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二章 중원을 불사르는 자
‘몇 명이었지?’
진백란은 마음속으로 가늠해 보았다. 그녀가 이곳에서 쓰러트린 자들을.
대충 다섯 명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로는 영 가물가물했다.
그녀가 멍청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몽환림의 안개가 드디어 머릿속을 잠식해 들어왔기 때문일 뿐.
이 안개는 강력한 독이었다.
사람을 죽이지는 않되, 강력한 환각으로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다.
실제로 지금껏 만났던 이들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하나같이 철로백 이상의 고수들이었지만, 어딘가 맛이 가 있는 모양새였다.
‘이 안개 때문이야.’
어쨌든 그 덕에 진백란은 연승할 수 있었다. 순전히 안개에 대한 면역력이 좀 더 강한 덕이었다.
물론 좋기만 하진 않았다. 그녀 역시 상당한 타격을 입었으니까.
지금도 채 회복되지 않은 상처가 온몸에 가득했다.
피로감이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고, 눈앞도 가물가물했다.
무엇보다 큰 문제점은 포기하고 싶어진다는 점이었다.
‘넌 지금까지 훌륭하게 싸웠어. 여기서 물러난다 해도 아무도 비난하지 않을 거야.’
‘이제는 포기해도 되지 않겠어? 이렇게 고집을 부려 봐야 힘들기만 하잖아.’
마음속에서 연신 그만두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누군가의 것도 아닌, 그녀 자신이 속삭이는 목소리였다.
“닥쳐.”
진백란이 목소리를 냈다. 마음속의 목소리가 잠시 물러났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속삭이기 시작했다. 진백란은 미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왜 절정고수조차 몽환림에서 버틸 수 없는 것인지 너무나 잘 알 것 같았다.
으득.
그녀는 입술을 깨물어 피를 냈다. 고통이 느껴지니 약간은 머릿속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이제 몇이나 남았을까?’
그녀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를 계속해서 걸었다. 그저 걷다 보면, 숲이 그녀를 다음 상대에게로 인도할 터였다.
그리고 반 각 후.
비틀거리는 인영이 멀리서 나타났다.
“당신은……?”
“넌!”
나타난 인영은 유장천이었다. 그 역시 상당한 혈투를 겪었는지 온몸에 상처가 가득했다.
유장천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마침내 만났구나. 그리고 용케도 살아남아 있었구나. 너를 만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
스스스스.
유장천의 어깨 뒤로 진득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혈귀왕이란 별호답게 그가 내뿜는 살기를 진한 핏빛이었다.
‘아직도 저 정도 여력이 남아 있다니.’
진백란은 기가 막힌 심정이었다. 그녀 역시 단련을 통해 일취월장했지만, 유장천과는 아직까지도 꽤나 격차가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형.
몽환림의 안개는 그나마 그녀에게 더 친절했다.
“제길. 이 빌어먹을 안개 같으니.”
혈귀왕이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눈이 반쯤 풀려 있는 걸로 봐선 안개에 의한 환각이 상당한 듯했다.
이건 기회였다.
“힘들어 보이는군.”
“닥쳐라.”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되겠어? 이러는 동안에도 녹운담은 당신을 배반할 책략을 꾸미고 있을 텐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유장천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기실 그 역시 녹운담을 믿지 않고 있는 까닭이었다.
두 마인 사이에 있는 커다란 불신.
그것을 이용한다면 싸움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었다. 그들보다 약한 진백란으로선 그 점을 파고들어야 했다.
“녹운담은 교활한 작자지. 나와 당신이 싸우느라 서로 체력을 소모하고 나면 유유히 나타나 우리 둘의 숨통을 끊을걸?”
“개소리를…….”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자가 얼마나 대단한 모사꾼인지는 나보다도 당신이 더 잘 알 텐데?”
“으음.”
유장천이 침음을 흘렸다.
다른 이야기였다면 이렇게까지 고심하지도 않았으리라. 그저 시답잖은 술수라며 웃어넘겼을 터.
그러나 녹운담에 대한 거라면 얘기가 달랐다. 하물며 몽환림에 의해 정신력이 약화된 지금이라면.
‘좋았어!’
멍청이의 심지가 흔들리고 있다.
잘만 한다면 유장천과 녹운담이 동귀어진하게 만들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진백란은 모르고 있었다. 자기도 실수를 하고 있다는 것을.
파앗!
그녀의 뒤편에서 안개가 흩어지며 인영이 솟구쳤다. 패월군 녹운담이었다.
“아……!”
당황한 그녀가 나찰수라를 뽑으려 했지만 녹운담이 훨씬 빨랐다.
그의 권격이 진백란을 난타했다. 그녀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고스란히 얻어맞았다.
진백란은 삽시간에 피투성이가 되어 널브러졌다. 그야말로 무자비한 기습이었다.
“흥. 멍청한 최후로군.”
녹운담은 헐떡이는 진백란의 턱을 걷어찼다.
그녀의 몸이 축 늘어졌다.
“이걸로 대충 정리가 된 모양이군. 그런데 무슨 얘기를 하고 있던 건가, 유장천?”
“…….”
“괜찮은 건가?”
녹운담이 재차 묻자 유장천이 꿈에서 깬 듯한 표정을 지었다.
녹운담은 의아했지만 이내 의심을 지웠다.
“몽환림의 환각 작용 때문인가 보군. 하긴 견디기가 무척 어려울 거야. 나 역시 머리가 지끈거리고 있으니 말이야.”
“……그런 것치고는 멀쩡해 보이는군.”
“최대한 전투를 피해 다녔거든. 뭐, 다 저 멍청한 계집 덕분이지.”
“무슨 뜻이지?”
녹운담은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숲에 의해 가장 먼저 맞닥뜨린 건 나와 진백란이었지. 하지만 난 최대한 기척을 죽인 채 그녀를 미행하기로 했다. 힘을 비축할수록 유리한 게 당연했으니 말이야.”
“…….”
“그 덕에 저 멍청이는 본래 나와 붙었어야 했던 놈들과 일일이 맞붙게 되었지. 운이 따랐는지 연승을 거두기는 했지만 말이야.”
녹운담이 웃는 낯으로 유장천의 어깨를 툭 쳤다.
“어쨌든 모두 끝났다. 보아하니 남은 것은 우리 둘뿐인 것 같다.”
“…….”
“그래서 말인데, 생각해 보니 굳이 자네가 천마가 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그냥 우리 두 사람이 함께 숲 밖으로 나가면 두 명의 천마가 탄생하는 것 아니겠나? 그러면 처음 계획했던 것처럼 우리 둘이서 마교를 지배할 수 있겠지.”
유장천은 웃었다. 살기가 걸려 있는 미소였다.
“그래서?”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인가. 같이 숲을 나가자는 얘기지.”
“기회를 보아 본좌를 치려는 게 아니고?”
녹운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무슨 소리인지는 본좌보다도 네놈이 더 잘 알고 있을 터인데?”
“저 계집에게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속아 넘어가지 말게.”
“아니. 저년의 수작과는 별개다. 본좌가 말하고픈 건 네놈의 속내지. 애초부터 네놈은 언제든 본좌의 뒤통수를 칠 생각이었잖나?”
“…….”
“아니라고는 못하겠지. 녹림채나 다스리면서 왕이라도 된 양 굴어대는 여우같은 놈.”
녹운담의 얼굴이 기어코 일그러졌다.
“머릿속에도 근육만 들어찬 네놈 같은 얼간이가 할 말은 아닐 텐데?”
“네놈이 감히!”
유장천에게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폭사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녹운담도 마찬가지였다.
평소 같으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그러나 몽환림의 안개는 그들의 감정을 극한으로 치닫게 했고, 본디 서로를 배반할 생각을 갖고 있던 그들은 결국 이빨을 드러냈다.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는 힘.
몽환림이 가진 가장 무서운 능력이었다.
“네놈을 죽이고 본좌가 천마가 되겠다!”
“천마가 되는 것은 나다!”
둘의 기세에 안개가 파르르 떨며 물러났다. 그들은 숲 전체를 뒤엎을 기세로 격돌했다.
콰과과광!
사방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유장천의 환도와 녹운담의 주먹이 부딪칠 때마다 부서진 나뭇조각과 바위 부스러기가 비산했다.
“죽어라!”
“죽는 건 네놈이다!”
포효와 같은 외침 뒤로 충돌음이 뒤따랐다. 그럴 때마다 거대한 고목이 쓰러지거나 땅이 파헤쳐져 흙을 튀겨 냈다.
그러는 와중에도 숲은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느릿하지만 분명하게.
진백란이 둘의 싸움에 휘말리지 않은 것은 순전히 그 덕이었다.
“으음…….”
그녀는 신음과 함께 정신을 차렸다. 턱을 세게 걷어차였기에 아직까지도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죽은 건가?’
그런 것 같진 않았다. 온몸이 아프다며 신호를 보내 오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정신을 깨웠다.
그리고 혈투 중인 두 사내를 발견했다.
유장천과 녹운담. 그들이 서로를 찢어발길 기세로 공방을 펼치고 있었다.
‘결국은 이렇게 됐구나.’
잘됐다는 생각보다도 씁쓸함이 느껴졌다. 천마 생전엔 누구보다도 주도적으로 마교를 이끌어 나가던 그들이었다.
물론 그때도 야망이야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억누르며 때를 기다려 왔을 테고.
어찌 됐든 이제는 적일 뿐.
진백란은 기척을 최대한 죽였다. 이제 와서 저들에게 그녀가 깨어났다는 것을 알려서 좋을 것은 없었다.
전투는 차츰 녹운담이 지배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체력 소모가 상당했던 유장천보단 그가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콰직!
주먹이 꽂힌 유장천의 왼쪽 어깨가 그대로 함몰되었다. 견갑골까지 그대로 비틀렸을 터.
“끄으……!”
유장천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이제 움직일 때마다 그의 왼팔은 불에 데인 듯 고통스러울 것이다.
녹운담이 서늘하게 웃었다. 자신이 완전히 우위에 섰음을 인지한 것이다.
“네놈의 혈사문은 내가 잘 거두어 주지. 어차피 천마가 되고 나면 마교의 모든 것이 내 것이겠지만 말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유장천이 남은 힘을 모두 짜냈다. 왼팔을 포기하고서 공격에만 전념하기로 한 것이다.
‘일격만, 어떻게든 일격만 먹일 수 있다면!’
그러나 녹운담은 냉정했다.
괜히 들떠서 반격의 빌미를 주느니, 시간을 끌어 유장천을 서서히 파멸시키기로 했다.
유장천의 움직임이 이내 눈에 띄게 느려졌다. 애초에 체력에서 열세였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끝이 보이는구나, 옛 전우여.”
“크윽!”
유장천이 몸부림치듯 공세를 펼쳤지만 녹운담은 차분히 회피에 전념했다.
‘슬슬 끝이 보이는군.’
녹운담이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파팟!
“……!”
지금까지와 다른 날카로운 공세였다. 그것도 녹운담에 사각에서부터 뿜어져 나온.
피할 수 없었기에 할 수 없이 팔을 들어 방어했다. 녹운담의 어깨근육이 갈라지며 피를 쏟았다.
“큭! 어떤 놈이……!”
순간 녹운담의 얼굴이 경직됐다. 진백란이 나찰수라를 든 채 서 있었던 것이다.
“너……!”
살아 있었던가. 녹운담은 그녀를 끝장내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유장천은 이제 눈도 가물가물한 지경이었다. 그래도 누군가가 녹운담을 공격했다는 것은 알았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고맙다고 해야겠군. 본좌 혼자 싸우고 싶지만, 지금은 그런 고집을 피울 때가 아니겠지.”
“멍청한 소리! 그 입 닥쳐라, 유장천!”
“본좌는 이 교활한 놈이 천마가 되는 꼴은 볼 수가 없다. 차라리 다른 놈이 되는 편이 천마신교 전체를 위해서라도 낫겠지.”
“그 입 닥치라고……!”
녹운담의 외침을 자르듯 유장천이 몸을 날렸다.
“쳇!”
녹운담은 주먹을 뻗어 그의 갈비뼈를 모조리 부숴 놓았다.
그러나 유장천은 피를 게워 내면서도 기어코 녹운담의 몸을 붙들었다.
“베어라!”
그 외침의 대상이 누군지는 뻔한 것. 녹운담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렸다.
“알겠어요.”
나직하게 들려오는 진백란의 목소리.
당황한 녹운담이 말을 더듬거렸다.
“자, 잠깐! 우리 협상을……!”
서걱!
두 사람의 목이 한데 치솟았다. 함께 마교를 호령해 온 이들치고는 너무나 허망한 최후였다.
“헉…… 헉!”
나찰수라를 떨어트린 진백란이 엎어져서 헐떡거렸다. 그녀 역시 안팎으로 부상이 심각했기에 검격 한 번도 힘든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억지로 검강을 뽑아냈으니, 몸속이 한껏 진탕이 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큭…….”
그녀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렸다. 몸속에선 통제불능의 기운이 날뛰기 시작했다.
‘주화입마!’
그렇게 되면 손쓸 도리가 없다.
진백란은 최대한 호흡을 가라앉히며 몸속을 제어하려 했다.
그사이 몽환림의 안개는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최후의 한 명만이 남았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최후의 한 명은 주화입마를 앞에 두고 있었다.
“크…… 윽!”
체내의 기운이 폭주한다. 몸 밖으로 뛰쳐나오기 위해 요동치고 있다.
조금만 더 있으면 기혈과 맥락이 온통 뒤틀리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게 끝이다.
지금껏 이룬 것도, 앞으로 이룰 것도 모두 백지로 돌아갈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그녀의 내기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한 것은.
누군가 그녀의 등허리에 손을 대고 있었다. 그곳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그녀의 내기를 인도하여 가라앉히고 있었다.
진백란은 겨우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너무 늦었잖아, 당신.”
“최대한 빠르게 달려온 거야.”
정천의 대답에 그녀는 웃음을 터트렸다.
“나 천마 됐다? 부럽지?”
“……새 천마께서는 어린애처럼 굴지 않는 법부터 배워야겠군.”
정천은 시선을 움직였다.
목을 잃은 채 사이좋게 널브러져 있는 유장천과 녹운담이 보였다.
“뭐 그래도 네가 한 것치고는 제법이었어.”
* * *
그 남자는 처음 왔을 때처럼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다. 그것도 하필 독왕 갈월이 무림 토벌에 나서기 하루 전에.
독왕은 내심 침음했다. 침소로 들어서니 초대하지 않은 자가 앉아 있었다.
최후의 혈선, 진운룡이 그를 보며 웃었다.
“두 달 만이군.”
“……그렇구려.”
반갑지만은 않은 손님이다. 지금 같은 때엔 더더욱.
독왕은 언제든 치고 나갈 수 있게 내력을 조금씩 순환시키기 시작했다.
진운룡도 그것을 알 터인데, 변함없이 여유로운 태도였다.
“그래, 무슨 일로 찾아온 것이오? 이전과 같은 도움은 한 번이면 족하다고 생각하오만.”
치명상을 입은 진운룡을 위해 독왕은 많은 것을 제공했다.
치료에 필요한 내단, 사파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는 의원들, 나아가 지친 그의 심신을 달랠 여인들까지.
진운룡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모습을 감췄다. 관련되어 있는 모든 인간을 죽이고서.
독왕쯤 되는 이로서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어이없다는 생각보다도 소름이 먼저 돋았다.
“덕분에 몸은 완전히 회복되었다. 그러고 나니 할 일이 없더군. 그래서 기분삼아 세상을 유랑했지.”
“굳이 죽일 필요가 없는 이들을 죽인 것도 그 때문이오?”
“그렇다. 뭐 상관없는 일 아닌가? 너 역시 명분 따져 가며 살생을 벌이진 않았을 텐데.”
“그건 그렇지. 하지만 다른 이를 죽이는 것과 이 갈월의 사람을 죽이는 것은 얘기가 다르오.”
“내게 있어선 별 차이가 없는데.”
독왕의 이마에 실핏줄이 돋았다.
진운룡은 그 사실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독왕을 만나러 온 것조차 별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은 아닌 듯했다.
“나는 중원을 벗어나 보았지. 두 달 남짓한 시간 동안 바깥세상을 떠돌며 많은 것을 보았다.”
“…….”
“하지만 어느 것도 나의 고향에 비할 수는 없더군. 그리고 이제 난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츠츠츠츠.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살기가 진운룡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
그 순간 독왕은 지금껏 갖고 있던 모든 감정을 내던져 버렸다. 진운룡에 대한 불만도, 그를 향한 호승심이나 분노도.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순수한 공포였다.
‘이, 이것이 인간의 힘이란 말인가?’
독왕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진운룡은 그 사실조차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너희가 내 모든 것을 앗아 갔지.”
“우, 우리가 한 일이 아니오.”
“아니, 너희들이 한 일이다. 중원인이, 지금껏 미천하다고만 여겨 왔던 존재들이 한 일이다.”
대체 무엇을?
독왕은 억울함마저 느꼈다.
자신이 전혀 연관되지 않은 일로 저런 존재의 분노를 느껴야만 하다니.
“축하한다. 너희는 비로소 나의 분노를 살 자격을 얻었다. 나는 더 이상 너희를 미개한 생물로 보지 않는다. 나의 적,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동등한 존재로 본다.”
“그, 그게 무슨…….”
콰앙!
독왕의 왼팔이 폭발하여 날아갔다.
그저 진운룡이 바라보았다는 사실만으로. 살의를 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무(武)의 궁극이라는 심멸(心滅).
무의 극치를 목도했음에도 독왕은 경탄할 수 없었다. 뇌를 불사르는 듯한 고통 때문에.
“크아아아악!”
퍼억!
독왕의 오른팔이 예리하게 잘려 나갔다.
“칼처럼 베어 냈으니, 흔히들 말하는 심검이라 할 수 있겠지. 뭐 별 상관은 없다. 곧 이것에 이름을 붙일 이들은 모조리 사라질 테니.”
“무슨, 대체 무슨 짓을…….”
“말했잖은가. 나는 너희들 중원인을 동등한 존재로 보겠노라고. 그러니 복수하려는 것이다.”
“복……수?”
진운룡의 눈이 화르륵 타올랐다.
“난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 너희가 내 고향을 없앴다. 그러니…… 이젠 내가 너희의 고향을 없앨 차례겠지.”
콰앙!
독왕의 머리가 그대로 폭발했다. 일세를 풍미한 강자의 허망한 최후였다.
전성기 때의 그였다면 이렇게 당하진 않았으리라. 그러나 독왕은 하루가 다르게 노쇠해지고 있었고, 심멸이란 것 자체를 처음 접했던 만큼 대적할 방도도 딱히 없었다.
결국은 머리를 잃고 경련하는 시체가 되어 버렸다.
“…….”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진운룡.
이윽고 그의 얼굴이 변하기 시작했다.
스스스스.
그의 몸이 뒤틀리며 왜소한 노인의 모양새를 이루었다. 깔끔하던 피부가 메마른 논처럼 갈라져 수많은 주름을 만들었다.
잠시 후 그 자리엔 독왕과 똑같이 생긴 존재가 앉아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괜찮으십니까, 독왕님?”
조금 뒤에야 무인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태연히 앉아 있는 독왕. 그리고 두 팔과 머리가 날아간 시체였다.
“암습이 있었다. 단지 그뿐이니 경거망동할 필요는 없느니라.”
“아, 알겠습니다.”
시체의 행색이 마음에 걸리긴 했으나 무인들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독왕 본인이 바로 앞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체를 가지고 무인들이 떠난 방.
진운룡은 어둠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정천이라 했던가? 넌 좋은 것을 알려 주었다. 이 세상에 나 혼자서 대적할 수 없는 적도 존재한다는 것을 말이다.’
진운룡은 홀로 세상을 멸할 수 있는 존재다. 그리고 얄궂게도 정천 역시 그러했다.
그렇다면 승패를 가르는 것은 그 외의 존재들.
그 싸움에서 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중원을 불사르겠다. 네가 기거할 수 있을 자리는 모조리 없애 버리겠다.’
진운룡의 눈이 독사처럼 빛났다.
‘나도 네게 복수하겠다. 네가 그랬던 것처럼.’
〖강룡검제 10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