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四章 마교를 취하는 방법
“……그래서 그를 데려왔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끼리 결정하기는 좀 힘들 것 같아서 말이죠.”
진백란은 미소를 지었다.
“잘하셨어요, 귀도.”
칭찬을 들었음에도 귀도신마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기실 귀환한 후 내내 그답지 않게 어두운 표정이었다.
“무슨 문제라도?”
진백란이 묻자 그제야 귀도가 한숨을 뱉었다.
“그것이 말입니다.”
운을 떼고도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다.
“괜찮으니 말씀해 보세요.”
“흠흠. 그것이…….”
귀도신마는 결국 말하지 못하고 옆에 있는 장유추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진백란의 시선이 자연히 그에게로 향했다.
장유추는 별것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그가 ‘진짜 천마’와 대면시켜 달라고 하고 있소.”
“진짜 천마?”
“정천을 보고 싶어 하오.”
진백란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임철형은 천마를 위해 반역을 도모했다. 천마의 지배력을 굳건히 만들어 주기 위하여. 반역을 통해 도리어 반역자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기 위하여.
그러나 그가 생각하는 천마는 진백란이 아니었다. 혈연보다는 실제적인 힘을 택한 것이다.
엄밀히 말해 그의 반역은 지금도 진행 중이었다. 아마 그를 살려 둔다면 이제부턴 정천을 천마 자리에 올려놓자고 주장할 테지.
그 사실이 싫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알랑거리기나 하는 다른 이들보단 좋았다.
진백란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일어섰다.
“재미있군요.”
“천마……?”
“그를 만나겠어요. 어디에 있죠?”
귀도신마의 얼굴이 기어코 일그러졌다.
“그 노친네를 만나시겠단 말입니까?”
“만나는 거야 괜찮지 않겠어요?”
“만일 암습이라도 하려 한다면…….”
“그 정도 암습에 죽는다면 천마 자격도 없겠죠.”
자신 있는 언동. 아직 스스로를 본좌라 부를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그녀에게선 어느새 천마의 자신감이 드러나고 있었다.
조금씩이지만 성장하고 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며 끝이 보이지도 않는다.
지금까지의 천마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
귀도신마는 그런 진백란의 모습에 확실히 끌리고 있었다.
‘역시 천마는 이분뿐이다.’
정천이 강하긴 하다. 강자존이란 법칙만을 두고 본다면 강호의 그 누구보다도 천마에 어울리는 존재일 것이다.
하지만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누굴 따를 것인가 묻는다면, 귀도신마는 단연코 진백란의 손을 들어 줄 터였다.
“귀도?”
진백란의 재촉에 귀도신마도 결국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따라오시죠.”
세 사람이 방을 나섰다.
임철형은 구속당하지 않은 채로 있었다. 방에 모셔져 있는 모습만 봐선 영락없는 손님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어쨌든 스스로 투항한 자를 결박할 순 없었다. 어쨌든 그는 마교의 최고령자이기도 했으니까.
진백란이 들어서는 모습을 보는 임철형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동시에 입가에 감도는 것은 비웃음.
어리고 당돌한 여자 천마에 대한 비웃음이었다.
“오랜만이로구나, 란아야.”
대뜸 아명(兒名)을 내뱉는다. 천마가 아닌 천마의 딸로만 대하겠다는 의미.
진백란은 물러서지 않았다.
“마교 유일존에게 쓰기엔 부적절한 호명 같군.”
“흘흘. 감투 좀 썼다고 벌써부터 천마 흉내인 것이냐?”
“본좌가 천마니까.”
“아니, 천마의 자리를 잠시 빌려 쓰고 있는 대리인일 뿐이지. 그렇지 않은가?”
동의를 구하듯 귀도신마를 돌아보는 임철형. 귀도신마는 대꾸하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진백란은 탁자를 사이에 둔 채 그의 앞에 앉았다. 거칠 것 없는 태도에 임철형의 비웃음도 살짝 흐드러졌다.
“정천을 만나고 싶어 했다고?”
“그게 진짜 천마의 본명이었구먼. 이 모든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너를 네가 감당할 수 없는 자리에 올려놓은 인물.”
“그가 마교 사람이 아니란 것도 알고 있나?”
“물론. 그리고 그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지.”
진백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가 천마가 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도 사실이야.”
“천마의 자리는 단순한 호불호로 정해지는 게 아니다. 하늘이 내리는 것이지.”
“그자 앞에서도 그렇게 말할 건가? 그 정도로는 마음을 돌리기 힘들 텐데?”
임철형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사실 진백란이 직접 찾아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자신의 말에 격분하여 고초를 겪게 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됐더라도 나쁘진 않았으리라.
마교 최고령자가 모진 고문을 당한단 얘기는 그 자체로도 공분을 사기에 충분할 테니.
안 그래도 악화일로인 여론을 폭발시키기에도 좋았을 터였다.
설령 그 정도가 아니더라도, 진백란이 자신을 직접 보려 할 거라 생각진 않았다. 기껏해야 투옥시키거나 했을 테지.
그렇기에 약간은 당황스러웠다. 그녀가 던져 오는 질문들도 그랬고.
침묵이 길어지자 진백란이 재촉했다.
“왜 대답하지 않지? 기세 좋게 시작한 일이니 나름대로의 계획은 있을 텐데.”
“……물론이다.”
“그렇다면 말해 봐. 그를 어떻게 설득할 생각이지?”
“그가 지닐 수 있는 것의 거대함을 설명하겠다. 마교의 거대함을, 우리가 줄 수 있는 충성의 거대함을 설명할 것이다.”
“소용없을걸.”
간단히 단정 짓는 진백란의 말에 임철형이 눈살을 찌푸렸다.
“해 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이다.”
“그렇겠지. 그리고 이미 본좌가 해 보았거든.”
임철형의 눈동자가 기어코 흔들렸다.
“이미 해 보았다고?”
“그래. 그에게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지. 천마신교의 전력 전부를, 황제조차 누리기 힘들 호사와 갖가지 재물을. 창고에서 기다리고 있을 수많은 보물과 비약들을.”
“…….”
“그는 모두 흥미 없다고 했어. 몇 번을 얘기했지만 의미가 없었지.”
“거짓말을…….”
“거짓말이었다면 좀 더 그럴싸하게 했겠지. 게다가 그가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 아닌가? 애초에 그가 천마의 자리를 원했다면 날 도울 필요도 없이 자신이 천마제전에 나섰을 거야.”
“음…….”
임철형이 침음을 흘렸다.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라면 얼마든지 그를 설득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니, 못하게 되더라도 시도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노부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럴 거라면 혈사문과 패신림의 수뇌부를 살려 두는 편이 좋았을 텐데?”
굳이 이런 소동을 일으켜 그들을 희생시킬 필요는 없었다.
차라리 어둠 속에서 조용히 정천과 접촉하는 편이 나았을 터.
임철형의 대답은 간단했다.
“놈들은 머저리들이니까. 아직까지도 자신들이 패권을 쥘 수 있으리라 착각하고 있었지. 살아서 좋을 게 없는 놈들이었다.”
“그랬군. 어쨌든 정천은 흔들리지 않을 거야. 당신이 무엇을 제시하든 모조리 무시해 버릴걸.”
“그거야 해 보지 않고는…….”
“그래서 한 가지 제안할 게 있어.”
임철형이 표정을 구겼다.
“노부의 말을 전혀 듣지 않은 것이냐?”
“그럴 리가 있겠어요? 하지만 그게 무의미할 게 뻔하기에 다른 길을 알려 드리겠다는 거예요.”
그녀의 말투가 바뀌었다.
고압적인 천마의 그것에서 아직은 앳된 여인인 진백란의 것으로.
“선배님이 개인의 사욕만으로 움직였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기에 이런 제안을 하는 겁니다. 선배님이 어떤 노력을 하든 그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요.”
“으음…….”
“저 역시 정천이야말로 천마의 자리에 제격이리라 생각했어요. 그에게 몇 번 이야기해 보기도 했죠. 하지만 어떤 자리가 됐든 본인이 싫다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어요?”
임철형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진백란의 말이 본심에서 나왔음을 느낄 수 있었기에.
“그래서 절충안을 내놓고자 해요. 선배도, 저도 만족할 수 있는.”
“절충안이라고?”
“그렇습니다.”
진백란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서 말을 이었다.
“그의 후계자를 대신 드리죠.”
“후계자라니?”
“그의 씨앗을 남겨 드리겠단 말이에요.”
임철형의 입이 벌어졌다. 그뿐 아니라 귀도신마와 장유추 역시 놀란 채 진백란을 쳐다봤다.
“씨앗이라니, 그건…….”
“마교가 필요로 하는 건 그의 재능이 아닌가요? 본인자체를 취할 수 없다면 그의 재능의 파편이라도 취해야겠죠.”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세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서로를 쳐다봤다.
겨우 정신을 차린 임철형이 운을 뗐다.
“이 늙은이더러 수십 년을 더 기다리라는 얘긴가?”
“이십 년이면 족합니다. 그 아이가 저를 뛰어넘는 순간 천마의 자리쯤은 얼마든 내놓을 수 있어요.”
“으음. 이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네만…… 이미 그와 접했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이런 얘기를 할 수도 없겠죠.”
거짓말이다. 귀도신마와 장유추는 그 사실을 내색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결과적으론 무의미한 시도였다. 임철형은 두 사람을 돌아보지도 않았으니까.
“으음…….”
침음을 뱉는 임철형.
설마 진백란이 저런 제안을 건네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아시겠지만 지금의 제 무예는 이전보다 월등히 나아졌어요. 그래 봐야 선배의 마음에 차지는 않겠지만요. 어쨌든 이 성취는 모두 정천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
“다시 말해, 제게 해 줄 수 있는 거라면 자식에게도 해 줄 수 있다는 의미죠.”
“그렇……겠지.”
“게다가 그 자식은 천마와 정천의 피를 모두 지닌 존재죠. 내재된 역량에 한해선 역대 어느 무인보다도 뛰어날 겁니다.”
임철형은 우물쭈물 대꾸하지 못하고 있었다. 꼭 그렇게 되리란 법만은 없다고 얘기할 수도 있었지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진백란의 제안이 머릿속을 온통 휘젓고 있었던 까닭이다.
‘역대 최고의 자질을 지닌 천마가 태어난다.’
당장이 아닌 미래를 내다본 한 수였다. 만일 그것이 실현될 수만 있다면…….
‘마교는 다시 한 번 변혁할 수 있다.’
이미 정천으로 인해 많은 것이 변했다. 마교는 지금도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그것이 한 번 더 격변하게 된다면…….
‘그러나 너무 먼 미래의 일 아닌가.’
정천을 천마로 추대할 수만 있다면 굳이 미래의 변혁이 필요하지도 않다.
그의 힘 아래 마교 전체가 집결할 수만 있다면, 이번에야말로 중원에 군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정천은 천마가 되려 하지 않는다.
단순히 진백란의 말뿐이긴 했으나, 지금까지의 행보를 종합해 봐도 다른 결론이 나오진 않았다.
그저 그의 힘이 아쉬워 집착을 놓지 못하고 있을 뿐. 결국은 이 역시 미련이었다.
임철형은 긴 시간을 침묵했다. 진백란은 끈기를 놓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오랜 장고 끝에 그의 주름 가득한 얼굴이 진백란을 향했다.
“한 번만이라도 그자를 만나 볼 순 없겠나?”
“얘기는 해 보겠어요.”
대꾸를 한 진백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모든 일이 잘 풀렸다는 듯.
“그를 만나 보고도 미련을 놓지 못하겠다면 저로서도 어쩔 수 없겠죠. 그 후엔 놓아드릴 테니 반역을 꿈꾸든 여론을 선동하든 마음대로 해도 좋습니다.”
“…….”
“하지만 마음이 바뀐다면.”
“전력을 다해 널 돕겠다.”
진백란의 입가에 아주 잠깐 미소가 스쳤다.
“그럼.”
그녀는 고개를 살짝 조아리고 방을 나섰다. 아마도 임철형에 대한 최후의 예우가 될 터였다.
임철형은 그녀가 멀어지는 동안에도 내내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의 방에서 어느 정도 멀어진 직후, 귀도신마가 모깃소리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뭐가 말이죠?”
“그 늙은이한테 뻥치셨잖습니까.”
진백란이 해맑게 웃었다. 장난을 성공시킨 어린 소녀처럼.
“제대로 걸려든 것 같죠?”
“어째서 그런 거짓말을…….”
“간단해요. 그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으니까요.”
“그야 그렇겠지만, 후에 거짓말인 게 발각된다면 문제가 될지도 모르는데요.”
“그렇게 되더라도 상관없을 거예요.”
진백란은 확신했다.
“그땐 이미 내 지배력이 공고하게 된 다음일 테니까요. 설령 임 노괴가 속았다는 걸 깨닫게 되더라도 할 수 있는 건 없겠죠. 일단 그때까지 살아 있을 때의 얘기겠지만요.”
“으음.”
귀도신마는 내심 감탄했다.
영악하다. 전대 천마였던 아버지와 같은 위압감은 없지만, 대신 그녀에겐 상황을 조종할 정도의 수완이 있었다.
“그보다도…….”
진백란은 장유추에게 시선을 옮겼다.
“장 장로,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여 주셔야겠어요.”
“움직이다니?”
“내가 괜히 그대와 제갈 장로를 장로 자리에 앉힌 건 아니에요. 모두 이때를 위한 거였죠.”
기실 진백란에 대한 반대 여론의 이유 중엔 두 사람도 큰 비중을 차지했다. 아무리 강자존의 마교라 해도 정파인을 장로 자리에 앉힌다는 파격은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럼에도 진백란은 그것을 강행했다.
처음엔 기반이 전혀 없기에 택한 궁여지책인 줄 알았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그것도 아닌 듯하군.’
진백란의 말이 이어졌다.
“사흘 뒤 장로회의가 있다고 들었어요.”
“……그랬던가?”
장유추의 말에 귀도신마가 혀를 찼다.
“이 몸도 그렇다만 네놈이야말로 장로로서의 자각이 전혀 없는 놈이구나. 얼마 전에 서신이 닿지 않았더냐.”
“글쎄. 시종이 무언가 종이쪼가리를 가지고 오긴 했었다만.”
“쯧쯧.”
귀도신마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피식 웃은 진백란이 설명했다.
“천마신교의 현 장로는 모두 일곱 명이에요. 본디 마교칠절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구성된 이들이니까요. 다시 말해 두 분과 제갈 장로를 제하고도 네 명이 더 있다는 얘기죠.”
“음.”
“그 네 명을 설득해 주셔야겠어요. 어차피 그들이 장로회의를 열려는 의도도 뻔한 거니까요.”
극소수를 제외하곤 지지 기반이 전무한 진백란이다. 장로회의 역시 그녀를 견제하기 위한 수작일 터.
장유추가 딱딱하게 대꾸했다.
“남을 설득하거나 하는 일은 그다지 자신이 없소만.”
“누구보다도 어울릴 거라 생각하는데요?”
진백란은 장유추의 허리춤에 걸린 광천뇌도를 가리켰다.
“무인이 무인을 설득하는 데에 세 치 혀는 필요하지 않겠죠.”
장유추의 입가에도 결국 사나운 미소가 걸렸다.
“진짜 천마가 되어 가시는군.”
“칭찬이죠, 그거?”
“물론이오. 잠깐이지만 당신에게 경의마저 느꼈을 정도니까.”
승리하기 위해선 어떠한 수단도 가리지 않는다. 장유추는 그 사실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것을 알기에 진백란은 마주 웃었다.
“가끔 보면 장 장로야말로 마교에 어울리지 않나 싶어요.”
* * *
사흘 뒤.
귀암산 남부의 천휴담(天休潭)에 네 개의 인영이 나타났다.
일곱 장로 중 장유추와 귀도신마, 제갈현을 제외한 네 사람이었다.
각기 일장로, 이장로, 삼장로, 사장로로 불리는 그들이었다. 아직 자리에 나오지 않은 장유추와 귀도신마, 제갈현이 각각 오, 육, 칠장로의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
본디 마교 장로회의의 영향력은 천무맹과 달리 그다지 크지 않았다.
유일존인 천마의 자리는 그 무엇보다도 분명했고, 그 아래를 지키는 철절삼마와 마교칠절의 위치 역시 확고부동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난 천무맹과의 일전이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천마가 죽었고 철절삼마 중 두 사람이 사망했다. 마교칠절 역시 궤멸하다시피 한 상태.
그 와중에 장로들 중 세 사람이 비명횡사했으나, 나머지 네 장로의 위치는 공고해지게 되었다.
그나마 이들과 대적할 세력은 혈사문과 패신림이었으나, 지난 천마제전을 기점으로 몰락해 버리고 말았다.
장로들은 이를 기회로 삼았다.
무력에서 밀리는 만큼 머리를 굴려야 했다. 중소규모의 무력 집단과 결탁, 그들에게 자리를 약속하는 대신 협력을 약속받았다.
그 결과 현재 천마 진백란을 견제할 수 있는 위치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물론 이들이 유장천이나 녹운담처럼 야망이 큰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랬다면 임철형이 들고 일어났을 때 동조했을 테지.
장로들은 현실을 잘 알았다. 아무리 애송이라고 해도 천마는 천마. 그녀와 대적해서 좋을 게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들이 실질적으로 바라는 것은 협상.
적당히 진백란에게 협력할 것을 약속하며 많은 것을 뜯어낼 생각이었다.
‘천마는 많은 것을 남겼지.’
‘각종 무공비급과 절세의 병장기들, 나아가 갖가지 영험을 지닌 내단과 영약까지.’
‘그중 일부만 뜯어낼 수 있어도 우리의 독문무공을 크게 발전시킬 수 있을 터.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 대에는 천마를 능가할 수 없더라도 후대에는 능가할 수 있을 것이다.’
미래를 내다본 투자.
장로들의 계획이란 그것이었다.
“그런데…….”
반백의 애꾸눈인 일장로가 불편한 듯 말을 꺼냈다.
“이자들은 약조한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나타날 생각을 않는군.”
“우리를 무시하려는 것은 아닐 테지?”
이장로의 말에 삼장로가 끼어들었다.
“그렇진 않을 걸세. 우리 세력을 무시할 수 없음을 모를 정도로 진백란이 멍청하진 않을 테니.”
“말을 가려서 하게. 미덥지야 않지만 어쨌든 그녀는 천마일세.”
“흥. 운이 좋았을 뿐이지. 어느 누가 그 계집을 천마로 인정하는가?”
삼장로의 비웃음에 모두들 쓴웃음을 지었다. 상황이 꼬여 그녀가 천마로 추대되었지만 기실 이를 인정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유장천과 녹운담도 얼간이들이지. 설마 욕심에 눈이 멀어 동귀어진해 버릴 줄이야.”
“그 멍청이들이 처신만 제대로 했어도 이런 사태가 일어나진 않았겠지.”
“차라리 천마제전을 새로 여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네.”
“안타깝지만 그러긴 힘들 것이네. 어찌 됐든 새로운 천마는 진백란 그것이니 말일세.”
말을 잇던 일장로가 피식 웃었다.
“뭐, 불행한 사고로 천마께서 요절이라도 한다면 모르겠지만 말이지.”
다른 장로들도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싸움이란 비무장이나 전장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자기 집 안방에서 더욱 치열하게 벌어지는 법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천마신교는 기이한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모두가 천마에게 충성했으나, 동시에 모두가 천마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전대 천마 진검운이 천마전 내에서 암습당한 기록은 백여 차례에 이른다.
공식적인 것만 이 정도고, 비공식적으로는 그 몇 배에 이르는 암살 기도가 있었다.
물론 그 모든 시도는 천마신교 내 세력들에 의한 것.
배후가 밝혀져 멸문당한 종파도 수십이었으나, 치밀하게 꼬리를 감춘 종파도 상당수였다.
어쨌든 천마는 그 와중에도 살아남았다. 그리고 자신이 암습당한 것에 대해 크게 분노하거나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절대적인 강함이란 바로 그런 것.
그렇기에 마교인들은 천마를 공경했다. 그리고 그와 별개로 천마를 죽이기 위해 갖가지 시도를 했었다.
그 정도에서도 살아남아야만 자신들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다는 것처럼.
“진검운은 완벽한 무인이었다. 그 누구도 그에게 범접할 수 없었고, 그 누구도 그에게 대적할 수 없었지. 그를 죽이는 것은커녕 약간의 해라도 입힐 수 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였지.”
일장로의 하나뿐인 눈이 희번덕거렸다.
“하지만 진백란 그 애송이도 그러할까?”
“싱겁게 죽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 같군.”
“모르는 일이지. 자기 부하들의 도포 자락에 숨으려 할지도 말이야.”
장로들의 비웃음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사이로 짓궂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니면 그런 멍청한 짓을 작당하는 얼간이들을 쓸어버리려 선수를 칠지도 모르고 말이지.”
“……!”
장로들의 얼굴이 경직됐다. 낯선 목소리였다.
굵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최소한 도포 자락에 숨으려 할 것 같지는 않군. 그 정로도 순진한 것 같진 않으니.”
귀도신마와 장유추였다. 그들이 어느새 네 장로의 뒤에까지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장로들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나름대로 무예에 자신이 있는 그들이었다. 그렇기에 멍청할 정도로 허물없는 이야기를 나눴던 것이고.
감히 어느 누가 그들의 감각을 뚫고 들어와 접근한단 말인가?
그러나 두 불청객은 그걸 해냈다. 최소한 장로들보다 한 배분은 앞서는 무인들이라는 의미.
마교칠절인 귀도신마가 자신들보다 앞서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최소한 얼마 전까진 이 정도까지 격차가 나진 않았었다.
‘그사이에 더욱 실력이 발전했단 말인가?’
‘말도 안 된다. 우리가 기척을 느끼지 못할 정도의 실력이라니.’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린 거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분명한 것은 자신들이 좋지 않은 상황에 빠졌다는 것.
이래서는 괜히 뻗대서 좋을 게 없다. 장로들은 재빠르게 시선을 나누었다.
“흠흠.”
“이, 이거 결례를 한 것 같소이다.”
“요즘 돌아가는 상황이 하도 답답하여 마음에도 없는 얘기를 하고 말았소.”
깍듯하기 그지없는 정중한 사과.
귀도신마는 쯧 하고 혀를 찼다.
“배짱도 없는 것들 같으니. 금세 사과할 것이면 무엇하러 그리 떠들어 댄 것이냐?”
“흠흠. 우리가 실수를 한 것 같소. 그러니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구려.”
“미안하단 한마디로 입 싹 씻고 넘어가려고?”
장로들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러나 일장로가 시선을 보내어 그들을 주의시켰다.
일장로는 이어서 정중한 자세로 예를 표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이까?”
정중한 태도에 귀도신마의 말문이 턱 막혔다.
‘이런 젠장. 차라리 배 째라고 나오면 편할 것을.’
허례허식을 나누는 것보다 주먹질을 나누는 데에 익숙한 그였다. 그런 그에게 있어 이런 상황은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그런 귀도신마를 구원한 사람은 제갈현이었다.
“마음에도 없는 사과는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과를 들어야 할 대상은 우리가 아닌 천마님인 것 같군요.”
일장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어떤 의미로는 귀도신마나 장유추보다 껄끄러운 인물이 나타난 것이다.
‘전대 천무맹의 군사…….’
계교를 부리는 데 있어선 장로들보다 한 수 위일 터인 인물.
사실 장로들이야 결국 약간 더 영약한 무인 수준일 뿐이니, 여느 학자들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제갈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천마는 저자를 앞세워 우리와 협상하려는 것인가?’
‘꽤나 힘겨운 싸움이 되겠군.’
장로들의 생각은 그러했다. 진백란이 알았다면 어이가 없어 웃었을 것이다.
헛기침을 한 일장로가 운을 뗐다.
“어쨌든 본론으로 들어가고 싶소만.”
“그러시지요.”
제갈현의 대답. 일장로는 목소리를 살짝 낮추었다.
“어차피 피차간에 알 것 다 알고 있으니 쓸데없는 말은 뗍시다. 우리는 천마가 바라는 것을 가지고 있고, 천마 역시 우리가 바라는 것을 가지고 있소.”
“천마께서 네 장로분께 바라는 것은 충성심밖에 없을 겁니다.”
“허, 알 만한 사람이 왜 그러시오? 서로가 바라는 게 거래임을 모르진 않을 터이거늘.”
제갈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장로들은 그것을 긍정의 미소라고 해석해 버렸다.
“그러니 간단히 합시다. 전대 천마의 무공 비급 중 중요도에서 상급에 위치한 세 가지를 내놓으시오. 파군천결권과 질풍열파각, 마룡승천검의 세 비급, 혹은 이에 준하는 비급을 원하오.”
“……그쪽에서 제시할 것은?”
“우리 네 장로가 휘어잡고 있는 군소세력 십여 곳의 지배권을 넘겨 드리리다.”
제갈현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그러니까, 천마와 거래를 하겠다는 말씀이지요?”
“두 번 물어 무엇하오? 어차피 서로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니오?”
제갈현은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된 이상은 빼도 박도 못할 터.
“두 분께서도 똑똑히 들으셨겠지요?”
“물론.”
“흘흘흘. 이 두 귀로 똑똑히 들었지.”
장유추와 귀도신마도 씩 웃었다. 어딘지 모르게 살기와 환희가 섞여 있는 웃음.
장로들은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이게 무슨……?”
“똑똑히 들으십시오. 천마의 권위에 대한 도전은 곧 천마신교에 대한 도전과 같은 것. 또한 천마를 상대로 거래를 한다는 것은 천마의 권위에 대한 도전일 뿐 아니라 마교에 대한 반역에 준하는 행위!”
장로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자신들이 예상한 반응이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제갈현은 담담한 목소리로 선고했다.
“이에 대한 대처는 즉결처분 외에 없을 것입니다.”
“그 무슨!”
일장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분노와 당혹감이 그의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감히! 감히 우리를 어찌하겠다는 건가!”
“어쩌긴.”
귀도신마의 신형이 땅을 차냈다. 다음 순간 그의 주먹은 일장로의 코뼈를 뭉개고 있었다.
뻐억!
“크아악!”
불의의 일격을 당한 일장로가 비틀거렸다. 단 일격으로 그의 얼굴이 뭉개져 피범벅이 되었다.
“이, 이런 개 같은!”
“해보겠다는 거냐!”
이장로가 애병인 환도를 뽑아 들려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오른 팔뚝은 팔에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장유추가 섬전처럼 광천뇌도를 휘두른 것이다.
“헉!”
“뭔가 착각하고 있군.”
장유추의 목소리는 그 와중에도 차분했다.
“우린 너희와 싸우려는 게 아니다. 너희를 처벌하려는 것이지.”
“크으으윽!”
이장로가 잘려 나간 팔을 붙들고서 주저앉았다. 장유추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이장로의 턱을 발로 걷어찼다.
뇌가 진탕이 된 이장로가 그대로 고꾸라졌다.
압도적인 힘.
장로들 역시 초인적인 신체와 내력을 지니고 있었으나, 이 둘에 비할 바는 되지 못했다.
“크으으…….”
침음만 흘리는 장로들. 그새 일장로를 반죽음으로 만들어 놓은 귀도신마가 피식 웃어 보였다.
“다시 한 번 말해 보시지 그러나. 천마에게 무엇을 내놓으라고?”
“…….”
“너희는 머저리들이다. 감히 도전할 수 없는 것에 도전했고, 감히 거래할 수 없는 자와 거래를 하려 했지. 너희는 천마에게 대적하려 했다.”
“지, 진백란이 천마란 말이냐!”
삼장로가 용기를 내어 소리쳤다. 귀도신마의 싸늘한 시선만을 받을 따름이었지만.
“그녀는 천마지. 천마의 피를 이었으며 적합한 절차를 밟아 천마의 자리에 올랐으니 말이다.”
“진백란에겐 천마의 위엄이 없다! 많은 마인들이 그 계집을 인정하지 못한다. 저 구령마존 임철형부터가 그렇잖나!”
“쯧쯧. 이제 보니 소식이 늦은 작자들이었군.”
“뭐라고?”
귀도신마 대신 제갈현이 대답했다.
“임철형은 그제 부로 천마님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를 약속했습니다.”
“뭣……!”
장로들이 경악에 빠졌다. 임철형이 연행됐다는 건 알았지만 그새 간단히 사상을 뒤집었을 줄이야.
귀도신마는 귀령도의 뭉툭한 부분으로 어깨를 툭툭 쳤다.
“뭐, 너희 같은 놈들이 싫지는 않다. 천마의 자리란 원래 죽는 날까지 도전받고 위협받는 자리니까 말이야.”
“…….”
“하지만 그 도전이란 칼날과 독, 암기와 살의로 이루어진 것이어야 한다. 네놈들처럼 알량한 거래와 협상이 아니라.”
귀도신마의 두 눈에서 살기가 흘러넘쳤다.
살기에 취한 귀령도가 기괴한 곡성(哭聲)을 토하기 시작했다.
“네놈들은 무인도 뭣도 아니다. 얄팍한 속셈으로 무장한 장사치일 뿐. 아니, 장사치조차도 네놈들만큼 알량하진 않을 게다.”
“히익……!”
“천마께선 네놈들을 살려 데려오라 하셨지만 지금 보니 그럴 필요도 없을 것 같군. 이 몸이 직접 네놈들의 모가지를 떼어 놓겠다.”
“이익!”
두 장로는 깨달았다. 놈들은 자기들을 살려 둘 생각이 없다. 멍청히 있다간 앞선 두 장로처럼 곤죽이 되고 말 것이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장로들이 몸을 날렸다. 귀도신마를 향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뒤편으로.
귀도신마의 이마에 실핏줄이 돋았다.
“결국 선택한다는 게 도주란 말이냐?”
쌔애애액!
귀령도의 귀곡성이 허공을 갈랐다. 귀곡성을 따라 바람의 결이 흘렀다. 세찬 바람은 삽시간에 쇄도해 삼장로를 급습했다.
그 순간 삼장로의 등허리는 쩍 갈라져 뼈를 드러내고 있었다.
“커헉!”
나찰귀령인(羅刹鬼靈刃).
바람에 실린 무형의 검강이 수십 장 너머의 삼장로를 갈라 버렸다.
사장로 역시 다를 건 없었다.
단번에 그를 따라잡은 장유추의 도격이 후두부를 노리고 있었다. 공포에 정신이 팔린 사장로로서는 피할 수 없었다.
퍼억!
수박 깨지는 소리와 함께 그의 머리가 쪼개졌다. 사장로의 몸이 비틀거리더니 그대로 땅에 널브러졌다.
“저질러 버렸군요.”
제갈현이 한숨을 토했다.
“분명 천마께선 저치들을 살려 데려오라 하셨을 텐데요.”
“흠흠. 어쩌다 보니…….”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하는 귀도신마. 반면 장유추는 약간의 주저도 없었다.
“살아서 도움 될 것 없는 것들이었소.”
“무능한 자들은 무능한 자들 나름의 쓸모가 있는 법입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구태여 더 말할 것은 없겠습니다만.”
“어차피 저 둘이 남아 있잖소?”
장유추가 일장로와 이장로를 가리켰다.
“허억. 허억…….”
“끄으으으.”
곤죽이 되어 있어 숨만 간신히 잇고 있는 실정. 몰골만 봐선 시체와 비교해도 나을 게 없었다.
그러나 아직 살아 있긴 했다. 그것만으로 가치는 있을 터였다.
“아쉬운 대로 저들이라도 데려가지요.”
“흠.”
귀도신마와 장유추가 각기 장로 하나씩을 어깨에 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