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五章 대막의 함정 (125/146)

第五章 대막의 함정

“있는 힘껏 한 대 쳐 봐.”

“예?”

“주먹으로 한 대 쳐 보라고. 단 내공은 전혀 싣지 말고서.”

나랍멸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이게 수련이란 말입니까?”

“내가 수련이라면 수련이지. 그리고 자꾸 쓸데없이 토를 다는데, 앞으로는 그러지 마. 내 방식을 따르기로 했으면 철저히 따르라고.”

“아, 알겠습니다.”

나랍멸은 그렇게 말하고도 한숨을 푹 쉬었다. 그 모습을 보며 정천이 혀를 찼다.

“저번엔 나랑 잘만 싸워 놓고는 이제 와서 무슨 내숭을 떠는 거야?”

“전 원래 이런 걸 좋아하는 성미가 아닙니다. 그때야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고요.”

“그럼 지금도 상황이 상황이다 하고 생각하면 될 일 아냐.”

“말로는 당신을 못 당하겠군요.”

“그걸 알면 시키는 거나 제대로 해.”

“알았습니다. 알았다고요.”

그렇게 말하고도 잠시 우물쭈물하는 나랍멸이었다.

애초에 치고받는 육박전 자체에 경험이 거의 없는 그였다. 그랬기에 정천에게 고전했던 것이었고, 분명 보완해야 할 점이었지만.

‘오늘은 시작부터 소란스럽구나.’

나랍멸은 조금 전의 일을 떠올렸다.

아침 댓바람부터 나타난 정천은 대뜸 그를 연무장으로 끌고 가려 했다.

그것부터가 문제였다. 서장의 그 누구도 법왕의 아침을 이렇게 방해한 적이 없었기에.

나랍멸 본인보다도 시중을 드는 사람들이 난리를 쳤다.

“어딜 만져! 어딜 만지냐고!”

“감히 법왕님을 그 더러운 손으로 만지다니!”

육십도 더 먹은 듯한 늙은 여인이 정천에게 바락바락 소리를 쳤다. 고작 나랍멸의 손목을 잡았다고 그러는 것이었다.

“허.”

살기등등한 기세에 정천도 얼이 빠져 버렸다. 그러는 사이 나유타까지 나타나서 정천에게 달려들었다.

“법왕님을 놓아드려, 악당!”

나유타는 정천의 등으로 달려들어선 머리칼을 드세게 잡아당겼다. 아프진 않았지만 기분이 좋을 리는 만무했다.

“아, 진짜 이것들이 뭘 잘못 먹었나.”

정천은 투덜거리면서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괜히 막는답시고 건드렸다가 또 무슨 사단이 일어날까 싶어서였다.

우물쭈물하던 나랍멸이 뒤늦게 두 사람을 떼어 냈다.

“신답, 나유타! 그만들 하세요.”

“일단 이 작자가 손을 놔야지요!”

“그래요!”

“아, 아니. 그러니까 일단 좀…….”

천하의 법왕이 여자 둘을 다루지 못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확실히 보기 우스운 장면이지만 당사자라면 얘기가 다르다. 그리고 정천은 당사자였다.

“법왕의 스승에게 행패를 부리는 게 서장의 방식인가 보지?”

“스승? 당신이? 법왕님의?”

신답이라 불린 여인이 즉각 쏘아붙였다. 그래도 다짜고짜 덤비는 것보단 낫긴 했다.

“물론 스승이지. 안 그런가, 법왕 나리?”

“저 불한당의 말이 사실인가요?”

신답이 돌아보며 물으니 나랍멸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그것이 말이지요.”

“역시 사실이 아니지요?”

“아, 아니. 그건 아닙니다, 신답.”

“그럼 저 불한당의 말이 사실인가요?”

“아무래도 그렇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미묘한 대답. 그래도 긍정은 긍정이었다.

신답은 틀어쥐고 있던 정천의 옷자락을 놓았다. 나유타도 입맛을 다시며 정천의 등에서 내려왔다.

‘그러고 보니 이 꼬마는 다 알면서도 이 난리를.’

정천이 슬쩍 째려보니 나유타가 혀를 낼름 내밀었다.

‘영악한 녀석.’

언젠가 갚아 주리라 생각하는 정천이었다.

그것이 대략 반 각 전의 일.

나랍멸은 이제 정천의 앞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그리 탄탄하다고는 할 수 없는 육체. 몸의 근육은 오히려 길바닥의 시정잡배만 못했다. 그야말로 수백 년의 공력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닐 터.

모든 내력을 갈무리한 나랍멸의 모습은 초라하기까지 했다.

“쳐.”

정천의 재촉에 나랍멸이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주먹을 뻗었다.

“……?”

주먹에 닿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정천이 피했는가 하여 눈을 떠 보니, 그의 주먹은 정천의 콧등에서 세 치도 더 떨어진 위치에 있었다.

정천은 헛웃음을 뱉었다.

“어이가 없군. 거리도 제대로 가늠할 줄 모르나? 그 엉성한 자세는 또 뭐고?”

“처, 처음이라 긴장해서 그렇습니다.”

“솜방망이 주먹을 뻗는 데에도 긴장할 정도라니, 서장의 수호자 체면이 말이 아닌데.”

“…….”

나랍멸은 쥐구멍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구원군이 나타났다. 사실은 아까부터 이 자리에 있었지만.

“그만! 법왕님을 그만 괴롭히세요!”

나유타의 종알거리는 목소리에 정천이 혀를 찼다.

“어떻게 보면 이걸 괴롭힌다고 해석할 수 있는 거냐. 더군다나 맞는 쪽은 나지, 법왕이 아니야.”

“시끄러워요! 법왕님은 가녀린 마음씨를 지니셔서 당신 같은 불한당을 때리는 것조차 힘겨워하시는 거란 말이에요.”

“정말 그런 거라면 차라리 좋을 텐데.”

나랍멸은 더더욱 부끄러워졌다. 나유타의 말은 전형적인 ‘안 하느니만 못한’ 것이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나유타, 목소리를 줄여 주세요.”

“네…….”

시무룩해진 나유타가 대답했다.

정천은 미간을 찡그리고서 말했다.

“시작한 지 반 각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 주먹 한 번 제대로 지르지 못했군. 이래서야 수련이나 제대로 할 수 있겠어?”

“지금부터 제대로 하겠습니다!”

호기롭게 소리친 나랍멸이 주먹을 뻗었다. 역시나 이번에도 애꿎은 허공만 갈랐다.

답답해진 정천이 결국 고함을 쳤다.

“사람 팰 땐 눈을 떠! 평소에 기감으로 위치를 가늠한다 쳐도 어쨌든 눈 뜨고 때리라고!”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주먹을 뻗을 땐 팔만 움직이지 말고 상반신 전체를 틀어 주란 말이다.”

정천은 어디서 구해 온 막대기로 나랍멸의 자세를 교정해 주었다. 직접 만졌다간 난리가 나니 머리를 쓴 것이었다.

오히려 막대기를 쓰는 쪽이 더 경멸스럽지 않나 싶었지만.

“저, 그런데 이게 정말 효과를 볼 수 있는 겁니까?”

나랍멸의 물음에 정천이 코웃음을 쳤다.

“몸이 단련되면 정과 기 역시 자연히 단련되는 법이야. 암만 대단한 정신과 기운을 지녔던들 몸이라는 매개체 없이 무엇을 할 수 있겠어?”

“그야 그렇습니다만, 이제 와서 기초를 갈고닦은들 뾰족한 수가 생길까요?”

“생겨. 최소한 네가 지닌 기운을 약간이나마 효율적으로 펼칠 수 있으니.”

나랍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천은 그에게 기초적인 기수식과 초식들을 가르쳤다. 나랍멸의 재능 자체가 엉망인 것은 아니어서, 하나를 가르쳐 주면 최소한 둘을 깨칠 정도는 되었다.

물론 허약하기 그지없는 체력만은 어쩔 수 없었지만.

“헉헉…… 헉.”

나랍멸의 몸은 삽시간에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아무래도 내력 사용을 금하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지켜보는 정천으로선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법왕의 이름이 울겠군. 만날 풀만 뜯어먹고 굶기를 반복하니 몸이 이 모양인 거 아냐.”

“초식과 금식을 욕되이 부르지 마십시오. 그 역시 지금의 수련과 같은 고행입니다.”

“그런 말은 일어나서 하시지.”

나랍멸은 비무장 위에 큰 대자로 뻗어 있었다.

하긴 마보(馬步)를 일각이 넘게 지속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좀 쉬었다 하지.”

그제야 정천도 나랍멸의 옆에 걸터앉았다.

“법왕님!”

걱정스럽게 지켜보던 나유타가 물동이를 들고 다가왔다. 그것을 본 정천이 나직이 말했다.

“나부터 한 모금 마시자.”

찌릿.

죽일 듯 정천을 째려보는 나유타. 정천은 어깨만 으쓱이고 말았다.

“그런데…….”

겨우 숨을 돌린 나랍멸이 물었다.

“다른 일행 분들은 무얼 하고 있습니까?”

“출진 준비를 하고 있지. 되도록 빨리 약탈자란 놈들을 만나는 게 좋을 듯하니.”

“당신은 가지 않습니까?”

“난 댁을 가르쳐야지. 그리고 웬만하면 그들만으로도 충분할 거야.”

“초원의 전사들은 그리 만만한 자들이 아닙니다.”

“역시 약탈자란 대막의 무사들을 말하는 것이었나?”

“그렇습니다. 정작 본인들은 스스로를 대막인이라 부르지 않지만요.”

“원래부터 사이가 그리 좋진 않았던 모양이지?”

“최소한 지난 십 년 동안은 평화로웠습니다. 호화호특의 수뇌부들은 적당한 정치적 식견을 지닌 인물들이었으니까요.”

“침략하지 않는 대신 공물을 챙겼나 보군.”

“천승들은 반대했습니다만 제가 고집을 부렸습니다. 피를 흘리는 것보단 먹을 것, 입을 것을 조금 희생하는 편이 나을 테니까요.”

정천이 픽 하고 실소를 흘렸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란 말인가.

“어린애 같은 발상이군.”

나랍멸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무 어리숙한 발상이라고 말했다. 대막의 늙은이들이 조금만 더 교활했더라도 서장을 손에 넣을 방법은 무궁무진했겠군.”

“…….”

나랍멸이 노려봤지만 정천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중원이나 다른 세력이 서장을 넘보지 않는 것은 평화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야. 서장에 팔룡천법왕이 있기 때문이지.”

“저는 되도록 피를 흘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이 서장의 것이든 바깥의 것이든.”

“그 발상이 어리석다는 거다. 네가 조금만 영악했어도 오히려 대막의 노인들이 네게 공물을 바쳤어야 했을걸.”

“그들을 핍박하고 싶진 않았습니다. 그 마음은 지금도 똑같고요.”

“그럴 테지. 그 결과 네 백성들이 조금 더 굶주리게 되었지. 게다가 그 평화 덕분에 저들은 약탈자가 되어 변방의 마을을 습격하게 됐고.”

“…….”

나랍멸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나유타가 그만하라는 시선을 정천에게 보냈다. 굳이 그 때문이 아니더라도 정천 역시 그만할 생각이었지만.

“뭐, 네 땅이니 네가 어떻게 휘두르든 내 알 바는 아니겠지.”

“나의 땅이라거나 나의 백성이란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네 생각이 어떻든 넌 서장의 왕이야. 너를 제외한 모두가 네게 의지하고 있으니.”

나랍멸의 시선이 나유타에게 향했다.

나유타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이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당장은 크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다만 한 가지만은 분명해 보였다.

‘나는 더욱 강해져야 한다. 심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분명 부처의 길은 아니다. 어쩌면 정천의 말대로 왕의 길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나랍멸은 그 길을 무시할 수 없었다.

“계속합시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나랍멸. 다리가 아직 후들거리긴 했지만 표정만은 굳건했다.

그것을 본 정천이 피식 웃었다.

“아까보단 좀 나아졌군.”

* * *

정천을 제외한 일행이 포달랍궁을 나선 것은 이튿날의 일이었다.

청년 한 명이 안내를 맡았다. 지도 제작자인 아버지를 따라 어려서부터 서장 곳곳을 돌아다녀 본 경험이 있다고 했다.

“임윤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제법 유창한 말투. 모르고 듣는다면 중원인과 구별이 안 갈 정도였다.

화연란이 감탄하여 말했다.

“우리말에 능숙하시군요.”

“어려서부터 변경에서 주로 살았으니까요. 제법 많은 중원인들을 만났고, 그중엔 친구의 연을 맺은 이들도 있습니다.”

“그 친구란 아마도 밀수꾼들일 테지?”

장유추의 말에 임윤이 웃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대충 때려 맞혔지. 내 아는 녀석들 중에도 밀수업을 하던 놈들이 몇 있었으니. 출신에 걸맞잖게 고급스러운 옷도 그렇고.”

“눈썰미가 좋으시군요.”

“늙고 나면 늘어나는 건 이것뿐이거든.”

일행은 곧장 북동쪽으로 향했다.

“꽤나 험난한 길이 될 겁니다. 대부분이 이곳 포달랍궁보다도 고도가 높으니 호흡에 유의하십시오.”

“호흡을 말인가요?”

“예. 고도가 높을수록 공기가 희박하니 그만큼 호흡에 곤란이 올 수 있습니다.”

능숙한 설명에 화연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그녀를 비롯하여 이 정도 고도에 힘겨워할 사람은 없었지만 말이다.

여정은 상당히 길었다.

거리도 거리거니와 제대로 된 길이라 해도 험준하고 구불구불했다.

“이래서야 대막 놈들 꽁무니도 구경 못하게 되겠군. 아무래도 경공을 펼치며 이동해야겠네.”

장유추의 말에 임윤이 손사래를 쳤다.

“관두는 게 좋습니다. 경공 한두 번으로 넘어갈 만큼 호락호락한 계곡과 산이 아닙니다.”

“자네야말로 우릴 호락호락하게 보지 말게.”

장유추는 대뜸 임윤을 들어 올렸다. 임윤도 그를 설득하기를 포기했다.

“……산의 분노를 사지 않기만을 빌어야겠군요.”

“시끄럽고 안내나 잘 하게.”

그 말을 끝으로 장유추가 훌쩍 몸을 날렸다. 폭이 거의 삼십여 장은 됨직한 계곡으로.

백미련과 요태희, 화연란이 그 뒤를 따랐다. 그녀들도 뻔한 길을 멀리 돌아가는 데에 이골이 나 있었다.

“으아아악!”

임윤의 비명 소리만이 계곡 건너로 길게 이어졌다.

그러한 노력 끝에, 일행은 이레가 채 되지 않아 서장의 변방에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임윤이 처음 계산한 시간을 며칠이나 단축한 것이었고, 포달랍궁까지 가는 데 걸린 시간보다도 훨씬 짧은 기록이었다.

“여러분같이 막무가내인 사람들은 처음 봅니다.”

“칭찬으로 듣겠네.”

장유추는 무뚝뚝하게 대꾸하고는 전방을 응시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파다청(巴多靑)이라 불렸던 마을. 지금은 약탈자들에게 유린당해 폐허만 남아 있는 곳이었다.

“일단은 이곳에서부터 시작해야겠군. 우선은 약탈자 놈들의 흔적을 찾는 게 먼저야.”

“그건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이는데.”

백미련의 말이었다. 그녀는 길게 이어져 있는 기마대의 발자국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것을 본 임윤이 고개를 저었다.

“따라가 봐야 소용없을 겁니다. 이미 이곳을 침략했던 게 한 달도 더 됐으니, 지금쯤은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을걸요.”

“그건 그렇군. 그렇다면 흔적을 찾는 것은 무리겠어.”

백미련의 말에 요태희가 임윤에게 물었다.

“이곳에는 모두 몇 개의 마을이 있죠?”

“전부 세어 보진 않았습니다만, 대충 삼십에서 사십 사이일 겁니다.”

“침략당한 마을들의 위치를 모두 알고 있나요?”

“전부까진 아니지만 대략은…….”

요태희가 돌을 들어 땅바닥에 네모를 그렸다.

“이 근방의 대략적인 형태와 마을들의 위치를 그려 주세요. 그중 침략당한 곳들에 표시를 해 주시고요.”

임윤은 그녀가 시키는 대로 했다.

대략 표시를 마치고 나니 뭔가 실마리가 잡히는 것 같았다.

장유추가 수염을 비틀었다.

“조금씩 남쪽으로 파고들고 있군.”

“네. 치고 빠지는 걸 반복하면서도 지속적으로 서장 내부로 파고들고 있어요.”

“이러다 포달랍궁까지 밀고 들어가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장유추 딴에는 농담이라고 한 말이었으나 요태희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어쩌면 정말 그럴 수도 있죠.”

“……정말 그럴 거라 생각한단 말인가, 궁후?”

“어쨌든 자료가 보여주는 바는 그러하니까요.”

“포달랍궁엔 팔룡천법왕이 있어. 아무리 대막 놈들의 간이 크다고 해도 그걸 모르진 않을 텐데?”

“법왕이 궁을 나설 수 없다는 사실을 이용하려는 걸지도 모르죠. 어쩌면 중도에 방향을 바꿀 수도 있고요.”

“아마도 그럴 게야. 암만 놈들이라 해도 무식하게 안으로만 파고들진 않을걸.”

“정말 그런 거라면 좋겠지만…….”

두 사람이 대화하는 사이 화연란은 폐허가 된 마을에서 무언가를 옮기고 있었다.

반쯤 타 버린 시체들. 피난민들이 미처 수습하지 못한 희생자들이었다.

그것을 요태희가 화연란을 도왔다.

임윤은 그쪽을 힐끗힐끗 보면서도 가까이 가질 않았다. 그냥 시체를 만지기가 껄끄러운 모양이다 하고 장유추는 생각했다.

“그나저나 저 여자들도 천하태평이군. 무덤이나 만들고 있을 때가 아닌데 말이야.”

장유추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광천뇌도를 꺼내 들었다. 시체들을 묻기 위해 땅을 파려는 것이었다.

“그럴 필요 없어.”

“응?”

“무덤을 팔 필요 없다고.”

백미련의 목소리였다.

장유추가 무슨 소린가 하여 그녀를 돌아봤다.

“이곳 사람들은 풍장(風葬)을 해. 우리들처럼 죽은 이를 땅에 묻거나 하진 않아.”

“그건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

“책에서 읽었지. 포달랍궁의 서고에서 찾은 책을. 본후는 어느 누구와 달리 머릿속에 무공만 들어차지 않았으니까.”

“그 사람 속을 박박 긁는 말투는 시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구먼.”

장유추는 투덜거리며 광천뇌도를 집어넣었다.

“그나저나 다시 남쪽으로 가야 하는 건가?”

“아마도 그렇겠지.”

백미련의 시선이 문득 한곳으로 향했다. 일행이 시체를 옮겨 놓는 위치의 허공이었다.

그녀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늙은이, 이상하지 않아?”

“뭐가 말이냐?”

“시체들이 이렇게 많은데 하늘엔 새 한 마리 날고 있지 않아.”

“그야…….”

장유추의 목소리도 잦아들었다.

고도가 높기 때문에? 그럴 리는 없었다. 실제로 이보다 높은 고도에서도 독수리나 여타 새들을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미 포식을 했기에 배가 불러서? 그렇다고 보기엔 시체들의 상태가 너무 좋았다. 뜯기거나 한 부분이 거의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불에 탄 것 치고는 상태가 좋은데.’

그 순간 장유추의 머릿속에서 벼락이 쳤다. 한 가지 불길한 생각이 스쳐 지나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늦은 뒤였다.

푸화아아악!

시커먼 연기가 무시무시한 규모로 뿜어져 나왔다. 화연란이 옮기려던 시체에서였다.

“큭!”

검은 연기에 노출된 화연란이 뒤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얼마 움직이지도 못하고서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이런!”

장유추가 급히 달려가 화연란을 부축했다. 백미련이 구절검법을 펼쳐 검은 연기를 흩어 냈다.

“괜찮은가?”

“괘, 괜찮아요. 가벼운 마비 증상만 온 것 같아요.”

확실히 화연란의 상태는 좋아 보였다. 혈색이 창백해진 것도 아니고 독에 중독된 기미도 없어 보였다.

거기에 요태희가 확인까지 해 주었다.

“단순한 마비향에 지나지 않아요. 조금만 쉬고 있으면 금방 회복될 거예요.”

“그것 참 다행이로군.”

모두들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쉬었다.

단 한 명, 백미련을 제외하고서.

“과연 그럴까?”

“음? 그건 무슨 소리냐?”

장유추가 쳐다보자 백미련이 말했다.

“조금 전의 연기, 단순히 우릴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어. 그랬다면 무색무취의 독이나 마비향을 썼을 거야. 저렇게 요란한 연막탄 같은 게 아니라.”

“…….”

“저런 종류의 연막의 목적은 하나뿐이지.”

“신호를 보내는 것.”

요태희가 침음하듯 말했다.

백미련은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은 먼 곳으로 간 게 아니야. 우리를 기다리며 함정을 파 놓은 거지.”

“그, 그렇다면 큰일이군요!”

내내 입을 닫고 있던 임윤이 소리쳤다.

“제가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어쩌면 대막의 병사들이 매복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말해 놓고 도망치려고?”

“……!”

임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순간 그의 손이 품속으로 향했고, 그보다도 빠르게 백미련의 구절검이 임윤의 목젖을 겨냥했다.

“멈춰!”

“큭!”

구절검의 칼끝에서 핏방울이 망울졌다. 백미련이 조금만 머리칼을 움직여도 임윤의 목이 뎅겅 잘려 나갈 터였다.

모두들 갑작스런 상황에 놀란 눈치였다.

“품속에 있는 걸 느리게 꺼내. 허튼짓을 벌였다간 목을 날려 버리겠어.”

“아, 알겠습니다.”

임윤이 꺼낸 것은 자그만 단도였다. 그것을 본 모두가 실소를 머금었다.

“고작 그런 장난감으로 여기서 벗어나려 한 건가?”

장유추의 핀잔에 임윤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요태희가 물었다.

백미련은 임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설명했다.

“간단해. 시체에다 저런 장치를 준비해 뒀다는 건 우리가 오리란 것을 알았다는 의미지. 그렇다는 건 내통자가 있다는 것이고. 모든 마을에다 저런 수고를 하진 않았을 테니, 그 내통자는 우리가 이리로 오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어야겠지. 혹은 우리를 이리로 이끌고 올 수 있는 사람이거나.”

“…….”

“시체가 있음에도 새가 날아다니지 않는다는 건 특수한 처리를 해두었다는 의미지. 게다가 넌 시체 근처에도 가지 않으려 했어. 시체에 뭔가 해놨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을 테니 그랬겠지.”

임윤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때 구절검이 그의 목으로 살짝 파고들었다.

“헉!”

“대답해. 대막의 무리와 무슨 약속을 한 거지?”

임윤은 이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애석하게도 이들은 하나같이 그가 대적할 수 없는 초절정 고수들이었다.

“나로서도 달리 방법이 없었소. 놈들이 가족들을 인질로 잡아 협박했단 말이오!”

“그깟 구질구질한 얘기를 들으려는 게 아냐. 놈들과 어떤 작당을 했지?”

“다, 당신들을 이곳까지 유인하라는 명령을 받았소. 필요하다면 나더러 직접 시체에 장치된 연비탄(煙ᄏᆞᆺ彈)을 터트리라고 했소.”

“그 이후엔?”

“기, 기다리면 된다고 했소. 그 이후엔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노라고…….”

그때였다.

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것도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장유추가 이를 악물었다.

“마치 우리의 생각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던 것만 같군. 대체 어찌 된 일이지?”

“포달랍궁 내에 첩자가 있었던 걸까요?”

요태희와 장유추의 시선이 절로 임윤에게 향했다. 임윤은 화들짝 놀라 손을 내저었다.

“나, 난 아무것도 모르오! 첩자 노릇이라니, 가당치도 않소!”

“그럼 어떻게 우리의 안내인으로 배정된 거지?”

“그야 내가 서장 제일이니까! 어쨌든 악의는 없었소. 설마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단 말이오!”

“끝까지 거짓말이군.”

차갑게 내뱉은 백미련이 대번에 임윤의 복부에 전각을 꽂아 넣었다. 임윤은 대번에 게거품을 쏟으며 혼절해 버렸다.

“너 같은 걸 베기엔 내 머리카락이 불쌍해.”

백미련은 임윤을 적당한 자리로 차 날렸다.

그 와중에도 진동은 더욱 커지고 있었다.

일천의 기마병이 내뿜는 진동이었다. 그것도 사방에서 느껴지는 걸로 보아 이미 마을을 완벽하게 포위하고 있는 듯했다.

“어쩌죠?”

요태희의 물음에 장유추가 이를 악물었다.

“빠져나가긴 힘들 것 같군. 싸울 수밖에.”

하필 마을은 주변이 고지대로 둘러싸인 분지(盆地)였다. 다시 말해 포위한 입장이 높은 위치를 점한다는 의미였다.

저들은 이쪽의 일거수일투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쪽은 저들의 숫자조차 파악하기 어렵다.

지형적으로 그들은 독 안에 든 쥐 신세였다.

“어떻게 저들은 우리가 오리라는 걸 알았을까요?”

“낸들 알겠소? 지금은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는 것 같소.”

이제는 말발굽 소리까지 지척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험준한 지형을 달려오고 있음에도 힘차기 그지없는 소리였다.

* * *

대막의 말은 중원의 말과는 다르다.

평원을 벗어나면 제대로 달릴 수도 없는 중원의 말과 달리, 대막의 기마들은 험준한 지형조차 초원인 양 맘껏 누빌 수 있다.

그를 다루는 대막인들의 기마술은 또 어떠한가. 모든 면에서 중원인들의 실력을 아득히 넘어섰다.

그 사실이야말로 월골과 그의 부족민들이 자부하는 것이었다.

이번엔 그 외에도 한 가지 더 있었지만 말이다.

“예상대로로군.”

월골은 차갑게 웃었다.

중원으로부터의 서신은 월골에게 경고했었다. 중원의 강자가 서장을 찾아올 것이라고, 어쩌면 서장을 도와 너희를 칠 수도 있노라고.

그 내용을 읽었을 때 이미 월골은 이 계획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임윤과는 이미 오래전부터 인연을 맺고 있었다. 임윤의 입장에선 인연이 아니라 악연이라 해야겠지만 말이다.

기실 이번 서장 침공도 임윤의 도움이 컸다. 그의 아버지가 제작한 지도의 사본을 월골에게 넘긴 게 임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큰 도움을 받았다.

“멍청하고 가련한 녀석. 아내와 자식들 따위는 그저 부속물에 지나지 않는 것을.”

기실 임윤이 장유추 일행에게 말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월골은 그의 가족을 볼모로 잡고 있었고, 그 때문에 임윤은 그에게 협력해야만 했다.

그리고 월골은 그 사실에 어떠한 가책조차 느끼지 않았다.

월골의 기마병들이 마을을 완전히 포위했다.

월골의 시선이 마을의 곳곳을 훑었다. 일단은 폐허 속으로 숨어들었는지 인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폐허는 폐허일 뿐.

적들을 찾아내는 건 시간문제이리라.

‘저 가운데에 그분께서 경계하는 인물도 숨어 있으렷다.’

월골은 서신의 주인을 본 적도 없었다.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한 채 그저 서신만을 주고받았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가 대막과 오랜 약속을 했다는 것만을 알 따름.

그럼에도 한 가지만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서신의 주인은 월골로서도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강자라는 것을.

그 정도는 서신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기운만으로도 읽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기운이 가리키는 사실은, 서신의 주인이야말로 중원과 대막을 통틀어 짝을 찾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었다.

‘절대지존. 고금제일의 무인.’

그런 존재가, 서장을 찾아온 누군가를 경계하고 있었다. 서장의 수호자인 팔룡천법왕 이상으로.

그 사실이 월골의 흥미를 끌었다.

‘서장의 심장을 찌른다.’

서신은 분명 그리하라고 일컫고 있었다. 그러나 월골은 그것이 단순히 포달랍궁을 습격하라는 의미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서장의 심장을 찌르는 일이 될 것이다.’

월골은 그렇게 확신했고, 그의 확신은 상당 부분 옳은 것이었다.

스르릉.

거대한 환도를 꺼내 든 월골이 소리쳤다.

“사막의 아들들아! 계곡과 산이 낳은 아이들아!”

그의 목소리가 분지 전체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몰이사냥을 시작해 보자꾸나!”

“와아아아!”

일천의 숫자가 내뿜는 포효. 어마어마한 굉음에 말들이 벌써부터 날뛰기 시작했다.

월골과 무사들은 그것을 억제하지 않았다.

“돌격!”

“와아아!”

두두두두!

마치 태산이 무너지는 듯한 기세로, 월골과 기마병들이 마을을 향하여 짓쳐 내려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