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五章 미끼를 풀다
고금을 통틀어 음영들의 역할은 간단하고도 분명하게 이어져 왔다.
오직 주인에게 충성한다. 주인의 뜻을 의심하지 않으며 주인의 의지를 따름에 있어 주저하지 않는다.
어떤 의미로는 반려자보다도 주인과 가까운 그들이기에, 절대적인 믿음과 충성심은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독왕을 모셔 왔던 음영이라고 다를 게 없었다. 최소한 얼마 전까지는.
그러나 그는 독특한 음영이었다. 어찌 보면 독보적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공포에 굴복하여 주인을 저버린 음영이었으니까.
독왕은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히 죽음을 맞이했다. 그를 죽인 진운룡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음영을 지배하게 되었다.
음영 역시 이상할 정도로 간단히 이를 받아들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압도적인 공포.
그것이 음영의 뼛속까지 자리 잡았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일까? 음영은 이상하게도 자괴감을 느끼지 못했다.
음영의 미덕인 충성심을 어겼음에도, 보통 경우라면 주인을 따라 자결했어야 정상임에도.
물론 그 이유 역시 진운룡이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마음대로 죽어 버리면 용서치 않겠다고. 죽음을 넘어선 고통을 선사하겠다고.
어찌 됐든 그로 인해 음영의 많은 것이 변했다. 예전이라면 하지 않았을 일도 하게 되었으니까.
의심.
음영은 새 주인인 진운룡의 의도에 의심을 품고 있었다.
‘어째서?’
음영은 호북성의 지도를 응시하며 생각했다.
‘어째서 그는 싸움을 지지부진하게 끌고 있는 것일까?’
진운룡은 강력한 지배력으로 사파동맹을 삽시간에 휘어잡았다.
그의 실력을 본 사파 군웅들은 그 누구도 진운룡에게 대들 생각을 못했다.
공포 때문이기도 했지만 기대감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자라면 해낼 수 있으리란 기대감. 정파천하를 끝맺을 수 있으리란 기대감.
‘그러나…….’
웅대하게 시작됐던 것과는 달리, 현재 정사간의 전쟁은 소모전의 연속이었다.
어느 한쪽도 치명타를 입히지 못한 채, 그저 끄나풀만 조금씩 풀어 도발만 하고 있는 실정.
크게 당한 것도 없지만 크게 한 방 먹이지도 못했다. 진운룡의 등장에 충격과 기대를 동시에 품은 군웅들로선 맥이 빠지는 일이었다.
실제로 사파동맹에서 탈퇴하려는 움직임들도 있었다. 진운룡이 무서워 저지르진 못하고 있었지만.
‘대체 왜?’
그것이 군웅들의 공통된 생각이었고, 음영마저 품고 있는 생각이었다.
‘어째서 그는 압도적인 무력을 지녔으면서도 나서질 않는 걸까?’
“아마도 본좌만이 그 답을 알고 있겠지.”
“……!”
음영은 온몸에 털이 쭈뼛 서는 느낌을 받았다. 어느새 진운룡이 그의 뒤에 와 있었던 것이다.
“어, 어떻게…….”
“무엇 말이냐. 어떻게 이곳에 왔느냐고? 내 발로 걸어서 왔다.”
발걸음은커녕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하물며 미닫이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마저.
음영은 마른침을 삼키고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람의 생각마저 읽을 줄 아십니까?”
“그럴 것 같나?”
미묘한 반문.
잠시 침묵하던 음영이 말했다.
“조금 전 말씀은…….”
“생각에 잠겨 있기에 대강 던져 본 것이다. 너 같은 족속들마저 정신을 팔게 할 사람이 있다면 본좌뿐일 테니까.”
이쯤 되면 광오하다 못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음영은 패배감마저 느끼며 고개를 조아렸다.
진운룡은 표정 없는 얼굴로 물었다.
“무엇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나.”
“별것 아니었습니다.”
“본좌에 대한 생각이 별것 아니라는 것은 곧 본좌 역시 별것 아니란 의미일 테지?”
“그, 그런 게 아니오라…….”
“말하라.”
음영은 포기하고서 입을 뗐다.
“어째서 정파무림을 제대로 공격해 들어가지 않으시는 건지 의아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후후.”
나직이 웃은 진운룡이 손을 살짝 폈다.
약간 떨어져 있던 의자가 저절로 끌려와서는 그의 등 뒤에서 멈춰 섰다.
허공섭물. 절세의 수법임에도 음영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심멸마저 선보인 괴물에게는 저 정도야 간단한 일일 테니.
“네가 그런 의문을 품을 정도면 다른 놈들은 말할 것도 없겠군.”
없다뿐이겠는가.
이미 으슥한 곳에선 심심찮게 배반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정파의 중원인들도 마찬가지일 테고.”
“그렇……습니다.”
음영은 대답하면서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이 상황 자체가 진운룡이 의도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만 어째서?’
음영이 생각이 이어지는 가운데, 진운룡이 운을 뗐다.
“그보다, 귀암산 쪽의 정보는 어찌 됐나.”
“아.”
음영은 그제야 진운룡이 찾아온 이유를 깨달았다.
“큰 변혁이 일었던 모양입니다.”
“변혁?”
“전대 천마 진검운의 딸인 진백란이 새로운 천마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상당수의 마교도들이 이에 불응, 공공연히 반기를 들고 있다고 합니다.”
“흠.”
진운룡이 턱을 괴었다. 약간은 예상외라는 표정.
“놈이 천마 자리를 꿰찰 거라 생각했는데.”
음영으로선 진운룡이 말하는 ‘놈’이 누군지 알 길이 없었다. 다만 추측건대 진운룡의 복수의 대상일 것 같았다.
“진백란에 대한 설명을 들으시겠습니까?”
“필요 없다. 기껏해야 지 아비 수준일 테지.”
역대 무인들 중 수위에 꼽혀도 손색없을 천마 진검운이다. 그러나 진운룡에게 있어선 그조차도 무시의 대상인 듯했다.
‘어쨌든 진백란은 아비의 반의반에도 이르지 못할 수준이기도 하고.’
음영은 공손한 태도로 진운룡의 말을 기다렸다.
“그 외에 특별한 소식은 없나?”
“별달리 유별난 것은 없습니다. 천마신교 전체가 혼란스럽다는 것 외에는…….”
“발톱을 감추고 있을 속셈인가.”
진운룡이 손톱을 깨물었다. 그답지 않게 초조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무언가 마음에 두고 계신 거라도 있습니까?”
“네 알 바 아니다. 건방지게 본좌에게 이것저것 캐물으려 하지 마라.”
매몰찬 대답에 음영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흥.”
진운룡은 코웃음을 쳤지만 별다른 행동을 보이진 않았다. 음영은 마음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애송이 하나 필요하다.”
“예?”
“적당히 영악한 중원인이 하나 필요하다. 나이는 어릴수록 좋겠군. 갓 성년이 된 수준이라면 제격일 것 같다. 가문이나 배경도 어느 정도 있으면 좋겠지.”
음영이 고개를 드니 진운룡이 말을 이었다.
“당장 찾아서 본좌 앞에 대령해라.”
“알겠습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음영은 일단 저지르고 보자는 심정으로 밖으로 향했다.
* * *
시린 달이 동호의 수면으로 부서져 내렸다. 동호의 뭍을 걷고 있던 명신은 한적한 전경을 돌아보며 한숨을 뱉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아버지의 말로는 독왕이 죽었다고 했다. 정체불명의 고수가 그의 자리를 꿰찼다고도 했다. 마치 그것으로 모든 설명이 충분하다는 양.
이상한 일이었다. 표독스럽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파의 군웅들이 아닌가.
그들이 졸지에 우두머리 자리를 빼앗기고도 변변한 저항조차 하지 않다니?
이유는 간단했다.
저항하기엔 너무나 거대한 존재였기 때문. 벌과 새가 날벼락에 저항할 수 없는 것처럼, 그 고수의 존재 자체가 그들의 세계를 초월했기 때문이다.
어린 명신에게 있어선 충격이었다.
독왕 갈월조차도 아득한 고수였거늘, 그런 고수를 죽이고 다른 군웅들을 압도해 버리는 자가 있다니.
처음엔 믿기 어려웠다.
그러나 몰라보게 변한 군웅들의 태도를 보고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들은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조심하고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기 좋을 대로 행동하던 그들이. 시빗거리를 찾아 힘을 표출하려고만 하던 그들이.
충격은 차츰 경외로 변했다.
명신은 얼굴조차 보지 못한 고수에 대한 동경을 키워 나갔다. 그 또래의 청년들이 으레 강자에게 끌리는 것처럼.
그자라면 이루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정파천하의 종결을.
그러나 시간은 무의미하게 흐르기만 했다.
정체불명의 고수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고, 중원은 무의미한 소모전으로 속을 앓고만 있었다.
“도대체 왜?”
소리 내어 물어봐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 목소리가 그자에게 들릴 일은 없을 테니.
명신은 뭍에 주저앉았다. 답답한 마음을 어찌해야 해소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명을 받은 음영이 밖으로 향하고 있던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음?’
먼저 발견한 쪽은 음영이었다.
호숫가를 어슬렁거리는 어린 것이 하나. 처음엔 멋모르고 주변을 지나가는 얼치기인가 싶었다.
‘혹시 모르니 제거해 두는 편이…….’
사파동맹의 기지로 향하는 동굴이 근처에 있었다. 저런 애송이에게 발견될 것 같진 않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네 멍청함을 원망해라.’
음영은 장침(長針)을 꺼내어 명신에게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호들갑 떨며 덮칠 것도 없이, 급소 중 한곳에 가볍게 꽂아 넣기만 하면 끝이었다. 아마 통증도 느끼지 못한 채 절명할 것이다.
음영이 명신과 불과 삼 장 거리까지 다가섰을 때였다.
휙!
날카로운 검격이 음영을 덮쳤다. 음영은 깜짝 놀라 장침을 대강 뿌리고서 물러났다. 습격자는 장침을 쳐내느라 치고 들어가지 못했다.
명신이 뒤늦게 깜짝 놀랐다.
“아버님!”
흑류검 명규가 그곳에 있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을 한 채로.
“암수(暗手)는 속히 모습을 드러내라. 찢어발겨 버리기 전에.”
음영은 그제야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흑류검 명규의 아들이었던가.’
달아날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이내 지웠다. 명규의 실력은 모든 면에서 음영을 앞서고 있었다.
음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명규의 두 눈이 더욱 차가워졌다.
“어떤 놈의 사주로 내 아들을 노렸는가. 대답한다면 고통 없이 죽여주지.”
“사과하겠습니다, 흑류검. 소인이 잠시 오해를 했습니다.”
“오해로 남의 집 대를 끊으려 했다는 거군. 그로 인해 소중한 목숨을 버리게 됐으니 네 무지함을 탓해라.”
“이 미천한 목숨이야 얼마든 드릴 수 있습니다. 다만 소인은 임무를 맡은 몸이니 선처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임무? 무슨 임무 말이냐. 내 아들을 죽이는 임무란 말이냐?”
“그게 아니오라…….”
음영은 모두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어째서 오해하게 되었는지는 물론, 진운룡이 자신에게 내린 명령에 대해서도.
진운룡의 명령에 대해 얘기한 이유야 간단했다. 갓 성년이 된 수준의 나이, 거기에 흑천문이라는 배경까지. 이제 보니 진운룡이 말했던 조건과 완벽히 일치했던 것이다.
“흐음.”
명규는 수염을 쓸어내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자가 왜 경험 적은 청년 무인을 찾는 것이지?”
“그것까진 소인도 모르겠습니다.”
떨떠름한 표정이 명규의 얼굴에 스쳤다.
“설마 기이한 취향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닐 테지?”
“그렇진 않을 겁니다. 이 모든 것은 정파무림을 무너트리기 위한 일환입니다.”
“흐음.”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명규가 아들을 돌아봤다.
“저자를 따라가거라.”
“아버님?”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르지. 이 기회에 그자의 속내를 캐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 너 역시 그자를 직접 대면해 보고 싶어 했고 말이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가 보아라. 그쯤 되는 자가 너를 해코지하려고 이런 수고를 할 것 같진 않구나.”
주저하던 명신도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소자가 다녀오겠습니다.”
“음.”
명규는 그제야 검을 거두었다. 음영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명신에게 말했다.
“따라오십시오, 소협.”
명신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좀 꺼림칙한걸.”
“무엇이 말입니까?”
“자넨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날 죽이려 했었잖아.”
“그야 그렇습니다만 지금은 아니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 불안하시다면 가진 무기를 모두 건네 드리면 될는지요?”
“아니, 그렇게까지 해서야 나만 겁쟁이가 될 뿐이지. 앞장서도록 해.”
두 사람은 곧장 음영의 방으로 돌아갔다.
“……!”
방을 들어서는 순간, 명신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공기부터가 다르다.’
형언하기 힘든 압박감. 폐부를 옭죄는 듯한 압력이 사방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것은 모두 한 사람에 의한 것일 터. 명신은 정신을 가다듬고서 그자를 응시했다.
진운룡은 그때까지도 의자에 앉아 있었다. 외관만 보아선 명신보다 너덧 살 정도나 더 많을 듯한 젊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알맹이는 독왕마저 능가하는 초고수일 터. 아마 저 모습도 몇 번의 환골탈태를 거친 결과일 것이었다.
“말씀하신 대로 데려왔습니다.”
음영의 말에 진운룡의 눈이 슬쩍 움직였다.
“늦었군.”
“죄송합니다.”
사과를 하면서도 내심 쓴웃음을 짓는 음영이었다. 그가 방을 나선 지 일각도 채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진운룡의 시선이 명신에게 향했다.
‘큭.’
명신은 자기도 모르게 움찔했다. 마치 대호(大虎) 앞에 놓인 생쥐가 된 기분이었다.
진운룡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제대로 골라 왔군. 똑똑하진 않지만 멍청하지도 않고, 겁대가리를 상실한 것은 아니지만 두려움 앞에 쉽게 무너지지도 않는군. 적당한 애송이를 골라 왔어.”
“가, 감사합니다.”
“좋다. 물러가라.”
“예?”
음영의 반문에 진운룡이 미간을 찌푸렸다. 음영은 기겁하여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죄, 죄송합니다!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을 기세로 나가 버리는 음영이었다.
일견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지만 명신은 웃을 기분이 나지 않았다. 그의 행동이 십분 이해가 됐던 까닭이다.
오히려 음영이 부럽기까지 했다. 그래도 기왕 이렇게 된 것, 용기를 내 보자고 생각했다.
“저를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함부로 본좌에게 말을 걸지 마라. 본좌가 허가하기 전까지는 숨소리조차 내지 마라.”
“…….”
명신은 그대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한마디라도 더 꺼냈다간 목이 달아나리란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기에.
진운룡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본좌는 딱히 너를 바란 게 아니다. 네 또래의 적당한 애송이라면 누구라도 좋았으니까.”
“…….”
“지금부터는 말하는 것을 허가하지. 이름과 소속을 말하라.”
“……명신이라 합니다. 산동성의 흑천문에 속해 있습니다.”
“흑천문이라면 명규라는 자의 문파였던가?”
명신의 눈이 번쩍 뜨였다.
“아버님을 아십니까?”
“제법 강단이 있더군.”
진운룡의 화법을 생각해 봤을 때 이 정도면 엄청난 찬사였다. 명신은 그걸 잘 몰랐기에 벙쪄 있었지만.
“갈월을 죽이던 자리에 있었다. 모두가 얼어붙어 있을 때 본좌에게 말을 걸었을 정도니 배짱 하나는 두둑하다고 봐야겠지.”
“…….”
“그래 봤자 하룻강아지 수준이지만.”
다른 이가 저런 말을 했다면 검부터 뽑아 들었으리라. 그러나 명신은 아무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진운룡의 평가가 타당하다고까지 생각됐다.
‘이자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
본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믿기지 않는 일이었지만, 명신의 몸이 머리보다 먼저 알고 있었다. 눈앞의 사내가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말이다.
진운룡이 입을 뗐다.
“네가 할 일은 간단하다. 분열된 사파동맹에서 겨우 탈출한 애송이의 역할을 하면 된다.”
“……예?”
진운룡의 손가락이 살짝 움직였다. 벽에 붙어 있던 지도의 일부가 화르륵 타올랐다.
숭산(嵩山).
소림사가 있는 곳이었다.
“정파연맹의 머저리들은 저곳에 모여 있다. 길게 이어지고 있는 소모전에 정신적으로 지쳐 있을 테지. 하루 빨리 사파동맹을 깨부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을 터.”
쿵쿵쿵쿵.
명신의 심장박동이 차츰 빨라지기 시작했다. 지금 비로소 저 괴물 같은 자가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미끼를 드리운다. 이곳의 위치를 비롯한 사파연맹의 모든 정보를 아낌없이 제공해 주도록.”
명신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정말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이다.”
“하지만…….”
명신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짜증 섞인 진운룡의 시선 때문이었다.
그저 눈을 흘기는 수준이었을 뿐인데, 명신은 수천 명의 암살자들이 자신에게 살기를 풍기는 듯한 착시를 느꼈다.
“평소였다면 네놈의 머리를 빠개 버렸을 거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네놈도 돌아가는 꼴을 이해해야 할 테니 참도록 하지.”
대단한 인심이라도 쓰는 듯한 말투. 그리고 명신은 그가 정말 인심을 썼다는 것을 체감했다.
진운룡의 말이 이어졌다.
“소모전이 중원인 전체에게 남긴 인상은 동일하다. 사파인들도 정파인들도 하루 빨리 결판을 내고 싶어 안달이 났을 터.”
명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자신만 해도 그러했으니까.
“그리고 양측의 전력은 정파 측이 앞선다.”
“예?”
자기도 모르게 반문을 한 명신이 손으로 입을 틀어쥐었다. 다행히 진운룡은 조금 전과 같이 짜증을 내진 않았다.
“무인의 숫자, 개개인의 무력, 각 문파에서 발전시켜 온 무공의 수준. 모든 면에서 정파가 앞서고 있다.”
“…….”
침묵이 감돌았다. 하지만 명신은 더 이상 놀란 표정이 아니었다.
애초에 진운룡의 말투는 패배를 앞둔 이의 것이 아니었으니.
“지금쯤 더 안달이 난 쪽은 정파인들이겠지. 붕괴한 천무맹, 언제 움직일지 모르는 마교…… 놈들은 하루빨리 지리한 전쟁을 끝맺고 싶어 할 거다.”
“그……렇겠군요.”
진운룡은 더 설명하지 않았다. 마치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처럼.
“일단 돌아가 대기하고 있어라. 곧 숭산으로 향하게 될 테니.”
* * *
명신이 숭산으로 향한 것은 이틀 뒤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