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章 진운룡
“자, 어서 이쪽으로!”
“밀지 말고 차근차근 질서를 지켜라!”
전쟁 통의 피난민과 같은 전경이 황룡성의 거리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전대 천무맹주 남궁운의 주도로 생존자들이 황룡성을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이 정도 속도라면 반 시진 내에 모두들 대피할 수 있겠어요.”
“으음.”
모용린의 말에 남궁운은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정말 다행이로군.”
“마교의 공세가 끊어진 덕분이에요. 이 마당에 그들이 다시 쳐들어왔다면 감당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럴 테지.”
남궁운은 안타까움이 어린 눈으로 황룡성의 전경을 응시했다.
황룡성은 어느 때와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살진에 의해 죽은 것은 사람뿐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중원 어디에서도 짝을 찾을 수 없을 웅장한 건물들. 사람 사는 생기가 생생히 묻어 있는 거리, 언제나 활기가 넘쳤던 주택가.
그가 목숨을 바쳐 지켜왔던 모든 것.
그것을 버리고 떠나야 한다는 건 가슴이 찢어지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이곳에 남아 있다간 혈선들의 먹잇감이 될 뿐이었다. 개똥밭에서 구르더라도 이승이 나은 법. 일단은 살아남는 게 먼저였다.
남궁운이 감상에 젖어 있을 때였다.
쿠쿠쿠쿠……!
“음?”
황룡성 전체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진. 황룡성이 세워진 이래 처음 있는 지진이었다.
그렇다는 건 한 가지만을 의미할 뿐.
남궁운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것은 모용린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요?”
“정확히는 모르네. 하지만 놈들이 뭔가를 일으켰다는 건 분명해 보이는군.”
그때였다.
파앗!
금역이 있는 위치에서 순백색의 섬광이 번뜩였다. 그 순간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남궁운이 침음하듯 중얼거렸다.
“놈들이 ‘문’을 연 것인가.”
* * *
섬광은 정천 일행이 있는 곳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을 본 요태희의 얼굴이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그들이 문을 열었어요.”
“이미 동력이 모인 것인가?”
장유추가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된 이상 모든 게 끝이다. 팔부혈선은 득의양양하여 자기네 고향으로 돌아가 버릴 것이다.
백미련은 그 와중에 요태희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그녀 역시 본래는 저들과 같은 태생.
문이 열린 이상은 돌아가고 싶은 감정이 없을 수가 없었다.
“왜 그러시죠?”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요태희가 물었다.
백미련은 말을 돌리지도, 적당히 얼버무리지도 않았다.
“지금이라면 당신도 돌아갈 수 있어. 저들과 함께. 본래 당신이 왔던 곳으로.”
“…….”
“누구도 당신을 원망하진 않을걸. 심지어는 혈선들 역시도. 어찌 됐든 이제야 고향에 돌아가게 됐으니까. 애초에 중원인을 인격으로 대우하지 않았던 그들이니, 당신이 우리에게 붙었던 것도 한때의 변덕 정도로만 치부하겠지.”
요태희는 주먹을 꾹 쥐었다.
백미련의 말은 옳다. 한때 마라혈천이었던 만큼 그녀는 팔부혈선의 생각을 상당히 잘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요태희는 팔부혈선이 아니었다.
“전 그들과 함께 돌아가지 않겠어요.”
“어째서지?”
“그건…….”
잠시 머뭇거리던 요태희가 말했다.
“중원이 좋으니까요.”
백미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부럽다는 눈으로 요태희를 바라봤다.
“난 한 번도 그렇게 느껴 본 적이 없어. 그렇기 때문인지 약간은 당신이 부러운걸.”
“언젠가는 당신도 이곳을 좋아할 수 있게 될 거예요.”
짧은 침묵이 그들을 감쌌다.
모든 게 이렇게 끝났다.
팔부혈선은 왔던 곳으로 돌아갈 테고 상처만 입은 채 남겨진 그들은 다시 번영하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해야 할 것이다.
“아니.”
정천의 나직한 목소리가 그들의 귀를 흔들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정천?”
백미련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것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
정천은 시선을 ‘문’ 쪽에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아직 놈들은 문을 넘어서지 않았어.”
“설마……?”
“궁후, 당신이라면 감지할 수 있겠지. 놈들은 아직 황룡성에 남아 있어.”
요태희의 두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그녀는 황룡성 쪽으로 집중을 하고는 퍼뜩 놀라 말했다.
“그 말대로예요. 저들은 아직 문을 건너지 않았어요.”
“문제가 생긴 건가?”
“그건 모르겠어요. 어쩌면 실패한 걸지도…… 혹은 아직 두 세계 사이의 연결이 완벽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정천은 몸을 일으켰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아직 기회가 남아 있었다.
“황룡성으로 가겠어.”
“정 소협…….”
“만약 가는 도중에라도 놈들이 문을 건넌다면 뒤쫓으면 되겠지. 그 후에 놈들과 싸우게 된다고 해도, 그로 인해 죽더라도 상관없어.”
정천의 목소리에선 살기 이상의 차가움이 느껴졌다. 지극한 증오심이 만들어 낸 기운이었다.
그 자리의 모두는 얼핏 확인할 수 있었다.
정천의 어깨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시커먼 기운을.
강룡수라마공의 기운. 천마신공에서 시작되어 강룡단과 용검대의 죽음으로써 개화한 역사상 최강의 무공이었다.
탓.
정천이 땅을 박찼다. 다음 순간 그는 이미 수십 장 너머의 거리를 내달리고 있었다.
타타탓!
다른 이들도 정천의 뒤를 따라 달려 나갔다.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무령권마가 진백란에게 물었다. 진백란은 황룡성 쪽을 바라보다가 입을 떼었다.
“성을 빠져나오는 이들을 거두도록 하자.”
“예? 하지만 아가씨. 저들은 정파인입니다. 단순히 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미 우리들의 습격을 받았던 자들입니다. 저들이 과연 우리의 호의를 호의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천무맹주가 현명한 사람이길 바라야지.”
신생 천마신교의 교주, 아직은 천마가 아닌 아가씨에 불과한 진백란이 수하들을 돌아봤다.
“가자. 우리가 감아 놓은 굴레를 풀러.”
* * *
정천은 달리는 와중에도 금역을 겨냥했다. 그런 다음 자신의 기운을 활의 형태로 형상화했다.
요태희의 천해랑사를 응용, 강룡수라마공의 기운을 화살처럼 쏘아 보내려는 것이었다.
피잉!
시위를 떠난 흑색 기운이 허공에 길죽한 흔적을 남기며 날아갔다. 정확히 ‘문’을 노리는 일격이었다.
쐐애애액!
날아가던 기운은 당장이라도 문을 꿰뚫을 듯한 기세였다. 하지만 중도에 튀어나온 인영 하나가 정천의 기운을 쳐냈다.
콰과과광!
비껴 나간 강기가 폭발하며 누각 하나를 무너트렸다. 어느 정도 예상한 것이었기에 정천은 딱히 놀라지 않았다.
강기를 쳐낸 인영이 삽시간에 정천에게로 돌진해 왔다. 팔부혈선 중 하나가 분명했다.
“와라!”
기합성과 함께 정천이 강룡천마갑을 불러냈다. 흑색의 기운이 뿜어져 나와 그의 몸을 완전히 감쌌다.
접근해 온 혈선은 얼굴에 검버섯이 피어 있는 노인이었다. 그의 두 눈에서는 얼음장 같은 푸른색 기운이 피어나고 있었다.
그는 강룡천마갑을 확인하고는 놀라움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대단하군. 이 정도의 중원인이 천마 외에도 존재할 수 있다니.”
“너희들도 놀랄 줄은 아나 보군.”
“물론이다. 자네는 천마의 후손인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그의 무공을 쓰고 있기 때문인가?”
혈선은 고개를 선선히 저었다.
“천마의 피는 우리와도 연결되어 있다. 본디 우리의 동족이었던 자의 후손이니까. 배신자라고는 해도 여타 중원인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지.”
“…….”
“보아하니 천마의 후손 같지는 않군. 그러면서도 그 정도의 힘을 지녔다니. 솔직히 말해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다.”
“일개 중원인이 너희에게 필적하는 힘을 지녔기 때문인가?”
분노가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
혈선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렇다.”
“그럼 앞으로 더 놀라게 되겠군.”
정천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눈자위를 가득 메운 흑색 연기는 이제 넘쳐흐르듯 사방으로 뿜어지고 있었다.
“그 일개 중원인에게 잘나신 혈선께서 죽게 될 테니 말이야.”
“주제를 모르는구나, 중원인이여.”
정천은 대꾸하지 않고서 혈선에게 쇄도했다.
이미 황룡성은 거의 비워진 상태. 그런 만큼 힘을 아낄 필요는 없었다.
파아아앗!
그 어느 때보다 거대하게 구현된 강룡검이 혈선을 향해 휘둘러졌다. 천마의 무한천강마저 능가하는 위력이었다.
혈선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는 두 손을 전방으로 내밀었고, 그 순간 푸른빛의 반투명한 방패가 생겨났다. 사방으로 한기를 쏟아 내는 얼음 방패였다.
말이 좋아 방패지, 그 크기는 거의 빙산에 필적할 정도로 거대했다.
‘하지만 뚫어 버리면 그만이다!’
검과 방패가 충돌했다.
카가가각!
고막을 찢을 듯한 소리가 터져 나오며 사방으로 불꽃이 튀었다. 깨어진 얼음 파편이 떨어진 자리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이럴 수가!’
혈선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절대영도에 가깝게 빙결되어 있는 방패였다. 그 강도는 강철조차 우스울 정도. 그 어떤 명검이나 고수조차 뚫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정천의 검은 그것을 파고들고 있었다. 실로 무시무시한 기세로.
마라혈천을 상대한 직후임에도 강룡검의 힘은 그 어느 때보다 강했다.
극심한 증오로 인해 정천의 정신력이 극대화된 까닭이었다.
“크으으으…….”
이미 검은 빙한의 방패를 반 이상 파고든 직후.
그 순간 혈선은 생전 처음 생경한 감정을 느꼈다.
자신의 몸이 놈의 검에 의해 반으로 갈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
자신의 의식이 꺼진 촛불처럼 한순간에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
즉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큭……!”
혈선은 방패를 소멸시켰다. 그 순간 그의 몸이 정천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물론 그 어느 때보다 감각이 예민해진 정천은 금세 혈선의 위치를 찾아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건물 위였다.
“기묘한 술수를 쓰는군.”
“…….”
혈선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자신이 느낀 감각에 아직까지도 몸서리가 쳐졌다.
“두려워한다고? 내가 일개 중원인을 두려워하고 있단 말인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혈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네놈은 살아 있어선 안 된다, 중원인!”
“중원인이 아니라 정천이다, 혈선.”
“무엇이 됐든 상관없다. 네놈은 존재해선 안 된다. 너 같은 중원인이 존재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이윽고 그의 옆으로 두 명의 혈선이 더 나타났다. 한 사람은 눈에서 노란빛을, 다른 사람은 눈에서 붉은빛을 내고 있었다.
그들 역시 앞선 혈선만큼이나 당황한 모습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저 중원인이 어떻게 아직까지 살아 있는 거지?”
두 동료의 물음에 혈선의 표정이 구겨졌다.
“놈은…… 나보다 강할지도 모른다.”
“뭐야?”
나머지 둘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그들 각자는 그리 크게 격차가 나지 않는 실력들이었다.
그렇다는 건 한 가지만을 의미했다.
놈이 자신들 한 명, 한 명을 능가하고 있다는 것. 장난감 정도로만 여겼던 일개 중원인이 말이다.
그 사실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말도 안 된다! 어찌 중원인 따위가?”
“못 믿겠으면 한 번 싸워 봐라. 대번에 이해할 수 있을 테니.”
“정말이란 말인가.”
두 혈선은 이를 악물었다.
애초에 그들은 중원인에게 어떤 감정도 품지 않았다. 때문에 그들이 아무리 많이 죽고 희생되더라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격이 다른 존재이기에, 그들은 자신들보다 한참 열등한 존재이기에.
그러나 그들 개개인에게 필적하는 존재가 나타났다.
그것은 곧 중원인이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는 의미였다.
미개한 이들에게 따라잡혔다는 사실. 이는 혈선들에게 있어 그 무엇보다도 큰 충격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하나뿐이야.”
앞선 혈선, 푸른빛의 혈선이 두 동료에게 상기시키듯 말했다.
“놈은 강하다. 그러나 우리 세 사람이 힘을 합친다면 해치울 수 있다. 놈만 사라지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거다.”
“으음.”
“그 말이 옳은 것 같군.”
혈선들은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정천은 일종의 오류라 할 수 있었다. 세계를 이루는 법칙을 뒤흔드는 오류. 그들이 중원인 위에 군림한다는 대전제를 깨는 오류.
그렇다면 오류 자체를 제거하면 그만이다.
세 사람의 혈선은 그렇게 결론을 지었다.
한편 정천은 그들의 대화에서 많은 것을 유추해 내었다.
우선 당장 쓸 수 있는 전력이 셋뿐이라는 것.
여덟 명 모두가 자유롭다면 모두 모여 정천을 죽이면 그만이었다.
‘그렇다면 나머지 다섯이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문제가 생겼다는 것인데…….’
이는 아마도 ‘문’ 쪽의 문제일 공산이 컸다. 아니, 그것이 확실했다.
아직 기회는 남아 있었다. 정천은 내심 안도했다.
‘세 명. 조금 빠듯하긴 하겠지만 여덟 명 모두를 상대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던가? 그렇다면 저 셋을 해치우는 것이 정천의 한 걸음이었다.
‘시작이 반이기도 하니까!’
파아아앗!
두 자루의 강룡검이 양팔로부터 무서운 기세로 뿜어져 나왔다. 정천으로서도 약간 무리하는 것이었지만, 불행히도 저들은 여지를 남겨 두고 싸워도 될 만큼 약하지 않았다.
“크아아아!”
비명에 가까운 기합성을 지르며 정천이 혈선들에게로 짓쳐 들어갔다.
우선은 돌진에 더하여 두 자루의 검을 교차해 휘둘렀다. 십(十)자 형태로 검강이 쏘아지며 세 혈선들을 갈라놓았다.
정천은 일단 새로 온 혈선 중 하나에게로 돌진했다. 정천의 실체를 실감하지 못하고 있기에 약간이라도 방심하고 있을 터였다.
“으음!”
붉은빛 혈선의 얼굴에 당황의 기색이 어렸다. 말로 들었던 것보다 정천의 공세가 날카롭고 거셌다.
부우우웅.
새빨간 기운이 혈선의 두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왔다. 기운은 삽시간의 용암의 줄기처럼 변하여 엄청난 열을 뿜어냈다.
정천의 검강들이 용암 줄기와 충돌했다.
콰지지직!
용암 줄기가 반쯤 갈라지며 사방으로 튀었다. 용암 파편에 맞은 목조건물이 삽시간에 활활 타올랐다.
그 불꽃 사이에서 혈선은 조금 전에 동료가 느꼈던 감정을 깨달았다.
공포.
“으으, 아아아!”
용암 줄기에 집중되는 힘이 더욱 강해졌다.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다는 생각이 혈선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그것은 정천 역시 마찬가지.
강룡천마갑의 기운을 약간 줄이는 것을 감수하면서도 강룡검에 쏟아붓는 기운을 배가시켰다.
파파파팍!
두 자루의 검강은 더욱 빠르게 용암 줄기를 뚫고 들어갔다. 강기 자체를 녹여 버릴 거라는 혈선의 예상을 완전히 뒤집고서.
‘이건 말도 안 된다!’
싸움이란 것은 결국 숫자놀음. 더 강한 자가 이기게 마련이다.
물론 언제나 변수는 있는 법이지만, 압도적인 강자에게 있어선 큰 의미가 되지 못했다.
힘은 그 어떤 변수라도 무너트리는 법이었으니까.
그렇기에 혈선들은 항시 자신만만했다. 그 누구도 자신들의 압도적인 힘에 대항할 수 없기에.
그리고 그 자신감이 깨어지는 순간.
그들이 받는 충격이란 엄청난 것이었다.
“크읏!”
“이놈, 중원인!”
나머지 두 혈선이 정천에게 쇄도했다. 그들도 정천의 무위에 놀라고 있던 터라 행동이 조금 늦을 수밖에 없었다.
치고 들어오는 그들의 속도는 재빨랐다. 그러나 무인들의 것만큼 날카롭거나 세련되지는 않았다.
하기야 그들이 제대로 된 검법이나 권법을 익혔을 리 만무했다.
‘워낙 강하기에 싸우는 법을 익힐 필요도 없었겠지. 그저 주어진 힘으로 적을 짓누르면 그만이었을 테니.’
그리고 그 방심이 지금 정천에게는 힘이 되어 주고 있었다.
‘피한다!’
정천은 도리어 혈선들에게로 치고 들어갔다.
혈선들은 내심 당황하면서도 자신들의 힘을 정천에게로 발산했다.
검버섯 가득한 혈선은 초거대 얼음창을 만들어 내어 정천에게 내던졌다. 또 다른 혈선은 노란빛의 뇌전을 쏘아 보냈다. 장유추나 천마의 그것마저 능가하는 힘이었다.
정천은 빠르게 판단했다.
‘창은 피하고 뇌전은 감수한다!’
풍운세류(風雲勢流)의 경공으로 얼음창을 교묘하게 미끄러졌다.
다음으로는 강룡천마갑에 순간적으로 집중, 방어력을 높여 뇌전을 받아 냈다.
콰지지직!
뇌전은 수라마공의 기운마저 뚫고서 들어왔다. 정천은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불타는 느낌에 전율했다.
그러나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정천을 이를 악물면서도 애써 웃었다.
“그, 그걸 맞고도……!”
당황하는 혈선의 얼굴. 정천은 그들이 경직된 틈을 타 다시금 강룡검에 기운을 집중시켰다.
콰과과곽!
용암 줄기를 꿰뚫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멍하니 있던 붉은빛 혈선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크으윽!”
용암 줄기가 한데 뭉쳐져 방패의 형상을 이루었다. 반사적으로 그런 것이었겠지만, 도리어 정천에게는 기회가 되었다.
‘한점에 힘을 집중시킨다!’
파바바박!
두 줄기의 검강이 나선형으로 꼬이며 용암 방패를 파고들었다. 제이검인 나찰수라의 개량형이었다.
두 자루 강룡검은 보다 빨라진 속도로 용암 방패를 꿰뚫고 들어갔다. 그리고 이내 반대편까지 치고 들어가 붉은빛 혈선에게 쇄도했다.
붉은빛 혈선은 찰나의 순간 몸을 빼냈다. 그러나 정천 쪽이 조금 더 빨랐다.
파악!
“끄으으윽!”
혈선의 팔 한쪽이 허공으로 튀었다. 졸지에 팔 하나를 잃은 혈선이 거품을 물고 신음했다.
“크아아악!”
나머지 두 혈선은 얼어붙은 채 그 모습을 목도했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진 뒤였다.
“이, 이럴 수가…….”
“고작 중원인 따위가!”
정천은 차갑게 웃으면서도 혀를 찼다. 저 멍청이들이 놀라고 있는 동안 동료를 지원했다면 정천이 훨씬 불리해졌을 것이다.
‘이런 머저리들을 위해 그 많은 이들이 목숨을 버려야 했다는 건가?’
그 생각을 하니 더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이런 놈들 때문에 용검대 동료들이 죽어야 했다는 건가!’
흑색 기운이 더욱 강렬한 기세로 폭사되었다. 그로 인해 약간의 어지러움이 느껴졌지만, 정천은 애써 참으며 붉은빛 혈선을 노려봤다.
“죽을 때다.”
“아, 안 돼!”
붉은빛 혈선이 하나뿐인 팔로 기운을 끌어냈다. 많이 약화되기는 했어도 여전히 열기가 엄청난 용암 줄기가 뿜어졌다.
정천은 무시하고 그대로 파고들었다. 무조건 돌진할 생각이었다.
그때 또 하나의 인영이 정천의 왼편에서부터 나타났다. 인영은 곧장 기운을 발했고, 무형의 풍압이 정천의 몸을 강타했다.
“크윽.”
정천의 몸은 삽시간에 수백 장을 날아갔다. 그 정도로 인영이 날린 풍압은 엄청났다.
그자 역시 혈선이었다. 특이하게도 다른 이들과 달리 눈을 감고 있었지만.
전체적인 체형 역시 여타 혈선들과는 달랐다. 같은 노인임에도 체격이 다른 혈선들보다 크고 근육도 균형이 잡혀 있었다.
주름 가득한 얼굴만 제외한다면 누가 보아도 무인의 그것이었다.
왜소한 노인의 형체를 한 동료들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세 혈선들이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제때 와 주었군, 진운룡.”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이름을 지닌 혈선. 그것도 요태희처럼 중원인의 이름이었다.
그 이름이 어딘지 모르게 익숙했다. 몸을 일으키던 정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진운룡이라고?”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다. 천무맹의 사람이라면, 아니 중원의 무인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은 들어 보았을 이름이 아닌가.
“유성검 진운룡.”
정천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초대 천무맹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