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七章 복수자
“준비가 모두 끝났어.”
정천의 말에 진백란이 움찔했다.
“그 말은…… 이제 곧 중원으로 향하겠다는 뜻이야?”
“이곳에 볼일은 더 없으니까. 중원 쪽의 상황도 뭔가 심상치 않고.”
“심상치 않다니. 지금만큼 평화로웠던 적도 없으리라 생각되는데?”
곳곳에서 소모전이 일고는 있으나 지엽적인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오히려 마교 쪽 사정에 비하면 중원은 평화롭다고 봐야 할 터였다.
하지만 정천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더 수상하다는 거야. 폭풍전야가 더욱 고요한 법이니까.”
“…….”
“어쨌든 천마인 네게 보고는 해야 할 것 같더군. 얼마 후에 귀암산을 떠나게 될 것 같아. 그러니까…….”
“강룡단을 빌려달라는 거지. 알겠어. 처음부터 그러기 위해 조직한 거니까. 좋을 대로 해.”
예상외로 선선히 허락하는 진백란이었다. 정천은 약간 의외라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뭐야, 그 눈은?”
“아니. 설마 이렇게 간단히 끝날 줄은 몰랐거든.”
“그럼 뭐야. 내가 당신 바짓가랑이라도 붙들고 질질 짤 줄 알았어?”
“그런 건 아니지만.”
정천은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든 잘 됐군. 난 이만 돌아가겠어.”
“기다려.”
“……?”
“한 가지 부탁할 게 있어.”
정천은 말하라는 눈으로 진백란을 응시했다. 하지만 진백란은 섣불리 말을 꺼내기 힘든 듯 몸을 배배 꼬고 있었다.
“음. 그러니까 그게…….”
“그게, 뭔데?”
“음. 그러니까 말이지. 음. 음.”
뭐가 문제인지 본론을 꺼내지 못하고 주저하고만 있다. 정천은 이 여자가 뭘 잘못 먹었나 하고 생각했다.
“말하는 법을 까먹은 건 아니지?”
“좀 기다려 봐.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니까.”
“그러지.”
정천은 탁자에 놓인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다지 차를 즐기진 않았으나, 무료하다 보니 입안이 심심했다.
한참 끙끙거리던 진백란이 겨우 말을 꺼냈다.
“나랑 합방하지 않을래?”
정천은 입안에 머금은 차를 그대로 뿜어 버렸다.
“지금…… 뭐라고?”
“제대로 알아들었잖아.”
“아니, 그거야 그렇긴 한데…….”
정천은 경악한 눈으로 진백란을 쳐다봤다. 그 시선이 쑥스러운 듯 진백란이 눈을 피했다.
“누가 압박이라도 하든? 천마님께서 언제 비명횡사할지 모를 일이오니 지금이라도 얼른 애 하나 만들어 두소서 하고.”
“그런 건 아냐. 음. 하지만, 그러니까…….”
한참 손가락만 쳐다보던 진백란이 겨우 말을 이었다.
“아깝잖아? 그…… 혈통이란 게. 천마의 핏줄이랑 당신의 핏줄이랑. 음, 두 가지가 한데로 엮이기만 한다면 최고의 혈통이라 할 수 있을 테니.”
정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겨우 그런 이유로 굴리기엔 자기 몸이 아깝지 않아? 스스로를 좀 더 소중히 생각하는 게 좋을 텐데.”
“마교를 위해서라면 내 몸쯤은 아깝지 않아.”
“네가 그렇다면야 그런 거겠지만. 그래도 아마 별 의미는 없을걸.”
“무슨 의미야?”
정천은 어깨를 으쓱였다.
“천마의 혈통이야 대단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나의 핏줄은 그리 대단하지 않을 거라고. 애초에 내가 혈통 덕에 강해진 것도 아니고.”
“그야 그렇지만…….”
“게다가 너도 그다지 내키진 않을 거 아냐. 아무리 중원보다 개방적인 마교 사람이라지만.”
“그건 그래.”
“……너무 간단히 인정해 버리면 내 꼴이 우습잖아.”
진백란은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본좌를 바람맞힌 벌이니라.”
“농담으로라도 그런 얘기는 다시는 꺼내지 마시지요, 천마 나리.”
“본좌를 능멸할 생각이야? 본좌는 허투루 이런 말을 꺼내지 않는다.”
“예예, 그러시겠죠.”
정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미리 인사해 두지. 앞으로 다시 보게 될지 모르겠으니까. 네 아버지를 능가하는 훌륭한 천마가 되길 바라지.”
진백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훌륭한 천마라면 중원을 피바다로 물들이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렇겠군. 그냥 적당히 천마 노릇 하길 바라야겠군.”
정천은 가볍게 손을 흔들고는 돌아섰다. 진백란도 흥미를 잃었다는 듯 그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만 가. 그 멍청한 얼굴을 더 보고 있기 싫으니.”
“그러지. 잘 살아.”
정천이 멀어지고 난 뒤에야 그녀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마음속에서 떨어져 나간 것만 같았다.
정천이 숙소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미행 하나가 그의 뒤를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나름대로 기척을 지우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는 있었으나 정천의 기감 앞에선 무의미한 일이었다.
걸음을 멈춘 정천이 돌아섰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그냥 나오시지. 미행당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거든.”
“……과연 대단하군.”
모습을 드러낸 이는 주름 가득한 백발의 노인이었다. 정천으로선 처음 보는 얼굴.
“누구요, 노인장은?”
“구령마존 임철형이라 하면 알겠는가?”
“전혀.”
임철형은 쓴웃음을 지었군.
“그렇군. 하기야 이 늙은이의 이름이 중원에까지 퍼졌을 것 같지는 않았네.”
“되었고, 날 미행한 이유를 듣고 싶소만.”
“듣자 하니 천마의 자리를 스스로 거절했다고 들었네.”
또 이건가. 정천은 지긋지긋하단 표정을 지었다.
“이미 천마신교엔 천마가 있으니 내 의사는 중요하지도 않다고 봅니다만.”
“마교는 강자존일세. 천마가 아니라 해도 천마보다 강하다면, 그런 자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큰 변화가 생길 수 있지.”
“그렇다면 걱정하실 것 없을 거요. 난 곧 귀암산을 뜰 생각이니.”
다급해진 임철형의 목소리가 커졌다.
“왜 주어진 것을 취하려 하지 않는가? 마교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기회일세.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이네!”
“그렇겠지. 하지만 내가 흥미가 없으니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이오?”
“어째서 흥미가 없단 말인가? 다른 이들은 꿈조차도 꿀 수 없는 자리이거늘!”
“다른 이라는 건 노인장 본인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결국은 세상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 아니오? 내가 그를 천마의 자리에 앉혔노라고.”
임철형이 움찔했다. 정천은 차가운 눈으로 말을 이어 갔다.
“뻔한 얘기지. 천마가 될 역량은 없으니 대신 그런 역량을 지닌 자를 천마의 자리에 추대하고 싶다는 욕망. 자신의 꿈을 다른 이를 통해서라도 간접적으로 이루고 싶다는 생각.”
“……그게 나쁘단 말인가?”
“그런 의미는 아니오. 하지만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게 있다는 거지.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당사자의 의사라는 것. 그리고 내게 있어 천마의 자리란 수많은 짐을 짊어져야 할 피하고 싶은 자리일 뿐이오.”
“그런가…….”
임철형이 무거운 한숨을 토했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었네. 하지만 직접 통보를 받게 되니 그제야 실감이 되는군.”
“미안하게 됐수다. 하지만 싫은 건 싫은 거니까 어쩔 수 없지 않겠소?”
“아니, 이 늙은이에게 미안해 할 필요는 없네.”
임철형은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오히려 이렇게 되니 시원한 마음이로군. 이제는 아무런 마음의 제약 없이 천마에게 충성할 수 있을 것 같으이.”
“잘 보필해 주십쇼. 아버지를 능가할 재능의 소유자니까.”
“정말 그리되었으면 좋겠군. 우리의 오랜 숙원을 풀어 줄 수 있기를.”
정천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저들의 숙원이란 정파무림을 불사르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뭐,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처음부터 물과 기름이나 다름없는 관계였다. 개개인을 본다면 꽤 괜찮다고 할 수 있는 그들이나, 집단이 된다면 결국 정파의 적이었으니까.
그래도 그리 깊게 생각하진 않기로 했다.
‘결국은 후대의 무인들이 짊어지게 될 과제겠지.’
* * *
염각이 보낸 전서구가 소림사에 도달했다. 철운과 모용중강, 양무소와 여타 무인들은 드디어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정파무림의 최정예라 할 수 있는 오천 병력이 호북성을 향하여 진군하기 시작했다.
소문은 삽시간에 바람을 타고 중원 곳곳으로 퍼졌다. 모든 이들이 사태의 추이를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어떤 의미로는 황룡성을 습격했던 마교 병력 이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진용이었다.
십대문파의 문주들과 각 명문세가의 가주들, 거기에 그들을 보필하는 최정예 무인들과 엄선된 수하들까지.
어찌 보면 이것이야말로 정파의 저력을 보여 주는 지표라 할 수 있었다.
천무맹이 사라졌음에도 정파의 뿌리는 굳건하다는 것을 알리는 지표.
당연히 사파무림의 대응에도 눈길이 갔다. 많은 이들이 사파무림의 대처는 어떠할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그러나 사파무림의 대처는 실망스러웠다.
고작 호북성 쪽 몇 개의 문파가 대항하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오합지졸이라 할 정도까진 아니나 정파 최정예 병력에 대항할 정도는 아니었다.
정파의 군단은 사파의 저항을 가볍게 즈려밟고서 동호까지 진군해 나아갔다.
보름 뒤.
그들은 동호를 앞에 두고 염각과 조우하고 있었다.
“수고했네, 염각.”
철운의 치하에 염각은 목례만을 할 따름이었다.
“자네, 설마 우리가 오기도 전에 한바탕 한 것은 아니겠지? 우리에게도 먹을거리는 남겨 줘야지 않겠나? 하하하!”
농담조인 양무소의 말에도 염각은 미소만 지을 따름이었다.
못 본 사이에 말수가 많이 줄어들었다고 생각됐으나 모두들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저 긴장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쨌든 우릴 안내해 주게.”
모용중강의 말에 염각이 고개를 끄덕였다.
염각은 곧장 그들을 동굴 앞까지 안내했다. 보름 사이에 이미 거미줄이 철벽처럼 동굴을 두른 뒤였다.
“이곳이 놈들의 기지로 향하는 입구라고?”
양무소는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철운은 오히려 감탄하고 있었다.
“거미는 본디 한나절이면 충분히 거미줄을 치고도 남는 곤충이오. 인적이 없는 것처럼 위장하기엔 저만한 방법도 없었을 터.”
“흐음.”
“어쨌든 문제는 문제로군. 동굴 자체가 좁으니 이 병력 전체가 단번에 진입하기엔 문제가 있을 것 같소.”
“다른 입구를 찾아봄이 좋지 않겠소? 사파 놈들의 규모도 상당할 터, 놈들이라고 이곳만 이용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소만.”
“중요한 점을 지적하셨소, 모용세가주.”
철운이 곧이어 명령을 내리려 했다. 일단은 주변을 탐색하는 게 우선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내 움찔하고 말았다.
정파 군단을 포위한 채 멀리서부터 모습을 드러내는 인영들 때문에.
“응?”
양무소와 다른 이들도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꼈다. 이윽고 그들을 둘러싼 포위망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파의 무인들.
얼핏 보아도 정파 무인들의 배는 넘어 보이는 숫자였다. 이곳이 그들의 본거지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환영하오, 정파의 위선자들이여!”
중후한 목소리의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그의 손에 들린 흑색 검을 본 양무소가 소리쳤다.
“흑류검!”
“철혈권왕께서 알아주시니 영광이로군.”
흑류검 명규의 말에 양무소가 이를 갈았다.
“죽었다는 건 거짓말이었군. 네 아들놈을 미끼로 사용한 것이더냐!”
“물론이오. 다행히 그대들의 위선 덕에 내 아들은 무사한 모양이오만.”
그러했다. 염각의 서신 덕분에 명신은 정파무림으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에게 약간 노자까지 주어 풀어 준 뒤였다. 모든 것을 잊고 새 출발을 하라는 의도였다.
그야말로 쓸데없는 친절이었다.
“제기랄! 그 개자식을 끌고 왔어야 했거늘!”
양무소가 분통을 터트렸으나 이미 지나 버린 일이었다. 이제 와서 명신을 잡아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철운은 가늘어진 눈으로 명규를 응시했다.
“그대였던가? 사망한 독왕 갈월의 뒤를 이어 사파무림을 조종해 왔던 것이?”
“……그랬다면 좋았을 것이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소.”
“네놈이 대장이 아니란 말이냐?”
양무소의 외침에 명규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야 그저 장기말에 지나지 않을 뿐. 기실 우리들 모두가 그러하오.”
“그렇다면 대체 누가 네놈들을 지배한단 말이냐?”
“본좌다.”
나직한 목소리가 모두의 귓가로 파고들었다. 크지 않음 목소리임에도 그 자리의 모두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화르륵.
동굴의 거미줄이 한순간 불타 사라졌다. 그 어둠 너머에서 장신의 사내가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내딛는 걸음마다 사내의 존재감이 해일처럼 몰려왔다. 정파의 무인들은 물론 사파의 무인들마저 피부가 쭈뼛 서는 기분을 맛보았다.
어느새 그를 중심으로 부채꼴 형태의 공백이 생겨났다. 피아를 불문한 모든 무인들이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던 것이다.
사내, 진운룡이 입을 열었다.
“본좌가 저들 모두를 지배한다.”
“네, 네놈은 대체 누구냐?”
양무소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로서는 머리털 나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제 와서 더 숨길 것은 없겠지.”
그의 목소리가 천상의 것인 양 깊게 울렸다.
“본좌는 한때 정파의 주인이었으며, 천무맹의 창조자이기도 했다. 너희 모두의 무공에 깊은 가르침을 주었으며, 중원의 역사를 홀로 바꾸기도 했었지.”
“그 무슨 개 같은…….”
양무소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진운룡과 시선을 마주쳤던 까닭이다.
“본좌는 진운룡.”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청천벽력처럼 울렸다.
“초대 천무맹주이자 팔부혈선의 일원이었으며, 이제는 너희 중원인들에게 복수를 할 존재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