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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五章 일검승부 (100/146)

第五章 일검승부

촤아악!

차가운 물의 느낌에 진백란은 기겁했다.

“뭐, 뭐야!”

“뭐긴 뭐야. 그만 자고 일어나라는 거지.”

두레박을 내던지며 대꾸하는 정천이었다. 진백란은 자신이 우물 근처에 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몽유병이 있는 건 아니니, 정천이 그녀를 데려왔을 터.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다, 당신이?”

“뭐가?”

“날 안고서 이리로 온 거야?”

“응.”

진백란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그것을 본 정천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개방적이기로는 마교 쪽이 정파보다 더하다던데. 네가 특이한 건지 그 얘기가 잘못된 건지 모르겠군.”

“나, 남자 손도 제대로 잡아 본 적 없단 말이야.”

“요조숙녀 나셨군.”

말은 그렇게 해도 이해는 됐다. 다른 누구도 아닌 천마의 딸이니, 어지간한 강심장도 접근조차 생각하기 어려웠으리라.

“남자를 두들겨 팬 적은 많을 거 아냐.”

시큰둥하게 대꾸한 정천이 말을 돌렸다.

“그보다, 확인이나 해 봐.”

“확인?”

“네 몸속. 한번 내력을 일주시켜 보라고.”

“아, 알았어.”

진백란은 그대로 정좌하고서 집중했다.

단전에서 내기가 치솟아 일주천을 시작했다.

거기까진 평소와 같았으나 그 뒤로는 다른 부분이 상당히 많았다.

강룡수라마공의 기운은 그녀의 몸속에 일종의 이정표를 남겨 놓았다.

어느 곳으로 기운이 돌아야 하며, 어떤 식으로 기운이 분배되어야 하는지. 진백란은 그저 그것을 따르며 기억하면 될 일이었다.

화아아악.

평소와는 다른 내력이 치솟는다. 그럼에도 기시감은 들지 않았다.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친근한 느낌.

그리운 느낌마저 있었기에, 진백란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아버님…….”

“앞서 말했듯 네 무공은 천마신공과 무척 흡사해. 그러니 느낌 역시 친숙할 테지.”

이거면 된다. 진백란은 확신했다.

남은 며칠만으로도 익숙해지는 데에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형(形)과 식(式).

몸을 일으킨 진백란이 요구했다.

“지금 바로 초식을 전수해 줘. 난 준비됐으니까.”

“그럴 필요 없어.”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원래 지니고 있던 기운을 약간 변용하는 것과 초식 하나를 아예 처음부터 가르치는 게 똑같을 것 같아? 남은 시간으로는 턱도 없어. 게다가 나 역시 천마의 무공에 대해선 기본적인 것밖에 모르고.”

기껏해야 천마보 같은 보법 정도일까.

정천이 알고 있는 천마의 무공은 강룡단 동지들에게서 배운 게 전부였다.

진백란은 당황했다.

“그, 그럼 아무 소용도 없는 거잖아! 결과적으론 얻은 게 없으니.”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군.”

짧게 혀를 찬 정천이 되물었다.

“네가 배운 건 누구의 무공이었지?”

“내가 배운 것?”

혈패검식.

그녀가 걸음마를 뗐을 때부터 익히고 단련해 왔던 무공이다.

그것을 가르쳐 준 사람은 물론…….

“아버님이었어.”

“그럼 그것도 천마의 무공 아닌가?”

진백란은 입을 다물었다.

단순한 발상이다.

기질(氣質)의 변화는 형과 식의 변화까지 끌고 온다. 내력이 바뀌면 검식도 바뀌며 궁극적으로 검법 자체에도 변화가 온다.

정천이 말하려는 건 그것이었다.

나머지는 그녀 본인에게 달린 일.

“해보겠어.”

천마제전까지는 이레도 남지 않은 시간. 촉박하지만 시간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고마워.”

돌아서려는 정천에게 그녀가 말했다. 정천은 못 들은 척하고 그냥 걸어갔다.

비무장을 나서는 정천에게로 모용린이 달려왔다.

그녀답지 않게 땀으로 범벅이 된 모습. 경공을 펼치는 것만으로는 저렇게 될 리 없다. 식은땀을 잔뜩 흘린 게 분명했다.

“마교 무인들이라도 쳐들어왔어?”

“……반쯤은 맞았다고 해야겠군요. 한 명이에요. 그것도 상당히 강한.”

“강하다고?”

“구절검후가 당해 내지 못했어요.”

못해도 마교칠절 이상이란 소리. 천마를 제외하면 가장 강한 수준이라 봐도 좋으리라.

그리고 천마가 죽은 지금은…….

“새로운 천마 후보인가?”

“그런 것 같았어요.”

“그렇군.”

태연히 대꾸하고 걸음을 옮기는 정천. 모용린은 조금 당황하여 재차 말했다.

“뇌혈도 선배가 대적하고 있지만 승산은 장담하지 못해요!”

“아마 그렇겠지.”

여전히 미적지근한 반응. 모용린은 얼마 전의 대화에서 정천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모두 죽더라도 자기는 상관없다는 거야?’

연인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때 정천의 한마디가 귀를 때렸다.

“내게 덤빌 기운이 있다면 그쪽이나 돕는 게 나을 텐데.”

“……그렇겠죠. 당신이 원래 이런 작자란 걸 알았어야 했는데.”

모용린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연인검을 회수하지 않았다. 오히려 앞질러 걸어가 정천의 앞을 가로막았다.

“뭐하는 거냐?”

“도와줘요.”

“내키지 않는다. 천마의 딸도 도와줄 만큼 도와줬으니 이제 이곳에 볼일은 없어.”

“진운룡의 자취를 쫓겠다는 건가요? 하지만 당신이라고 해도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그 반대 아닌가? 지난번 놈들과 싸울 때도 거의 나 혼자 모든 것을 해냈던 걸로 기억하는데.”

모용린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진운룡은 이미 종적을 감췄어요. 그쯤 되는 작자니 쉬이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겠죠. 그런 자의 흔적을 쫓는 건 무력만으로는 안 될 일일 텐데요?”

“어차피 곧 모습을 드러낼걸.”

“대리자를 내세우겠죠. 천무맹을 배후에서 조종했던 것처럼.”

“그럼 그 대리자를 해치우면 될 일이야.”

“그럼 또다시 숨어들겠죠. 어느 쪽이 되었든 당신과 정면으로 싸우려 들지는 않을걸요?”

멸천의 위력은 간접적으로나마 모두가 확인했다. 그날, 황룡성에서.

게다가 자세한 정황까지 장유추나 요태희에게 전해 들은 뒤.

그로부터 모용린이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진운룡은 이 남자와 싸우려 들지 않을 거야.’

단순한 무위는 진운룡의 우세. 하지만 정천에겐 판도 자체를 뒤집을 비장의 수가 있다.

그렇다면 진운룡이 택할 방도는 한 가지다. 비장의 수를 낭비하게 하는 것.

그리고 그에겐 상당수의 추종자들이 있을 것이다.

얼마든지 쓰고 버릴 수 있는 추종자들이.

모용린은 일련의 사실들을 정천에게 늘어놓았다. 자신의 추측뿐 아니라 진백란의 정보망을 통해 접한 대략적인 판세까지.

“중원에선 사파가 득세하고 있어요. 단순히 천무맹이 무너졌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만 하기엔 너무 조직적인 움직임이 많아요.”

“…….”

“당신이라도 그 세력 전체에 홀로 맞설 순 없을 텐데요.”

정천은 인상을 구겼다. 여기까지 와서도 다른 이들의 손을 빌려야 한단 말인가.

“그러니까, 나는 마교의 힘을 빌려야 한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외톨이가 되겠답시고 머저리처럼 끙끙거리지 말라고요.”

“신랄하구만.”

“더한 말도 퍼부어 줄 수 있어요.”

정천은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는 확인해야겠군. 다들 정문 쪽에 있나?”

“따라와요.”

두 사람의 신형이 돌담 위로 치솟았다.

* * *

눈앞이 가물거린다. 하나뿐인 손에는 힘이 없다. 광천뇌도를 제대로 쥐고 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좋지 않군.’

장유추는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칼날이 몇 번이나 스치고 지나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분명한 건 자신이 놈에게 입힌 타격은 전무하다는 것이었다.

내력이 부족해 천뢰강림을 펼치진 않았다지만, 이 정도로 격차가 있을 줄은 몰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운기조식이라도 하고 왔을 것이다.

‘상성이란 건가.’

장유추는 가래침을 탁 뱉었다.

여전히 기운이 남아 있는 움직임에 관식은 쓴웃음을 지었다.

“맷집 하나는 경악스러울 정도군. 귀암산에서도 댁같이 괴악스런 늙은이는 보지 못했어.”

“앞으로 놀랄 일이 더 많을 게다.”

“글쎄. 일단은 내 옷깃이라도 스쳐야 하지 않을까?”

“흥.”

장유추는 코웃음을 치면서도 내심 낭패감을 느꼈다.

‘귀도신마, 저 멍청이 때문이다.’

두 사람은 일각 전까지만 해도 혈투에 가까운 비무를 벌였다. 내력도 내력이지만 체력과 정신력을 엄청나게 소모해 버렸다.

그리고 장유추의 천뢰강림은 내력 이상으로 체력의 소모가 큰 무공.

지금 펼쳤다간 놈에게 한 방 먹이기 전에 자신이 먼저 골로 갈 터였다.

‘기운이 남아 있던 초장에 팍팍 썼어야 했는데. 괜히 간을 보다가 이렇게 되어 버렸군.’

이젠 버티고 서 있는 게 고작이다.

그저 자존심과 오기만이 그의 두 다리를 지탱해 주고 있었다.

보다 못한 귀도신마가 나섰다.

“교대하자꾸나. 무정검 너도 온전한 상태가 아닌 적을 쓰러트리고 싶진 않겠지?”

팟!

장유추가 됐다고 말하려니 관식이 먼저 귀도신마 쪽으로 검기를 날렸다. 귀도신마는 혀를 차면서 슬쩍 물러났다.

“허튼수작 마시오.”

“젠장. 저 녀석은 나랑 대련하느라 온전한 상태가 아니라니까.”

“그게 뭐 어떻다는 거요? 세상 어느 적이 그런 것을 일일이 고려해 주고 배려해 준단 말이오?”

“하! 그럼 우리가 네놈을 협공해도 된다는 소리렷다! 네놈이 불리하든 말든 배려해 줄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다!”

“때려치워라, 떠벌이.”

장유추가 도리어 귀도신마를 책망했다. 정작 관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놈은 하여간 자기를 걱정해 줘도…….”

“네놈은 자존심도 없느냐?”

“뒈지고 나면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다 무슨 소용이냐? 자존심이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니고.”

“노부가 그래서 네놈을 싫어하는 거다.”

“싫든 말든! 어쨌든 죽고 싶으면 좋을 대로 하려무나!”

“오냐.”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을 보던 관식이 나직이 혀를 찼다.

“이것도 슬슬 질리는군. 두 사람 다 덤비든 말든 마음대로 하시오. 어차피 죽는 건 함께일 테니.”

“건방진……!”

“잘도 떠드는구나.”

두 사람의 살기가 집중되었다. 그럼에도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는 관식. 도리어 살기를 쏘아 보낸 두 사람이 밀리는 느낌이었다.

정천이 도착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교대는 나랑 합시다.”

훌쩍 담을 넘어온 정천이 말했다. 장유추는 내심 안도하면서도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허튼소리. 아직 결판이 나지 않았다.”

“노인네 자존심 하고는.”

시큰둥하게 중얼거린 정천이 장유추를 살짝 밀었다.

“웃.”

별것 아닌 동작인데도 장유추는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이미 다리에 힘이 풀려 있었던 것이다.

정천이 관식을 돌아봤다. 관식 역시 비슷한 연배의 정천을 이채 띤 눈으로 보았다.

“아하.”

알겠다는 표정이 관식의 얼굴에 떠올랐다.

“네가 천마에 가장 가깝다는 그 남자인가?”

“아니.”

정천은 고개를 저었다.

“천마가 나에 가장 가깝다는 게 옳은 표현이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광오한 성격이군.”

“네가 날 어찌 생각하든 신경 쓰지 않는다. 어쨌거나.”

정천은 전각을 밟았다. 천마보를 펼쳐 그대로 관식의 품 안으로 파고들며 주먹을 뻗었다.

파앙!

공기를 찢는 소리. 가장 자연스러운 움직임이기에 여느 권법을 능가하는 권격이었다.

“웃!”

관식은 아슬아슬하게 몸을 틀어 주먹을 피했다. 정천은 예상했다는 듯 살짝 물러났다.

“빠르군. 뇌혈도 선배가 고전할 만도 해.”

“…….”

관식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놀란 가슴을 추스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강하다!’

하지만 그보다 놀라운 건 정천의 보법.

‘분명해. 천마보가 분명하다.’

관식 역시 천마보를 일견한 적이 있었다. 그는 갑작스런 천마의 무공에 내심 놀랐다.

정천은 더 치고 들어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정천과 거리를 더 벌린 후에야 관식이 물었다.

“그분의 제자인가?”

“그렇다면 어쩔 거지? 고개라도 조아릴 거냐?”

“그럴 리가 있나.”

관식의 입가가 귀밑까지 늘어졌다.

“쓰러트리고 내가 위로 올라서야지.”

“마음가짐 하나는 마음에 드는군.”

고개를 끄덕인 정천이 말을 이었다.

“그럼 내가 이긴다면?”

“뭐야?”

“내가 널 무릎 꿇린다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관식은 이내 코웃음을 쳤다.

“웃기는군. 내기라도 하자는 건가?”

“비슷하다. 어쨌든 마음이 바뀌었거든.”

“마음이 바뀌어?”

의아한 표정을 짓는 관식. 정천은 구태여 부연 설명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가 아닌 장유추나 다른 이들에게 하는 말이었으니까.

“난 여전히 천마가 될 생각은 없다. 너 같은 놈들 수천, 수만을 밑에 두게 된다고 생각하니 골치가 지끈거리는 것만 같거든.”

“오만한 놈. 마치 자기가 벌써 천마라도 된 양 지껄이는구나.”

“될 생각 없다니까. 어쨌든 그래도 너희가 당장은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내기를 하자는 거다. 널 그냥 없애기는 좀 아깝거든.”

관식의 이마에 핏줄이 돋았다.

“사람 열불 나게 하는 데엔 일가견이 있군. 벌써 자기가 이긴 양 떠드는 꼴이라니.”

“어쨌든 할 테냐, 말 테냐?”

“해 주마. 내가 이기면 네놈의 팔다리를 잘라다가 개 먹이로 넘기겠다.”

“좋아. 내가 이기면 전심전력으로 진백란을 도와라.”

“진백란을? 역시 그녀와 긴밀한 관계인 건가?”

“쓸데없는 추측은 집어치우고, 어쨌든 받아들인 걸로 알겠다. 그러니…….”

화악.

시커먼 기운. 강룡검이 정천의 오른팔 위로 솟아났다.

“졌다고 비관하진 마라.”

“네놈이야말로!”

관식이 그대로 땅을 박찼다.

놈의 기괴한 검강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어차피 검강이야 자신도 펼칠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타앗!”

기합성과 함께 그의 장검에서 푸른빛 검강이 뿜어져 나왔다. 무정검이란 별호답게 일말의 인간성도 없는 듯한 시린 빛이었다.

그리고 격돌.

승패는 단 일검으로 갈렸다.

쨍강!

관식의 장검이 산산이 부서져 흩날렸다. 관식의 몸은 십여 장가량의 높이로 치솟았다가 땅으로 떨어졌다.

“크악!”

내장이 진탕이 되어 검붉은 피가 입으로 쏟아졌다. 관식의 몸에는 거대한 구렁이가 휘감고 지나간 것 같은 상흔이 남았다.

“……!”

장유추와 모용린, 귀도신마는 서 있던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설마 단 일격으로 승부가 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귀도신마의 경악은 더더욱 컸다. 정천의 검이 무언가와 닮아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무한천강……!”

분명했다.

천마의 절초. 그의 죽음 이후 다시는 볼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던 그것이었다.

“아직은 그 정도까진 아닙니다.”

정천이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는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 하고 있었다.

그의 손바닥엔 예리한 칼날에 베인 듯한 상처가 피를 흘리고 있었다.

자신의 검강에 베인 것이다.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분명했다.

“미완성이라는 건가?”

장유추의 물음에 정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멸천에만 의존하는 건 위험하니까요. 천마의 검에서 암시를 얻어 나름대로 제 무공에 응용해 보았습니다.”

“그럴 만한 여유가 있었던가?”

“시간은 넉넉했지요. 한 달 이상을 잠들어 있었으니까요. 다행히 그동안 이것저것 생각할 시간이 있었습니다.”

“실전은 이게 처음이란 거군.”

“예. 하지만 멸천 때의 경험도 있어서 생각보다는 수월했습니다.”

정천은 몸을 돌렸다. 상처는 이미 회복되어 있었다.

그동안 모용린은 자신이 무의식중에 단어 하나를 되뇌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괴물…….’

팔부혈선은 괴물이었다. 진운룡 역시 괴물이었다. 그리고 그건 천마나 정천 역시 마찬가지였다.

절정의 무인들이 즐비한 지금의 중원에서도 독보적인 존재들.

정천은 이미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 중원을 뒤흔들 수 있는 존재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것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그녀는 정천이 왜 그리도 홀로 행동하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접점을 만들기 싫은 거야. 그 접점으로 인해 문제가 더욱 커지기만 할 테니까.’

초대 천마는 스스로 사람들을 찾아다니지 않았다. 천무맹의 초대 맹주 진운룡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그저 그 자리에 존재했을 뿐이다.

모여든 것은 다른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사람들은 정천에게도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자기들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바랄 테고, 자기들 멋대로 정천을 추앙하리라.

제이의 마교, 제이의 천무맹이 생기는 것은 시간문제일 터.

정천은 그것을 꺼리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 마당에도 진백란을 천마로 내세우려는 것이었고.

‘내가 실수한 걸지도 몰라.’

모용린은 스스로를 책망했다.

어쩌면 정천을 홀로 움직이게 두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자꾸만 그 생각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는 모용린이었다.

그사이 정천은 널브러져 있는 관식을 들쳐 메고 있었다. 의아해진 귀도신마가 물었다.

“그놈은 어쩌려고? 가져가서 어디다 파묻어 버릴 셈인가?”

“그러기엔 아까운 녀석 같은데요. 이 정도 무인은 마교에도 흔치 않을 것 같습니다만.”

“흔치 않은 정도겠나. 그 녀석, 재수 없기는 해도 강한 놈일세.”

“그렇겠죠. 그러니…….”

정천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미래의 천마에게 선물하기로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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