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一章 멸천, 세 번째
츠츠츠츠.
황룡성의 금역.
그곳의 가장 깊은 곳에서는 연신 다색의 뇌전이 번뜩이고 있었다.
혈선들이 특수한 장치를 설치해 놓은 자리였다. 장치는 혈선들의 정신력에 의해 작동하며, 오직 그들만이 움직일 수 있었다.
본래 예정대로면 장치에 의해 황룡성 중앙에 ‘문’이 구현되었어야 했다.
물론 문이 구현되기는 했다.
그러나 그들의 고향으로 이어지는 문은 아니었다.
혈선들은 고향의 좌표를 찾아내기 위해 집중하고 또 집중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진운룡 쪽의 상황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단지 지금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만을 알 따름.
“설마 십 년 전의 재래(再來)가 벌어지는 것은 아니겠지?”
푸른빛 혈선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떨렸다. 노란빛, 붉은빛의 혈선 역시 표정이 어두웠다. 정천의 존재를 알게 된 까닭이었다.
반면 나머지 네 혈선은 책망하는 눈으로 혀를 찼다.
“멍청한 소리. 우리가 세운 이론은 완벽하다.”
“지금은 그저 공간 사이에 자그만 잡음이 끼어든 것에 불과하다.”
그들의 말에도 푸른빛 혈선은 불안한 표정을 거두지 않았다.
“이론은 이론일 뿐이야. 현실 속엔 수많은 변수가 있고, 지금도 그 변수에 의해 문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잖나.”
“일시적일 뿐이다. 그리고 변수란 것이 우리들에게 무의미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잖나?”
“우리는 절대적이다. 변수는 무의미해.”
동료들의 말에 푸른빛 혈선은 조소를 지었다.
“절대적이라고? 하긴 나 역시 조금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었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지금 진운룡이 맞서고 있는 중원인에 대해 너희는 모르지. 그러니 그렇게 태평하게 있을 수 있는 거다.”
네 혈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지금…….”
“고작 중원인 하나에 벌벌 떨고 있는 것인가?”
푸른빛 혈선의 언성이 높아졌다.
“놈은 변수다.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큰 변수! 자칫하면 우리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될지도 몰라!”
“멍청한 소리! 일개 중원인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이냐?”
“놈이 제법 강하더라도 진운룡의 상대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잘 알 텐데?”
“나도 안다. 진운룡은 우리들 이상의 역량에 중원의 무공까지 익힌 존재지. 과거를 통틀어도 그에게 필적할 존재는 없을 거라는 것도 잘 안다.”
“그런데 무엇이 걱정이란 말인가?”
“십 년 전. 우리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던 날을 기억하는가?”
혈선들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어찌 그날을 잊을 수 있을까?
그들에게 있어서도 뼈아픈, 그러나 타산지석의 계기가 된 날이었다.
그날도 그들은 오늘처럼 ‘문’을 열려고 시도했었다. 그러나 불안정하던 장치는 폭주, 고향으로의 문이 아닌 다른 곳으로의 문을 열고 말았다.
그것이 바로 진마동.
혹여나 하여 황룡성이 아닌 사천에서 일을 벌였던 게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진마동이 황룡성에 나타났다면 천무맹은 그날로 멸망했으리라.
중원인들이 얼마나 죽든 알 바는 아니었지만, 천무맹은 계획 실행에 있어 필수적이었다.
“이제 와 진마동의 얘기를 꺼내는 의중이 무엇인가? 무슨 얘기를 하고 싶나?”
동료들의 채근에 푸른빛 혈선은 침묵했다. 그저 정천이 있을 방향을 무거운 눈으로 바라볼 따름.
결국 노란빛 혈선이 대신 대답했다.
“놈은 진마동의 생환자다.”
“…….”
짧은 침묵이 흘렀다.
네 혈선은 어째서 푸른빛 혈선이 신경질적이었는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과거의 망령이라는 건가. 하긴 생환자가 있었다는 보고는 천무맹주에게서 직접 받았었지.”
“그러나 그래 봐야 고작 중원인일 따름이다. 이렇게까지 경기를 일으킬 이유는 없을 텐데?”
이번에는 붉은빛 혈선이 대꾸했다.
“놈의 무위는 우리들 개개인에 필적했다.”
“……!”
이번 침묵은 앞선 것과는 성질이 달랐다.
소리 없는 경악이 네 혈선을 짓눌렀다.
역대 천무맹주들조차 한 수 아래로 보는 그들이었다. 비록 무공에 대한 지식은 일천하다지만, 그런 사실이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의 힘을 지닌 그들이었다.
기나긴 시간을 군림해 왔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영약과 내단 등을 가로챌 수 있었다.
원체 강하던 기운은 고급스러운 영약 섭취에 의해 더욱 강해졌다.
천무맹이 무림의 중심이며 수많은 보물의 본산인 덕이 컸다.
본디 요태희 수준이던 그들의 내력이 이만큼이나 거대해진 것은 그 덕이었다.
쉽게 말해 외공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내공이 뛰어난 게 그들이었다. 그 내공의 수준이란 외공의 문제를 보완하고도 남을 수준이었고.
그런 그들에게 개인 단위로 대적할 수 있는 인물은 그나마 천마 정도일 터.
그런데 천마도 아닌 주제에 그들에게 필적하는 존재가 있다고 했다.
고작 하나일 뿐이지만 충격은 충격이었다.
하나가 있다는 것은 곧 둘, 셋도 있을 수 있다는 의미였으니 말이다.
“진운룡이 놈을 죽일 것이다.”
녹색빛 눈을 지닌 혈선이 말했다. 나머지 두 혈선도 그 말에 동의했다.
“그래. 진운룡이 있으니 걱정할 건 없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우리 일곱이 모두 덤벼들어도 승리를 자신할 수 없잖나.”
“그렇기는 하지만…….”
푸른빛 혈선은 말끝을 흐렸다.
그 역시 진운룡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무공적 지식, 육체의 단련, 전투 경험…… 모든 면에서 진운룡은 정천을 압도했다.
단 한 가지.
내력의 규모를 제외한다면.
‘놈의 내력은…… 우리들마저 능가한다!’
인정하긴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혈선들은 앞서 유리구슬을 통해 정천의 전투를 지켜보았다. 대부분은 그냥 좀 세구나 하고 넘겨 버렸었고, 그건 푸른빛 혈선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제 와 계산해 보면, 놈은 수십의 마라혈천을 상대하고 난 직후였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혈선들과 대등하게 싸웠다.
‘일정량이 비어 있는 물통. 그 안의 물만으로도 우리의 물통 전체에 필적했다는 소리.’
다시 말해 물통이 꽉 차 있었다면 혈선들조차 압도했으리란 의미. 그것은 진운룡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물론 만약의 일일 따름.
누가 뭐래도 지금의 정천은 상당량이 빈 물통을 지니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꽉 찬 진운룡의 물통보다는 양이 적었다.
그것을 메울 수 없는 바에야…….
‘아니, 방법이 있지 않은가!’
검왕은 물론 천마조차 사용했었던 그것.
비어 버린 내력을 삽시간에 회복시킬 수 있는 최후의 수법.
‘놈이 혼령연소를 쓴다면 그땐 진운룡조차 승산을 장담할 수 없다!’
* * *
파지지직.
하늘과 땅을 잇는 흑색의 기둥.
정천의 오른팔에서부터 뿜어져 나온 멸천의 기운이었다.
‘어마어마하다.’
진운룡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가신 뒤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런 무식한 강기는 그로서도 어찌할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크으으으.”
정천의 잇새에서 신음이 흘렀다. 그의 몸은 당장에라도 부서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구현하는 것만으로도 시전자의 몸을 망가트릴 정도. 직격당하면 혈선이라 해도 즉사를 면할 수 없으리라.
‘하지만 피하면 그만.’
그래 봐야 결국은 검격일 뿐이다. 무지막지하게 거대하다고는 해도 일직선의 칼날일 뿐. 목표와 궤적만 알면 얼마든 피할 수 있다.
‘평소라면 그렇겠지.’
진운룡은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자신이 저걸 피해 버리면 ‘문’이 멸천에 노출된다.
그리고 현재 멸천의 힘이라면 문을 소멸시킴은 물론 근방의 모든 것을 날려 버릴 것이다.
혈선들이 설치해 놓은 장치들 역시.
그럼 모든 게 끝장이다. 백 년 단위의 시간과 노력을 쏟은 그들의 결실이 송두리째 날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다.’
푸화아악!
진운룡의 몸에서부터 순백색의 기운이 터져 나왔다. 천마신공의 그것과 비슷한, 그러나 동일하지는 않은 강기였다.
과거 초대 천무맹주로서 마교와 대적할 때, 그의 무공은 다음과 같은 이름으로 불렸다.
멸마환영무(滅魔煥靈武).
이름 그대로 마교의 모든 것을 멸하고 적의 모든 것을 불살랐던 절대신공이었다.
더군다나 기나긴 시간이 흐른 지금은, 과거의 미흡했던 점을 모두 보완한 뒤였다. 최강의 무공이란 게 있다면, 아마도 현존하는 모든 무공 중에서 그에 가장 가까울 터.
‘칼날의 궤도를 비껴가게 한다!’
진운룡은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렸다.
그로서도 차마 멸천과 정면 승부할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궤도를 비껴가게 하는 거라면 가능하다고 봤다.
“…….”
정천 역시 진운룡의 속셈을 꿰뚫어 보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방법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제대로 싸우면 승산이 없다. 그나마 저 괴물을 상대로 승산이 있는 것은 이것뿐이야.’
다른 길이 없기에 이 길로 갈 수밖에 없다. 정천으로서도 여유는 전혀 없었다.
꾸욱.
땅을 밟는 정천의 전각이 깊숙이 들어갔다.
다음 순간.
하늘로 치솟아 있던 정천의 오른팔이 땅을 향하여 내리꽂혔다.
파아아앗!
천지(天地)를 연결하던 흑색 칼날이 진운룡을 향하여 내리꽂혔다. 정확히는 그와 그의 뒤에 있는 ‘문’을 일직선에 둔 궤적이었다.
파밧!
멸마환영무의 기운이 진운룡의 오른 손아귀로 집중되었다. 정천이 모든 것을 갈라 버리는 검이라면, 그는 모든 것을 쳐내는 권이었다.
멸마권(滅魔拳).
쓸데없이 장황하지도 않으면서 진운룡의 자신감이 투영되어 있는, 그가 선보일 수 있는 최강의 절초였다.
“하아압!”
기합성과 함께 진운룡이 천공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백색 기운은 그의 오른팔을 휘감고서 백룡의 형상이 되어 하늘로 치솟았다.
내리꽂히는 흑색의 칼날.
승천하는 백색의 용.
두 개의 힘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콰지지지직!
거대한 굉음과 함께 사방으로 충격파가 흘렀다. 황룡성의 지반이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 진동했고,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건물들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이윽고 충돌 지점으로부터 어마어마한 열파가 퍼져 나왔다.
화르르륵!
중심 지역이라 할 수 있는 ‘문’ 주변의 목재나 시체 등이 삽시간에 불꽃에 휩싸였다. 두 강기가 내뿜는 열파는 그만큼이나 강렬했다.
허공에서 연신 흑백의 번개가 번갈아 가며 작렬했다. 두 기운은 한데 어우러져 서로의 꼬리를 깨물려는 용들인 양 날뛰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콰광!
굉음과 함께 멸천의 기운이 튕겨졌다. 흑색 강기는 황룡성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산언저리에 직격했고, 단번에 산 전체를 쩍 갈라놓았다.
쩌저저저적!
졸지에 갈라져 버린 산의 지형이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단순히 표면만이 아니라 아래쪽의 지반까지 박살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쿠구구구!
진운룡은 물론, 황룡성 바깥에 있던 이들도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산 하나가 문자 그대로 붕괴하는 모습을.
진운룡의 멸마권은 소멸한 직후였다.
결과적으로 힘의 대결에선 정천이 우세승을 한 셈. 그러나 실질적인 승리는 진운룡의 것이었다.
무엇보다 정천의 내력이 바닥을 드러냈다는 것이 컸다.
“크으…….”
정천은 침음하며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검왕에게 멸천을 펼쳤을 때의 재탕이었다.
내력을 밑바닥까지 모두 소모해 버렸다. 당장의 신체를 가눌 힘조차 소모된 셈.
이래서는 개미 한 마리 죽일 수 없으리라.
“결판이 났군.”
진운룡이 한숨을 뱉으며 중얼거렸다.
그 역시 상당량의 힘을 소모해 전력이 크게 급감한 상태였다. 그러나 정천만큼은 결코 아니었다.
사람을 죽일 힘 정도는 얼마든지 남아 있었다.
“네게는 거듭 감탄하게 되는군. 본좌를 여기까지 몰아붙였던 것은 천마 진천백 이후로 네가 처음이다.”
“…….”
“본좌는 오늘의 일을 잊지 않을 것이다. 필생의 숙적 중 한 명으로 너를 평생 기억하겠다.”
진운룡은 이제 정천을 발치에 두고 있었다.
그의 손에 희미한 기운이 맺혔다. 강기. 가볍게 두드리는 것만으로도 두개골을 수박 깨듯 부숴 버릴 수 있는 힘이다.
“단번에 숨을 끊어 주지. 고통은 없을 것이다.”
진운룡의 손이 정천의 머리맡까지 다다랐을 때였다.
피잉!
갑작스레 날아온 강기가 진운룡의 주먹을 쳐냈다. 평소라면 당하지 않았을 기습이었으나, 힘의 소모가 컸기에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
“으음!”
진운룡이 침음하며 물러났다. 그의 손아귀에선 가느다란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그를 죽이게 둘 수는 없어요.”
아랑궁을 든 요태희가 폐허 사이에서 걸어 나왔다. 그녀를 확인한 진운룡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당신이었군. 하긴 중원인들의 지식만으로 우리에게 대적하긴 힘들었겠지.”
“내가 한 일은 거의 없어요. 모든 건 그들 스스로가 해낸 일이에요.”
요태희가 다시 시위를 당겼다.
“그렇기에 당신만큼은 내 손으로 거두어야겠죠.”
“……못 본 사이에 자신감이 지나치게 충만해졌군. 그게 아니면 감을 잃은 건가? 네가 본좌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건 잘 알 텐데?”
“온전한 상태라면 그렇겠죠.”
요태희의 두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정 소협만큼은 아니지만 당신 역시 내력 소모가 컸어요. 조금 전의 강기도 평소였다면 가볍게 받아쳤을 테니까요.”
“…….”
“지금은 다른 혈선들도 당신을 돕지 못해요. 감을 잃은 것은 오히려 당신입니다.”
“바보 같은 소리. 그렇다고 해도 혼자서는 본좌를 당해 낼 수 없다!”
한때의 연인을 바라보는 요태희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빛났다.
“혼자라고 한 적은 없을 텐데요?”
“뭐……?”
파밧!
그 순간 진운룡의 양쪽에서 두 개의 인영이 솟구쳤다. 백미련과 장유추였다.
백미련은 몸이 채 회복되지 않은 채였다. 때문에 본래 아홉 갈래여야 할 구절검이 고작 세 갈래밖에 없었고, 내력 역시 평소의 절반 수준이었다.
반면 장유추는 비교적 몸이 성했다. 때문에 천뢰강림을 펼치는 데에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푸른 번개와 붉은 안개가 진운룡에게 쇄도했다.
탓.
진운룡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요태희의 말마따나 미처 예상하지는 못했지만 본능이 그의 몸을 이끌었다.
‘약한 놈부터!’
그의 쌍장이 백미련의 구절검을 강타했다. 매화향이 흩어지며 그녀가 피를 토하며 튕겨져 나갔다.
쌍장의 반동을 이용, 몸을 반 바퀴 회전시킨 진운룡이 장유추의 몸으로 파고들었다.
그것도 장유추의 사각이라 할 수 있는 잘려 나간 왼팔 쪽으로.
“크윽!”
장유추는 크게 당황했다. 설마 이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의 약점을 간파하고 파고들 줄이야.
그의 공격 수단은 오른팔 하나뿐이다. 각법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먹힐 만한 것은 광천뇌도로 펼치는 천뢰강림뿐.
진운룡이 왼팔 쪽으로 파고든 순간, 그는 공격을 위해 몸을 비틀어야 했다.
때문에 그냥 공격하는 것보다 다소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찰나의 지체.
그것만으로도 진운룡이 반격하기엔 충분했다.
퍼퍽!
백미련을 날려 버렸던 쌍장이 장유추의 옆구리를 격타했다.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갈빗대가 우수수 부러졌다.
“끄으……!”
장유추는 격통에 신음하면서도 도격을 날렸다. 그러나 이미 진운룡이 멸마환영무를 둘러 방어에 나선 뒤였다.
푸른 번개는 백색 강기를 뚫지 못했다.
진운룡은 그대로 몸을 띄웠다. 그런 다음 가볍게 장유추의 턱을 차올렸다.
그것만으로도 거구를 쓰러트리는 데엔 충분했다. 사람을 해치우는 데엔 산을 무너트릴 힘까지는 필요도 하지 않았다.
뇌가 흔들린 장유추가 비틀거리더니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큭……!”
요태희는 당황했다. 설마 저 두 사람이 이토록 허무하게 당해 버릴 줄이야.
진운룡은 이미 다음 행동에 들어가고 있었다. 요태희는 더 주저하지 않고 연신 시위를 당겼다.
핑! 피잉! 핑!
궁강, 천해랑사가 연달아 허공을 갈랐다. 집중력이 최고조에 달했던 만큼 그녀의 화살은 그 어느 때보다도 날카로웠다.
그러나 그것은 진운룡도 마찬가지.
오랜만의 싸움으로 그의 감각이 완전히 되돌아온 뒤였다.
진운룡은 물러나지 않고 도리어 돌진했다. 그러면서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비처럼 쏟아지는 강기 다발을 피해 나갔다.
어느새 두 사람 사이는 지척.
요태희는 사격을 멈췄다. 그녀는 아랑궁에 강기를 두른 다음 칼처럼 휘둘렀다.
그러나 접근전은 진운룡이 압도적.
그는 그녀의 공격을 가볍게 흘려보낸 다음 발끝으로 요태희의 명치를 찔렀다.
“크흑!”
호흡 곤란으로 요태희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진운룡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몸을 회전시켜 그녀의 턱을 후려쳤다.
멸마환영무의 기운 앞에선 호신강기도 소용없었다. 신체가 안팎으로 진탕이 된 요태희가 땅을 나뒹굴었다.
초고수 세 사람이 쓰러지는 데엔 십 초도 걸리지 않았다.
“끝이군. 안 그런가?”
요태희는 고통을 참고 상체를 일으켰다. 진운룡은 그사이 백미련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무슨 짓을……?”
“뻔한 걸 묻는군. 본좌에게 대적했으니 숨통을 끊어 놓아야지.”
당황한 요태희가 아랑궁을 집어 들어 시위를 당겼다.
피잉!
그녀가 쏘아 낸 강기는 앞선 것에 비해 형편없을 정도로 약해져 있었다.
진운룡은 고개를 살짝 꺾는 것만으로 가볍게 피해 버렸다.
강기를 날려 봐야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요태희가 소리쳤다.
“멈춰요!”
“본좌가 그 말을 들을 성싶은가?”
“어차피 다 끝났잖아요! 당신들이 이겼어요. 이제 곧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면 다시는 올 일이 없는 곳, 마지막엔 자비를 베풀어도 되잖아요!”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군.”
피식 웃은 진운룡이 말했다.
“칼날이란 쓰지 않으면 무뎌지는 법이잖아.”
“……뭐라고요?”
“본좌는 네 말대로 곧 고향으로 돌아갈 거다. 그리고 그곳에서 진정한 세상의 주인으로서 군림할 생각이지.”
“대체 무슨 소리를…….”
“입 다물고 들어. 그러려면 한없이 냉정하고 잔혹해져야 해. 그 잔혹성이란 지금부터 계속해서 유지해 줘야 하는 것이고.”
진운룡이 백미련이 목덜미를 잡아서 들어 올렸다. 축 늘어진 그녀의 몸이 힘없이 딸려 올라왔다.
“그러니 죽이는 거야. 이 감각을 유지해 둬야 하거든.”
“다, 당신…….”
요태희는 말을 잇지 못했다. 설마 이렇게까지 사람이 변해 버렸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백미련은 겨우 호흡만 유지하고 있었다. 옷깃 사이로 드러난 새하얀 앙가슴은 그녀가 토해 낸 피로 얼룩져 있었다.
짧은 음심이 진운룡을 자극했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인간의 감정이었다.
‘흥. 본좌도 아직은 멀었군.’
본디 마라혈천을 키운 것은 그였다. 그들의 성향인 비인간성 역시 그가 주입시킨 것이었다.
그런 만큼 진운룡 본인부터가 인간의 감정을 버렸었다. 세상 위에 군림하게 위해선 불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짧은 순간이나마 잊었던 감정이 떠올랐다. 이내 가라앉아 버리긴 했지만.
‘그녀를 보았기 때문인가?’
요태희.
본래의 이름으로 불리던 시절엔 자신의 반려였던 여인. 그러나 지금은 그저 발목을 잡으려 드는 귀찮은 적에 불과했다.
‘이 중원 계집도 그렇고.’
진운룡은 주먹을 그러쥐었다. 단번에 머리를 깨부순 후 저 덩치 큰 얼간이를 해치울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살갗을 찢는 듯한 무시무시한 살기가 느껴진 것은.
‘응?’
진운룡은 고개를 홱 돌렸다. 당황한 나머지 백미련의 목덜미를 놓아 버리고 말았다.
정천이 그곳에 있었다.
흑색의 강기, 강룡검의 기운에 휩싸인 채.
“네, 네놈…….”
진운룡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정천의 두 눈이 기이한 광채를 뿜고 있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멍하니 있던 요태희가 중얼거렸다.
“혼령연소…….”
파지직!
강기는 삽시간에 정천의 오른팔로 뭉쳐 들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진운룡의 얼굴이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졌다.
‘설마 저것을 또……!’
파지지직!
하늘을 꿰뚫을 듯한 흑색 칼날이 솟구쳐 올랐다.
“멸천.”
정천의 목소리가 진운룡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이걸로 세 번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