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二章 회생
“쳇. 악운도 이런 악운이 없을 거야.”
칠삼은 육포를 우물거리며 중얼거렸다.
“문지기 노릇으로 젊은 날을 다 허비하고, 다 늙은 뒤에야 뒤늦게 문파에 귀의하다가, 이제는 집도 보금자리도 잃고 마교의 소굴로 흘러들었군.”
“그래도 살아남았잖습니까?”
심후의 말이었다.
분명 옳기는 옳은 말이다. 그런데도 칠삼은 공연히 심통이 났다.
“그래. 살아남았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 순전히 화륜문의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거면 된 것 아닙니까?”
“청룡문의 옛 동료들이 모두 죽었어. 그뿐인가? 살아남은 자들 대부분은 천무맹의 요직 아니면 대문파의 무인들뿐이야. 우리 같은 무지렁이들은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다는 거야.”
“그건…….”
심후는 입을 다물었다.
칠삼도 언성을 낮추었다. 그에게 목소리를 높여 봐야 의미 없는 일이었다.
“우스운 일이지. 창피한 일이고. 살아남았다고 좋아할 수도 없는 일이야.”
심후는 주먹을 꾹 쥐었다.
많은 성장을 했다고 자부하는 그였다.
난맥으로 인한 선천적인 한계를 뛰어넘어, 지금 그의 무위는 어지간한 대문파의 직계 제자에도 뒤떨어지지 않았다.
칠삼 역시 마찬가지. 더 이상 그를 일개 문지기라고 업신여길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날, 그들은 무력했다.
폭풍은 모든 걸 갉아먹었다.
문자 그대로의 자연재해 앞에선 그간 단련해 온 무공 따윈 무의미했다. 담미화가 없었다면 우왕좌왕하다 휩쓸렸으리라.
어쨌든 겨우 소윤을 데리고서 도망쳐 나온 게 전부.
그마저도 제갈세가의 손길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겨우 살아남고 보니 황룡성은 개박살이 났고, 천무맹은 망한 거나 다름없어서 마교 놈들에게 의탁이나 하고 있는 실정이고…….”
이어지는 칠삼의 말에 심후는 우울해졌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그래도 살아남았잖아요.”
두 사람의 고개가 돌아갔다.
화연란이 어느새 다가와 있었다.
“무, 문주님.”
“됐어요, 칠삼 아저씨. 이 마당에도 문주 대접을 받을 염치는 없어요.”
“여, 염치라니요.”
더듬거리는 칠삼.
조금 전의 한탄을 그녀가 들었다고 생각하니 절로 얼굴이 벌게졌다.
그 마음을 알기에 화연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가 무슨 말을 해도 칠삼을 위로할 순 없을 것이다.
그녀도 비슷한 심정이었으니까.
‘황룡성이 사라졌어.’
화연란은 스스로가 딱히 대단한 애향심을 가졌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청화촌에서의 기억은 행복보다 고통에 가까웠다. 자연히 황룡성이란 공간 자체가 싫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는지 모른다.
정천이 만나기 전까진 황룡성은 악몽의 땅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막상 그것이 사라지고 나니, 가슴속에 허한 구멍이 뚫린 것만 같았다.
그 구멍을 메울 방법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 그런데 정천은 좀 어떻습니까?”
칠삼이 물었다. 화제를 돌리기 위한 말이었지만 화연란은 더욱 우울해졌다.
“아직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으세요.”
“그렇군요.”
칠삼은 내심 후회했다.
‘눈치 없는 멍청이 같으니.’
일단 속으로 자기 자신에게 욕설을 퍼붓고는 애써 화제를 돌렸다.
“윗사람들의 생각은 어떤 걸까요? 전대 맹주라거나 군사, 제갈세가나 모용세가의 아가씨들 말입니다.”
“글쎄요. 아마 당장은 이 상황을 유지하는 데에만도 힘에 부치겠죠.”
“으음.”
“아무래도 이천 명의 의식주를 유지해야 할 테니까요.”
천무맹의 생존자는 대략 이천 명.
일국의 도읍에 비할 정도였던 인구를 생각한다면 정말 극소수만이 살아남은 셈이었다.
그래도 이천 명이란 그리 작은 숫자가 아니다. 이를 유지하려면 상당히 많은 노력이 든다.
더군다나 이곳은 귀암산.
남궁세가도 모용세가도 본가의 힘을 빌릴 수 없을 실정이다.
엄밀히 말해 이천 명을 먹여 살리고 있는 건 진백란의 지원. 다시 말해 천마의 재산이었다.
‘이젠 전대 천마라 해야겠지만.’
천마의 죽음.
그 현실 앞에서 마교도들이 느끼는 분노와 적개심이란 엄청날 것이다.
그리고 그 칼날은 고스란히 정파인들에게 향할 수밖에 없을 터.
그들이 목숨을 유지하고 있는 건 순전히 진백란 덕이었다. 천마의 딸인 그녀가 나서서 두둔을 하니 다른 이들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칠삼으로선 그저 의문뿐이었지만.
‘대체 맹주는 왜 이곳으로 오기로 정한 것일까? 왜 천마의 딸이 우리를 비호해 주고 있는 걸까?’
그 이유는 알 수 없는 일.
다만 분명한 것은 정천과 관련이 있으리란 사실이었다.
칠삼은 고개를 돌렸다.
벽 하나 너머.
정천은 향이 자욱하게 깔린 방 안에서 회복 중이었다. 마치 깊은 잠에 빠진 양 깨어나지 않은 채.
* * *
“저기, 보여?”
천마 소유의 저택.
그 담에 걸터앉아 있던 백미련이 바깥쪽을 향해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손끝을 따라 시선을 돌린 모용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보여요. 너무나 분명히.”
보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장님이 아닌 바에야, 아니 장님이라 해도 느낄 수는 있을 터였다.
흉흉한 살기를 내뿜고 있는 안광이 수백. 담으로부터 이백여 장쯤 떨어진 숲이었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구태여 물을 것도 없는 일.
“이틀 전보다 배로 늘어났군요.”
“진백란의 영향력이 그만큼 감소하고 있다는 의미지.”
황룡성의 피난민 이천 명이 기거 중인 대저택.
천마의 저택을 노리는 마교도의 숫자는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나마 그들이 지금껏 참고 있는 이유는 하나뿐. 천마와 그의 유일한 혈육에 대한 존중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교도에게 있어 존중이란 바닥이 보이는 우물과 같은 것.
그들의 인내심은 이내 끝을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살육전이 벌어질지도.’
연인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엄밀히 말해 생존자 이천 명은 정파의 최정예였다. 그만큼 철저하게 능력 있는 이들만 골라서 살려냈으니 말이다.
누군가는 잔인하다며 매도할 수도 있겠지만, 모용린으로선 이게 최선이었다.
어쨌든 이들은 강하다. 이천 명의 군단이라 봐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저들은 그 수십 배는 되는 숫자에 무력도 크게 뒤처지지 않는다.
더군다나 이곳은 저들의 영역.
심리적으로 지쳐 있는 생존자들이 살육 당하게 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그래도 아직은 며칠의 여유가 더 남아 있는 것 같군. 지금 당장은 치고 들어오지 않을 거야.”
백미련의 말에 모용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당장 쳐들어올 거란 말보다 불안한 것은 왜일까?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있을까요?”
“천마를 되살린다면 가능할지도.”
“그런 불가능한 방법 말고요.”
“본후가 불가능한 방법을 말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지?”
간단하다. 그 외의 방법 따윈 없기 때문이다. 영민한 모용린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허황된 것이라도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게 그녀의 심정이었다.
이러한 상황이라 해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잠시 침묵하던 백미련이 입을 열었다.
“린.”
“예?”
“이곳으로 온 게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생각해?”
모용린은 멈칫했다. 사실 처음 듣는 질문은 아니었다. 백미련은 며칠 동안 같은 질문을 몇 번이고 반복해 왔으니까.
“궁후께서 강력하게 요청하셨고 맹주께서 그에 따르셨죠. 제가 반대했더라도 달라질 건 없었을 거예요.”
“그 자리에 있었다면 반대했을 거란 얘기군.”
“네.”
대답하는 데엔 일말의 주저도 없었다.
“배신자에 대한 불안 때문이란 건 저도 알고 있어요. 중원 곳곳엔 팔부혈선이 심어 놓은 수하들이 널려 있고, 그들이 누군지 알 길은 전혀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렇더라도 정파의 힘에 의존했어야 했다고 봐요.”
“본후는 궁후 요태희가 싫어. 하지만 혈선에 대한 그녀의 적개심은 진심이라 생각해.”
“하시고 싶은 말씀이 뭐죠?”
“간단해. 어느 쪽이 정말 이득이었을까 하는 점이야.”
“……?”
“본후는 요태희가 단순히 배신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이곳을 택했다고는 보지 않아. 그보다는 훨씬 똑똑한 여자니까.”
“그렇다는 건…….”
“마교로 향하는 것에 승산이 있다,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는 거야.”
승산이라니. 대체 무엇에 대한 승산이란 말인가?
모용린은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흠칫 놀랐다.
비록 저택에 감금된 거나 다름없는 그들이지만, 몰래 바깥을 쏘다니는 데엔 문제가 없었다. 그 덕에 귀암산 내의 정세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 얻은 정보가 하나.
‘천마제전.’
새로운 천마를 뽑기 위한 회합이 열린다.
말은 회합이지만, 마인들의 본질을 생각해 본다면 의견이 통일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힘.”
모용린의 혼잣말에 백미련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력한 무력, 압도적인 힘만 있다면 누구나 천마가 될 수 있어. 그것이 마교, 그것이 강자존이니까.”
“천마가 되면…….”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는 저 작자들을 수족처럼 부릴 수도 있다는 거지.”
귀암산의 인구는 못해도 백만. 그리고 이곳은 어린아이나 일개 아낙조차도 생존을 위한 비수 하나씩은 소지하고 다니는 곳이다.
다시 말해 백만의 병력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소리. 천마가 부르짖던 중원정벌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마교의 힘을 빌려 중원을 친다……!’
요태희는 그것까지 계산에 넣은 것이 아닐까?
물론 이 모든 건 어디까지나 그들 중 한 사람이 천마가 된다는 전제 하에서나 가능했다.
‘우리 중에 천마가 될 사람이…….’
물론 있었다.
모용린은 조금 더 생기가 돌아온 눈으로 백미련을 돌아봤다.
“그가 제전이 벌어지기 전까지 깨어날 수 있을까요?”
“그러길 바라야지.”
* * *
무시무시한 허기가 정천을 갉아먹고 있었다.
허기는 그야말로 한 마리 마룡이었다. 외부에서부터 기운이 들어오기가 무섭게 낚아채어 물고 씹고 부수고 삼켰다.
먹으면 응당 채워져야 하거늘, 먹을수록 허기는 더욱 거대해졌다.
그리고 들어오는 소량의 기운만으론 만족하지 못하고, 몸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정천의 몸은 그렇게 붕괴되고 있었다.
혼령연소로 인해 내기의 근간이 뒤흔들렸다. 그런 가운데 한 번으로도 치명적인 멸천을 연달아 사용했다.
이러한 귀결은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왜 그때 나를 말린 겁니까?’
정천은 마음속으로 물었다. 화륜패에게, 용검대의 동료들에게.
대답은 없었다. 무시무시한 허기만이 있을 뿐.
붕괴되는 몸과 함께 의식도 희미해져 갔다. 두 개의 내단이 몸속으로 들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우선은 천령단.
무시무시한 양기를 지닌 천령단은 이글거리는 태양 같았다.
한순간 움찔한 마룡이었으나, 이윽고 허기에 이끌려 천령단을 향해 쇄도했다.
콰직.
시커먼 이빨이 태양을 꿰뚫었다. 불길이 삽시간에 마룡의 비늘에 옮겨붙었다.
검은 어둠과 붉은 광채가 한데 어우러졌다. 음양의 조화라는 말이 있다지만, 이건 숫제 음양의 충돌이 어울릴 판이었다.
이윽고 둘은 하나가 됐다. 마룡은 불타올랐고 태양은 삼켜졌다.
화룡이 된 마룡이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허기는 사라졌지만 열기를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제는 열기가 마룡을 이끌고 있었다. 마룡은 사방으로 치달아서 몸을 부딪치기 시작했고, 그것은 정천의 몸이 여전히 위험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냥 두었다간 열기로 인해 몸이 타버릴 터.
그때 두 번째 내단인 백옥단이 투여되었다.
천령단이 태양이었다면 백옥단은 달이었다. 차갑게 식어 사방으로 냉기를 내뿜는 달.
마룡은 달을 향해 치달았다.
태양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빨로 깨물어 잘게 쪼개어 삼켰다.
불길이 냉기와 어우러져선 차츰 사라져 갔다.
잠시 후의 마룡은 더 이상 날뛰지 않고 있었다. 이제는 허기도 열기도 모두 사라져 만족하게 된 뒤였다.
목표를 잃은 마룡은 정천의 몸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마침내 정천의 몸에 평화가 찾아들었다.
상처뿐인 평화가.
결과적으로 정천의 몸은 조금도 회복되지 않았다.
도리어 마룡이 날뜀으로 인해 더욱 상처를 입었을 뿐이다.
하지만 마룡은 더 이상 날뛰지 않는다. 그리고 정천의 몸은 조금씩이지만 분명하게 외부의 기운을 흡수하고 있었다.
남은 것은 기다리는 것.
정천은 그것을 알았기에 차분히 기다렸다. 몸이 회복되기를, 보다 많은 기운을 흡수할 수 있기를.
자아가 무의식 속으로 잠겨 들었다.
운기조식이 시작되며 우악스럽게 주변의 기운을 빨아들였다.
그리고 정천은 꿈속으로 녹아들었다.
* * *
“그래, 네 말대로 난 제갈세가 출신이다.”
이제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아 희미하게만 보였다. 그래도 그가 강룡단 출신의 동지임을 못 알아볼 정천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게 꿈이라는 것 역시.
운기조식을 할 때마다 꿈은 여지없이 그를 찾아왔다. 동료들이 눈앞에서 죽어 나가는 모습으로.
그것이 끝날 때쯤 남는 것은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몸, 그리고 피폐해진 정신이었다.
하지만 이번 꿈은 달랐다.
악몽뿐인 진마동에서의 십 년이었지만, 그중에서도 그나마 아늑했던 기억이니까.
정천은 자신이 했었던 말을 어렵사리 기억해 내어 입 밖으로 꺼냈다.
“그런데 왜 제갈세가 놈이 마교에 가담한 거지?”
얼굴은 희미하지만, 그가 미간을 찌푸렸었다는 것만은 기억났다.
미간을 찌푸린 그가 대답했다.
“버려졌으니까. 내가 원해서 마교에 가담한 건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마교가 싫다는 건 아니지만.”
“널 받아들여 줬기 때문에?”
“아니. 날 죽이려 들었기 때문에.”
섬뜩하게 들릴 법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이는 그였다.
“귀암산에 흘러들어 간 첫날, 친절히 대해 주는 객잔 주인에게 속아 독이 들어간 편육을 먹었지. 본디 고아들을 상대로 독을 실험하는 개자식이었다더군.”
“…….”
“혼수상태에서 사나흘을 헤맸을 거야. 깨어나고 보니 귀암산 구석에 위치한 공동묘지더군. 시체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보니 악취도 역겨움도 없었다.”
“향기라도 느꼈다는 거냐?”
“아니. 그냥 휘영청 떠올라 있는 달이 아름답더군.”
“하, 시인 나셨군.”
“너도 느껴 본 적이 있을 텐데? 수십 번도 더 죽을 뻔하고, 정말로 황천을 건너기 일보 직전의 상황에서 어찌 살아 돌아왔을 때. 이번엔 정말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닐 때.”
“…….”
정천도 알 것 같았다. 실제로 그런 경험을 이곳에서만 몇 번도 더 했었으니.
“그저 살아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세상이 아름답더군. 마교는 내게 그것을 알려 주었다. 열 살 무렵의 시기에 말이야.”
“……네 부모는 왜 너를 버렸지?”
“글쎄. 아마도 내가 사생아였기 때문일 테지. 이미 아버지에겐 정실에게서 얻은 아들이 셋이나 있었으니.”
그 당시의 정천은 그게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딱히 알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하지만 지금은 잘 알고 있었다.
‘제갈현 삼형제.’
“이름을 그렇게 지은 것은 아비에 대한 복수 때문인가, 제갈살?”
제갈가를 죽인다[殺]. 그의 내력을 안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제갈살은 그때 고개를 저었었다.
“아니. 마찬가지 이유로 내 부모에게도 감사하고 있다. 게다가 이미 둘 다 불귀의 객이 됐으니 죽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
“그럼 왜 그런 이름을 지었지?”
“이게 내 업(業)이니까.”
제법 그럴싸하다는 생각을 했었던가? 지금부터는 기억이 희미했다.
전우, 제갈살의 얼굴이 사라져 갔다. 정천은 의식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기나긴 잠이 끝났다. 그의 몸은 느리지만 확실하게, 기어코 수복을 끝마쳤다.
“밖에 누구 있어?”
누워서 눈만 뜬 채로 정천이 말했다.
벽 너머에서 잠시 소란이 있는가 싶더니 벌컥 문이 열렸다.
“오라버니?”
화연란이었다. 그녀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정천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껴안기 전에 정천이 몸을 일으켰다. 싫은 건 아니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게 있었기에.
“내가 얼마 동안 잠들어 있었지?”
“한 달 하고도 이레 동안 잠들어 계셨어요.”
“여기는?”
“귀암산. 천마신교의 본거지예요.”
과연. 체내에 투여됐던 내단들이 보통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천마신교의 비보들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잠들어 있던 동안…… 아니지, 직접 물어보는 편이 낫겠군. 다른 사람들은 모두 어디에 있지?”
“진 소저의 자택에 있을 거예요. 사실 지난 며칠 동안은 그곳에서만 모두들 기거하고 있었어요.”
바깥의 분위기가 그리 호의적이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하기야 그들은 마교도들에게 있어 불청객에 지나지 않을 테니.
‘아니, 불청객이라면 불안하지나 않지.’
그들은 적이다. 그것도 호랑이 굴 한가운데로 굴러 떨어진 바보 같은 적.
최소한 저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마치 자신들이 호랑이인 양.
정말 그럴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
* * *
“퉤!”
귀도신마는 가래침을 뱉었다. 흙 섞인 침은 잘 뱉어지지도 않았다.
“빌어먹을 놈. 계속 같은 식으로 골탕을 먹일 셈이냐?”
“한탄스러운 일이군. 노부의 친절함을 그런 식으로 매도하다니.”
“친절? 네놈 덕에 먹은 흙이 한 무더기는 된다!”
“자꾸 같은 식으로 덤비니 같은 식으로 메쳐 버릴 수밖에.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
“쯧. 양팔이 다 있었던 때랑 자꾸 헷갈린단 말이다.”
귀도신마는 하나만 남은 팔을 휘적거렸다.
장유추 역시 혀를 끌끌 차며 하나뿐인 팔을 휘휘 흔들었다.
“네놈도 외팔이, 노부도 외팔이다. 우리의 조건은 동등하지. 그럼에도 네놈만 땅을 뒹구는 건, 물론 노부의 실력이 압도적이긴 하다만, 그만큼 네놈에게 학습 능력이란 게 결여되었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동등한 조건은 아니란 말이다. 이 몸은 본디 왼손잡이였으니까.”
“그래서, 젓가락 집는 법부터 차근차근 가르쳐 주랴?”
“끄응!”
침음을 뱉은 귀도신마가 일어섰다. 이것으로 무려 백 번 하고도 여든세 번째였다.
장난스럽게 말을 주고받은 것과 달리, 두 사람 모두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치명적인 사투를 벌여 온 터였다.
들고 있는 것은 나무 몽둥이.
그러나 이들 정도의 고수들이 들면 어지간한 명검보다도 위험한 흉기였다.
그러한 사투에서 연패하고 있는 중. 지난 기간을 모두 통틀어 보면 수천 번의 패배가 있었다.
귀도신마로서는 정말 기가 찰 일이었다.
‘한때는 동등했던 적도 있었고, 운이 좋았지만 어쨌든 이 몸이 승리했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 정도의 차이라니?
이쯤 되면 오른손잡이니 왼손잡이니 할 문제가 아니었다. 분명한 격차가 있다는 의미니.
그만큼 자신과 장유추 사이에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차이점이 뭐냐는 게 문제지!’
귀도신마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나 싫지만은 않은 기분이었다.
무(武)라는 것은 참 우습고도 놀라운 것이었다.
이런 마당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수수께끼투성이니 말이다.
“젊을 적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설치던 때가 있었지. 그땐 이 몸이야말로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했었다.”
장유추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갑자기 웬 고백이냐?”
“시끄럽다. 하여간 커 갈수록 그게 아니란 걸 느끼겠더구나.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조금씩 깨달아 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야.”
“……얼씨구.”
“어쨌든 그렇기에 이 몸은 무(武)에 감사하고 있다. 이 몸의 한계란 고작 이 정도라는 것을 알려 주었고, 그럼에도 아직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었으니.”
장유추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할 말은 다 했냐?”
“아니. 아직 조금 남았다.”
장유추는 표정을 구겼다.
이제 작작 하라고 말하려니, 귀도신마가 어울리지 않게 진중한 표정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네놈에게 감사한다.”
“……뭐라고?”
“네놈은 이 몸의 스승이다, 장유추.”
처음이었다. 칼도둑놈이 아니라 장유추라는 본명으로 부른 것은.
의외의 말에 장유추는 헛웃음이 나왔다.
“별 웃기는 놈을 다 보겠군.”
“고마워하는 게 좋을 것이다. 이 몸에게 이런 말을 들을 사람은 앞으로도 없을 테니.”
“퍽이나 고맙군. 됐으니 그만 떠들고 어서 덤벼들기나 해라.”
“오냐.”
귀도신마가 전각에 힘을 주었다.
이윽고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장유추에게로 튕겨져 나갈 것이다.
그러면 장유추는 무릎을 내밀며 오른팔을 사선으로 휘두를 것이다.
귀도신마의 몽둥이가 봉쇄되고, 노출된 가슴팍을 무릎이 깨부술 터.
귀도신마도 그것을 알기에 계획을 수정했다. 우선은 돌진하는 척하며 몸을 회전시켜 놈의 사각인 왼팔을 노리는 것으로.
장유추가 다시 거기에 대응한다. 짤막한 방어만으로 귀도신마의 공세가 파훼된다.
귀도신마는 다시 계획을 수정한다.
‘사각을 노리는 건 무의미하다. 도리어 놈도 그것이 약점임을 알기에 방비를 철저히 할 것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정면 승부를?’
‘지금쯤이면 정면 승부로 가닥을 잡고 있겠지. 그렇다면 노부가 도리어 놈의 사각을…….’
일련의 과정이 멈춰 있는 상황 속에서 이어졌다. 상승의 고수들에게만 허락된다는 경지가 그들에게 펼쳐진 것이었다.
지난 며칠 동안의 대련에서도 짤막히 한두 번만이 펼쳐졌을 뿐.
이번만큼 길게 이어진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두 사람은 전율하고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새로운 경지로 한 걸음 내딛었다는 의미였기에.
‘오오오.’
‘으음.’
귀도신마는 희망했다.
이것이 조금만 더 이어지기를.
그것은 장유추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무언가가 보일 것도 같다. 여기서 조금만 더 나아간다면!’
그때 외마디 외침이 그들의 평정을 깨트렸다.
“어르신들!”
휘휙!
두 사람이 한 방향으로 몸을 비튼 것은 거의 동시였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살기를 폭사한 것도.
“헉!”
목소리의 주인. 칠삼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두 초고수의 살기는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은 것이었다.
“으, 으으…….”
말을 잇지 못한 채 몸만 부르르 떤다. 그러한 칠삼과 마찬가지로 두 사람도 몸을 부르르 떤다. 참을 수 없는 분노 때문이었다.
장유추도 귀도신마도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 덕분에 칠삼만 죽을 맛이었다.
“우리를 부른 이유를 말해라. 제대로 된 게 아니라면 그대로 목을 따 버리겠다.”
겨우 진정을 한 장유추의 말이었다. 진정을 했는데도 이 정도.
“그냥 목을 따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귀도신마라고 별반 다를 것은 없었다. 오히려 마교도인 그가 장유추보다도 적극적이었다.
실제로 몽둥이에 희미한 검기가 맺혀 있었다.
‘이런 미친!’
칠삼은 생사에 기로에 놓였음을 깨달았다. 이 작자들이라면 능히 저지르고도 남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곳은 살인의 성역인 귀암산이 아닌가?
말 한마디에 생사가 오간다.
옛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상황이었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어서 말하라니까!”
장유추가 다그친 뒤에야 칠삼이 입을 뗐다.
“저, 정천이 눈을 떴습니다.”
“……!”
“그 친구가?”
두 사람의 살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럴 가치가 있는 소식이었기 때문이다.
“가 보도록 하지.”
장유추가 먼저 발을 뗐다. 귀도신마는 사납게 웃고서는 칠삼의 어깨를 툭 쳤다.
“정천 그 친구에게 고마워하게. 자네 목숨을 구해 주었으니 말이야.”
“……예?”
칠삼이 반문할 때엔 이미 두 사람이 멀어진 뒤였다. 그러고 나니 왠지 억울한 기분이 드는 칠삼이었다.
“하여간 무인들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