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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八章 염원의 끝 (91/146)

第八章 염원의 끝

금역 깊숙한 곳.

기다란 항아리를 응시하고 있던 혈선들이 목소리를 내었다.

“끝이 보이는군.”

“중원인들의 덕이다. 그들의 죽음이 값진 씨앗이 되어 싹을 피웠다.”

“그래. 우리는 이제 곧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들의 목소리는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그래 봐야 건조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이젠 끝이 다가오고 있다. 그 사실을 생각하니 흥분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혈선 중 하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직접적으로 마라혈천을 관리하는 혈선이었다.

“혈천들이 갑자기 몰살당하기 시작했다.”

“몰살이라니? 설마 마교와 정파가 연합하기라도 한 것인가?”

“설령 그렇다 쳐도 이렇게까지 빠르게 그들을 제거할 수는 없다.”

다른 혈선들의 표정도 비로소 심각해졌다.

“변수……인가.”

“그래. 그것도 상당히 심각한 변수다.”

혈선 중 한 명이 커다란 유리구슬을 소환해 내었다. 간단한 조작이 가해지자 유리구슬 너머로 마라혈천의 모습이 펼쳐졌다.

한 사람에 의해 몰살당하고 있는 모습이.

혈선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중 한 명이 끊어 뱉듯 소리쳤다.

“천마!”

* * *

강룡검이 스칠 때마다 마라혈천의 피도 하늘로 튀었다. 전각을 날릴 때에도, 우악스레 몸통 박치기를 할 때에도 여지없이 혈천의 몸뚱이가 나뒹굴었다.

정천은 천마가 그랬던 것처럼 마라혈천을 거세게 몰아붙이고 있었다.

모두가 경이에 휩싸인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저자는, 저분은 천마의 현신인가?”

운규백마의 목소리였다. 마의가 나직한 목소리로 정정해 주었다.

“그는 정파인이다.”

“정파인이라고? 하지만 저 무공은……!”

“천마신공이지. 정확히는 정파의 무공과 혼합이 되어 있지만.”

“대체 어떻게?”

마의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는 진마동의 생환자다.”

“진마동……!”

운규백마는 그 단어만으로도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더불어 이것이야말로 혈선에 대적할 유일한 수단이라는 것도.

팔부혈선에 대적할 수 있었으리라. 천마만 살아 있었다면, 이 두 사람이 힘을 합칠 수만 있었다면.

“내가 모든 것을 망친 셈이로군.”

운규백마의 목소리엔 이제 아무 힘도 없었다.

마의는 그의 생명력이 빠르게 소진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살기를 포기했다. 이래서는 그 어떠한 신의조차 치료할 수 없으리라.

“백마…….”

진백란의 목소리.

운규백마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말했다.

“아가씨, 죄송합니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백마……!”

운규백마의 대꾸는 없었다. 이로써 대다수의 마교칠절은 허무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정천은 느끼고 있었다. 거의 모든 혈천들이 쓰러졌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의 생명조차도 팔부혈선에게 이용당하리라는 것을.

‘제길!’

이들을 죽여 봐야 혈선이 원하는 대로 될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죽이지 않았다간 마교도들이 죽게 될 것이다.

진퇴양난. 어느 쪽을 택하더라도 팔부혈선으로선 이득이었다.

그러나 그렇다면 피해가 그나마 적은 쪽을 택해야 했다.

그렇기에 정천은 일말의 손속도 두지 않았다. 마라혈천이 다른 이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들을 무자비하게 사냥해 나갔다.

“크아아악!”

“커헉!”

학살. 지금 정천의 모습을 한마디로 표현할 단어는 그것뿐일 터였다.

마라혈천의 숫자는 어느새 십여 명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살아남은 그들은 정천의 모습에서 한 사내를 겹쳐 보고 있었다.

천마.

천마의 망령이 부활하여 그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으아아아!”

혈천 중 하나가 공황 상태에 빠져 비명을 마구 질러대기 시작했다.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동료를 공격해 들어갔다.

“미친!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우리 모두가 죽을 거야! 그렇다면 차라리 내가 너희를!”

“미친 자식! 정신 차려!”

마라혈천이 붕괴되고 있었다. 이미 잔당만 남게 되었다지만 그 강대하던 이들의 최후치고는 너무나 허무한 모습이었다.

마라혈천은 이제 두 패로 갈려 서로를 공격하고 있었다. 한 명이 공황에 빠지니 나머지들도 전염되듯 미쳐 돌아갔다.

이 정도라면 마인들과 동료들의 힘만으로도 처리할 수 있을 터.

‘내가 할 일은 다했다.’

정천은 강룡천마갑을 해제했다. 그의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내력의 대부분을 소모한 뒤였다. 천마가 앞서 혈천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지 않았다면 죽는 쪽은 정천이었으리라.

‘천마…….’

대면한 것은 짧은 시간뿐이었지만 많은 것을 자신에게 남겨 준 인물이었다.

그의 희생이 없었다면 마교도 천무맹도 오늘 종언을 고했으리라.

“괜찮아?”

어느새 다가온 백미련이 묻고 있었다.

“글쎄…….”

정천의 대답은 미묘했다. 사실 스스로 생각해 봐도 자기가 괜찮은 건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그사이 마라혈천의 잔당은 하나둘 쓰러지고 있었다. 장유추와 귀도신마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백미련은 정천에게 수고했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이 차마 입에서 나오질 않았다. 수고했다는 말은 모든 게 끝난 뒤에야 할 수 있는 것이기에.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래. 알고 있어.”

정천은 몸을 일으켰다.

간단히 운기조식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자신의 운기조식은 여타 무인들의 것과는 성질이 다르기도 했고.

‘한 번 하게 되면 족히 서너 시진은 잡아먹을 터. 그러는 동안 혈선들이 움직인다면 모든 게 끝이다.’

지금은 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갈 건가요?”

궁후 요태희가 다가오며 물었다. 정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가지 않으면 안 될 테니까.”

“나도 가겠어요. 여기까지 왔으니 최소한 방패막이라도 되어 줘야겠죠.”

상처를 입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강한 그녀다. 그럼에도 자신을 방패막이 정도로 격하한다는 것은 하나만을 의미했다.

“그 정도로 혈선들이 강한가?”

“솔직히 말하죠.”

요태희는 잠시 뜸을 들였다.

“지금 이곳에 있는 모두, 그리고 황룡성에 남아 있을 모두가 힘을 합치더라도 그들을 이길 수 없을 거예요.”

나직한 목소리였으나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들었다.

무령권마가 성큼성큼 다가와 소리쳤다.

“우리의 힘을 무시하는 건가!”

“팔부혈선 개개인의 힘은 오십여 명의 마라혈천에 필적합니다. 다시 말해 여덟 명 중 두 명의 힘만으로도 천무맹과 마교가 이 정도 타격을 입었다는 소리예요.”

“…….”

천마는 죽고 마교 본대는 절반이 궤멸. 천무맹 역시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그것이 고작 혈선 두 명의 전력이란다.

더군다나 저쪽은 총 여덟 명. 단순 계산만으로도 이 네 배의 전력이란 의미였다.

“으으음.”

긴 침음을 흘리는 무령권마였다. 기왕 얘기한 것, 요태희는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지금 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하나예요. 일단 이곳에서 물러나는 것.”

“적을 앞에 두고 도망치자는 건가?”

무령권마의 말에 요태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도망치자는 거예요.”

“웃기는 소리! 그런 제안을 우리가 따를 것 같나?”

요태희는 무령권마를 무시한 채 정천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직 그들이 문을 열지 못한 걸 보면 문을 열기 위한 동력이 부족하다는 소리예요. 다시 말해 여기서 희생자가 더 생기지만 않는다면 문은 열리지 않는다는 소리나 다름없죠.”

“…….”

“지금이라도 황룡성의 생존자들을 대피시키고, 이곳에서 최대한 떨어진 곳으로 피하면 돼요. 혈선들이 펼쳐 놓은 진법의 영향에서 벗어난 곳으로요.”

“혈선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그들로선 함부로 무인들을 죽일 수 없어요. 진법의 영향력 바깥에선 암만 학살을 벌여 봐야 동력을 얻을 수 없으니까요.”

요태희는 확신하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들은 본디 학자 출신이에요. 누구보다도 논리와 이치에 맞추어 행동하죠. 어찌 보면 기계처럼 느껴질 정도로요.”

“진법 밖에서 무인을 죽이는 건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거군.”

“그래요.”

요태희는 확신에 찬 얼굴이었다.

“우선은 이곳을 빠져나가는 거예요. 그다음에 진법을 무력화할 방법을 생각하면 돼요.”

분명 정론이었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한다면 당장은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그리고 평생을 혈선의 그림자에 두려워해야겠지.”

“네?”

정천은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마라혈천의 잔당을 처리한 장유추가 다가와 있었다.

그를 향하여 정천이 말했다.

“난 지금부터 황룡성의 금역으로 향할 겁니다. 선배는 제 부탁을 하나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부탁이라 했나?”

“예. 지금쯤 황룡성 내에 있을 군사, 옛 맹주와 함께 생존자들을 성 바깥으로 인솔했으면 합니다.”

장유추의 시선이 자연히 백미련에게 향했다.

“그거야 다른 사람이라도 할 수 있겠지. 난 자네와 가겠네.”

“본후 역시 정천과 함께 가겠어.”

“그렇다면…….”

두 사람의 시선이 요태희에게 향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요태희가 고개를 저었다.

“저 역시 싸우겠어요. 그편이 약간이나마 승산이 있을 테니까요.”

“그건 안 됩니다.”

정천의 목소리에 세 사람의 시선이 한데 쏠렸다.

“혼자 좋은 건 다 해먹겠다는 건가?”

“조금 강해졌다고 너무 잘난 척하는군. 그대 혼자 놈들을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해?”

“저 역시 두 사람에게 동감이에요. 조금이라도 승산이 있으려면 함께 싸우는 수밖에 없어요.”

정천은 한숨을 쉬었다.

“약간만 상처를 입어도 동력의 일부가 될 텐데?”

세 사람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지금 황룡성에 들어가 싸운다는 것은, 죽거나 상처를 입을 시엔 피를 빼앗겨 혈선의 동력으로 쓰일 거라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건 자네도 마찬가지 아닌가?”

“저라면 그들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습니다.”

“상처 하나 없이 싸울 수는 없지. 자네의 무공이 강하긴 해도 무적은 아니야.”

“…….”

정천은 침묵했다. 장유추의 지적은 뼈아프지만 분명 사실이었다.

“한 가지 방법이 더 있긴 하지.”

한편에서 듣고만 있던 귀도신마가 입을 열었다.

“놈들은 지금쯤 그 동력이란 것을 거의 대부분 얻었겠지? 그리고 동력만 충족된다면 자기네 고향이란 곳으로 돌아가겠지?”

장유추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떠벌이?”

“간단해. 놈들에게 나머지 동력을 제공해 주면 되는 거다.”

“빌어먹을 마교도 자식, 남은 천무맹 사람들을 희생하겠다는 거냐!”

“그렇다고는 얘기하지 않았어. 그들에게 제안을 하면 되는 거야.”

“제안이라니!”

“정파인도 아니고 마인도 아닌 놈들을 제공하겠다고 하는 거다.”

장유추의 입이 절로 다물어졌다. 백미련의 목소리가 신음처럼 흘러나왔다.

“사파…….”

“그래. 놈들이라면 너희나 우리로서도 적대하고 있고, 혈선 놈들의 동력으로도 손색이 없을 테지.”

“비열한 생각이로구나.”

장유추의 말에 귀도신마는 코웃음만 쳤다.

“비열? 네놈 말대로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우리의 상태를 볼 필요가 있다. 놈들은 우리보다 강해. 그건 궁후의 말만으로도 알 수 있지. 이대로 싸웠다간 몰살당할뿐더러 놈들에게 동력만 제공할 따름이다.”

귀도신마의 시선이 정천을 훑었다.

“허심탄회하게 얘기해 보게. 팔부혈선 여덟 명이 모두 나선다면 싸워 이길 자신이 있나?”

“……없습니다.”

“그럴 테지. 막말로 놈들 전체가 자네에게 덤벼들어 자네를 죽인다고 치세. 그렇게 되면 개죽음일뿐더러 그 누구보다 많은 동력을 제공하게 될 따름이야.”

정천은 이를 악물었다.

놈들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진마동의 어둠 속에서 죽어 간 동료들의 한을 풀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혈선들을 이길 자신이 없었다. 더불어 자신의 힘이 그들의 동력으로 쓰이게 된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귀도신마가 차갑게 선언했다.

“최선은 놈들에게 굴복하는 거야. 마교도 천무맹도 우선은 살아남아야 해. 살아남아야 훗날을 도모할 수 있을 테니까.”

“우리의 자존심을 스스로 짓밟으면서 말이냐?”

“그렇다, 칼도둑놈.”

장유추는 이를 으드득 갈았지만 차마 귀도신마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그 역시 심장을 깎는 심정으로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게 뻔했기에. 그렇기에 피가 나도록 주먹을 꾹 쥐고 있는 거겠지.

“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한쪽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화연란이 머뭇거리고 있었다.

“할 말이 있다면 해 보세요.”

요태희가 말했다. 친절하지만 힘이 빠져 있는 목소리였다.

“오라버니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화연란은 다른 이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정천을 똑바로 응시했다.

“복수하고 싶으세요?”

“……?”

“아직까지도 그들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이 남아 있느냐고 물었어요.”

정천은 화연란의 눈을 보았다.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눈. 위축되어 있긴 하나 겁에 질린 눈은 아니다.

‘대주님과 같은 눈이구나.’

잠깐 동안이지만 마치 용검대주 화륜패를 눈앞에 두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패기 넘치던 그와는 달리 따스함이 더욱 컸지만.

화연란은 흐르려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복수하세요.”

“이봐, 소저. 지금 그게 불가능하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잖나.”

귀도신마가 신경질적으로 말했지만 화연란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들과 싸워 이기는 것만이 복수는 아니에요. 목숨을 빼앗는 것보다 큰 복수는 그들에게 똑같이 되갚아 주는 거죠. 가장 소중한 것을 앗아가는 것.”

“가장 소중한 것? 설마…….”

귀도신마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것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요태희가 침음을 흘렸다.

“문을 열기 위한 장치와 진을 부숴 버리자는 거군요.”

고개를 끄덕인 화연란이 말을 이었다.

“그건 아마도 황룡성 지하에 위치해 있겠죠? 그렇다면 충분히 파괴할 수 있어요.”

분위기가 대번에 바뀌었다.

단순히 팔부혈선과 싸우려 든다면 그저 개죽음만 당할 테지만, 그들의 장치를 파괴한다면 제대로 복수하는 셈이니 말이다.

귀도신마가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죽음뿐이겠군. 분노한 혈선 놈들이 우릴 가만둘 리가 없으니.”

“왜, 무서우냐?”

“그럴 리가 있겠느냐, 칼도둑놈아? 이 몸은 지금 흥분이 되어 미치겠다.”

“다리가 바들바들 떨리는데.”

“……젠장. 그래, 죽을 거라 생각하니 두려워 죽겠다.”

귀도신마는 진백란을 돌아봤다.

“아가씨는 남은 동도들을 규합하여 귀암산으로 돌아가십시오. 지금부터의 천마신교는 아가씨께서 이끄셔야 합니다.”

“귀도…….”

“함께 가겠다고 말씀하진 마십시오. 아가씨에겐 막중한 임무가 있습니다.”

귀도신마는 담백하게 웃었다.

“우리 같은 노땅들은 이제 물러날 때가 됐지요.”

“귀도…….”

진백란은 그를 설득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때문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를 심란하게만 할 터였다.

“그럼 정해졌군.”

정천의 시선이 모두를 훑었다.

“개자식들에게 한 방 먹여 줍시다.”

* * *

같은 시각.

혈선들은 유리구슬 너머로 황룡성의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

살아남은 이들은 황룡성 바깥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를 주도하는 사람은 전대 맹주 남궁운이 이끄는 남궁세가와 제갈세가, 모용세가였다.

마라혈천은 전멸한 직후.

그들의 목숨이 소중한 동력으로 치환되었지만, 부릴 수족이 사라졌다는 것은 못내 아쉬웠다.

“할 수 없군. 지금부터는 우리가 직접 나서는 수밖에.”

한 혈선이 안타까운 듯 중얼거렸다.

“우리가 키워 낸 이들을 스스로 죽여야 한다는 게 영 찝찝하군.”

가족이나 동족에 대한 동정심이 아니었다. 닭장이나 우리 등에 가둬 놓고 기르던 애완동물을 죽여야 한다는 수준의 아쉬움이었다.

애초에 그들이 바라보는 중원인이란 고작 그런 존재였던 것이다.

그들이 처음 중원에 도착했을 때에 중원인들은 고작 야만인에 불과했다. 인격체라기보다는 한없이 동물에 가까운 존재들.

청동 무기나 겨우 다루던 그들에게 강철의 제련법을 제공한 것도 그들이었고, 맹수의 먹잇감에 지나지 않던 그들에게 무공이란 이름으로 전투법을 퍼트린 것도 그들이었다.

물론 그 모든 것은 철저히 역사의 배후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유희에 불과했다.

애초에 중원인이란 그들에게 있어 장난감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수천, 수만을 죽여 가면서까지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것이었고.

물론 개중엔 예외도 있었다.

그들을 배신하고 중원인 측에 붙은 요태희 같은 이들이 그러했다.

물론 그 모든 것도 이제는 끝을 앞에 두고 있었다.

대표 격의 혈선이 동료들을 돌아봤다.

“누가 가겠나?”

“내가 가지.”

머리가 반쯤 벗겨진 혈선이 나섰다.

그때 항아리 쪽을 응시하던 혈선이 입을 떼었다.

“그럴 필요는 없겠군.”

“음?”

혈선의 입가가 미소를 그렸다.

“동력이 모두 모였네.”

“오오!”

“그렇다는 것은……!”

“그렇네. 이제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어.”

환호성이 혈선들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그중 몇몇은 기쁨의 눈물까지 흘릴 정도였다.

“마침내…… 마침내 돌아갈 수 있게 됐군.”

“정말 긴 시간이었어.”

“그래. 참으로 길고도 긴 시간이었지.”

대표 격의 혈선이 선언하듯 말했다.

“우리의 염원이 마침내 종지부를 찍게 되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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