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二章 대폭주(大暴走)
부우우웅.
내내 먹통이던 장치가 마침내 빛을 토하며 작동하기 시작했다. 땀까지 쏟아 가며 집중하던 혈선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해냈네! 좌표를 찾아냈어!”
“어서 이쪽 문과 고정시키게!”
“이미 하고 있네. 조금만 기다리게!”
위이이잉.
허공에 걸린 항아리들로부터 피의 줄기가 흘러나왔다. 각각의 줄기들은 이내 ‘문’이 있는 방향으로 치달으며 대지에 기묘한 문양을 그려 나갔다.
그들의 고향을 나타내는 좌표.
이것이 문과 연결된다면 그제야 제대로 된 통로가 열리게 될 것이다.
“어서 진운룡에게도 알려야겠군!”
“그쪽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지?”
“지금쯤이면 정리가 끝나지 않았겠나?”
혈선들이 그런 얘기를 나누던 때였다.
콰아아앙!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거대한 칼날이 하늘을 뚫을 듯 치솟는 모습이 보였다.
“……!”
“저, 저것은?”
세 혈선은 칼날 자체에 주목했다. 자신들이 맞붙었던 사내, 정천의 기운이 분명했다.
나머지 네 혈선은 칼날이 솟구친 위치에 주목했다.
‘문’이 있는 방향이었다.
“서, 설마 놈이 문을 파괴하려고……?”
“에잇! 진운룡은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건가!”
“놈에게 이미 당한 걸지도 모른다.”
푸른빛 혈선의 말이었다. 네 혈선이 짜증 섞인 눈으로 그를 돌아봤다.
“또 그 소리로군. 차라리 진운룡이 당하게 해달라고 고사라도 지내지 그러나?”
“너희들은 모른다. 놈이 만약 그 방법을, 혼령연소를 택했다면…….”
“혼령연소라고?”
그제야 나머지 혈선들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무공에 대해선 무지한 그들도 혼령연소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그것은 자신들이 중원에 퍼트린 술법 중 하나였기에.
“문으로 가세!”
한 혈선의 말에 다른 혈선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좋은 싫든 그곳을 가야 했다.
* * *
“저건……!”
황룡성 외곽.
피난민들과 마교도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서 진백란은 주먹을 꾹 쥐었다.
이것으로 두 번째다. 아까 전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강기가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아 올랐다.
바로 옆에 있던 남궁운이 침음했다.
“멸천일세.”
“멸천?”
“정천 그 친구의 성명절기일세. 하지만 저것을 두 번씩이나 쓴다는 것은…….”
“혼령연소로군.”
귀도신마의 말이었다.
“…….”
진백란은 근심 어린 눈으로 황룡성을 응시했다.
그녀의 아버지 역시 혼령연소를 펼치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제는 아버지와 같은 무공을 쓰는 자가 세상을 떠나려 한다.
‘정천…….’
엄밀히 말해 그에게 연심을 품은 건 아니었다. 기껏해야 만난 지 며칠도 되지 않은데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적대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이제 와서 마교와 정파의 반목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만.
하지만 그런 것을 다 집어치우더라도, 그녀는 정천이 죽지 않았으면 했다. 그는 천마와 다른 길을 걸었으면 했다.
“아가씨, 최대한 여기서 멀리 떨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의의 물음에 진백란은 시선을 떼었다.
“마의, 당신이 교도들을 통솔하도록 해요. 곧장 귀암산으로 귀환하도록 하세요.”
“그럼 아가씨는 이곳에……?”
그녀는 남궁운을 돌아보고서 말했다.
“저는 이곳에 남겠어요.”
“……괜찮겠나?”
“우리가 뿌린 씨앗이니 우리가 거두어야겠지요. 어쩌면 앞으로 마교와 정파가 협력해야 할지도 몰라요. 그렇다면 제가 볼모로라도 남아 있는 편이 수월하겠죠.”
“목숨을 위협받게 될 수도 있네.”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어요.”
남궁운은 진백란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어떠한 사심도 없는 맑은 눈이었다.
“천마는 훌륭한 여식을 남겼군.”
“…….”
“알겠네. 일단은 피난민들을 소림사로 보낼 생각이네. 자네도 그 행렬에 동행하도록 하게.”
진백란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이곳의 결말을 확인한 다음에 가겠습니다.”
“이제 보니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군그래.”
잠시 후 정파와 마교도들의 대부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엔 소수의 사람들만이 남게 되었다.
“그나저나.”
진백란의 호위로서 함께 남은 귀도신마가 말했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조금 더 가까이 가 봐도 되지 않을는지요?”
“하긴, 이 마당에 멀리서 강 건너 불구경하듯 멍청히 있는 것도 우습겠군.”
그들은 이내 황룡성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실감할 수 있었다.
바람.
황룡성을 중심으로 거대한 규모의 돌개바람이 불어닥치고 있었다.
* * *
부우우웅!
‘문’으로부터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빛이 터져 나왔다. 그것을 본 요태희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좌표가 고정됐어요. 중원과 그곳을 잇는 통로가 마침내 체현됐어요!”
그 순간 금역 쪽으로부터 일곱 개의 인영이 튀어나왔다. 진운룡을 제외한 나머지 팔부혈선들이었다.
잠시 주변을 살펴본 그들이 경악했다.
“요태희!”
“역시 모든 것은 네 수작이었나, 배신자!”
혈선들은 곧이어 정천을 발견하고는 침음을 뱉었다. 정천의 멸천은 그들의 역량마저 아득하게 뛰어넘고 있었다.
“쳇!”
진운룡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자칫하면 일곱 혈선이 자신을 배신하고 자기들끼리 문을 넘어가 버릴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함부로 움직이자니 정천이 걸렸다.
‘더 이상은 저걸 쳐낼 기력도 없다. 지금 상태로는 회피조차 힘들다. 운 좋게 피한다손 쳐도 문이 파괴되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다.’
혈선들 역시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괜히 움직였다가 정천의 멸천에 당하게 되면 그대로 끝이었기 때문이다.
‘저 힘이라면 능히 우리를 죽일 수 있을 터. 여기는 일단 진운룡에게 맡기는 것이 나을지도…….’
그렇다고 정천이라고 여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진운룡을 치면 혈선들이 움직인다.
‘멸천은 이것이 마지막.’
더 이상은 혼령연소를 펼치더라도 멸천급의 절초를 펼칠 여력이 없었다.
그렇다고 혈선을 공격하면 진운룡이 움직일 터. ‘문’을 공격한다 쳐도 남는 것은 분노한 팔부혈선의 보복뿐이리라.
멸천을 통해 이중 하나를 확실히 해치울 수 있다. 그러나 그렇기에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셈이었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어느 누구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한 채 시간만 죽이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황룡성 주변으로는 돌개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문이 완전히 개방됨으로써 주변의 기류가 기묘하게 비틀린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영원하진 않다.
문을 여는 동력은 한정적이다. 이대로는 길어야 반 각 정도만 유지되고 말 터.
그 이후엔 문이 닫혀 버린다. 닫힌 문을 다시 열기 위해서는 이번과 같은 동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천무맹은 없었다.
남은 것은 혈선들의 존재를 알게 된 중원인들뿐.
지리멸렬한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승자에게도 패자에게도 남는 것이 없는 전쟁이.
‘크으…….’
‘이 상황을 타개할 수가 없단 말인가?’
혈선들은 타는 가슴만 속으로 두드릴 따름이었다.
상황은 정천도 마찬가지였다.
멸천은 구현하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양의 내력을 소모했다. 다시 말해 정천은 지금 이 순간에도 대량의 내력을 쓰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 한계치는 앞으로 반 각 정도.
우습게도 ‘문’의 한계 시간과 비슷했다.
‘제기랄.’
진운룡은 이를 악물었다. 하필이면 상황이 이렇게까지 더럽게 꼬일 줄이야.
그러나 그는 그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이런 때를 대비하여 준비해 놓은 게 있었던 까닭이다.
‘문제는 저 멍청이들이 과연 속아 주느냐는 것인데.’
진운룡은 혈선들을 힐끔 보았다.
어차피 이제는 시간이 얼마 없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혈선들에게 전음을 날렸다.
—내 말이 들리나?
— 진운룡?
— 뭔가 좋은 수라도 있나?
진운룡은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저들은 예상한 것 이상으로 자신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절대적 존재라고 생각해 온 자신들을 능가하는 중원인이 나타났으니 말이다.
당연히 중원인에 대해 빠삭한 진운룡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을 터.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무엇보다 진운룡이 바라는 것이었다.
—지금부터 내 얘기를 잘 듣게. 놈의 힘은 분하지만 나마저도 능가하고 있어. 그런 놈에게 대항하려면 우리들 혈선의 힘을 한데 모아야 하네.
—힘을 한데 모은다고?
—그게 가능한 일인가?
—물론 가능하고말고. 다행히 중원의 수법 중에는 이런 상황에 안성맞춤인 것이 있지.
그런 게 있었던가? 혈선들은 잠시 의아해했으나 이내 의심을 지웠다. 상황이 다급하다 보니 의심을 품을 여유조차 없었다.
진운룡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곧장 자네들에게로 몸을 날리겠네. 자네들은 단전의 기운을 한데 모아 나에게로 곧장 발산하게.
—하지만 그랬다간 자네가…….
—살기를 지우고 보내면 되네. 기본적으로 나와 자네들의 기운은 그 형질이 동일하니, 내가 흡수하는 데엔 무리가 없을 걸세.
—으음.
—자네가 그렇게까지 자신한다면…….
혈선들이 체내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진운룡은 속으로 다섯부터 하나까지 센 다음 그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지금!”
“큭!”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정천이 흠칫했다. 그러나 곧장 멸천을 날리진 않았다. 그의 움직임이 뭔가 이상했던 것이다.
‘왜 혈선에게 몸을 날리지?’
이유는 이내 밝혀졌다. 혈선들이 자신들의 기운을 진운룡에게로 보냈던 것이다.
“이것을 받게!”
“놈을 해치우게!”
각각의 빛을 머금은 기운 덩어리가 진운룡을 향해 날아들었다. 진운룡은 두 팔을 벌려 각각의 덩어리들을 받아들였다.
“공격해요! 그가 저걸 흡수하게 둬선 안 돼요!”
요태희의 외침이었다. 정천 역시 그걸 알고 있었기에 곧장 멸천을 날리려고 했다.
그러나 진운룡은 그에 대해서도 대비해 두었다.
“어딜!”
진운룡의 손바닥을 펼쳤다. 허공섭물에 의해 백미련과 장유추, 요태희의 몸이 끌려왔다.
세 사람은 그대로 방패막이가 되었다. 멸천을 날리려던 정천이 멈칫했다.
“신경 쓰지 말고 공격하세요!”
요태희의 외침에도 정천은 팔을 뻗지 못했다. 다른 누구보다도 정천 본인이 더 놀랄 일이었다.
‘어째서?’
저 세 사람을 싫어하진 않는다. 하지만 복수보다도 소중하진 않았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복수를 위해 살아온 정천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팔이 떨어지질 않았다. 본능이나 의지를 넘어선 무언가가 자신을 붙들고 있었다.
‘그걸 휘두르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걸.’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말하고 있었다. 정천은 그게 화륜패의 목소리임을 알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옛 동료들, 용검대의 대원들이 정천에게 말하고 있었다.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라고.
‘크……으.’
정천은 이를 악물었다.
그저 환청일 뿐이라고, 신경 쓸 것 없다고 속으로 되뇌어도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진운룡은 혈선들의 기운을 체내에 받아들였다.
파아아앗!
일시적으로 그의 내력이 급증했다. 정천의 내력마저 가볍게 웃도는 수준이었다.
“하하하하!”
진운룡의 웃음소리가 허공을 뒤흔들었다. 혈선들도 밝아진 얼굴로 소리치고 있었다.
“어서 놈을 끝장내게!”
“이제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거야!”
진운룡의 시선이 옛 동지들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그 눈빛은 더 이상 동료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다.
중원인을 볼 때와 같은 시선.
그는 경멸 어린 눈으로 혈선들을 응시했다.
“너희의 이용 가치는 여기까지다.”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린가!”
“이런 소리지.”
진운룡이 팔을 뻗었다.
파아아앗!
백색의 검이 길게 뻗어 나왔다. 정천의 강룡검을 연상케 하는 강기의 덩어리였다.
진운룡은 그것을 혈선들을 향하여 휘둘렀다.
“지, 진운룡!”
“네놈이 우리를!”
당황한 혈선들이 뒤늦게 방어하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애초에 힘을 모두 건네준 그들로서는 진운룡의 검격을 막을 여력이 없었다.
콰과과광!
강기의 파도가 혈선들을 덮쳤다.
그들은 백색 섬광 속에서 육체가 산산이 부서지는 고통을 느꼈다.
“끄아아아악!”
“진운룡!!”
혈선들의 비명은 강기의 폭풍과 함께 사라졌다. 그들의 육신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채 소멸되어 버렸다.
“다음은 네놈이로군.”
진운룡이 웃음 가득한 눈으로 정천을 돌아봤다.
“큭……!”
정천은 절망감을 느꼈다. 이젠 멸천을 펼치더라도 진운룡을 죽일 수 없었다. 아니, 그의 멸마환영무조차 파훼할 수 없을 터였다.
‘이렇게 죽는 건가?’
왜 조금 전 공격하지 못했을까. 왜 그들의 환청은 자신을 말린 걸까.
갖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그런 다음에 남은 것은 한 가지 사실뿐이었다.
‘모든 게 끝났다.’
정천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정 소협…….”
허공섭물로 붙들려 있는 요태희도 마침내 체념했다. 애초에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당신을 원망하지 않아요. 스스로를 책망하지 마세요.”
요태희의 목소리가 정천의 귓가에 울렸다. 욕설이나 저주보다도 더욱 고통을 주는 말이었다.
“흥. 싱겁게 끝이 났군.”
진운룡은 코웃음을 쳤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 그였다.
‘힘을 흡수하는 게 조금만 늦었더라면, 놈이 인질들을 무시한 채 공격했더라면, 저 얼간이들이 나를 의심했더라면…….’
그 어느 한 가지만 벌어졌더라도 지금 죽어 자빠져 있는 것은 진운룡 자신이었으리라.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감정이었다.
‘안도…… 그리고 공포라는 것인가.’
진운룡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렇기에 더욱 확실히 끝장을 보아야 했다.
“죽여 주마.”
부우우웅!
멸마환영무의 강기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게 뿜어져 나왔다.
그 위력은 정천 일행은 물론, 황룡성 전체마저 파괴해 버릴 수준이었다.
‘이렇게 죽는 건가.’
정천은 체념한 채 속으로 되뇌었다. 그리고 잠시 후, 자신이 아직도 멸천의 기운을 붙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째서?’
모든 게 끝났다. 이제 와 멸천을 펼친다 해도 진운룡에게 치명타를 입히긴 힘들 것이다. 그야말로 허무한 발악에 지나지 않을 터.
그런데도 정천의 오른손은 아직 멸천을 쥐고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노라고 말하는 것처럼.
‘아직 끝이 아니다.’
정천 본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조금 전에 그랬던 것처럼, 화륜패와 용검대의 동료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속삭이고 있었다.
‘네 손에 검이 들려 있는 한, 아직 싸움은 끝난 것이 아니다.’
일어나 싸우라고 말하고 있었다. 허무한 발악일지라도 실컷 해보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정천은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요태희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의 입 모양이 말하고 있었다.
당신이 바라는 대로 행동하라고.
파지지직!
형태만 겨우 유지하고 있던 멸천의 기운이 순간적으로 폭발했다. 흑색의 강기는 다시금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아 올랐다.
“흥! 이제 와 발악하겠다는 거냐?”
코웃음을 친 진운룡이 주먹을 들어올렸다. 멸마권의 강기가 사방으로 작렬했다.
그 순간 요태희가 입을 열었다.
“당신, 이곳에 남을 생각인가요?”
“음?”
“문이 닫히고 있어요.”
“……!”
진운룡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요태희의 말은 사실이었다. 두 세계를 잇는 문이 당장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명멸(明滅)하고 있었다.
“아, 안 돼!”
다급해진 진운룡이 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인질들도 팽개친 채, 정천에게도 신경을 끈 채로.
이미 혈선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문을 열기 위한 장치들도 돌개바람에 의해 파손된 상태였다.
진운룡 혼자서는 이를 다시 만들 수 없다. 저 문이 닫히게 되면, 그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단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그렇게는 안 돼!”
그 순간 요태희는 정천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날려 버려요!”
“알고 있어!”
정천의 오른팔이 허공을 후려쳤다. 멸천의 기운이 채찍처럼 휘둘러져서는 ‘문’을 향하여 일직선으로 쇄도해 갔다.
진운룡의 몸은 문을 절반쯤 넘어선 상태였다.
그리고 그곳을 향해 흑색의 칼날이 틀어박혔다. 진운룡의 모습이 어둠에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키이이이잉!
기괴한 굉음이 사방으로 울렸다. 멸천은 마치 구멍에 휩쓸리는 물처럼 문 너머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번쩍!
눈을 찌르는 섬광이 사방으로 터져 나왔다. 뒤이어 어마어마한 후폭풍이 황룡성 전체로 몰아쳤다.
콰과과과과광!!
열풍이 몰아쳐 모든 것을 파괴했다. 지상에 발생한 태풍은 우악스러운 마수처럼 어떤 것도 남기지 않고 쪼개고 부수었다.
“허억. 헉…….”
정천은 멸천을 날린 자세 그대로 고꾸라졌다. 혼령연소까지 펼쳐 모든 힘을 소모한 지금은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도 태풍은 여지없이 몰아쳤다.
* * *
콰과과과광!
“……!”
진백란과 남궁운, 귀도신마는 걸음을 멈춘 채 망연자실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앞에선 태풍에 삼켜진 황룡성이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이, 이래서야 접근조차 쉽지 않겠군.”
혀를 내두르는 귀도신마.
진백란이 남궁운을 바라보며 물었다.
“조금 무리한다면 뚫고 들어갈 수 있지 않겠어요?”
“가능하기야 하겠지. 하지만 저 안에서 과연 사람을 찾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군.”
땅이 파헤쳐지고 건물이 부서져서 허공에 흩날린다. 아마도 저 안은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의 상황일 터였다.
자칫하면 구조하러 들어갔다가 그들까지 휩쓸리게 될지도 몰랐다.
진백란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여기서 멍청히 구경만 해야 한단 말이야……?”
“아가씨…….”
귀도신마가 그녀를 달래려 할 때였다.
“저게 뭐지?”
남궁운이 무언가를 가리켰다. 나머지 두 사람도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람을 헤치며 몇몇 인영들이 나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귀도신마가 환호성을 뱉었다.
“칼도둑놈!”
장유추였다. 그가 큼직한 한 팔로 정천과 백미련, 요태희를 붙든 채 태풍을 뚫고 나왔다.
남궁운이 급히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
장유추는 거의 탈진 직전이었다.
“운이 좋았소. 제때에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지. 그러고 보니 태풍이 몰아치고 있더군. 정천 저 친구는 죽은 듯이 쓰러져 있고…….”
“그 외에 본 것은 없었나?”
“아무것도. 오직 몰아치는 바람뿐이었소.”
“그렇다는 건…….”
남궁운이 말끝을 흐렸다. 이래서야 혈선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가 없지 않은가?
그의 생각이라도 읽은 듯, 헐떡이던 요태희가 나직이 입을 뗐다.
“혈선들은 모두 죽었어요. 진운룡이 그들을 배신했죠.”
“지금…… 진운룡이라고 했나?”
남궁운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요태희에게 물었다.
요태희는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남궁운이 아닌 아득한 무언가를 보고 있는 듯했다.
실제로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과거였다. 그리 멀지 않은, 정천이 멸천을 날리던 순간의 기억이었다.
멸천이 문을 직격하던 순간, 진운룡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기운. 그 충돌로 인해 붕괴해 버리는 문. 엉망이 되어 버린 좌표.
요태희의 입에서 신음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운룡은 아직 살아 있어!”
〖강룡검제 9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