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一章 살진전개(殺陳展開)
“……?”
모용린은 처음 느낀 것은 포근함이었다.
검을 쥔 이래 거의 느껴본 적이 없었던 감정. 그렇기에 의아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익숙한 전경이 보였다.
막 피어난 듯 연두색으로 빛나는 이름 모를 잡초. 그 위를 한가로이 노니는 나비들. 그와 함께 어디선가 들려오는 피리 소리.
어린 날의 전경이다.
‘어머니의 피리…….’
눈물이 핑 도는 것만 같았다. 지금 고개를 돌리면 피리를 입에 대고 있을 어머니가 보일 것 같았다.
‘내가 열 살 무렵에 돌아가셨던…….’
모용린은 고개를 돌렸다.
피리를 불고 있던 그녀의 어머니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약간의 흐릿함도 없는, 꿈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모습.
현실보다도 생생했다.
오히려 지금까지 가문을 위해 애써 왔던 일들이 꿈인 것처럼.
“왜 그러니, 린아?”
모용린은 잠시 머뭇거렸다. 힐끔 본 자신의 몸은 어린 날의 그것이었다.
분명했다. 다섯 살 무렵의 과거. 아직은 검이나 모용세가의 무공과는 담을 쌓고 있던 시절.
그녀는 어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상한…… 꿈을 꾸었어요.”
“이상한 꿈이라니?”
“제가 다 큰 뒤였어요. 오라버니들과 경쟁하고, 가문을 이어받기 위해 암투를 벌이고……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났어요.”
“무서웠겠구나.”
“그렇지는 않았어요. 그냥, 많이 피곤했어요.”
어머니는 인자한 미소와 함께 모용린을 꼭 안았다.
“힘들었겠구나.”
“응.”
“그래. 그럼 이제 쉬렴.”
그렇게 말하며 어머니는 피리를 내밀었다. 모용린은 멍하니 그것을 받아 들었다. 어머니의 말대로 이제는 그저 쉬고만 싶었다.
모용린은 피리를 조금씩 얼굴 가까이 가져갔다. 한번 불어 볼까 했던 것이지만, 피리는 입이 아닌 목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치 목을 찌르려는 칼날처럼.
순간 날카로운 전음이 그녀의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린아, 정신차려라!
“……!”
모용린은 흠칫 놀랐다. 그 순간 생생하던 전경이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어머니?”
그녀의 어머니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없었다. 잡초도 나비도 모두 사라진 뒤. 그녀가 들고 있던 피리도 더 이상 없었다.
그 대신 진짜 현실이 되돌아왔다.
“……!”
모용린은 단검을 거꾸로 쥐고 있었다. 칼날의 끝은 그녀의 목에서 한 치 정도만 떨어져 있었다.
조금만 더 움직였더라면…….
“괜찮으냐?”
손바닥이 어깨에 얹혔다. 어머니의 손길과는 달리 딱딱하고 투박한, 그러나 무엇보다도 듬직한 손바닥이.
모용준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있었다.
“작은 오라버니.”
모용린은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어머니를 뵈었어요.”
“그랬구나. 나 역시 그랬다.”
“오라버니도요?”
모용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목을 가리켰다. 자그만 생채기가 나 있었다.
“하마터면 목이 베일 뻔했지.”
오싹한 소름이 모용린의 몸을 훑었다.
“어떻게 된 일이죠?”
“강력한 환술이다. 당한 건 우리들뿐만이 아니야.”
“그렇다는 건…….”
모용준의 얼굴이 한껏 구겨졌다.
“거대한 규모의 살진이 펼쳐진 것 같다. 북풍장을 비롯한 이 근방 전체에. 아니, 어쩌면 황룡성 전체가 살진 안에 들어와 있을지도 몰라.”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황룡성 내의 사람들 대부분이 살진의 환각에 노출되었다는 것.
모용린은 벌떡 일어나 바깥으로 향했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서 코를 움켜쥐었다.
자욱한 혈향이 이미 그녀가 있는 곳까지 퍼져 있었다.
뒤따라 나온 모용준도 미간을 찡그렸다.
“큰일이군. 생각한 것보다 상황이 심각해.”
“다른 곳은 확인해 보지 못하셨나요?”
“네가 걱정되어 부리나케 달려온 거다. 다른 곳을 확인할 여유는 없었다.”
모용린은 더 묻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부터가 모용준의 전음이 없었다면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준아, 린아!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냐?”
문을 벌컥 열고 나타난 이는 모용훈이었다.
“갑자기 무언가 머리를 찌르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사방에서 피 냄새가 풍겨 오더구나.”
“형님, 환각에 시달리지 않았습니까?”
“환각? 아니, 딱히 그런 것은 느끼지 못했다만. 약간의 두통이 있기는 했다만.”
“으음.”
모용준이 침음했다. 모용린이 즉각 말했다.
“아무래도 조건부로 작용하는 것이었나 보군요. 그렇다는 건 모두가 당하진 않았다는 의미예요.”
“그렇겠지. 다만 그 조건이란 게 무엇인지가 문제일 것 같다.”
“이미 지난 일이니 더 생각할 필요는 없지 않겠어요?”
“아니다.”
모용준이 정색하고서 고개를 저었다.
“조건부라는 건 다시 말해, 언제든 발발할 수 있다는 거야. 지금은 괜찮더라도 어느 순간 갑자기 환각에 노출될 수도 있어.”
“그건 확실히 그렇군요.”
모용린은 곧장 두 사람에게 명령했다.
“오라버니들, 당장 살아남은 세가의 무인들을 집합시키세요. 그들을 한곳에 모아 놓은 다음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단속시키세요.”
“살아남은 무인들을? 너는 어쩌고 말이냐?”
“전 당장 가 봐야 할 곳이 있어요.”
모용린은 말을 마치자마자 걸음을 떼었다. 그 뒤를 모용훈이 급히 따랐다.
“내가 같이 가겠다.”
“큰 오라버니도 이곳에 남으세요. 와룡장에 가려는 거니, 저 혼자여도 충분해요.”
“그건 모르는 소리다. 언제 어디서 환각에 노출될지 몰라. 혼자보다는 둘이 가는 게 나을 거다.”
일리가 있는 모용훈의 말이었으나 모용린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그런 종류의 환각이라면 두 번 다시 걸리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
“린아.”
“이곳에 남으세요. 오라버니가 필요한 곳은 바로 이 북풍장이에요.”
모용훈도 더 고집을 부리진 못했다.
“알겠다. 바깥의 상황은 더 심각할 테니 부디 조심해라.”
고개를 끄덕인 모용린은 경공을 펼쳐 담을 넘어갔다.
북풍장 바깥 역시 혈향이 자욱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살진의 영향이 어떠한지 보다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도 있었다.
사람들이 한데 미쳐 버린 것만 같았다.
마치 스스로를 죽이기 위해 안달이 난 것처럼.
가장 편히 죽는 이들은 주변에 흉기를 지닌 이들이었다.
모용린이 그랬던 것처럼 무언가에 홀려 목에 흉기를 꽂고, 그대로 부르르 경련하다가 절명하는 것이다.
흉기를 지니지 못한 이들은 혀를 깨물거나 머리를 벽에 부딪쳐 댔다. 어떤 이들은 서로가 서로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큭!’
담이 큰 모용린으로서도 절로 고개가 돌려졌다. 한둘이라면 어찌 말리겠지만, 대로에 나와 있는 수십, 수백 명이 동시에 그러니 말릴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대체 어떤 살진이기에!’
너무나 갑작스럽고 거대했다. 한순간에 황룡성 내 모두의 정신을 옭아맬 정도의 환각이라니.
하루 이틀 준비했을 리 없다.
못해도 십여 년 이상의 준비 과정이 있었을 터. 그것을 생각하니 더욱 소름이 끼쳤다.
‘정천의 말이 옳았어.’
그는 계속해서 말해 왔다. 황룡성은 이미 혈선들의 것이며, 그들에게 대항하지 않고서는 미래가 있을 수 없다고 말이다.
그러나 천무맹은 그 말을 무시했다.
무시했다기보다는 눈앞의 마교 때문에 미처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지만.
어찌 됐든 이제는 어느 쪽이 더 큰 문제였는지 밝혀졌다. 마교보다도 거대한 적은 바로 팔부혈선이었던 것이다.
‘와룡장마저 이런 상태라면…….’
그땐 모든 게 끝이다.
천무맹주 유극태가 부재중인 상황. 이 마당에 그나마 천무맹을 규합할 수 있는 것은 군사 제갈현과 제갈세가뿐이었다.
다른 이들이라면 대책조차 없을 테니 말이다.
그것은 모용린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최대한의 속도로 달려가고 있을 때였다. 순간적으로 인영 하나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큭!”
모용린은 침음을 삼켰다.
눈앞을 막아선 이는 하북팽가의 무복을 입고 있는 무인이었다. 문제라면 눈이 반쯤 뒤집어져 있다는 것.
환각에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었다.
“팽가의 적…… 갈가리 찢어 죽일 테다!”
“바보 같은 소리! 당신은 지금 환영에 조종당하고 있는 거예요!”
모용린이 소리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무인은 두 자루의 환도를 휘두르며 짓쳐들어왔다.
‘빠르다!’
모용린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한 고수. 한시가 바쁜 지금 같은 상황에선 검을 섞는 게 실로 껄끄러웠다.
하지만 피할 수도 없는 일. 모용린도 연인검을 뽑아 반격에 나섰다.
차창!
십여 차례의 공방이 섬전처럼 지나갔다. 팽가 무인의 온몸에 연인검의 상흔이 새겨졌다.
핏!
모용린의 뺨에서도 선혈이 흘렀다. 슥 피를 닦아 낸 모용린이 착잡한 눈으로 무인을 노려봤다.
‘원래라면 상처 하나 없이 제압했을 상대인데…….’
이유는 간단했다. 환각에 걸린 무인은 자기 몸을 전혀 돌보지 않은 채 공격에만 치중했다.
그런 만큼 상처도 많이 입었지만, 모용린에게도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그래 봐야 치명상까진 힘들 테지만, 이런 마당에 약간이라도 피해를 보는 게 껄끄러운 것은 사실.
‘게다가 시간까지 뺏기고 있어. 이러는 동안에도 상황은 악화되고 있다.’
모용린은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탓!
그녀가 땅을 박찼다.
조금 전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전각을 밟아 몸을 반 바퀴 회전시켰다. 연인검은 마치 그녀의 한 몸인 양 유연한 검영(劍影)을 그렸다.
퍼억!
팽가 무인의 머리가 허공으로 치솟았다. 반격은커녕 방어조차 생각할 수 없었을 정도의 쾌검.
모용린 나름대로 강적들을 상대하기 위해 구상한 초식이었다. 속도와 예리함에만 모든 것을 맞춘, 단순하면서도 확실한 위력의 검초.
‘이렇게 쓰고 싶진 않았는데.’
씁쓸한 표정을 잠시 짓던 모용린이 걸음을 떼었다.
지금은 자그만 일에 심란해할 만큼 여유로운 시기가 아니었다.
와룡장은 겉으로는 평소와 같아 보였다.
정문을 지키는 문지기들이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최소한 다른 곳에서 나는 혈향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행이야.’
내심 안도한 모용린이 정문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잡았다.
푹!
칼날 하나가 문을 뚫고 튀어나왔다. 조금만 더 접근했다면 모용린의 눈을 찔러 버렸으리라.
“……!”
깜짝 놀란 모용린이 몸을 뒤로 날렸다.
‘설마?’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만약 제갈세가 무인들이 환각에 이미 걸렸다면, 그리고 자신을 죽이는 대신 남들을 죽이는 쪽으로 움직이게 됐다면……?
그러나 그녀의 예상은 빗나갔다. 좋은 쪽으로.
탓!
정문 위쪽으로 뛰어올라 나타난 이는 와룡장 총관 제갈순이었다.
그는 매서운 눈으로 모용린을 내려보았다.
“그대는 제정신인가, 미쳤는가?”
“……소녀가 미친 것처럼 보이는지요?”
“그래 보이지는 않는군. 하지만 방심할 수는 없는 일이지.”
“이렇게 시간 낭비할 순 없어요. 안으로 들어가 얘기를 나눌 수 있을는지요?”
“한 가지만 묻지. 환각에 걸렸었소?”
모용린은 아주 짧게 머뭇거렸다.
“그래요. 오라버니의 도움으로 금세 풀려날 수는 있었지만요.”
“그랬군. 들어오시오.”
제갈순의 말과 함께 문이 열렸다. 다행한 일이긴 하나 약간 허무한 마음도 들었다.
“그 질문, 왜 하신 거죠?”
“나 역시 환각에 걸렸었으니까.”
“그래도 풀려나셨군요.”
“그랬지. 조카딸을 죽이기 직전이었지만.”
“……그랬군요.”
그제야 제갈순의 날선 반응이 이해되는 모용린이었다. 제갈순은 두 번 생각하기 싫다는 듯 몸서리를 쳤다.
“연아가 내 이름을 크게 외치지 않았다면 내 조카딸의 몸에 칼을 꽂아 넣었을 것이오. 그 사실을 생각하니 내 자신이 견딜 수 없이 미워지더군.”
“자책하지 마세요. 총관의 잘못이 아닙니다.”
“이 얘기는 그만하도록 하지. 이곳에 온 것은 북풍장의 대표로서 왔다고 생각해도 되겠소?”
“물론이에요.”
고개를 끄덕인 제갈순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렇다면 현 와룡장의 대표와 대화하셔야겠군.”
그곳엔 제갈세연이 있었다. 멀리서 봐도 눈에 띌 만큼 확연한 손자국을 목에 남긴 채.
“목은 괜찮은 거야?”
모용린의 물음에 제갈세연은 쓴웃음을 지었다.
“조금 따끔거리지만 괜찮아요. 아, 그리고 숙부님 잘못은 아니니 자책하지 마세요. 자책하면 미워할 거예요.”
“…….”
묵묵부답인 제갈순.
제갈세연은 더 말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는 모용린에게 집중했다.
“북풍장 역시 당했나요?”
“그래. 이곳 분위기를 보자니, 아무래도 우리가 더 크게 당한 모양이야.”
“제갈세가의 무인들은 환술에 대적하는 방법도 익혀 두기 마련이니까요. 아, 이건 숙부님을 탓하려는 게 아니에요.”
묵묵히 있던 제갈순의 어깨가 더욱 처졌다. 제갈세연은 한숨을 작게 쉬고서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렇다는 건, 황룡성 전체가 당했다고 봐야 한다는 소리겠죠? 특별히 와룡장과 북풍장만 목표가 되었을 리는 없으니.”
“그래. 오는 길에 스스로를 죽이는 이들을 수도 없이 보았어.”
제갈세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되어 가는 건지…….”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거지.”
“그들이라면, 역시?”
“팔부혈선.”
제갈세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황룡성 사람들을 모두 죽여 무엇을 하려는 걸까요?”
“그건 모르지. 다만 분명한 건, 지금이라도 살아남은 이들을 한데 모아 저항해야 한다는 거야.”
“그게 과연 가능할까요?”
왠지 자신이 없는 목소리. 하지만 모용린은 제갈세연을 책망하지 않았다. 기실 그녀 역시 비슷한 심정이었으니까.
“그래도 발악을 해 봐야지. 그보다 군사께선 어디 계시지?”
“백부님은 지금쯤 본청에 계실 거예요. 각 세가와 문파의 대표들과 함께…….”
말을 잇던 제갈세연이 흠칫했다.
“그들마저 환각에 노출되었다면!”
“지금 당장 확인해 봐야겠어. 정예 무인들 몇 명만 빌려 줄 수 있어?”
“물론이에요. 그리고 저도 같이 가겠어요?”
“부장주!”
제갈순의 목소리였다.
제갈세연은 그런 반응에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말리지 마세요, 숙부님.”
“그럴 순 없습니다. 형님마저도 당하셨다면 와룡장을 통솔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뿐입니다!”
“그렇죠. 바로 숙부님이요.”
“그게 무슨……!”
“명목상으로만 부장주인 어린애보다는 숙부님이 모든 면에서 나으세요. 그나마 제가 숙부님보다 나은 것은 대(對)환술 저항력 정도일 테고요. 그러니 이 일은 제가 맡는 편이 나아요.”
일리가 있는 말이었기에 제갈순은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아니, 그보다도 조카를 해칠 뻔한 죄책감이 더 컸을 것이다.
“금방 돌아올게요.”
인사를 남긴 제갈세연은 정예 무인 십 인을 끌고 모용린과 함께 와룡장을 나섰다.
그들은 곧장 황룡성 본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주변을 가득 메운 혈향에 제갈세연이 얼굴을 찡그렸다.
“지독하군요.”
“그래. 이게 그저 시작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지.”
“근데 조금 이상하지 않아요?”
“이상하다니?”
제갈세연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길 보세요.”
목숨을 잃은 무인들 사이에서 어린아이가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모용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참혹한 광경이군. 굳이 가리켜 보여 주지 않아도 알고 있어.”
“그게 아니에요.”
제갈세연은 다른 쪽도 가리켰다. 일꾼으로 보이는 이가 쓰러진 주인을 앞에 두고 얼이 빠진 표정으로 주저앉아 있었다.
두 광경을 번갈아 본 모용린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쳐 갔다.
“설마……?”
“그래요.”
제갈세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공을 익힌 자들만 환각에 당했어요.”
“무인들만이……? 하지만 왜 그런 형태의 살진을 펼친 거지?”
“그것까진 모르겠어요.”
모용린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한시가 바쁜 상황이었지만 생각을 할 필요가 있었다.
“거기에 더해서, 큰 오라버니와 작은 오라버니는 환각에 크게 당하지 않았었어. 작은 오라버니는 어렵잖게 환각을 풀었고, 큰 오라버니는 약간의 두통만을 느낀 정도였지.”
“무공의 수준에 따라 환각의 영향력도 다른 모양이에요.”
“그런 모양이야. 하긴 이렇게까지 거대한 규모의 살진을 펼쳤는데 그 정도의 단점은 있어야겠지.”
“그럼 조금 안심이네요. 각 문파의 수장급이라면 환각에 당하진 않았을 테니까요.”
“글쎄…….”
모용린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문제는 그 정도 사실쯤은 적들도 알고 있을 거란 점이야.”
* * *
같은 시각.
황룡성 본부에 모여 있던 무인들은 거대한 압력에 짓눌리고 있었다.
“크……으!”
“이, 이건 대체?”
어마어마한 위압감이 그들의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마치 사자 앞의 생쥐가 된 것 같은, 영혼까지 압도된 것 같은 기분.
모든 것은 본부의 바로 바깥에서부터 느껴지고 있었다.
압도적인 존재는 느리게, 그러나 확실히 다가오고 있었다. 본부 안의 무인들은 어느새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병장기를 뽑아 들고 있었다.
콰과과광!
병풍과 미닫이문 등이 산산이 박살 나서 날아갔다. 그리고 그 사이로 여덟 명의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인들과 같은 인간. 그러나 풍기는 기운만큼은 전혀 다른 세계의 존재들.
그들이 누구인지는 물을 것도 없었다.
“팔부혈선……!”
어느 무인이 억눌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혈선들 중 한 명이 그 목소리를 들은 듯 미소를 지었다.
약간의 살기조차 섞이지 않은 미소.
혈선들은 무인들을 적으로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대들에게는 마음 깊이 감사하고 있다.”
대표 격인 혈선이 입을 열었다. 갈색 피부가 바위처럼 메말라 꼭 조각상 같은 느낌을 풍기는 노인이었다.
“감사라고?”
군사 대리 현상성의 물음에 말을 꺼냈던 혈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대들 덕분에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갈 문을 열 수 있게 되었다.”
“고향? 문?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그대들의 아둔한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얘기지. 이해할 필요는 없다. 그저 알고만 있으면 된다. 우리들이 돌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돌아가게 되었다고?”
고개를 끄덕인 혈선이 말을 이었다.
“문을 열기 위해서는 동력(動力)이 필요하다. 그 동력을 얻을 길이 지금껏 묘연했으나, 결국은 알아낼 수 있었지. 그리고 조금 전, 우리는 대량의 동력을 얻기 위한 행동을 개시했다.”
무인들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들 중, 특별히 감각이 뛰어난 이들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네, 네놈들……!”
“정녕 이런 잔학한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벌였단 말이냐?”
그들의 반응에 다른 무인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잔학한 일이라니, 저들이 대체 무엇을 했기에……?”
현상성이 고통스러운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대학살을 벌였군.”
“그렇다.”
혈선의 대답에 무인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대학살이라고? 설마 마교가 벌써 이곳까지 쳐들어온 것인가?”
“그렇다면 그들을 움직인 것도 저들이란 소리……?”
“마교를 움직인 것은 우리가 맞으나 그들이 학살을 벌인 것은 아니다. 애초에 마교는 너희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으니까.”
“우리의…….”
“시선을……?”
대표 격인 혈선이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로 설명했다.
“우리는 조금 전 황룡성 전체에 걸쳐 있는 초대형 살진을 발동하였다. 그 결과 황룡성 내의 무인 중 오 할이 목숨을 잃었지.”
“……!”
“……!”
아무런 감정도 섞이지 않은 목소리와 대조적으로 너무나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게다가 그 규모란 무인들의 상식을 너무나 벗어나 있었다.
조금 전, 바로 조금 전에 황룡성 무인 중 절반이 죽었다니. 그게 말이나 된단 말인가?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이야기였으나 혈선들의 표정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것을 왜!”
현상성이 고통에 신음하듯 소리쳤다.
“대체 왜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냐! 자랑하기 위해서냐? 우리의 무인들을 너무나 간단히 죽였다고 유세하기 위해서란 말이냐!”
“아니.”
간단히 부정해 버린 혈선이 역시나 설명조의 목소리로 말했다.
“황룡성 내 오 할의 무인들을 흡수하긴 했으나 여전히 문을 열기에는 부족한 수치다. 때문에 보다 많은 무인들의 피가 필요하다. 하지만 살진만으로는 역부족이지. 당장 그대들부터가 전혀 살진에 현혹되지 않았을 정도니 말이야.”
“흡수? 살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무인이 대부분이었으나 혈선은 부연 설명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저 전달하고픈 말만을 전달할 따름.
“그런 까닭에 나머지 무인들의 처리는 우리가 직접 나서서 하기로 했다. 마라혈천은 지금 천마를 죽이기 위해 파견되어 있으니 말이야.”
“마라혈천? 천마를 죽인다고?”
무인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가운데, 현상성만큼은 저들의 말을 거의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현상성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너희가 직접 나서서 우리들을 모두 죽이겠다는 말이냐?”
혈선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비로소 자신들을 이해해 주는구나 하는 미소였다.
“그렇기에 너희에게 감사한다고 말한 것이었다.”
“웃기는 소리! 우리가 호락호락하게 당하고만 있을 거라 생각하나!”
현상성이 두 주먹을 부딪치며 소리쳤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무인들도 온몸으로 살기를 내뿜었다.
혈선들은 하나같이 한숨을 뱉었다.
마치 처음부터 이렇게 되리라 예상했다는 듯.
“하긴 순순히 죽어 줄 리는 없겠지. 그대들을 이해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와 그만둘 생각은 없다. 우리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이니까.”
“…….”
“너희들 중원인들, 그중에서도 무인들은 이럴 때 이렇게 말한다지?”
대표 격인 혈선이 손을 내밀었다.
“와라. 선수는 양보하겠다.”
“……쳐라!”
현상성의 외침에 무인들이 각기 고함을 지르며 절초를 펼쳤다.
“타앗!”
“죽어라!”
그들 모두는 각 문파의 수장급. 그런 만큼 무위 역시 중원에서도 내로라할 수준이다.
그런 만큼 그들이 뿜어내는 기운이란 휘황하고 현란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팔부혈선이 한데 손을 내밀어 가볍게 내저었다.
파앗!
맹렬한 기세로 치닫던 각종 강기가 거짓말처럼 흩어졌다. 아니, 혈선들이 내뿜은 압도적인 기운에 상쇄되어 소멸한 것이다.
“말도 안 되는!”
현상성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성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유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