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一章 인외의 싸움
서장의 수호자.
세외의 지존.
팔룡천법왕 나랍멸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
손을 들어 스윽 닦아 냈다. 상처는 이미 아문 뒤다. 그러나 그가 피를 흘렸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랄 일이었다.
다른 이들은 물론이거니와 스스로도.
조금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간단히 허용하고 만 일격.
정천의 주먹은 그의 뇌를 흔들어 놓았고, 나랍멸은 잠시뿐이지만 현기(眩氣)를 느꼈다.
‘방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심했기 때문이라 해도 이렇게 됐다는 것 자체가 놀랄 일이었다. 그 누구에도 일격을 허용한 적이 없던 그가 아닌가.
그만한 능력이 있다는 의미.
‘방심할 수는 없다.’
나랍멸은 그 순간 팔룡천법왕이 아니었다.
그저 싸움에 나선 한 사람의 무인일 뿐.
생경한 기분이었다. 지금껏 그가 진심으로 싸웠던 적이 있기나 했던가?
스스스스.
그의 몸에서 광채가 흘러나왔다.
법왕의 상징. 은은하게 사위를 비추는 청광. 사외를 압도하는 기운.
“아……!”
“저것이 바로…….”
모두가 경외감을 느꼈다. 나랍멸의 기운은 무인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포근함과 공경심이 절로 드는 그런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 정천은 웃었다.
“이제 좀 할 만하겠군.”
츠츠츠츠.
강룡천마갑의 기운이 한층 강해졌다.
나랍멸의 그것과는 반대로 보는 이들을 절로 흠칫하게 만드는 강렬한 기운.
나랍멸은 생각했다.
‘저자와의 싸움은 지금까지의 그 어떤 것과도 다르다.’
태어난 이래로 백사십육 년.
나랍멸은 난생처음으로 어떠한 감정을 느끼고 혼란스러웠다.
그것이 공포라는 것을 잠시 후에야 깨달았다.
‘그렇구나. 이것이 바로…….’
자칫하면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
남들이 범이나 늑대 같은 야수 떼를 눈앞에 뒀을 때, 혹은 산사태나 홍수 같은 자연재해 앞에 놓였을 때.
치열한 전쟁, 어느 순간 혼연히 튀어나온 칼날이 목젖을 짓누를 때.
그럴 때 느끼는 감정.
나랍멸은 비로소 그것을 지금에야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을 실감하니 절로 실소가 나왔다.
‘멀었구나. 멀었어. 이래서야 어찌 법왕을 자처할 수 있단 말인가. 내 자신이 죽음에 연연하고 이에 두려움을 느껴서야…….’
물론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또 다른 감정 하나가 나랍멸을 쥐고 흔들었다.
호승심.
눈앞의 상대를 쓰러트리고 싶다는 마음.
처음엔 증오에서 시작된 감정이었다. 적대적인 말투와 난폭한 행동. 그는 마치 시정잡배와 같은 저속하고 무례한 작자였다.
이윽고 그의 주먹을 허용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고통이란 것을 느꼈다.
그에게도 같은 느낌을 돌려주고 싶었다.
‘이것이 싸움이다.’
나랍멸은 그 순간 무인으로 태어나고 있었다. 지금껏 마주친 적이 없는 동급의 존재 덕분에.
“당신에겐 감사하고 싶습니다.”
나랍멸의 말에 정천은 조소했다. 그가 느끼고 있을 감정을 대강은 아는 까닭이었다.
“겨우 이 정도로 감사하기엔 너무 이르지.”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이 이후로 당신에게 감사할 일은 전혀 없을 겁니다. 그러니 지금 고마움을 표현해야겠지요.”
“세상일은 어떻게 흐를지 모르는 건데?”
“미리 알 수 있는 것들도 있는 법입니다.”
말을 마치며 일권을 뻗는 나랍멸.
파앙!
정천과 그 사이의 거리가 삼 장쯤 됐기에 허공만을 격했다.
그러나 그 순간.
허공을 격한 기운은 맹렬한 기운의 파도가 되어 정천을 덮쳤다. 보이지 않으나 그렇기에 더욱 위협적인.
정천은 피하지 않고 왼팔을 휘둘렀다.
보이지 않는 두 기운이 중간에서 격돌했다.
쿵!
비무장 주변의 공기가 파르르 떨렸다. 기운이 충돌한 지점의 바닥이 쩌저적 갈라졌다.
그때 두 사람은 이미 앞으로 뛰쳐나오고 있었다.
선공은 정천이었다.
천마보로 나랍멸의 옆구리 쪽으로 파고든 다음 일권으로 갈빗대를 노렸다.
“흡!”
나랍멸이 두 손을 휘저었다. 태극권의 기수식과도 비슷한 형태. 내젓는 팔로 부드럽게 정천의 주먹을 빗겨 내었다.
이윽고 정천의 팔을 꺾으려 드는 나랍멸.
워낙 부드러운 움직임이었기에 정천으로서도 하마터면 휘말릴 뻔했다.
“흥!”
정천은 신경질적인 코웃음과 함께 팔을 빼냈다. 회수된 팔 주변으로 흑색 기운이 뭉쳐 들었다.
이윽고 검의 형상으로 화하는 기운.
강룡검을 구현한 정천이 그대로 기운을 비틀었다. 제이검 나선수라가 나랍멸의 복부를 노리고 쇄도했다.
그것을 본 나랍멸이 뒤로 물러났다. 이윽고 그의 전방으로 출수되는 청광 덩어리.
두 기운이 충돌했다.
카드드득!
나선형으로 꼬아진 검끝이 청광을 꿰뚫고 들어갔다. 그대로 부서지나 싶더니, 청광은 강룡검을 삼키려는 듯 덮쳐들었다.
두 기운은 찌르고 삼킨 채로 상쇄되었다.
정천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보통의 강기와는 다르다.’
나랍멸의 청광은 패도적이거나 파괴적인 기운과는 거리가 멀었다.
부수는 대신 내부로 집어삼켜서는 고요히 소멸시켜 버리는 힘. 어찌 보면 산을 부수고 바다를 들끓게 하는 것보다 성가셨다.
그 와중, 나랍멸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일장을 내질렀다.
정천 역시 장법으로 맞섰다.
쾅!
조금 전보다 훨씬 큰 격타음이 울렸다. 두 사람의 몸이 각각 두 걸음씩 뒤로 밀려났다.
호각.
지켜보는 모든 이들이 주먹을 꾹 쥐었다.
그래도 두 사람이 느끼는 감정만큼은 아닐 터였다.
‘태어난 이래 제대로 싸워 본 적도 없을 텐데.’
정천은 조금 억울한 기분까지 들었다.
‘누군 생사를 수십 번도 더 넘나들어 이 경지에 이르렀는데, 놈은 그저 힘을 전수받은 것만으로도 저 정도란 말인가?’
바로 그때.
나랍멸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선대들과 내가 구백 하고도 오십 년에 걸쳐 겨우 이룩한 경지를, 저 사내는 삼십 년 남짓한 일생 동안 이룩해 냈구나.’
두 사람은 같은 순간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나랍멸이 자기도 모르게 운을 뗐다.
“당신과는 다른 식으로 만났더라면 좋았을 것 같군요.”
“개소리. 친목회라도 열자는 거냐?”
접근을 아예 차단하는 한마디. 정천의 목소리는 딱딱했다.
나랍멸도 마음을 다시 다잡았다.
타탓!
두 사람이 재차 격돌했다. 이번엔 모든 감정이 완전히 배제된, 오로지 투지와 살기만이 존재하는 격돌이었다.
콰콰콰쾅!
후두두두.
연달아 격음이 터져 나왔다. 그럴 때마다 포달랍궁 전체가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것이었다.
충격파.
두 사람의 주먹과 주먹, 뼈와 뼈가 부딪칠 때마다 그 충격이 궁 전체를 흔들었다.
마음만 먹으면 산 하나를 통째로 무너트릴 수 있는 존재들의 싸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래서야 승패가 갈리기 전에 이곳이 무너지지나 않을지 걱정이군.”
장유추가 침음하듯 내뱉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지켜보는 이들의 말문이 열렸다.
“누가 이길 거라고 생각하세요?”
“아무래도 법왕이겠죠.”
“정천이 이길 거야.”
화연란의 물음에 요태희와 백미련이 동시에 대답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잠깐 동안 서로를 훑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죠?”
“그러는 그쪽은?”
“……싸우는 법이나 감각은 조금 밀릴지 몰라도 애초에 팔룡천법왕이 밟은 경지가 보다 높고 깊으니까요. 천 년에 걸친 서장의 정수는 팔부혈선이나 진운룡조차도 넘볼 수 없는 수준이에요.”
“싸움의 결착은 경지나 수준 따위로 결정되는 게 아니야.”
“필부들의 싸움이라면 그렇겠죠.”
“잘난 이들, 대단한 고수들이라고 해서 다를 것도 없어. 당신도 황룡성이 무너지던 날 실감했을 텐데?”
요태희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저는…….”
“게다가 두 사람은 마음가짐부터가 달라.”
“예?”
“저 팔룡천법왕이라는 자,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겠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계속 주저하고 있을 거야. 자칫하면 이곳이 잘못될 수도 있으니까.”
안 그래도 포달랍궁은 지진이라도 난 듯 간헐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이 팔룡천법왕으로선 내심 신경이 쓰일 터.
“생각보다는 금방 결착이 날지도 모르겠군.”
장유추의 말이었다.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나유타가 소리쳤다.
“법왕님은 지지 않으실 거예요!”
그녀의 말에 대답해 주는 이는 없었다.
“크윽!”
나랍멸의 고개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부러진 콧대에서 걸쭉한 피가 흘러내렸다. 무자비한 주먹이 그대로 내리꽂힌 것이다.
정천의 주먹도 무사하진 않았다. 피부가 찢겨져 살점을 흘려냈다. 살점이 뜯긴 자리로 손가락의 뼈마디가 드러났다.
그럼에도 정천은 침음 하나 흘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웃고 있었다.
승기를 잡았음을 실감했기에.
“칫!”
나랍멸이 쌍장을 뻗었다. 일단은 정천을 밀친 다음 시간을 벌려는 것이었다.
그것이 실수.
정천은 물러나지 않고 나랍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쌍장이 아슬아슬하게 정천의 등을 스쳤다. 그것만으로도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등가죽이 뜯겨져 나갔다.
결코 작지는 않은 상처.
그러나 그 덕에 승기를 잡았다.
정천은 그대로 나랍멸의 몸을 들어 올렸다. 무게중심을 잡는 법조차 배우지 않았기에 나랍멸은 속절없이 들리고 말았다.
“무슨……?”
그 순간 나랍멸의 몸은 바닥에 충돌하고 있었다.
너무나 초보적인 메치기. 그러나 나랍멸에겐 그 초보적인 지식이 너무나 적었다. 어찌 보면 최적의 방법이었던 셈.
정천이 그의 몸 위로 올라탔다.
그리고 마구잡이로 주먹을 내리꽂기 시작했다.
“큭!”
나랍멸이 손을 내저으며 방어하려 했다. 내공을 끌어올려 밀어내려 했지만 그러기엔 짓누르는 정천의 힘이 너무 강했다.
역시나 기초적인 무공이라 할 수 있는 천근추로 짓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퍼퍽! 퍽!
나랍멸의 얼굴에서 연신 피가 튀었다.
무인의 싸움이라기엔 너무나 거칠고 수준 낮은 방식. 문자 그대로 진흙탕 싸움이다.
그리고 정천은 그 싸움에서 상위를 점했다.
잠시 주먹이 멈추었다. 가볍게 숨을 토한 정천이 한마디 했다.
“싸울 땐 시시콜콜 떠들지 마.”
퍽!
말을 마치자마자 다시금 얼굴에 내리꽂히는 주먹. 나랍멸의 두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크윽!”
두 손을 내저어 주먹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정천은 일말의 자비도 없이 양 주먹을 번갈아 내리찍었다. 삽시간에 얼굴을 두들기는 주먹질에 어찌 반격해야 한다는 생각마저 떠오르지 않았다.
퍼퍼퍼퍽!
핏덩이가 걸쭉하게 주먹과 이어져 나왔다. 나랍멸은 고통 속에서 이를 악물었다.
“하아압!”
궁여지책. 기합성을 토하며 체내의 기운을 모조리 발출했다.
파앙!
상위를 점했던 정천의 몸이 삽시간에 허공으로 튕겨져 버렸다. 역시 내공의 규모 자체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쳇.”
정천은 가볍게 혀를 차며 착지했다. 그사이 나랍멸이 주섬주섬 일어나고 있었다.
“헉…… 헉…….”
눈에 띄게 거칠어져 있는 호흡.
사실 타격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다. 곤죽이 되도록 맞았다지만 나랍멸쯤 되는 존재의 회복력이라면 금방 회복이 될 터.
타격 자체도 얼굴을 맞은 게 전부. 정작 중요한 내공엔 그다지 큰 손실을 주지 않았다. 상처는 이미 아무는 중이었다.
무인 대 무인의 싸움으로서는 그리 크지 않은 타격.
‘하지만 인간 대 인간의 싸움이라면?’
나랍멸은 두들겨 맞는다는 것 자체에 대한 내성이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태어난 이래 절정의 내공을 전수받고 평생을 안위 속에서 살아왔을 테니.
어느 누구의 주먹도 그를 해할 수는 없었으리라. 평소 몸에 둘러져 있는 기운만으로도 철벽과 같은 방어가 가능할 테니.
그러나 그것을 깰 수 있는 존재라면?
정천이 그런 존재였고, 강룡천마갑의 힘을 빌려 나랍멸의 철벽을 부수었다.
나랍멸은 태어나 처음으로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맞았다.
고통이란 것을 뼛속 깊이 새겼다.
그 자체만으로도 정신적으로 큰 충격일 것이다.
“허억. 헉…….”
나랍멸의 호흡이 조금은 안정되었다.
정천은 구태여 더 공격하지 않았다. 나랍멸의 눈에 새겨진 공포를 보았기 때문이다.
맞는다는 것에 대한, 육체적 고통에 대한 공포.
난생처음 느끼는 것이리라.
“기분이 어떻지, 법왕 나리?”
비웃음 섞인 목소리로 묻는 정천.
나랍멸은 그런 정천을 괴물 보듯 노려봤다.
“지금 어떠냐고 물었습니까?”
“그래. 진짜배기 싸움을 맞본 감상이 어떠신가?”
나랍멸은 입을 닫았다. 그 감상이란 말로 형언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정천이 침묵하는 나랍멸 대신 말을 이었다.
“무척 더럽지? 쓰라리고 따끔하고 찝찝할 테지. 고통이야 상처가 회복되면서 함께 사라지겠지만, 고통을 느꼈던 기억만큼은 결코 사라지지 않지.”
“…….”
“앞으로의 싸움이란 이런 것이다. 최소한 진운룡 그놈과의 싸움은 이렇겠지. 아니, 이런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거다. 내장을 흘리며 싸우게 될지 모르고 뼈가 부러져 피부 밖으로 튀어나올지도 모르지.”
나랍멸의 몸이 흠칫거렸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절로 반응하는 것이었다.
“평생 향불 속에서 썩어 온 네놈이 과연 감내할 수 있을까?”
대놓고 도발하는 정천. 하지만 도발만이 목적은 아니었다.
정천은 나름의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어차피 이대로는 써먹지도 못한다.’
나랍멸, 팔룡천법왕은 강했다. 잠재 능력만으로는 정천을 가볍게 웃돌 터였다.
그러나 그것을 다루는 능력은 애송이 수준.
갓 검을 쥔 초보 무사도 저보다는 나을 것이다.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애초에 제대로 싸울 일조차 없었을 테고, 그렇기에 힘을 다루는 법을 구태여 배울 일도 없었겠지.
그러나 싸움판이란 곳은 그런 변명이 통하는 곳이 아니다.
상대가 정천이 아닌 진운룡이었다면, 나랍멸의 목은 진즉에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나랍멸쯤 되는 존재라도 목을 치면 무사하진 못할 테지. 그리되면 수백 년의 법공이고 뭐고 한순간에 날아가 버리는 것이다.
“나를 가르치려는 겁니까?”
나랍멸이 신경질적으로 되물었다.
정천은 피식 웃었다.
“그래. 그래야 심심풀이 상대라도 될 것 같거든.”
“나를 모멸하지 마십시오.”
“말로 하는 경고야 누구든 못할까? 정말 모멸당하기 싫거든 정신 차리고 싸우시지.”
“…….”
나랍멸의 눈빛이 변했다. 약간이나마 남아 있던 부드러움이 완전히 사라졌다. 서장을 지키는 자애의 화신은 더 이상 없었다.
이윽고 그의 몸을 두른 청광이 한층 강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지금부터가 진짜라는 듯.
쿠구구구.
무지막지한 기운에 포달랍궁이 세차게 흔들렸다. 나랍멸의 심경이 바뀌었음을 모두가 느꼈다.
조금 전까지의 그와는 달랐다. 그는 더 이상 포달랍궁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전력으로 싸우려 하고 있을 뿐.
“제기랄.”
장유추가 침음을 내뱉었다.
“정천 저 멍청이가 일을 어렵게 만드는군. 싸우는 법 가르치는 건 일단 이긴 다음에 해도 늦지 않았을 텐데.”
“어쩌죠?”
화연란의 물음에 요태희가 입술을 깨물었다.
“비무장 주변에 결계를 치겠어요. 임시방편에 불과하지만 어느 정도는 버텨 줄 거예요.”
“어느 정도? 법왕 혼자라면 그렇겠지.”
백미련의 지적대로였다. 지금 기운을 끌어올리는 사람은 나랍멸 혼자가 아니었다.
저 두 괴물 앞에선 요태희의 결계조차도 유명무실할 것이다.
파지지직.
정천의 몸에서도 흑색 기운이 뿜어지듯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랍멸의 청광에 비하더라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수준.
요태희가 이를 악물었다.
“일합이나마 버틸 수 있다면 다행이겠군요.”
“법왕님!”
나유타가 소리쳤으나 나랍멸은 들리지 않는 눈치였다. 그것은 정천 역시 마찬가지.
“빠져나가지.”
장유추가 그렇게 말하며 혼절한 천승들의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입술이 터질 정도로 세차게 후려치니 몇몇 천승들이 정신을 차렸다.
그나마 타격을 덜 받은 이들이었다.
그러고도 네 명은 여전히 의식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장유추가 그들을 양 어깨에 둘씩 들쳤다.
정신을 차린 천승들은 비무장 위의 상황에 할 말을 잃었다.
“이,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오?”
“설명할 시간 없어. 자기 몸은 건사할 수 있겠지?”
백미련의 물음에 천승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얼떨떨해 하는 표정들.
백미련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고서 말할 따름이었다.
“여차하면 도망쳐. 우리도 그럴 거니까.”
‘아.’
나랍멸은 내심 탄성을 뱉었다.
기분이 좋았다.
지닌 힘을 모조리 끌어낸다는 것이 이렇게나 상쾌한 일인지는 미처 몰랐다.
여자를 처음 안아 본 청년의 기분이 이러할까.
그의 힘이란 애초에 한 인간이, 그리고 그를 둘러싼 환경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나랍멸은 항시 힘을 가두어 놓기만 했다.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왔고, 사실 그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이것은 파괴에 지나지 않았다. 저열하고 저속한 행동에 지나지 않았다.
부처의 길과는 멀어도 한참은 먼 것.
나랍멸은 그러한 행위에 청량감을 느끼는 자신을 경멸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생각은 없었다.
눈앞의 그의 적수가 서 있는 한은.
정천 역시 웃고 있었다. 온몸을 갑옷처럼 두른 흑색의 기운 속에서.
악귀의 웃음이다. 나찰의 웃음이다.
수많은 수라장을 거쳐 온 무인의 웃음이다.
‘세상에 존재하여 좋을 것이 없는 자다. 어쩌면 나 역시 그럴지도 모른다.’
서장의 수호자.
그러나 그 하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생하고 봉사하고 있던가?
나랍멸이 많은 기적을 행하기는 했으나, 과연 자신을 위해 희생한 이들보다도 가치 있는 기적이었을까?
‘나는 모르겠다.’
어쨌든 지금은 자기 성찰의 시간이 아니었다.
그저 싸워야 할 순간일 뿐.
끝도 없이 비대해지던 청광의 빛이 일순 성장을 멈췄다. 이윽고 빛은 수축하여 나랍멸의 몸에 맞는 크기로 줄어들었다.
힘을 거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집중시켜 더욱 강하게 만든 것이다. 푸른빛은 이제 백색에 가깝게 변하고 있었다.
정천 역시 마찬가지.
집중된 힘은 오른팔에 쥐어진 칼날 하나로 화했다. 그 빛깔이란 끝이 없어 보이는 흑색.
저것에 직격당하면 죽을 것이다. 아니, 죽는 걸로 모자라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서 멸해질 것이다.
나랍멸의 입이 절로 열렸다.
“그것의 이름을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멸천.”
실로 오만한 칭명이다. 그러나 그것이 크게 어긋난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 이름에 걸맞은 위력을 지니고 있을 테니.
나랍멸이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
수축된 청광은 그의 손 주변으로 원을 그리며 맴돌고 있었다.
“찰타라(刹打羅)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유일하게 내가 이름을 붙인 것이지요.”
“깜찍한 이름이군.”
“그렇게 생각합니까?”
청광 주변의 허공은 일그러지고 있었다. 수축된 기운으로 인해 왜곡되고 있는 것이었다.
인간에게 허용됐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는 힘.
아마 앞서 청광이 보였던 것과 별반 다르진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을 집어 삼켜 고요히 소멸시켜 버릴 테지.
그 위력은 멸천에 비해서도 결코 떨어지지 않으리라. 하나같이 이미 무공의 영역을 넘어선 것들이었다.
때문에 지켜보는 이들만 입술이 바싹 탔다.
‘저런 두 기운이 충돌하게 된다면…….’
요태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포달랍궁이 아니라 서장 전역의 안위를 걱정해야 할 터.
최소한 이 일대가 붕괴해 버리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미친놈들, 정말 부딪칠 생각인가?”
장유추가 광천뇌도를 쥐며 중얼거렸다.
여차하면 천뢰강림을 펼칠 생각이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게 뻔했지만, 약간이나마 위력을 상쇄할 수 있으리라.
백미련도 구절검을 구현한 상태. 그녀의 머리칼들이 칼날로 화해 있었다.
천승들도 망가진 몸이나마 내던질 기세였다.
나랍멸도 그들의 긴장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린 그였다.
‘아!’
그 순간 나랍멸은 자기혐오를 느꼈다.
‘정말 내가 미쳤었던 것인가?’
언젠가 경전에서 읽었던 구절이 생각났다. 모든 인간은 한 마리의 짐승을 몸속 깊은 곳에 키우고 있다는 이야기.
그것은 팔룡천법왕쯤 되는 존재라 해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는 짐승에게 정신을 빼앗겼었다.
나랍멸은 정천을 보았다. 그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와는 다르다.’
나랍멸이 짐승에게 정신을 뺏겼었다면, 정천은 본인 스스로가 짐승과 융화된 경우였다.
‘괴물. 저자는 다른 이들의 안위를 생각이나 하고 있을까?’
나랍멸은 두 개의 서신을 떠올렸다.
두 서신은 모두 한 가지 사실을 얘기하고 있었다. 중원을 불사르는 암염(暗炎). 이윽고 서장까지 불사르게 될 불꽃.
그러나 나랍멸이 보기엔 정천 역시 그와 다를 게 없었다.
“당신도 불꽃이군요. 시커먼 불꽃. 닿는 모든 것을 태우고 말 치명적인 업화.”
“…….”
“당신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것을 휘두르겠지요?”
“그래.”
정천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침착한 미치광이.
나랍멸로선 감당할 수 없는 존재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나랍멸의 입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졌습니다. 패배를 인정합니다.”
나랍멸의 청광이 사라졌다.
동시에 그가 유지하고 있던 살의와 투지도 완전히 사라졌다.
정천은 잠시 동안 멸천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만족한 얼굴은 결코 아니었다.
일순간 모두가 긴장했다. 만약 정천이 멈추지 않고 멸천을 휘둘러 버린다면? 그들 모두가 몸을 내던진들 막을 수가 있을까?
서장은 붕괴될 것이다.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을 것이다.
그가 검을 쥔 손을 휘두르기만 한다면…….
그때 정천이 멸천을 거두었다.
모두들 그제야 안도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떠올렸던 생각에 황당해했다.
‘어째서?’
‘왜 나는 그가 멸천을 휘두를지 모른다고 생각했지?’
우스운 일이었다.
정천은 진운룡이 아니고, 별안간 멸천을 휘두르는 둥의 미친 짓을 저지르진 않을 터였다.
그럼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가졌었다는 것. 그를 완전히 신뢰하진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저자의 힘이 두렵기에.’
나랍멸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미 사람들의 표정만으로도 내심을 짐작할 수 있는 그였다.
그건 정천도 마찬가지일 터.
그는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언제 폭발해 버릴지 모르는 화산. 그렇기에 가까운 이들조차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괴물. 그것이 바로 정천이었다.
“싱겁군.”
정천의 입이 열렸다.
“이래선 써먹지도 못하겠어. 진운룡과 맞섰다간 삽시간에 목을 내놓겠지. 아무래도 서장까지는 헛걸음을 한 것 같군.”
신랄한 말에도 나랍멸은 모멸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의 말이 아마도 사실일 테니까.
“그래도 써먹을 수 있게끔 단련할 수는 있겠지요?”
“……!”
의외의 말에 모두들 놀랐다. 더군다나 그것이 나랍멸 본인이 꺼낸 말이란 것에 더욱.
“법왕님?”
나유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나랍멸은 그녀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정천에게 말했다.
“당신이 나를 단련시키면 되지 않겠습니까?”
“내가? 너를? 왜 그래야 하지?”
“혼자서는 중원의 업화를 진화할 수 없을 테니까요. 애초에 그렇기에 서장을 찾아온 것이 아닙니까?”
정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힘을 빌려 주겠다고 생각해도 되겠지?”
“나는 팔룡천법왕.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
나랍멸, 팔룡천법왕의 눈에는 현기(賢氣)가 감돌고 있었다. 평소의 그와 같이.
나유타나 다른 이들이 알고 있는 그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