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五章 강룡천마갑 (88/146)

第五章 강룡천마갑

흑천살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끝이군.”

그의 앞엔 하나의 시체와 시체가 되기 직전의 사람 하나가 있었다.

전자는 윤하월이요 후자는 천마였다.

천마는 검왕이 그랬던 것처럼 수십 년은 늙은 듯한 모습이었다. 이미 쓰러진 윤하월 역시 마찬가지였다.

흑천살과 마라혈천 역시 온전하지는 않았다.

완전히 목숨이 끊긴 혈천만 스무 명. 중상을 입은 이들도 서른 명은 족히 되었고, 그중 열 명은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웠다.

그러나 치료를 할 여유는 없었다. 죽음을 앞두었음에도 천마는 맹수처럼 날뛰고 있었다.

“타아아앗!”

피 끓는 기합성과 함께 무한천강이 뿜어져 나왔다. 흑색 검기는 헐떡이던 마라혈천의 목을 휘감고는 그대로 끊어 버렸다.

푸욱.

그사이 반대편에서 달려든 마라혈천의 칼날이 천마의 복부 깊이 박혔다.

“끄으으……!”

천마는 고통에 겨워 신음하면서도 마라혈천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죽기 직전의 노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악력. 삽시간에 마라혈천의 목이 옥죄어졌다.

“크윽……!”

마라혈천은 당황하여 천마의 손목을 자르려 했다. 그러나 천마는 그럴 여유를 주지 않고서 마라혈천의 배에 검강을 꽂았다.

“네놈도 맛 좀 봐라.”

“끄아아악!”

마라혈천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다른 혈천들은 경악한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흑천살 역시 내심 동요하고 있었다.

‘우리는 저 사내를 두려워하고 있다.’

거의 세뇌에 가까운 정신 교육을 받은 그들이었다. 어릴 적부터 혈선들에 의해 싸움만을 위한 기계로 훈련받은 그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한 사내를 상대하면서 깨치고 있었다.

오랫동안 자신들이 잊고 있던 인간성, 그리고 사라졌으리라 생각했던 공포를.

천마는 정녕 중원 최강의 무인이었다.

파앗!

시체가 된 혈천을 던져 버린 천마가 광소를 터트렸다.

“간지럽구나! 좀 더 기개가 있는 놈은 없느냐!”

꺼지기 직전의 불꽃이 더욱 밝게 빛난다던가? 지금의 천마가 바로 그러했다.

흑천살은 최대한 냉정을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머릿속으로 자꾸만 불안감이 생겨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비교적 멀쩡하던 초반보다도 죽기 직전이 된 지금이 더욱 강하다. 혼령연소의 힘을 빌렸다고는 하나 이 정도일 줄이야.’

다른 이였다면 이미 혼령을 다 불사르고 쓰러졌어야 정상이다. 그런데도 어찌 저렇게 서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놈은 괴물인가?’

무의미한 의문이었다. 이미 답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전대미문의 괴물.

그것이 바로 천마였다.

흑천살이 입술을 잘근 깨물고 있을 때였다. 다른 마라혈천들이 더 덤벼들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뭐 하는 건가? 놈은 지쳤다. 지금 더욱 거세게 몰아붙여야 한다.”

흑천살의 재촉에도 혈천들은 머뭇거렸다.

“뭐 하는 거냐!”

흑천살이 다그치자 혈천 중 하나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천마는 이미 지쳐 있다. 지금은 무리해서 덤비는 게 아니라 시간을 끄는 게 옳지 않을까?”

“혼령연소도 슬슬 끝을 보이고 있을 거다.”

다른 혈천도 거드니 대다수의 혈천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흑천살은 답답해져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다 놈을 놓치기라도 하면? 소모한 수명을 회복하는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이미 많은 동지들이 목숨을 잃었다. 만일 놈을 놓친다면 다음번엔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

“무얼 두려워하는 건가? 아무리 강해도 결국은 한 명의 인간일 뿐이다. 놈에게도 한계는 있어!”

“그럼 네가 싸우지 그래?”

어느 혈천의 반문에 흑천살이 입을 다물었다.

그는 혈천들이 불신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예전이라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천마에 대한 공포로 인해 숨어 있던 인간성이 깨어난 것인가?’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이다. 자신과 남, 두 생명의 무게에 경중을 매기라 하면 대부분 자신을 중히 여기게 마련이다.

마라혈천에겐 그런 게 통용되지 않았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팔부혈선의 명령을 최우선으로 택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러나 천마의 압도적인 힘은 그들의 인간성을 일깨웠고, 하나의 의문을 던져 주었다.

‘어째서 흑천살은 싸우지 않지?’

‘왜 놈만 혼자서 편하게 우리를 부려먹는 거지?’

한 번 피어난 의문은 눈덩이처럼 불려졌다. 이윽고 그들은 흑천살에게 적의까지 품게 되었다.

‘싸우고 싶으면 네가 싸우란 말이다!’

‘혼자 편하게 있으니 우리의 고충을 모르지!’

혈천들의 눈초리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흑천살은 이를 악물었다.

“보면 모르나. 나는 이미 한 팔을 잃었다. 이런 상태로 천마에 대적해 봐야 방해만 될 뿐이다.”

“핑계 대지 마라. 그렇더라도 싸우는 모습을 보이란 말이다.”

“그래! 우리는 이미 많은 피를 흘렸다. 네놈 혼자 편하게 우릴 부려먹을 순 없어!”

“이런 병신들…….”

흑천살은 욕설을 중얼거리면서도 천마에게로 걸어 나갔다. 이 마당에 공연히 몸을 빼려 했다간 동료들에게 죽게 될 것 같았다.

그가 걸어 나오는 것을 본 천마가 씩 웃었다.

“아직 본좌도 녹슬진 않았군.”

“무슨 소리지?”

“오랜만에 써 본 마안이 이렇게까지 효과를 발휘할 줄은 몰랐거든.”

순간 흑천살의 얼굴이 굳었다. 마안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그래. 네 동료들의 성질을 약간 자극해 주었지. 뭐, 평소 생각하던 것을 더 강하게 만들어 준 수준이지만.”

함정에 빠졌다. 흑천살은 그 사실을 깨닫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싸우는 사이사이 마안을 펼쳐 동료들의 감정을 자극한 것인가?’

천마의 마안은 사람을 조종한다.

그러나 이는 약자에게나 해당되는 것. 마라혈천쯤 되는 강자들에겐 먹혀들지 않는다.

하지만 지니고 있는 감정 자체를 증폭시킬 수는 있다. 예컨대 흑천살에 대한 열등감과 박탈감 같은 것을 말이다.

천마는 싸우는 내내 그것을 시도했고, 공포로 인해 마음이 열린 마라혈천들에게 먹혀들었다.

‘하지만 왜?’

그래 봐야 결국은 이 정도가 끝이다. 흑천살을 앞에 내세우게 하는 수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인가?’

흑천살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표정을 읽은 것인지 천마가 씩 웃었다.

“끝이 다가왔지.”

“……?”

“본좌의 생각으로는 이제 기껏해야 한둘을 해치우는 정도일 거야. 그렇다면 가장 효과가 있는 녀석을 해치우는 게 좋을 테지.”

흑천살은 모든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를 죽이기 위해 수를 썼다?”

“머리를 잃으면 놈들의 전력이 반감될 테니까.”

“영광이군. 천하의 천마가 몸소 죽이겠다고 지정할 정도라니.”

“그렇지? 죽고 나서도 영광으로 알거라.”

흑천살은 하나뿐인 팔로 검을 쥐었다. 피식 웃은 천마가 무한천강이 씌워진 나찰수라를 내뻗었다.

“타앗!”

“하앗!”

두 사람의 몸이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어떠한 잔재주도 포함되지 않은 순수한 검격이었다.

파악!

흑천살의 목이 하늘로 치솟았다. 그 순간 천마도 기어코 나찰수라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놓았다.

마라혈천들은 뒤늦게 자신들의 실수를 깨달았다. 모든 것이 천마의 수작이었다는 것도.

“놈!”

“죽어라, 천마!”

푸푸푸푹!

무방비가 된 천마의 몸에 갖가지 병장기가 꽂혔다. 혼령연소마저 끝을 고한 지금으로선 즉사에 가까운 타격이었다.

“후우.”

천마는 나직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먹구름에 휩싸인 하늘의 모습이 서서히 흐려지고 있었다.

“여기가 끝이군.”

천마는 남은 내력을 끌어모아 왼손에 집중시켰다. 희미한 빛이 실린 왼손을 복부에 가져다 대었다.

항시 죽음을 생각해 왔던 그였다. 나찰수라를 손에 쥔 이후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 왔다.

이런 식으로 죽게 될 수 있다는 것도.

때문에 그에 대한 나름의 대비 역시 해 놓았다.

“본좌쯤 되는 인물은 역시 이렇게 사라지는 게 가장 화려하지 않겠나?”

천마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그 의미를 이해 못한 혈천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쿠구구구.

천마의 몸속에서 무언가가 번뜩인다는 것을 깨닫고는 사색이 되었다.

“피해라!”

어느 혈천의 외침과 함께, 천마의 체내에 내장된 폭천고(爆天蠱)가 발동했다.

파앗!

* * *

콰과과과광!

어마어마한 폭발!

여파는 정천이 있던 위치에까지 날아들었다. 나무들이 세차게 흔들리고 땅이 얕게 경련했다.

“무슨……?”

백미련의 물음에 괴룡염마가 클클거리며 웃었다.

“폭천고가 발동한 모양이군.”

“폭천고?”

“천마가 자기 몸속에 심어 놓은 고독이다. 그의 기운 중 일부를 조금씩 삼키고 있다가, 특정한 조건에 의해 모두 폭발시켜 버리는 녀석이지.”

“…….”

모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괴룡염마는 웃는 낯으로 구태여 재확인시켜 주었다.

“저게 폭발했다는 건 천마가 죽었다는 의미다. 폭천고를 발동할 수 있는 사람은 천마 본인뿐이니까.”

“닥쳐!”

진백란의 주먹이 괴룡염마의 입에 꽂혔다. 괴룡염마는 고통에 겨워 쿨럭거렸다.

“커억, 끄으으. 암만 그래도 사실은 사실이다.”

“닥쳐! 닥치라고!”

발악하듯 소리치는 진백란을 귀도신마와 마의가 진정시켰다.

정천은 착잡한 눈으로 폭발이 일어난 방향을 돌아보았다. 천마다운 최후라고도 볼 수 있었지만, 씁쓸한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괴룡염마는 이제 다 포기한 듯한 모습이었다.

“어쨌든 노부가 아는 것은 다 얘기했다.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해라.”

“그러지.”

짤막히 대꾸한 정천은 죽일 가치도 없다는 듯 일어섰다.

그는 모두를 돌아본 다음 짤막히 말했다.

“아무래도 황룡성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염마의 말대로라면 이미 마교 본대도 그쪽으로 향한 것 같습니다.”

“최악의 경우엔 이미 전쟁이 벌어졌을지 모르겠군.”

“십중팔구 벌어졌을 거야.”

장유추의 말에 백미련이 한마디 했다. 장유추는 이맛살을 찌푸리면서도 반박하지 못했다.

“문도들이 괜찮을지 걱정이에요.”

화연란의 표정은 그 누구보다 어두웠다. 만약 괴룡염마의 말대로라면, 화륜문 식구들은 살진에 당했을 가능성이 컸다.

정천은 진백란을 돌아봤다.

“여하간 이런 연유로 황룡성으로 향하려 하는데, 너희들은 어쩔 거지?”

“우리도 함께 가겠어. 전쟁을 막을 사람이 있다면 그건 우리뿐이니까.”

진백란의 대답에 정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그것’을 알아서 처리하고 따라와.”

정천이 말한 그것이란 물론 괴룡염마였다.

진백란은 증오심 어린 눈으로 괴룡염마를 노려봤다. 하지만 차마 혈륜검을 빼 들지는 못했다.

“저런 쓰레기, 죽일 가치도 없어.”

그녀는 괴룡염마를 무시한 채 정천의 뒤를 따랐다. 마의와 귀도신마 역시 그녀를 따라 걸음을 떼었다.

괴룡염마의 표정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하! 좋을 대로 떠들어라! 너희들이 암만 경멸한대도 상관없다. 이미 천무맹은 끝났어! 마교 역시 노부와 운규백마의 손에 떨어진 거나 마찬가지다! 천마가 죽은 지금 너희에게 희망은 없어!”

“뭘 모르는군.”

익숙한 목소리에 괴룡염마는 움찔했다.

어느새 되돌아온 귀도신마가 끌끌 혀를 차고 있었다.

“뭐, 뭘 모른다는 거냐.”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다면, 이미 운규백마는 너를 배신했을 거다.”

“닥쳐라! 그딴 말로 노부를 현혹하려 하는가?”

“쯧쯧. 화내기 전에 생각이나 해 보시지. 왜 하필 그가 네게 천마를 죽이라고 했을까? 이제 와서 천마를 누가 죽이든 별 의미가 없을 텐데.”

“의미가 없다니! 다른 누구도 아닌 천마를 죽이는 일이다!”

“그러니까 생각을 해 보라고. 속알맹이야 어떻든 너희는 일단 천마의 복수를 위해 마교를 이끄는 거잖아?”

“그, 그건!”

괴룡염마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귀도신마의 말대로, 그런 상황에선 천마를 죽인 범인은 도리어 감춰져야 하는 것이다.

귀도신마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괴룡염마를 내려다보았다.

“앞뒤 생각도 안 하고 그저 신이 나서 일을 받아들였겠지.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천마에게 열등감을 느껴 왔을 테니까.”

“노, 노부는…….”

“넌 그냥 이용당하다가 버려진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괴룡염마.”

스르릉.

귀령도가 스산한 소리를 내며 뽑혀 나왔다.

“그리고 이 몸은 그런 멍청이의 숨통까지 끊어 줄 정도로 친절하고 마음이 넓지.”

“아, 안 돼! 귀도신마, 노부는 아직 죽을 수 없다!”

“늦었어.”

파악!

괴룡염마의 머리가 하늘로 치솟았다. 귀도신마는 머리 잃은 염마의 몸을 발로 툭 차 넘어트리고는 한마디를 뱉었다.

“천마께서 나락에서 기다리고 계실 거다.”

* * *

정천은 일행의 선두에서 내달리고 있었다. 진백란이 깨어났으니 대신 화연란을 등에 업은 채였다.

“화륜문은 괜찮을까요, 오라버니?”

“그래.”

정천의 대답엔 흔들림이 없었다. 그 대답에 화연란은 비로소 안도했다.

그가 거짓말로 남을 안심시키는 성격이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뭔가 수를 쓰신 건가요?”

“진마동에 있을 적에 진법에 대해 약간 배웠었거든. 혹시나 이런 일이 있을까 싶어 화륜문 장원에도 펼쳐 놓았지.”

“그 진법이 제대로 효과를 냈을까요?”

“살진이 화륜문만을 노렸다면 어려웠겠지만, 황룡성 전체를 아우를 정도라면 그렇게까지 강력한 수준은 아닐 거야.”

화연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화륜문에 대해 안도하게 되니 자연히 다른 쪽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황룡성 전체가.

“천무맹은 이제 끝난 걸까요?”

“…….”

이번에는 정천도 대답하지 못했다. 쉽게 부정할 수 없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까지 강력하진 않을 거라 했지만, 무려 수십 년에 걸쳐 펼쳐진 살진이었다. 그 위력은 어지간한 무인들을 몰살시키기에 충분했으리라.

게다가 남은 이들은 마교의 본대와 맞닥뜨리게 된 실정.

어쩌면 오늘이야말로 천무맹의 마지막 날이 될지도 몰랐다.

“정천, 느끼고 있나! 놈들이 우리와 가까이 있어.”

바로 옆까지 다가온 장유추가 소리쳤다.

힐끔 시선을 돌린 정천이 차분히 대답했다.

“마라혈천이군요. 대략 육십 명 정도 남은 것 같습니다. 천마는 정말 엄청난 일을 해냈군요.”

“감탄할 때가 아닐세! 놈들과 우리 사이의 거리는 오 리가 채 되지 않아!”

이 정도 거리라면 언제든 습격 가능한 수준. 그러나 정천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놈들은 덤벼들지 않을 겁니다.”

“어째서 그런가?”

“황룡성 쪽이 우선이니까요. 게다가…….”

익숙한 기운은 모두 사라졌다. 흑천살이 저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으리란 소리다.

머리를 잃고 상처까지 입은 무리.

그렇기에 함부로 덤벼들진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우선적으로 팔부혈선의 명령을 따르려 할 터.

그리고 괴룡염마의 말대로라면, 팔부혈선의 우선 목표는 무인들의 몰살이었다.

천무맹은 물론 마교까지.

위협적이지만 소수인 정천 일행을 무시할 정도의 이유로는 충분했다.

“우리도 좀 더 속도를 올리죠. 저들보다는 먼저 황룡성에 도착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도 최대한의 속도를 내고 있는 걸세.”

장유추의 말대로였다. 아무래도 다들 크고 작은 부상을 입고 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온전한 사람은 정천과 마의, 화연란과 백미련 정도. 그중에서도 제대로 싸울 수 있는 건 정천과 백미련뿐이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해야겠습니다.”

“반대로 생각하다니?”

정천은 대답 대신 화연란을 장유추에게 넘겼다.

“놈들의 속도를 줄여야죠.”

말을 마친 정천이 곧장 마라혈천 쪽으로 내달렸다.

“오라버니!”

화연란이 소리쳤지만 정천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도 더 말리지는 못하고 그저 정천의 무사를 빌 수밖에 없었다.

백미련이 곧장 정천을 따랐다. 그것을 본 진백란도 대열에서 이탈했다.

“나도 가겠어.”

“아가씨! 아가씨는 남으셔야 합니다!”

“하지만 마의!”

“천마께서 계시지 않은 지금, 폭주한 동도들을 진정시킬 수 있는 사람은 아가씨뿐이십니다!”

분하지만 옳은 말이었다. 진백란은 할 수 없이 분노를 삭였다.

“알겠어. 지금은 내 복수보다도 마교의 안위가 중요하겠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어느새 뒤쫓아 온 귀도신마의 말이었다.

“그러니 제가 아가씨 대신 다녀오지요.”

“귀도?”

“걱정 마십시오. 저는 정천 저 친구 뒤에서 적당히만 싸울 테니까요.”

귀도신마는 그 말을 끝으로 곧장 정천을 따랐다.

그것을 확인한 장유추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저놈은 하여간 재미있는 곳엔 꼭 빠지질 않는군.”

백미련과 귀도신마는 정천의 좌우에서 달렸다. 그들을 힐끔 돌아본 정천이 나직이 말했다.

“자기 목숨은 알아서들 건사하도록.”

“알고 있어.”

“걱정 말게나!”

온전한 백미련보다도 한 팔을 잃은 귀도신마가 더 신명이 났다.

더군다나 아직 상처가 채 아물지 않아 감아 놓은 붕대가 붉게 물들어 있는데도 말이다.

정천도 그걸 알고 있었지만 딱히 뭐라 하진 않았다.

얼마 달리지도 않아 마라혈천들이 나타났다. 정확히는 대열의 허리 부분이었다.

그들도 정천의 접근을 알고 있었기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왔는가!”

혈천들 사이에서 익숙한 얼굴이 튀어나왔다. 피범벅이 되어 있는 살마괴였다.

다른 마라혈천들도 백미련을 발견하고는 이를 갈았다.

“배신자!”

“죽여 버리겠다!”

세뇌에 가까운 충성심을 지닌 그들이었다. 때문에 그 무엇보다도 배신자에 대한 증오심이 가장 컸다.

“멍청이들.”

차갑게 내뱉은 백미련의 머리칼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구절검이 펼쳐지며 사방으로 살기를 흩뿌렸다.

“이 몸도 있다는 걸 잊지 마라!”

귀도신마의 귀령도가 번뜩였다. 시커먼 기운이 뿜어져 나와 혈천들에게로 짓쳐 들었다.

카카카캉!

파밧!

두 사람의 공세로 인해 혈천의 대열에 중도에 끊어졌다. 갈라진 무리 중 앞쪽의 절반은 그대로 내달렸고, 뒤쪽의 절반은 세 사람을 공격해 들어갔다.

“제법 머리를 쓰는군. 그게 아니면 그저 맹목적으로 움직이는 건가?”

나직이 중얼거린 정천이 강룡검을 구현했다. 그러고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

“이쪽은 내가 맡지. 두 사람은 앞서 간 놈들을 방해하여 속도를 늦춰 줘.”

“무슨 소릴 하는 거지? 아무리 그대라도 혼자 이들 모두를 맡을 순 없어.”

“나 역시 동감일세.”

두 사람의 반발을 무시한 채 정천이 말을 이었다.

“먼저 간 놈들과 이놈들은 상황이 달라. 아마 암묵적으로 정해 놓았겠지. 앞쪽은 무슨 일이 있어도 황룡성에 도착하는 게 우선, 이놈들은 우리를 해치우는 게 우선. 그러니 앞쪽 놈들을 조금 방해한다고 해도 죽자고 덤벼들진 않을 거야.”

“본후에게 지금 명령하는 거야?”

“그래.”

흔들림 없는 대답에 백미련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그녀가 뭐라 하기 전에 정천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부탁하는 것이기도 해.”

“…….”

“이쪽은 내게 맡겨. 지금은 이게 최선이야.”

“하지만…….”

“나는 천마처럼 혼자 죽지는 않을 거야.”

백미련은 결국 고집을 꺾었다. 아무래도 그녀보다는 정천의 고집이 더욱 셌던 것이다.

“이번엔 본후가 져 주지.”

그 말을 남긴 채 백미련이 몸을 날렸다.

귀도신마는 과장되게 한숨을 토했다.

“재미 좀 보나 싶었는데 이러긴가?”

“여기보단 저쪽이 더 재미있을 겁니다.”

“글쎄. 이 몸과 자네가 힘을 합쳐 한판 싸우는 게 더 재미있을 거라 생각하네만.”

정천은 피식 웃었다.

“부상당한 채로는 방해만 됩니다.”

“……신랄하구먼. 그래도 죽을 자리를 뺏는 건 조금 비겁한 건 아닌가?”

귀도신마는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급히 정천을 따라온 것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죽음으로써 앞으로 다가올 더 큰 싸움을 회피하려는 겁니까?”

“그럴 생각은 없네. 이 몸이 그렇게 비겁할 거라 생각하나?”

“그럼 가십시오. 이곳은 제게 맡기시고.”

귀도신마도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나중에 보세.”

“예.”

평범하기 그지없는 인사를 끝으로 귀도신마가 달려 나갔다. 정천은 그제야 마라혈천 쪽을 돌아봤다.

살마괴가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얘기는 다 끝나셨나?”

“그래. 친절하기도 하군. 얘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다니.”

“네놈의 발을 묶어 둘 수 있으면 될 일이니까.”

정천은 남은 마라혈천들을 훑어봤다. 하나같이 중상을 입은 이들이었다. 그런 만큼 차라리 정천을 묶어 두자는 것일 터.

“발을 묶는 건 도리어 너희 쪽이란 거군.”

“그래. 그렇다고 해도 우리로선 발을 묶는 것을 넘어 네놈을 해치울 생각이지만.”

“할 수 있을까?”

파바바밧.

강룡검의 기운이 정천의 몸을 감쌌다.

단순히 검형만을 이루던 이전까지와는 조금 다른 형태의 방식이었다.

몇 차례의 명상, 그리고 천마의 전투 장면은 정천 앞에 놓여 있던 벽에 균열을 냈다. 그 결과 정천은 앞으로 나아갈 실마리를 얻었다.

아직까진 그저 자그마한 균열일 뿐.

그러나 그 균열을 더 넓혀, 마침내 벽을 깨게 된다면 강룡수라마공도 새로운 영역에 들어설 수 있으리라.

‘천마만이 들어섰던 영역에…….’

정천은 머릿속으로 천마의 전투 장면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그가 내력을 다루는 방식, 그가 검강을 뽑아내는 방식, 그 외의 자그마한 움직임까지 생생히 기억하고 떠올렸다.

살마괴는 내심 정천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대체 뭐지?’

알 수 없는 불안감.

그것이 살마괴의 가슴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에잇! 괜한 불안일 뿐이다!’

살마괴가 애써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죽어라!”

다른 마라혈천들이 정천에게 달려들었다. 내면의 불안을 이기지 못해 성급해진 것이다.

정천이 눈을 떴다.

강룡검은 마치 그림자로 이루어진 갑주처럼 그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검이라고 부르기조차 힘든 형상.

양팔 끝에서 튀어나온 두 자루의 칼날은 분명 천마의 무한천강을 닮아 있었다.

정천이 개척한 새로운 영역.

강룡천마갑(剛龍天魔鉀)의 모습이었다.

피피핏!

혈천들이 내뿜은 각종 강기가 정천에게로 쏘아졌다. 정천은 피하지 않고 강기를 향해 몸을 날렸다.

콰과과광!

강기들은 마갑을 꿰뚫지 못하고 폭발했다. 그사이 혈천들에게 접근한 정천은 두 자루의 검을 빠르게 교차하여 휘둘렀다.

파바바밧!

“크으윽!”

“으윽!”

검격이 번뜩일 때마다 혈천들의 몸에서 피가 튀었다. 기기묘묘한 절초라고는 할 수 없는, 지극히 정론적인 검법 초식.

그러나 그 검이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데다 빠르기까지 하다면 얘기가 달랐다.

지켜보는 살마괴의 얼굴이 거멓게 죽었다.

그제야 강룡천마갑의 무서움을 실감한 것이다.

세상에 무적이란 없다. 그러나 무적에 가장 가까운 게 있다면 지금의 정천이리라.

그들이 천마를 쓰러트릴 수 있었던 건 천마 역시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떨어지는 물방울이 기어코 바위를 꿰뚫듯, 조금씩 상처를 내고 내공을 소모시켰기에 해치울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정천은 조금 다르다.

온몸을 무한천강급 강기로 휘감아 방어하고 있으니 상처를 입히긴 힘들다.

더불어 내뻗는 검격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초고수의 절초급이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내공을 전부 발휘하고 있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방법이 있다면 하나뿐.

놈의 강기를 능가하는 힘으로 본체에 타격을 주는 것뿐이다.

그러나 정천의 내력은 천마 이상.

상처 입고 지친 혈천들로선 대적하기 힘들었다.

그 사실을 실감했는지 혈천들도 공격은 뒷전, 그저 방어와 회피에만 급급했다.

“피하기만 해선 이길 수 없다! 기운을 한데 몰아 놈의 강기를 뚫어 버려야 해!”

“그걸 누가 모르나! 하지만 놈이 그럴 틈을 주지 않잖나!”

살마괴는 이를 악물었다.

‘팔부혈선은 실수했다. 흑천살도, 우리도 마찬가지로 실수했다.’

그의 눈에서 벌건 핏발이 섰다.

‘천마보다도 먼저 이놈을 해치웠어야 했다!’

천마가 죽음으로써, 우습게도 그에 필적하는 괴물이 탄생하고 말았다. 팔부혈선은 물론 그 누구조차 생각 못한 변수였다.

그리고 그 변수를 탄생시킨 것은 팔부혈선 자신들.

‘용검대가 진마동으로 향하지만 않았어도, 놈이 그곳에서 살아 돌아오지만 않았어도!’

살마괴는 내심 분통을 터트렸다. 그 순간 정천이 그의 바로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제기랄.”

나직한 한마디와 함께 살마괴의 머리가 하늘로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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