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四章 무정검 관식
혈륜검을 쥔 진백란이 중얼거렸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거야?”
천마제전은 이제 칠주야도 남지 않았다. 마교, 나아가 중원 전체의 운명이 여기에 달려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향방의 열쇠를 쥔 사람은 정천.
그런 그가 하고 있는 것은…….
비스듬히 누워서 진백란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쓸데없이 중얼거리지 말고 시키는 거나 제대로 해.”
“하고 있잖아!”
진백란은 검을 들어 다시 휘두르기 시작했다. 기기묘묘한 절초라도 펼치느냐면 그건 아니었다.
그녀가 하는 일은 기본적인 베기 동작.
그것을 무식하게 반복하는 것이었다.
“정말 이래도 돼? 이제 며칠 남지도 않았는데, 정말 이러고만 있어도 되는 거야?”
“응.”
단정적이기 그지없는 어조. 그러나 정천 같은 사람이 내뱉으니 그저 가벼워만 보였다.
진백란은 살기마저 어린 눈을 하고서 물었다.
“당신…… 정말 제대로 할 마음은 있는 거야?”
“너야말로 제대로 배울 마음은 있는 거냐?”
“그야 당연하지!”
“그럼 시키는 대로나 해.”
“으…….”
진백란은 주먹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더 열을 내 봐야 씨알도 먹히지 않을 일. 결국 시키는 대로 검을 휘둘렀다.
무의미한 동작.
검격의 기초 중의 기초인 내려치기.
아마 처음 걸음마를 뗐던 순간부터 수만 번은 반복해 왔으리라.
‘물론 기본이 중요하다는 건 알지만…….’
그러나 이건 아니다.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진백란의 머릿속을 자꾸만 맴돌았다.
정천은 팔자 좋게 늘어져서 그녀가 검 휘두르는 모습을 보았다. 이따금 걸쭉하게 하품도 하면서.
누가 봐도 절세신공의 전수와는 몇 갑자의 차이가 있는 모습이었다.
지켜보던 정천이 대뜸 물었다.
“지금까지 몇 번 휘둘렀지?”
“……몰라.”
“그럼 앞으로는 세면서 휘두르도록 해. 대략 천 번쯤.”
“으……!”
진백란은 하마터면 반려자 같은 혈륜검을 내던질 뻔했다.
‘더는 못해!’
마음속으로 소리치고 또 소리쳤다. 그러고 나니 약간은 진정이 되는 기분이었다.
정천은 그런 진백란을 멀뚱히 바라봤다.
“뭐해? 안 하고.”
“…….”
진백란은 불평하지 않기로 했다.
‘일단은 저 작자의 말을 따르자. 따르고 난 뒤에도 성과가 없다면 그때 가서 따져도 늦지 않아.’
물론 그러려면 보장을 받아 둬야 했다.
“만약 내가 천마신공을 익히지 못한다면, 당신이 내 대신 천마제전에 나가야 해.”
“내가 왜?”
“날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거니까! 책임을 져야 할 것 아냐?”
“왠지 미리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 놓는 것 같은데. 나중에 실패하더라도 내 책임으로 떠넘기려고.”
“난 그렇게 비겁하지 않아!”
“뭐 그렇다고 쳐 두지. 어쨌든 내려치기나 계속하라고. 이천 번 정도.”
“……왜 아까보다 늘어난 거야?”
진백란은 투덜거리면서도 혈륜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백 번쯤 세었을 때, 정천이 그녀의 요구에 확답하지 않았다는 걸 떠올리고는 치를 떨었다.
천 번. 천오백 번.
진백란의 숨이 거칠어졌다. 마교에서도 이십 위권 내에 드는 그녀에게도 천 단위의 반복 동작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내력 소모를 극단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상황. 오직 체력만을 사용하고 있으니 힘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헉…… 헉.”
그녀의 손놀림이 느려졌다.
한가로이 늘어져 있던 정천이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순서가 끊기면 처음부터 다시.”
“……으으!”
오만 가지 욕을 속으로 삭이며 손에 힘을 주었다. 이젠 거의 악만 남은 그녀였다.
그리고 마침내 이천 번.
그녀는 비무장 위에 큰 대자로 엎어졌다.
“더, 더는 못해.”
아까까지의 위세는 다 사라진 뒤. 거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진백란이었다.
정천은 그제야 몸을 일으켜서는 터덜터덜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녀의 등에 손을 얹고는 체내를 살폈다.
꿈틀거리며 약동하는 심장.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것처럼 쿵쾅거린다.
사방으로 뿜어내는 피는 혈관을 따라 맹렬히 체내를 일주하고 있었다.
기운을 받아들이기엔 최적의 상태였다.
정천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지금부터 네 안에 내 기운을 불어넣을 거야.”
“……!”
진백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제부터가 진짜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단 한 번뿐이니 지금의 감각을 잘 기억해 두도록 해. 실패하더라도 다시 할 수 있긴 한데, 또 처음부터 검을 휘둘러야 할 거야.”
“아, 알았어.”
더듬거리며 대답한 진백란이 조금 뒤늦게 물었다.
“그런데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
“네가 익힌 무공은 천마신공의 원형이라 할 수 있어. 물론 보다 조악하고 단순하지만. 어쨌든 기본적으로 같은 형식을 지녔다는 게 중요하지.”
“……좋아. 그래서?”
“간단해. 기운의 흐름을 느끼고 네 원래 무공과 어떤 부분이 다른지 깨달아야 해. 그런 다음 네 기혈을 조정하는 거야.”
형(形)과 식(式)을 익히기에 앞서 기반을 다져 놓는다.
불안정하고 위험성 많은 방식이지만, 분명 빠르고 효과적이었다.
정천이 나직이 경고했다.
“자칫 잘못하면 주화입마에 걸릴지도 모른다.”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겠지. 다른 누구도 아닌 천마의 무공이니까.”
“좋은 마음가짐이야.”
짤막히 대꾸한 정천이 대번에 기운을 불어넣었다.
꿈틀!
진백란의 몸이 크게 요동쳤다. 체내로 파고든 기운은 그만큼 격렬했다.
“큭!”
그저 기운이 들어왔을 뿐인데 피가 솟구쳐 입으로 흘러나왔다. 진백란은 거칠어진 호흡을 애써 갈무리하며 집중했다.
정천의 기운은 마치 수십 개의 가시를 지닌 덩굴 같았다.
약간만 꿈틀거려도 몸을 찌르고 가를 것만 같은 느낌. 그 어떤 것보다도 위험한 기운이었다.
‘이것이 아버님의…….’
정확히는 아버지의 기운과 무척 흡사한 기운. 어쩌면 그 이상으로 위험할지도 모른다.
진백란의 호흡이 안정되자 정천이 말했다.
“움직인다.”
쿠쿠쿠쿠.
“……!”
진백란은 하마터면 다시 한 번 각혈할 뻔했다.
정천의 기운은 강렬하다 못해 그녀의 기혈 자체를 부숴 버릴 것만 같았다.
‘날 죽이려는 건가?’
한순간이지만 그녀를 암살하려는 자가 정천으로 위장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말이다.
‘이건 진짜야.’
진백란은 이를 악물었다.
혼절할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기운의 흐름을 기억하기 위해 노력했다.
“크, 으으, 윽!”
강룡수라마공의 기운은 그녀의 몸을 천천히 일주했다. 지나치게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불필요한 부분은 적절히 지나쳤고 중요한 부분은 확실하게 지나갔다.
그러한 과정을 마친 후 정천의 손아귀로 다시 회수되었다.
“커헉!”
기운이 빠져나가자마자 진백란이 기침을 토했다.
검붉은 핏물이 섞여 있는 기침.
나쁜 징조는 아니었다.
“울혈 제거는 덤이야. 딱히 의도했던 건 아니지만 말이지.”
“이…… 악귀.”
진백란은 그 말을 끝으로 정신을 잃었다.
* * *
또 다른 어둠.
유령마객은 또 다른 사내와 대면하고 있었다.
마의와 달리 젊은 사내였다. 기껏해야 서른하고 한둘쯤 되었을까.
단정한 의복과 잘 손질된 머리칼. 귀공자의 전형 같은 얼굴과 힘이 넘치는 눈매.
제왕의 상이란 게 있다면 그를 가리키는 것이리라.
“그래, 마의를 만났다고.”
사내의 말에 유령마객의 붕대가 움직였다.
“그렇소.”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던데.”
“…….”
“내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니라고 보네만.”
유령마객은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마교의 모든 정보를 총괄하는 그다. 그런 그를 감시할 수 있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분명한 건, 눈앞의 청년은 그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미 전해 들어 알고 계실 터인데 더 물어 무엇 하겠소?”
“전해 듣는 것과 직접 듣는 것은 명백히 다르지. 자네 입으로 직접 듣고 싶어.”
“……마의는 공자를 첫손에 꼽았소이다.”
사내, 무정검 관식의 미소가 짙어졌다.
“유감이지만 사족이 더 있었다고 들었거든. 그리고 내가 관심이 있는 쪽은 그 사족이야.”
“……마의는 천마의 딸에게 기대를 거는 것 같았소.”
“진 소저에게? 확실히 재능은 있지. 다른 누구도 아닌 천마 진검운의 유일한 혈육이기도 하고.”
관식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하지만 아직 개화하지 못한 꽃이야. 그 상태로 나서 봐야 줄기를 꺾이거나 이파리를 잃을 뿐이지.”
“…….”
“하지만 마의쯤 되는 능구렁이가 괜한 기대를 할 리는 없지. 뭔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건데.”
유령마객의 부연 설명 없이도 홀로 추리를 이어 가는 관식이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대체로 맞았다.
“그러고 보니 진 소저는 이천 명이나 되는 객식구를 두고 있었지. 아무래도 정파 놈들의 무공에서 뭔가 실마리를 찾은 것 같은데.”
반쯤은 정답이라 할 수 있는 추측. 유령마객은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관식은 그 반응만으로도 만족했다.
“자네쯤 되는 사내가 주눅이 든 모습은 언제 봐도 우습단 말이지.”
“…….”
“어쨌든 통천각주인 자네조차 자세히 모를 정도면 대단한 뭔가가 있긴 한 모양이야. 안 그런가?”
관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에 유령마객은 약간의 불안을 느꼈다.
“무얼 하실 생각이오, 공자?”
“나는 궁금한 건 참지 못하거든. 쇠뿔도 단김에 빼랬으니 이참에 인사나 하러 가려고.”
“천마의 저택으로 가겠단 말씀이오?”
“옛 천마의 저택이지.”
가볍게 정정을 한 관식이 걸음을 뗐다. 유령마객은 화들짝 놀라 그의 뒤를 따랐다.
“무턱대고 쳐들어갔다간 불청객이 아니라 적으로 오인받을 것이외다!”
“그게 무슨 문제지? 굳이 적이 아니더라도 별별 이유로 싸움이 터지는 곳이 여기, 귀암산 아닌가?”
“자그마한 싸움과 대규모의 전투는 다르지 않소?”
“걱정 말게. 최대한 자제할 테니.”
그게 말처럼 될 리가 없었다. 괜히 무정검이 아니니 말이다.
그러나 유령마객은 관식을 더 말릴 수 없었다. 여기서 더 그를 귀찮게 한다면 좋은 꼴 보긴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약간이지만 호기심이 들기도 했고.
‘확실히 절호의 기회이긴 하다.’
저택 내부의 정황은 통천각주인 그조차 아직 살펴보지 못했다.
몇 번인가 사람을 풀어 조사를 시도하긴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번번이 정파인들에게 걸려 허사로 돌아갔다.
상당한 실력자가 저택을 지키고 있다는 것.
그러나 이 사내, 관식이 나선다면 얘기가 조금 다를 터였다.
‘피바람이 몰아치기는 하겠지만…….’
어찌 보면 며칠 뒤 벌어질 일이 조금 당겨진 것에 불과했다. 어차피 모든 것은 피를 보고 나서야 끝나게 될 것이다.
전대 천마 때 그러했던 것처럼.
일각 후.
저택 담에 걸터앉아 있던 백미련이 흠칫 놀라 일어섰다.
“온다.”
“네?”
생각에 잠겨 있던 모용린이 흠칫 놀랐다. 그녀 역시 같은 방향을 보았고, 인영 하나가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느린, 그러나 분명한 걸음.
당당하게 걸어오고 있는 사내가 하나.
“마교의 사절이라도 되는 걸까요?”
“대놓고 검을 들고 오는 사절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어.”
백미련의 말대로 사내는 기다란 장검 하나를 허리 옆으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백 장 거리가 됐을 때 검을 뽑아 드는 사내.
“칫.”
백미련은 어느새 구절검을 구현하고 있었다.
파앙!
공기를 찢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검격이 번뜩였다.
그리고 백 장 거리를 가르며 검기 다발이 쏘아져 들어왔다.
빠르고 날카롭다. 산전수전 다 겪은 백미련조차 잠시 놀랄 정도로.
“피해!”
그 말을 끝으로 백미련이 앞으로 몸을 날렸다. 아홉 갈래의 검 전부가 한데 뭉쳐 검기에 맞섰다.
카앙!
날카로운 충돌음.
백미련의 몸이 다섯 걸음 정도 물러났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반쯤 벽에 처박혔다.
“큭.”
사내의 검기는 하늘로 튕겨져 올라간 뒤, 고작 쳐내는 것만으로도 이런 반동을 받은 것이다.
“사람들을 불러오겠어요!”
모용린이 후방으로 달리며 소리쳤다. 사내의 무위는 그녀가 합세한다고 어찌할 수준이 아니었다.
벽에서 몸을 빼낸 백미련이 입가를 슥 훔쳤다.
선명한 붉은 피가 묻어났다.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건가, 마교도?”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건지 사내가 픽 웃었다.
“제법이군. 살아남을 줄은 몰랐는데.”
“자신감이 과하군. 그 정도로 대단한 검기 같지는 않은데 말이야.”
“벽에 처박힌 주제에 할 말인가?”
“본후가 잠시 방심했다.”
말을 하면서도 백미련은 스스로에게 놀라고 있었다. 평소 하지 않던 허세를 부리다니.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사내가 담담히 말했다.
“나는 관식이다.”
“……그래서?”
“흐음. 아직 정파무림에까진 내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나 보군. 하긴 꽤 오랜 세월 동안 교류가 단절되어 있었으니.”
사내, 관식이 가볍게 검을 흔들었다.
“지금부터 무정검 관식의 이름을 똑똑히 새겨 주면 되겠지.”
“…….”
“네가 그 첫 제물이 되어 줘야겠다.”
백미련은 듣지도 않았다는 듯 먼저 몸을 날렸다. 선수필승인 법이니.
탓!
백매화향이 자욱이 깔렸다. 이전의 부상에서 거의 회복한 그녀였기에 검의 예리함은 한층 더해진 뒤였다.
타타타탕!
연달아 불꽃이 튀었다. 아홉 검 모두를 활용한 화려하기 그지없는 연격.
그것을 모두 막아 내는 관식의 검엔 일말의 군더더기도 없었다.
‘대단하다.’
백미련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했다.
관식의 검은 지금껏 그녀가 맞붙었던 마인들의 것과는 달랐다.
보통 패도적이라는 단어로 대표되는 그들의 검과 달리, 그의 무정검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섬세했다.
그리고 날카로웠다.
피핏!
백미련의 어깻죽지에서 피가 튀었다. 다음은 허벅지, 이윽고 목에도 생채기가 생겨났다.
“윽……!”
침음을 흘리며 물러나는 백미련. 공세를 펼친 건 그녀인데 피투성이가 된 것도 그녀였다.
관식은 장난기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끝인가?”
“…….”
“정파인 치고는 제법이야. 하지만 잘난 척할 정도의 무위는 아닌 것 같군.”
백미련은 입술을 깨물었다. 설마 자신이 이렇게 농락당하게 될 줄은 몰랐다.
‘강하다.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어.’
천마의 것과는 완전히 별개인 무공, 아마도 귀암산의 험난한 세파 속에서 스스로 갈고닦은 것이리라.
그 역시 엄청난 수라장을 거쳐 왔을 터.
그리고 진정한 무공은 그런 곳에서 생겨나는 법이었다.
관식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그럼 이번엔 내 차례다.”
“…….”
“죽을 준비는 되었나?”
백미련은 구절검을 풀었다. 칼날은 그녀의 머리칼로 되돌아가 풀썩 가라앉았다.
포기한 것인가? 관식은 잠시 그렇게 생각했으나 이내 그게 아님을 알았다.
그녀의 등 뒤로 느껴지는 패도적인 기운.
“흥. 협공하겠다는 건가?”
“그럴 생각이었다면 구절검을 유지했을 테지. 본후는 네게 졌다. 인정하겠어. 하지만 저들도 그럴 것 같지는 않군.”
쿠웅!
장유추의 거구가 훌쩍 담을 뛰어넘어 나타났다.
“이놈이 침입자인가?”
장유추의 말에 관식은 헛웃음이 났다.
“침입자는 네놈들이겠지, 정파 놈들.”
“침입자가 아니라 손님이지.”
“진백란의 손님일 뿐 마교의 손님은 아니다.”
“별 차이가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귓구멍을 휘적거리며 대꾸하는 장유추. 조금 뒤늦게 귀도신마가 담을 넘어 나타났다.
관식이 처음으로 표정을 구겼다.
“한때는 댁을 존경하기도 했었소, 귀도신마.”
“허. 지금은 아니라는 건가?”
“당연한 것 아니겠소? 언제부터 당신 같은 자가 진백란의 끄나풀이 된 거요?”
모욕적인 도발에도 귀도신마는 클클 웃었다.
“뭐 어쩌다 보니. 어쨌든 그녀는 천마님의 따님 아닌가? 같은 마교칠절이라 해도 입장이 다르지.”
“죽은 천마의 딸일 뿐이오. 살아 있는 천마와 죽은 천마는 엄연히 다르지.”
“그냥 죽은 천마가 아니다. 우리 모두를 구하시고 돌아가셨지.”
관식이 잠시 침묵했다.
황룡성에서의 일은 마교인들에게 있어 미궁 속의 수수께끼 같았다.
전서응의 보고로는 서전을 승리로 장식했다고 했다. 그 이후로도 내내 압도적으로 밀어붙였고.
그러다 갑자기 천마가 죽었다. 마교 본대는 심대한 타격을 입었고, 황룡성은 폭풍에 삼켜져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그 외의 모든 것은 알려지지 않았다.
천마가 어떻게 죽었는지, 갑작스런 폭풍의 원인은 무엇인지, 왜 그들이 황룡성의 생존자들을 거두었는지.
자세한 정황을 아는 것은 극소수뿐.
그들은 침묵하고 있었다.
그리고 관식은 그 어떤 것에도 신경 쓰지 않았다.
“중요한 건 천마가 죽었다는 사실뿐이오.”
“아니, 중요한 건 그분이 어떻게 돌아가셨느냐 하는 것이다.”
“내겐 중요하지 않소. 그보다는 새로운 천마의 자리가 중요하지.”
귀도신마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다면 천마제전에서나 설칠 것이지 왜 여기 와서 발광인가?”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거든. 이곳에 강력한 천마 후보가 있다는 얘기를.”
“아, 그래?”
귀도신마는 약간 놀란 눈을 했다. 그것은 잠자코 있던 장유추도 마찬가지.
“소문이 빠르긴 빠르군. 그나저나 어디서 주워들은 것이냐?”
“알 바 아니잖소? 어쨌든 그 반응을 보니 사실이긴 한가 보군.”
“응. 사실이네.”
관식의 입가가 길게 늘어졌다.
“그자를 이리 데려오시오.”
“아니, 그럴 필요도 없네.”
“……?”
“그 친구는 천마제전에 나가지 않을 거야. 그러니 자네도 다른 작자들도 그 친구에게 신경 쓸 것 없겠지. 안 그런가?”
“……그렇지 않소. 어쨌든 그 정도 강자라면 실력을 알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니.”
“후회할걸, 자네.”
“후회하고 말고는 선배가 신경 쓸 일이 아니오.”
귀도신마는 옆머리를 긁적였다.
“하여간 말이지. 한판 붙고 싶은 거라면 천마제전 이후에나 하게. 그때 가서는 마음 놓고 싸울 수 있을 것 아닌가?”
“지금은 아니고?”
“괜히 붙었다가 개박살이 나면 천마제전이고 뭐고 없지 않겠나?”
“호오.”
관식의 미소가 일그러졌다.
“그 말은 내가 지기라도 할 거라는 것 같소만.”
“지기라도 할 것 같은 게 아니야. 그 친구랑 싸우면 자네 죽어.”
옆에서 듣고 있던 장유추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 떠벌이 놈이 저 애송이를 도발하고 있군.’
정말 그런지 어떤지는 몰라도 효과는 탁월했다.
차릉!
장검을 들어 귀도신마를 겨냥한 관식이 서늘하게 협박했다.
“당장 그자를 데려오시오. 내가 이곳을 정말 다 부숴 버리는 걸 보기 싫다면.”
“미안한데 지금은 안 된다니까. 그 친구 좀 바빠.”
“두 번 말하지 않겠소.”
화악!
관식의 몸에서 무형의 살기 다발이 뿜어져 나왔다. 내내 여유롭던 귀도신마마저 살짝 위축될 정도.
“호오.”
장유추가 나직이 감탄했다.
“솔직히 놀랍군. 그 정도로 정갈하고 예리한 살기라니, 제법인데.”
“검기도 날카로운지 시험해 보겠나?”
“뭐, 그러지.”
장유추가 성큼 나섰다.
그사이 백미련이 귀도신마에게 다가가 귀엣말을 건넸다.
“정천에게 다녀와.”
“응?”
“안 그러면 장유추가 죽을지도 몰라.”
귀도신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백미련의 모습만 봐도 관식의 무위가 짐작은 되었지만…….
“그 정도인가? 저 칼도둑놈이 위험할 정도라고? 관식 놈이 제법 강하기는 하지만 그 정도로 압도적이진 않을 텐데?”
“단순 무위만으로는 비슷비슷한 수준일 거야.”
“그렇다면 됐군. 뭐가 문제인가?”
“상성이 좋지 않아.”
“상성이라면…… 물이 불을 이기고, 뭐 그런 거?”
“쾌검은 강검을 이기고 강검은 연검을 이기며 연검은 쾌검을 이겨. 그리고 저 남자는 연검과 쾌검 모두에 정통해.”
반면 장유추는 강검일변도.
백미련의 말대로라면 불리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쫄래쫄래 정천에게 일러바칠 수도 없잖나. 지금도 아가씨를 가르치고 있을 텐데.”
“당신 친구가 죽어도 좋아?”
귀도신마는 펄쩍 뛰었다.
“친구라니! 저런 머저리가?”
“거기, 시끄럽다.”
장유추가 귀찮은 듯 소리쳤다. 아마도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을 터.
그것은 관식도 마찬가지였다.
“……저렇다는군. 그래도 나와 맞설 텐가?”
“흥. 저런 이론 놀이는 샌님들이나 하는 거야. 무인의 실전은 이론과는 전혀 다르지.”
“그 말엔 동감이지만…….”
핏!
주르륵.
장유추의 뺨에서 선혈이 흘렀다. 워낙 빠른 검기였기에 흠칫 반응하지도 못했다.
“…….”
“이 정도라면 앞으로의 공격에도 제대로 반응하기 힘들 것 같은데.”
“흥.”
슥 뺨을 훑어 낸 장유추가 사납게 웃었다.
“어디서 모기가 물었나 보군. 간지럽기 그지없구나.”
관식도 피식 웃었다.
“이래서 난 댁 같은 덩치들이 좋단 말이야.”
파앙!
떠드는 건 거기까지였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땅을 박차고 격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