第七章 천중산의 전투
사파 연맹은 구태여 자신들의 진격을 숨기지 않았다. 별다른 위장을 하지도 않은 채 당당히 섬서성과 하남성, 안휘성의 경계를 넘어섰다.
그것을 확인한 정파 무림 쪽에서도 요격군을 편성했다. 시간이 충분했던 만큼 그들 역시 전력을 끌어모은 뒤였다.
그것 자체가 진운룡의 의도였다는 것을 아는 이는 극소수였다.
첫 번째 전투는 하남성에서 펼쳐졌다.
정파의 심장인 소림사가 있었던 만큼 대응도 가장 빨랐던 것이다.
천중산(天中山).
숭산으로 가기 위해선 지날 수밖에 없는 길목이었다. 그랬기에 제갈각이 이끄는 병력 역시 그곳에 매복해 있었다.
사파 측 군단은 천무문주 명규가 이끄는 병력.
명규 역시 매복이 있으리란 걸 예상하고 있었고, 때문에 천중산의 길목에 불을 놓으려 했다.
그것을 감지한 제갈각은 매복을 포기하고 병사를 움직였다. 산불에 휩싸여 개죽음을 당하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돌격!”
제갈각의 외침에 정파 무림군이 사파 연맹군을 치고 들어갔다.
천중산 길목의 숲에 피바람이 몰아쳤다.
“죽어라!”
“타핫!”
“크아악!”
사방에서 울리는 비명과 고함. 연신 울리는 병장기 소리. 그런 가운데에서도 진짜 고수들은 적수를 찾기 위해 조용히 움직였다.
그것은 명규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을 통솔하는 이는 분명 제갈각이나 모용중강 중 하나렷다.’
무인이라면 누구라도 노려봄직한 이름들.
그들의 목을 베는 것은 사파 무인에게 있어 크나큰 영화일 터였다.
물론 제갈각은 명규의 바람과 달리 전장 내부에 있지 않았다. 후방에서 전황을 지켜볼 따름이었다.
“숫자만 믿고 싸우는 전형적인 졸장의 전투로군.”
제갈각은 옆으로 시선을 보냈다.
당장이라도 전장에 뛰어들고 싶어 안달이 난 무인들이 있었다.
“기다리게. 자네들이 활약하는 것은 조금 뒤의 일일세.”
“알고 있습니다.”
젊은 무인이 대답했다. 공손하긴 하나 혈기를 감출 수 없는 모습.
그들을 지켜보는 제갈각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이 아이들이야말로 능히 무림의 앞날을 짊어질 재목들이다.’
소림사엔 중원 전역에서 몰려든 갖가지 무인들이 있었다.
그중엔 명문 문파나 세가의 출신은 아니나 실력만큼은 뛰어난 이들도 있었다.
전란이라는 위기가, 도리어 이런 무명 고수들의 등장을 촉진시킨 셈이었다.
제갈각은 직접 그들 중 최고수들을 선별했다. 앞으로의 전공에 따라 후하게 대접하겠다는 말과 함께.
덕분에 수많은 고수들이 추려 낼 수 있었다. 때마침 진운룡이 뜸을 들였기에 시간도 넉넉했다.
덕분에 완성된 것이 제갈각 휘하의 타격대인 신웅대(新雄隊)였다.
‘이제 남은 것은 놈들의 머리를 찾아내는 것이다.’
하필 전투가 숲에서 펼쳐졌기 때문에 전술이 끼어들 여지가 없게 되었다. 병력을 물려 재정비한 후 싸울 수도 있겠지만, 서전부터 밀리는 인상을 심어 주고 싶지는 않았다.
적에게나 아군에게나.
우선은 기세에서부터 이기고 들어가는 게 중요했다.
문제는 적장의 방식이 제갈각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
차라리 자신처럼 후방에서 전황을 파악하는 식이었다면 노리기도 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파 연맹의 수장은 직접 숲 속에서 뛰어든 듯했다.
‘그렇다면 신웅대를 지금 움직일까?’
꽤나 구미가 동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제갈각은 일단 참기로 했다.
비장의 패를 꺼내드는 건 전황의 변화를 지켜본 후에도 늦지 않았다.
‘어쨌든 이곳에 진운룡은 없으니.’
애초에 이 전쟁은 진운룡에서 시작하여 진운룡으로 끝나는 것이었다. 때문에 모든 군략을 진운룡 중심으로 짤 수밖에 없었다.
진운룡이 병력을 셋으로 나눴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제갈각과 모용중강이 떠올린 전략은 하나뿐이었다.
‘진운룡이 없는 전장에서 최대한의 성과를 올린다!’
나아가 진운룡이 나타난 전장에선 최소한의 피해만 입은 채 물러난다.
승리는 처음부터 생각하고 있지도 않았다. 어차피 국지전의 승패는 중요한 것도 아니었고.
‘성 하나가 넘어간다 해도 정파 무림의 패배로 직결되진 않는다. 빼앗긴 영토는 다시 빼앗을 수 있다.’
진운룡만 죽일 수 있다면 말이다.
두 사람은 하남성의 병력을 둘로 나눴다. 하나는 제갈각이 이끄는 수비군이었고 다른 하나는 모용중강이 이끄는 유격군이었다.
유격군은 섬서성과 하남성의 경계에 걸쳐 대기 중이었다.
그러다 진운룡이 나타나는 쪽으로 향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승리보다는 퇴각을 성공시키기 위해.
‘안휘성엔 진 노사께서 가셨으니 믿는 수밖에.’
진천백이라 자신을 밝힌 노인장.
그가 정말 초대 천마인가 하는 것은 아직까지도 의문이었다. 아무래도 믿기 힘든 이야기였던 까닭이다.
그렇다 해도 노인장의 무공이 대단한 수준이란 것은 분명했다.
그러니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안휘성은 다른 두 성에 비해 병력도 적었으니.
여하간 현재의 전투는 사파 연맹에게 유리한 형태가 결코 아니었다. 제갈각은 그것을 알기에 느긋할 수가 있었다.
‘좋지 않군.’
명규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정파 측의 수장은 숲 속에 있지 않았다. 그 말은 곧 후방에서 전황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
‘저들은 진운룡이 이곳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긴 진운룡이 있었다면 이렇게 지리한 야전을 벌이고 있지는 않았으리라. 일검으로 천중산을 허물고 숭산까지 진격했을 테지.
하지만 진운룡은 없다. 저들도 그것을 안다. 그렇다면 전력 면에서 불리한 쪽은 사파 연맹이었다.
‘굳이 여기서 병력을 소모할 필요는 없다.’
전쟁의 중심이 진운룡이라는 것은 명규도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세 개의 부대 중 둘은 시간 끌기에 불과했다. 진운룡이 성 하나를 집어삼키는 동안 다른 성의 움직임을 막아 줄.
‘그렇다면 일단 병력을 물려야 할까?’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애초에 숲 속에서 싸우다 보니 피아가 엉켜 버렸고, 이래서야 전술을 지시하기도 애매했다.
—퇴각 명령을 내려라. 병력을 재정비한 후 다시 싸운다.
명규가 후방으로 전음을 보냈다. 이윽고 날카로운 뿔피리 소리가 숲 속에 울렸다.
퇴각 명령이었다.
사파 무인들이 슬금슬금 물러나기 시작했다.
전황을 살피던 제갈각도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기다리고 있던 때가 온 것이다.
“신웅대의 젊은 무사들아.”
제갈각이 손을 들어 올렸다.
“너희의 이름을 놈들에게 똑똑히 새겨 주어라!”
“사파에 죽음을!”
우렁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명규가 있는 숲 속에까지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였다.
‘뭐지?’
잠시 의아해하던 명규는 숲으로 짓쳐 들어오는 무인들을 보고서 경직됐다.
‘빠르고 날카롭다! 제갈각은 이런 자들을 아껴 두고 있었던 것인가?’
그 숫자는 대략 삼백. 많지는 않았으나 기세만큼은 삼천에 비해서 떨어질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곳은 숲. 숫자상의 우위가 그렇게 압도적으로 발현되지는 못하는 곳이었다.
삼백으로도 수천을 치는 것이 어렵지 않다는 뜻.
더군다나 사파 무인들은 퇴각 중이었다.
‘당했다!’
명규의 손아귀가 땀으로 젖었다. 자그마한 실수를 했을 따름인데 그 여파가 생각 이상으로 커지게 생겼다.
‘할 수 없지.’
명규는 은신을 풀고서 흑천검을 높이 들었다.
“애송이들아, 흑천문주 명규가 너희를 상대해 주마!”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 명규 역시 사파 무인인 만큼 시끄럽게 통성명을 하는 것보단 조용히 적의 목을 따는 쪽을 선호했다.
그럼에도 이름을 밝힌 것은 정파 무인들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과연 호승심에 눈이 먼 바보들이 명규에게로 달려들었다.
“유랑검 백광이 네 상대를 해 주마!”
“아니, 네 목을 따는 것은 이 혈무권사 관진이다!”
알 바 없는 이름들이요, 알 바 없는 바보들이었다. 명규는 사납게 웃으며 길게 강기를 뽑아 냈다.
“닥치고 덤벼라!”
시퍼런 강기가 흑천검 위로 치솟았다. 명규는 달려드는 무인들과 주변의 나무들을 한데 베어 버렸다.
서걱!
명규의 반경 십여 장이 잘려 나갔다. 인간이고 나무고 가릴 것 없이 모조리 베어 넘기는 강력한 일격이었다.
“헉……!”
“크으으으.”
호기롭게 덤벼든 무인들이 내장을 쏟으며 쓰러졌다. 그들도 결코 시정잡배 수준은 아니었으나, 사파 내에서 수위를 다투는 명규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후방에서 지켜보던 제갈각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강하군.”
여느 사파인처럼 사술을 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파인의 무공에 가까운 깔끔한 검법이었다.
하기야 정파와 사파의 구분이 불분명해진 시대였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결국 두 파벌을 가르는 것은 무공이 아닌 사소한 것들이었으니까.
‘어쨌거나 지금은 그저 적일 뿐.’
제갈각은 전음을 펼쳐 신웅대를 독려했다.
—놈은 고수다. 함부로 덤비지 말고 포위망만 펼쳐 두도록. 스무 명이 놈을 견제하고 나머지는 잔병들을 쫓아가라!
그러나 신웅대는 제갈각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냥 무시하고 가기엔 명규의 이름값이 컸던 까닭이다.
여전히 대다수의 신웅대원들이 명규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그리고 명규는 착실히 그들을 죽여 갔다.
‘이런!’
제갈각은 난감함을 느꼈다.
병사와 무인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개개인은 제법 강하나 협동이 되지 않는다. 대주의 명령이 들리긴 하나 듣지를 않는다. 훈련을 할 기회가 없었기에 벌어진 사단이었다.
—호승심에 목숨을 버리지 마라! 놈은 강하다. 섣불리 덤볐다간 목숨만 잃을 뿐이다!
안타까움에 제갈각이 연신 전음을 날렸으나 신웅대에겐 들리지 않았다. 흥분한 까닭에 판단력을 상실한 것이었다.
명규도 신웅대의 문제점을 파악하고는 웃고 있었다. 제갈각의 전음이 들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심정이 어떨지는 짐작이 됐다.
‘실력이 좀 있다고 해 봐야 결국은 잡병들일 뿐. 명령 전달조차 제대로 안 돼서야…….’
결과적으로 병력을 물린 명규의 판단이 옳게 되었다. 제갈각은 방심한 나머지 큰 실수를 한 것이다.
마침 물러난 사파 무인들도 전열을 갖췄다. 애초에 멀리 퇴각할 것이 아니었기에 전열을 다듬는 것은 금방이었다.
—되돌아와서 이 멍청이들을 쳐라!
전음을 날린 명규가 흑천검을 크게 휘둘렀다. 흑세만추(黑勢萬鎚)의 초식이었다.
이미 명규 주변은 공터로 변해 있었다. 그의 무자비한 검강이 사방의 나무들을 죄다 쓸어 날린 까닭이었다.
발아래로 쌓인 시체가 물경 이십.
신웅대의 인원을 생각해 보면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숫자였다.
“으음.”
“크으…….”
처음의 기세와 달리 신웅대원들은 감히 치고 들어오지를 못하고 있었다. 명규의 검기가 자신들을 아득히 능가하고 있음을 실감한 것이다.
“어리석은 아이들아, 너흰 너희 수장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
명규의 배후에서 거대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물러났던 사파 무인들이 되돌아오는 기척이었다.
이제 그들은 나무를 베어 넘기며 전진하고 있었다. 아예 숲을 깎아 버리고 평지와 같은 지형에서 싸우겠다는 것이었다.
실리적으로 봤을 땐 체력만 소모하는 무식한 전술. 그러나 숲을 베어 넘기는 그 모습이 주는 심리적 압박은 대단했다.
바라는 지형이 아니라면 직접 만든다.
병사들은 할 수 없는 무인만의 방식이었다.
“너희와 놀아 주는 것도 여기까지다. 이제부터는 싸움이 아닌 사냥을 시작하겠다.”
서슬 퍼런 명규의 말에 신웅대원들은 감히 발을 떼지 못했다.
명규는 모든 상황을 활용해 시웅대를 심리적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대로 상황이 이어진다면 사기가 떨어진 신웅대를 패퇴시킬 수도 있었겠지만…….
“거기까지요.”
나직한 목소리가 명규의 귀를 찔렀다. 이윽고 좌측에서부터 명규를 치고 들어오는 백색의 검강.
“흡!”
기합성과 함께 흑천검이 번뜩였다.
흑백의 검강은 순간 뒤섞이는가 싶더니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며 흩어졌다.
‘예리하다.’
명규는 손으로 땀을 슥 훑었다. 살짝 긁혔는지 생채기가 나 있었다.
“암습이라니, 무림 명숙의 이름이 울겠구려.”
“그대의 방식을 그대에게 돌려준 것뿐이오.”
수풀 사이에서 제갈각이 나타났다. 그를 본 신웅대원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제갈각은 엄격한 표정으로 대원들을 돌아봤다.
“너희의 전투는 그야말로 졸전이었다. 명령을 듣지 않고 싸워서는 어떤 실력을 소유했든 잡졸에 지나지 않음을 명심해라.”
“…….”
대원들이 고개를 푹 숙였다. 제갈각의 말에 부끄러움을 참을 수 없었다.
제갈각은 온화로운 얼굴로 덧붙였다.
“오늘의 쓰디쓴 기억을 항시 기억해라. 그리고 교훈으로 삼아 훗날의 양분으로 이용해라.”
“예!”
신웅대원들이 소리쳐 대답했다. 조금 전보다는 확실히 밝아진 목소리들이었다.
명규는 쓴웃음을 지었다.
‘명백한 패전을 순식간에 훈련으로 바꿔 버리는군.’
대단하다면 대단한 말재간이었다. 명규였다면 저런 식의 언변을 펼치진 못했으리라.
“대단한 웅변이었소.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아하니 제갈세가의 가주인 제갈각 선생인 모양이로군.”
사실 제갈각의 정체는 첫 공방에서 이미 눈치챘다. 세가 특유의 검식이란 감추려야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럼에도 이렇게 말하는 것은 물론 비꼬기 위한 의도였다. 약간이라도 심리적으로 우세를 점하는 것이 중요했으니 말이다.
때문에 멀쩡한 표현을 놔두고 선생이라 그를 불렀다. 싸움과는 거리가 먼 샌님이란 조롱이었다.
제갈각은 미소를 지었다. 혓바닥으로도 공세를 펼치는 투지가 과연 대단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귀하는 누구신지?”
“흑천문주 명규란 이름을 들어 봤으리라 생각하오만.”
“죄송하나 처음 듣는 이름이구려.”
약간 뜸을 들인 제갈각이 덧붙였다.
“요사이 사파와 관련하여 들리는 이름이란 온통 하나뿐이기에 말이오.”
“…….”
그 하나란 물론 진운룡을 가리키는 것. 무인으로서의 자존심을 긁으려는 제갈각의 언변이었다.
“역시 말로는 못 당하겠군. 그러나 싸움은 혓바닥이 아닌 두 손과 두 다리로 하는 것.”
명규는 흑천검을 들어 제갈각을 겨누었다.
“미안하지만 숭산까지의 길을 내주셔야겠소.”
“줄 수 없는 것을 달라고 청하시는군.”
“듣지 않겠다면 빼앗는 수밖에 없소이다.”
“애초부터 그럴 생각으로 온 것이 아니오?”
두 무인은 사납게 웃었다. 그들의 뒤로 각 세력의 무인들이 몰려들었다.
그럼에도 당장 달려들지 않고 대기하는 것은 두 무인에 대한 존중의 의미였다.
졸지에 결투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물론 이는 보통의 전쟁이라면 통용되지 않을 일. 승패를 결정짓는 것은 어디까지나 병사들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일기투라는 것 자체가 실전에선 무의미한 것이기도 했고.
그러나 무인들의 싸움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제갈각도 명규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붙는 수밖에 없겠군.’
‘좋다. 처음부터 이것을 바랐다.’
두 사람이 조심스레 발을 디뎠다. 이 결투에서 밀려나는 쪽은 천중산을 포기하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