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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三章 열두 걸음 (120/146)

第十三章 열두 걸음

용왕당(龍王堂) 내 비무장이 소란스러워졌다. 일련의 무리가 안으로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독기가 오른 십이천승, 그리고 정천이 비무장 위로 대뜸 올라갔다. 다른 이들은 적당히 떨어진 거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 외의 구경꾼은 없다.

오직 그들과 당사자들만이 차륜전의 결과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상황이 이상하게 되어 버렸군요.”

팔룡천법왕이 한숨을 내쉬었다. 요태희는 뭐라 말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사과했다.

“죄송해요, 법왕님. 설마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릴 줄은 몰랐어요.”

“궁후께서 사과하실 것은 없습니다. 누구라도 이런 결과는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 이상한 내기를 물러 줄 수 없을까요? 우린 여기에 싸우러 온 게 아니라 힘을 빌리기 위해 온 것입니다.”

“그러긴 힘들 것 같군요.”

팔룡천법왕이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러나 단호하게.

“저 사내가 말을 꺼냈고 저는 그걸 받아들였습니다. 이제 와서 물린다는 것은 서로가 납득하기 힘들 것 같군요.”

“그런가요……?”

“네. 아무래도 힘들 것 같습니다.”

요태희가 재차 한숨을 쉬었다.

“두 사람 모두 다치지 않기만을 바라야겠군요.”

“궁후님……?”

팔룡천법왕이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을 했다.

“결례가 될지도 모를 질문입니다만, 혹 천승들의 실력을 얕보고 계신 것은 아닌지요?”

“당신이야말로 저 사내를 얕보는 게 아니라?”

끼어든 사람은 백미련이었다.

팔룡천법왕은 약간의 기시감을 느꼈다. 자신 앞에서 이렇게나 당당한 사람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겪게 되다니.

“여인이여, 제가 저자를 얕본다고 하였습니까?”

“그래.”

팔룡천법왕은 애써 미소를 지으려 했다.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저 사내의 실력이 출중하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 정도의 실력만으로는 천승 열둘을 모두 당해 낼 수 없을 겁니다.”

“어째서 그렇게 자신하지?”

“젊은 날의 천마 역시 저들과의 차륜전에 나선 적이 있습니다. 천승 중 일곱 분을 격파한 후에 포기하고 말았지요.”

팔룡천법왕의 눈에서 숨기기 힘든 자신감이 드러났다.

“그리고 저들은 그때보다도 더욱 강해졌습니다. 설령 진짜 마라나 악귀가 나타난다 하여도 물리칠 수 있을 정도로요.”

“당신이야말로 착각하고 있어.”

백미련의 입가에 비웃음이 스쳤다.

“저자를 옛날의 천마와 비교하다니.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큰 실수일걸?”

“…….”

콰앙!

순간 거대한 기운이 비무장 쪽에서 격발되었다. 백미련은 물론 팔룡천법왕도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강룡검은 갑주의 형태로 화하여 정천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강룡천마갑이 펼쳐진 것이다.

“으음……!”

첫 번째로 나선 천승이 침음을 흘렸다.

조금 전에 검강을 뽑아냈을 때에도 심상치 않기는 했지만, 지금의 정천은 인간의 영역 자체를 아득히 넘어선 듯했다.

‘그러나 물러설 수는 없다!’

각오를 다진 천승이 몸을 날렸다.

“타핫!”

짤막한 기합성.

정천 역시 걸음을 옮겼다.

콰앙—!

눈으로 확인하기도 힘들 속도였다. 한순간 무언가가 번뜩이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천승의 몸이 반대편 벽으로 날아가 박혀 버렸다.

후드드득.

신체의 절반이 벽에 처박혀 버린 모습. 이따금 쿨룩거리는 기침만이 생사를 알려 주고 있었다.

한 걸음으로 결착이 났다.

두 번째 천승이 비무장 위로 튀어 올랐다.

“장형(長兄)의 복수를 하겠다!”

그는 거대한 삼절곤(三節棍)을 사방으로 휘둘렀다. 정천이 피할 여지를 마련하지 않는, 마치 거미줄과 같은 결계가 정천을 가두었다.

그러나 깨트리면 그만.

정천은 한 걸음 내딛으며 주먹을 뻗었다.

쩌어억!

삼절곤의 결계가 일격으로 붕괴되었다. 타격은 그대로 삼절곤으로 흘러들어 곤 자체를 박살 내 놓았고, 나아가 천승의 체내를 진탕으로 만들었다.

“끄으으윽.”

피를 게워 내며 쓰러지는 천승.

팔룡천법왕은 자신이 크나큰 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이럴 수가…….”

정천의 도발 때문이었을까.

팔룡천법왕은 자신이 나설 필요까지도 없을 거라고, 십이천승만으로도 그를 물러나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강룡검을 보았을 때에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보통 기세가 아니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대단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았기에.

그러나 그것을 몸에 두른 순간, 정천은 조금 전까지의 그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팔룡천법왕으로서는 흉내조차 내기 힘든 내력의 응용. 수많은 수라장을 헤쳐 왔기에 가능한 일일 터였다.

콰아앙! 콰앙!

연달은 폭음이 법왕의 고막을 흔들었다.

천승들은 그사이에도 두려움 없이 비무장 위로 올랐고, 정천은 일말의 자비심도 없이 그들에게 패배를 선사했다.

일곱, 여덟, 아홉…….

그리고 마침내 열둘.

십이천승이 궤멸하기까지는 열두 걸음만이 필요했다.

“…….”

팔룡천법왕은 두 눈 가득 눈물을 흘렸다. 그러한 가운데 정신을 잃은 천승들에게 사과하고 또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모든 것이 나의 불찰입니다. 내가 그대들을 패배로 내몰았습니다.”

“그만 질질 짜고 이리로 올라와.”

정천의 목소리였다. 팔룡천법왕은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살의를 느꼈다.

“그대에겐 자비심도 없소? 저들에게 보일 일말의 동정심도 없다는 말이오?”

“누가 온실 속에서 오냐오냐 자란 대왕님 아니랄까 봐 개소리를 지껄이는군.”

정천 역시 살의를 내뿜고 있었다. 팔룡천법왕과는 정반대의 이유로.

“내가 저들을 열두 걸음으로 박살 낸 것은 저들의 무예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저들의 태도가 얼마나 진지한지 알았기 때문이고. 그렇기에 전력을 다해서 저들을 쓰러트린 거다.”

십이천승을 상대하는 데엔 굳이 강룡천마갑까지는 필요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정천은 천마갑을 펼쳤다. 그것이 저들에 대한 예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같은 무인에 대한 정천의 가치관이었다.

그렇기에 팔룡천법왕의 눈물이 가증스러웠다. 자비니 동정이니 떠드는 모습이 위선으로 비쳤다.

“올라와라, 법왕. 아니, 나랍멸이라고 불러야 하나?”

“……!”

팔룡천법왕의 눈이 기이한 광채를 토했다.

지금껏 그 누구도 부르지 않았던 이름이다. 그것을 저 잔혹무도한 사내가 꺼내어 부르고 있었다.

“그게 네 본명이라고 들었다. 아닌가?”

“……아니, 맞소. 나의 이름은 팔룡천법왕이 아닌 나랍멸이오.”

나랍멸이 비무장 위로 올랐다.

평소의 자애로운 모습을 완전히 지운 채. 투지를 담아 정천을 노려보며.

단지 그것만으로 주변의 공기가 달라졌다. 나유타처럼 연약한 소녀는 물론 장유추나 백미련조차도 숨 쉬기가 답답하다고 느꼈다.

요태희가 결계를 쳐서 모두의 숨통을 트여 주었다. 나랍멸은 그녀에게 감사의 눈길을 보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이 마당에도 한눈을 팔고 있나?”

“……!”

퍼억!

나랍멸은 세상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사실 흔들리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그의 뇌였다.

“법왕님!”

나유타의 외침에 귓등을 때렸다. 그와 함께 바닥이 눈앞으로 치솟는 게 느껴졌다.

‘아니…… 내가 바닥으로 쓰러지는 거다.’

어떠한 고수라 해도 그 본질은 결국 인간. 따라서 인간이기에 일어날 수밖에 없는 신체의 반응에는 무기력했다.

턱을 세게 치면 뇌가 흔들린다. 뇌가 흔들리면 몸의 제어력을 상실했다. 제어력을 잃은 몸은 그대로 무너질 수밖에 없다.

물론 회복력이 남다르다면 얘기가 달랐다.

“크으……!”

나랍멸은 쓰러지기 일보 직전에 겨우 멈추었다. 정천은 그 모습을 보며 나직이 웃었다.

“그렇게 나와 줘야지.”

“나는…… 그대를 용서하지 않겠소.”

“용서 따윈 바라지도 않는다.”

쿵!

정천이 두 주먹을 부딪치며 소리쳤다.

“그러니 제대로 덤비기나 해!”

* * *

“음?”

진운룡의 고개가 문득 서쪽으로 향했다. 의아함을 느낀 명신의 시선이 뒤를 좇았다.

“왜 그러십니까?”

“…….”

대답은 없었다. 명신은 재차 물어볼까 하다가 관두었다. 괜히 물어 봐야 불똥만 튀게 될 터였다.

그가 포기하고 기다리기로 결정했을 즈음이었다.

“하늘의 무게가 한곳으로 쏠렸다.”

“예?”

“강자들이 맞붙고 있군.”

진운룡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게 분노로 인한 것이라는 것은 잠시 후에야 알 수 있었다.

“건방진 것들!”

무시무시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진운룡은 하늘마저 찢어 버릴 듯한 기세로 서녘을 노려봤다.

* * *

산동성의 태산(泰山) 기슭에는 자그만 움막이 하나 있었다.

찾아오는 이도 없는데다 그런 게 존재하는지조차 아는 이가 없는 초라한 집이었다.

그곳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살았는데, 싸구려 도자기를 구워 산 아래 마을에 내다 팔아 하루하루를 연명해 갔다.

당연하게도 어느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는 삶.

그렇기에 노인은 유유자적하게 살아갔다. 그런 노인의 꿈은 죽는 것이었다.

그냥 죽는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 판단했을 때 최적이자 최고의 자리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것. 그것이 노인이 지니고 있는 유일한 꿈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 마을에 내려갔을 때, 들려오는 풍문을 통해 노인은 난세가 도래했음을 알았다.

정파의 하늘을 부수기 위해 사파의 불꽃이 치고 올라온다.

모두가 불안에 빠져 있던 그 순간, 노인은 자신이 바라고 바라던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노인은 장죽을 하나 들고서 집을 나섰다. 아마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일은 없을 터였다.

“죽기에는 좋은 날씨로군.”

여유로운 목소리로 섬뜩한 소리를 뱉으며, 한때 진천백이라 불렸던, 혹은 초대 천마라 불렸던 노인은 걸음을 재촉했다.

〖강룡검제 11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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