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一章 사파의 주인
‘뭔가 달라지셨다.’
음영은 형언하기 힘든 괴리감을 느꼈다. 그것도 자신이 평생을 보필해 온 독왕에게서.
어젯밤, 독왕은 신원 미상의 자객에게 급습당했다. 그러나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자객을 처리했다.
그리고 오늘.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군웅 회의에 나섰다. 오히려 평소보다도 훨씬 활기가 있는 모습으로.
‘마침내 중원 정벌이 가시화됐기 때문일까?’
그럴 가능성은 높았다. 그것이야말로 독왕 갈월의 오랜 숙원이었으니.
하지만 그럼에도 뭔가가 찝찝했다.
‘보고에 의하면 자객은 머리가 박살나 죽었다고 했다.’
독왕답지 않았다.
깐깐하기가 이루 비견할 데가 없는 인물이 독왕이었다. 그리고 그런 성격만큼이나 몸에 피를 묻히는 것도 싫어했다.
적을 죽이는 것은 언제나 독수(毒手)와 독향(毒香). 그런 독왕이, 암만 급습을 당했다지만 자객의 머리를 빠개 놓았다?
‘설마…….’
음영은 앞서 걷고 있는 독왕을 보았다.
너무나 완벽한 모습. 평소의 그와 마찬가지로 구부정한 체형. 검버섯이 피어 있는 지저분한 피부 역시 평소와 같다.
하지만 그렇기에 느껴지는 위화감이란 게 있었다.
‘설마……!’
순간 음영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한 가지 불길한 추측이 머릿속을 스친 까닭이다.
그 순간, 독왕이 고개를 돌렸다.
마치 음영의 속내를 읽은 듯.
“심장박동이 빨라졌군. 뭔가 불안한 일이라도 있는 겐가?”
“…….”
음영은 당황하여 대꾸하지 못했다. 평소였다면 하지 않았을 실수. 침묵은 그 자체로도 충분한 대답이었다.
독왕의 입가가 미소를 그렸다.
평소 그가 짓지 않던, 삼라만상의 위에 군림하는 자만이 지을 수 있는 미소였다.
“눈치챘군.”
“……!”
음영은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걸 느꼈다. 저 한마디가 의미하는 바란 얼마나 크단 말인가.
‘독왕은 이미 죽었다!’
분명했다. 아마도 머리가 박살난 자객이란 살해당한 독왕일 테지.
그리고 그자를 처치한 채 그의 행세를 하고 있는 이 남자는…….
‘최후의 혈선 진운룡!’
순간 오만 가지 생각이 음영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복수, 도망, 공포, 증오…….
이윽고 그 생각들 모두가 지워지고, 한 가지만이 머릿속을 강하게 지배했다.
공포.
음영의 팔다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 독왕마저 게 눈 감추듯 해치워 버린 괴물 앞에서, 대체 무슨 복수를 꿈꾸며 무슨 증오를 거론한단 말인가.
독왕은 어느새 진운룡 본인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아예 정체를 가릴 필요조차 없다는 양.
“영리하군.”
“…….”
“본좌의 정체를 간파했으며 그 힘마저 가늠할 수 있으며, 복수 따위의 헛된 생각을 일찌감치 접어 버릴 정도로 영리하군.”
이자는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음영은 딱딱거리며 떨리는 이빨을 애써 악물었다.
“나를…… 죽일 거요?”
“예전이었다면 그랬겠지.”
순간 다시 한 번 음영의 심장이 덜컥거렸다.
여전한 공포. 그러나 자그만 안도감이 스멀스멀 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예전이어다면 그랬으리란 말은, 지금은 그러지 않으리란 말과 동의어니까.
독왕, 아니 진운룡의 미소가 짙어졌다.
“네놈은 영리하니 허튼수작을 벌이진 않을 테지. 그러니 살려 두겠다. 예전과 달리 본좌에게도 타인의 도움이란 게 필요한 시점이니 말이야.”
“……중원 정벌을 위해서 말이오?”
“중원 정벌? 하!”
신경질적인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진운룡에게서 처음으로 살기라는 것이 흘러나왔다.
그것만으로도 음영은 기절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중원을 불사르거나 헤집는 것쯤은 본좌 혼자서도 능히 할 수 있는 일이다. 다만 약간의 시간이 필요할 따름. 오히려 사파니 뭐니 하는 혹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쪽이 더 귀찮을 수도 있다.”
“…….”
“그럼에도 나는 너희의 힘을 빌리려 한다.”
“대체 무엇을 위해서 말이오?”
진운룡이 약간 뜸을 들였다.
“복수다.”
음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복수……라고?”
“그렇다. 개인적인 복수지.”
음영은 약간 얼떨떨한 심정이었다. 홀로 중원을 붕괴시킬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자가,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대세력의 힘을 빌리려 한다고?
“대체 그 대상이 누구기에?”
진운룡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네놈이 알 필요는 없는 일이지.”
“…….”
“어쨌거나 본좌의 정체를 떠벌리는 등의 멍청한 짓을 저지르진 않으리라 생각하지. 그런다손 쳐도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 말이야.”
음영 스스로가 생각해 봐도 그러했다. 진운룡의 정체를 간파했다고 하나 그것뿐. 음영이 그의 정체를 까발리려 해 봐야 별 의미는 없으리라.
‘독왕님…….’
음영은 갈월을 떠올렸다.
괴팍한 늙은이였다. 그다지 가깝다고는 할 수 없는 주종관계였다. 그러나 음영 쪽이 많은 은혜를 입기도 한 사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클 수는 없었다.
‘죄송합니다. 당신에 대한 충성도 여기까지인 모양입니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귀중한 일이다. 음영은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다.
“무엇이든 하명하십시오.”
무릎을 꿇는 음영을 보며 진운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딱히 당장은 명령할 게 없겠지만.”
몸을 돌린 진운룡이 걸음을 옮겼다.
군웅 회의장의 문이 어느새 다가와 있었다. 웅장한 그 모습을 보며 음영은 내심 호기심을 느꼈다.
‘이자는 그 많은 군웅들을 어떻게 휘어잡을 셈이지?’
일찍이 독왕 갈월이 사파의 군웅들에게 제안한 것은 평등한 연대였다.
연맹의 중심이 갈월 본인이긴 하나, 이는 명령 체계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방편일 뿐. 그와 군웅들 사이의 눈높이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 남자는 갈월이 아니다.
갈월과 같은 모습이라 해서 그와 같은 방식을 택할 리는 없었다.
끼이이익.
문이 열리며 수십 군웅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갈월을 보고도 크게 미동하진 않았다.
대체로 자유롭게 앉아 있는 모습들.
나름대로의 자존심의 표출이리라. 일단 힘을 합치기론 했으나 당신의 수하는 아니라는 의미.
진운룡은 씩 웃었다.
“제법 강단이 있는 것들이로군.”
몇몇 군웅들이 표정을 구겼다. 독왕의 말투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낀 사람들도 있었으나,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늙은이가 아침 댓바람부터 노망이 났는가. 말을 함부로 내뱉는군.”
파철부왕 염평이 으르렁거렸다.
군웅들 중에서도 갈월과 가장 사이가 나쁜 그인데, 마침 시비를 걸 기회가 생기니 좋다며 달려든 것이다.
진운룡은 염평을 빤히 쳐다봤다.
이전과 다른 시선. 염평은 약간의 이질감을 느꼈으나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어차피 늙은이의 수작일 뿐이라 생각하며.
위아래로 염평을 훑던 진운룡이 말했다.
“앞으로 나설 실력은 되어 보이는군. 그래 봐야 본좌 앞에선 하룻강아지에 지나지 않지만.”
“이 노인네가 뭘 잘못 먹은 모양이군. 도끼날에 한번 찍혀 봐야 정신을 차릴 텐가?”
“실현 가능하지도 않은 일을 당당하게 떠벌리지 마라. 그래 봐야 약해 보일 뿐이니.”
염평이 으드득 이를 갈았다.
원체 재수 없는 늙은이이긴 했으나 오늘따라 속을 긁는 느낌이 한결 더러웠다.
“시비를 걸고 싶다 이건가? 이 염평, 그런 종류의 개수작을 웃어넘길 군자는 되지 못한다.”
“그렇게 나와야지.”
진운룡이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염평을 제외한 다른 군웅들을 향한 것이었다.
“너희들은 본디 말만 가지고는 들어먹지 못하는 족속들이지. 그러니 귀찮지만 시범을 하나 보이려 한다. 그 흐리멍텅한 두 눈에 잘 새겨 놓도록.”
“개소리!”
염평이 몸을 날렸다. 단번에 십여 장 거리를 좁혀선 애병인 두 자루 쌍혈부(雙血斧)를 교차해 휘둘렀다.
그 순간 진운룡은 그 자리에 없었다.
“엇……?”
쌍혈부가 애꿎은 허공만 갈랐다. 피하는 모습을 눈으로 좇지도 못했다.
염평은 이를 갈면서 소리쳤다.
“독향을 뿌려 놓은 것이냐? 비열한 수작으로 감각을 마비시킨 거라면…….”
“걱정 마라. 그런 구차한 수법은 쓰지 않으니.”
목소리는 바로 뒤에서 들려왔다. 염평이 기겁하며 몸을 회전시켰다.
“놈!”
쌍혈부가 또다시 허공을 갈랐다. 진운룡은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보이는 것은 얼어붙어 있는 군웅들의 얼굴뿐.
그들은 하나같이 경악하고 있었다. 염평과 마찬가지로 그의 속도를 쫓아가지 못하고 있었기에.
그 사실을 깨달은 염평은 경악했다.
‘이럴 수가……!’
그것이 염평이 떠올린 마지막 생각이었다.
퍼억! 철퍽!
천장으로 피와 뇌수가 튀었다. 머리가 박살난 염평의 몸이 기우뚱거리더니 이내 쓰러졌다.
진운룡은 음영의 옆에 서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랬다는 듯.
“…….”
“…….”
무거운 정적이 군웅 회의장을 메웠다. 그들이 난생 느껴 보지 못했던 생경한 감정인 공포가 그곳을 지배하고 있었다.
분명했다. 지금껏 존재할 것이라고 추측만이 난무했던 그것.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서 적을 격멸할 수 있는 무공의 정점.
심멸(心滅).
그들은 졸지에 무예의 최고 경지를 눈앞에서 보게 된 것이다.
그나마 그 사실을 이론적으로 실감한 이들은 군웅들 중에서도 무공이 뛰어난 이들뿐.
나머지는 그저 시각적인 충격에 입을 닫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런 가운데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사실은 하나뿐이었다.
‘이자는…….’
‘독왕 따위는 아득히 넘어설 정도로 강하다.’
그들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렇게나 압도당한 경험은 생전 처음이었다.
진운룡이 감흥 없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보았으니 똑똑히 깨달았겠지. 앞으로 본좌가 너희를 지배한다. 너희는 본좌에게 지배당한다. 그 외의 것은 있을 수 없다.”
“…….”
“침묵은 곧 긍정이지. 하기야 어지간히 멍청하지 않고서는 깨달았을 테니 말이야.”
누군가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가 기분 좋은 듯 웃으며 진운룡이 덧붙였다.
“본좌가 마음만 먹으면 너희의 목숨을 가지고 노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 말은 사실이다. 모든 군웅들이 그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멍청한 변장을 하고 있을 필요는 없겠지.”
쿠구구구.
독왕 갈월의 모습이던 얼굴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기괴한 모습이었으나 어느 누구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곱사등이 체형이 곧게 펴지며 건장한 체형을 만들어 냈다. 검버섯 가득하던 피부가 매끄럽게 변했다.
이윽고 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진운룡. 물론 그의 존재를 알고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기에 모두들 놀라기만 한 얼굴이었다.
“다, 당신은 대체 누구요?”
명규의 물음이었다.
진운룡은 코웃음을 치고서 대답했다.
“본좌가 누구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늘어놓아 너희를 이해시킬 생각도 없고. 중요한 것은 한 가지 사실뿐이다. 본좌가 너희를 지배한다는 것.”
어느 누구도 더 이상의 질문을 꺼내진 못했다. 그가 질문이 무의미하다고 말한 이상, 자신들의 생각이야 어떻든 모든 질문이 무의미했다.
그 와중에도 입을 여는 사람은 명규뿐이었다.
“그래도 우리가 불러야 할 호칭은 필요하지 않겠소?”
진운룡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그러나 염평에게 그런 것처럼 살수를 펼치진 않았다.
“무의미한 질문은 아니로군. 무의미했더라면 네 머리도 박살이 났을 거다.”
“…….”
“하지만 그렇게까지 의미가 있다고도 하기 어렵겠군. 너희가 본좌를 부를 이름은 하나로 족하니 말이야.”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사방이 막혀 있는 장소이건만, 군웅들은 하나같이 살갗을 에는 바람을 느꼈다.
“본좌는 너희의 주인이다. 너희가 본좌를 부를 호칭 역시 주인 하나면 족하겠지.”
심히 굴욕적인 처사다. 이건 숫제 자신들을 노예로나 다루겠다는 말이 아닌가?
그러나 항의할 수 없다. 대항할 수도 없다.
그는 강한 존재이기에. 자신들이 감히 대적하기를 꿈꿀 수도 없을 만큼 압도적인 존재이기에.
아마도 중원 최초일 심멸의 주인이기에.
다음 순간 군웅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진운룡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다른 무엇도 아닌 그들의 본능이 시킨 일이었다.
진운룡은 마치 그게 당연한 일이라는 듯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