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二章 차륜전
명신은 약간이지만 마음의 가책을 느꼈다.
소림사의 중들은 그를 지극정성으로 대해 주었고, 그가 말했던 거짓말에 진심으로 눈물을 흘려주었다.
하기야 그들의 눈엔 젊은 나이에 아버지와 가문을 잃은 가엾은 청년만이 보였을 것이다.
그는 노잣돈까지 받고서 소림사를 떠날 수 있었다. 그리고 곧장 호북성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가 호북성에 도착했을 때엔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동호에서의 전투는 사파동맹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군웅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호북성 전역으로 불길을 이끌었다.
제갈세가가 무너지고 무당파가 궤멸당했다. 그들이 지녔던 기나긴 역사도 불꽃 아래로 파묻혀 버렸다.
세상은 어느새 변해 있었다.
더 이상 하늘에 휘날리는 것은 정파무림의 이름이 아니었다.
사파동맹의 위명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의 이름 역시.
이제 중원은 진운룡이란 이름을 되새기게 되었다. 천무맹의 초대 맹주로서가 아니라, 정파무림을 멸할 이름으로서.
“무사히 돌아왔구나.”
“네, 아버님.”
명규와 만난 것은 명신이 융중산에 도착했을 때였다. 도중에 전서구가 오갈 수 있었기에 약속 장소를 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융중산은 심상찮은 분위기였다.
멀리 어느 곳에서부터 연기 하나가 아직까지도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마도 제갈세가의 연기이리라.
명신은 고개를 돌려 아버지를 보았다. 그의 얼굴엔 피로가 가득해 보였다.
그러나 눈길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형형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버님, 무사하셨군요.”
“물론이다. 너 역시 별탈이 없는 것 같아 다행이다.”
“도착하자마자 이런 말을 하는 게 좀 이상할 수도 있겠지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명규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우리가 패했어야 하지 않느냐는 듯한 말투로구나.”
“그,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안다. 알고 있어. 이렇게까지 압도적인 승리를 취할 줄은 몰랐으리란 것일 테지.”
“그렇습니다, 아버님.”
명규는 미소를 지었다. 쓴웃음 같기도 하고 처연한 웃음 같기도 했다.
“이것이 축복인지 저주인지는 모르겠구나. 그러나 우리에겐 그가 함께한다.”
“그……라 하심은…….”
“투신(鬪神), 아니 멸신(滅神)이라 해야 할까? 아마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칭호를 갖다 붙이더라도 그를 표현하기엔 부족할 테지.”
명신은 그게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진운룡…… 말씀이군요.”
“들었더냐. 하긴 그 이름을 모르는 이는 강호 어디에도 없을 테지.”
“아무래도 그분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뛰어난 분이었던 모양입니다.”
“뛰어나다뿐이겠느냐.”
명규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그자야말로 강호의 역사를 완전히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일 테지.”
“아버님……?”
명신은 의아함을 느꼈다.
진운룡에 대한 칭송을 늘어놓는 것과 달리 명규의 표정은 전혀 기뻐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를 물으려 했을 때였다.
“왔나.”
진운룡이 부자에게로 다가왔다. 명규는 곧장 고개를 조아렸고 명신 역시 고개를 숙였다.
“다녀왔습니다.”
“음. 임무를 제대로 수행한 모양이더군.”
진운룡의 말은 그걸로 끝이었다. 명신 역시 처음부터 치하의 말 같은 건 기대도 하지 않았다.
진운룡의 시선이 곧장 명규에게로 향했다.
“다음은 숭산이다. 채비를 끝내도록.”
“당장 출발하기는 어렵습니다. 무인들 모두가 강행군으로 인해 지쳐 있습니다.”
실제로 그들의 행군은 엄청난 속도였다. 소림사를 떠난 명신이 호북성에 들어서기 전에 이미 무당파와 제갈세가를 궤멸시켰을 정도였으니.
진운룡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에 대한 대비는 해 놓았다.”
“예?”
진운룡이 손짓을 했다. 그의 뒤편에서 대기하고 있던 무인들이 걸어 나왔다.
명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들은…….”
하나같이 얼이 나가 있는 표정들. 척 봐도 온전한 상태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진운룡은 담담했다.
“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인간이기에 지닐 수밖에 없는 약점들을 제거해 놓았지.”
“약점……이라고요?”
“그렇다.”
명규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약점이 아니라 인간성 자체를 제거한 게 아닐까 싶은 모습이었다.
“정확히 어떤 비술을 사용한 건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건 아닙니다. 이들의 어디에서 인간임이 느껴진단 말입니까?”
“우습군.”
“예?”
“본좌가 이러지 말아야 할 이유라도 있나?”
명규의 말문이 막혔다. 그 답은 이미 오래전에 도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없습니다.”
“그렇다. 본좌는 너희에게 어떠한 짓을 하더라도 괜찮다. 그것을 주장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너 자신이었다.”
명신이 화들짝 놀라 명규를 쳐다봤다. 아들의 시선을 느꼈음에도 명규는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그렇습니다.”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명규였다.
“예. 제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야말로 우리에게 하늘을 줄 사람이기에, 정파의 것이던 중원의 하늘을 바꿔 놓을 사람이기에.”
“본좌는 그리할 것이다. 너희를 위해서는 아니지만.”
“알고 있습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명령을 따르도록. 네가 저들을 이끌어 선발대로서 활용하라.”
“존명.”
명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진운룡을 지나쳤다. 그가 명령을 내리자 무인들은 얼이 빠진 가운데에서도 곧바로 움직였다.
명신은 형언하기 힘든 기분으로 그 모습을 보았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거지?’
그들은 사파의 무인이다.
정정당당한 대결보다는 모략과 술수에 능통한, 그렇기에 손가락질을 당하면서도 자기 자신만큼은 당당한.
그러나 이건 아니었다.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넌 날 따라오도록.”
진운룡이 명령했다. 명신은 그 말을 따라야만 한다는 것을 실감했다.
머리가 내리는 판단이 아니었다. 본능이 그의 말을 따라야 한다며 소리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명규가 이끄는 선발대는 벌써 말에 올라 떠나고 있었다.
백 명이 채 안 되는 숫자인 만큼 정찰 이상의 임무를 할 수는 없을 터였다.
‘역시 소림사를 치는 것은 이분이 이끄는 본대겠구나.’
왠지 착잡한 심정이었다. 속았다고는 하나 그에게 잘 대해 주었던 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진운룡은 물끄러미 명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너는 놈들을 닮았군.”
“예?”
“나약한 심성이 놈들을 닮았다.”
명신은 왠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진운룡 앞에 발가벗겨진 채 서 있는 것만 같았다.
“아버님께도 자주 꾸지람을 들었었습니다. 사내놈이 배짱이 없고 유약하다고요.”
“그럴 테지. 그렇기에 이번 일을 잘 해냈는지도 모르겠군.”
“예?”
“너무 영악한 녀석을 보냈다면 놈들도 적당히 눈치를 챘을 것이다. 네가 유약하고 어리석었기에 놈들도 너의 연기에 속아 넘어간 것이다.”
칭찬인지 아닌지 아리송한 말이었다. 명신은 그냥 칭찬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이걸 칭찬으로 받아들이다니, 확실히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군.”
“…….”
“하지만 그렇기에 본좌의 말상대가 되어 줄 수 있는 거겠지.”
“예?”
진운룡은 태연히 말을 이었다.
“똑똑한 척하는 것들은 본좌의 말상대가 될 수 없다. 제깟 것들이 날고 기어 봐야 본좌로서는 우스울 따름이니까. 반면에 너처럼 어리석은 것들은 스스로의 한계를 잘 알지. 그렇기에 주제넘은 말을 하지도, 감히 본좌에게 훈계를 하려 들지도 않는다.”
“…….”
“그렇기에 본좌의 말상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무지막지한 자부심이었다. 명신은 뭐라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진운룡이 말을 몰았다. 명신도 자신에게 주어진 말에 올라 진운룡을 따랐다.
“앞으로 정파 놈들이 어떻게 행동할 거라 생각하느냐.”
진운룡의 물음에 명신은 주저했다.
“제가 어찌 그것을 알겠습니까?”
“네가 정답을 말하지 못하리란 것은 이미 알고 있다. 너 같은 범부(凡夫)의 생각은 어떠한지 알고 싶은 것뿐이다.”
“아마도…….”
잠시 고심하던 명신이 나름의 답을 내놓았다.
“남은 이들끼리라도 힘을 합치려 하지 않겠습니까?”
“역시 범부는 범부일 뿐이군.”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 없다. 네 무지함도 모두 본좌의 예상 범위 안에 있는 것이니.”
“…….”
명신의 입을 다물게 한 진운룡이 나직이 말했다.
“그들은 서로를 불신하게 될 것이다. 산산이 흩어져 자기네 영역만을 지키려 할 것이다.”
“하지만 소림사가 그 중심에 있지 않습니까?”
반문을 하고 나서 명신은 후회했다. 진운룡이 반문을 좋아하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외로 진운룡은 짜증을 내지 않았다. 명신이 반문하리란 것마저 예측한 것처럼.
“소림사는 그 자체로 정파의 상징이지. 천무맹이 존재하던 시절에도 천무맹을 견제할 수 있었던 유일한 세력이었다.”
“그렇군요…….”
“전력 자체를 천무맹에 비할 수 있다는 건 아니었다. 규모만 놓고 보면 천무맹의 십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했으니까. 다만 그 상징성이 클 따름이었지.”
“…….”
“확실히 소림사는 성가시다. 그것이 존재함으로써 정파의 바보들에게 희망을 줄 테니까. 그렇기에 본좌는 그것을 부수려는 것이다.”
명신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정파의 상징이자 심장인 그곳마저 무너진다면…….’
혼란이 세상 끝까지 치달을 것이다.
과연 그 뒤엔 무엇이 있을까?
“그러면 놈 역시 계속 숨어만 있을 수는 없겠지.”
“놈……이라니요?”
진운룡은 대답하지 않았다. 명신은 예전에도 그가 비슷한 말을 했었다는 걸 떠올렸다.
‘이 사람은 그 누군가를 증오하고 있다.’
특출한 눈치가 없더라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놈’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진운룡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하고는 했으니까.
그가 풍기는 살기는 보는 이에 심장마저 도려낼 것만 같았다.
“중원인이 하나 있었다.”
진운룡이 말을 꺼낸 것은 조금 뒤의 일이었다.
“놈은 처음엔 아무것도 아니었다. 본좌는 그런 존재가 세상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지. 관심은커녕 시선조차 주지 않아도 될 만큼 미천한 존재였다.”
“…….”
“그리고 본좌와 동료들은 한 가지 실수를 범했다. 그 실수를 메우기 위해 놈과 놈의 동료들을 이용했지. 하지만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게 놈을 괴물로 만들어 버릴 줄은.”
괴물.
천하의 진운룡이 저런 표현을 쓸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명신이었다.
진운룡의 말이 이어졌다.
“놈은 본좌와 동료들에게 복수하겠노라고 했다. 그리고 실제로 성공했지.”
“그자가…… 동료들을 해친 겁니까?”
결국 참지 못하고 명신이 질문했다. 진운룡은 가볍게 그를 흘겨보았고, 명신은 그것만으로 목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죄, 죄송합니다.”
진운룡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을 이어 갔다.
“놈은 복수에 성공했다. 본좌는 유일하게 지니고 있던 숙원을 달성하는 데에 실패했지. 그리고 다시는 시도할 수 없게 되었다.”
“…….”
“그로 인해 놈은 본좌가 있는 자리에까지 올라오게 되었다. 본좌가 우습게만 여겼던 중원인이, 본좌와 같은 눈높이에까지 오르게 된 거지.”
이자는 중원의 사람이 아니다. 명신은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대체……?’
진운룡은 항상 자신과 타인들을 구분 지어 놓았다. 구태여 중원인이란 표현을 쓰는 것은 그 때문일 터.
엄청난 자존심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인정한 그자는 대체 누구일까.’
명신의 의문과는 별개로 진운룡이 말을 이어 갔다.
“본좌는 놈을 인정했다. 미천한 중원인이 아니라 하나의 개체로서. 그리고 그 순간부터 너희들 중원인은 더 이상 개미와 같은 존재가 아니게 됐다. 본좌의 복수를 받기에 충분한 존재가 된 것이지.”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하던 명신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
진운룡은 ‘너희’라고 표현했다. ‘놈들’이나 ‘그들’이 아니라.
“그렇다면 당신께선…… 우리들 역시 죽이겠단 말씀입니까?”
적개심마저 어린 목소리. 그러나 그 질문을 듣는 진운룡은 여전히 담담했다.
“어떨 거라 생각하느냐?”
무감각한 반문. 명신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그가 마음을 바꾸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최소한 정파무림이 멸망하기 전까지는 유예가 있을 테니.’
진운룡에게 반기를 들어야 한다는 생각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정파무림보다도 사파무림이 먼저 멸망할 테니까.
“자비를…… 바랄 뿐입니다.”
명신의 떨리는 목소리에 진운룡이 처음으로 피식 웃었다.
분명한 냉소였다.
“본좌에게 자비란 게 있으리라 생각하나?”
명신은 용기를 냈다.
“그러길 바랍니다.”
“확신하지 못한다는 얘기로군.”
“당신에 대해 그 어떤 것을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진운룡의 미소가 짙어졌다.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대답을 했군.”
“…….”
“네 처우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겠다. 어쩌면 너는 본좌의 바로 옆에서 멸망해 가는 무림의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저는…….”
명신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고맙다고, 목숨을 살려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것을 막은 것은 최후의 자존심이었다.
진운룡은 미소를 지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정도는 이해해 주겠다는 듯.
자비라면 자비라 할 수 있을 터였다.
* * *
포달랍궁의 정문.
두 명의 천승은 미친놈을 보듯 정천을 쳐다보고 있었다.
“천마의…….”
“부탁을 받았다고 했나?”
“그래.”
정천의 대답은 간단했다. 두 천승의 눈매가 더욱 가늘어졌다.
“듣기로 천마는 천무맹과의 일전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그런 그가 너희를 보낼 수 있다는 말인가? 혹 그가 목숨을 잃기 전에 너희에게 명령을 내렸다는 말인가?”
정천이 피식 웃었다.
“촌동네라 그런가 소식이 늦군. 아니면 그저 문지기들이라서 얘기를 전해 듣지 못한 건가?”
“…….”
“…….”
두 천승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자신들을 한낱 문지기로 비하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감히…….”
“성역을 촌동네라 격하한단 말인가!”
그들의 몸에서 강렬한 투기(鬪氣)가 뿜어져 나왔다. 어지간하면 놀라지 않는 정천도 두 눈을 크게 뜰 정도였다.
“……문지기의 기운이 아닌데?”
“당연한 것!”
“우리는 팔룡천법왕의 안위를 지키는 십이천승이다.”
“어, 그래?”
정천은 처음 듣는다는 표정을 했다. 그러고는 이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미안하게 됐군. 어쨌든 법왕에게 우리가 왔다고 좀 전해 줄 수 있겠어?”
“애석하지만 우리가 그분께 전해 드릴 말씀은 하나뿐일 것 같군.”
“불청객이 찾아왔기에 내쫓았노라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정천은 혀를 차면서 공격에 대비했다.
그때였다. 일행 중 한 여인이 앞으로 나선 것은.
“천승들이여. 나를 기억하고 있을 텐데요?”
“음?”
“그 무슨…….”
천승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여인의 얼굴은 분명히 그들의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궁후님!”
“어떻게 이곳에……?”
여인, 요태희는 미소를 지었다. 그 광경을 본 정천이 혀를 찼다.
“이럴 거면 그냥 처음부터 나섰으면 됐잖아.”
“미안해요. 설마 저분들께서 문지기를 자처하고 계셨을 줄은 몰랐어요.”
천승들의 표정이 많이 누그러졌다. 그렇다고 정천에게 호의를 보인 것은 아니었지만.
“요사이 주변이 수선스러워 각별히 주의를 기하고 있었습니다.”
“듣자하니 동토의 분위기가 심상찮다고 하더군요.”
“네. 저희가 찾아온 것도 그 때문이랍니다.”
“그러셨군요.”
“궁후님의 방문이야 언제나 환영합니다.”
두 천승이 합장을 했다. 그러고는 조금 꺼림칙하다는 투로 덧붙였다.
“저, 그런데…….”
“저자도 일행입니까?”
그들이 말하는 ‘저자’란 물론 정천이었다. 정천은 혀를 찼고 요태희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습니다. 조금 전에 결례를 범한 것 같은데 부디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길.”
“궁후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할 수 없지요.”
천승들이 뒤로 물러났다.
“들어가 보십시오.”
“대기하고 있는 종이 법왕께로 안내할 겁니다.”
“감사합니다.”
합장을 해 보인 요태희가 안으로 들어섰다. 정천과 다른 일행도 그 뒤를 따랐다.
일행은 모두 다섯이었다. 정천과 요태희, 백미련과 화연란, 그리고 장유추가 그들이었다.
정문으로 들어서자 기암절벽 안으로 뚫려 있는 거대한 통로가 그들을 맞이했다.
중원에서도 보기 힘들 무지막지한 규모가 그들을 압도했다.
“대단하군요.”
“설마 절벽 안에 이렇게 거대한 건축물을 만들어 놓았을 줄이야.”
포달랍궁은 그 절반이 절벽에 세워져 있는 천험의 성. 저들이 성역이라 자부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해 보였다.
또 하나의 특징은 사방에서 향내가 느껴진다는 것.
향불을 일 년 내내 피워 놓기 때문인지 궁 전체에 향내가 가득했다.
얼마 걷지 않아 소녀 한 명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갈색 피부와 사슴처럼 맑은 눈동자가 인상적인 소녀였다.
“손님들을 환영합니다. 나유타라고 해요. 법왕님을 만나기 위해 오셨다고요?”
발랄한 인사에 요태희와 화연란이 미소를 지었다.
소윤에게서 바늘 같은 성깔만 제거하면 저렇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단다. 법왕님께 안내해 주겠니?”
“물론이죠. 이리로 따라오세요.”
나유타가 앞장서서 걸어갔다. 일행은 그 뒤를 따르며 성내를 살펴보았다.
사실 그다지 볼 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비슷비슷한 광경이 이어지고 있었으니까.
성내는 딱히 사치스러움이 느껴지지 않는 검소함의 그 자체였다. 듣기로 포달랍궁의 방에는 갖가지 금은보화가 가득하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뜬소문에 지나지 않는 듯싶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침묵하고 있던 정천이 대뜸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지금부터가 문제군.”
정천의 혼잣말에 화연란이 반응했다.
“어떤 게 말인가요, 오라버니?”
“법왕이란 작자. 어쩌면 무슨 수로 설득하더라도 소용이 없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설득해서 써먹게 되더라도 무용지물일지 모르니까.”
“오라버니, 그런 말씀은 좀…….”
화연란이 난처한 내색을 했다.
목소리가 작지 않았기에 앞서 걷는 나유타에게도 충분히 들릴 정도였다.
반응은 없다. 정천은 처음부터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지만.
“궁후 당신이라면 법왕이란 자와 붙어 봤을 것 같은데, 실력은 좀 어땠지?”
“그분은 싸우는 걸 즐기는 성격이 아니에요. 저 역시 싸우기 위해 그분을 찾은 적이 없었고요. 의술을 행하며 중원 곳곳을 돌던 시기에 이곳에 몇 차례 들렀던 게 전부예요.”
“그렇다면 그자의 실력은 모른다는 거군. 정말 헛걸음한 걸지도 모르겠군.”
뚝.
결국 나유타가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와 버럭 소리쳤다.
“당신! 도대체 뭐예요!”
정천은 피식 웃었다.
“뭐가?”
“자꾸만 법왕님을 나쁘게 얘기하고 있잖아요! 도대체 당신이 뭔데 법왕님을 그렇게 무시하는 거죠?”
정천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나? 네가 수작을 부려서 시간을 끌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지.”
“……!”
나유타가 흠칫 놀랐다. 다른 이들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눈으로 정천을 보았다.
“아마도 눈치챈 사람은 나밖에 없었나 보군. 하긴 그만큼 교묘했으니까.”
“그게 무슨 소리죠?”
요태희의 물음에 정천이 대답했다.
“별것 아냐. 아까부터 같은 자리만 빙빙 돌고 있더군. 성내가 미로처럼 생겨 먹은 데다 그곳이 그곳 같은지라 인식하긴 어려웠지만.”
“그런…… 대체 어째서?”
요태희의 시선에 나유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정천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어린애다운 이유일 테지. 우리와 팔룡천법왕을 만나게 하고 싶지 않다는.”
“당신들에게선 전란의 냄새가 나니까요.”
나유타가 울먹이는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특히 당신.”
그녀는 정천을 가리키고서 말했다.
“당신에게선 불길한 냄새가 나요. 너무나 불길해서 머리가 아파질 정도로요. 마치 수많은 원령을 데리고 있는 것만 같아요.”
“도사 나셨군.”
정천은 사납게 웃었다.
“제대로 봤다, 꼬마야. 하지만 이제 와서는 늦은 것 같군. 이미 우리는 이곳에 발을 들였으니까. 설령 문지기들이 막았더라도 별반 다를 것은 없었겠지만.”
“법왕님께 무슨 짓을 하려는 거죠?”
“아무 짓도 하지 않아.”
“전란의 냄새를 옮기려 한다.”
요태희와 정천이 동시에 대답했다. 나유타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 나서 말했다.
“언니는 착해요. 하지만 거짓말을 했군요. 오빠는 착하지 않지만 진실을 말했고요.”
“잘 아는군.”
정천은 차가운 눈으로 나유타를 응시했다.
“어쨌든 더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진 않다. 지금 당장 우리를 법왕에게 안내하든가, 그냥 도망쳐 버리든가 선택해.”
“……내가 도망친다면 어떻게 할 건데요?”
“깽판이라도 놓지. 성이 박살날 위기에 처하면 법왕이 안 나타나고는 못 배기겠지.”
“악당!”
나유타는 기절할 듯한 눈으로 정천을 노려봤다. 정천은 그 시선을 굳이 피하지 않았다.
“이쪽도 한가하지는 않아서 말이야.”
“악당! 악귀! 마라(魔羅)!”
“좋을 대로 떠들어. 어쨌든 바로 선택해 줘야겠는데.”
“그럴 필요 없습니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나유타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법왕님!”
그녀는 목소리의 주인에게로 쪼르르 달려갔다.
팔룡천법왕은 품에 안기는 나유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시선은 여전히 정천에게 향한 채로.
“지독한 장난을 좋아하시는군요.”
“성격이 원체 좀 모가 났거든.”
“그런 것 같군요. 하지만 처음부터 그러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만.”
“이곳 사람들은 관상 보는 게 취미인가?”
팔룡천법왕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정천의 공격적인 화법은 그로서는 무척 낯선 것이었다.
품에 안겨 있던 나유타가 소리쳤다.
“악당! 법왕님한테 그렇게 말하지 마!”
“악당이 공손하게 얘기를 할 순 없는 것 아닌가?”
“천승님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걸?”
“가만히 있지 않으면 어쩔 건데?”
처처처척.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일련의 무리가 일행을 포위했다. 단련되어 있는 서장의 병사들이었다.
그들의 앞엔 금강역사와 같은 모습의 열두 승려가 서 있었다.
“십이천승…….”
요태희가 침음을 흘렸다. 몇 차례의 견식만을 해 보았을 따름이지만 저들의 실력이 중원에서도 최고 수준이리란 것을 잘 아는 그녀였다.
“하여간 일이 꼬이게 만드는 건 중원 제일이야.”
백미련이 한숨을 뱉었다. 그녀는 이미 싸움에 대비하고 있었다.
“흥. 노부는 차라리 이쪽이 좋군.”
장유추가 웃으며 광천뇌도에 손을 가져갔다. 화연란도 조금 주저했지만 결국 열랑의 손잡이를 쥐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십이천승들은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그만.”
팔룡천법왕이 말했다. 그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천승들의 투기가 사라졌다.
요태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칫 잘못했다간 그들 모두 이곳에 뼈를 묻게 됐을지도 모른다.
팔룡천법왕의 시선은 여전히 정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당신에게선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는군요.”
“관상가 다음엔 포교사(布敎師)인가? 미안하지만 불문에 들 생각은 없는데.”
“……그 말에 제가 웃어야 하는 겁니까?”
정천은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알기로 여러분은 제게 도움을 청하고자 이곳을 방문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마교에서 보내왔던 서신의 내용대로라면요.”
“아마 그럴걸.”
“하지만 여러분의 행동은 그것과는 동떨어져 있군요. 도움을 청하려는 자들이 이런 소란을 일으키다니 혼란스럽군요.”
“거기 있는 꼬마 덕분이지.”
정천이 가리키자 나유타는 팔룡천법왕의 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그 행동이야말로 긍정이나 다름없었다.
팔룡천법왕이 쓴웃음을 지었다.
“잘못을 했군요, 나유타.”
“하지만…… 저 악당의 냄새가…….”
약간이지만 신통력을 지닌 그녀였다. 사실 정천의 이질적인 기운은 법왕 본인도 느끼고 있는 것이었고.
정천은 기이한 존재였다.
수많은 수라장을 헤치고 왔음이 분명한 귀기(鬼氣). 그것만이라면 그리 이상하진 않았으리라.
하지만 그에겐 무언가가 더 있었다.
팔룡천법왕은 그 실체가 언뜻 보이는 것도 같았다.
“마룡……이군요.”
정천의 눈이 처음으로 이채를 띠었다.
“보이는 건가?”
“어렴풋한 형태뿐입니다만, 예. 그렇습니다. 당신의 몸속엔 마룡이 살고 있군요.”
“이 손으로 베어 버렸지. 그 이후에 내 안에 똬리를 틀고 앉았더군.”
“당신은…… 평생을 마룡과 함께 지내야 할 운명이군요. 언제고 마룡에게 잡아먹힐지 모르는 불안감을 느끼며 말입니다. 동시에 그것 없이는 한순간도 살아 있을 수가 없군요.”
“그래.”
“당신은 위험한 존재입니다.”
“그런 것 같더군.”
팔룡천법왕은 우울한 눈으로 정천을 바라보았다.
“뿐만 아니라 많은 것을 짊어지고 있군요.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벗어나지 못할 것으로 보입니다.”
“…….”
“당신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얘기를 듣자니 아주 가지가지하는군.”
화아악!
정천에게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나유타는 겁에 질렸고 십이천승조차도 움찔했다.
장유추나 백미련, 요태희 역시 놀란 눈으로 정천을 보았다. 그가 이렇게까지 분노한 것은 진운룡과의 격전 이후로 처음이었다.
오직 화연란만이 애처로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팔룡천법왕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분노한다는 것은 마음속에서부터 인정하고 있다는 것 아닙니까?”
“……네 말대로라고 하지. 그래서 뭐 어쩌란 거냐? 오히려 내가 보기엔 네놈이 더 불쌍한데? 이런 쥐구멍 같은 데서 이백 년이나 썩어야 한다니.”
“…….”
팔룡천법왕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그 역시 약간이지만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정천이 차갑게 웃었다.
“너도 분노하고 있군. 자기 처지가 처량하다는 걸 인정하고 있는 건가?”
“앞으로도 당신을 좋아하게 될 일은 없을 것 같군요.”
“그거 듣던 중 고마운 소리군. 어쨌든 너 같은 녀석한테 구애나 받고 싶진 않거든.”
팔룡천법왕은 두통을 느꼈다. 이렇게까지 상대하기 피곤한 사람은 처음이었다.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여러분은 저를 설득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하지만 대화를 하면 할수록 저의 마음은 반대편으로 기우는군요.”
“난 널 설득할 생각이 없는데? 다른 사람들은 또 모르겠지만.”
팔룡천법왕은 기막힌 심정이었다.
“그럼 대체 이곳에 왜 온 것입니까?”
“무인이니까.”
파밧!
정천의 오른팔에서 강룡검이 치솟았다. 십이천승들은 하마터면 그에게 달려들 뻔했다.
흑색으로 물든 정천의 두 눈이 법왕을 노려봤다.
“한 판 붙어 보자. 너도 무인이라면 피하지 않겠지? 내가 이기면 우릴 도와라. 네가 이기면 네 배설물이라도 핥아 주지.”
팔룡천법왕은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이란 자는…….”
도무지 받아 줄 수가 없는 저속한 말투. 난폭하기 그지없는 태도. 모든 면에 있어 부처의 길을 추구하는 그와는 상극이었다.
마음속에선 그냥 무시해 버리란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저런 작자와 엮일 것 없다고, 저런 자와는 말도 섞지 말라고.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눈앞의 사내는 무시해 버리기엔 너무 거대했다.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말해.”
팔룡천법왕은 천승들을 가리켰다.
“십이천승 전원을 일대일로 제압할 수 있다면 상대해 드리겠습니다.”
“좋다.”
정천이 곧바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