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二章 두 개의 전쟁
사흘 후.
사파 연맹군의 본격적인 중원 정벌이 시작되었다.
최초의 진원지는 물론 호북성의 무한이었다. 이윽고 이에 동조하듯 강서성과 안휘성, 호남성에서 사파 세력이 궐기했다.
정파 세력은 섬서성과 하남성을 중심으로 뭉쳤다. 화산파와 소림사, 두 양대 거두가 정파 집결의 심장이 되었다.
사방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일어났다.
아직까지는 그 형태가 소모전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은 전투들이었다.
물론 그것이 곧 커다란 피바람을 몰고 오리란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 * *
전쟁의 풍문은 바람을 타고 귀암산으로까지 흘러갔다. 그러나 마교로서는 마냥 좋아할 수만도 없는 일이었다.
그들 역시 비슷한 의미로 고역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섬멸전을 각오하고 싸워야지.”
단호한 귀도신마의 말에 제갈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전멸시키는 것만이 능사인 싸움은 아니라고 보오만.”
“불안의 싹은 미리 잘라 두는 것이 정답이오.”
“이미 머리를 잃은 자들이오. 내버려 두기만 해도 알아서 와해될 것이오.”
“마인에 대해 잘 모르기에 할 수 있는 소리요. 놈들을 당신네 정파의 정치꾼들과 똑같이 보지 마시오.”
천마제전은 진백란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그 과정에서 마교의 양대 세력이라 할 수 있는 혈사문과 패신림은 어마어마한 타격을 입었다.
각각의 주인들인 유장천과 녹운담이 죽었다. 게다가 같은 날 벌어진 신생 용검대의 습격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그로 인해 각 세력의 규모는 절반 이하로 줄어든 상황. 지금도 그 숫자는 줄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남아 있는 이들은 그야말로 독기의 결정체.
그들은 죽음을 불사하고 진백란의 마교에 덤벼들 것이다.
귀도신마와 제갈현이 충돌하고 있는 부분이 여기였다. 귀도신마는 그 나머지를 완전히 제거할 것을, 제갈현은 회유할 것을 주장하고 있었다.
제갈현이 딱히 순진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가 지금 섬멸전을 반대하는 것은 이쪽의 피해도 클 것이기 때문이었다.
“궁지에 몰리면 쥐도 살쾡이를 무는 법이지. 한창 힘을 축적해야 할 시기 궁지에 물린 쥐를 쫓을 필요는 없소.”
“그렇다고 내버려 뒀다가 놈들이 모략이라도 꾸민다면? 아가씨가 어느 날 아침 독살당할 수도 있는 일 아니오?”
“아가씨가 아니라 천마겠지.”
내내 침묵하던 장유추가 끼어들었다.
“아니면 천녀라고 해야 하려나. 혹은 여천마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군.”
“천마는 그저 천마일 뿐이다, 칼도둑놈아. 남자이건 여자이건 관계없이 말이야.”
“뭐가 됐든. 어쨌거나 노부 역시 제갈 군사에게 동의한다.”
“네놈 동의 따위는 아무 의미도 없어.”
“그렇지는 않지. 어쨌거나 우리 세 사람은 신생 천마신교의 장로들 아닌가?”
“끄응.”
귀도신마는 신음을 흘렸다.
웃기는 일이다. 숙적이라 할 수 있는 정파인들을 신생 마교의 장로들로 앉히다니.
비교적 진백란과 친숙한 귀도신마조차 이럴진대, 다른 마인들의 충격이란 표현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이 결정에 대한 반대는 엄청났다.
지난 이레 동안 진백란에 대한 암살 시도만 수십 차례였다.
때문에 지금은 정천이 그녀 곁에 딱 달라붙어 있는 상황. 아무래도 별별 종류의 암습을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은 그뿐이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귀도신마와 두 사람은 대등한 위치였다.
“노부도 지금 상황이 좋지는 않다. 솔직히 말해 이런 감투 따위는 사양하고 싶다.”
“저 역시 기쁘다고 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제갈현이 몰라보게 야윈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일순 장유추도 귀도신마도 숙연한 심정이 되었다.
“고생이 많소, 군사.”
“흠흠. 힘내시구려.”
“하아…….”
장유추야 그렇다 쳐도 제갈현은 본디 천무맹의 군사.
그런 이를 장로라고 앉혀 놓았으니, 그에 대한 마인들의 적개심 또한 엄청났다.
기실 지금의 그는 진백란 이상으로 목숨을 위협받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렇다고 감투 자리를 내놓을 수도 없었다. 어쨌든 그들은 이제 마교와 한 배를 타게 된 몸이었으니.
이제 와서 이곳을 벗어나 중원으로 도망치기도 애매했다. 과연 환대를 받을 수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지금의 중원은 전란에 휩싸인 상태. 이런 상황에 몸뚱이를 끌고 가 봐야 보탬이 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차라리 방법이 있다면 마교의 힘을 빌리는 것뿐.
제갈현이 희망을 걸고 있는 부분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군사와 우리는 입장이 다르군.”
장유추가 씁쓸히 중얼거렸다.
중원은 지금 마교 이상으로 엉망진창인 상황이었다. 특히나 제갈세가의 본가가 위치한 호북성은…….
“본가가 괜찮을지가 걱정입니다.”
“으음.”
장유추의 침음에 귀도신마가 머리를 긁적였다.
“듣자 하니 사파 놈들 세력이 가장 강대한 곳이 호북성이라던데…….”
긴 역사를 자랑하는 무당파와 제갈세가가 그곳에 있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세력을 축적해 온 사파 세력 앞에서도 건재할 수 있을지는 의문.
“본가의 저력을 믿어 볼 수밖에요. 그나마 다행한 것은 자잘한 소모전만 일어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유령마객의 정보망은 귀암산 밖에서도 꽤나 유용했다. 개방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대략적인 중원의 상황을 파악하기엔 무리가 없었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나?”
귀도신마의 말에 장유추가 물었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냐?”
“사파 놈들 말이야. 분명 오랜 시간을 절치부심해 왔을 거 아니냔 말이지.”
“그렇겠지. 그런데?”
“그런 것치고는 너무 물렁하잖아.”
“물렁하다니?”
“보라고. 만약 이 몸이 사파의 대가리라면 쓸데없는 소모전을 벌일 것도 없이 당장에 무림세가들과 명문 문파들을 각개격파했을 거라고.”
“정파 쪽에서 그걸 가만히만 보고 있을 것 같으냐?”
“물론 그놈들도 나름대로 대응을 하겠지. 자기네 전력을 총동원해 대판 싸운다거나, 사파 놈들의 텅텅 빈 본거지를 역으로 친다거나. 하지만 그 어느 쪽이 되었던 사파 놈들로서도 꿀릴 건 없다고. 어쨌든 선공은 사파 쪽에게 있었으니.”
“음…….”
“그런데도 놈들이 하고 있는 일은 시답잖은 소모전이나 벌이고 있는 거지. 웃기는 일이야.”
장유추가 픽 웃었다.
“네놈답지 않게 제법 논리정연한 말이었다. 하지만 사파의 결속력이 약하다는 걸 간과했군. 놈들은 본디 연합이란 것과는 담을 쌓은 놈들이야.”
귀도신마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건 뭔 개소리야. 이봐, 칼도둑놈아. 대체로 그런 놈들일수록 공동의 적 앞에선 결속이 잘 되는 법이란 말이다.”
“그거야…….”
“더군다나 이건 놈들에게 있어 수십 년 만에 찾아온 기회지. 그런데 그걸 내분으로 말아먹는다고? 놈들이 그 정도로 멍청할 것 같지는 않은데?”
“으음.”
장유추가 침음을 뱉었다.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뭔가 계략을 세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조용히 대화를 듣고 있던 제갈현의 말이었다. 귀도신마가 씩 웃었다.
“그래. 이 몸이 하고 싶었던 말이 그거라고.”
“하지만 그 계략이 무엇인지는 우리로선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각 문주들과 가주들이 현명하게 판단해 주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겠군요.”
“어쨌든 본론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군.”
장유추가 손뼉을 쳐 주의를 환기시켰다. 귀도신마의 얼굴이 구겨졌다. 또 몇 시진을 더 떠들어야겠구나.
하지만 그들의 논쟁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남궁운이 방 안으로 들어섰던 것이다.
제갈현과 달리 그에겐 아무 직책도 주어지지 않았다. 천무맹의 전 맹주에 대한 나름의 예우였다.
“얘기는 잘 되어 가는가?”
“여전하오. 꽉 막혀 있지.”
“그래 보이는군. 그렇다면 이 소식이 좀 도움이 되어 줄 수도 있을 것 같군.”
“소식이라니요?”
제갈현의 물음에 남궁운이 쓴웃음을 지었다.
“혈사문과 패신림이 손을 잡았네.”
* * *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두 세력 모두 치명상을 입은 상태였으니 말이다.
상처는 거대했고 출혈은 끊이지 않았다. 그 상처를 막을 방도는 당장은 보이지 않았고.
결국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인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상처를 막아 주는 것.
처절한 방법이지만 분명 효과적이기도 했다. 문제는 누가 그 중심이 되어 주느냐는 것.
혈사문과 패신림엔 많은 수뇌부가 있었다. 본디 유장천과 녹운담의 최측근이었던 이들이었다.
그러나 그렇기에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중심이 될 수 없었다.
본디 동등한 위치였기에, 어느 누구도 위로 치고 오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시기 적절히 나타난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구령마존 임철형이었다.
마교의 최고령자이자 뛰어난 모략가.
그것이 임철형에 대한 세간의 평가였다.
“하지만 의외야. 임 노괴는 그렇게까지 야심이 강한 사람은 아니었거든.”
“늘그막에 감투 한 번 써 보고 싶었나 보지.”
시큰둥한 정천의 말에 진백란은 혀를 찼다.
“아냐. 지금까지의 행보도 그렇고, 사람들의 평가도 그렇고, 어느 면으로 봐도 노괴답지 않단 말이야.”
“사람이 사람 속이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더군다나 모략에 꽤 능한 노인네라며.”
“그러니까 이상하다는 거지. 누가 봐도 좋은 행보라고 하기는 어렵잖아.”
임철형 본인이 지닌 세력은 그리 크지 않다. 혈사문과 패신림이 연합한다면 분명 상당한 규모가 될 테지만, 마교를 뒤엎을 정도는 아니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내 밑으로 들어오겠다는 이들이 나날이 늘고 있어. 이미 혈사문이나 패신림 정도는 가볍게 넘어선 상태야.”
“자랑 맞네.”
“시끄러워. 어쨌든 이 마당에 두 세력을 휘하에 거둬 봐야 내게 대적하긴 어렵잖아. 그런데 왜 노괴가 그런 짓을 한 건지 의문이야.”
“흠.”
정천은 대강 대꾸하고서 눈을 감았다. 애초에 아까부터 큰 대자로 누워 있던 그였다.
그 모습을 보며 진백란이 아미를 구겼다.
“좀 제대로 앉아서 얘기해!”
“귀찮아. 피곤하고.”
“그래서 날 제대로 보호할 수나 있겠어?”
“난 네 수신호위가 아냐.”
“지금은 맞지. 그게 우리가 얘기했던 조약에 적혀 있던 사항 아냐?”
정천은 상반신을 슬쩍 일으켰다. 그러고는 주변을 살살 두리번거리더니 다시 드러누웠다.
“자객은커녕 개미 하나 보이지 않음. 됐지? 난 잠이나 잘란다.”
“얘기 좀 하자니까? 나 심심해.”
“그거야 네 사정이지.”
진백란은 구겨진 표정으로 풉 웃었다. 결과적으로 꽤나 기묘한 미소가 탄생했다.
“우습네. 천마가 되면 많은 게 바뀔 줄 알았는데.”
“아직 제대로 된 천마가 아니니까.”
“……그러네. 근데 그거 알아? 가끔 보면 당신, 비수처럼 날카로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던져.”
“성격이 그런 걸 어쩌겠어.”
졌다는 심정으로 어깨를 으쓱인 진백란이 물었다.
“그럼 이제 이 반쪽짜리 천마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마교에서도 가장 나이 많은 노고수가 정면으로 도발해 오는 상황인데.”
“그거야 네가 결정할 일이지.”
“조언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거 아냐?”
“나한테 정확히 어떤 것을 바라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나라고 해서 뭐 대단한 지혜나 신산기묘를 지닌 건 아니야.”
“그건 나도 잘 알아. 그냥 아무 말이나 해 봐.”
나직이 한숨을 쉰 정천이 말했다.
“크게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을 것 같군.”
“두 가지?”
“하나. 그 임철형이란 마교도가 늘그막에 권력욕에 취했다. 둘. 그 스스로가 나서서 애송이 천마를 위해 희생하기로 결심했다.”
진백란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희생이라니?”
“간단해. 너는 네 아버지와 달리 만인에게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천마야.”
“……그건 나도 알아.”
“상당수의 마교도들이 너를 불신하고 있지. 천마제전에서 우승하긴 했지만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고.”
진백란은 딱히 화를 내거나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 모두 사실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네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간단하지. 모두에게 보여 주는 것. 천마 진백란의 진가를 모두에게 확인시키는 거지.”
뒤는 더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저항 세력의 섬멸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터.
“그렇다면 임 노괴는 그것을 알고서……?”
“그것까진 모르지. 이것도 내 추측일 따름이니까.”
진백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어느 쪽이 되었든 그녀가 택할 최선책은 단호한 숙청이라는 것.
그것은 물어볼 것도 없이 피로 점철된 길일 터였다.
“내 명령 한마디면 수많은 이들이 죽게 되겠지?”
“새삼스러운 소리를 하는군.”
“수많은 피가 뿌려지겠지. 수많은 이들의 원한을 사게 될 거야. 어쩌면 철혈의 마녀 같은 이름으로 불리게 될지도 모르겠어.”
진백란의 우울한 목소리에 정천은 혀를 찼다.
“그럼 마교의 주인이라는 작자가 태평성대의 성군 같은 거라도 되는 줄 알았냐?”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냐. 나도 예전부터 각오는 해 왔었어. 하지만…….”
상상과 실전은 아무래도 다르기 마련이다.
그들을 섬멸하는 것은 수하들의 병장기일 터. 그러나 그 명령을 내리는 사람은 진백란이다. 그녀의 의지가 그들을 학살하게 될 것이라는 뜻.
단순히 적 한둘을 죽이는 것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수많은 이들의 원한을 사게 될 테니까.
‘천마가 된다는 건 이런 거군요, 아버님.’
진백란은 나직이 심호흡을 했다.
다음 순간 그녀의 눈동자는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담미화, 장로 세 사람을 불러와 줘.”
“알겠습니다.”
대답은 천장 쪽에서 들려왔다.
정천이 그녀의 수신호위가 되면서 담미화 역시 자연스레 진백란의 수족이 되었다.
사실 진백란으로선 수하의 역할보다도 말상대의 역할을 기대했으나, 담미화는 상상 이상으로 말수가 적고 얌전했다.
때문에 지금은 그냥 사무적인 관계만 지속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다른 사람들이라도 와 주면 좋을 텐데.’
백미련과 요태희는 폐관 수련 중이다. 화연란과 모용린은 천무맹 전력을 개편하는 일로 바빴다.
결과적으로 대화 상대가 될 만한 사람이라고는 정천 한 명뿐.
그녀로선 울며 겨자 먹기로 그에게 말을 붙일 수밖에 없었다.
“부르셨습니까, 천마님?”
얼마 지나지 않아 세 사람이 나타났다. 진백란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잘 오셨어요.”
“말씀 놓으십시오.”
제갈현의 말에 진백란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려고 노력은 하는데 쉽지는 않군요.”
“쉽지 않더라도 하셔야 합니다. 군왕의 위신이란 사소한 말 한마디에서부터 오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건 정파인들의 가르침인가요? 명심하죠. 하지만 오늘만큼은 좀 봐줬으면 좋겠네요. 급한 일을 해결하는 게 먼저니.”
“알겠습니다.”
세 사람이 그녀 앞에 앉았다. 정천은 여전히 한가로이 드러누운 채였다.
그것을 본 귀도신마가 혀를 찼다.
“자네도 참 무사태평이군. 만약 우리가 우리로 위장한 자객이라면 어쩌려고 그러나?”
“그러면야 문제겠습니다만 아니잖습니까?”
“그야 그렇지. 하지만 꼭 변장이 아니더라도 우리들 스스로가 반역을 마음먹을 수도 있지 않나?”
“귀도 선배, 반역하고 싶수? 아니잖습니까. 그럼 된 거죠.”
“아니, 그러니까 이건 예시를 든 거잖나.”
“뭐가 됐든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겁니다.”
귀도신마는 못 믿겠다는 얼굴이었지만 더 정천을 추궁하지 않았다. 말이 길어져 봐야 입만 피곤한 일이었고.
진백란이 세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얘기는 대충 들으셨겠죠?”
“맹주님께 들었습니다. 혈사문과 패신림이 기어코 최후의 강수를 뒀더군요.”
“마교 최고령자인 구령마존 임철형이 그들을 흡수했어요.”
“강한 자요?”
장유추였다. 천마에 대한 어떠한 예의도 보이지 않는 말투였으나 진백란은 괘념치 않았다.
“강했었죠. 하지만 지금은 세월을 이기지 못해 전성기적 실력을 발휘하진 못한다고 평가받고 있어요.”
“약하다는 소리군.”
귀도신마가 나직이 혀를 찼다. 장유추의 말투가 거슬렸던 것이다.
진백란이 그에게 눈짓으로 주의를 주고는 말했다.
“지금의 장 장로라면 백여 초 내에 승부를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그 늙은이를 썰어 주었으면 한다는 거요?”
“야, 칼도둑놈!”
귀도신마가 기어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귀도!”
진백란이 일갈했다. 그 외침에 귀도신마가 움찔했다. 그녀의 울림엔 예상을 뛰어넘는 깊이가 있었다.
“아, 아가씨?”
“천마예요.”
“으음. 죄송합니다, 천마님.”
귀도신마가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장유추와 제갈현 역시 약간 놀란 눈이었다. 지금의 진백란은 분명 천마제전의 그날보다도 강해져 있었다.
내내 가만히 있던 정천이 한마디 보탰다.
“지금이면 세 사람이 함께 덤벼도 승산을 장담하기 힘들 겁니다. 한창 천마신공을 자기화하고 있는 과정이니.”
정천의 도움으로 단초를 얻게 된 이후, 그녀는 부단한 노력으로 천마신공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왔다.
그 노력은 천마가 된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고, 본디 자질이 있었던 만큼 그녀의 성장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더군다나 아직 과정일 뿐.
그녀의 성장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었다.
‘범의 새끼는 역시 범이라는 건가?’
장유추는 뱃속에서 호승심이 들끓는 것을 느꼈다.
원체 자기보다 강한 자와 맞붙을 때 더욱 불타오르는 그였다.
진백란도 그것을 느꼈기에 정색했다.
“난 장 장로와 싸울 생각이 없어요.”
“대련 정도는 가능하다고 보오만.”
“그렇겠죠. 하지만 지금은 안 되요.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요.”
장유추는 팔짱을 끼었다. 그렇게 안 하면 자기도 모르게 광천뇌도에 손이 갈 것 같았다.
“말해 보시오.”
진백란은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 입을 뗐다.
“귀암산 전체에 보여 주었으면 해요. 천마에게 복종하지 않는 이들의 최후가 어떠한지.”
“우리 세 사람이 말이오?”
“정확히는 두 분이겠죠. 제갈 장로께선 본디 싸우는 데 익숙하지 않을 테니.”
제갈현도 상당한 무인이긴 하다. 그러나 귀도신마나 장유추 같은 강골들에 비견될 정도는 아니었다.
“흘흘. 재미있겠군요.”
신나는 듯 웃는 귀도신마. 그와 달리 장유추는 그리 밝지 않은 표정이었다.
“솔직히 말해 승산이 없소. 아무리 우리 두 사람이라 해도 그 정도를 숫자를 감당하긴 힘드니.”
“알고 있어요. 그러니 강룡단을 데려가도록 하세요.”
장유추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머릿속으로 셈을 해 본 것이다.
“그 정도라면 무리 없겠군.”
“그들을 제대로 단련시켜 주길 바라겠어요.”
진백란의 의도는 분명했다. 반역자들을 섬멸하는 동시에 강룡단을 단련시키라는 것.
내내 무뚝뚝하던 장유추가 처음으로 웃었다.
“조금은 비정한 군주 티가 나는군.”
“그런가요?”
진백란도 마주 웃었다. 더 이상 천마의 딸이자 말괄량이이며 성격 급한 소녀는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한 명의 천마만이 존재할 뿐.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사뭇 진중해진 목소리로 말한 장유추가 몸을 일으켰다. 진백란은 그가 자신을 내심으로 인정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대하고 있겠어요.”
* * *
반 시진 후 강룡단 전원이 소집되었다.
“오랜만입니다, 두 분.”
임시 강룡단주(剛龍團主)인 관식의 말에 장유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귀도신마는 강룡단원들을 돌아보며 가볍게 감탄했다.
“독하게도 굴려 놓은 모양이군그래. 하나같이 눈에 독기가 가득한걸.”
“그럴 겁니다. 죽는 게 나을 거란 생각이 들 정도로 굴렸으니까요.”
“역시 무정검이라 이건가?”
“그래도 많이 봐주면서 굴렸습니다.”
단원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그것을 본 귀도신마가 낄낄대면서 웃었다.
처음은 악연으로 만난 그들이었으나 지금은 제법 죽이 잘 맞게 되었다. 본디 무(武)에 대한 사상 자체는 비슷한 편이었으니 말이다.
“그건 그렇고, 출발은 언제 합니까?”
관식의 물음에 장유추가 대꾸했다.
“지금 바로.”
이윽고 세 사람과 오십 명의 강룡단원들은 천마전(天魔殿)을 나섰다.
그들은 뜸을 들이지 않았다. 그 어느 것의 눈치도 보지 않고서 곧장 임철형의 본거지인 구령각(九靈閣)으로 치고 들어갔다.
구령마존 임철형은 구령각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혈사문과 패신림에서 끌고 온 정예 전력과 함께.
개중엔 혈사문과 패신림의 수뇌부도 보였다. 아예 수뇌부 전원을 집결시킨 모양이었다.
귀도신마가 운을 뗐다.
“오랜만이오, 영감.”
임철형도 입을 열었다.
“그렇구먼, 애송이.”
불혹을 훌쩍 넘긴 귀도신마다. 나아가 마교칠절이자 현재는 장로의 위치에 있는 그다.
그런 그를 애송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귀암산을 통틀어 몇이나 될까.
그러나 지금 상황에선 어떠한 위화감도 느껴지지 않으니 우스운 일이었다.
“나이도 많이 자셨으면서 방구석에 앉아 손주들 재롱이나 볼 것이지, 뭐하러 이런 일을 벌이셨습니까?”
“흘흘.”
거북이 등껍질처럼 주름 가득한 임철형의 얼굴이 미소를 그렸다.
“오래 살다 보니 삶이 무료했던 모양일세.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 늙은이가 변덕을 부리고 난 직후더군.”
“이제라도 그 변덕을 철회할 수 있소만.”
“미안하지만 그럴 생각은 들지 않는군. 이 늙은이도 한 번쯤은 영광스런 자리를 차지해 봄 직하지 않겠나? 스물도 안 된 어린 계집도 얻을 수 있는 자리라면 더더욱 말이야.”
“……정말 그러길 원했다면 정식으로 천마제전에 출전했었어야 됐소.”
“그러게 말하지 않았나. 늙은이의 변덕이라고.”
귀도신마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변덕은 변덕일 뿐이오. 게다가 영감이 방금 폄훼한 그분은 마교의 주인이시오.”
혈사문과 패신림의 수뇌부들이 즉각 반발했다.
“개소리!”
“그 계집은 천마의 자리를 도둑질한 것에 불과하다!”
“아비의 후광을 업은 가증스러운 도둑!”
“그깟 년에게 천마의 이름은 과분하다!”
귀도신마는 쯧쯧 혀를 찼다.
“그 계집에게 목이 달아난 얼간이들이나 모셨던 것들이 말만 많군.”
“닥쳐라!”
“진백란 그년이 계략을 썼음을 모를 줄 아느냐!”
“정파 놈들을 데려왔을 때부터 알아봤다. 이 모든 게 그년과 네놈들의 계략일 터!”
귀도신마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더 말해 봐야 머리만 아플 것 같았다.
“듣기로 마인들은 힘을 숭상한다더니, 이제 보니 입만 산 겁쟁이들뿐이군.”
장유추의 한마디였다.
수뇌부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됐다.
“뭣이 어째!”
“빌어먹을 정파 놈이 잘도 떠드는구나!”
“잘 떠드는 건 네놈들일 테지.”
스르릉!
뽑혀 나온 광천뇌도가 가볍게 울었다. 듣는 이들을 본능적으로 소름 돋게 만드는 귀곡성이 울렸다.
“말씀 잘하셨습니다.”
관식 역시 장검을 뽑아 들었다.
“무인들이 이렇게나 모였는데 입만 아프게 떠들어 봐야 무얼 하겠나? 그만 떠들고 한판 붙어 보지.”
“으음.”
“관식…….”
수뇌부들의 태도가 약간 누그러들었다. 아무래도 무정검의 이름은 앞선 두 사람의 그것보다도 영향력이 컸던 것이다.
귀도신마도 그걸 알았기에 탄식을 뱉었다.
“이거야 어이가 없구만. 마교칠절인 이 몸보다 저 녀석이 무섭단 말이냐?”
“인생은 감투보단 실전이니까요.”
“끙.”
농담조인 관식의 말에 귀도신마가 침음했다. 적들과는 대조적으로 너무나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내내 웃는 낯으로 그 모습을 보던 임철형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새 천마의 마교는 이전의 마교와는 많이 다르군.”
“흠. 아마 그럴 겁니다. 꽤나 많은 것이 바뀌었으니까요.”
그러했다. 천무맹은 무너졌고 중원은 전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고, 마교의 중책을 몇몇 정파인들에 맡게 되었다.
너무나 많은 것이 변해 버렸다. 수십 년 동안 정체되어 있던 것들이 일 년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빠르게 변해 버렸다.
“대체 무엇 때문일까?”
임철형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무엇이 마교를, 나아가 중원을 이렇게나 바꿔 놓은 것일까?”
“…….”
“자네들이 알다시피 이 늙은이의 나이가 올해로 백오십일세. 삶의 대부분을 천무맹과의 싸움으로 보냈지.”
“그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것이 바뀌었어. 천무맹은 사라졌고 중원은 대변혁을 눈앞에 두고 있지.”
임철형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쉬운 일이야. 삶에 끝에 이르러서야 이런 재미있는 일들이 일어나다니.”
“……그래서 거짓 반역을 일으킨 겁니까?”
귀도신마의 물음에 수뇌부들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임철형은 자신들을 한데 모아 불구덩이로 집어넣은 셈인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상했다.’
‘임철형 저 늙은이가 갑자기 우리에게 손을 내밀다니!’
그들로서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일단은 살아남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그래서 한데 뭉쳤다. 임철형이라는 구심점을 가운데에 두고서. 마교 최고령자라는 권위에 기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그러나 그것이 계략이었다면? 애초에 흩어져 있던 그들을 한데 모아 일망타진하려는 계획의 일부였다면?
그들은 기겁한 표정으로 임철형을 보았다.
그 시선을 느끼며 임철형이 말했다.
“엄밀히 말해 거짓 반역은 아니지.”
그러나 누구도 그 말에 안도하지 않았다.
“이 늙은이는 죽음을 각오했으니까.”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귀도신마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스스로를 희생해 마교를 결속시키려는 거요?”
“그렇게 거창한 생각을 한 건 아닐세.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지. 나와 이 친구들이 여기서 사라짐으로써 당분간 애송이 천마를 괴롭힐 만한 일은 줄어들 터.”
“그런 걸 희생이라 부르는 거요.”
“좋을 대로 생각하게.”
“임철형!”
목소리는 임철형의 뒤에서 울렸다. 혈사문과 패신림의 수뇌부들은 혈안이 되어서 각자의 무기들을 꺼내 들고 있었다.
“이런 개수작을 부리다니!”
“처음부터 우리의 목을 진백란 그년에게 가져다 바칠 생각이었구나!”
“교활한 늙은이 같으니!”
임철형은 허허 웃었다.
“자네들은 착각하고 있어. 이건 분명 저 친구들에게 큰 기회지만, 반대로 자네들에게도 상당한 기회가 된다는 말일세.”
“그게 무슨 개소리냐!”
“간단하지. 여기서 자네들이 이기면 되는 것 아닌가? 보아하니 저 군단이 신생 강룡단인 모양인데, 저들을 꺾을 수 있다면 천마에게도 심대한 타격을 줄 수 있을 테지.”
“그런……!”
“무엇보다 자네들은 숫자만 삼백이 넘지 않나? 반면 저들은 끽해야 오십이야. 이 얼마나 압도적인 전력 차이란 말인가? 게다가…….”
임철형의 몸에서 백색의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것을 본 장유추가 침음했다.
“혼령연소……!”
“이 늙은이 역시 자네들의 편이 되어 싸워 주겠네. 그것이 자네들에 대한 내 나름의 의리일세.”
“의리라고!”
“그렇다네. 의리!”
임철형이 사납게 웃었다.
“간단한 것 아닌가? 마교는 강자존. 강한 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고 지배할 수 있는 거라네!”
“크으……!”
수뇌부 무인들이 침음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 너무 늦은 뒤였다.
이제 와서 도망치려 해 봐야 퇴로도 존재하지 않았다. 임철형의 구령각은 주변이 해자로 둘러싸인 지형이었기 때문이다.
적을 막기엔 최적의 형태지만, 반대로 빠져나가기엔 최악의 형태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적은 이미 유일한 통로로 들어와 버린 상황.
배수진. 퇴로는 없다.
“제기랄!”
“이렇게 되면 네놈들을 모조리 죽이고 나갈 수밖에!”
자포자기한 수뇌부 무인들이 소리쳤다. 그 말을 들은 귀도신마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그래야 마인이지!”
“그냥 도망치기를 포기한 것으로 보이는데.”
찬물을 끼얹은 장유추가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래도 요깃거리는 되겠지.”
꽈릉!
뇌전이 내리꽂혔다. 천뢰강림(天雷降臨). 시작부터 전력으로 나가기로 한 것이다.
피식 웃은 관식이 강룡단에 명령을 내렸다.
“대선배의 마음에 보답해야겠지. 봐주지 말고 모조리 쓸어버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