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章 비무대전
만호림(萬虎林).
과장 좀 섞어, 한때 만 마리의 호랑이들이 서식했다는 숲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한 마리의 호랑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무지막지한 사냥꾼들에 의해 대부분 죽거나 도망쳐 버린 것이다.
한마디로 이 숲에서의 호랑이는 멸종했다는 것.
“곧 멸망당할 정파 놈들의 마지막 자리로 안성맞춤이겠지요.”
멸살독마가 붕대로 칭칭 감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웃었다. 웃는다고 해도 반쯤은 고통 때문에 일그러진 것이었지만.
천마는 그런 독마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너무 무리하는군, 독마.”
“흘흘. 그렇다고 이 늙은이를 내치진 마십시오. 놈들이 죽는 꼴을 보는 것이야말로 이 늙은이에겐 보약이나 다름없을 겝니다.”
“글쎄…….”
천마는 말끝을 흐렸다.
‘정말 그렇게 일이 쉽게 풀릴지 의문이군.’
천마가 대동하고 온 마교도는 몇 명 되지 않았다. 비무대전의 대표로 나설 네 사람과 멸살독마, 혹시나 하여 데려온 마의가 전부였으니.
지독할 정도의 자신감의 표출.
마교 본진은 이곳에서 이십 리도 더 떨어져 있었다. 혹여나 정파인들이 대병력을 몰고 온다면 좀 위험해질 수도 있을 터.
평범한 무인이라면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는 천마.
그렇기에 그와 함께 온 마교도 중 어느 누구도 불안해하지 않았다.
“흘흘. 아쉽습니다. 몹쓸 몸이 온전하기만 했어도 이 늙은이 역시 대표로서 나갔을 터인데.”
천마는 멸살독마의 말을 한 귀로 흘렸다. 그가 온전했다 쳐도 대표로 뽑진 않았을 것이다.
철절삼마와 마교칠절, 이를 한데 합쳐 마교십존이라 이른다.
천마의 바로 아래라 할 수 있는 이들은, 형식적으로는 삼마가 위에 위치하지만 실력 면에선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젊고 강건한 칠절 쪽이 좀 더 강했다.
그런 면에서 철절삼마의 존재는 조금 특이했다. 강자존의 법칙 속에서 유일하게 연장자를 대우해 주는 배분이었으니까.
어쨌든 더 강한 것은 칠절이다. 천마가 그들 중에서만 대표를 뽑은 것도 같은 이유였다.
그녀를 그중 한 명으로 고른 것 역시.
“아까부터 종알종알. 너무 시끄러운 거 알아요, 독마?”
“흘흘. 죄송합니다. 늙은이가 주책을 부리고 말았습니다, 아가씨.”
“아가씨라고 부르지 말라니까요.”
가볍게 눈을 흘기는 백발 여인.
사실 여인이라기보다도 소녀에 가까운 외모를 가진 그녀는 혈패검마 진백란이었다.
천마의 딸.
언젠가는 천마가 될 여인.
그녀는 천마의 재능을 잘 이어받았다. 아직 완전히 개화하지 않았음에도 마교십존의 한자리를 꿰찼을 정도니 말이다.
“진백란, 그게 나를 부르는 이름이에요. 그러니 좀 그렇게 부르라고요.”
“하오나 아가씨…….”
멸살독마는 난감한 듯 손을 내저었다.
지금만큼은 수많은 적들을 학살해 온 독의 마신이 아니었다. 그저 손녀뻘의 아가씨를 대하기 어려워하는 노인일 뿐.
실상 마교의 대부분이 그러했다. 애초부터가 감히 말을 걸 수 없는 존재였으니 말이다.
진백란은 그런 대우를 싫어했다.
그 때문일 것이다. 굳이 혈패검마라는 우악스런 별호를 택한 것도.
물론 얼마 안 가 후회했지만 말이다.
‘별호만 들어선 우락부락한 칼잡이가 연상되니 원.’
천마는 피식 웃고서 입을 열었다.
“란아 너, 지난번처럼 망신당했다간 가만두지 않을 거다.”
“아명(兒名)으로 부르지 말라니까요, 아버님!”
“너도 그럼 아버님이라 부르지 말아야지. 천마 딸 취급받는 게 싫다면서 그렇게 호칭을 편히 부르면 쓰누?”
“으…….”
진백란은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잠시 후 얼굴을 들었을 때, 그녀의 표정은 전에 없이 진지했다.
“방심하지 않아요. 전력으로 정파 놈들을 해치워 버리겠어요.”
“음. 좋은 마음가짐이다. 네가 싸울 상대는 한 명이니 놈들이라 하긴 힘들지만.”
“꼭 그렇게 지적하셔야겠어요?”
천마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두 사람을 지켜보는 다른 마인들도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그들의 웃음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
수풀을 헤치며 일련의 일행이 나타난 것이다.
천마의 눈이 번뜩였다.
“왔구나.”
그의 눈이 일행을 훑었다. 일단 지난번과 거의 흡사한 구성. 지난번 방문했던 이들에 몇 명이 더 추가된 정도였다.
천마의 눈이 한 사내에게 가 멈췄다. 선두에서 당당히 걸어 들어오는 중년의 반백 사내.
“천무맹주 유극태인가?”
천마가 중얼거리고 있을 때.
멸살독마가 앞으로 걸어 나가 일갈했다.
“네놈! 빌어먹을 창잡이!”
일행 중 윤하월이 눈을 번뜩였다. 그의 입가에도 살기 어린 미소가 그려졌다.
“오랜만이로군, 독두꺼비 같은 늙은이.”
“뭐, 뭐야? 독두꺼비라고?”
멸살독마의 얼굴이 퍼렇게 변했다. 어찌나 열 받았는지 이마에 힘줄이 투툭 돋아났다.
그때 청량한 웃음소리가 독마의 귀를 때렸다.
“아하핫. 독두꺼비래.”
“…….”
“아. 미안해요, 독마.”
“끙. 아닙니다, 아가씨. 잘하셨습니다. 자칫하면 이 늙은이가 주제도 모르고 덤벼들 뻔했습니다.”
의외로 깨끗이 몸을 돌리는 멸살독마였다. 그러나 그가 포기하거나 겁먹은 게 아님을 마교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누가 놈의 상대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멸살독마가 목 긋는 시늉을 했다.
“최대한의 고통 속에서 끝장을 내 주게.”
“흥. 걱정 붙들어 매쇼.”
구릿빛 근육이 온몸을 두르고 있는 거한, 무령권마가 대꾸했다.
그는 대번에 천마 곁으로 다가가서는 말했다.
“제가 먼저 나가겠습니다, 천마.”
“일단 상황 좀 보고.”
짤막히 대꾸한 천마가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오느라 수고했소.”
스르릉!
일행의 선두에 있던 사내, 검왕 유극태가 대뜸 북제혈랑을 뽑아 들었다.
“네놈이 천마냐?”
“뭣이 어째! 넌 뭐하는 개뼈다귀기에 함부로 천마님께 말을 거는 게냐?”
물러났던 멸살독마가 발끈해 나섰다.
“…….”
천마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 누르며 손짓을 했다. 다른 마인들이 반강제적으로 멸살독마를 끌어냈다.
좀 상황이 정리된 뒤에야 천마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다. 그러는 네놈이 천무맹주냐?”
“……!”
검왕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듣던 대로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군.”
“왜, 네가 그러는 건 괜찮고 본좌는 안 되냐?”
“척 봐도 본좌가 네놈보다 존장인 듯한데 버릇이 없구나.”
“미안하지만 우리는 너희처럼 쓸데없이 나이를 따지진 않아서.”
피식 웃은 천마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본좌 앞에서 본좌 본좌 떠들지 마라. 듣는 본좌 기분이 나쁘니.”
“듣던 대로 미친놈이군.”
“본좌의 얘기를 듣긴 많이 들었나 보군? 너, 본좌한테 관심이라도 있는 거냐?”
“놈!”
검왕이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자세를 취했다. 그런 그의 앞을 정천이 막아섰다.
“관두십시오.”
“비켜라! 이런 건방진……!”
“전형적인 도발 아닙니까. 일일이 넘어가서야 상대방의 의도에 말려드는 것밖에 안 됩니다.”
평소와 달리 차분하게 설명하는 정천이었다.
“천마와 싸울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니고 맹주입니다. 냉정을 잃고서 그를 이길 수 있을 거라 봅니까?”
“으음.”
검왕은 침음하면서 북제혈랑을 집어넣었다.
천마는 내심 아쉬움을 느꼈다.
“역시 자네도 왔군, 정천.”
“전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본좌와는 붙지 않을 셈인가?”
“맹주가 당신을 상대할 겁니다.”
천마는 아쉬운 듯 웃었다.
“아쉽군. 그대와 싸우는 게 제일 재미있을 것 같은데.”
꾸욱.
검왕은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주먹을 쥐었다.
조금 전 천마와 말다툼하던 때보다도 지금이 더 화가 났다.
‘놈마저도 본좌가 아닌 정천을 택한단 말인가!’
당장이라도 죄다 쳐죽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래도 검왕은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참았다.
‘무시당하면 실력으로 갚아 주면 그만이다.’
속으로 연신 되뇌며 냉정을 찾는 검왕이었다.
“그런데…….”
천마는 주변을 대강 훑었다.
“이 공터, 싸우기엔 좀 좁은 것 같지?”
“그렇군요.”
정천의 대꾸에 천마가 히죽 웃었다.
“넓힐까?”
“반반씩 맡죠.”
“그래.”
천마는 바로 옆의 진백란을 힐끔 보았다.
“네가 하렴.”
“알겠어요.”
그녀가 혈륜검을 들고 나섰다.
그에 맞추어 정천 역시 검왕 쪽을 돌아봤다. 어쨌든 당신이 대장이니 명령하라는 의미.
그러나 검왕은 분노를 삭이느라 여념이 없었다. 생각에 잠긴 듯 인식도 못하는 모양.
할 수 없이 정천은 백미련을 돌아봤다.
“실력 좀 보여 줘.”
“흥.”
가볍게 코웃음을 친 백미련이 몸을 띄웠다.
그녀의 구절검이 펼쳐졌다. 반대편에선 진백란이 혈륜검에서 붉은 검강을 출수하고 있었다.
콰과과과광!
수도 없이 많은 나무들이 베이고 잘려 쓰러졌다. 그녀들은 검무를 추듯 하늘하늘한 몸놀림으로 아름드리나무들을 베어 넘겼다.
누가 우위라 하기 힘들 정도의 속도.
공터의 넓이가 종전의 열 배가 되기까지는 반다경도 걸리지 않았다.
“후우, 후우…….”
“헉, 헉…….”
진백란과 백미련은 가볍게 숨을 골랐다. 사실 평소라면 그다지 힘을 들이지 않았을 텐데, 괜히 경쟁이 붙어서 무리를 하고 말았다.
진백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너, 제법이구나. 하긴 나를 제압할 때 알아봤지. 비겁하게 둘이 덤비긴 했지만.”
“마치 일대일이었다면 당하지 않았을 거란 것처럼 얘기하는군.”
“당연하지!”
두 여인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너도 여기 출전하지?”
“그래…… 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본후는 출전하지 않아.”
아쉬운 눈빛이 진백란의 눈을 스쳤다.
“그렇군. 그럼 나중에라도 자리를 따로 마련하면 되겠지. 그땐 내빼지 말고 붙는 거다?”
“그 전에 일단 오늘 이 자리에서 살아남고 봐야지 않겠어?”
“흥.”
코웃음을 친 진백란이 웃었다. 백미련 역시 희미한 미소를 입에 머금었다.
“이제 잔해만 치우면 되겠군.”
천마가 가볍게 손을 저었다.
그 순간 나무들이 마치 보이지 않는 거인의 손에라도 이끌리는 듯 멀리 던져져 날아갔다.
평범한 허공섭물의 수백 배는 됨직한 힘.
모두가 홀린 듯 그 모습을 바라봤지만, 그중에서도 검왕의 충격은 특히나 컸다.
‘자연지경. 그것도 본좌를 능가하는…….’
자신 역시 자연검을 펼친다면 능히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천마는 검을 쥐지 않은 채로 그것을 해냈다.
이 차이는 상당히 컸다.
“제가 할까요?”
옆에서 정천이 물어 왔다. 딱히 깐죽거리는 말투인 것도 아닌데 검왕으로선 기분이 나빴다.
“본좌가 하겠다.”
북제혈랑을 뽑아 든 검왕이 가볍게 휘둘렀다.
이윽고 쓰러진 나무들이 돌풍에 휩쓸리듯 한 방향으로 날아갔다.
마인들 역시 조금 놀란 눈치였다.
“정파무림의 정점이란 말이 허언은 아니군요. 상당한 경지인 듯싶습니다.”
“그렇군.”
귀도신마의 말에 천마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여전히 미소가 입에 걸린 채였다.
“그러나 본좌의 상대는 아니지.”
“그야 그렇지요.”
귀도신마 역시 깨끗이 인정했다. 제삼자인 그가 보아도 두 사람 사이의 실력 차이는 상당히 컸다.
천마가 손뼉을 쳐 주의를 환기시켰다.
“자, 슬슬 시작해 보도록 하지. 그쪽에선 누가 먼저 나오겠나?”
“제가 가겠어요.”
나직이 말하며 앞으로 나서는 사람은 궁후 요태희였다. 다른 이들은 무반응이었으나 천마와 진백란, 귀도신마는 살짝 긴장했다.
“시작부터 강하게 나오는군.”
천마가 중얼거렸다. 그가 직접 맞붙어 본 요태희는 십존으로서도 꽤 버거운 상대였다.
게다가 이곳 공터는 지난번의 비무장의 열 배도 넘는 넓이.
게다가 마음만 먹으면 숲 전체를 전장으로 삼아도 문제가 없다. 그뿐 아니라 곳곳에 엄폐물이 널려 있어 숨기에도 적합했다.
활을 다루는 그녀의 진정한 실력이 발휘될 수 있다는 것.
보통 활이라면 모를까, 강철도 뚫어 버리는 그녀의 활이라면 숲은 도리어 최적의 장소였다.
‘그렇다면 이쪽에선…….’
천마는 그답지 않게 고민했다. 그녀의 활에 맞서 누구를 내보내야 할 것인가?
“제가 가겠어요.”
호기롭게 나선 사람은 진백란이었다.
천마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란아, 미안하지만 넌 좀 쉬어야 할 것 같다. 조금 전에도 나무 베느라 괜한 힘을 뺏잖느냐?”
“그 정도는 준비운동도 안 됐어요.”
“그래도 좀 쉬어라.”
“아버님!”
천마는 진백란을 무시한 채 무령권마를 돌아봤다.
“자네가 나가게.”
“알겠습니다.”
상대방이 원거리전의 대가라면 이쪽은 근접전의 대가. 천마는 극단적인 성향의 무인을 내세워 맞불을 놓기로 했다.
쿵쿵!
두 주먹을 부딪쳐 보이는 무령권마.
대체 주먹이 무엇으로 만들어진 건지, 부딪칠 때마다 쇳소리가 났다.
“한번 놀아보자고, 소저.”
“그러죠. 잘 부탁드립니다.”
얌전한 요태희의 대답에 무령권마는 코웃음을 쳤다.
“적에겐 그딴 소리를 하는 게 아니다!”
쿵!
그가 땅을 박차고 내달렸다. 단번에 요태희에게로 이어지는 돌진.
요태희도 어느 정도 예상했던 만큼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는 유엽보(柳葉步)를 밟아 단번에 뒤쪽으로 크게 물러났다.
거리를 벌림과 동시에 당겨지는 시위.
타앙!
곧장 무령권마의 어깨를 노리고 궁강이 날아들었다. 그 위력은 강철마저 꿰뚫어 버릴 수준!
“흥!”
무령권마는 물러나거나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그저 날아드는 기운에 주먹을 날릴 뿐이었다.
꽈앙!
화산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요태희의 궁강이 허공에서 폭발해 버렸다.
그 폭발을 헤치고 나오는 무령권마.
몸이 검게 그을렸긴 해도 타격은 없어 보였다.
“괴물일세.”
“무시무시한 호신강기로군.”
정천의 한마디를 장유추가 거들었다.
무령권마는 끈질기게 요태희에게 따라붙었다. 요태희는 일찌감치 숲 속으로 뛰어든 뒤였다.
“으라차!”
기합성과 함께 사방으로 주먹을 뻗는다. 요태희를 맞추려는 게 아니다. 거치적거리는 엄폐물을 싹 쓸어버리려는 것이었다.
콰과과과광!
숲이 붕괴되고 있었다. 커다란 나무들이 꺾여 나가거나 하늘로 튀어 올랐다.
그 사이사이에서 요태희가 날린 궁강이 날아들었다.
“흠!”
무령권마는 기합을 뱉으며 호신강기를 강화했다. 이번에도 궁강은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했다.
“쥐새끼처럼 숨지 말고 나오시지!”
호기롭게 외치는 무령권마. 요태희는 신경 쓰지도 않듯 궁강만 간헐적으로 날려댔다.
나머지 사람들이 헛웃음을 띠며 그 전황을 지켜보던 중,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입을 뗐다.
“무령권마에게 유리하군.”
“궁후에게 유리하군.”
전자는 검왕, 후자는 천마였다. 우습게도 서로 상대방 측의 우세를 점친 것이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제갈현과 멸살독마가 각기 물었다.
그에 대한 두 사람의 대답 역시 간단했다.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하고 있잖나. 무령권마의 호신강기는 뚫을 수 없는 방패와 같아.”
“타격이 지속적으로 주어지고 있잖아. 궁후의 궁강은 바위로 떨어지는 물방울이야.”
옆에서 얘기를 듣던 진백란이 입술을 오므렸다.
“창과 방패 얘기는 들어봤어도 물방울 얘기는 처음이네요.”
“간단한 거다, 란아. 수백 년 동안 바위 위로 물방울이 떨어지다 보면, 언젠가는 그 바위에 구멍이 생기고 마는 게지.”
“그렇게 오래 걸려서야 소용이 있을까요?”
“보통은 무의미하겠지. 공격하는 쪽이 먼저 지칠 수도 있고.”
천마는 턱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그녀는 좀 달라. 그냥 물방울이라기엔 날카롭고, 몰아치는 간격도 좀 더 좁지.”
“그렇다면…….”
“불패의 방패는 없다.”
천마는 짤막히 평했다. 그 순간.
콰아아앙!
“크으윽!”
무령권마가 처음으로 땅을 굴렀다. 그의 주먹에선 약간이지만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처음부터 지속적으로 궁강을 막아 오던 주먹이었다.
“구멍이 뚫렸군.”
천마의 목소리가 나직이 울렸다.
강기를 머금은 화살이 연달아 쏘아졌다. 자세가 흐트러진 무령권마의 틈을 놓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쾅! 쾅! 쾅!
“크아악!”
무령권마는 거북이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서는 궁강에 타격당하고 있었다. 본능적인 자세이긴 하나, 방어에 용이하진 않았다.
그의 온몸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한 번 깨어진 방패이다 보니 균열이 전체로 퍼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끄으으으.”
무령권마의 몸이 축 늘어졌다. 누가 보아도 목숨이 간당간당한 빈사 상태.
그제야 요태희가 숲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축 늘어진 무령권마를 마지막으로 살핀 후 천마를 돌아봤다.
“끝났어요.”
진백란은 한숨을 쉬었다. 첫판부터 이렇게 압도적으로 패해서는 좋지 않았다.
천마는 혀를 쯧 하고 찼다. 무령권마가 패배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본좌의 추측이 빗나갔잖나. 멍청한 계집.”
“네?”
그 순간 죽은 듯 엎어져 있던 무령권마가 벌떡 일어났다.
“먹어랏!”
그의 전력을 담은 주먹이 요태희의 옆구리에 꽂혔다. 진각을 밟은 자세도 이상적인데다 권강까지 제대로 실린 강격이었다.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이 기묘하게 꺾였다. 호신강기를 가볍게 꿰뚫고 갈빗대까지 싹 파괴해 버린 엄청난 위력이었다.
“컥……!”
요태희의 입에서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녀의 몸은 허무하리만치 간단히 무너져 내렸다. 무령권마는 두 번째 주먹도 날리려다가 그냥 멈췄다.
단 일격으로 끝.
방심이 불러온 패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