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四章 전쟁
그 시각.
마교의 본대는 황룡성을 향해 진군 중이었다.
배신자들이 조작한 내용은 간단했다.
정파인들이 비무대전에 대병력을 몰고 왔으며, 그로 인한 전투에서 천마와 마교의 대표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었다.
증거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미리 뿌려 놓은 선동꾼들에 의해 소문은 삽시간에 진실로 돌변했다.
몇몇은 의심을 품었으나 철절삼마인 괴룡염마와 운규백마가 선동을 하니 어쩔 수 없이 따랐다.
그리하여 남게 된 것은 천마를 잃어 분노한 무인들.
그들을 몰고 황룡성을 유린하는 것. 이것이 팔부혈선이 배신자들에게 명령한 내용이었다.
혈선들은 약속했다. 이를 제대로 이행한다면 중원 전체를 넘겨주겠노라고. 자신들은 원하는 것만 얻고 떠나면 그만이라고.
운규백마는 그 말을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제안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았다.
‘일단은 혈선의 말을 따른다. 일단은…….’
모든 것은 십여 년 전. 중마산(重馬山)에서 시작되었다.
마교와 천무맹의 밀회.
참석한 이는 당시 맹주 남궁운과 마교의 철절삼마뿐이었다. 세간에 알려진 바로는.
그러나 실제로 그 자리엔 몇 명의 인물들이 더 있었다. 남궁운 말고도 철절삼마가 대면했던 정파의 인물들이.
아니, 그들을 정파의 인물이라 할 순 없으리라.
그들은 바로 팔부혈선이었으니까.
팔부혈선은 남궁운조차 모르게 은밀히 중마산을 찾았다. 그리고 철절삼마의 앞에만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엔 반신반의했던 철절삼마였으나, 그들이 본연의 무위를 펼쳤을 땐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자들이야말로 천무맹의 주인이란 것을. 그리고 이들 개개인은 천마에 필적하는 무위를 지녔다는 것을.
그 자리에서 팔부혈선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철절삼마는 그 제안을 거부했지만, 혈선들은 크게 개의치 않는 듯했다.
‘너희는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게 팔부혈선의 말이었고, 철절삼마는 오랫동안 그 말을 잊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전.
스스로를 흑천살이라 밝힌 이가 나타났다.
‘약속을 이행할 때가 되었소.’
흑천살의 말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운규백마와 괴룡염마에게 있어선 수백 마디의 말보다도 확실한 설명이 되었다.
두 사람은 은밀히 회동했다. 흑천살이 멸살독마에겐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어째서?
이유는 간단했다.
멸살독마의 충성심은 팔부혈선에 대한 공포를 이겨 낼 정도였으니까.
다시 말해 나머지 두 사람의 충성심은 얕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흑천살은, 아니 팔부혈선은 그것마저 꿰뚫어 보고 있었다는 말인가?’
더 놀라운 것은 그 예상이 사실이란 것이었다. 운규백마와 괴룡염마는 항상 천마를 누르고 마교를 지배하길 바랐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운규백마와 괴룡염마는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길은 하나뿐.
‘마교를 나의 것으로!’
운규백마는 속으로 되뇌었다.
현재 마교 본대는 그의 수중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천마도 없고 괴룡염마와 멸살독마도 없는 이상, 최고 권위는 운규백마에게 있었으니까.
‘멍청한 염마는 지금쯤 천마가 있는 곳으로 갔겠지.’
천마를 직접 제거하고 오라며 염마를 부추겼던 운규백마였다.
암만 천마라 해도 지금쯤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을 거라고, 마라혈천에게 당할 대로 당한 그의 숨통만 끊어 주면 된다고.
그리하면 마교는 너의 것이 되리라고.
욕심 많은 괴룡염마는 희색이 되어 천마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놈의 최후가 될 터였다.
‘상처 입은 야수야말로 가장 위험하니 말이야.’
천마가 만신창이가 된 것은 사실이리라.
그러나 그렇다고 염마 정도가 해치울 수 있을 수준은 아니었다. 누가 뭐래도 천마는 중원 최강의 무인이니 말이다.
‘팔부혈선이라 해도 일대일로 싸운다면 천마를 압도할 순 없겠지.’
그러나 그들은 무려 여덟 명. 암만 계산이 느리다 해도 어느 쪽이 강자인지는 뻔했다.
‘나는 최강자가 아니어도 좋다. 용이 쓰러지고 호랑이가 떠난 산을 홀로 지배하는 여우가 되어도 좋다.’
강해야만 군주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운규백마는 너덜너덜해진 마교와 정파를 지배하게 된대도 좋았다.
운규백마가 생각을 잇고 있을 때, 또 한 명의 마교십존이자 배신자 무리의 한 명인 구천궁마(九千弓魔)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백마, 황룡성이 보입니다.”
“음.”
마교 본대는 어느새 황룡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황룡성의 전경 위로는 시커먼 먹구름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내부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것은 희미한 혈향.
혈선들이 말했던 살진이 펼쳐진 것이리라.
심상찮은 분위기를 직감한 구천궁마가 중얼거렸다.
“팔부혈선의 단언대로 되었군요. 냄새를 보아하니 한둘이 죽은 게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럴 테지. 우리도 예상했던 일이 아닌가?”
“무서운 자들이로군요, 정말.”
운규백마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곧 사라지게 될 이들이기도 하지.”
“그들의 말이 사실일까요? 자신들은 곧 중원을 떠날 거라는 말이?”
“혈선들을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
“솔직히 백마께서도 그렇잖습니까?”
운규백마는 피식 웃었다. 구천궁마의 말마따나 그는 팔부혈선을 신용하지 않았다.
“그렇다네.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할 머리 역시 가지고 있지. 그들이 우리를 함정에 빠트려 해치울 생각이었다면, 이건 너무 난잡하고 군더더기가 많은 방법이 아니겠나?”
“으음.”
“차라리 자신들의 압도적인 무위로 마교고 천무맹이고 쓸어버렸으면 될 일이네. 이런 번거로운 방식을 택할 이유가 없지.”
“그건 그렇군요.”
운규백마는 혈선에 대해 더 언급하지 않았다.
“가세. 우리는 우리가 할 일을 해야지.”
“모두 해치우는 겁니까?”
“그래. 하지만 방심하지는 말게. 지금 저곳에 남아 있는 무인들은 그야말로 정파무림의 최정예라 할 수 있을 테니.”
구천궁마의 얼굴에 사나운 미소가 걸렸다.
“그래 봐야 정파 놈들이지요.”
“크크, 그건 그렇지.”
구천궁마는 손을 들었다. 그를 따르는 궁기병대가 본대에서부터 서서히 떨어졌다.
“몰아치는 파도처럼 죄다 쓸어버리자!”
호기롭게 소리친 구천궁마가 가장 앞에서 말을 달렸다. 그 뒤를 따라 물경 오백의 궁기병대가 땅을 박차며 돌진했다.
백호문은 굳건히 닫혀 있었다. 그러나 그곳을 지키는 문지기들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살진의 영향으로 죄다 죽었던 까닭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수천 근의 강철문.
쉽게 뚫고 나갈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이럇!”
그럼에도 구천궁마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그건 그를 따르는 궁기병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두두두!
땅을 부술 기세로 내달리는 철마들. 그 최전방에서 구천궁마는 애병인 구두궁(九頭弓)에 시위를 얹었다.
츠츠츠츠.
붉은빛이 구두궁의 화살 끝에서부터 뿜어져 나왔다. 그것을 신호로 오백 궁기병대가 동시에 시위를 메겼다.
“꿰뚫는다!”
타앙!
붉은 구렁이가 땅을 헤치듯 화살이 시위를 떠났다. 붉은 강기를 머금은 화살을 따라 궁기병대의 화살들이 하늘을 날았다.
파바바밧!
오백 발의 화살이 백호문에 꽂혔다. 완벽한 순도의 강철을 뚫고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구천궁마가 꽂아 넣은 화살은 여전히 붉은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격발(激發)!”
구천궁마의 외침에 반응하듯 붉은 화살이 순간적으로 엄청난 빛을 뿜었다. 이윽고 화살이 꽂혔던 자리를 중심으로 철문이 녹아내렸다.
“재장전! 발사!”
파바바밧!
이차로 화살의 비가 백호문을 두들겼다. 강철문이 화살에 의해 박살이 나는 순간이었다.
강철이 녹아내린 구멍으로 구천궁마와 궁기병대가 파고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구천궁마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음!”
문 너머엔 일련의 무인들이 대기 중이었다. 모용훈을 비롯한 모용세가의 무인들이었다.
“화려하게도 덤벼 오는군.”
모용훈의 말에 구천궁마가 큭큭 웃었다.
“우리가 올 거라 예상하고 있었느냐?”
“물론. 그리고 너희가 누구와 내통했는지도 잘 알고 있다.”
“…….”
구천궁마의 얼굴이 살짝 경직되었다가 풀렸다.
“그렇다면 살려 둘 순 없겠군. 뭐, 어차피 오늘부로 황룡성의 무인들은 씨가 마를 테지만 말이다.”
“어리석군. 혈선들이 너희를 가만히 놔둘 것 같은가?”
구천궁마는 잠시 흠칫했으나 이내 역정을 냈다.
“세 치 혀로 구워삶으려 해도 소용없다! 우리는 이미 돌이킬 수 없으니까!”
이미 천마를 배신하고 혈선에게 붙은 그들이다. 이제 와 마음을 돌린다 해도 남는 것은 마교의 분열뿐이었다.
모용훈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싸우는 수밖에 없겠군.”
“흥! 무서운 것이냐?”
“글쎄. 지금 무서워해야 할 쪽은 도리어 너희라고 보는데.”
구천궁마도 그 사실은 인정했다. 무력 차이야 압도한다 쳐도 지형적 불리함이 있기 때문이었다.
백호문에 구멍이 났다고는 해도 그리 크진 않았고, 문을 넘어온 궁기병은 열 명이 채 되지 않았다.
반면 저들은 못해도 이백은 되어 보였다. 게다가 넘어온 궁기병들을 포위하고 있는 형국.
이렇게 되면 오백 명 대 이백 명이 아니라 십여 명 대 이백 명이 된다. 과연 북쪽의 모용세가답게 머리를 썼다고 할 수 있었다.
구천궁마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제법 머리를 쓰는구나. 과연 제갈세가의 호적수인가.”
“칭찬해 줘서 고맙군. 그렇다고 봐줄 생각은 없지만 말이야.”
“건방진 놈!”
구천궁마의 이마에 핏발이 섰다.
“감히 십존의 일인이자 마교칠절 중에서도 최강의 궁술을 지닌 이 몸을 봐주겠다고 했나!”
“제법 화려한 경력이시군. 하지만 내 눈에 보이는 건 그저 배신자 늙은이일 뿐이라서 말이야.”
“그 건방진 혓바닥을 꿰어 주마!”
그 순간 모용훈이 손을 들었다. 그와 함께 뒤쪽에 있던 무인들이 활을 꺼내 들었다.
구천궁마가 다급히 소리쳤다.
“뛰어라!”
파바바밧!
수십 발의 화살이 궁기병대에 쏟아졌다. 물론 이 정도 화살에 당할 만큼 약한 그들이 아니었으나, 문제는 말이었다.
히히히힝!
쿠당탕!
애초에 모용훈은 기수가 아닌 말을 노렸고, 마갑을 착용했다고 해도 화살 모두를 막아 낼 길은 없었다.
화살에 맞은 말들이 쓰러졌다. 기수들 중 중상을 입은 이는 없었으나, 궁기병대 최대의 이점인 기동력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은 구천궁마도 마찬가지.
그의 애마인 흑교(黑蛟)는 목이 화살에 꿰인 채 죽어가고 있었다.
그 화살은 모용훈 본인이 날린 것이었다.
“네, 네놈……!”
기마병은 말을 반려자 이상으로 소중히 여긴다. 그런 말을 죽였으니 구천궁마의 분노와 증오란 실로 엄청날 터였다.
하물며 마교칠절쯤 되는 초고수라면.
살기에 노출된 모용훈은 식은땀을 흘렸다.
‘엄청나구나. 피부가 쓸려 나가는 듯한 느낌이다.’
“대단하다고 칭찬해 줘야겠구나.”
구천궁마의 말이었다.
“네놈은 근 이십여 년 동안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냈다. 이 몸을 이렇게나 분노하게 만든 것 말이다.”
“영광이로군. 몸 둘 바를 모르겠어.”
“이죽거리는 것도 지금뿐이다. 네놈은 가장 마지막에 죽여 주마. 우선은 네게 있어 가장 소중한 이들을 눈앞에서 죽이겠다. 그런 다음 발끝부터 차근차근 화살로 꿰뚫어 서서히 죽여 주마.”
“좋을 대로 떠드시지.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협박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파바바밧!
히히힝!
소음은 문 바깥에서부터 들려왔다. 구천궁마의 표정이 한층 일그러졌다.
모용훈은 통쾌한 기분을 느끼며 말했다.
“매복이 우리뿐일 거라 생각했나?”
* * *
파바바밧! 파밧!
히히히힝!
백호문 바깥은 난리도 아니었다.
문 양쪽으로 이어진 숲에 매복해 있던 무인들이 일제 사격을 날렸던 것이다.
화살은 마찬가지로 말들을 주로 노렸다. 마교 최강의 궁술을 자랑하는 궁기병대가 우습게도 활에 당하고 만 것이었다.
하필 지도자인 구천궁마가 문 너머에 있었던 만큼 제대로 반격할 수도 없었다.
궁기병대 대부분은 반각도 지나지 않아 자신들의 말을 잃고 망연자실했다.
“그대들의 업보가 되돌아온 줄 아시오!”
호기롭게 소리치는 이는 무당파의 윤평이었다. 화살을 날린 무인들은 각 문파에서 급히 차출된 젊은 무인들이었다.
‘모용 소저와 제갈 소저가 아니었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뻔했다.’
윤평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갑작스런 살진으로 인해 거의 모든 문파가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까놓고 말해 천무맹이 끝났다 싶을 정도의 피해였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몰살의 원인 자체가 묘연하다는 것.
누군가 여기에다 모함의 말 몇 마디만 흘렸다면 각 문파들은 서로를 의심하며 남은 피마저 모두 쏟아부었을 것이다.
그때 이들을 급히 규합한 사람이 모용린이었다.
그녀는 지닌 인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각 문파의 후기지수들을 끌어모았다. 이때 용봉소회의 인맥이 큰 힘을 발휘했다.
모용린은 작금의 상황을 최대한 성실히 전달했다. 이를 믿지 못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그녀는 끈기 있게 그들을 설득했다.
더불어 마교의 습격이 곧 있으리라는 것 역시 알렸다.
처음엔 반신반의하던 이들이었으나, 지금은 그녀의 선견지명에 감탄하고 감사하고 있었다.
‘우리가 천무맹을 지킬 수밖에 없다!’
윤평은 속으로 거듭 되뇌었다.
모용린의 말에 따르면 문주급 인물들은 이미 몰살당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이 팔부혈선이라는, 천무맹을 배후에서 지배해 온 실세라는 것도 알렸다.
실로 믿기 힘든 얘기였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그 말이 사실이구나 싶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대항해야 할 텐데.’
그러나 일단 급한 불은 이쪽.
최선은 싸우지 않는 것이지만 이젠 어려운 일이 됐다. 그렇다면 최대한 피해 없이 제압하는 게 우선이었다.
때문에 어울리지 않는 활까지 든 채로 급습을 택한 것이었고.
윤평은 활을 내던지고 검을 뽑아 들었다. 우선적인 목표는 달성했으니 이젠 가장 익숙한 무기로써 싸워야 할 때였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소! 천무맹에 맞설 생각일랑 버리고 돌아가시오!”
“개소리 집어치워라!”
섬전처럼 화살이 날아들었다. 윤평이 날렸던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의 빠르기였다.
타앙!
가까스로 화살을 쳐낸 윤평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빠르고 날카롭다! 이게 마교 최강의 궁기병대의 실력인가?’
후기지수 중 으뜸이라는 그조차 겨우 막아 냈을 정도. 거리가 조금만 가까웠더라도 목이 꿰뚫렸을 것이다.
‘거리를 벌려선 안 된다. 다소 피해가 있더라도 달라붙어 진흙탕 싸움으로 몰고 가야 한다!’
판단을 마친 윤평이 소리쳤다.
“돌격! 절대 저들과 거리를 벌리지 마라!”
“쏴라!”
마교 쪽에서도 누군가가 소리쳤다. 이윽고 화살과 함성이 하늘을 가득 메웠다.
“흐음.”
운규백마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전황을 관찰했다. 아무래도 서전은 천무맹 측이 약간 유리한 듯싶었다.
“제법 머리를 쓸 줄 아는 녀석이 있는 모양이군. 제갈가의 군사라는 작자인가?”
누가 됐든 알 바는 아니었다. 잔머리란 약자들이 강자에 대항하기 위해 굴리는 것이었으니까.
“지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한 명의 칠절인 풍귀마(風鬼魔)의 말이었다. 그러나 운규백마는 고개를 저었다.
“구천궁마에게 맡기세. 괜히 도우러 갔다간 방해만 될 수 있네.”
“그렇다면 다른 쪽의 문을 치고 들어갈까요?”
“멍청하게 성문을 뚫으려 애쓰는 것은 병사들의 전쟁 아니겠는가? 무인에게 있어 성벽이란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이지.”
의미심장한 운규백마의 말에 풍귀마가 씩 웃었다.
“그렇군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네가 일을 맡지 않겠나?”
“그러지요. 가볍게 한 바퀴 돌고 오겠습니다.”
숫제 산책이라도 하고 오겠다는 듯한 투였다. 운규백마는 잔혹한 미소로써 이를 허락했다.
풍귀마는 휘하의 부대인 풍살대를 이끌고 나섰다. 그 목표는 백호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성벽.
풍살대는 전투 중인 궁기병대와 정파 무인들을 무시한 채 지나쳤다.
“설마!”
윤평이 당황했으나 병력을 따로 빼낼 여유가 없었다. 지금으로선 궁기병대를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급급했던 것이다.
탓!
풍귀마와 풍살대는 성벽을 가볍게 넘어섰다.
“무식하게 성문을 부술 필요 따위는 없지.”
궁기병대로선 말까지 성벽을 넘길 순 없으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 풍귀마는 거기까진 생각하지 않았다.
“여하간 죄다 쓸어버리자꾸나!”
“예!”
풍살대가 가볍게 땅에 내려섰다. 그들은 살기를 굳이 갈무리하지 않은 채 걸음을 떼었다.
그야말로 죽음의 무리.
그러한 풍살대 쪽으로 일련의 무인들이 달려 나왔다.
각 문파의 생존자들로 이루어진 의용군이었다.
“빌어먹을 마교 놈들!”
“죽은 동지들의 원수를 갚겠다!”
사뭇 비장함이 느껴지는 외침이었다. 그에 대한 풍귀마의 반응은 그저 웃는 것뿐이었다.
“멍청이들. 누구를 원망해야 하는지조차 모르는구나.”
“닥쳐라!”
가장 먼저 달려든 무인의 검이 풍귀마의 목을 노렸다. 풍귀마는 그 모습에 나직이 한숨을 뱉었다.
그 순간.
퍼어어엉!
엄청난 풍압이 무인을 날려 버렸다. 삽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크악!”
수십 장을 날아간 무인이 벽에 충돌했다. 두개골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무인의 머리에서 피가 흘렀다.
즉사.
천무맹 무인들의 얼굴이 흙색이 됐다.
“음공!”
“그것도 이렇게나 강력한…….”
“칠절의 자리를 날로 얻은 건 아니거든.”
가볍게 웃은 풍귀마가 속삭이듯 말했다.
“어쨌든 너희도 죽어라.”
파아아앙!
강렬한 음파가 무인들을 휩쓸었다. 잠시 몸을 부르르 떨던 무인들이 이내 두 귀와 두 눈, 두 콧구멍과 입으로 피를 쏟아 냈다.
“끄르르륵……!”
“끄아아아.”
수십의 무인이 절명하는 데엔 약간의 시간조차 걸리지 않았다. 풍귀마는 허허롭게 웃었다.
“왜 내 부하들이 내 뒤에 착 달라붙어 있는지를 생각했어야지, 머저리들.”
풍귀마가 손짓을 했다. 풍살대에게 진군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그러나 반응은 없었다. 풍귀마는 의아해진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
풍귀마의 표정이 이내 일그러졌다.
풍살대가 쥐도 새도 모르게 몰살당해 있었던 것이다.
“어떤 놈이냐! 감히 내 부하들을 죽이다니!”
풍귀마의 외침이 쩌렁쩌렁 울렸다. 내력이 실려 있었던 만큼 주변의 담벼락이 후들거리다가 무너졌다.
“거 참, 목소리 한 번 요란하군.”
이국적인 외모의 사내가 슬며시 나타났다. 풍귀마의 시선이 그의 언월도에 꽂혔다.
“네놈은 뭐냐?”
“열사도객 마태륜.”
“처음 듣는 이름이군. 그나저나 제법 실력은 있는 모양이구나. 감히 이 몸의 수하들을 몰래 토막을 쳐 버리다니.”
“그러는 네놈은 음공 빼면 별것 없는 것 같구나. 제 부하들이 죽는대도 눈치조차 못 채다니.”
“건방진……!”
이를 뿌득 가는 풍귀마였으나 내심으론 뜨끔하고 있었다. 적의 움직임을 간파하지 못했다는 건 시사하는 바가 컸기 때문이다.
놈이 마음만 먹었다면 자신의 목을 딸 수도 있었다.
그 사실을 생각하니 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마태륜은 시커멓게 탄 얼굴로 끌끌 웃었다.
“생각해 보면 운이 좋았지. 귀찮아서 빠졌던 자리에 나가 있던 놈들이 죄다 죽었다더군. 듣기로는 혈선이란 괴물들에게 당했다던가?”
“정말 운이 좋은 놈이었군. 그렇다면 운 좋은 것에 감사나 하고 찌그러졌어야지.”
“뭘 모르는군. 운이 좋았다는 건 반어법이다.”
마태륜의 입매가 비틀렸다.
“그저 아쉽고 분할 따름이다. 그렇게 강한 놈들과 칼을 섞어 보지 못했다는 게 말이야.”
“네놈…….”
풍귀마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정파 놈들보단 우리에 가까운 녀석이구나.”
“흥. 냄새나는 너희들 마교 놈들과 같은 취급하지 말거라. 이래 봬도 나는 협객이거든.”
“별 시답잖은 협객 놈을 다 보겠군.”
“다 떠들었느냐?”
마태륜이 두 자루 쌍도를 기묘하게 쥐었다. 척 봐도 중원의 도법과는 뿌리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음공을 펼치는 풍귀마에겐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죽어라!”
파앙!
거대한 굉음이 곧 무형의 파도로 변하여 마태륜에게 쇄도했다.
쐐애애액!
그야말로 소규모의 폭풍. 칼로 베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도법으로 찢어발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흠.”
마태륜도 그 사실을 알기에 굳이 맞서지 않고 몸을 옆으로 치웠다.
풍귀마가 원하는 바였다.
“걸렸구나!”
키이이잉!
기묘한 소음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마태륜의 코에서 핏방울이 떨어졌다.
“……두 가지 음공을 섞어 쓰는군. 풍압을 날려 시선을 뺏고 음파를 날려 몸속을 진탕으로 만드는 건가?”
“잘 아는구나. 어떠냐. 기회가 있을 때 이 몸을 치지 못한 게 후회되지?”
“그럴 리가.”
마태륜은 반가운 듯 씩 웃었다.
“제법 강한 놈과 싸우게 된 것이 기쁠 따름이다.”
“죽고 나서도 그리 웃을 수 있나 보자꾸나.”
풍귀마가 연달아 음파를 날렸다.
키이잉! 키잉!
보이지 않으니 방향과 목표를 알 수 없다. 귀에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의 음파이다 보니 닿기 전엔 파악도 힘들었다.
그리고 닿을 때마다 어김없이 내상을 입혔다.
울컥!
마태륜이 입으로 한 됫박은 됨직한 피를 쏟아 냈다.
“그것 봐라. 멍청한…….”
풍귀마는 득의양양하여 웃으려 했으나, 이상하게도 표정은 자꾸만 일그러지려 했다.
아마도 마태륜의 표독스러운 미소 때문이리라.
“대단하군. 나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인 건 장유추 이후로 네가 처음이다.”
“그리고 네놈을 죽일 몸이기도 하지.”
“이 정도로?”
도발하는 듯한 말에 풍귀마가 울컥했다.
“이젠 정말로 끝을 내 주마!”
키이이잉!
풍귀마가 또다시 음파를 날렸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이상 구태여 풍압을 날릴 필요도 없었다.
그 순간 마태륜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뭣……?”
풍귀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마태륜은 음파를 확실히 피했다.
‘설마 음파의 움직임을 파악한 건가?’
그것이 풍귀마가 떠올린 마지막 생각이었다.
촤아아악!
삽시간에 떨어진 마태륜이 그의 몸을 반으로 갈라놓았다.
쌍도의 두 칼날이 교차하며 풍귀마의 몸을 네 갈래로 찢어발겼다.
끄르르륵!
피거품을 쏟으며 풍귀마가 쓰러졌다. 마태륜은 무표정한 눈으로 그의 시체를 내려다봤다.
“미안하지만 이렇게 맞다 보니 대충 파악이 됐거든.”
마태륜은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갔다. 오기 전에 보기로는 백호문 쪽에서도 크게 한판 붙은 모양이었다.
“그런 싸움에 내가 빠질 수는 없지…….”
마태륜의 목소리가 잦아지나 싶더니 그 역시 그대로 고꾸라졌다. 풍귀마의 음파가 체내의 내장을 죄다 부숴 놓았던 것이다.
끄르르륵.
마태륜의 입에서도 피거품이 흘러나왔다. 이윽고 그의 눈에서도 생기가 빠져나갔다.
메마른 바람이 두 시체 사이로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