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三章 마교의 왕
통천각은 완벽한 첩보 조직이 아니다. 그러나 마교 내의 정보로 한정한다면, 거의 완벽한 첩보 조직이라 보아도 좋다.
그런 통천각주 유령마객이 가져온 정보는 다음과 같았다.
—일각 전, 구령마존 휘하의 삼백 병력이 강룡단과 전투 시작.
“…….”
진백란은 서신을 고이 접어 등잔불로 가져갔다. 서신은 이내 발갛게 불타올라 재가 되어 흩날렸다.
“강룡단이 가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어. 아니,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걸지도 몰라.”
“그렇겠지.”
“결국 당신이 예상했던 대로라는 거네.”
정천은 대꾸하지 않았다. 더 말하기 귀찮다는 의미. 그러나 진백란은 얌전히 물러나 줄 성격이 아니었다.
“역시 당신이 천마가 되었어야 했을지도 몰라.”
정천이 인상을 팍 구겼다.
“거참 끝난 일 가지고 되게 종알거리네.”
“아직은 끝난 일이 아니지. 당신이 말했던 것처럼 난 반쪽짜리 천마니까.”
“곧 온전한 천마가 될 예정이기도 하지.”
“아직은 아니잖아?”
정천은 무시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녀를 외면하고 눕더라도 들려오는 목소리까지 어쩌진 못했다.
“지금이라도 당신에게 천마의 자리를 양도할 수도 있어.”
“멍청한 소리.”
“정말 그럴까? 앞으로 진운룡에게 대적하려면 그 편이 훨씬 유리할 텐데?”
“난 귀찮은 건 질색이야.”
“이미 지금도 충분히 귀찮지 않아? 오히려 천마가 된다면 부릴 수족도 많아질 테니 편리할 거야.”
“그만큼 짊어져야 할 압박도 커지겠지.”
“이미 당신은 많은 걸 짊어지고 있는 것 같은데? 거기에 어느 정도가 더 얹힌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을 것 같은데.”
말이야 옳은 말이다. 하지만 정천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천마제전에서 우승한 건 너야. 전대 천마의 핏줄을 이은 사람도 너고. 내겐 그 둘 중 어느 것도 없어. 네가 양도한다고 설쳐 봐야 또 다른 반대에 부딪히기만 할 뿐이야.”
“반대를 원천봉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
“하. 그런 편리한 방법이 있을 리가…….”
“나와 당신이 혼약하면 돼.”
정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버렸다.
“……지금, 뭐라고?”
“혼약하면 된다고, 나랑 당신이.”
정천은 못 볼 걸 봤다는 눈으로 진백란을 쳐다봤다.
“너, 내가 좋냐?”
“싫어.”
“그런데 무슨 얼어 죽을 혼약이야?”
“뻔한 거 아냐? 소위 정략결혼이란 거지.”
“참 간단히도 말하는군. 혼약이란 게 그냥 하자고 하면 마음대로 되는 건 줄 알아?”
진백란이 토라진 표정을 지었다.
“나도 나름대로 많이 생각하고서 결정한 거란 말이야. 이렇게만 한다면 우리 앞에 놓인 문제들을 거의 모두 해결할 수가 있어.”
단순히 그녀가 여자이기 때문에 반대하는 자들의 숫자도 상당하다.
정파 무림에 비해 비교적 깨어 있는 마교라고 해도 여성 교주에 대한 거부감은 상당했던 것이다.
실제로 그녀를 천녀(天女)로 추앙하고 새로운 천마를 뽑자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었다.
물론 말이 좋아 추앙일 뿐, 실제론 그녀를 내치자는 의미였다.
그나마 이것은 점잖은 편.
그녀를 그냥 해치워 버리자는 의견도 만만찮게 강했고, 실제로 시도도 수십 차례나 있었다. 번번이 정천에 의해 좌절됐을 뿐.
그 과정에서 진백란이 느꼈을 압박과 피로는 엄청났을 터였다.
그렇다고 해서 동정심을 느끼는 건 아니었지만.
정천의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확고했다.
“난 천마가 되고 싶은 생각이 없어.”
진백란도 더 설득하기를 포기했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싫다면, 그건 정말로 싫다는 뜻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어. 내가 미쳤지. 잠시나마 당신 같은 작자랑 짝이 되는 걸 생각했었다니.”
진백란은 넌더리를 내며 돌아섰다.
“좀 쉴래. 혼자 있게 둬.”
“그러지.”
정천은 뻗대지 않고 일어났다. 며칠 전부터 천마전 내에선 더 이상 수상한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계속된 실패로 그녀의 적들도 마침내 포기한 것이다.
‘슬슬 때가 됐군.’
정천은 방을 나서며 생각했다.
‘중원으로 나갈 때가 됐다.’
아직 완벽하게 준비되었다고 할 순 없었다. 하지만 최소한의 준비는 된 상태라 봐도 좋았다.
현재의 중원은 일촉즉발의 상태.
소모전만 벌어지고는 있었지만, 언제라도 양측의 본대가 고개를 쳐들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돌이킬 수 없는 전란이 벌어질 터.
그 불꽃 속에서 진운룡 역시 모습을 드러내리라.
‘그때를 노리려면 지금 중원으로 나가야 한다.’
데려가는 것은 용검대와 강룡단뿐. 일단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마교의 일은 남아 있는 사람들만으로도 충분할 터. 진백란은 훌륭하게 자신의 세력을 일구어 낼 수 있을 것이다.
탁.
문이 닫혔다. 홀로 남은 진백란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내가 미쳤지.”
어떤 회유나 협박으로도 붙들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자신의 뜻이 너무나 확고하여 그 누구도 뜻을 꺾을 수 없는 사람이.
정천이 바로 그런 부류의 사내였다.
그녀는 괜한 말을 꺼냈다며 후회했다. 어쩌면 조금 전의 대화로 정천의 마음만 부채질한 것일지도 몰랐다.
아니, 그런 것이 분명했다.
‘그는 조만간 마교를 떠나겠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아직 반역 세력들이 남아 있긴 해도, 마교는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다시 말해 정천으로선 더 이상 볼일이 없다는 것. 도움 줄 것도 다 주었고, 받을 것도 다 받았으니 그로서는 미련이 없을 것이다.
그는 중원으로 떠날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을 거야.’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왠지 진백란은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분위기 때문일 터였다.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이 싸움에 모든 것을 걸고 있다는 분위기 때문에.
정천의 목표는 이제 진운룡 하나뿐이니 말이다.
조만간 둘 중의 하나는 중원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사라지는 쪽이 됐든 없애는 쪽이 됐든, 정천이 마교로 돌아올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진백란은 몸을 비틀며 스스로를 책망했다. 저런 꼴도 보기 싫은 작자가 뭐가 좋다는 건지.
‘나에게 많은 것을 주었지.’
아버지의 무공, 천마신공에 대한 단초부터 시작하여 마교 자체를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름의 조약이 있었다지만, 그녀는 정천에게 어떻게도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은 셈이었다.
단지 그 때문에 그를 붙잡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하아.”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다른 것에 집중하려 해 봐도 소용이 없었기에, 그녀는 한동안 돌아누운 채로 한숨만 흘렸다.
* * *
쾅!
쏘아진 검기가 벼락처럼 폭발했다. 뇌전은 주변으로 폭사되어 다섯 명의 무인을 탄화시켰다.
장유추의 도법은 뒤엉켜 있는 양쪽 무인들 사이에서도 단연 화려했다.
광천뇌도가 춤출 때마다 대여섯의 무인들이 비명을 쏟으며 거꾸러졌다.
귀도신마는 화려함은 덜한 대신 표독스러웠다. 핏빛 검기를 잔뜩 머금은 귀령도는 일격마다 적의 몸을 갈가리 찢어 놓았다.
관식은 앞선 두 사람보다도 훨씬 소박한 검격을 펼쳤다. 내뻗은 일검에 둘 이상이 쓰러지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시체를 만들어 내는 속도만큼은 두 사람을 가볍게 상회하고 있었다.
분명한 것은 한 가지 사실뿐이었다.
세 사람 모두 짝을 찾기 힘든 강자들이라는 것.
“허허.”
임철형은 허탈한 웃음을 뱉었다. 승리를 확신하진 않았지만 설마 이렇게나 압도적으로 깨질 줄은 몰랐다.
신생 강룡단은 그렇다 쳐도 저 세 사람만큼은 어지간해선 막을 자가 없을 듯했다.
그렇기에 마음 한구석으로는 다행한 마음도 들었다.
‘새로운 마교는 더욱 강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은 신생 마교의 거름이 될 터.
“누가 이 늙은이와 검을 맞대겠나!”
임철형의 외침에 가장 먼저 반응한 사람은 귀도신마였다.
“노인네 모가지는 이 몸이 곱게 따드리지!”
귀도신마는 약간의 뜸도 들이지 않고 짓쳐 들었다. 귀령도가 째질 듯한 귀곡성을 토해 내며 연신 도기(刀氣)를 흩뿌렸다.
차차차창!
임철형은 그의 애병인 구령추(九靈鎚)를 들어 검기를 막았다. 무게만도 오십 근은 족히 나갈 듯한 거병(巨兵)이었는데, 임철형은 장난감 다루듯 휘두르고 있었다.
그제야 귀도신마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
‘이 작자, 무시무시한 완력으로 이름을 날렸었지!’
지금은 긴 세월 덕에 무색해졌지만, 한때 구령마존 임철형 하면 무지막지한 힘의 대명사였다.
“이거나 받아 보게!”
정직하게 찍고 들어오는 일격. 귀령도로 방어를 한 귀도신마의 발끝이 땅으로 파고들었다.
“으음!”
귀도신마는 손이 저릿한 느낌에 침음했다. 이토록 무지막지한 일격이라니.
내력 전부를 양팔의 근육으로만 돌리는 듯했다. 그 정도로 임철형의 일격은 묵직했다.
그러나 못 버틸 수준은 아니다. 귀도신마는 사납게 웃음을 지었다.
임철형도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이쪽의 패는 전부 간파당한 모양이군.”
“이 몸을 원망하진 마시오!”
귀도신마는 구태여 전면전을 고집하진 않았다. 아무래도 완력 자체는 자신이 뒤지는 게 분명했고, 괜히 반격의 빌미를 제공하고 싶지도 않았다.
타타탓!
그의 보법이 한층 빨라졌다. 임철형의 주름이 한층 깊어졌다.
힘[力]을 제압하는 것은 언제나 부드러움[柔]과 빠름[快]. 귀도신마는 무의 기본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파파팍!
임철형의 몸 곳곳에서 선혈이 튀었다. 그는 반격이나 방어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귀령도의 이빨에 난자당했다.
삽시간의 그의 몸이 시뻘건 피로 물들었다.
그사이 혈사문과 패신림의 연합 병력은 전멸을 앞에 두고 있었다. 결국 무지막지한 관식과 장유추의 공세를 감당하진 못한 것이다.
“완패로군.”
한쪽 무릎을 꿇으며 임철형이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정수리를 향해 귀도신마가 귀령도를 내밀었다.
“고통 없이 보내 드리리다.”
임철형이 미소를 지었다.
“그것도 좋지. 하지만 기왕이면 다른 형태로 자비를 베풀지 않겠나?”
“원하시는 게 있소?”
“그렇다네. 마지막으로 한 번 만나 보고 싶군.”
구령추를 내던진 임철형이 호방하게 말했다.
“이 늙은이를 천마와 대면시켜 줄 수 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