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三章 천마의 방문
명신은 불안감을 느꼈다.
진운룡은 그답지 않게 미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사파 연맹의 무인들에게 알게 모르게 불안을 전파하고 있었다.
호북성은 사파의 것이 되었다.
무당파는 불길 아래로 사라져 버렸고 제갈세가 역시 극소수만이 살아남아 패퇴했다.
이레가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벌어진 일. 그 어떤 파죽지세라 해도 이에 견줄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러나 그것이 끝.
진운룡은 그 이상 전진을 명하지 않았다.
우두머리의 뜻이 그러할진대 휘하의 무인들이 멋대로 움직일 순 없는 일.
할 수 없이 사파의 호웅(豪雄)들도 대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보름이 되고 한 달이 되었다.
그사이 정파 무림은 소림사를 주축으로 뭉치고 있었다.
방장인 철운대사의 빈자리를 모용중강과 제갈각이 메꾸었다. 의분을 참지 못해 강호 전역에서 모여든 이들이 하남성으로 집결하고 있었다.
자칫하면 도리어 반격의 빌미마저 줄 수 있는 상황.
사파 무인들이 불만을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호북성을 밀어 버린 시점에서 하남성과 섬서성도 가시권이었다. 그가 마음만 먹었어도 화산과 종남, 소림이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단 말인가?”
“너무 큰 자만심 때문에 화를 부르진 않을지…….”
사파 무인들은 진운룡이 자만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들로선 응당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진운룡의 무위는 그야말로 무쌍(無ᄲᅮᆱ).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경지였던 것이다.
그러나 명신은 그렇지 않음을 잘 알았다.
‘그분은 자만하고 계신 게 아니다.’
진운룡은 오히려 신중을 기하고 있었다.
명신은 얼마 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진운룡은 곧장 숭산으로 치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것도 본인이 손수 최정예의 본대를 이끌고서.
그러나 그는 중도에 마음을 바꾸었다.
별안간 서녘을 쳐다본 직후의 일이었다.
‘분명 강자들이 맞붙고 있다고 말하셨다.’
명신으로선 그게 무슨 의미인지, 진운룡의 심중이 어떠한지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다만 감정만은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끝이 없어 보이는 분노와 경악.
자신과 같은 경지의 무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경악이었다.
‘정녕 강호는 넓고 무인은 많은 것일까? 그분에 필적하는 존재들이 더 있다니.’
어찌 됐든 그 이후로 진운룡은 본대를 물렸다. 그런 후에 폐관을 하고서 틀어박혔다.
모두가 황당해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 불만이 있다손 쳐도 진운룡의 심사를 거스를 만한 배짱은 누구에게도 없었다.
그러던 진운룡이 폐관에서 나온 것이 이레 전의 일.
그는 직후에 서신 하나를 명신에게 가져왔다.
“가장 멀리 나는 전서응을 가져와라.”
“멀리 나는 전서응이요? 어느 정도 거리를 말씀하시는 것인지…….”
“대막으로 보내고자 한다.”
입이 절로 벌어지는 대답.
“대막…… 말입니까?”
“그렇다.”
명신은 더 묻지 않았다. 꼬치꼬치 캐물어 봐야 좋을 것이 없었기에.
그렇게 진운룡은 서신을 날려 보냈다.
날아가는 전서응을 보며 진운룡이 운을 뗐다.
“본좌가 계획하고 있는 바를 가늠할 수 있겠느냐?”
명신은 자세를 바로 하고서 답했다.
“외세의 힘을 빌리시려 한다는 건 알 것 같습니다.”
“외세라. 흥.”
비웃음 섞인 코웃음을 치는 진운룡.
그의 이어지는 말이 명신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너는 중원이 세상의 중심이라 생각하느냐?”
“……네?”
“본좌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할 만큼 멍청하지는 않을 텐데?”
명신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 그것이, 너무 갑작스러운 질문인지라…….”
“그렇더라도 대답을 할 순 있겠지.”
잠시 생각하던 명신이 입을 뗐다.
“중원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면, 무엇이 세상의 중심이란 말입니까?”
“중원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지.”
진운룡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을 덧붙였다.
“본좌는 많은 곳을 다녀 보았다. 장성을 넘어 북녘의 끝까지도 가 보았고, 서장과 그 너머의 영역에까지 발을 디뎌 보았다.”
“서장 너머라고 하셨습니까?”
“중원 밖의 세상은 실로 드넓지. 중원 정도는 수십 개가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로.”
명신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그의 사고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는 규모였다.
진운룡의 말이 이어졌다.
“중원은 세상의 중심이 아니다. 세상은 너희들 중원인의 것이 아니지. 오히려 너희가 오랑캐라 부르며 배척하고 얕잡아 보는 저들이 너희보다도 넓은 세계를 알고 있을 것이다.”
대막의 전사들.
드넓은 초원의 주인인 그들은 중원의 오랜 적이자 골칫거리였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보다 넓은 세계를 알고 있을 거라니…….’
미개한 오랑캐들.
강인하지만 잔혹하며, 재빠르지만 악랄한 존재들.
명신이나 여느 중원인들이 그들에게 가지고 있는 선입관이었다.
진운룡은 재미있다는 듯 명신의 반응을 보았다.
“본좌의 사적인 목적은 복수다. 죽여야 할 놈이 있고, 본좌는 반드시 놈을 죽일 것이다.”
“…….”
“하지만 공적인 목적을 두어도 좋겠지. 너나 네 무리는 실로 어리석은 놈들이지만, 본좌의 수족 노릇 정도는 할 수 있을 테니.”
명신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언젠가 진운룡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중원인 모두에게 복수하겠다던.
지금의 진운룡은 그때와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폐관으로 인한 변화일까?’
명신으로선 알 도리가 없었다. 그저 그 변화에 감사할 따름.
“저희를 해치지 않겠다는 뜻으로 보아도 되겠습니까?”
“당장은. 어쩌면 너희가 죽는 날까지 그럴지도 모르겠군.”
“그렇다면 대체 그 공적인 목적이란 무엇입니까?”
진운룡의 입가가 미소를 그렸다.
“중원이란 틀을 부수는 것.”
“……!”
“생각해 보니 그것이야말로 너희들 중원인에 대한 가장 큰 복수가 될 것 같더군.”
명신은 자신이 착각을 했음을 깨달았다.
진운룡의 심경 변화는 자비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냉정하고 잔혹한 심성이 낳은 것일 뿐.
“단순히 죽이는 것은 시시한 일이지. 그저 무가치한 목숨을 뺏고 마는 일이니까.”
“…….”
“하지만 중원인이란 존재들의 기질 자체를 바꾸는 것은 커다란 일이지. 내일의 너희가 지금의 너희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리란 뜻이니.”
“대체 무슨 말씀을…….”
“밖으로는 장성을 부수고 외세를 끌어들이겠다. 안으로는 무림을 뒤엎고 국가를 허물겠다. 그 이후의 중원은 과연 너희가 알던 중원일까?”
명신의 두 손이 바르르 떨렸다.
시선을 내려 쳐다보니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진운룡도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는 이번에도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두려운가?”
“잘…… 모르겠습니다.”
명신의 대답은 정직했다. 정말 잘 몰랐기에. 뭐라 형언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에.
절망해야 할까?
그러나 무엇에 절망한단 말인가? 역사가 바뀌고 관습이 깨어지는 것에?
기뻐해야 할까?
그러나 무엇을 기뻐한단 말인가? 강호가 뒤바뀌고 대막인들이 들이닥치는 것에?
“정말 모르겠습니다.”
결국 명신은 그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진운룡은 그 사실에 크게 실망하지 않았다.
“너다운 대답이로군. 주체성도 없으며 자존심은 더더욱 없는.”
“…….”
“하긴 쓸데없이 떠들어 댔다면 주둥이를 비틀어 버렸을 테지만 말이다.”
명신은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표정을 지었다. 이 진운룡이란 작자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진운룡은 몸을 파묻고 있던 호피가죽 의자에서 일어났다.
“지금쯤이면 멍청이들이 안달이 나 있겠군.”
멍청이들이란 물론 사파의 호웅들을 가리키는 것일 터였다.
“따라와라. 바보들에게 먹이를 줄 시간이다.”
진운룡이 거침없는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명신은 조금 전의 대화를 떠올리며 자신감 없는 걸음을 떼었다.
“이제 다시 정벌행을 재개하시는 겁니까?”
명신의 물음에 진운룡은 혀를 찼다.
“본좌가 왜 대막의 무리를 움직였다고 생각하지?”
“잘 모르겠습니다.”
명신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이번엔 진운룡도 명신의 무지를 탓하지 않았다.
서장에 본인을 위협할 정도의 기운이 나타났다는 것, 그것이 또 다른 강자와 충돌했다는 것을 명신이 알 리 만무했기에.
‘하나는 정천, 그놈이다. 그렇다면 다른 하나는…….’
대번에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서장의 수호자, 세외의 지존.
‘팔룡천법왕.’
진운룡이 이를 악물었다.
많은 이들이 오랜 전설로나 치부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진운룡은 팔룡천법왕이 실존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미 한 차례 만나 본 적도 있었다. 물론 몇 백 년 전의 일이었지만.
‘당시에도 놈은 강했다.’
내공으로만 치면 팔부혈선 개개인을 능가할 정도. 혈선들이 수적 우세를 점하고 있는 데다 서장 자체가 그리 매력적인 지역이 아니었기에 충돌할 일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얘기가 다르다.
진운룡을 제외한 혈선들은 모두 죽었다.
팔룡천법왕의 내공은 과거보다도 더욱 상승했다.
‘그것은 약간의 기운만 느껴 보고도 알았다. 다만 문제라면 실전 능력인데.’
확신할 순 없었다.
진운룡이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기운의 크기가 전부였으니.
수천 리도 더 떨어진 거리임을 감안하면 이 정도만도 대단한 것이긴 했지만 말이다.
다행한 것은 오래전 대막의 무리에 심어 놓았던 약조가 효과가 있다는 것.
덕분에 간접적으로나마 서장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정천이 그곳에 있다. 월골에게 사소한 것까지 모두 보고하라 했으니 조만간 대강의 상황을 알 수 있겠지.’
마음 같아선 법왕과 정천이 동귀어진한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최악의 경우엔 놈들이 손을 잡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상당히 귀찮아질 터.
경우에 따라선 대막의 부족 전체를 움직여야 할지도 몰랐다.
‘월골의 말에 따르면 호화호특의 늙은이들은 평화에 찌들어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깟 것들이야 가볍게 건드려 주면 그만이다.’
대막을 조종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진운룡은 여전히 자신에게 주도권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곳에도 변수가 있다는 것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 * *
노인이 소림사에 당도한 것은 진운룡의 폐관이 끝나던 시점이었다.
“옛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구먼.”
곳곳의 건물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며 노인이 중얼거렸다.
소림사는 절이라기보다도 병영이나 요새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중원 전역에서 몰려온 무인들이 그곳에 있었다. 오히려 본 거주민이라 할 수 있는 법승들의 모습을 찾기가 힘들 정도.
잇따른 패전에 비하면 상당히 활기찬 모습이란 것도 특이점이었다.
파죽지세이던 사파 연맹의 진격이 멈춘 까닭이었다.
물론 수뇌부인 제갈각이나 모용중강은 진운룡의 의도를 알 수 없어 죽을 맛이었지만, 아래 무인들로선 그저 좋을 따름이었다.
마침 지나가는 동자승이 한 명 있었다.
노인은 동자승을 불러 나직이 부탁했다.
“이곳의 책임자에게 안내해 줄 수 있겠느냐?”
“책임자요? 제갈세가주나 모용세가주 말씀이세요?”
당돌한 대답에 노인이 눈을 껌뻑거렸다.
“방장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 걸 보니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구나.”
노인의 말에 동자승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노인장은 세상 돌아가는 꼴도 모르세요? 미치광이라면 그냥 돌아가시고, 밥을 얻어먹으러 오신 거라 해도 그냥 돌아가세요. 공양하고 싶어도 쌀이 부족할 지경이에요.”
“흐음.”
동자승은 노인을 무시한 채 제 할 일 하러 사라져 버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풍문이나 수소문해 볼 걸 그랬나.”
그렇게 중얼거리는 노인이었으나 곧 생각을 접었다. 어차피 뜬소문이 대부분일 터였으니.
“진짜배기 정보란 응당 높은 작자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법이지.”
노인의 걸음이 경쾌해졌다.
노인은 휘적거리는 걸음으로 전진했다. 어차피 사람들의 모습이나 분위기만 봐도 어디가 중심지인지는 알 수 있었다.
과연 얼마간 걷다 보니 제지하러 다가오는 무인들이 나타났다.
“그만! 이곳은 아무나 들어올 수 없소.”
“돌아가시오, 노인장!”
실로 위압적인 반응. 지키고 있는 자들이 꽤나 높은 작자들이란 의미다.
노인은 장죽을 휘저으며 웃었다.
“이 늙은이가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군. 그나저나 이곳에는 계신 이들이 정파 무림의 우두머리들인가?”
무인들은 미친놈 다 봤다는 눈으로 노인을 쳐다봤다.
“대답해 줄 의무도 없거니와 대답을 들을 자격도 없어 보이는군. 좋은 말로 할 때 꺼지시오.”
“미안하지만 그렇게는 못하겠구먼.”
“혼쭐이 나야 정신을 차리시겠소?”
팔척장신의 무인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노인의 가느다란 팔다리쯤은 단번에 부러트릴 수 있을 듯한 거구였다.
“날 원망하지 마시오!”
거한은 그대로 노인을 집어 들려고 했다. 그래도 존장이니 차마 육모곤을 휘두를 순 없었던 모양.
그러나 다음 순간.
뒤집어져 허공을 나는 쪽은 거한이었다.
“헉!”
와장창!
기왓장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팔 척 거구가 한순간에 지붕 위까지 날아가 버린 것이다.
또 한 명의 무인이 입을 쩍 벌린 채 노인을 보았다.
무슨 술수를 부렸는지 눈으로 좇지도 못했다.
“누, 누구냐, 네놈은!”
말을 더듬거리며 육모곤을 휘젓는 무인.
노인은 끌끌거리며 웃었다.
“네가 막을 수 있는 인물이 아니란 것은 분명하지 않느냐, 아이야?”
“이익!”
무인이 달려들며 대번에 육모곤을 뻗었다. 노인을 적으로 규정한 모양.
순간 노인의 신형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사삭!
노인은 삽시간에 무인의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동시에 팔을 내뻗어 육모곤을 쥔 팔을 비틀었다.
“크악!”
비명과 함께 육모곤을 떨어트리는 무인. 그 순간 그 역시 지붕 위로 내던져지고 있었다.
쨍그랑!
기왓장이 요란하게도 박살났다.
노인이 가볍게 손을 털고 있으려니 법당 문이 열리며 무인들이 나타났다. 하기야 이렇게 소란스러운데 점잔빼고만 있을 수도 없었으리라.
‘호오.’
노인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나타난 무인들은 앞선 애송이들과는 수준이 달랐다. 하나같이 일문의 주인을 자처할 수 있을 법한 고수들.
그중에서도 맨 앞의 두 사내가 내뿜는 기도는 상당했다.
그들이 지닌 무공 자체보다도 분위기나 기세가 남다른 편이었다. 달리 말하면 심리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자신들이 위기에 처했다는 걸 모르는 것보단 백배 나았다.
‘저 둘이 우두머리인 모양이로군.’
노인이 그렇게 단정을 지으려니, 두 사람 중 비교적 인자한 인상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노인장께선 어인 일로 이런 소란을 일으키십니까?”
“예의를 모르는 놈들에게 예의를 가르쳐 주었다네.”
노인이 익살스럽게 대꾸하니 둘 중 보다 험악한 인상의 사내가 코웃음을 쳤다.
“그놈의 예의, 두 번 가르쳐 줬다간 사람 몸이 남아나지 않겠소.”
전자는 물론 제갈각, 후자는 모용중강이었다.
노인이 두 사람을 제대로 알아본 것이다.
장죽을 지지대 삼아 몸을 슬쩍 기울인 노인이 말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게 재미있는 모양이더군. 하여 내친걸음에 구경 좀 나왔네.”
“노인장께선 은거고수이신 모양이군요.”
눈치 빠른 제갈각의 말에 노인은 웃었다.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옛 친구의 기운이 반가워 나도 모르게 나와 버렸구먼.”
“지금 옛 친구라 하셨소?”
미묘한 단어를 모용중강이 놓치지 않았다.
노인이 대답 없이 웃고만 있으려니 제갈각이 손수 법당을 가리켰다. 노인이 보통 인물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긴밀한 이야기는 들어가서 하시지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무래도 미치광이 노인 같은데요.”
“보통 사람 같진 않습니다만.”
주변의 무인들, 즉 군소 문파의 문주들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그들에게 노인의 진면목을 간파할 수 있는 혜안이 존재할 리 없었다. 두 사람으로선 조금 한숨이 나올 일이었다.
그때 모용중강이 딱 잘라 말했다.
“걱정들 마시오. 그것보다 우리 셋이서만 대화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워 주셨으면 좋겠소.”
“…….”
“…….”
문주들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것을 제갈각이 부드러운 어조로 풀어 주었다.
“염려하지 않으셔도 좋소. 자세한 얘기는 대화가 끝난 연후에 들려 드리리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문주들이 물러났다.
“들어오시지요.”
“그러지.”
제갈각이 노인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그 와중에 모용중강은 의혹 어린 눈으로 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 사람은 법당 한가운데에 털썩 앉았다.
“드넓은 법당에 사람이 셋뿐이다 보니 문자 그대로 휑하군요.”
제갈각의 말에 노인이 피식 웃었다.
“어찌 우리 셋뿐이겠는가. 부처께서 듣고 계신데.”
“하하, 그건 그렇군요.”
제갈각이 마주 웃으려니 모용중강이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본론으로 들어가고 싶소만.”
“…….”
제갈각이 웃음을 그쳤다. 노인 역시 빙그레 미소만 지을 따름이었다.
“그러지. 아무래도 서로 간에 농이나 주고받을 여유는 없는 것 같으니 말이야.”
“노인장께선 누구십니까?”
“아까도 말했지만 옛 친구의 기운이 반가워 은거를 깨고 나온 늙은이일세.”
“옛 친구라 하심은…….”
조심스러운 제갈각의 목소리.
빙긋 웃은 노인이 물었다.
“진운룡이라 한다면 이해가 빠르겠는가?”
“……!”
“……!”
천하의 제갈세가주와 모용세가주조차도 이번만큼은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진운룡의 존재를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정파 무림의 문주들 정도나 겨우 알고 있을 정도. 일반 무인 중에서는 그 이름을 언급하는 사람조차 거의 없었다.
아무 연고도 없는 은거기인이 그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은 분명 충격이었다.
“확실히 그자와 인연이 있는 모양이군요.”
“물론이지. 그것도 끈질긴 악연일세.”
“자세히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제갈각의 추궁에 노인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 전에 이 늙은이가 먼저 자네들에게 묻고 싶군. 자네들은 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예?”
“그라면 진운룡 말입니까?”
“그렇다네.”
잠시 주저하는 두 사람.
이윽고 모용중강이 약간은 자신 없는 투로 대답했다.
“어마어마한 무공을 지녔다는 것. 그에 대한 자신감의 발로인지 스스로를 초대 천무맹주 진운룡이라 참칭한다는 것. 그리고 사파 무림을 움직여 정파를 멸하려 한다는 것 정도요.”
대답을 듣는 노인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고작 그 정도여선 자네들에게 승산은 없겠군. 적을 제대로 아는 것이야말로 병법의 기초일 텐데 말이야.”
“…….”
두 사람은 발끈하지도 못했다. 노인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다.
가볍게 혀를 찬 노인이 말했다.
“한 가지 정정해 줌세. 그는 진운룡을 사칭하는 자가 아닐세.”
“……그가 진운룡 본인이라도 된단 말씀이오?”
모용중강이 미심쩍은 듯 물었다. 노인은 빙그레 웃고서 반문했다.
“진실로 그렇다면?”
“…….”
“믿기 힘든 얘기군요. 노인장의 말씀대로라면 그는 수백 년도 더 살아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게다가 천무맹의 초대 맹주였던 그가 왜 정파 무림을 멸하려 한단 말씀입니까?”
“어리석은 후배들의 몰골에 분노가 치밀었을지도 모르지. 혹은 자신의 실패작을 묻어 버리자고 생각했거나.”
“저희가 불민한 후배들임을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유만으로 무림 자체를 멸하려 한다는 건 용납할 수 없습니다.”
모용중강은 조금 놀란 눈으로 제갈각을 보았다. 지금의 제갈각은 노인의 말이 사실이란 것을 전제로 말하고 있었다.
“제갈 가주, 지금 저 노인장의 말을 믿는단 말씀이오?”
“가능성이 아주 없는 일은 아니잖습니까? 동방삭 같은 인물도 있건대 절정고수가 수백 년을 사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지요.”
“동방삭은 이야기 속의 인물일 뿐이잖소?”
“초절정의 고수들이 이야기 속에나 있을 법한 일을 해내는 모습을 예로부터 몇 번이고 목도했습니다. 이번 경우라고 해서 다를 건 없을지도 모릅니다.”
“으음.”
모용중강이 침음을 뱉었다. 내색하진 않으나 불편한 기색이었다.
노인이 말을 이었다.
“다른 녀석들처럼 미치광이로만 생각하지 않아서 고맙구먼.”
“노인장께서 알고 계신 것을 좀 더 풀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지. 물론 믿고 말고는 전적으로 자네들의 몫이겠지만.”
노인의 시선이 모용중강에게 향했다. 모용중강은 약간 붉어진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흠흠. 부디 고견을 들려주시면 감사하겠소.”
“그러지. 고견이랄 것은 없겠지만.”
노인의 말이 이어졌다.
“먼저 이 늙은이의 소개부터 하지. 중원인의 표현대로 하자면, 진운룡과는 동문수학했으며 죽마고우로 불렸던 사이일세.”
“그자와 친구였단 말씀입니까?”
“친구이자 호적수였지. 한때는 서로를 죽이기 위해 무슨 일이든 했으니까 말이야.”
제갈각도 모용중강도 노인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도움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 노인의 목소리엔 깊은 울림이 있었다.
“진운룡과 그의 동료들에겐 한 가지 목적이 있었지. 이 늙은이는 그것을 막고자 했고. 진운룡은 목적을 위해 추종자들로 이루어진 단체를 세웠으니, 그것이 바로 천무맹일세.”
“그렇다면 노인장은……?”
“이 늙은이 역시 그에 맞서 단체를 하나 세웠네. 그 이름은 자네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일세.”
노인은 더 말을 잇지 않았다. 대신 가볍게 자신의 독문무공을 발현했다.
우우우웅.
가볍게 방출되는 기운.
제갈각과 모용중강의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그들도 익히 알고 있는 기운이었다. 어찌 모를 수가 있을까?
아마 십여 년 전의 전쟁에 참가했던 이들이라면 모를 수가 없으리라.
당시 정파 무림의 악몽과도 같았던 이들.
강룡단이 펼치던 무공의 색깔과 너무나 흡사했다.
“설마 노인장은……!”
제갈각의 외침에 모용중강이 자기도 모르게 검을 뽑아 들었다.
노인, 진천백이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이 늙은이가 바로 초대 천마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