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二章 서장의 약탈자
정천 일행은 손님의 자격으로 포달랍궁에 묵게 되었다.
자칫 궁 전체를 붕괴시킬 수도 있었다는 사실은 애써 무시되었다.
객실로 안내받은 그들은 그제야 객장을 풀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험하고 먼 길이었다.
“먼 길이었네요.”
“서장은 드넓으니까요. 중원 정도는 가볍게 들어갈 정도로요. 우리가 온 길은 그 일부에 지나지 않아요.”
말을 꺼내는 사람은 화연란과 요태희뿐이었다.
“서장이 그렇게나 넓은가요?”
“포달랍궁도 서장 전역을 기준으로 보면 동쪽에 치우쳐져 있는 형국이죠. 서쪽으로 더 나아가다 보면 수많은 나라들과 수많은 인종들을 만날 수 있어요.”
“인종……?”
미묘한 표현에 화연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색목인 말인가요?”
“뭉뚱그리자면 그렇겠죠. 하지만 색목인도 수많은 부류가 있어요. 중원의 북인과 남인의 기질이 확연히 다른 것처럼요.”
“무척 자세히 알고 계시네요.”
“사실 구태여 구분 짓자면 저 역시 그들에 더 가까우니까요.”
“가깝다고요?”
요태희가 눈동자로 손을 가져갔다. 이윽고 각막에 붙어 있던 투명한 막을 떼어내자 푸른빛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보석 같은 색채.
중원에선 결코 찾아볼 수 없는 빛이다.
“와…….”
화연란이 탄성을 뱉었다.
쓴웃음을 지은 요태희가 다시 투명한 막을 각막에 붙였다.
“아무래도 색목인은 중원에서 배척받게 되니, 자연히 가릴 수밖에 없더군요.”
“그랬군요. 그렇다면 궁후님은 본래 서방에서 오신 건가요?”
“그렇지는 않아요. 안타깝게도.”
요태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화연란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괜한 걸 물었군요.”
“그렇진 않아요. 그저…….”
“서방 곳곳을 둘러보았나?”
정천의 물음이었다.
마침 화제를 돌리고 싶었던 요태희가 곧바로 말을 받았다.
“꽤 많은 곳을 돌아다녔었죠. 한때는 중원 가까이에도 오기 싫었던 적이 있었으니까요.”
“어디까지 가 봤지?”
“최소한 중원보다도 넓은 땅을 돌아다녔다는 것만은 분명해요. 아마도 중원 정도는 열 개쯤 들어가지 않을까 싶은 땅을.”
“서장이 중원의 열 배도 더 된단 말인가요?”
화연란이 놀라 물었다.
백미련이나 장유추도 흥미가 동하는 듯 귀를 종긋 세우고 있었다.
“세상은 넓어요.”
나직이 운을 뗀 요태희의 말이 이어졌다.
“남서부로는 천축이 있고, 서쪽으로도 거대한 제국이 하나 있지요. 중원만큼이나 융성하고 거대한, 어쩌면 중원마저 능가할지도 모르는 대제국이.”
장유추가 질문을 꺼냈다.
“그 동네 놈들의 실력은 좀 어떤가?”
“중원만큼 무공이 발달하진 않았어요. 대신 그들은 지혜와 전술로써 무공을 대체하죠.”
“흐음.”
“그곳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군.”
정천의 말에 요태희는 쓴웃음을 지었다.
“네. 마치 고향의 옛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으니까요.”
“그런데 왜 중원으로 되돌아왔지?”
요태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글쎄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저로서도 그 점이 의아했으니까요.”
그녀의 시선이 동쪽으로 향했다.
“보이는 곳에선 싸움이 횡행하고, 보이지 않는 곳. 사람 사는 곳은 모두 같다고들 하지만 중원만큼 전란과 싸움이 끊이지 않는 곳은 없었어요. 장성으로 자신들을 가둬 둔 채 싸움을 계속하는 그 모습은 꼭 투견 같기도 하더군요.”
“…….”
“그런데 왜 돌아왔을까요. 저도 잘 모르겠네요. 그래도 굳이 답변하자면, 아마도 책임감 때문인 것 같아요.”
“책임감?”
“동족의 잘못을 바로잡는 게 나의 일. 그렇게 생각했었던 것 같네요. 아마 그것만이 정체성을 유지할 방법이라 생각했던 건지도 모르죠.”
정체성.
그녀는 기나긴 수명을 지닌 이방인이다. 그 사실만큼은 많은 시간이 지나더라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가만히 듣고 있던 정천이 돌연 말했다.
“이제 그만 들어오시지.”
“네?”
정천은 대꾸 없이 문 쪽을 응시했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니, 낡은 문이 스르륵 열렸다.
들어서는 이는 십이천승 중 한 명.
기척을 지우는 능력이 상당했기에 정천 외엔 아무도 접근을 느끼지 못했다.
‘아냐.’
백미련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종착지에 도착했단 사실에 모두들 마음을 놓았기에 감지하지 못했을 뿐, 약간이라도 긴장하고 있었다면 그의 기척을 못 느끼진 않았으리라.
달리 말해, 정천은 이 와중에도 마음의 끈을 놓고 있지 않다는 것.
‘저 남자에게 편안한 장소란 게 있기나 한 건지 모르겠군.’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려니, 천승이 입을 열었다.
“조금 전 회의가 끝났소.”
“회의?”
“당신들에게 협력해야 할지를 결정하는 회의 말이오.”
장유추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거야 이미 결정된 것 아니었나? 정천은 법왕에게 승리했지 않나. 그런데도 이제 와 말을 돌린다는 건 우습군.”
“그건 팔룡천법왕께서 나서느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것이었을 뿐. 법왕이 나서는 것과 서장이 나서는 것은 다르오.”
“말장난을 하는군. 그럼 댁들은 법왕 홀로 중원으로 내보내기라도 할 거였단 말인가?”
“그래야 한다면.”
천승의 태도는 단호했다. 장유추는 쯧 하고 혀를 찰 뿐 더 말하지 않았다.
잠자코 듣고 있던 정천이 물었다.
“그래서, 어쩌기로 결정했지?”
“조건부요.”
“조건부라고?”
“그렇소. 법왕께선 드넓은 자애로써 움직이시지만, 일국의 행동이란 자애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법이지.”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아무것도 없이 빈손으로 도와 달라고 하는 쪽이 날강도일 테니.
“그 조건이란 걸 들어 보겠소.”
정천의 대답에 천승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안도하는 걸 보니 반발을 예상했던 모양이다.
정천이 진심으로 반발했다면 그것을 막을 수 없으리란 것도.
“간단히 말하리다. 최근 궁의 경계에 주의를 가했던 까닭에 반사적으로 서장 외부로의 방어가 미흡했었소. 그런 까닭에 국경에 나타나 약탈을 일삼는 무리가 요사이 횡행하고 있소이다.”
“우리와 무관하진 않겠군요.”
화연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궁의 경계를 강화한 이유는 아마 마교 측이 보낸 서신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니 어느 정도의 원인은 일행에게 있다고 봐야 했다.
“그 일로 그대들을 탓할 생각은 없소.”
엄숙히 말한 천승이 덧붙였다.
“그러나 가능하다면 도와준다면 고맙겠소만.”
팔룡천법왕은 서장의 수호자이나, 다시 말하면 상징적 의미밖에 존재하지 않기도 하다.
평생 밖에 나와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오직 반년뿐.
그것을 잡다한 약탈자들에게 쏟을 순 없는 것이다.
수탈자들도 그것을 알기에 마음 놓고 서장을 노릴 수 있었다. 법왕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당장의 굶주림이 큰 법이니.
본디 그것을 방비하던 이들은 십이천승.
그러나 포달랍궁의 경계를 위해 하릴없이 귀궁할 수밖에 없었고, 약탈자들은 그때를 놓치지 않았다.
“그러니까.”
정천이 말했다.
“그것들을 몰아내 주면 된다는 소리로군.”
“그렇소. 가능하다면 완전히 뿌리를 뽑아 버린다면 좋겠지만 그것까진 어렵겠지. 최소한 법왕께서 계시지 않은 동안만이라도 놈들이 서장을 노리지 못하게 해 주시면 되오.”
“알겠소. 서장의 지리를 잘 아는 사람 하나만 붙여 주시오.”
의외로 간단한 승낙.
다른 이들은 물론이고 천승 역시 조금 놀란 눈치였다.
“정말 괜찮겠소?”
“이상한 질문이군. 내가 그래 주길 바랐으니 그런 조건을 내건 것이 아니오?”
“그거야 그렇소만…… 되었소. 본승이 말을 잘못 꺼낸 모양이군.”
말을 마친 천승이 합장을 했다.
“오늘은 이만 물러나리다. 내일 아침 식사를 마친 직후에 사람을 보내겠소. 편히들 쉬시길 바라겠소.”
천승이 떠나자 백미련이 정천에게 물었다.
“정말 그런 일에 시간을 낭비해도 되겠어?”
그녀의 말을 장유추도 거들었다.
“그냥 마교 쪽에 서신을 보내 병력을 보내 달라고 하는 편이 낫지 않겠나?”
정천은 고개를 저었다.
“어설프게 지원병이 와 봐야 기질도 다른 이곳에서 제 힘을 발휘하긴 어려울 겁니다.”
“그건 그렇겠군. 우리도 생고생을 해서 겨우 도착했으니 말이야.”
“우리가 나서는 편이 차라리 나을 겁니다. 여유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니, 이참에 서장에 빚을 만들어 두는 것도 나쁘진 않겠죠.”
“그렇구먼. 그럼 이제 문제는 팔룡천법왕이 언제 나서느냐는 것인데…….”
“아마 당장 나설 수는 없을 겁니다. 일단은 진운룡의 거취가 밝혀지는 것이 우선이니.”
이제 팔룡천법왕에게 허용된 시간은 한 달뿐. 그가 포달랍궁을 나서는 것은 목적지가 확실히 정해지는 순간뿐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진운룡을 유인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군.”
장유추의 혼잣말에 화연란이 흠칫했다.
그녀는 경직된 시선으로 정천을 돌아봤다. 한 가지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던 까닭이다.
“오라버니…… 설마 중원 전체를 제물로 삼으려는 것은 아니겠죠?”
“제물이라니?”
장유추가 물었다.
요태희와 백미련은 이미 대강 이해한 듯 침묵하고 있었다.
화연란이 떨리는 목소리로 설명했다.
“진운룡이라는 자는 이미 무의 정점.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이 원하는 순간 어느 곳에든 나타날 수 있고 어느 곳에도 나타나지 않을 수가 있겠죠.”
“그야 그렇겠지.”
“그런 그가 확실히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 얼마나 존재할까요?”
장유추가 팔짱을 끼었다.
“대회전(大會戰)이 벌어지는 순간의 전장 정도겠군.”
“다시 말해 한 세력의 존망이 결정되는 순간이겠죠. 예컨대 귀암산을 침공하는 순간이라거나…….”
장유추의 표정도 그제야 심각해졌다.
“그 시점이라면 정파 무림이 완전히 멸망한 이후겠군. 하긴 드넓은 중원에 비해 귀암산은 그 위치가 분명한 편이니, 진운룡을 끌어들여 한판 붙기에도 용이할 거야.”
중원에선 진운룡과 조우하기 힘들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대번에 전장을 이탈해 버리는 것도 가능할 테니.
이미 정천에게 호되게 데인 그인 만큼 승패가 확실하지 않다면 싸우려 들지도 않을 것이다.
반면 귀암산이라면 그를 끌어들이기도 쉬울 터.
달리 말하면 진운룡을 죽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은 그곳이었다.
‘수많은 것들을 희생해야겠지만…….’
정파 무림이 사라진다. 수많은 이들이 학살될 것이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강물을 이룰 것이다.
정파 무림에 적을 두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꺼림칙할 터.
그러나 정천만은 그렇지 않으리라.
그렇기에 그녀로선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정말 그럴 생각이신가요?”
재차 던져지는 질문.
정천은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래야 한다면.”
“오라버니!”
“말은 끝까지 들어. 정말 그것밖에 방법이 없다면 그래야 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직까진 다른 방법을 강구할 시간과 여유가 있어.”
정사대전의 첩보는 계속해서 마교로 보내지고 있는 실정이었다.
소림의 철운대사가 이끌던 병력이 대패했고 호북성과 호남성이 마교에게 넘어갔다. 다음은 아마도 하남성이 될 터.
그럼에도 아직 끝이 난 것은 아니다. 정파 쪽에서도 반격의 칼날을 갈고닦는 중이었다.
진운룡이 강대하다고는 해도 혼자일 뿐.
전체적인 규모를 따져 본다면 사파는 정파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더군다나 정파에겐 수백 년간 중원을 호령해 온 저력이 있었다.
이대로 무너지지는 않을 터.
거목을 쓰러트리려면 진운룡으로서도 상당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진운룡과 팔부혈선의 장악력은 천무맹 바깥으로까지는 이어지지 않았던 모양이야. 수백 년 동안 천무맹 하나만을 지배해 오고 있었으니 그럴 테지만.”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천무맹이 붕괴된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황룡성이 사라짐과 함께, 팔부혈선의 지배력 역시 대부분 사라져 버렸으니 말이다.
모든 것은 혈선들의 오만이 빚어낸 것. 하기야 그들의 계획은 완벽했다. 어찌 정천 같은 변수가 생겨날 줄을 알았으랴.
그러나 변수는 변화를 낳았다.
미래는 혈선들이 생각한 것과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진운룡의 바람과는 멀어졌다.
그리고 반격의 실마리는 거기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법왕이 함부로 출궁할 수 없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어.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건 믿을 수 있는 연락망이겠지. 원하는 순간 팔룡천법왕에게 연락이 닿을 수 있게끔.”
“그렇겠죠.”
화연란이 한층 안도한 얼굴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완벽한 건 아냐. 정작 전력이 되어야 할 팔룡천법왕이 저 모양이니까.”
모두들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정천이 ‘저 모양’이라고 말한 팔룡천법왕은 그들의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는 존재였으니.
정천도 그것을 알기 때문인지 부연 설명했다.
“그는 강해. 아마 축적해 온 내공만을 따지자면 진운룡마저도 뛰어넘겠지.”
“하지만 다룰 재간은 부족하지.”
장유추의 말에 정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운룡은 오 합만 겨뤄 보고도 그 사실을 깨달을 겁니다. 그 이후 그가 팔룡천법왕을 압살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반 각도 안 되겠죠.”
“자네가 법왕과 힘을 합쳐 협공한다면 어떻겠나?”
“오히려 전력이 감소될 겁니다.”
“어째서 그런가?”
“법왕과 겨뤄 보고 난 후에 알았습니다. 그와 저의 기운이 상극이란 것을요. 협공은커녕 서로가 서로를 방해하기만 할 겁니다.”
“음…….”
장유추가 침음했다.
지켜보던 그들로서도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다. 팔룡천법왕의 청광과 정천의 강룡천마갑의 성질이 상극이라는 것을.
싸운다면 차륜전이 최선이리라.
그리고 반 각도 버티지 못할 수준이라면 없느니만 못한 전력이었다. 오히려 진운룡에게 준비운동의 기회만 주겠지.
“역시 그의 부탁대로 할 수밖에 없겠군.”
“예. 빡세게 단련시켜 줘야죠.”
어깨를 으쓱인 정천이 말했다.
“대강 법왕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법왕 본인도 실감하고 있을 테고요. 그러니 가르치는 것도 어렵진 않을 겁니다.”
“그럼 약탈자들을 토벌하는 건 우리의 몫이겠군.”
광천뇌도를 쓰다듬으며 장유추가 말했다.
반면 요태희 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이상하군요.”
“뭐가 말인가요?”
화연란의 물음에 요태희가 말했다.
“비록 천승들이 빠졌다고는 해도 서장의 수호병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아요. 애초에 팔룡천법왕이 궁 안에만 기거함에도 서장이 평화로웠던 건 험준한 지형과 더불어 수호병들의 기질이 강인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도 약탈자들로 골머리를 앓는다는 게 이상하군요.”
“국경 부근의 마을만 노략한 후 능숙하게 빠지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더 이상한 일이지.”
정천이 말을 받았다.
“능숙히 치고 빠질 수 있을 정도로 훈련받은 병사들이라는 의미니까.”
그제야 화연란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설마…….”
“애초에 이런 곳을 노릴 수 있는 놈들이 일개 도적 떼일 리는 없지.”
모두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그럼 외세의 군대란 말인가요, 오라버니?”
“가능성은 높지. 더군다나 시기도 절묘해. 정파와 마교가 동시에 서신을 보낸 이 시점에 서장을 침략한다는 것이.”
“사파 쪽과 협약이 된 군대일 수 있단 말인가?”
“가능성은 높습니다.”
정천의 말에 모두들 침묵했다.
그 말대로라면, 이 전쟁은 비단 중원과 강호만의 문제가 아니게 될 터였다.
‘그리고 그것을 획책한 자는…….’
정천은 턱을 괴고서 생각했다.
요태희가 언젠가 말했었다. 혈선들의 영향력은 비단 정파 무림이나 강호에만 걸친 것이 아니라고.
물론 과거의 일이긴 했다. 실제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혈선의 영향력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다. 적어도 강호 내에서는 말이다.
‘하지만 강호 밖이라면?’
만일 그렇다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수준으로 흐르게 될지도 몰랐다.
* * *
평원.
이따금 모래바람이 불어와 눈을 찔러 댄다.
어지간한 이들이라면 눈살을 찌푸리거나 고개를 돌려 버릴 것이다.
그것은 고수라 자처하는 중원의 무인들조차 다를 바가 없을 터. 아무리 대단한 그들이라 해도 물렁물렁한 안구를 단련할 길은 없으리라. 기껏해야 내공으로 막을 쳐 보호하는 게 전부일 테지.
그런 험준한 바람 속에서 월골은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전란이라.’
그는 얼마 전에 날아든 독수리 한 마리를 떠올렸다. 그 굳건한 발목에 묶여 있던 서신 한 장을.
중원의 무인이 보내온 것이었다.
오랜 약속을 이행할 때가 되었다.
오랜 약속.
이제는 거의 모든 이들이 잊은 약속이었다.
잔혹하고 패도적인 성질을 견디지 못한 호화호특(呼和浩特)의 겁쟁이들. 그들은 중원의 황실을 두려워했다. 그들의 기분을 맞추는 데에 평원의 힘을 모조리 쏟아부었다.
대막의 사막엔 더 이상 용맹이 자리 잡을 곳이 없었다. 강맹함과 강인함은 그저 배척받는 자들의 소유물일 뿐이었다.
그것이 싫었기에 월골은 항상 반골 기질을 보여 왔다. 늙은이들은 월골 때문에 골치깨나 썩었으리라.
그러던 와중에 날아든 서신.
늙은이들은 비웃음 섞인 눈을 한 채 그것을 내밀었다.
“네가 원한 것은 전란의 싹이니, 어디 한 번 이 약속대로 이행하도록 하라. 그러나 너는 더 이상 우리 부족 연맹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명심하라. 가라! 네 부족들만을 데리고서!”
월골을 내쫓기 위한 얕은 수작.
그리도 싸움이 좋다면 네 부족을 데리고서 마음껏 싸우다 죽으란 의미였다.
나쁠 것은 없었다.
월골은 제안을 받아들였고, 서신이 가리키는 대로 평원으로 나섰다.
따르는 것은 정예병 일천.
이들과 함께라면 중원의 어떤 군대와도 싸워 이길 수 있으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물론 첫 술에 배부를 순 없는 법. 월골은 우선 서신에 적힌 대로 서장을 공략했다. 멍청한 땡초들을 유린하고 몇 개의 마을을 불살랐다.
그럴수록 마음속의 불길도 차츰 강렬해지는 것만 같았다.
‘마음 같아선 전설적인 팔룡천법왕과 결판을 내고 싶다. 그러나 그 정도 되는 존재가 이 정도에 발을 뗄 리는 없겠지.’
우선은 십이천승.
법왕의 최정예 호위들을 해치우는 것이 월골의 제일 목표였다.
월골은 서신의 마지막 구절을 떠올렸다. 그의 머릿속에서 도무지 사라지지 않는 한마디였다.
너희에게 불타오르는 중원을 선물하마.
그것이 허풍이 아님을 월골은 알고 있었다. 들려온 풍문에 따르면 이미 한 차례의 불길이 강호에 일었다고 했다. 무림의 내로라하는 세가와 문파들이 화염에 휩싸여 사라져 갔다고 했다.
무림이 무너지면 그다음은 중원 전역이다.
월골은 그 순간을 목도하고 싶어 미칠 것만 같았다.
“족장, 두 번째 서신이 왔습니다.”
수하 한 명이 독수리 한 마리를 들고서 나타났다.
얼마 전 월골은 서신을 보냈었다. 자신과 자신의 부족에 대해, 그들의 전력과 성과에 대하여.
아마도 그에 대한 답신일 터.
이번에도 서신은 간략했다.
서장의 심장을 찌르라.
“그렇게 하리다.”
서신을 읽어 내린 월골이 나직이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