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章 멸천, 두 번째
초대 천마와 초대 천무맹주는 특이하게도 같은 성씨를 지니고 있었다.
물론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중원은 넓고 같은 성을 지닌 인물도 발에 채이도록 있었으니까.
하지만 같은 또래이며, 같은 시기에 중원의 양대 세력을 세웠으며, 비슷한 무위마저 지녔다면 얘기가 조금 달랐다.
두 사람의 뒤엔 항상 이런저런 소문이 뒤따랐다. 본래는 형제라는 둥, 같은 혈육을 타고났다는 둥, 같은 스승에게서 동문수학한 사이라는 둥.
천마도 천무맹주도 이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긴 세월이 흐르고, 후대의 어느 누구도 그 사실에 별다른 관심을 지니지 않게 된 지금.
정천은 새로이 깨달은 사실에 이를 악물었다.
“그런 거였나. 하긴 천무맹을 배후에서 조종하려면 무엇보다도 자기들 스스로 건립하는 게 편했겠지.”
눈을 감은 혈선, 진운룡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정천은 몸 상태를 살폈다. 자잘한 생채기는 이미 회복된 뒤. 심각한 부상도 없었던 만큼 싸우는 데엔 문제가 없었다.
세 혈선은 그사이 진운룡에게 질문을 쏟아 내고 있었다.
“문의 상태는 어떠한가?”
“차원 좌표를 제대로 찾아냈는가? 이제는 작동할 수 있겠나?”
“지난번처럼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겠지?”
진운룡은 시선을 정천에게 고정한 채 대답했다.
“여전히 작업 중이다. 아마도 일각 정도는 걸려야 할 거다. 지난번처럼 실패는 아니니 안심하도록.”
“과연!”
“다행이로군!”
혈선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 사실이 정천의 격분을 부채질했다.
“좋아하긴 이르지. 너희 모두 내 손에 죽게 될 테니.”
“건방진 놈!”
“우리를 조금 몰아붙인 것 가지고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분개하여 소리치는 혈선들이었으나 차마 정천에게 덤벼들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자신들에 필적하는 무력이 껄끄러웠던 것이다.
반면 진운룡은 말없이 정천만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약간이지만 희미한 미소마저 띤 채로.
내내 침묵하던 진운룡이 입을 열었다.
“진천백, 그 친구의 힘을 닮았군.”
“……초대 천마 말인가?”
“그렇다. 참으로 그리운 이름이로군.”
회상에 잠긴 눈을 하던 진운룡이 물었다.
“하지만 그의 후손은 아닌 것 같군. 어떻게 그 힘을 얻게 되었지? 중원인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내력의 근원은 무엇이고?”
정천의 입매가 비틀렸다.
“모두 네놈들 덕에 얻게 된 힘이지.”
“우리들?”
“그렇다. 진마동에 대해서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혈선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한동안 잊고 있던 사실이 그들의 뇌리를 스치고 갔다.
용검대 제삼조장, 정천
홀로 생환.
붉은빛의 혈선이 이를 악물었다.
“설마 네놈이?!”
정천의 두 눈동자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이글거렸다.
“수많은 동료들이 그 지옥에서 죽어 갔다. 나 역시 죽음에 직면했었지. 하지만 그 결과 너희들에 대적할 힘을 얻어 돌아올 수 있었다.”
“…….”
“그 점에 대해선 고맙다고 하고 싶군. 네놈들에게 복수할 힘을 네놈들이 주게 된 셈이니 말이야.”
“크으…….”
세 혈선이 침음을 뱉었다. 작은 변수라고 생각했던 것이 이렇게 커다란 태풍이 되어 돌아올 줄이야.
그들이 평소 생각했던 대로였다. 변수란 결국 문제가 될 것이기에 변수인 법이었다.
“대단하군.”
그 와중에도 진운룡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솔직히 말해 네게 존경심마저 느껴진다. 일개 중원인의 힘으로, 요행이 따랐다고는 해도 그 정도 경지에까지 오를 수 있다니. 아마 과거의 진천백도, 역대 최강의 천마라는 진검운도 네게 필적하지는 못할 것 같군.”
“너희들이라고 다를 것 같나?”
“애석하군.”
진운룡의 입가가 미소를 그렸다.
“그렇다고는 해도 본좌의 상대가 되지는 못하니.”
“……뭐라고?”
“이해를 못한 것인가, 인정하질 못하겠는 것인가?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보다 직설적으로 말해 주지.”
진운룡의 입가는 이제 완연한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너는 본좌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 * *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지?”
장유추와 백미련, 요태희는 상당히 떨어진 거리에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결국 정천과 함께 가지 못했다. 처음 혈선을 직면한 순간, 자신들은 방해만 될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천이야 저들에게 필적할 힘을 지녔으니 몰아붙일 수 있었다지만, 자신들은 저 압도적인 힘을 어찌할 수 없었으리라.
기술도 편법도 어느 정도 상대가 되어야 빛을 발할 테니까.
때문에 몸을 숨기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혈선에 대적할 순 없더라도 ‘문’을 파괴하는 것은 가능할지도 몰랐기에.
그러던 중 또 한 명의 혈선이 나타났다.
그 순간 요태희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진운룡……!”
장유추는 물론이고 백미련마저도 익히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천마의 이름만큼이나 유명한 이름이었으니 말이다.
“진운룡? 저자가 초대 천무맹주 진운룡이라고?”
“그래요. 첫 천무맹주이자 이후 혈선으로서 천무맹을 좌우해 왔던 인물이죠.”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매복 중이란 것도 잊은 채 소리치고 마는 장유추였다. 그렇다고 혈선들이 눈치를 챈 것 같진 않았지만.
어쩌면 신경 쓰지 않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들에게 있어 세 사람은 벌레나 다름없었으니.
요태희는 가슴을 움켜쥐고 몸을 떨었다. 그녀의 반응에 백미련이 넌지시 물었다.
“당신과는 어떤 관계지?”
“…….”
대답하지 못하는 요태희. 그 침묵만으로도 대답이 되었기에 백미련은 더 묻지 않았다.
“어째서 그런 사람과 반목했던 거지?”
“……진천백, 그 사람 때문이었죠.”
“초대 천무맹주에 이어 이번에는 초대 천마인가.”
요태희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두 사람은 본디 가장 가까운 사이였어요. 더불어 비교적 친중원적인 성격이기도 했죠. 중원식으로 이름을 지은 것은 그들과 저뿐이었으니까요. 중원의 무공을 받아들여 체화한 것도 우리 셋뿐이었죠.”
“두 사람의 성이 같은 것은 그 때문이겠군.”
“그래요.”
요태희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진운룡은 달라졌어요. 중원에 뿌리를 내리려던 생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혈안이 되었어요.”
“그것을 위해 천무맹을 세웠고 말이지?”
“네. 결국 저와 진천백, 그리고 뜻이 맞았던 동료 두 사람이 작별을 고했죠. 아마 진천백은 그때부터 알고 있었던 걸지도 몰라요. 언젠가 그와 싸우게 되리라는 것을요.”
“그렇게 천마가 태어났고 마교가 이어져 내려온 것이군. 하지만 저자도 결국은 혈선의 일원이 아닌가?”
장유추는 여전히 낙관적이었다.
“다른 세 놈도 혈선이었지만 정천에게 압도당했어. 물론 우리에 비하면 초월적으로 강할 테지만 정천의 상대는 되지 못해.”
백미련도 그 생각에 동의했지만 요태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건 세 사람이 무공에 무지하기 때문이에요. 강한 힘을 지녔지만 제대로 다루는 법을 모르죠. 중원인들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아무리 대단한 근골을 지녔다고 해도 무공을 익히지 못한다면 그저 맷집 강한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아요.”
“그건…… 그렇군.”
“진운룡은 그들과 달라요. 게다가 오랜 단련으로 인해 더욱 강해졌을 테죠.”
“…….”
“어쩌면 지난번에 보았을 때보다도 강해져 있을지도 몰라요. 아니, 필시 그럴 거예요.”
“지난번이라는 건 언제지?”
“마지막으로 그와 싸웠던 그날.”
요태희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백 년은 족히 지난 과거예요.”
* * *
“본좌라니, 마치 자기가 중원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군. 너희가 그토록 우습게 보는 중원인 말이야.”
정천의 가시 돋은 말에도 진운룡은 빙긋 웃기만 할 따름이었다.
“뭐, 그래도 한때는 너희를 직접적으로 이끌기도 했었으니까. 정확히는 너희의 선조들이라 해야겠군.”
“좋을 대로 지껄여라. 어쨌든 너희의 원대한 계획도 여기서 끝이니까.”
말을 마침과 동시에 정천이 검격을 날렸다. 진운룡이나 혈선들이 아닌, ‘문’을 향해 날린 것이었다.
그들을 당황케 하고 주의를 돌리려는 의도.
일단 진운룡의 본실력을 알아내려는 것도 목적이었다.
그러나 진운룡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머지 세 혈선이 화들짝 놀라 정천의 강기를 가까스로 쳐냈다.
정천이 진운룡을 노려본 채로 물었다.
“동료들을 믿은 건가?”
“그럴 리가 있나. 본좌는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
여전히 여유롭게 말을 잇는 진운룡. 혈선들이 그를 미심쩍게 쳐다봤지만 이내 표정을 풀었다.
어쨌든 그들은 이제 곧 목표를 이루게 된 것이다.
“우린 먼저 동료들에게 가 있겠다. 놈을 처리한 다음 돌아오도록.”
“그러지.”
진운룡이 고개를 끄덕이자 세 혈선들이 삽시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정천이 흠칫하자 진운룡이 설명해 주었다.
“순간 이동이란 것이다. 중원의 무공과는 조금 성질이 다른 기의 운용법이지.”
“……친절하기도 하군. 그건 그렇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너무 주절주절 떠드는 것 아닌가?”
“뭐, 괜찮지 않겠나? 네 인생의 마지막 대화가 될 터인데.”
“내키는 대로 지껄이는군.”
파앗!
강룡천마갑이 정천의 몸을 에워쌌다. 진운룡은 새삼 감탄한 눈으로 그 모습을 보았다.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본좌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다.”
“흥. 죽을 때가 되었기 때문인가?”
“아니.”
파아아앗!
정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진운룡 역시 마찬가지로 기운을 격발, 자신의 몸을 갑주처럼 감쌌던 것이다.
기의 성질까지도 비슷했다.
그 역시 천마신공과 비슷한 무공을 익히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경지는 정천의 강룡천마갑과 동일한 것. 정천이 이 경지를 오늘에야 밟았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놈은 이미 예전에 이 경지에 이르렀다는 건가?’
진운룡의 끝도 없는 자신감이 새삼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큭.”
정천은 이를 악물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와 포기하고 물러나거나 굴복할 수는 없었다.
“천마의 무공을 익힌 건가?”
“천마의 무공? 우스운 소리를 하는군. 진천백과 내가 본디 같은 세상 출신이라는 걸 잊었나?”
천마의 무공이란 본디 중원의 무공에 저들 나름의 무공을 섞은 것. 결과적으로 두 사람의 무공의 뿌리는 같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정파의 무공은 성질이 완연히 다른 것인가?
정천의 의문을 느낀 듯 진운룡이 설명했다.
“간단하다. 진천백은 자신의 깨달음을 세상에 뿌리고 싶어 했고, 본좌는 그러지 않았기 때문이지.”
“…….”
“중원인들 따위가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아니거든. 너희로서는 감히 꿈꿀 수도 없는 힘이 이것이다.”
“그렇다면 입맛이 좀 쓰겠군. 너희가 우습게 보는 중원인이 네 경지를 따라잡았으니.”
“그래서 감탄했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틀린 점이 한 가지 있군.”
진운룡의 미소가 한층 광기를 띠었다.
“네놈은 본좌의 발끝도 따라잡지 못했다.”
“뭐?”
팟!
진운룡이 땅을 박찼다. 정천은 긴장하며 그의 움직임에 대응하려 했다.
그 순간 진운룡은 정천의 복부에 주먹을 꽂고 있었다.
“컥!”
진운룡의 강기는 대번에 강룡천마갑을 꿰뚫고 들어왔다. 거기서 나아가 정천의 체내 곳곳을 진탕으로 만들어 놓았다.
지금껏 겪은 그 어떤 공격보다도 치명적인 내상.
정천의 목구멍으로 핏물이 치솟았다.
“크으……!”
애써 정신을 다잡은 정천이 반격에 나섰다. 그는 두 자루 강룡검으로 진운룡의 목을 노렸다. 가위의 두 칼날처럼 교차하여 진운룡의 몸을 갈라 버릴 속셈이었다.
진운룡은 맨손으로 강룡검을 붙들었다. 강기를 손바닥에 둘렀다지만 너무나도 간단히.
“……!”
정천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 순간 그의 두 팔이 진운룡에 의해 비틀렸다.
“크악!”
비틀어진 뼈가 팔꿈치를 뚫고서 나왔다. 정천은 비명을 토하면서도 애써 진운룡의 몸을 차내어 뒤로 물러났다.
진운룡은 정천을 쫓지 않았다. 그저 여유 가득한 눈으로 바라볼 따름이었다.
“본좌와 네 차이는 대략 이 정도다.”
“크으…….”
“네가 본좌를 이길 수 없다고 한 연유를 이제는 알겠지?”
정천은 대답하지 않은 채 이를 갈았다.
두 팔과 내상은 이내 회복되었다. 초인의 영역에 다다른 재생력 덕분이었다. 그러나 무너진 자존심만큼은 회복될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진운룡의 내력은 그렇게까지 압도적이지 않다. 천마나 다른 혈선들을 능가하고는 있었지만 정천에 미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
그의 무공이 천마나 정천의 강룡수라마공마저 능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언뜻 생각해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
그러나 냉정히 생각해 보면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진운룡에겐 누구보다도 많은 시간이 있었다. 최초의 천무맹주로서 군림했을 때부터, 팔부혈선의 일원으로서 천무맹을 조종하는 시기까지.
천마나 정천으로서도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시간이 그에게 주어졌었다.
애초에 초대 천마에 필적했을 정도의 강자가, 그 기나긴 동안 무공을 연마해 왔다면……?
‘나나 다른 이들이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의 수련을 쌓았을 터!’
정천은 절망감마저 느꼈다. 저런 괴물을 어떻게 상대해야 한단 말인가?
진운룡은 정천의 동요를 즐기고 있었다.
“한 가지 사실은 정정하도록 하지. 본좌는 다른 동료들이나 너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이 중원을 마음에 들어 했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구태여 마라혈천을 조직하여 키우지도 않았겠지.”
“마라혈천 역시 네 작품이었단 말이냐?”
“물론. 본좌가 아니면 그 누가 그들을 키웠겠는가? 중원의 무공에는 무지하기 짝이 없는 저 멍청이들이?”
동료인 혈선들마저 무시하는 투였다. 애초부터 진운룡은 여타 혈선들보다도 높은 위치에 있었던 것 같았다.
그렇기에 정천으로선 의문인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거지? 이곳, 중원이 그렇게나 마음에 들었다면 여기에 남아 군림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 이유야 간단하다.”
잠시 뜸을 들인 진운룡이 웃는 낯으로 말했다.
“기왕 군림할 거라면 그쪽이 나을 테니까.”
“……뭐?”
“내 동료들은 기본적으로 우둔하고 순진한 작자들이다. 물론 너희들을 몰살시키면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지만, 그거야 너희들 중원인을 아예 열등한 존재로 보았기 때문이지. 같은 짓을 고향의 동족들에게 하자고 한다면 펄쩍 뛸 작자들이야.”
“너는 다르다는 건가?”
“물론.”
진운룡은 당당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본좌는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고 그들을 죽일 수 있다. 나아가 그들 위에 군림하여 그들을 지배할 수도 있다. 이곳에서 갈고닦은 무공과 본좌의 본래 힘이 합쳐진다면 그야말로 무적이니 말이다.”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본좌는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곳에서 새로운 마라혈천을 결성하여 그곳을 두 번째 천무맹으로 만들 것이다. 지금껏 그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최강의 집단이 탄생하는 것이지!”
진운룡의 포부 앞에 정천은 도리어 마음속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분노가 극에 달하면 활활 타오르는 것이 아니라 얼음장처럼 차갑게 가라앉는다.
지금의 정천이 딱 그러했다.
“고작 그런 이유로 내 동료들은 죽어야 했다는 건가?”
나직한 정천의 목소리.
진운룡은 구태여 부인하지 않았다.
“그래. 네 동료들은 그런 이유로 죽어야 했다. 비단 네 동료들뿐인가? 천무맹의 멍청이들도, 마교의 버러지들도 모두 그런 이유로 죽어야 했다.”
“죄책감 따윈 느끼지 않나 보군.”
“죄책감? 하하!”
진운룡은 정말 우습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너는 잠자리의 날개를 뜯으면서 죄책감을 느끼나? 지나가는 개미를 밟으며 죄책감에 눈물을 흘리나?”
“그만 됐다. 네가 말하고픈 바는 잘 알겠으니.”
스스스스.
강룡천마갑이 정천의 체내로 사라졌다. 진운룡은 웃는 낯으로 그의 속을 긁었다.
“왜, 벌써 포기한 것이냐?”
“천만에.”
파지직.
정천의 오른팔에서 검은빛 뇌전이 번뜩였다. 이윽고 강룡검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인 흑색 칼날이 오른팔을 감싸고 치솟았다.
진운룡이 쯧 하고 혀를 찼다.
“멍청하군. 최고의 무공을 펼쳐도 모자랄 판에 도리어 걸음마 단계로 돌아가다니.”
“조예의 깊음으로는 너를 따라갈 수 없을 테니까. 무공의 깊음만을 보자면 천마도, 그 누구도 네놈을 따라가지 못할 테니까.”
“입에 발린 소리라고는 해도 기분은 좋군. 그래서?”
“그래서 다른 방법을 택한 거다.”
푸하아앗!
강룡검이 폭발적으로 증식했다. 뿜어져 나온 칼날은 삽시간에 땅을 꿰뚫고 들어갔고, 연기와 같은 흑색 기운이 하늘 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진운룡의 표정 역시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니 조예가 아닌 힘 자체로 상대할 수밖에.”
“대체 그건……?”
“멸천.”
정천의 목소리가 또박또박 울렸다.
“내가 펼칠 수 있는 최강의 검으로 상대해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