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一章 서장으로
“강 건너의 불구경을 하는 것은 일견 재미있어 보이는 일이지. 하지만 불씨가 바람을 타고 강을 건너오게 되면, 그리고 이쪽마저 불사르게 되면, 더 이상 그 누구도 재미있다고 웃지 못할 거야.”
진백란이 좌중을 돌아봤다.
“본좌는 불길이 강을 건너오게 내버려 두지 않겠어. 다시는 타오를 생각조차 못하도록 불씨 하나까지 짓밟아 꺼트리겠어.”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귀도신마의 목소리였다.
고개를 끄덕인 진백란이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의 회의는 오로지 한 가지, 진운룡을 격멸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진행하겠어. 모두들 가지고 있는 의견을 허심탄회하게 얘기해 주었으면 해.”
“내가 먼저 해도 될까?”
정천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마자 멸살독마가 칵 하고 소리를 쳤다.
“이놈! 감히 천마께 예의를 갖추지 않다니!”
“우리 사이에 허례허식은 생략해도 좋잖아?”
“좋은 건 네놈뿐이다. 네놈이 천마께 까불거리는 꼴은 이 늙은이의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진 지켜볼 수 없느니라!”
“노인네 성깔 하고는.”
“이놈!”
목청 하나는 여느 청년보다도 화끈한 멸살독마였다. 내공이 실린 것도 아닌데 귀가 얼얼할 지경.
정천이 혀를 차고 있으려니 또 한 명의 노인이 운을 뗐다.
구령마존 임철형이었다.
“괜찮지 않겠는가, 독마?”
“임 형, 그게 무슨 소리요?”
“저 친구는 천마의 부군 아닌가. 저 정도의 무례쯤이야 얼마든지 괜찮다고 보네만.”
“부군이라니요?”
옹이구멍 같던 멸살독마의 눈이 대뜸 커졌다. 정천도 이게 무슨 소린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당황한 진백란이 소리쳤다.
“그, 그만 됐어! 지금은 한시가 급하니 잡담을 삼가도록 해.”
“…….”
정천이 말없이 쳐다보니 눈길을 피하는 진백란이었다. 뭔가 일이 있었구나 싶었지만 정천은 추궁하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그녀의 말마따나 한시가 급했으니 말이다.
“별건 아냐. 내가 용검대와 강룡단을 이끌고 진운룡과 결전을 벌이겠다는 거지.”
“참으로 단순 무식한 계획이로고.”
눈을 가늘게 뜬 채 혀를 차는 멸살독마였다. 정천은 어깨를 으쓱였다.
“때로는 단순한 게 가장 좋은 법이니까.”
“그대는 그렇다 쳐도, 용검대와 강룡단을 합쳐 백 명이 채 안 되는 숫자만으로 사파 무인들을 감당할 수는 없을 텐데?”
“전면전을 벌인다면 그렇겠지. 내가 택하려는 건 유격전이야.”
“치고 빠진다는 거군.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본대가 존재해야 하오.”
남궁운의 말이었다.
“아무리 대단한 무인들이라 해도 밥을 먹지 않고선 싸울 수 없는 법. 숫자가 백 명이나 되는 이상 현지 조달만으로는 무리요. 그들에게 병참을 보급할 본대가 존재해야 하오.”
“그렇겠지요, 맹주.”
진백란은 남궁운을 맹주로서 대우해 주고 있었다. 천무맹이 사라졌다지만, 그는 응당 그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게다가 신생 천무맹이 고개를 들려 하는 지금이라면 더더욱.
“그 역할을 우리 천신맹(天新盟)이 맡고 싶소.”
“천신맹?”
“천무맹을 계승할 새로운 연맹의 이름이오.”
마인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오랜 숙적의 적자가 바로 이 자리에서 탄생을 선포한 것이다.
“우선은 축하해 드려야겠군.”
비꼬는 듯한 말투로 임철형이 말했다.
“가능하다면 칼날과 피로 축하의 인사를 드려야겠소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힘들겠군. 아쉬울 따름이오.”
“그 마음만은 고맙게 받으리다.”
능숙하게 받아치는 남궁운.
너희를 죽이겠다는 말을 돌려서 내뱉은 임철형만 머쓱해졌다.
“흠. 어쨌든 속하는 반대입니다. 사파 놈들을 박살 낼 계책을 지원하는 거라면 저들이 아닌 우리 마교가 본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말은 진백란을 향한 것이나 시선은 남궁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나설 생각은 꿈에도 말라는 무언의 엄포였다.
남궁운은 한 걸음 물러나기로 했다.
“연합군을 결성함은 어떻겠소? 그대들 마교와 우리 천신맹이 말이오.”
“말도 안 되는 소리!”
이번엔 멸살독마였다.
“그런 꼴은 이 늙은이의 두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없을 것이다. 네놈들 때문에 전대 천마께서 돌아가셨음을 잊었는 줄 아느냐?”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었소. 혈선들이 그런 계략을 꾸몄을 줄을 어찌 알았겠소?”
“뭘 모르는군. 너희들 정파 놈들은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죄악이다.”
남궁운은 한숨을 뱉었다.
두 노인이 바락바락 떠드는 통에 뭘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지금 이 늙은이의 솔직한 심정은 통쾌하다는 것이다. 사파 놈들에게 무너져 가는 네놈들의 꼬락서니가 말이지. 만약 놈들이 우리의 적이 될 가능성만 없다면 응원이라도 했을 게다.”
“…….”
“그것을 유념해 두어라.”
우리는 본래 적이다. 지금은 잠시 상황이 여의치 않아 한 지붕 생활을 하고 있을 뿐.
멸살독마가 말하고픈 것은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우리가 바란 일이다.’
남궁운은 그렇게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만약 정파인들이 마교에 흡수되는 길을 택했다면 그들은 한편이 될 수 있었으리라.
어찌 보면 마교야말로 가장 접근성이 강한 집단이었으니까.
마인이 될 의지가 있다면 누구나 환영하는 곳. 그곳이 마교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남궁운과 정파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고수했다. 마지막까지 천무맹의 후예로 남을 것을 택했다.
그런 만큼 멸살독마는 그들을 적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다. 개개인에 대한 호불호를 접어 두고서라도.
“어쨌든…….”
진백란이 입을 열었다.
“정천의 계획은 일단 기억해 두지. 다른 방법은 또 없어?”
“한 가지가 있긴 합니다.”
입을 연 사람은 제갈현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그대의 말에는 특히나 기대하고 있어.”
진백란의 목소리엔 기대감이 묻어나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중원에서도 첫 손에 꼽히는 식자가 그였던 것이다.
“현재 사파동맹이라 불리는 무리의 형태는 무척이나 기형적입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단순한 전력만 놓고 봤을 때 지난 동호에서의 전투는 정파연맹이 패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패했지. 단 한 사람의 존재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말해 그 한 사람을 무너트리지 않고는 아무리 많은 사파 무인들을 죽인다 해도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그건 우리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일세.”
임철형의 일침에 제갈현은 고개를 숙였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은, 이것은 무인들의 전쟁이란 점입니다. 다수의 힘으로 한 명을 쓰러트릴 수야 있겠지만 무척 수고스럽고 힘든 일이 되겠지요.”
“일대일로 쳐야 한다는 건가?”
임철형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정천에게 쏠렸다. 그 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때 제갈현이 말했다.
“한 명이 더 있습니다.”
“뭣……?”
“역대 천마들조차도 한 수 접어 두어야 했던 인물. 중원 외에 존재하기에 모두들 잊고는 하지만 기나긴 세월 동안 실질적인 최강자로 존재해 온 인물 말입니다.”
“그 무슨 헛소리를!”
몇몇 마인들이 거부감을 드러냈다. 주로 젊은 층이었다.
반면 임철형이나 멸살독마 같은 이들은 침묵을 고수하고 있었다. 반박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진백란이 입술을 뗐다.
“팔룡천법왕 말이군.”
“그렇습니다.”
제갈현이 공손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는 서장의 수호자입니다만, 또한 중원의 수호자이기도 합니다. 서방의 오랑캐나 갖가지 무리들이 멀리 돌아 북방으로 중원을 침범해야 했던 것은, 오로지 그가 서방에 존재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에게 협력을 요구하자는 건가? 하지만 팔룡천법왕은 평생을 통해 반년 동안만 포달랍궁을 나올 수 있다고 하던데?”
“중원은 물론 서장까지 불타게 될 것이다, 그리 전하면 될 겁니다. 서장을 수호하기 위해선 무엇이든 할 인물이니까요.”
“음…….”
“그에겐 아직 한 달 가까운 시간이 남아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중원으로 와 진운룡과 일전을 벌이기엔 충분한 시간이지요.”
분명 구미가 당기는 계책이었다. 임철형과 멸살독마가 난색을 표하고 나섰지만.
“우리 마인들더러 외부인에게 손을 빌리라고 말하는 것인가? 그럴 수는 없네.”
“놈과 길고 짧음을 겨뤄 보지도 않고서 손부터 벌릴 수는 없네.”
“모조리 법왕에게 맡기자는 것은 아닙니다. 진운룡뿐 아니라 사파동맹의 무인들 역시 큰 적인 것은 마찬가지고, 아무리 팔룡천법왕이라 해도 그들 전부를 상대할 순 없을 테니까요.”
“결국 그자를 위해 판을 깔아 주자는 소리 아닌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돌려 말하면 마교에 여러 선택권이 주어지게 되지요.”
“그게 무슨 소리인가?”
“팔룡천법왕과 진운룡의 전력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을 것입니다. 어느 쪽이 더 강하느냐는 차치하고서 말이지요.”
“그야…….”
“그렇겠지.”
“두 사람의 싸움은 치열할 것입니다. 어느 한 쪽이 승기를 잡을 때쯤이면 두 사람 모두 한두 개는 훌쩍 넘을 치명상을 입은 직후겠지요. 체력 역시 고갈되어 바닥을 보이고 있을 겁니다.”
“…….”
“…….”
“그때가 되면 마교의 전력으로 진운룡을 상대할 수 있습니다. 팔룡천법왕도 머리가 있다면 적당히 물러나 주겠지요. 그것이 더 효율적인 길이라는 것을 알 테니까 말입니다.”
“그렇……겠군.”
“으음.”
동조를 하면서도 왠지 내키지 않는 기색의 두 노인이었다.
그들 역시 어지간한 계책을 접하고 펼쳐 보았지만, 제갈현이 말하고 있는 계책은 왠지 모르게 껄끄러운 느낌이었다.
아마도 외부의 힘을 이용한다는 사실 때문이리라. 마인들의 계책이란 그 무엇이 되었든 결과적으로 본인들의 힘으로써 끝장을 보는 식이었으니까.
진백란 역시 썩 내키진 않는 눈치였다.
“혹은 팔룡천법왕의 자리에 정천이 들어갈 수도 있겠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정천은 마지막까지 남겨 놓는 편이 좋을 겁니다. 어떤 변수가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일이니까요.”
“혹은 나와 팔룡천법왕이 함께 협공을 펼칠 수도 있는 거고.”
정천의 말에 제갈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그럼에도 법왕 한 명만을 진운룡에게 붙인다는 계획을 내놓은 건 어째섭니까?”
“자네의 힘은 불안정하잖나.”
제갈현은 멸천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순간적인 화력만은 진운룡이나 팔룡천법왕조차 자네를 넘볼 수 없을 테지. 하지만 그 힘은 너무 위험해. 그렇지 않나?”
제갈현이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멸천은 거대한 산을 그대로 붕괴시켜 버렸다.
팔부혈선이 열어 놓았던 ‘문’을 파괴한 것 역시 멸천이었다. 그리고 그 여파로 황룡성은 거대한 소용돌이에 삼켜져 버렸다.
정천의 잘못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불안정하며 위험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제는 그 힘을 제대로 제어할 수 있단 말인가?”
“…….”
“침묵하는 걸 보니 아닌 모양이군. 그렇다면 자네의 힘에 의존할 수만은 없네. 자네는 협공에 대해 말했지만, 자칫하면 같은 편인 팔룡천법왕을 위험에 빠트릴 수도 있을 것 같군.”
정천으로선 반박할 말이 없었다. 대체로 옳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제갈현의 허점을 지적한 사람은 진백란이었다.
“제갈 장로, 그대 역시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군요.”
“그게 무엇입니까?”
“팔룡천법왕이 과연 우리를 도울 수 있을까 하는 것.”
제갈현의 말문이 막혔다. 그녀의 지적 역시 반박하기 어려웠기에.
“천마의 말씀이 옳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얘기한 모든 것은 팔룡천법왕의 마음이 동했다는 것을 전제할 때에만 통용됩니다.”
“그렇다면 그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 우선이겠군요.”
“예. 쉽지만은 않은 일이겠습니다만.”
진백란은 정천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대가 가 주겠어?”
“……내가?”
“그래. 지금으로선 그대가 가장 믿음직스럽거든.”
정천은 미간을 찌푸렸다.
내심은 한시라도 빨리 중원으로 향하고 싶을 뿐이었다. 어서 진운룡과 결판을 내어 지긋지긋한 악연을 끊어 버리고만 싶었다.
하지만 제갈현의 말이 마음에 밟혔다.
‘자네의 힘은 불안정하잖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힘을 제멋대로 다룬 여파는 누구보다도 정천 본인이 크게 실감했으니.
게다가 약간 궁금증이 일기도 했다.
‘팔룡천법왕.’
이야기는 몇 번 들어 본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그땐 그저 전설로만 치부했었다. 너무 현실성이 없었고 멀게만 느껴지는 이야기였기에.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최소한 그를 만나 보는 것은 가능하리라.
그리고 세간의 평대로라면, 그는 정천과 진운룡과 함께 무의 궁극에 올라 있는 존재이리라.
정천은 판단을 내렸다.
“그러지. 내가 가 보겠어.”
정천의 대답에 진백란이 미소를 지었다.
“그럼 부탁할게.”
* * *
한 마리의 전서구가 포달랍궁의 문을 넘어선 것은 며칠 뒤의 일이었다.
발신지는 귀암산.
그곳이 천마신교의 본산임은 팔룡천법왕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기이한 일이구나.’
중원을 지탱하는 세 개의 하늘. 그중 두 곳에서 비슷한 시기에 서신을 보내왔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어떤 종류의 교류도 없었음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중원에 먹구름이 드리운 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팔룡천법왕은 서신을 펼쳤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서신의 논조는 정파연맹에서 보내왔던 것과 거의 일치했다.
어찌 된 일인지 필체마저 비슷했다.
두 서신이 각각 제갈현과 제갈각 형제의 손으로 쓰였기 때문이란 것은 팔룡천법왕으로서도 알 길이 없는 일이었다.
내용 역시 대동소이했다. 이번에도 팔룡천법왕의 눈길을 하나의 글귀가 사로잡았다.
사파의 암염(暗炎)은 곧 서장에까지 미치게 될 것입니다.
‘이들도 마찬가지인가.’
어쩐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들의 위기에 대해서는 말을 줄이면서 서장의 위기를 확대하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저도 읽어 봐도 되나요, 법왕님?”
어느새 다가온 나유타가 묻고 있었다.
사실 팔룡천법왕은 그녀가 이곳으로 오려고 마음먹은 시점부터 그녀가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미처 반응하지 못한 것은 마음속이 어지럽기 때문이었다.
“그러지 않는 게 좋겠군요, 나유타.”
“음. 알겠어요.”
나유타는 간단히 포기했다. 세상엔 모르는 게 좋은 법인 것들이 많다는 것을 알 만큼 영민했기 때문이다.
팔룡천법왕은 약간의 기운을 끌어올려 서신을 불살라 버렸다.
“와아.”
나유타의 감탄사를 들으며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에게 있어 너무나 간단한 일들이 다른 이에게 있어선 그렇지 않다는 것.
수십 년 전에 깨달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익숙해지기 어려웠다.
팔룡천법왕은 생각에 잠겼다.
‘그들의 태도는 불손하다. 마치 서장을 담보로 두어 나를 협박하는 것만 같다.’
가만히 있으면 서장이 위험해질 것이다. 그러니 이리 와서 우리 좀 도와다오.
차라리 그들이 솔직하게 도와달라고 했다면 마음이 동했을 것이다. 그는 세상만물을 긍휼히 여기는 팔룡천법왕이었으니까.
남겨진 시간이 한 달이 채 안 되긴 했지만, 중원을 위해 어느 정도는 써 줄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팔룡천법왕은 그들의 부탁을 거절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것 외에는 자신이 택할 길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법왕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나유타의 물음에 팔룡천법왕은 미소를 지었다.
“나유타, 당신이라면 누군가 도움을 청할 때 어떻게 하겠습니까?”
“도움이요?”
“네. 당신밖에 들어줄 수 없는 요청입니다.”
“어, 음. 그러니까요…….”
잠시 눈치를 살피던 나유타가 대답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돕고 싶어요.”
“도움을 청하는 그들의 태도가 불손하더라도요?”
“음…… 네. 그 사람들의 태도가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어렵지 않은 건 아니잖아요?”
팔룡천법왕, 아니 나랍멸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렇……겠군요.”
“음. 돌아가신 할머니께서 항상 말씀하셨거든요. 어려운 이들을 정성껏 돕는 것 부처님의 마음이라고요. 하지만 전 그렇게까진 못할 것 같아요.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해 보려고 노력할 거예요.”
“그렇군요.”
나랍멸은 자신이 저들, 중원인들을 삐딱하게 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처음엔 그들의 글귀에 큰 충격을 받았었다.
자칫하면 서장이 겁화에 휩싸일지도 모른다. 그 문장 자체가 악몽이 되어 나랍멸의 머릿속에 틀어박혔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는 문장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되었다.
심멸의 영역에 들어선 존재라는 문장이 그 의심을 부채질했다.
‘나조차도 들지 못한 영역에 들었다고?’
나랍멸은 잘난 척하기를 즐기는 성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지닌 힘이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를 알 정도는 되었다.
무려 팔백 년의 세월 동안 단련되어 온 힘. 선대 법왕들의 생과 함께 이어져 온 엄청난 양의 내공.
그것을 지녔음에도 다다르지 못한 영역이 바로 심멸의 경지였다.
그것을 깨친 이가 있다고 하니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 서신은 그 의심을 부채질했다.
저들의 말이 과연 사실일까?
그렇게 시작된 의심은 나랍멸을 사로잡았다.
과연 저런 자들을 위해 제약된 시간을 할애해야 할까 싶었다.
그리고 나유타의 대답을 들었을 때 나랍멸은 자신의 잘못을 자각했다.
‘그들의 태도는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처한 상황. 그리고 내게 주어져 있는 것들이다.’
팔룡천법왕은 부처가 아니다.
어찌 보면 부처와 가장 거리가 먼 존재라고 볼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랍멸은 부처의 마음을 갖고 싶었다.
단 한순간만이라도.
그는 두 번째 서신의 마지막 구절을 떠올렸다. 곧 천마신교로부터 사신이 올 것이라는 이야기가 적혀 있는 구절이었다.
처음엔 사신을 거부하려 했으나, 지금 그는 생각을 바꾸었다.
‘한 번쯤은 만나 봐도 좋을 것이다.’
팔룡천법왕은 나유타를 고마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나유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법왕님?”
“그냥, 고마워서 그렇습니다.”
“네? 어떤 게요?”
그녀의 물음에 조금 생각하던 팔룡천법왕이 대답했다.
“깨우침을 주었기에 고맙습니다.”
* * *
십이천승은 실질적인 포달랍궁의 최강 전력이다. 팔룡천법왕의 경우 제한된 상황에서만 힘을 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무위 역시 서장은 물론 중원에서조차 짝을 찾기 힘든 수준.
한번은 수행하던 시절의 천마 진검운이 포달랍궁에 다다른 적이 있었다.
당시 진검운은 당돌하게도 팔룡천법왕과 붙기를 원했다.
그런 비무 요청에 팔룡천법왕은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십이천승 전원을 일대일로 제압할 수 있다면 비무를 해드리겠습니다.”
진검운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십이천승 열두 명과 차륜전(車輪戰)을 벌였다.
결과는 십이천승의 승리.
엄밀히 말해 일곱 명까지를 쓰러트린 진검운이 탈진하여 포기한 것이었다.
어쨌든 그것만으로도 포달랍궁의 긴 역사 중에서도 최고 기록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진검운은 훗날 천마가 되었다.
다시 말해 천마조차도 십이천승 전원을 쓰러트릴 순 없었던 것이다.
물론 예전의 일이니 지금 다시 붙는다면 어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진검운이 얼마 전 죽음으로서 재대결이 벌어지지도 못하게 됐고.
그런 그들이 얼마 전 팔룡천법왕의 호출을 받았다. 분위기가 심상찮으니 궁을 지키는 데에 엄중을 기하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충실히 명령을 따랐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일에도 신중을 기했고 궁을 드나드는 이들 하나하나를 면밀히 관찰했다.
누구도 팔룡천법왕을 해할 수 없으리라 믿으면서도 그의 안위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진정한 충심이란 이런 것을 가리키는 것일 터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여느 때처럼 궁 앞을 지키던 두 명의 천승이 기이한 무리를 발견했다.
서장의 복색이 아닌 중원, 그것도 마교의 복색을 한 이들이었다.
그 선두에 있는 사내의 기운은 익숙한 것이었다. 어디서 느껴 보았던가를 생각하던 천승들의 눈이 한순간 번쩍 뜨였다.
‘진검운!’
‘천마, 그자인가?’
그럴 리는 없었다.
이제는 어렴풋한 기억 속의 얼굴과도 많이 달랐고, 연령을 보아도 진검운과 맞지는 않았다. 그새 환골탈태했다면 또 모를까.
아니, 애초에 진검운은 이미 죽은 인물이 아니던가.
천승들은 고개를 휘휘 젓고서 사내에게 집중했다.
사내와 그 일행은 천승들의 예상대로 궁을 향해 올라오고 있었다.
두 천승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입을 열었다.
“멈추어라.”
“그대들은 누구이기에 성지에 들어서려 하는가?”
사내가 고개를 슬쩍 들어 천승들을 바라봤다.
“땡초들이 문을 지키고 있는 걸 보니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군.”
“뭐라고?”
사내, 정천이 대답했다.
“천마의 부탁을 받아 팔룡천법왕을 만나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