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二章 혈천의 검
수십 마리의 살쾡이 속에서 홀로 포효하는 대호.
마라혈천을 유린하는 천마의 모습이었다.
“어쩔 텐가, 정천?”
장유추가 찡그린 얼굴로 물었다.
천마는 검왕과 붙을 때 이상의 무위로써 마라혈천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과연 어느 쪽이 사냥하는 쪽인지 헷갈릴 지경.
여기에 자신들이 합세한다면 필승이리라. 장유추의 생각은 그러했다.
그러나 정천은 다른 대답을 꺼냈다.
“이 틈에 빠져나가죠.”
“빠져나가자고? 천마를 두고 말인가?”
“딱히 친한 사이도 아니잖습니까? 게다가 합세해 봐야 방해만 될 뿐입니다.”
“으음.”
장유추도 그 말엔 반박하지 못했다.
사실 합세하려 했다면 진즉에 했으리라. 그러나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천마는 그야말로 절초를 난사하고 있었다.
자기 자신 외의 모든 것을 공격하는 난격. 어설프게 돕겠다고 끼었다간 그의 검에 공격당할 것이다.
“게다가…….”
정천의 말이 이어졌다.
“이 싸움은 천마의 패배로 끝날 겁니다. 그나마 그가 시선을 끌고 있을 때 포위망을 빠져나가야겠죠.”
“헛소리!”
앙칼진 소리를 뱉은 사람은 진백란이었다.
그녀는 마의에게 부축 받고 있었다. 윤하월에게 당한 상처가 채 회복되지 않아 파리한 기색이었지만, 정천을 노려보는 눈엔 생기가 가득했다.
그리고 분노 역시.
“아버님은 패하지 않아! 그 누구에게도!”
“일대일이라면 그렇겠지.”
“몇 놈이 덤빈대도 문제없으셔!”
“그렇지 않을걸. 당장 놈들을 봐도 치명상을 입은 놈은 몇 명 되지 않아.”
진백란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정천의 말이 옳다. 천마의 공세는 무시무시했지만, 마라혈천의 숫자는 거의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그나마 중상을 입은 이들도 후방으로 빠져서는 몸을 회복시켰다. 특수한 내단이라도 가져온 것인지, 팔이 잘리는 등의 치명상만 아니라면 금세 회복할 수 있었다.
반면 천마의 기세는 조금씩이지만 줄어들고 있는 상황.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결론은 뻔했다.
진백란이 정천의 앞섶을 움켜쥐었다.
“그래서, 나더러 아버님을 두고 도망치기나 하라는 거야?”
“그래.”
차릉!
진백란은 혈륜검을 뽑아 들어 정천의 목젖을 겨누었다. 그러나 차마 찌르지는 못한 채 검을 거뒀다.
“마음대로 해. 너희 정파인들에게 도와 달라고 하진 않겠어. 하지만 우린 여기에 남아 아버님을 도울 거야.”
정천은 마인들의 행색을 돌아봤다.
전투에 나서지 않은 멸살독마와 마의를 제외한다면 하나같이 싸움보단 치료가 필요한 몰골들이었다. 이는 승리한 무령권마도 마찬가지.
“천마에게 방해만 될걸.”
“닥쳐!”
“싫다. 그리고 정말 그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빨리 본진으로 돌아가는 편이 낫지. 증원군을 끌고 온다면 마라혈천에 대항할 수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진백란은 정천의 말에도 머뭇거렸다.
그게 가장 좋은 방법임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본진까지의 거리는 상당했다.
과연 병력을 끌고 올 때까지 천마가 버틸 수 있을까?
그녀로서도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정천은 대뜸 진백란을 들어 어깨에 걸쳤다.
“무, 무슨 짓이야!”
“널 보호해 달라고 천마에게 부탁받았으니 들어줘야겠지.”
정천은 나머지 마인들을 돌아봤다.
“경공 정도는 펼칠 수 있겠지?”
“지금 장난하나? 우리 걱정일랑 말고 빨리 움직이기나 하지.”
외팔이가 된 귀도신마의 말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정천이 뒤를 돌아봤다.
“상황이 이러니 일단 마교의 본대가 있는 곳으로 향했으면 하는데,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노부는 문제없네.”
장유추가 나섰다.
화연란과 요태희, 백미련 역시 앞으로 나왔다.
반면 남궁운과 제갈현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저들과 같이 가고 싶지는 않군. 아무래도 황룡성이 걱정되기도 하고.”
“나 역시 마찬가지요.”
“알겠습니다. 그럼 황룡성으로 향해 주십시오. 아마 서두르셔야 할 겁니다.”
제갈현은 대번에 정천의 말을 이해했다.
“이미 그쪽도……?”
“혈선이 움직이기 시작했을 겁니다.”
“으음.”
“상황이 심상찮다 싶으면 본청이 아닌 와룡장이나 북풍장으로 향하십시오.”
“본부 쪽의 무인들이 당했을 거란 말인가?”
남궁운의 물음에 정천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팔부혈선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는 이들은 그들뿐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만 제거한다면 살아남은 천무맹 사람들을 다루기도 쉽다는 소리죠.”
“그 말은…….”
“예컨대 마교의 습격이란 식으로 상황을 조작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게 되면 전쟁은 피할 수 없다. 그것도 마교나 정파, 어느 한쪽이 소멸하기 전엔 끝나지 않을 혈겁이 될 터.
남궁운과 제갈현의 표정이 한층 심각해졌다.
“그럼 여기서 찢어지세.”
“그러죠.”
정천은 더 말을 잇지 않았다. 이미 짧지만 소중한 시간을 허비한 뒤였다.
“달립시다!”
그 말을 끝으로 정천이 몸을 날렸다. 마인들과 장유추, 화연란, 요태희, 백미련이 뒤를 따랐다.
동시에 남궁운과 제갈현이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만통안을 지닌 흑천살이 이를 놓칠 리 없었다.
“놈들이 달아난다!”
그 말만으로도 십여 명의 마라혈천이 즉각 움직였다. 어차피 천마의 공세도 약해진 뒤였기에 그 정도 인원이 빠진다 해도 문제는 아니었다.
‘쳇.’
정천은 혀를 찼다.
대다수가 부상을 입은 지금, 그나마 마라혈천에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은 장유추와 백미련, 그리고 정천 자신 정도였다.
고작 세 명이다. 이 정도로는 열 명 모두의 공세를 막아 내기 벅찼다.
‘누구 한 명이 남아 놈들을 묶어 놓아야 하는데.’
그때였다.
파밧!
푸른빛의 창강이 번뜩이며 십여 명의 마라혈천을 흩어 놓았다. 청룡창의 창강이었다.
잊고 있던 한 사람, 윤하월이 살기등등한 기세로 소리쳤다.
“멍청한 것들, 천마 한 명만 잡으면 된다고 생각했나!”
붕대로 겨우 동여맨 오른팔에선 다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정도 상처로는 윤하월의 기세를 어찌할 수 없을 듯했다.
“윤하월! 미끼가 되어 남을 건가?”
장유추의 외침에 윤하월은 코웃음을 쳤다.
“그저 도망치지 않을 뿐이오! 기왕 갈 거라면 이것들을 죄다 쓸어버린 후에 가면 될 일이지!”
“허튼 생각 말고 적당히 싸우다 빠지게!”
“흥.”
윤하월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장유추는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실감했다.
장유추는 곧장 정천을 돌아보며 물었다.
“저 친구를 그냥 둘 셈인가?”
“별수가 없잖습니까. 자기가 택한 길이니 존중해 줄 수밖에요.”
정천의 대답은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본디 윤하월을 싫어하는 그였기에, 이런 도움을 받는다는 게 더욱 껄끄러웠다.
열 명의 마라혈천은 윤하월을 무시한 채 정천 일행을 뒤쫓으려 했다.
그러나 청룡창의 창강은 놀라울 정도의 속도로 연신 쏘아졌다. 열 명 모두가 방어에만 급급해할 정도로.
스스스스.
윤하월의 몸에선 한 줄기 연기 같은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혼령연소.
그 역시 목숨을 불사르기로 결정한 것이다.
마라혈천 중 하나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저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려는 건가?”
“하!”
신경질적인 웃음을 뱉은 윤하월이 이죽거렸다.
“놈들을 위해?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이건 어디까지나 나 자신을 위해서다. 언제나 싸움을 바라왔던 내게 이만큼 좋은 자리도 없지.”
“고작 그런 이유로 목숨을 버리겠다고?”
“내가 검왕 같은 멍청이와 같다고 생각하나?”
윤하월은 청룡창을 휙휙 휘둘러 보였다.
“일단 너희를 쓸어버린 다음 황룡성으로 돌아갈 거다. 악양화가의 비전 내단이라면 수명 대부분을 회복할 수 있겠지.”
청룡창이 마라혈천들의 얼굴을 순서대로 겨누었다.
“한마디로 너희들만 해치우고 나면 만사형통이란 소리다.”
“허황된 소리를 지껄이는군!”
혈천 사이에 끼어 있던 천연살이 소리쳤다. 그를 발견한 윤하월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어린놈, 네가 먼저다. 살진을 펼친 게 아마도 네놈일 테니 목을 날려 버리면 사라질 테지.”
“건방진 놈! 이래 보여도 내가 네놈보다 존장이다.”
“그런가? 상관없다. 뭐가 됐든 네놈이 가장 먼저 죽게 될 테니.”
천연살이 표독스런 얼굴로 대꾸하려 할 때였다. 윤하월은 기다리지 않고서 청룡창을 전방으로 세 번 연속 출수했다.
파바밧!
신속의 창격.
뿜어져 나온 창강이 천연살의 두 팔과 머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큭!”
기겁한 천연살이 뒤로 몸을 날렸다. 살진 설치를 제한다면 마라혈천 내에서 평균에도 미치지 못하는 그였다.
두 명의 마라혈천이 급히 천연살을 앞으로 나섰다.
동료를 위한다기보다도 반격의 실마리를 잡기 위해서였다.
타탕!
각각 출수한 환도와 대부가 윤하월의 창강과 충돌했다.
혈천들의 속셈은 창강을 상쇄하여 곧장 반격에 들어가려는 것이었으나…….
“흥.”
윤하월은 청룡창의 창대를 가볍게 비틀었다. 그와 동시에 일직선으로 날아들던 창강이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마치 쇄도하는 용처럼.
두 발의 창강이 혈천들의 머리를 노렸다. 두 혈천은 황급히 병장기를 들어 창강을 막아 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천연살의 미간으로 쏘아졌다.
“헉!”
단말마의 비명.
그것이 천연살의 유언이었다.
퍼억!
창강은 그대로 천연살의 머리를 으깨진 감자처럼 부숴 버렸다. 반탄공을 펼칠 틈도 없는 속도에, 호신강기조차 가볍게 꿰뚫는 파괴력이었다.
비틀.
머리를 잃은 천연살의 몸이 허우적거리다가 쓰러졌다. 그야말로 허무한 최후였다.
“놈!”
천연살과 가장 가까웠던 살마괴가 대노하여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천연살이 펼쳐 놓았던 살진이 깨어진 직후.
안 그래도 과거보다 확연히 강해진 윤하월이, 거기에 더하여 감각마저 온전히 되찾은 뒤였다.
팟!
또 한 차례의 창강이 번뜩였다. 이번에도 미간을 노리는 쾌속의 일격!
타아앙!
창강은 아슬아슬하게 튕겨졌다. 앞서 두 발의 창강을 막았던 혈천들이 또다시 나선 것이다.
그 위치는 살마괴의 얼굴에서 세 치가량 떨어진 거리. 조금만 늦었더라도 그 역시 불귀의 객이 됐으리라.
“큭.”
침음을 뱉은 살마괴가 물러났다. 천연살과 달리 본디 냉정한 그였던 만큼 이내 흥분을 가라앉혔다.
윤하월이 그 모습을 보며 이죽거렸다.
“흥. 그래도 저 멍청이보다는 조금 낫군.”
“…….”
“그래 봐야 별 차이는 없겠지만 말이야. 다음번엔 네 동료들도 널 구해 주지 못할 게다.”
“네놈!”
이를 박박 가는 살마괴를 두 혈천이 붙들었다.
“넘어가지 마라. 수준 낮은 도발일 뿐이다.”
“놈은 혼령연소 덕분에 본래 이상의 힘을 내고 있다. 시간만 끌면 자연히 그 바닥이 보이게 될 거다.”
그들의 말은 정론이었다. 실제로 윤하월 본인도 약간이지만 힘이 떨어져 간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변수는 다른 데에도 있었다.
콰과과광!!
대다수의 혈천들이 몰려 있던 곳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천마가 펼친 무한검쇄(無限劍鎖)의 초식이 터져 나온 것이었다.
천마의 검격은 지금까지의 어떤 것보다도 강력했다. 천연살의 죽음으로 살진이 소멸된 까닭이었다.
단순히 평소 감각이 되돌아온 것뿐.
그것만으로도 이 정도 위력이다. 괜히 중원 최강이 아니었다.
“저쪽도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는군.”
피식 웃은 윤하월이 살마괴를 돌아봤다.
“분명 천마를 사냥하러 왔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이제 와서는 어느 쪽이 사냥당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군.”
“떠들 수 있을 때 실컷 떠들어라. 천마는 결국 여기에 뼈를 묻게 될 테니.”
“글쎄. 지금 같아서는 나와 천마, 둘만으로도 너희 모두를 쓸어버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착각도 크군. 아니면 최후가 다가온 것을 느끼고 허세를 부리는 건가?”
“말로는 지지 않는구나.”
윤하월은 기습적으로 청룡창을 출수했다. 여전히 빠르고 날카로웠지만, 아까와 달리 냉정을 유지하고 있던 살마괴로서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었다.
“쳐라!”
일갈하며 창강을 쳐내는 살마괴. 그 순간 나머지 여덟 명의 혈천이 팔방에서 윤하월에게 짓쳐 들어갔다.
‘제길.’
거의 모든 방향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들어오는 합공. 이쯤 되면 어지간한 초고수라도 당황하기 마련이었다.
더군다나 이들의 움직임이 실로 일사불란한 것이, 아마 합공만을 집중적으로 익힌 모양이었다.
‘모든 것은 천마를 해치우기 위해서인가?’
기실 개개인의 능력도 윤하월에 필적하는 혈천들이었다. 지금까진 혼령연소의 덕에 우위를 점하고 있었던 것일 뿐.
그 정도 강자들의 합공이니 윤하월로서도 쉽게 공세를 취할 수 없었다.
파바밧!
파밧!
검신과 도신, 도끼날과 창날이 윤하월의 몸 곳곳을 스쳤다.
다행히 급소는 비껴갔으나 출혈로 인해 몸이 붉게 물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크윽!”
윤하월도 나름대로 반격을 했으나, 그럴 때마다 여지없이 사각에서 혈천들이 치고 들어왔다.
이쪽 공격은 막히거나 회피되고, 반대로 저쪽의 공격은 작지만 분명한 상처를 남긴다.
혼령연소를 통한 재생력으로도 상처가 중첩되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결국 윤하월은 삽시간에 피투성이가 되어 휘청거리게 됐다.
“암만 강하다고 해도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란 겨우 이 정도다.”
살마괴의 말에 윤하월이 피 섞인 침을 뱉었다.
“훈계라도 하려는 거냐? 웃기는 놈이군.”
“딱히 그럴 생각은 없다. 다만 네 모습을 보자니 이런 게 무인인가 싶기는 하군.”
“웃기는 소리. 네깟 놈들이 무인이 무엇인지 알기나 할 것 같나?”
“그래. 우리는 무인이 무엇인지 모른다. 무인이 되기도 전에 사부나 부모에게서 버림받았으니 말이야.”
“…….”
“팔부혈선은 마라혈천을 그 무엇보다 강대한 조직으로 키웠다. 하지만 그 강자들은 수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금역의 안개 너머로 나와 볼 수도 없었지.”
살마괴의 눈에 약간이지만 회한의 감정이 스쳤다.
“다른 동료들은 몰라도, 나는 약간이지만 너희를 동경했다. 최소한 자기 힘을 펼칠 장소는 마련되어 있었으니 말이야.”
“……네놈들도 이젠 그 장소란 게 마련된 것 아닌가?”
“그래. 하지만 그것도 길지는 않을 거다.”
윤하월의 눈에 의문이 스쳤다.
“길지 않을 거라니, 그건 무슨 소리냐?”
“그것까지 네놈에게 말해 줄 필요는 없겠지.”
“웃기는 놈이군. 기껏 궁금증을 유발해 놓고는 말하지 않겠다고? 그럴 거면 처음부터 떠들지나 말 것이지.”
가래침을 탁 뱉은 윤하월이 청룡창을 꾹 쥐었다.
“말할 기분이 나도록 박살을 내주마.”
“이 와중에도 허세 하나는 대단하군.”
“흥.”
코웃음을 친 윤하월이었으나 머릿속에선 이미 살마괴의 말에 반쯤 동의하고 있었다.
승산은 없다. 이대로 싸움을 이어 봐야 아까와 같은 식으로 조금씩 죽어갈 것이다.
‘일단은 도망칠까?’
예전이었다면 결코 떠올리지 않았을 생각이었다. 적을 눈앞에 두고서 도망치다니, 차라리 꺾일지언정 그런 수치를 감수할 순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게 있었던 것이다.
‘이건 전쟁이다. 전쟁에서 패하게 되면 무림은 그걸로 끝이다.’
그에게도 무인의 책임감이란 게 남아 있었던 걸까?
이렇게 개죽음을 당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면?’
윤하월은 천마 쪽을 힐끔 보았다.
그쪽 역시 지리한 소모전이 이어지는 중. 살진이 소멸된 초기엔 제법 힘을 내는 천마였으나, 지금은 가까스로 공세를 유지하는 정도였다.
‘저러다 정말 사냥당하겠군.’
마라혈천은 꼭 사냥개 무리 같았다.
흑천살은 한 발 떨어진 채 동료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그는 천마가 펼치는 초식을 보는 순간, 거의 순식간에 그 본질과 장단점 등을 파악해 냈다. 그리고 그를 통해 파훼법을 찾아내어 그에 맞는 전술로서 천마에게 대응을 했다.
첫 일격은 당한다고 쳐도 두세 번째쯤 되면 대응책이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압도적인 힘 앞에선 이 모든 게 무위일 터였으나, 안타깝게도 천마와 혈천 다수의 무력은 비등한 수준이었다.
아니, 체력적인 여유를 생각한다면 마라혈천이 유리했다.
‘그렇다면!’
윤하월은 답을 도출해 냈다.
‘놈을 죽인다!’
파앗!
그 순간 윤하월은 자유로운 왼손을 내뻗어 살마괴와 혈천들에게 일장을 날렸다.
파아앙!
공격보다도 연막을 위한 수단이었다. 허공에서 격발된 장력은 이내 공간을 뒤흔들었다.
흙무더기가 치솟아 순간적으로 윤하월과 혈천들 사이로 벽이 생겼다. 물론 일순간에 불과했지만, 움직일 틈을 만들기엔 충분했다.
“무슨 짓을!”
당황한 살마괴가 신경을 곤두세웠다. 언제 윤하월이 창격을 뿜을지 몰랐기에.
창격은 없었다.
윤하월은 대신 흑천살 쪽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타아앗!”
부우우웅!
윤하월의 몸이 푸른 구체에 휩싸였다. 구체는 이내 유성처럼 꼬리를 만들어 내며 찬란한 후광을 뿜어냈다.
창신열파(槍神熱波).
그것도 혼령연소의 힘을 빌려 본래의 배 이상의 위력을 내고 있는 절기였다.
콰드드드득!
한 마리의 청룡이 꿈틀거리며 쇄도했다. 청룡의 비늘이 스치면서 땅이 파헤쳐지고 바람이 찢겼다.
그 목적지에 있는 것은 흑천살의 목.
워낙 갑작스런 기습이었기에 다른 마라혈천들이 미처 대응하지 못했다. 흑천살 역시 천마에게 집중하고 있던 상황.
“죽어라!”
윤하월의 외침과 함께 청룡이 아가리를 벌렸다.
“큭!”
흑천살은 자신의 애병인 쌍검을 뽑아 들어 방어에 나섰다. 그러나 이미 청룡의 이빨이 눈앞까지 쇄도해 온 뒤.
콰과과과!
창신열파는 엄청난 후폭풍을 남기며 흑천살을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윤하월의 얼굴에 약간이지만 경직되었다.
‘깊지 않았다!’
분명히 닿는 느낌은 있었다. 그러나 뼈를 부수고 내장을 찢어발기는 느낌까진 없었다.
윤하월이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흑천살이 서 있었다. 왼팔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채, 그러나 죽지는 않은 채.
그의 쌍검은 부러져서 땅을 뒹굴고 있었다.
두 자루의 검과 왼팔을 대가로 창신열파의 피해를 최소화한 것이다.
“제길…….”
짧은 한마디를 남긴 채 윤하월이 비틀거렸다. 이미 너무 많은 기력을 소모해 버린 그였다.
그제야 상황이 파악된 마라혈천들이 윤하월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그러나 그 전에 천마가 그의 앞으로 몸을 날렸다.
부웅!
나찰수라를 크게 휘두르니 엄청난 검풍이 일었다. 그 풍압만으로도 혈천들이 물러나게 하기엔 충분했다.
“몸은 괜찮나?”
천마의 물음에 윤하월은 쓴웃음을 지었다.
“네놈에게 도움을 받고 싶진 않았는데.”
“본좌는 빚을 지고 사는 성격이 아니라서. 네가 본좌를 도왔으니 본좌도 이 정도는 해 주어야지.”
“딱히 네놈을 돕고 싶었던 건 아니다. 단지 저놈만 없으면 이놈들의 전력이 크게 반감되리라 생각했을 뿐.”
“잘 보았군. 하지만 그다음까진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군.”
“그럴 리가 있나.”
윤하월이 큭큭대며 웃었다.
“그렇게 되면 네놈이 저놈들을 상대하기도 수월해졌겠지. 나는 그 틈을 타서 도망칠 수 있었겠고.”
“그리 영리한 생각 같지는 않군. 무엇보다도 지금 모습을 보자니 몸을 가누기도 어려워 보이는데.”
“그건 그렇군.”
윤하월은 청룡창을 지팡이 삼아 겨우 쓰러지지 않고 있었다.
조금 쉰다면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하겠지만, 조금 전과 같은 일격은 더 이상 어려울 터였다.
“그래도 확실히 도움이 되었다.”
천마가 조금 목소리를 높였다.
“몸은 괜찮은 건가, 사냥꾼?”
흑천살과 마라혈천을 비꼬는 말.
몇몇 마라혈천들이 이를 갈았으나 흑천살의 표정은 차분했다.
“끄떡없다고는 못하겠군요. 확실히 예상외의 일격이었습니다.”
“……자기가 당했으면서도 그 딱딱한 말투는 여전하군. 네놈은 화도 내지 못하는 건가?”
“이 상황에 제가 이성을 잃으면 누가 유리할지는 뻔한 것이니까요.”
지독히 사무적인 말투에 천마를 혀를 찼다.
“재미없는 놈이로군.”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윤하월에겐 미안한 일이었으나 천마의 생각은 그러했다.
물론 그런 사실을 딱히 아쉽게 느끼진 않았다.
애초에 그는 독보적인 존재. 그 누구에게도 손을 빌리지 않으며, 도움을 바라지도 않는다.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힘을 믿기 때문에.
그러나 천마는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여기가 무덤이 되리라는 것을.
‘팔부혈선이 제법 머리를 썼군.’
확실히 마교도 천무맹도 그들에게 놀아났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백인의 마라혈천은 천마가 지금껏 보아온 어느 무인 집단보다도 강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러나진 않는다.’
나찰수라를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어차피 짐이 될 것도 없으니 아쉬울 것도 없었다.
‘란아가 무사히 빠져나가서 다행이다.’
천마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다음은 네게 맡기마.’
천마의 몸이 금빛으로 물들었다. 그 순간 내내 무표정하던 흑천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모두들 조심……!”
“타아앗!”
쩌렁쩌렁한 기합성과 함께 강렬한 기운이 천마를 중심으로 폭발했다. 그 힘이란 지금까지와는 수준이 전혀 다른 규모였다.
쿠구구구구.
천마를 중심으로 세상이 밀려나는 것만 같았다.
황금빛의 뇌전은 어느새 흑색으로 변해 있었다. 천마가 내뿜는 기운은 마치 무저갱에서 흘러나오는 것만 같아 보였다.
“이, 이건…….”
어지간해선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을 윤하월조차 말을 더듬고 있었다.
이 기운이 의미하는 바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흑천살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마침내 벼랑 끝까지 몰린 맹수가 진짜 이빨을 내밀었다.
“혼령연소……!”
폭풍처럼 몰아치는 기운 속에서 천마가 씩 웃었다.
“저승길 동무가 될 준비들은 되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