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三章 아버지의 유산 (98/146)

第三章 아버지의 유산

“깨어났는가, 정천? 천마제전에 나갈 거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선 귀도신마가 쾌활하게 소리쳤다. 방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그 와중, 진백란이 못 말린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직 설명도 안 했어요, 귀도.”

“엇, 그랬군요.”

핀잔을 듣고서도 싱글벙글 웃는 귀도신마였다.

“이 몸이 간단히 설명함세. 새 천마를 뽑는 회합이 열릴 예정인데 어차피 싸움질로 가려질 게 뻔하거든? 그러니 자네가 나서서 평정해 줘야겠네.”

“…….”

장내의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확실히 간단명료한 설명이기는 했지만…….

“싫습니다.”

정천의 답변 역시 간단했다.

내내 웃는 낯이던 귀도신마의 표정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아니? 왜!”

“이기면 천마가 되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 천마신교의 백만 교도 전부가 자네의 휘하에 들어오는 거라네!”

“그래서 싫다는 겁니다.”

“천마가 되기 싫은가? 마교의 정점이 되기 싫어?”

“예.”

“허!”

귀도신마는 기묘한 감탄사를 뱉고는 그대로 침묵했다. 그로서는 굴러들어 온 호박을 왜 차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잠자코 있던 진백란이 입을 열었다.

“어째서지?”

“내가 천마가 되면 정신 나간 마교도 놈들을 통솔해야 되잖아. 난 그런 거 싫어.”

참으로 간단한 답변.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백미련이 피식 웃었다.

“안 그러면 이천 명에 이르는 사람들 모두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웃음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살벌한 이야기. 물론 그 살벌함에 질릴 만큼 담이 약한 사람은 없었다.

귀도신마가 팔짱을 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확실히 그렇게 되겠지. 자네들에 대한 여론은 안 좋다는 말로도 표현하기 힘들 정도니.”

“백만 마교도 전부를 적으로 돌리게 될지도 몰라. 당장은 내가 막고 있지만 그것도 위태위태해.”

진백란이 말을 거들었다.

“아마 새 천마가 내리게 될 첫 명령은 당신들을 사냥하라는 것일걸?”

“도망치면 될 일이지.”

“이천 명 모두를 데리고? 아무리 당신이 강하더라도 그건 불가능해.”

정천은 시큰둥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이해할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뭔가 이상한 착각들을 하고 있는데 말이야.”

정천이 장내의 모두를 돌아봤다. 전혀 장난기가 없는 눈길로.

“내가 왜 그 이천 명의 생사를 책임져야 하지?”

“…….”

침묵이 감돌았다. 몇몇은 당혹감에 입을 오물거렸고 몇몇은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지켜야 할 의리가 있는 사람들은 란아와 화륜문의 문도들 정도야. 그 외의 나머지가 여기서 죽든 말든 상관할 바는 아니지?”

“그런 말도 안 되는!”

누구보다 당황한 사람은 요태희였다.

“이제 와서 이들을 버리겠단 말인가요?”

“애초에 거둔 적도 없으니 버린다는 것은 어폐가 있지 않나? 난 이들의 주인이 아니야. 이들도 나를 따르는 수하들이 아니고.”

“하지만 우린, 저는 당신을 믿었어요!”

“혈선들은 모두 죽었지. 진운룡이 남아 있긴 하지만 놈도 온전한 상태는 아니야. 해치운다면 나 혼자서도 가능할지도 모르지. 그게 아니더라도 이천 명이나 되는 짐을 데리고 다니는 것보단 혼자가 편해.”

“…….”

요태희가 고개를 떨어트렸다. 냉담하지만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다.

진백란은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어떻게 그따위로 말할 수 있지? 네가 누구 덕에 목숨을 건졌다고 생각해?”

“내가 할 말을 하는군. 내가 아니었으면 여기 있는 모두는 그날 그 자리에서 죽었어. 그렇지 않다고 말하진 않겠지?”

“그, 그거야…….”

맞는 말이다. 인정하기 싫어 말끝을 흐릴 뿐. 정천이 아니었다면 그들 모두는 마라혈천에 의해 불귀의 객이 되었으리라.

진백란도 입매를 비틀며 침묵했다. 결과적으로 정천에게 화를 낼 사람은 없게 되었다.

‘결국은 이 정도의 사람이었어?’

모용린은 살기까지 띤 눈으로 정천을 노려봤다. 그러다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그녀가 화연란을 향하여 말했다. 기실은 정천더러 들으라고 한 말이나 다름없었지만.

“당신이 그에게 부탁해요.”

“예?”

“조금 전 그가 말했죠. 당신과 화륜문 사람들만은 지킬 거라고. 그러니까 당신이 부탁하면 돼요. 다른 이들도 지켜달라고 말이에요.”

화연란은 당황했다.

“하지만…….”

“그게 안 되면 고집이라도 피우면 되겠죠. 이곳에 남아만 있으면 저자도 어찌할 수 없지 않겠어요?”

그녀에게 말하고 있으나 어느새 시선은 정천을 향해 있었다. 이래도 듣지 않을 거냐는 의미였다.

정천은 피식 웃었다.

“얕은 수법인데.”

“비웃으려면 비웃어요. 우린 이렇게라도 살아남아야겠으니까.”

“비웃지 않아. 도리어 존경스러운데. 그 자존심 강하던 아가씨가 설마 이렇게까지 나올 줄이야.”

모용린은 애써 웃었다. 최대한 당당하게 보이길 희망하면서.

“어떻게든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후일을 도모할 수도 있는 거니까요. 당신도 그때 그랬을 것 아닌가요? 진마동의 어둠 속에서.”

“…….”

정천이 처음으로 멈칫했다.

불안한 느낌에 몇몇이 긴장했지만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얕게 한숨을 쉰 정천이 화연란을 돌아봤다.

“네가 정해.”

“……네?”

“팔부혈선도 대부분 죽은 지금 내게 남은 건 대주님의 마지막 부탁뿐이야. 그러니 네가 선택해. 네가 저들 모두를 보호하라면 하겠어. 천마가 되라고 하면 되겠다. 그러니 네가 내게 말해.”

모두의 시선이 화연란에게 향했다. 바야흐로 그녀가 모두의 운명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화연란은 숨 쉬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갑작스레 너무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된 까닭이었다.

모용린은 일부러 그녀의 시선을 회피했다.

지금 화연란을 봤다간 자기도 모르게 애원하게 될 것만 같았다.

“저는…….”

한동안 주저하던 화연란이 겨우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가 천마가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 무슨!”

귀도신마의 외침이었다. 설마 그녀가 저렇게 말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정천조차도 약간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란아?”

화연란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껏 너무 많은 것에 짓눌러 계셨어요. 처음엔 아버지와 옛 동료들의 망령에, 다음엔 우리들을 지키려는 의무에. 이제 와서까지 오라버니가 시달리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 결과 이들 모두가 죽게 될 텐데도?”

화연란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직 확정된 건 아니에요. 굳이 오라버니가 천마가 되지 않더라도 다른 방법이 있을 거예요.”

“꿈같은 소리를 하는군! 지금 상황이 애들 장난이라고 생각하나? 마교가 그리 호락호락해 보이는가!”

귀도신마의 호통에도 화연란은 위축되지 않았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도 한 문파의 문주이고, 지금 상황이 얼마나 절박한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라버니에게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할 수는 없지 않나요?”

“말도 안 되는 요구라니. 천마가 된다는 건…….”

“그만큼 큰 의무감과 압박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죠. 마교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으니까요.”

“으, 으음.”

귀도신마가 도리어 우물쭈물하게 되었다.

화연란은 차분히, 그러나 힘이 실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의욕이 없는 사람은 무능력한 사람보다 위험한 법이에요. 무능력한 사람은 최소한 자기보다 유능한 이들에게 일을 맡길 수는 있을 테니까요. 의욕 없는 천마가 마교를 패망으로 이끌길 바라세요?”

“그,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면 정천 오라버니께 그런 요구를 해선 안 돼요. 마교를 위해서도 말이죠.”

“그럴지도…… 모르겠군.”

달변에 넘어가 버리는 귀도신마였다.

그 모습을 보며 남궁운이 희미하게 웃었다.

“철부지 아가씨인 줄 알았더니 한 문파의 당당한 문주였군.”

“그러게 말입니다.”

제갈현도 약간 놀랐다는 표정이었다.

“위기가 무인을 한 단계 성장시키는 법이라더니, 저 소저에게 딱 맞는 표현 같군요.”

“무인의 성장이라.”

“꼭 무공 자체만이 무인의 자질은 아니니까요.”

“그렇군.”

고개를 끄덕인 남궁운이 앞으로 나섰다.

“그렇다면 다른 방도를 찾아보는 편이 낫겠지. 안 그런가, 정천?”

“제게 물어 봐야 별 의미가 없을 텐데요.”

“그렇지는 않지. 어쨌든 자네는 천마가 되기 싫은 것뿐이잖나? 그 외의 일이라면 어느 정도 우리에게 협력할 수도 있으리라 보네만.”

역시 수완가답다. 정천은 속으로 생각했다.

남궁운은 정천의 심리를 상당히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었다.

정천이 강경하게 나온 것은 타인들의 무책임한 기대감이 싫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천마의 자리에 대한 압박감도 컸고.

‘그는 냉정하긴 해도 살인마는 아니다. 정말 이천 명의 목숨을 아무렇게나 내던질 만큼 무책임하진 않지.’

그것을 알기에 남궁운은 조금 전의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진백란을 돌아봤다.

“하여,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만.”

“좋은 생각이라도 있나요?”

“유력한 천마 후보에게 접근한다면? 그와 협상을 할 수도 있다고 보오만.”

“협상이라고요? 무엇을 가지고 말이죠?”

대답은 정천에게서 들려왔다.

“천마의 최종 절기라면?”

진백란과 귀도신마의 귀가 번쩍 뜨였다. 특히나 진백란의 놀라움은 엄청난 것이었다.

“거짓말…… 당신이 아버님의 절초를 알고 있을 리가 없잖아?”

“응. 반쯤은 거짓말이야. 다시 말해 절반쯤은 정말이란 거지.”

“그게 무슨 헛소리지?”

“간단해. 천마와 나의 무공은 같은 뿌리를 지니고 있다. 당연히 나는 천마의 무한천강에 대한 지식 역시 가지고 있어.”

사실이라면 입이 떡 벌어질 일이었다.

천마는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의 최강검을 전수하지 않았다.

그럴 만한 자질의 인재를 발견하지도 못했거니와, 자신의 최강검식을 섣불리 밝힐 만한 성격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최강검은커녕 천마신공 자체조차 극소수에게만 보여졌을 따름.

그의 죽음과 함께 그 모든 게 물거품으로 사라진 거나 다름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천의 말은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만일 그것을 익힐 수만 있다면…….’

중원 최강에 다가가는 것은 일도 아닐 터.

전대 천마만큼이야 힘들겠지만 대단한 성취를 이룰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내가?’

진백란은 한순간 갈등했다. 자신에게 가르쳐 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천마제전은 칠주야도 채 남지 않은 상황.

그사이에 아버지의 검을 익힌다는 건 그녀가 천 년에 한 번 나올 천재라 해도 불가능했다.

“괜찮은 거래 상대가 있다고 보나?”

정천의 물음은 노골적이었다.

마치 진백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이걸 익힐 생각 따윈 말라고.

“나는…….”

진백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정천이 말한 것에 딱 들어맞는 이들이 몇 명 있었다. 무정검(無情劍)이란 별호로 더욱 유명한 관식이라든가, 태산도 무너트린다는 붕설권(崩雪拳)의 조혁이라든가 하는 무인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선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내가 배우고 싶어.”

“네가?”

정천의 반문에 진백란은 흠칫 놀랐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모두의 시선이 날아와 꽂히고 있었다. 진백란은 당황스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내가…… 방금 뭐라고 했지?”

“네가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네 아버지의 검을.”

“나는, 그러니까…….”

진백란은 말을 오물거리며 속으로 되뇌었다.

‘멍청이! 이런 마당에 사사로운 상념이라니!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호통을 치실 거야!’

마음을 가다듬은 그녀가 말했다.

“말이 잘못 나왔던 것 같아. 그러니까 조금 전의 말은 잊었으면 좋겠어.”

“싫은데.”

장난 같은 반응. 정천의 표정이 진지한지라 진백란은 더 화가 났다.

“말이 헛 나왔다니까! 실수한 걸 가지고 물고 늘어지지 말라고!”

“실수가 아닌 것 같은데.”

진백란은 이를 악물었다.

실수가 아니긴 했다. 그녀의 본심이었을 뿐. 지극히 개인적인 바람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걸 인정하고 싶진 않았다. 인정하는 순간 눈물이 나올 것 같았기에.

정천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란 작자들은 모두 똑같은 모양이야.”

“뭐?”

“어쩌면 천마 역시 대주님과 비슷한 성격이었던 건지도 모르겠군.”

“그게 무슨 소리지?”

“패혈검마라고 했던가? 네 별호.”

“혈패검마야. 그런데 그건 왜 묻지?”

“질문하는 건 나다. 검을 누구에게 배웠지?”

“……아버지. 천마에게.”

정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마는 언젠가 네게 천마신공을 전수하려 했던 걸지도 모르겠군. 단순히 호신을 위해 약간만 가르치려 했던 건지도 모르겠지만.”

“대체 무슨 소리를…….”

진백란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던 것이다.

“설마?”

“그래. 네 무공과 네 내력. 모든 면에서 천마신공과 흡사하다.”

진백란은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뿐이었기에.

정천이 차분한 목소리로 확인해 주었다.

“천마신공을 익히기엔 최적의 몸이라 봐야겠군. 아버지의 유산이라 해야 할까?”

* * *

“누가 승자가 될 것 같은가?”

어둠 속.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이 붕대로 몸을 감은 사내와 독대하고 있었다.

“나야 알 수 없는 일이지요, 마의.”

붕대 사내, 유령마객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생김새와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였다.

“통천각주인 자네가 모르면 누가 알겠나?”

통천각엔 모든 마교도들의 머리카락 수까지 기록되어 있다.

그런 소문이 돌 정도로 통천각의 정보 수집 및 분석 능력은 정평이 나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전혀 허튼 소문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러한 통천각의 책임자인 유령마객은 마교 내에서 가장 많은 정보를 지닌 인물이었다.

그리고 많은 정보란 곧 정확성을 의미하기도 했다.

“어떤가. 한 번 예상을 얘기해 보는 것은?”

“뻔한 것 아니겠소? 양대 세력의 거두들이지.”

천마가 죽은 지금 마교 내 최대 세력은 두 개가 있었다. 혈사문과 패신림이 바로 그것들이었다.

그 두 세력을 이끄는 이들이야말로 현 마교의 양대 거두라 할 수 있을 터.

하지만 마의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들이야 누구라도 생각할 법한 후보들 아닌가? 다른 이들을 한번 말해 보게나.”

“……제일순위는 역시 무정검 관식이외다. 천마신공과는 별개의 무공을 익혔음에도 독보적인 무위를 지녔소. 어쩌면 새로운 천마신공의 흐름이 생기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오. 아직 나이가 적어 미흡한 점도 상당히 많기는 하지만.”

“역시 관식인가? 그다음은?”

“붕설권마 조혁, 흑룡마객 연규, 무영신귀 백천인의 삼파전.”

“혈패검마는 어떤가?”

유령마객의 붕대가 살짝 비틀렸다.

“진백란? 마의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오만, 그녀의 무위는 저들에 비해 명백히 떨어지오.”

“흘흘흘.”

노인, 마의는 건조한 웃음을 흘렸다.

“그야 모르는 일이지. 어쩌면 전대미문의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르지.”

“……그러고 보니 그녀의 곁에 거대한 변수가 있기는 하군. 어찌 보면 진정한 천마의 후계자라 할 수 있는 인물이.”

“마치 이제야 생각났다는 것처럼 말하는구먼. 본래는 그 친구를 제일순위로 꼽고 싶었던 것 아닌가?”

“…….”

참으로 귀신같은 늙은이다.

단순한 의술도 신의 경지에 이르면 사람의 마음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것일까?

“솔직히 말해, 그자가 나선다면 저 네 사람이 협공한다 해도 승산이 없을 거요. 아니, 어쩌면 천마제전의 참가자 전부가 연합한다 해도…….”

말을 꺼내는 유령마객 스스로가 생각해 봐도 기막힐 일이다.

천마신교 최강의 무인들을 어린애처럼 다룰 수 있는 존재라니. 정천의 무위를 직접 보지 않았다면 자신조차 믿지 못했으리라.

“서글픈 일이로군. 천마신교의 뿌리가 이토록 약해 빠졌을 줄이야.”

“그보다는 상대가 너무 안 좋은 것 같소만.”

유령마객의 언성이 살짝 높아졌다.

“게다가 그는 어디까지나 외부인이오.”

“외부인이라고 천마제전에 참가할 수 없다는 법은 없네. 강자존이야말로 마교제일의 법이 아니던가? 마교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

“그자가 천마의 자리를 바라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외다.”

마의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흘흘. 그것까진 생각하지 못했군.”

“게다가 그는 지금 혼수상태요. 깨어난다 해도 본래의 무위를 발휘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오.”

잠시 뜸을 들인 유령마객이 덧붙였다.

“혹 마의께서 나섰더라면 얘기가 달랐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오.”

“응? 그건 아닐세.”

마의가 손을 내저었다.

“그의 곁엔 이미 좋은 의원이 있거든.”

“……?”

유령마객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그가 전혀 모르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마의는 그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자네가 모르는 것도 의외는 아니지. 그녀가 의술을 널리 펼쳤던 것도 수십 년 전의 일이니.”

“그녀? 여인이란 말이오?”

“그렇다네.”

“설마…….”

유령마객은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세상 사람들은 마의를 가리켜 의술의 신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러한 표현조차 그를 표현하기엔 부족하다.

실로 입신의 경지에 다다른 의술.

중원의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기기묘묘한 처방과 처술.

그중에는 사람의 골을 절개하거나 내장을 잘라 내는 혁신적인 수술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정천 일행 중 한 사람은 탈중원인으로 추정되는 자. 수백 년에 가까운 삶을 살아 왔다고 일컬어지는 자다.

“설마 마의, 당신은 그녀에게서?”

희미한 미소와 함께 마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세의 무인들은 그분을 궁후라고 부르지만, 나의 시대에서의 별호는 의선이셨지.”

“으음.”

“그런 분께서 하시는 일이네. 그 정파인이 온전히 깨어나는 것은 명약관화지.”

“그렇다면 그가 천마제전에 참석할 거란 말씀입니까?”

“그럴지도. 아니면 대리자를 내보낼지도 모르지.”

마의의 침착한 음성이 이어졌다.

“어느 쪽이 되었든 마교를 뒤흔들 것은 분명하네.”

* * *

독왕 갈월은 칠흑이 깔린 복도를 걷고 있었다. 그러한 그의 옆으로 인기척이 하나 나타났다.

독왕의 입이 열렸다.

“알아냈는가?”

“예. 아무래도 귀암산으로 향한 모양입니다.”

음영의 보고에 독왕의 입매가 비틀렸다.

“어떤 놈이 결정한 것인지는 몰라도 영악한 선택을 했군. 지금은 옛 동지들조차 믿을 수 없다는 건가?”

“이미 그분께서 정파무림에 손을 써 두셨음을 알고 있을 테니까요.”

“하긴 이 마당에 가장 혈선들과 관련이 없는 곳은 마교뿐일 테지.”

대화의 내용은 물론 황룡성의 생존자들에 관한 것이었다.

“하지만 생각이 좀 짧았군. 클클클.”

독왕의 웃음이 걸쭉하게 이어졌다.

팔부혈선의 세력이 정파 내에 깊숙이 자리 잡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일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계획에 몰두하게 된 이후로 외부적인 영향력은 거의 끊긴 거나 다름없었다. 결과적으로 지난 수십 년 동안 혈선의 영향력이 미친 곳은 황룡성으로만 국한되었다.

그리고 수십 년은 한 세대 이상이 물갈이되기에 충분한 시간.

현재의 정파무림 내에서 혈선의 영향력은 그리 크지 않다고 봐도 좋았다.

대신 혈선들은 다른 방법을 택했다.

사파와 손을 잡는 것.

“진운룡은 빠르게 회복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 봐야 앞으로도 달포의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그 정도라면 정파를 손에 넣고도 남을 정도의 여유지.”

독왕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놈의 행방이 묘연한 것이 약간 걸리지만…….”

진운룡은 죽기 직전의 몸이 되어 독왕을 찾아왔다. 그를 죽이기엔 절호의 기회였지만, 독왕은 그를 살리는 길을 택했다.

독왕은 그에게 절세의 영약들을 내주었다. 수하들은 반대했으나 독왕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놈은 중원 사람이 아니다. 지금까지 벌인 일은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것.’

그러니 손을 잡고서 적당히 이용하면 되는 일이었다. 같은 편이라면 진운룡만큼 든든한 인물도 없었으니 말이다.

“뭐, 적당히 회복된 후엔 알아서 나타날 테지.”

독왕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진운룡을 신뢰하지 않았다. 배신의 가능성도 어느 정도는 두고 있었다.

그럼에도 걱정하지 않는 건, 자신의 독공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감 때문이었다.

검왕이나 궁후처럼 절대적이고 유일한 별호. 사천당문에서조차 감히 쓰지 못하는 독왕이란 이름은 오직 그만을 위한 것이었다.

독왕이 음영에게 말했다.

“마교 쪽을 지속적으로 주시하도록. 아마도 정파 놈들보다 힘겨운 상대가 될 것이다.”

“존명!”

음영의 인기척이 사라졌다. 독왕은 어둠 속을 걸으며 홀로 중얼거렸다.

“접어놓았던 웅비의 날개를 펼 때가 되었다. 우리의 그림자가 중원을 아래에 둘 것이다.”

너무나 오랜 기다림이었다.

이제는 더 기다릴 수도 없다.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려서 얻어 낸 절대적인 기회.

독을 가진 모든 짐승들이 그러하듯, 독왕은 먹잇감이 걸려들기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먹잇감이란 물론 중원 자체를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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