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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一章 소강(小康) (106/146)

第十一章 소강(小康)

스스스스.

안개가 사정없이 그녀를 감쌌다. 마치 피부 속으로까지 스며들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답답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도리어 포근하다는 느낌이 그녀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정천의 말이 떠올랐다. 몽환림을 만든 것은 초대 천마 진천백이었다는.

어쩌면 역대 천마들이 같은 혈통이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팟!

안개를 헤치며 화살 하나가 날아들었다. 평소라면 당황했겠지만 진백란은 어렵잖게 화살을 피했다.

‘그녀의 말대로야. 이곳은 궁사의 영역이다.’

검객이었다면 진백란 쪽에서 먼저 알아챘으리라. 하지만 적은 거리를 지배할 줄 아는 궁사였고, 진백란에게 선제공격을 날릴 수 있었다.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말이다.

“제법이구나. 나름대로 수련을 했다, 이건가?”

철금속 같은 노인의 목소리. 아마 만궁노괴(滿弓老怪) 철로백일 터였다.

“그건 선배 역시 마찬가지로 보이는군요.”

“헛, 이제 제법 어른티를 내는구나. 아비의 위명으로 칠절의 자리를 얻었던 주제에.”

철로백의 목소리에서 살기가 묻어났다.

그는 진백란을 증오하고 있었다. 혈통 때문에 그를 제치고 그녀가 칠절의 자리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때 일은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죄송이라. 사과를 하기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나?”

“……그렇군요. 좀 더 일찍 찾아뵙지 못한 건 분명 제 잘못입니다.”

“그게 아니라 찾아올 생각이 없었겠지. 나와 독대하는 것이 두려웠을 테니. 네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할 수 없었을 테니.”

“선배의 말씀이 옳습니다.”

순간 한쪽의 안개가 파르르 떨렸다.

“그렇게 간단히 인정하지 마라! 나는 잘못이 없노라고,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고 뻗대라! 그래야 네 미간을 꿰뚫는 즐거움도 배가 될 테니!”

“죄송하지만 선배는 아무것도 뚫을 수 없을 거예요.”

팟!

진백란이 몸을 날렸다. 조금 전 안개가 떨렸던 장소를 향하여.

나찰수라가 뽑혀 나오며 시뻘건 광채를 뿜었다. 검의 기세 때문인지 안개들이 순간적으로 물러났다.

‘없다?’

진백란은 일순 당황했다. 분명 이곳에 있어야 할 터인데, 철로백은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순간 왼쪽에서 느껴지는 살기.

타앙!

화살은 아슬아슬하게 나찰수라에 튕겨 나갔다. 검을 드는 게 좀만 늦었더라도 목이 꿰였으리라.

“으……!”

당황한 진백란이 검기를 쏘아 날렸다. 화살의 진원지를 노린 것이었지만 박살나 쓰러지는 것은 아름드리 고목이었다.

이번엔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살기.

“……!”

황급히 몸을 날렸지만 허벅지에서 불길이 일었다. 신음을 삼키며 확인하니 원래 있었던 것인 양 화살이 꽂혀 있었다.

‘강하다!’

별다른 움직임을 보인 것도 아닌데 숨이 찼다. 터질 것 같은 긴장감 때문이었다.

진백란은 커다란 고목 뒤에 숨어 호흡을 조절했다.

문득 자신의 처지가 우스워졌다.

‘잘난 척하듯 모두 앞에서 선언했었지.’

그녀는 천마가 되겠다고 했다. 나찰수라를 뽑아 들고 모두의 앞에서 당당히 말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녹운담의 말이 옳았다. 그녀는 그저 검의 위세를 빌리고 있었을 뿐이다.

‘그의 앞에서도 말했었어.’

정천의 힘을 빌리지는 않겠다고, 자신의 힘만으로 천마제전에서 승리할 거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적 하나를 처리하지 못해 이 꼴이다.

그들이 본다면 비웃을 터였다. 그리고 비웃음을 당하더라도 쌌다.

‘나는 아무것도 성장하지 못한 걸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진백란은 포기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독려했다.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자의 마음으로 맞서는 거야. 내가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거기서부터 조금씩 나가자.’

진백란은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 요태희가 그녀와 대련하며 조언했던 것이 있었다.

“화살을 쫓아선 안 돼요. 화살이 날아들 때 이미 궁사는 움직이고 있어요. 궁사의 마음을 한발 먼저 앞서갈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궁후의 조언이다. 과연 그녀가 만궁노괴보다 뛰어난 존재일까?

그렇지는 않을 터였다.

팟!

사고(思考)를 꿰뚫으며 화살이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고목 위, 그녀의 정수를 노리는 화살이었다.

진백란은 땅을 박찼다. 허벅지에 박힌 화살 때문에 이물감이 느껴졌으나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고목 위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미 철로백이 그곳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가 있을 법한 곳은?’

조금 전의 화살로 끝장을 보려 하진 않았으리라. 그보다는 그녀를 유인하려는 게 목적이었을 터.

‘만약 내가 고목 위로 치솟았다면, 어디서 노리는 게 좋았을까?’

그녀는 빠르게 해답을 찾아냈다.

‘십여 장 거리에 있는 커다란 바위 뒤!’

그녀의 몸이 삽시간에 그곳으로 치달았다.

“하압!”

기합성과 함께 일검을 뻗었다. 붉은 검강이 바위를 직격했다.

콰아앙!

폭발음과 함께 튀어 오르는 인영이 하나.

“크윽!”

만궁노괴 철로백은 당황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녀의 사고를 웃돌고 있었던 자신이, 이젠 반대로 그녀에게 읽히고 있었던 것이다.

일격은 피했다지만 위치를 노출했다. 그것만으로도 궁사인 그에겐 치명적이었다.

“끝이에요!”

진백란은 매섭게 철로백을 몰아붙였다. 접근전은 그녀의 영역이었고, 몇 합 지나지 않아 철로백의 활이 반으로 갈라졌다.

“내가 패했다.”

땅에 널브러진 철로백이 패배를 인정했다. 진백란은 나찰수라를 회수하고는 말했다.

“몽환림을 나가서 보고하세요.”

“나를 죽이지 않을 셈인가?”

천마제전의 패배 조건은 두 가지다.

몽환림을 빠져나가 패배를 인정하거나, 다른 참가자의 손에 죽거나.

그중 선호되는 쪽은 후자였다. 천마제전에 참가할 정도라면 강자임이 분명했고, 이는 곧 후환의 싹이기도 했으니까.

후환은 제거해 두는 것이 정설.

그러나 진백란은 그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아무도 죽일 생각은 없습니다. 새로운 천마신교를 위해 필요한 사람들일 테니까요.”

“그 물렁함이 네 목을 죄어 올 수도 있다.”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감당하는 수밖에요.”

“이상한 사고관이군.”

진백란은 담백하게 웃었다.

“저는 아버님이나 할아버님, 나아가 역대 천마들처럼 강하지 못해요. 부족한 게 많고 배워야 할 게 많죠. 그러니 혼자서는 해낼 수 없습니다.”

“…….”

“많은 가르침 부탁드리겠습니다.”

“흥.”

철로백은 코웃음을 치며 몸을 일으켰다.

“더 이상 예전의 어린애는 없는 건가.”

“예?”

“아무것도 아니다.”

철로백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그가 멀어지자 진백란은 한숨을 토하며 주저앉았다.

“힘들구나.”

체력이나 내력의 소모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단순한 생사투 이상의 긴장감을 견디기가 쉽지 않았다.

그녀는 일단 화살을 뽑아 내고 상처를 치료했다. 그 와중에도 연신 기습에 대비한 채.

‘이 긴장감이 가장 큰 문제야.’

언제 어디서 적과 맞닥뜨릴지 모른다는 점. 그것이 천마제전의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그렇더라도 그녀는 승리해야만 했다.

* * *

“너, 유령마객…….”

쿠웅.

백사귀가 쓰러졌다. 유령마객은 땀으로 범벅이 된 채 헐떡였다. 그의 몸을 칭칭 감아 놓은 붕대도 상당 부분 풀려 있었다.

“제법이군.”

백미련이 짤막히 말했다. 치열했던 사투에 대한 감상치고는 싱거웠다.

“좋아. 그럼 다음 목적지로 가지.”

정천이 몸을 돌렸다. 그 행동에 남아 있던 백혈회 무인들이 움찔거렸다.

정천이 그들 하나하나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당장 꺼져서 마교 전체에 알려라. 새로운 천마의 동지들이 귀암산을 뒤집어 놓을 거라고.”

반 시진 후.

귀암산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소문은 삽시간에 날개를 달아 곳곳으로 퍼졌다. 어떤 이들은 정파의 침략이 시작되었다고 소리쳤고, 어떤 이들은 모든 것이 진백란의 모략이라고 주장했다.

그 모든 것들은 갖가지 무용담에 가려져 이내 위세를 잃었다.

홀로 오백에 달하는 무인들을 쓰러트린 대머리 칼잡이의 이야기가 자리를 대신했다.

일만 군사로도 뚫을 수 없다는 백혈회당 정문을 일격에 박살낸 사내의 이야기도 있었다.

아홉 자루의 검을 다루는 여인, 무정검 관식과 유령마객의 이야기도 있었다.

오히려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는 천마제전의 이야기가 묻힐 지경이었다.

모두가 수군거리고 있을 때, 두 번째 풍문이 몰아닥쳤다. 흑룡방이 습격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습격자들은 삽시간에 흑룡방 무인들을 몰아붙였고, 이각이 채 지나기 전에 흑룡방부 매열륜이 항복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이번엔 습격자들의 이름도 함께였다.

‘우리는 용검대다.’

용검대!

젊은 무인들은 의아해했고 나이 많은 무인들은 전율했다. 그 이름이야말로 그들이 오랫동안 묻어 두었던 악몽과도 같았다.

과거 마교의 가장 큰 적이었다고도 할 수 있는 무리.

이젠 그들이 귀암산 내에서 활개를 친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진백란을 위해서.

당장 마교 전체의 힘으로 그들을 쳐야 한다는 의견이 득세했다.

그들이 진백란의 협력자이니 이름이야 어떻든 마교 내의 세력이란 의견도 일어났다.

찬반양론이 뜨겁게 끓어올랐다. 천마제전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자는 중재론도 한자리를 차지했다.

그사이 새로운 이야기가 한 곳에서 똬리를 틀었다.

용검대에 맞서기 위해 신생 강룡단이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그들을 이끄는 이는 멸살독마.

마교 내의 여론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 * *

“이들인가?”

“그렇다.”

멸살독마의 대답에 정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백란의 부탁을 받아 멸살독마 본인이 직접 선출한 오십 명의 무인들.

하나같이 당혹감이 어린 채 정천을 보고 있었다. 하기야 그들로선 모든 것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근데 믿을 수는 있는 실력들인가?”

첫 한마디부터 저들의 자존심을 슬슬 건드리는 정천. 성질 급한 몇 명이 눈을 부릅떴다.

멸살독마는 혀를 차고서 대꾸했다.

“마의가 선별을 도왔다. 사람 보는 안목으로는 네놈이나 옛 천마님까지 능가하는 작자지.”

“그렇군. 그렇다면 믿을 수 있겠어.”

본래는 정천 본인이 선별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부족했기에 진백란에게 맡겼고, 다행히 그녀는 제대로 된 해답을 내놓았다.

정천은 신생 강룡단의 무인들을 돌아봤다.

“나는 옛 진마동 토벌대의 유일한 생환자다.”

무인들 사이로 동요가 일었다. 비교적 젊은 그들이었으나 진마동의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당대 최강의 타격대인 용검대와 강룡단. 그들 전부가 투입된 작전.

듣기로 살아 돌아온 이는 아무도 없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그들 앞에 선 남자가 그 유일한 생환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걸 어떻게 믿으란 말이오?”

무인 한 명이 입을 열었다. 다른 무인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거한이었다.

정천은 웃는 낯으로 물었다.

“마의와 멸살독마의 확인이 있는데도?”

“그들의 말이라고 항상 옳다고는 할 수 없지. 댁이나 진백란에게 회유되었을지도 모르고.”

멸살독마가 눈살을 찌푸렸다. 마의가 사람 뽑는 기준에 예의 같은 것 없었나 보다.

반명 정천은 도리어 이 상황이 반가운 눈치였다.

“확실히 네 말이 옳군. 그렇다면 그곳에서 생환했다는 걸 증명해야겠는데, 뭐 좋은 방법이 있어 보이나?”

“흥.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쩌자는 거요?”

거한이 순간 사납게 웃었다.

“하지만 내게 명령할 수 있는 남자인지는 확인할 수 있겠지.”

“그렇군. 결국 주먹이란 건가?”

“왜, 무섭소?”

거한의 물음에 정천이 픽 웃었다.

“개미를 두려워하는 호랑이도 있나?”

“……건방진 성질머리를 고쳐 주지!”

거한이 전각 한 번에 거의 십여 장 거리를 좁혔다. 체격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정천은 내심 감탄했다. 거한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이런 자를 선출해 준 마의의 안목에 대해서도.

‘이 정도면 굳이 봐주지 않아도 되겠지.’

생각은 그걸로 끝이었다. 정천은 도리어 거한의 품속으로 파고들어서는 복부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거한으로선 반응할 수도 없는 속도였다.

“꺼어…… 억.”

외마디 비명과 함께 거한이 거품을 게워 냈다. 그걸로 상황은 끝이었다.

그 무위를 처음 목도하는 무인들은 물론, 멸살독마조차도 새삼 정천의 무력이 침음을 삼켰다.

‘괴물 같은 녀석.’

정천은 거한을 바닥에 엎어 놓고는 무인들을 돌아봤다.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시선이 느껴졌다.

“더 할 말이라도 있나?”

“…….”

“없는 걸로 알겠다. 내가 너희를 통솔하더라도 문제는 없겠지?”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거부의 의미가 아니라, 놀라 얼어붙어서 말도 꺼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인 정천이 유령마객을 돌아봤다.

“다음은 어디지?”

파죽지세의 연파.

강룡단을 흡수한 용검대는 패신림의 내단 보관고를 급습했다. 그곳을 약탈해 버린 다음엔 혈사문의 무기고를 습격했다.

마지막으로 두 세력의 전서응 우리를 기습, 모든 전서응을 거두어 버렸다.

그리고 반 시진쯤 지났을 때엔 몇 군데의 마구간을 급습해 버렸다.

반나절이 채 지나기 전에 두 세력은 먹통이 되어 버렸다. 연락망 곳곳이 공격당함으로써 모든 명령 체계가 붕괴된 것이다.

그로 인해 남은 선택지는 수비에만 집중하는 것.

얄궂게도 신생 용검대는 그 시점에서 습격을 멈추었다.

두 세력으로선 정말 분통이 터질 일이었다.

물론 그들도 가만히만 있지는 않았다. 어차피 본거지를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수천의 무인들이 제멋대로 모여들었다. 주로 각 파벌의 하급 무인들이었다.

그들은 앞다투어 일마궁 앞으로 몰려갔다.

전쟁을 불사할 생각을 하고서.

그곳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장유추였다. 그는 폐허가 되다시피 한 숲 한가운데에 홀로 서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무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데, 쓰러져 있는 이들의 신음 소리도 긴장을 더했다.

“끄으으…….”

“으으.”

대다수가 중상. 생각보다 죽은 이는 많지 않았다. 마교의 무인들로서는 더욱 안 좋은 일이었다.

장유추가 그들을 비웃듯 말했다.

“뭐하나? 부상자들을 데려가지 않고.”

“…….”

“그게 아니면 그냥 죽게 놔두겠다는 건가? 마교의 동지애는 참으로 눈물겹군.”

명백한 도발.

마교 무인들이 이를 갈았지만 넘어가는 것은 더 멍청한 일이었다. 그들은 일단 부상자들을 후방으로 이송했다.

그리고 장유추를 둥글게 포위했다.

“죽을 각오는 되었겠지, 늙은이?”

“살아서 여길 나갈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마라.”

수천 명이 쏘아 내는 살기가 장유추에게 집중되었다. 장유추는 피부가 떨리는 느낌에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로구나, 이런 기분.”

“…….”

“하지만 너희들은 머리가 좋지 않군. 아마도 정천 그 친구가 난리를 쳐놓았기 때문이겠지만 말이야.”

콰과과광!

한곳에서 일대 광풍이 몰아쳤다. 모두가 놀란 가운데 귀도신마가 무인들을 베어 넘기고 있었다.

그는 잔뜩 화가 난 얼굴이었다.

“이 망할 자식! 혼자서 재미란 재미는 다 보다니!”

장유추가 껄껄 웃었다.

“늦잠을 잔 네놈 잘못이지.”

“웃기지 마라! 어젯밤 내 찻잔에다 수면제를 탄 게 네놈이지?”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다만.”

“이놈! 이미 하인 놈을 닦달해서 알아낸 사실이다.”

“흠.”

장유추는 팔짱을 끼었다. 단번에 그가 있는 곳까지 파고든 귀도신마가 귀령도를 들어 보였다.

“그러니 젊은 것들아! 이 자식은 무시하고 우리끼리 놀아 보자꾸나!”

“새치기하지 마라. 이 녀석들은 노부와 선약이 있다.”

“그딴 선약은 갖다 버리라고 해라!”

두 명의 외팔이 도객이 드잡이질을 하고 있다. 마교의 무인들은 어이가 없어진 표정으로 그 모습을 하릴없이 바라봤다.

당장 공격하고픈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거의 알려진 게 없는 장유추야 그렇다 쳐도 귀도신마는 마교칠절의 일원이 아닌가.

그야말로 마교의 정점.

그 위명만으로도 나는 새를 떨어트리는 인물이다. 무인들이 위축되는 것도 당연했다.

“쯧쯧. 하여간 싸우는 것밖에 모르는 무뢰배 녀석들이란.”

또 한 명의 노인이 나타나자 무인들은 할 말을 잃었다. 이번엔 유일하게 남은 철절삼마인 멸살독마였던 것이다.

그 역시 마교 제일의 위명을 자랑하는 존재. 게다가 다수를 상대하는 전투에선 도객들을 아득히 능가하는 존재였다.

그가 손만 한 번 떨쳐도 몇 명의 무인들이 쓰러지게 될 것인가.

고작 세 명이 모였을 뿐인데도 무인들은 전의가 상실되는 걸 느꼈다.

멸살독마는 두 도객을 힐난했다.

“미치광이처럼 날뛰기만 하면 능사인 줄 아느냐? 그만 날뛰고 칼들 집어넣어라.”

“하지만 독마…….”

“귀도신마, 이놈!”

“쳇.”

귀도신마는 구시렁거리면서도 귀령도를 집어넣었다. 본디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두 사람이었으나, 그동안 멸살독마도 귀도신마도 상당히 변해 있었다.

장유추 역시 광천뇌도를 회수했다. 꽤 지쳐 있었던 그로서는 사실 반가운 일이었다.

멸살독마가 혀를 쯧쯧 찼다.

“모두가 아까운 무인들이다. 장차 마교천하를 위하여 힘을 합쳐야 할 아해들이거늘, 멍청한 칼잡이들이 자기 좋을 대로 핍박을 하다니.”

“독마, 쳐들어온 건 우리가 아니라 저 녀석들…….”

“시끄럽다!”

귀도신마가 입을 다물었다.

멸살독마에겐 노강호이기에 가능한 위엄 같은 것이 있었다.

멸살독마는 몸을 돌려 무인들을 돌아봤다.

“아해들아, 너희들도 이만 물러가라.”

“하, 하지만 독마님…….”

“천마제전이 진행 중이다. 어차피 모든 것은 그 결과에 의해 판가름이 나게 될 터. 더 이상 싸우는 것은 무의미하다.”

패신림과 혈사문 입장에선 기가 막힐 일이었다.

자신들은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을 뿐인데, 가해자가 이제 화해하자며 손을 내미는 꼴이었으니.

“당하기만 하고 물러나란 말입니까?”

어느 혈기왕성한 무인이 외쳤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멸살독마가 반문했다.

“그럼 기어코 끝장을 보겠다는 것이냐?”

“…….”

“이 두 놈이 강하다는 거야 알고 있겠지. 거기에 이 늙은이도 가세한다면 너희들로서도 꽤나 고전하게 되겠지. 게다가 여기엔 우리 세 사람만이 있는 것도 아니란다.”

“…….”

“그럼에도 기어코 피를 보겠다면 말리진 않으마. 하지만 죽음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더 이상 싸우겠다며 나서는 이는 없었다.

멸살독마는 놀랍게도 홀로 수천 명을 제압해 버린 것이다.

긴 연륜과 위명이 빚어 낸 성과였다.

결국 무인들은 하릴없이 물러났다. 애초에 지휘관 하나 없이 흥분하여 몰려들었을 뿐. 흥분이 가라앉자 물러나는 것도 빨랐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귀도신마가 혀를 내둘렀다.

“역시 언제 봐도 대단한 혓바닥이우. 저 기운 넘치는 놈들을 쫄아 물러나게 하다니.”

“그걸 고작 말장난으로만 받아들였다면 네놈도 아직 멀었다.”

가볍게 핀잔을 준 멸살독마가 중얼거렸다.

“이제 남은 일은 그분이 돌아오시기만 기다리는 것이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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