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六章 용검대, 강룡단 (101/146)

第六章 용검대, 강룡단

‘단 일격이라니!’

유령마객은 이를 악물었다. 망막에 새겨진 장면이 지금까지도 잊히질 않았다.

공정한 싸움은 아니었다.

장유추의 체력은 실로 어마어마했고, 관식은 상당량의 내력을 소모해야 했다. 그로 인해 온전한 상태로 정천과 대결할 순 없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렇게까지 허무하게……!’

그러나 유령마객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다. 관식이 온전했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거다. 무엇보다, 공정함이 다 뭐란 말인가.’

비겁 따위는 없다. 애초에 먼저 치고 들어간 사람은 관식이다.

정천이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한 달 전보다도 더욱 강해진 것 같았다.

놈은 너무나 강하다. 그것도 유령마객이 알고 있는 그 누구보다도.

‘어쩌면 그분보다도…….’

유령마객은 긴 한숨을 뱉었다.

그가 지금껏 머릿속으로만 작성해 놓았던 명단, 새로운 천마의 자리에 어울릴 법한 이들의 이름들은 죄다 지워졌다.

그 자리엔 한 사람의 이름만이 새로 새겨졌다.

‘정천.’

저자뿐이다. 신생 천마신교를 이끌 사람은 저자밖에 없다.

힘이야말로 모든 것이니.

유령마객은 굵직한 나뭇가지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발각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어쩌면 알고도 보내 주는 걸지도 몰랐다.

마의를 찾아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저자의 존재를 자신보다 잘 알고 있었으리라.

‘마의와 상의해 봐야겠다. 새 천마의 옹립에 대하여.’

평생을 마교를 위해 헌신해 온 유령마객이었다. 그것은 지금이라고 다를 게 없었다.

‘모든 것은 마교를 위해.’

유령마객의 신형이 나무 위에서 사라졌다.

털썩.

비무장 위에 거의 내던지다시피 하는 관식을 보며 진백란은 기겁했다.

“무정검? 이자가 왜 여기에……?”

“소식이 느리군. 마교 전체에 소문이 났는데.”

농담조로 대꾸하는 정천. 그는 발로 툭 차서 관식의 몸을 위쪽으로 돌려놓았다.

“쳐들어왔었어. 이 녀석 혼자서.”

“무정검다운 행동이군. 원래 파벌 같은 거랑은 어울리지 않는 작자였으니까. 당신처럼.”

“난 이렇게 멍청하진 않지.”

“그러시겠지. 어쨌든 왜 내게로 데려온 거야? 보다시피 난 바쁘다고.”

그녀는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젖은 옷이 몸에 착 달라붙어 제법 관능적인 몸매를 드러냈다. 물론 정천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진백란 역시 아까와는 달리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

시간은 촉박했고, 그 시간을 단련에 모두 쏟아도 모자랄 판이었다.

쓸데없는 데에 신경을 쓸 여유는 없었다.

정천은 피식 웃었다. 그녀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네가 이곳에선 최고 책임자니까. 너 외에는 딱히 얘기를 나눌 만한 사람이 없더군.”

“무슨 얘기?”

“동맹에 대해서.”

진백란은 못 들을 걸 들었다는 얼굴을 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저자 입에서 동맹이란 말이 나오다니.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아냐.”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 거야? 게다가 당신은 어떤 것도 대표하지 않잖아. 어디까지나 혼자서 다 해먹겠다는 게 신조 아냐?”

“나쯤 되는 인물이면 사람들이 가만히 두지를 않으니까 말이야.”

“잘난 척은.”

진백란은 관식의 몸 위에 발 하나를 걸쳐 놓았다. 꼭 큰 범을 잡은 사냥꾼처럼. 그것을 물끄러미 보던 정천이 물었다.

“뭐하는 거야?”

“그냥. 이 작자한테 꼭 한번 해 보고 싶었거든.”

어깨를 으쓱인 진백란이 말을 돌렸다.

“그래, 동맹이란 건 마교와 천무맹에 관한 거겠지? 하지만 그 어느 쪽도 어불성설이야. 난 마교의 주인이 아직 아니고, 당신도 천무맹의 주인이 아직 아니니까.”

“틀렸어.”

“틀렸다니?”

“동맹이란 건 정천과 진백란에 대한 거다. 그거라면 네가 어떤 직책이든 문제가 아니지.”

“…….”

진백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고백하는 거라면 되게 촌스럽네.”

“고백은 무슨. 난 성깔 더러운 여자 싫어.”

“젠장. 누가 성깔이 더럽다는 거야? 하고 싶은 말이나 제대로 해. 빙빙 돌리지 말고.”

“좋아. 간단해. 내가 널 천마로 만들어 주지. 너는 내게 한 가지를 제공해 주면 돼.”

“……전혀 간단하지 않잖아.”

진백란은 한숨을 쉬었다.

“우선 당신에겐 감사하고 있어. 천마신공을 일부만이지만 전수해 준 거라든가, 깨달음을 준 거라든가. 하지만 그것만으로 통할 만큼 천마제전은 만만하지 않아.”

“실력들이 죄다 이 녀석 수준이라면 그렇지만도 않을 텐데.”

“무정검 관식이 강하긴 해도 최고는 아냐. 뭐 그중에 당신과 대적할 만한 사람이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싸우는 건 당신이 아니라 나라고.”

진백란이 살짝 눈을 흘겼다.

“그게 아니면 뭐야. 이제 와서 천마제전에 나가기라도 하려고?”

“말했잖아. 널 천마로 만들어 주겠다고.”

“……좋아. 대체 어떻게?”

잠시 뜸을 들이던 정천이 반문했다.

“흡성공이 뭔지는 알지?”

진백란의 표정이 구겨졌다.

“나더러 그런 사술(蛇術)을 펼치라고?”

타인의 내력을 흡수, 자신의 내력을 불린다. 분명 이것만 본다면 대단한 무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대성했다는 자는 없었다.

무공 자체의 비열함으로 인해 무림공적이 되어 사냥당했기 때문이기도 하며, 무공 자체가 지닌 수많은 부작용 때문이기도 했다.

흡수당하는 대상은 물론 흡수하는 자의 목숨까지 위험해지는 수법.

지금은 거의 사장되다시피 한 과거의 무공이었다.

정천은 손을 내저었다.

“흡성공 자체에 대해 말한 게 아냐. 일시적이지만 그것과 비슷한 효용을 지닌 수법을 알고 있다는 거지.”

“……대체 그런 걸 어디서?”

“세상에 백만 명의 무인이 있다면 백만 개의 비장의 수도 있는 법이지. 그리고 진마동은 그런 비장의 수를 서로 공유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로 지독한 장소였고.”

“누군가에게 배웠다는 거군. 그래서 그걸 내게 쓰겠다고?”

“그래. 너와 내 무공의 기반은 같으니 최적의 상대이기도 하지.”

진백란의 표정이 진중해졌다.

간단하다. 정천이 잠시 힘을 나눠 주고, 자신은 그것을 기반으로 천마제전을 평정하는 것이다.

효과적이고 분명한 방법.

그러나 쉬 내키지는 않았다.

“뭔가 좀 그렇지 않아? 내 힘만으로 이루는 성과가 아니잖아.”

“마음에 걸리더라도 감수해야지. 솔직히 말해 지금 성장세로는 천마제전에서 승리할 수 없을걸.”

“……그럼 내게 아버님의 무공을 전수해 준 건 뭐였어? 소용없을 걸 알면서도 가르쳐 준 거란 말이야?”

“반쯤은.”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지? 진백란은 살기까지 담아 정천을 노려봤다. 별 소용은 없었지만.

정천도 심했다 싶었는지 짧게 부연했다.

“나머지는 네게 달렸다고 말했잖아. 네가 천마신공을 이해하는 속도가 빠르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거라고 봤어.”

“그리고 지금 보니 속도가 느리다는 거고?”

“그건 아니지.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으니.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건 불확실한 길이고 이건 확실한 길이라는 거다.”

기가 막힐 정도의 오만함이다.

“결국 자기 힘을 빌리면 만사형통이란 거잖아.”

“그렇게 들린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부정하진 않겠다.”

진백란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꾹 눌렀다.

“……좋아. 그럼 내게서 원하는 건?”

정천은 지체하지 않았다.

“강룡단.”

“……강룡단?”

“그래. 신생 강룡단. 내가 마교도들 사이에서 직접 선별한 최정예 타격대를 원한다.”

진백란은 살짝 입을 벌리고서 정천을 보았다. 정천은 피식 웃고서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난 이쪽 체질이라서. 문파 규모의 대규모 병력을 움직이고 제어할 자신은 없어. 하지만 타격대라면 얘기가 다르지.”

“…….”

“숫자는 오십 명 정도가 좋겠군. 전부 합쳐 백 명 정도가 이상적이지.”

나머지 오십을 어디서 차출할 것인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용검대도 되살리려는 거야?”

“그래.”

“그 둘을 부활시켜서 뭘 어떻게 하려는 거지?”

“무림에 알려야지. 본래의 그들이 얼마나 큰일을 해냈었는지. 그리고 중원의 모두가 그것을 잊고 있었다는 것도.”

정천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들의 힘으로 진운룡을 끌어낼 거다.”

* * *

“과거의 망령을 되살리겠다는 건가?”

정천의 요구를 들은 남궁운의 한마디. 그런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살기 어린 차가운 시선이었다.

“맹주님께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없을 텐데요.”

“난 더 이상 맹주가 아닐세. 하지만 그럴 자격이 없다는 말엔 동의하네.”

“공식적으로는 맹주가 아니겠지만, 어쨌든 이곳의 이천 명을 총괄하고 있잖습니까.”

“모용세가와 제갈세가도 있네.”

피난한 사람들의 통치는 세 가문이 공동으로 하고 있었다. 모용린과 제갈현, 남궁운이 그 대표였고.

모용린을 제외하고 보면 어차피 과거 천무맹의 군사와 맹주니 달라진 것도 없다.

“말장난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차피 다른 두 사람에게 물어 봐야 맹주님께 얘기하라고 할 테고요.”

“그렇겠군.”

남궁운이 긴 한숨을 뱉었다.

“내가 어떻게 자네를 저지할 수 있겠나. 자네가 그러고 싶다면 그렇게 하게.”

“그럼 지금 당장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벌써부터 말인가?”

“마교 쪽 사람이야 당장은 힘들다지만, 이쪽은 그렇지도 않으니까요. 기왕 얘기가 통한 김에 빨리 진척시키는 쪽이 좋겠죠.”

남궁운의 눈이 살짝 커졌다.

“마교 쪽이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인가?”

“마교에서 오십, 천무맹에서 오십. 도합 백 명을 이끌 생각입니다.”

“제정신이 아니군! 제대로 통솔해 보기도 전에 내분이 일어날 걸세.”

“보통 상황이라면 그렇겠죠.”

남궁운의 말이 막혔다. 정천은 그 ‘보통이 아닌’ 상황을 직접 겪었지 않은가.

“그럼 허락받은 것으로 알고 가 보겠습니다.”

“…….”

정천은 대답도 듣지 않고 방을 나섰다.

일마궁(一魔宮)이라고도 불리는 천마의 저택은 그 규모만도 어지간한 왕성에 비견될 정도였다.

때문에 천 단위의 사람들을 먹이고 재울 수 있었고, 그 구역 역시 상당히 대규모였다.

그런 곳 중 정천이 먼저 찾아간 곳은 화륜문 식구들이 있는 곳.

볼일이 있는 사람은 둘이었다.

“오라버니?”

낯선 모양새의 문을 열고 들어서니 화연란이 있었다. 장소는 바뀌었지만 그녀가 풍기는 느낌만은 여느 때와 같았다.

“칠삼과 심후는?”

“안채에 있을 거예요. 그런데…….”

화연란의 손가락이 정천의 팔 쪽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손에 들려 거의 끌려오다시피 하고 있는 인물을.

“그거, 시체인가요?”

“아니. 아직 살아 있는 녀석.”

“대체 누구죠?”

정천은 자신이 끌고 온 사내를 내려다봤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이름이 뭐였더라.

“관식 놈을 예까지 끌고 온 건가?”

붕대를 칭칭 감은 장유추가 방에서 나오며 물었다. 그는 관식에게 당한 부상 때문에 이곳으로 와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다.

“이 녀석 이름이 관식입니까?”

“그렇다네. 뭐 한 방에 쓰러트렸으니 기억 못한대도 이상할 건 없겠지만.”

정천은 어깨를 으쓱였다.

“제대로 싸웠다면 못해도 오십 합까지는 갔을 겁니다. 이 녀석이 운이 나빴던 거죠.”

장유추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천이 관식을 상대로 펼쳤던 일검은 그야말로 멸천과 무한천강의 사이에 위치한 것이었다.

멸천보단 약하되 여전히 무지막지하게 강력하고, 무한천강보다 강하되 여전히 내력의 소모가 어마어마한.

그것에 직격당하고도 목숨을 건졌으니, 오히려 관식의 실력이 진짜배기라고 봐야 옳았다.

‘노부의 천뢰강림과 맞부딪친다면…….’

호승심이 장유추의 속내를 슬금슬금 건드렸다.

백미련의 상성론에 따르면 장유추가 상대하기 편한 부류는 관식보다는 정천 쪽에 가까웠다.

두 사람이 맞붙는다면 그야말로 순수한 힘과 힘의 싸움이 펼쳐질 터. 지금까지 펼쳤던 대련의 양상도 대개 그러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장유추는 상념을 접었다. 지금 그와 정천 사이의 격차는 하수와 고수의 그것 이상이었다.

앞으로 격차가 좁혀지지 않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

하지만 맥 빠지는 생각을 하진 않기로 했다.

“그런데 천마의 딸과는 무슨 얘기를 한 겐가?”

“마침 잘됐군요. 선배도 같이 듣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정천은 자신의 계획을 두 사람에게 말했다.

둘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신생 용검대란 말이군.”

“그럼 오라버니가 대주가 되는 건가요?”

“그런 셈이지. 딱히 직책 따위에 의미를 두고 싶지는 않지만.”

“그럼 심후와 칠삼 아저씨는 왜……?”

“뻔한 것 아냐?”

정천이 픽 웃으며 대답했다.

“부려먹으려는 거지.”

* * *

정천은 심후와 칠삼 외에도 담미화와 소윤까지 불러 모았다. 오랜만에 화륜문 식구들이 한데 모여 대면하게 되었다.

거기에 장유추와 백미련도 재밌겠다며 끼어 버렸다.

“여러분이 할 일은 간단해. 이곳에 있는 이천 명의 무인들 중에서 사람을 추려 내는 거야.”

“…….”

“물론 아무 기준으로나 사람을 뽑아선 안 되겠지. 일단은 오백 명 정도로까지만 추리면 될 것 같아. 지금부터 그 방식을 말하겠어.”

“…….”

모두들 정천의 이야기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밑에 방석처럼 깔린 관식에게 눈이 자꾸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보다 못한 장유추가 말을 꺼냈다.

“것보다도, 그 자식부터 치우고 얘기하면 안 되나?”

“그냥 신경 쓰지 마십쇼.”

“신경을 쓰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잖나. 게다가 그 녀석, 제대로 치료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바로 보셨습니다.”

“……그대로 죽게 내버려 두려고?”

“그렇게까지 허약한 놈은 아닐걸요. 어쨌든 천마 후보로까지 꼽히던 놈이니 이 정도로 죽진 않겠죠.”

과연 그럴까. 모두들 정천의 말에 회의적이었다. 정신을 잃은 지금도 관식은 밭은기침과 함께 피를 쏟고 있었으니까.

“죽일 거라면 본후에게 맡겨 주면 좋겠는데.”

백미련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관식에게 패했던 게 못내 마음에 남아 있는 모양.

정천은 고개를 저어 그녀를 말렸다.

“당장은 살려 둘 거야. 써먹을 데도 있을지 모르고. 그리고 너 역시 싱겁게 끝내느니 길게 고통을 주는 편이 좋을 텐데?”

“그건 그렇네.”

고개를 끄덕이는 백미련. 물론 그녀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간담이 서늘한 기분이었다.

그들은 오랜만에 실감할 수 있었다. 눈앞의 사내가 어떤 작자인지.

‘지독하기로는 혈선보다 더하지.’

‘게다가 지난 이후로 더욱 독기가 오른 것 같단 말씀이야.’

‘적이 아닌 게 다행이군.’

그들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천은 자기 할 말만 이어 나갔다.

“우선은 눈, 그리고 행동하는 태도. 그 사람에게 의지가 있는지 없는지, 의욕이 충만한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

이곳에 와 있는 이천 명의 피난민들의 반응은 대개 두 가지였다.

체념하거나, 분노하거나.

황룡성의 소멸과 천무맹의 궤멸을 바로 앞에서 확인한 이들이다.

그 결과 그들은 의지박약 상태가 되거나 강렬한 분개에 잠기게 됐다. 그리고 정천이 필요로 하는 쪽은 단연코 후자였다.

“물론 분노에만 정신이 팔려 명령도 제대로 들어먹지 못하는 놈들은 없느니만 못하겠지만, 그거야 이차적으로 추려 내면 되겠지.”

정천은 손뼉을 쳐서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무인들 대부분은 제갈세가와 모용세가, 남궁세가의 무인들이야. 그러니 인명을 알아내는 건 각 세가의 대표들의 도움을 받으면 되겠지.”

“만약 그대 밑으로 들어가기 싫어한다면?”

백미련의 물음이었다.

“뭐 그거야 차후에 생각하면 되겠지. 일단은 명단을 뽑는 게 먼저니까.”

“알겠어.”

시원하게 대답한 백미련이 문밖으로 나섰다. 그녀답지 않게 적극적인 걸음걸이로.

마라혈천의 전멸 이후, 더 이상 그녀를 얽매는 것은 없었다.

최후의 혈선인 진운룡이 남아 있긴 했지만 그녀에게 영향을 주기엔 너무나 멀리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생기에 차 있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그런데 그 모든 게 관식에 의해 깨진 것이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칼부림을 할 수도 없는 노릇. 결국은 무언가에 정신을 쏟는 것만이 해답이었다.

정천은 나머지 사람들을 돌아봤다.

“그럼 부탁하지.”

그 말을 기점으로 모두들 흩어졌다.

열 명이 안 되는 인원으로 이천 명을 추려야 하니 바삐 움직여야 했다.

“근데 정천, 자네는 그냥 여기에 있을 셈인가?”

“응.”

칠삼의 물음에 시큰둥하게 대꾸하는 정천. 칠삼은 약간 볼멘 표정을 지었다.

“우리한테 일은 다 시키고서 자네 혼자서만 뭐하고 있으려고?”

정천은 말없이 관식을 가리켰다.

칠삼은 이내 말수가 없어져 총총걸음으로 멀어졌다. 내심 관식의 명복을 빌면서.

모두들 밖으로 나서자 정천은 오른손에 내력을 끌어모았다.

자연히 깰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었지만 그랬다간 너무 시간이 걸릴 터였다. 무엇보다 기다리기가 지루하기도 했고.

내력을 담아 가볍게 뒤통수를 격타했다.

가볍게 움찔하더니, 이내 관식이 침음을 뱉으며 꿈틀거렸다.

“으으, 끄으윽.”

정천은 가볍게 관식을 툭 찼다. 내력도 담지 않은 발차기였지만 관식은 척추가 꺾이는 기분이었다.

“으으윽.”

“엄살 부리지 말고 일어나라.”

“……!”

관식은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 그리 낯익지 않은데도 소름이 쫙 끼치는 목소리였다.

“여, 여기는! 그, 그리고 너는!”

“너라니.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보군.”

무미건조한 목소리인데도 살기가 잔뜩 담긴 목소리보다 소름이 끼친다.

관식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기억을 정리했다. 자신이 정신을 잃기 전 일어났던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다.

‘으음…….’

식은땀이 흘렀다. 온몸의 신경이 비명을 지르는 것만 같았다.

저 사내 때문에.

‘단 일격에…….’

뒤늦은 충격이 관식의 머리를 때리고 지나갔다.

어린 시절, 멋모르고 절정고수의 돈주머니를 털려다 죽기 직전까지 맞았던 적 이후로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가 지금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나, 날 어찌할 생각이오.”

“글쎄.”

시큰둥하게 대꾸하는 정천.

대답이 불분명하니 관식으로선 도리어 불안감이 증폭되는 기분이었다.

“날 죽일 거요?”

“네가 그 정도 가치나 있다고 보냐?”

정천의 반문에 관식은 할 말이 없어졌다.

“그럼……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오?”

“일단 그 분별없는 말투부터 교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눈치 빠른 관식이 재빨리 말투를 바꿨다.

“어떻게 하시려는 겁니까?”

“너, 생각보단 머리가 돌아가는군.”

“귀암산에서 홀로 살아남은 몸이니까요.”

절정고수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어느 파벌에도 속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관식이 가장 자부심을 느끼는 것 중 하나였다.

물론 이제 와선 무의미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나와 얘기했던 내용은 기억하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진백란이 천마가 되게끔 전력으로 도와라. 정천이 내건 내기 조건은 그것이었다.

그리고 관식은 변명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패했다.

하지만 납득하기 어려웠다.

패배를 납득할 수 없다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시원하기까지 했으니까. 정천은 압도적으로 강했고, 그것만으로도 관식의 경의를 사기에 충분했다.

‘성격이 좀 뭐 같은 것 같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 점이었다. 정천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것.

그리고 마교에선 강함이 곧 정의였다.

“이유가 뭡니까?”

“뭐가?”

“왜 대형께서 천마의 자리에 오르려고 하시지 않는 겁니까?”

정천이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이게 미쳤군. 누가 네놈 대형이란 거냐?”

“대형께선 저를 압도하셨습니다. 대형이 아니라 그 이상의 호칭으로라도 불러 드릴 수 있습니다.”

“집어치워. 그리고 난 천마 자리에 관심이 없다.”

“세상의 절반을 가질 수 있는데도 말입니까?”

천마신교는 세상의 절반. 마교도들이 자주 떠드는 고어(古語) 중의 하나였다.

과장이 심하긴 하나 마인 나름대로의 자부심이 들어있는 말이었다.

정천에게 있어선 알 바 아니었지만.

“세상의 절반이 아니라 세상의 전부라도 싫다. 내가 바라는 건 하나뿐이다.”

“그게 뭡니까, 대형?”

“네 알 바 아니다. 그리고 한 번만 더 대형이라 불렀다간 각오해라.”

“예…….”

이제야 얘기가 통하겠군. 정천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네게 몇 가지 물어볼 게 있다.”

“무엇이든 물어보십시오. 성심성의껏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관식은 정말 아는 한도 내에서 뭐든 대답해 줄 생각이었다. 정천의 힘에 강하게 매료되었던 까닭이다.

‘성격은 개차반인 것 같지만.’

어차피 중요한 것은 힘 자체다.

귀암산에서 성장하며 누구보다 그것을 몸에 새겨 놓은 관식이었다.

물론 호승심이 아주 없진 않았다. 오히려 그는 호승심이 강한 편에 속했다.

하지만 정천에게는 그런 생각이 거의 들지 않는 게, 격차 자체가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다.

인간은 산에 호승심을 갖지 않는다. 바람이나 대하(大河), 천둥이나 태풍에 호승심을 갖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들이 너무나 아득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지금 관식에게 있어선 정천이 그러했다.

잠시 생각하던 정천이 질문했다.

“이곳 마교의 파벌 구조는 어떻게 되어 있지?”

관식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저보다 자세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 당장 데려와.”

* * *

벌컥!

문을 열고 들어서는 관식을 보며 유령마객은 안도감보다도 불안감을 느꼈다.

“무정검! 어떻게 그곳에서 빠져나온 것이오?”

그가 확인했을 때 관식은 반죽음 상태로 정천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유령마객은 그가 살아남을 거란 생각을 버렸다.

하지만 관식은 살아 돌아왔다. 멀쩡하다고는 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게다가 놀랄 일은 거기서부터였다.

스윽.

“……!”

목젖에 와 닿는 장검.

무방비 상태였던 유령마객은 너무도 어이없게 제압당하고 말았다.

관식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서 말했다.

“나와 함께 가 줘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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