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八章 폭풍전야 (103/146)

第八章 폭풍전야

‘정천!’

문지기에게서 그 이름을 들었을 때, 멸살독마는 귀가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

지금껏 그는 고심하고 분개하고 있었다. 어떻게 유장천과 녹운담을 저지할지 고민했고, 놈들의 후안무치함에 분개했다.

때문에 유령마객의 방문도 거절했던 것.

그러나 이젠 그럴 이유가 사라졌다. 아니, 해답이 보일 것도 같았다.

“그를 들라 일러라!”

문지기가 허둥지둥 뛰어가고 반각이 되지 않아 세 사람이 나타났다.

유령마객과 관식.

그리고 정천.

멸살독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 중요성과는 별개로, 어쨌든 정천과는 악연이었으니 말이다.

“벌써 그 둘을 구워삶은 것이냐. 간교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로군. 네놈은 또 무슨 짓을 벌인 것이냐?”

독설로 운을 떼는 멸살독마. 그답다면 그다운 반응이었다.

정천은 피식 웃었다.

“딱히 한 일은 아무것도 없는데.”

“흥. 네놈의 말은 믿을 수 없다.”

“그럼 왜 불러들였지?”

멸살독마의 말문이 막혔다.

분위기가 조용해지자 유령마객이 운을 뗐다.

“당신의 도움을 받고자 하여 찾아왔소, 멸살독마.”

“도움? 네놈들도 말이냐? 네놈들은 나를 어떻게 이용해 먹을 생각이냐?”

“이용이라니, 우린 그런 생각은…….”

유령마객이 입을 닫았다. 정천이 손을 들었던 것이다.

정천은 차분한 눈으로 멸살독마를 응시했다.

“이미 놈들이 왔다 갔군.”

“…….”

“유장천과 녹운담이라던가? 마교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졌다는 두 녀석.”

멸살독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움찔거리는 그의 몸이 이미 대답이었다.

정천이 멸살독마를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았다.

“말해 보시지. 놈들이 제안한 게 무엇인지.”

“내가 네놈에게 말해야 할 이유 따위는 없다.”

“대단한 고집이군. 그럼 내가 추측하는 것을 들어보기나 해. 정확히는 저 붕대 녀석이 추측한 거지만.”

“…….”

“두 놈은 마교를 공동 통치로 다스리려 한다. 그러기 위해 천마제전을 폐지하려 하고 있지.”

“……!”

충분한 반응이었다. 멸살독마는 부릅뜬 눈으로 정천과 유령마객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당신은 놈들의 협력을 요구받았다. 보아하니 이미 왔다가 간 모양이군.”

“……그렇다.”

“그래서, 따를 생각인가?”

쾅!

멸살독마가 두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탁자는 당연히도 반으로 쪼개져서 화병과 그릇 등을 쏟았다.

“놈들은 나를 협박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가씨를 죽이겠다면서!”

“아가씨라면, 진백란 말인가?”

“그 외에 누가 있겠느냐!”

정천은 팔짱을 끼었다.

“그 정도 협박에 넘어갔다는 거군. 진백란이 듣는다면 분통을 터트리겠는데.”

“네놈은 아무것도 모른다. 녀석들은 이미 마교 전체 무력의 오 할을 차지하고 있다. 나머지 모두가 연합해도 상대가 될까 말까인데, 아가씨 홀로 대적할 수 있다는 말이냐?”

“혼자는 아니지.”

“혼자나 다름없다. 그분의 세력은 미약하기 짝이 없고 네놈들 정파 놈들은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뭐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 하지만 놈들의 요구는 따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멸살독마가 충혈된 눈으로 정천을 노려봤다.

“아가씨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네놈이 책임이라도 질 것이냐?”

“난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아.”

“그렇다면 나도 더는 할 말이 없다! 꺼져라!”

멸살독마가 축객령을 내렸지만 정천은 움직이지 않았다.

“우습군. 내가 책임을 지겠다고 말했다면 더 할 말이 있었을 거란 의미인가?”

“…….”

“내가 말할 것은 하나뿐이야. 놈들을 저지하고 진백란을 천마로 등극시키겠다는 것.”

“……!”

멸살독마가 눈을 부릅떴다.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였다.

“네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

“가는귀가 먹었나? 진백란을 천마로 만들어 주겠다고 말했어.”

“오만한 소리를 잘도 지껄이는구나.”

“댁이야말로 너무 그녀를 무시하고 있군. 그녀 역시 천마의 피를 타고났다. 지금까지의 천마들이 그랬던 것처럼.”

옳은 말이다. 멸살독마는 아무 반박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침묵하며 필사적으로 생각해 낸 것은 변명 아닌 변명이었다.

“그분은 물론 영민하시다. 하지만 아직은 개화하지 못한 꽃이야. 칠절의 일원이시긴 했지만 다른 여섯에 비해 무위도 떨어지는 편이었고.”

“그만큼 어렸으니까. 게다가 그녀의 스승이 그렇게 배분해 놓은 점도 있고.”

“배분이라니? 천마께서 말이냐?”

“그래.”

“그게 대체 무슨……?”

“길게 설명할 생각 없어. 어쨌든 그녀는 빠르게 강해질 거다. 아버지만큼은 아니겠지만.”

멸살독마는 생각에 잠겼다. 주름 가득한 그의 얼굴에서 연신 식은땀이 흘렀다.

침묵을 깬 그가 물었다.

“그래서, 천마제전을 속행하란 말이냐?”

“그래.”

“두 놈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겠지. 하지만 천마제전 당일까지는 아무 행동도 할 수 없을 거야. 그 전에 움직여서는 여론이 좋지 않을 테니.”

“별 차이는 없다. 놈들은 언제라도 판도를 뒤집을 수 있는 세력을 지니고 있으니까.”

“그렇겠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세력에 불과해.”

“그게 무슨 소리냐?”

정천은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머리를 잃은 뱀이 할 수 있는 건 몸부림치는 일뿐이지. 간단한 것 아닌가?”

“…….”

서늘한 감각이 멸살독마의 등허리를 훑었다. 눈앞의 사내는 그저 강하기만 한 애송이가 아니었다.

“이제 보니 네놈이야말로 진정한 마인이로구나.”

“칭찬으로 듣지.”

“이 늙은이의 생각을 말해 볼까? 나는 네가 그 누구보다도 아가씨의 천마 등극에 방해가 되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다.”

천마만큼 강하며 천마만큼 영리하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진백란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어느 면으로 보나 정천은 그녀를 능가했다.

‘그분 이상으로 천마에 적합한 인물…….’

그런 존재에 대한 행동은 크게 둘일 수밖에 없다.

복종하거나, 제거하려 들거나.

정천도 그 속내를 알고 있었다.

“미안한데 난 천마가 되고 싶은 마음 따위는 없어.”

“천마는 마음으로 되는 게 아니다. 하늘의 뜻에 의해 정해지는 거지.”

“바보 같은 소리를…….”

“그렇다고 생각하느냐? 저 두 놈들은 어떻지?”

멸살독마는 관식과 유령마객을 가리켰다.

“저들은 이미 너를 마음속으로 따르고 있을 게다. 그러니 전면적으로 협력하고 있는 것이겠지.”

“…….”

“그리고 아마도, 너를 천마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게야.”

관식과 유령마객이 움찔했다. 모두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심리란 단순한 법이다. 모두들 자기가 따르고자 하는 인물에 자신을 투영하지. 자신이 될 수 없는 것을 그가 해낼 수 있기를 갈구한다. 마치 그것이 자신의 승리라도 되는 양.”

“…….”

“그렇지 않으냐, 애송이들?”

유령마객과 관식은 멸살독마의 시선을 회피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대답이 되었다.

정천은 여전히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그러든 말든 나는 싫다니까.”

“네 마음이 중요한 게 아니다. 앞으로 저런 녀석들이 수천, 수만이 모여들 것이다. 놈들 모두가 멋대로 네놈을 숭상하려 들 테지.”

“…….”

“그때도 네놈은 네놈의 뜻을 고집할 수 있으리라 보느냐?”

정천의 대답이 지금까지와 달리 늦어졌다.

“그땐 훌쩍 사라져 버리면 돼. 아니면 그 수천, 수만 명을 모조리 때려눕혀 버리면 돼.”

“흘흘. 네놈도 당황한 모양이구나. 실현하지도 못할 얘기를 하다니.”

“정말 못할 것 같나?”

“하는 것 자체는 가능하겠지. 다만 네놈이 정말 그럴 마음을 먹을 수 없으리란 얘기다. 그것이 사람의 심리란 거니까.”

“난 이미 그런 거 다 잊었어.”

“말이야 그렇게 할 수도 있겠지.”

정천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궤변만 늘어놓는군. 어쨌든 중요한 얘기는 그게 아니지 않나?”

“내게 있어서는 중요하다. 네놈은 그분의 천마 등극에 가장 위협적일 수도 있으니까.”

“글쎄. 일단은 유장천과 녹운담이란 놈들이 사라진 뒤에나 고민할 일 같은데.”

멸살독마도 그 사실엔 동의했다. 물론 그렇다고 정천을 용납하겠다는 건 아니었다.

“우선은 네 말을 따르마. 나름대로 자신감이 있으니 천마제전을 속행해 달라는 거겠지. 하지만!”

일순 독마의 두 눈에서 불길이 일었다.

“그 후에는 이 늙은이가 너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볼 것이다.”

“좋을 대로 해.”

정천의 대답에 멸살독마는 손을 내저었다.

축객령이었다.

이번에는 정천도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

* * *

하루가 지났다. 멸살독마는 아무런 공표도 하지 않았다.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났다. 여전히 독마의 공표는 없었다.

그렇게 천마제전을 하루 앞두게 되었다.

“빌어먹을 늙은이!”

유장천이 분노에 가득 차 포효했다. 그의 사자후에 숲 전체가 바르르 떨었다.

녹운담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주변으로는 거멓게 죽은 풀잎들이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리고 있었다.

실로 무시무시한 살기.

그들은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그 늙은이가 정말로 미쳤군. 감히 우리와의 협약을 깨?”

“네 말에 동감이다, 혈귀왕. 그 늙은이는 미친 것이 분명해.”

유장천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어떻게 할까? 당장 살수를 파견해 그 늙은이를 도륙해 버릴까?”

“아서, 지금은 이미 늦었다.”

녹운담이 이를 악물었다.

“천마제전을 하루 앞뒀어. 지금 그 늙은이를 죽였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으으음.”

“어쩌면 우리가 자신을 죽이길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지. 나름대로의 책략을 획책하고서.”

그럴 가능성도 분명 있었다. 유장천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주먹을 바르르 떨었다.

“개자식! 이렇게 된 것, 내일 진백란 그년을 살려 두지 않겠다!”

“그 계집을 죽이는 거야 당연한 거고, 문제는 그다음이다.”

두 사람이 서로를 응시했다.

“우리 둘 중 누가 천마가 되느냐 하는 것이로군.”

“그렇다.”

“네가 양보해라, 녹운담.”

“……너라면 그렇게 나올 줄 알았지.”

녹운담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애초에 이것을 피하기 위해 천마제전을 폐기하려던 것이었다.

두 마리의 호랑이가 동귀어진하지 않으려면 구역을 나누어 철저히 떨어져 있는 수밖에 없으니까.

그러나 그 계획은 실패했다.

구역은 결국 하나가 되었고, 결국 둘 중 하나는 나가떨어져야 한다.

“동귀어진…… 인가.”

녹운담이 한숨을 쉬었다. 유장천은 이제 거의 짐승처럼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어떠냐. 그러고 보면 네놈과 이 몸, 지금껏 제대로 된 승부를 내 본 적이 없었지.”

“바보 같은 짓 그만둬라, 혈귀왕.”

“왜? 무서운 거냐, 녹운담?”

“그게 아니다.”

녹운담은 담담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

“네가 천마가 되어라.”

“……뭐야?”

“그리고 나는 천마 바로 아래의 직위를 갖도록 하지. 국가로 치면 승상쯤 될까. 어차피 철절삼마가 궤멸되었으니 별문제는 없을 게다.”

“으음.”

“이름이야 적당히 지으면 되겠지. 어쨌든 네가 천마가 되고 내가 너의 보좌가 되겠다.”

유장천이 우물거렸다. 설마 녹운담이 이렇게나 간단히 포기해 버릴 줄은 몰랐다.

“정말 괜찮은 것이냐?”

“물론.”

녹운담은 그리 아쉽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형식이야 어떻든 지금까지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네게 조언하고, 너는 그에 따라 천마신교를 다스리는 거지. 천마로서.”

“천마로서…….”

“마교가 우리의 것이다. 그리고 곧 중원 역시 우리의 것이 될 거다.”

“중원!”

유장천의 눈이 탐욕으로 빛났다. 그것을 보며 녹운담은 내심 고소를 지었다.

‘역시 단순하군. 조종하기 편하겠어.’

세상은 언제나 그림자 속의 배후에 의해 움직이는 법이었다.

녹운담은 자신이야말로 누구보다 배후에 어울리는 존재라고 자부했다.

‘적당히 상황을 보아 독살해 버리거나 하면 되겠지. 이 정도 멍청이를 해치우는 것쯤이야 어려울 게 전혀 없다.’

녹운담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유장천 역시 내심 칼날을 갈고 있었다.

‘흥. 네놈의 속내를 모를 줄 알고? 교활한 여우 같은 놈. 언제고 손을 봐주리라.’

이른바 동상이몽.

아니, 대상이 다를 뿐 생각하는 바는 비슷하니 어울리진 않는 표현이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속내를 갈무리한 채 내일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 * *

같은 시각.

등화(燈火)들이 일렁이는 비무장에서, 멸살독마는 진백란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정천과 대련 중인 그녀를.

“타앗!”

기합성과 함께 시뻘건 검강이 뿜어졌다. 모든 것을 삼켜 버릴 것처럼 우악스럽고 날카로운 강기였다.

콰과과과!

비무장 곳곳이 부서져 날아갔다. 진백란은 마치 자그마한 폭풍이 된 것처럼 사방으로 칼날을 흩뿌렸다.

예전보다 더더욱 패도적으로 변한 검술.

그 위력 역시 예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럴 수가!’

멸살독마는 진심으로 경악하고 있었다. 설마 그녀가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이 정도의 성장을 이룰 줄은 몰랐다.

그러나 그보다 놀라운 것은 정천이었다.

자꾸만 그녀에게서 놈에게로 시선이 움직이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모두 피하고 있다.’

폭풍은 매섭고 날카로우며 강렬했다. 그러나 그것조차 정작 닿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법이었다.

정천은 그녀의 검강을 피하고 있었다. 일견 아슬아슬하게 보였으나, 실상은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회피하고 있는 것이었다.

‘격이 다르다.’

멸살독마는 이를 악물었다.

이미 놈은 천마 진검운과 동렬의 무인이었다. 그가 죽은 이상은 전 중원을 통틀어도 정천에게 대적할 자는 찾기 힘들 것이다.

진백란 역시 그 사실을 알 터.

그럼에도 그녀는 의외로 표정이 밝았다.

휘릭.

연신 회피하던 정천이 진백란의 틈을 파고들었다. 진백란이 검을 내리 찔렀으나, 이번에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그때 그녀가 손목을 비틀었다.

팟.

선혈이 튀었다. 칼날이 정천의 뺨을 스쳤다. 진백란의 표정에 순간 승리감이 스쳤다.

그 순간 정천의 주먹이 그녀의 복부에 박혔다.

콰앙!

벽력탄이 터지는 듯한 굉음. 그녀의 몸은 거의 몇 장을 그대로 날아갔다.

“으윽!”

널브러졌던 진백란이 침음을 내며 일어났다. 잠시 비틀거리던 그녀가 검붉은 토혈을 뱉었다.

“나쁘지 않았어.”

정천의 감상이었다. 나름대로의 칭찬이었다.

“당신 정말 볼수록 마음에 안 들어.”

진백란이 투덜거리며 그대로 비무장 위에 드러누웠다. 어찌나 열심히 움직였는지 그녀의 몸 위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멸살독마가 뒤늦게 다가갔다. 누운 채 호흡을 조절하던 진백란이 그를 보고 놀랐다.

“어라, 독마? 언제 왔어요?”

“조금 전에 도착했습니다.”

“그랬구나.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 버렸네.”

멸살독마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늙은이, 정말로 감격했습니다. 아가씨가 이렇게까지 성장하셨을 줄이야.”

“저 인간 덕분이죠.”

진백란이 상체를 일으켰다. 여유로운 표정과 달리 얼굴은 창백했다.

정천이 그녀에게 다가와서 등에 손을 가져갔다. 그것을 본 멸살독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놈이 지금 무슨 짓을……!”

“그만해요, 독마.”

“옙.”

진백란의 한마디에 얌전해지는 멸살독마였다.

정천은 여느 때처럼 그녀의 몸에 내력을 주입했다. 예전이었다면 움찔했을 그녀였지만 이제는 편안히 그의 기운을 받아들였다.

내기는 진백란의 몸속을 일주천하며 그녀의 내상을 치유했다. 자기회생능력을 지닌 강룡수라마공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이내 혈색이 돌아온 얼굴로 일어났다.

“다시 한 번 붙어.”

혈륜검을 집어 들며 말하는 진백란. 정천은 질렸다는 얼굴을 했다.

“이제 그만하지? 오늘 하루 종일 지긋지긋하게 싸워댔잖아.”

“아직 부족해.”

“내일을 위해 체력을 아껴야지.”

“나 아직 쌩쌩해.”

“네가 아니라 내가 지쳤다.”

진백란이 토라진 표정을 지었다.

“무슨 사내자식이 그렇게 약해 빠졌어? 물론 댁이 강하기야 하지만, 왜 그리 근성이 없는 거야?”

“난 귀찮은 걸 질색이거든. 그리고 이 정도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할 일 아니냐?”

“응. 고마워. 그러니까 더 고맙게 조금만 더 해.”

“싫다니까…….”

멸살독마는 얼이 빠진 얼굴로 둘의 실랑이를 쳐다봤다. 이건 마치 무인 대 무인이 아니라…….

“아, 그런데 독마는 무슨 일로 온 거예요?”

뒤늦게 화제를 돌리는 진백란이었다. 한 손으로는 정천의 팔목을 붙든 채였다.

잠시 당황하던 멸살독마가 애써 웃었다.

“흘흘. 이 늙은이야 뭐, 아가씨의 건승을 기원하려고 왔지요.”

“그랬군요. 고마워요. 나는 천마가 될 거예요.”

그 어떤 포부보다도 분명한 한마디였다. 멸살독마는 가슴속이 뭉클해지는 기분이었다.

이어지는 실랑이를 보자니 그 기분도 날아가는 것 같았지만.

“한 판만 더 해!”

“아, 글쎄 싫다니까!”

“야! 이런 미소녀가 이렇게까지 부탁하는데 정말 이러기야?”

“미쳤군. 내 눈엔 선머슴 같은 계집애만 보이는데.”

“네 눈이 미친 거겠지!”

한동안 그렇게 언성을 높이다가, 결국 정천이 대안을 내놓았다.

“이렇게 하자. 나 말고 다른 사람이랑 대련해.”

“그게 무슨 대안이야? 당신만큼 강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오히려 나와 하니까 효율이 나쁠 수도 있어. 오히려 비슷한 무위를 지닌 사람과 대련하는 편이 더욱 도움이 될 거야.”

“……그냥 하기 싫어서 발 빼는 것 같은데?”

“날 믿으라니까.”

진백란도 더는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 어쨌든 실랑이만 계속하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좋아. 대신 당신도 계속 이곳에 있어야 해.”

“내가? 대련할 것도 아닌데 쓸데없이 여기에 있어 봤자…….”

“조언도 해 주고 치료도 해 줘야지.”

“이게 정말 사람을 부려먹는군.”

“협약을 했잖아. 그러니까 그에 맞게 최선을 다해야지. 잊지 마. 내가 당신네 이천 명을 먹여 살리고 있다는 것을.”

정천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가 원한 것도 아닌 일로 생색을 내는 게 영 마뜩치 않았다.

하지만 이어진 말까지 들으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제이의 강룡단 결성을 돕고 있다는 것도.”

“…….”

“그러니까 나한테도 협력해야 돼. 알고 있잖아?”

“쳇. 알았다.”

결국 정천이 백기를 들었다.

의기양양해진 진백란이 허리춤에 손을 얹고서 질문했다.

“그래서, 나와 대련할 사람은 누군데?”

“……직접 고르는 편이 낫겠지.”

정천은 천무맹 내에서 가장 강하다 생각되는 인물들을 소집했다. 장유추와 백미련, 요태희와 모용훈 등이 소집되었다.

거기에 관식과 유령마객까지.

아예 두 사람은 이제 정천의 수족처럼 움직이고 있는 실정이었다.

“무슨 일로 부른 거야? 저것은 왜 여기에 있고.”

백미련의 질문이었다.

‘저것’이란 물론 관식이었고.

성질 날카로운 관식이 그냥 듣고 넘길 리는 없었다.

“어이, 계집. 지금 그 말은 나더러 한 건가?”

“말을 이해할 지성은 있는 모양이군.”

“하! 지난번에 나한테 깨졌던 건 기억 못하나 보지?”

“그땐 본후가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지. 너에겐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어.”

“그래서, 지금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거냐?”

“물론.”

관식과 백미련은 당장이라도 붙을 기세였다. 그리고 그건 다른 사람들이라고 다를 게 없었다.

“어이, 애송이. 일단은 노부와 먼저 붙어야지?”

장유추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백미련은 미간을 찌푸렸고 관식은 으르렁거렸다.

“당신도 나한테 깨졌던 늙은이잖아? 정파 놈들은 왜 이리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지 모르겠군.”

“그러지 말고 한 판 더 붙자고. 이번엔 노부도 준비를 단단히 했거든.”

“패배한 개에게는 관심없다.”

“허, 다시 붙으려니 무서우냐?”

“누가 무섭대!”

참으로 단순한 관식이었다.

당장 전쟁이라도 벌일 듯한 분위기였다. 다들 얼떨떨해져서 세 사람을 쳐다보았다.

정천이 혀를 차고는 나직이 말했다.

“야, 무식검.”

“어떤 개자식이 감히!”

“이런 개자식이다.”

“…….”

정천을 본 관식이 하얗게 질렸다.

“대, 대형?”

“미쳤군. 누가 네 대형이냐?”

혀를 찬 정천이 진백란을 돌아봤다.

“저 중에서 한 명 골라 봐.”

“누가 더 바보인지 말이야?”

진백란의 말에 모두가 발끈했다. 저 세 사람이 벌인 작태를 생각하고는 조용해졌지만.

물론 당사자들이야 알 바 아니었다.

“말씀이 심하시군, 혈패마검.”

관식이 먼저 운을 뗐다.

“물론 당신을 존중하기는 하지만…….”

“그러고 보니 그대와도 아직 결판을 내지 못했지?”

백미련이 관식의 말을 자르며 끼어들었다. 어이가 없어진 관식이 소리치려 했으나 정천이 화낼까 봐 속으로만 삭였다.

“너한테는 이제 관심 없어.”

진백란의 대꾸에 백미련의 표정이 서늘해졌다.

“본후가 무서운 모양이지?”

“……그렇게 날 도발한단 말이지?”

두 여인 사이로 한파가 몰아쳤다. 그 살기만큼은 정천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때 화살 하나가 날아들어 그녀들의 발치에 꽂혔다.

“처음은 제가 나서죠.”

요태희였다. 설마 그녀가 나서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모두들 깜짝 놀랐다.

정천도 예외는 아니었다.

“궁후, 당신이?”

고개를 끄덕인 요태희가 말했다.

“어찌 보면 이 모든 상황은 저의 판단으로 인해 빚어진 일입니다. 그 점에 대해선 정천 대협께도 미안한 마음이 커요.”

“아니, 당신이 미안해할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그렇더라도 책임은 져야겠죠.”

요태희가 진백란을 돌아봤다.

“어떤가요? 천마제전이란 게 어떤 방식인지는 모르겠지만, 활을 다루는 무인도 없진 않으리라 생각되는데요.”

“……솔직히 나도 천마제전에 대해선 자세히 몰라.”

진백란의 대답이었다.

“그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누구지?”

정천의 질문에 모두의 시선이 한데 쏠렸다.

멸살독마가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뭐, 뭔가. 마교의 비밀에 대해 나더러 말해 달라는 것이냐?”

“얘기해 줘요, 독마.”

“아가씨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진백란이 부탁을 하니 금세 느슨해지는 멸살독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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