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章 혈천이 열리다
장로들을 전멸시킨 이후, 마라혈천은 어떠한 형태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제갈현은 비영대 전체를 금역에 투입시킬까도 고민했다. 그러나 눈앞의 마교를 둔 채 내부에만 신경을 쓸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비영대를 둘로 나누었다.
하나는 마교의 동태를, 다른 하나는 금역을 감시케 했다.
담미화에게서 그 얘기를 전해들은 정천은 혀를 찰 따름이었다.
“쓸데없는 짓이야. 하지만 군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
“마교 쪽을 살피는 비율을 줄였어야 했을까요?”
“비영대 전원으로 금역을 감시케 해도 모자라. 일단 약속을 했으니 천마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을 테고.”
“하지만 맹주는 그 말을 믿지 않는 눈치라고 해요.”
“그럴 테지.”
정천은 그 말을 끝으로 침묵했다.
시간은 쏜살처럼 흘렀다. 그사이 상당수의 문파들이 천무맹을 버리고 빠져나갔다.
처음은 소규모 문파들이었다. 그렇기에 수뇌부 측에서도 별반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나중엔 중형 문파들도 도망칠 낌새를 보였다. 이렇게 되니 검왕과 수뇌부로서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검왕은 즉시 이름난 문파마다 서신을 보내어 으름장을 놓았다.
도망치거나 발을 빼는 자는 추후 천무맹의 이름 아래 엄준한 심판을 받게 하겠소.
말이 좋아 심판이지, 딴마음 먹었다간 멸문시켜 버리겠다는 협박이었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역효과였다.
본디 천무맹에서 마음이 달아난 이들은 물론, 천무맹에 우호적이던 이들에게도 적대적으로 비쳤던 것이다.
마치 자기들을 예비 배신자로 잠정 지은 것 같은 내용이니, 좋게 봐줄 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마교와 내통하려는 무리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중 몇몇은 실제로 연락이 닿았다.
대부분 천무맹을 배반해 내부에서부터 마교를 돕겠다는 내용.
그 말을 전해들은 천마는 웃으며 한마디만 할 따름이었다.
“서신 들고 온 사자를 베어서 돌려보내.”
그 후 한동안 황룡성의 사대문 앞엔 머리를 베인 시체들이 놓였다. 내통하겠다는 무리도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졌다.
그리고 천무맹 무인들은 확실히 깨달았다.
‘천마는 우리의 모든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정파인의 피를 타고났다는 것, 혹은 정파에 동조하고 함께했다는 것.
천마에게 있어선 그것만으로도 누군가를 멸할 이유가 되었다.
‘너희는 모두 죽는다.’
내통자들의 시체가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비무대전의 날이 밝았다.
* * *
희미한 어스름이 깔린 새벽.
백호문 앞에 몇몇 인영들이 나타났다.
가장 먼저 나온 이는 검왕이었다. 그는 수행원으로서 남궁운과 군사 제갈현을 대동한 채였다.
이윽고 나타난 장유추가 말을 건넸다.
“오랜만이오.”
“음.”
짤막한 대답. 장유추는 남궁운과 제갈현을 알아보고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왜 두 사람이 여기 있소?”
“본좌가 수행원으로서 데려왔네.”
“의외로군. 가장 충성스러운 오른팔을 데려오리라 생각했는데.”
제갈현이야 그렇다 쳐도 남궁운은 수십 년 동안 적대해 온 정적이 아니던가. 그런 이를 수행원으로 대동한 검왕이나 그걸 받아들인 남궁운이나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검왕의 눈 역시 장유추를 훑었다. 그답다고 해야 할지, 수행원은커녕 아무도 대동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놈은 어디 있나?”
“놈이라니, 누굴 말하는 건지 모르겠군.”
“뻔한 것 아닌가?”
장유추는 턱을 쓰다듬었다.
“정천이라면 새벽녘에 화륜문을 나섰소. 어디에 갔는지는 잘 모르겠군.”
“흥. 내뺀 건가.”
검왕의 비웃음에 장유추는 실소를 터트렸다.
그 모습이 검왕을 자극했다.
“뭐가 그리 우습나?”
“그럼 우습지 않겠소? 다른 이도 아니고 정천더러 내뺐다고 하다니.”
“놈이라고 공포가 없진 않을 터. 죽음의 공포에 내뺐을 수도 있지.”
“전혀.”
장유추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한 진마동의 나락을 체험하고 온 정천이오. 그리고 그곳에서 유일하게 살아 돌아왔고.”
“…….”
“그런 정천이 공포에 내뺄 정도라면, 우린 옛적에 오줌을 지리고 있었어야 정상이지.”
검왕이 이를 악물었다. 어째 정천 곁에 있는 놈들은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말엔 저도 동감이에요.”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태희가 하늘거리는 걸음으로 안개를 헤치며 나타났다.
그녀의 곁엔 백미련과 화연란이 대동하고 있었다.
장유추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구절검후라면 모르겠지만, 화륜문주까지 데려가도 괜찮겠나?”
“걱정하지 마세요, 장 아저씨. 저도 제 한 몸을 건사할 수 있어요.”
당돌한 화연란의 대답에 장유추는 껄껄 웃었다.
“암, 그렇지. 화륜패 녀석의 여식을 노부가 잠시 얕보았군. 이거 미안하구먼.”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두 사람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보며 검왕은 눈살을 찌푸렸다. 겁먹고 있는 것보다는 낫지만 이건 소풍 가는 분위기가 아닌가.
“궁후가 데려온 아이들은 누군가?”
검왕의 물음에 제갈현이 대꾸했다.
“어린 쪽은 신생 문파 화륜문의 문주인 화연란입니다. 옛 용검대주인 화륜패의 딸이지요. 조금 나이가 있는 쪽은 아마도 궁후의 제자로 보입니다.”
그 목소리가 들린 걸까. 백미련의 차가운 눈이 제갈현을 노려봤다.
“본후는 이 여자의 제자 따위가 아니야.”
검왕이 물었다.
“그렇다면 너는 누구인가?”
“대답할 의무는 없다.”
“그것이 본좌의 질문임에도 말인가?”
순간적으로 예리한 살기가 검왕에게서 흘러나왔다. 잠시 흠칫하는 백미련이었지만, 이내 평상심을 되찾고서 말했다.
“그래.”
“건방진!”
검왕이 쩌렁쩌렁한 일갈을 통했다. 당장이라도 허리춤의 북제혈랑을 뽑아 들 기세였다.
일촉즉발.
그 상황을 깨고 들어온 사람은 또 한 명의 문젯거리였다. 윤하월이 청룡창을 비스듬히 들고서 터덜터덜 걸어왔던 것이다.
하필 윤하월은 검왕과 백미련 사이를 지나갔다. 그 덕에 검왕이 화를 낼 시점을 놓치고 말았다.
장유추가 잘됐다는 듯 재빨리 말을 꺼냈다.
“여, 수련은 좀 했는가?”
윤하월은 힐끔 장유추를 보고서 대꾸했다.
“선배에게 굳이 말할 의무는 없겠지. 말하지 않겠소.”
“흥. 건방진 것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
“서글서글하게 굴기라도 해 달라는 거요?”
“뭐,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말 시키지 마시오. 선배와는 한마디도 하기 싫으니.”
“허허. 하여간 귀여운 맛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녀석이로군.”
“닥치시오.”
날이 선 말에도 장유추는 웃기만 했다. 그 모습에 남궁운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달라졌군, 저 친구.”
예전의 장유추였다면 윤하월을 때려죽이려고 했을 것이다.
지금의 윤하월 이상의 개차반이라고 평가받았던 그였으니까.
하지만 장유추는 변했다.
비단 팔 하나를 잃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나저나…….”
요태희가 운을 뗐다.
“그는 아직 오지 않았나요?”
“그런가 보군. 분명 나오기는 가장 빨리 나왔을 텐데.”
장유추가 말을 받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설마 이 친구, 정말 도망쳐 버린 건 아니겠지?”
“흥. 그럴 때엔 내가 그놈 몫까지 싸우면 그만이오.”
“윤하월 자네, 말 시키지 말라고 하는 것치고는 묘하게 내 말에 자주 끼어드는군.”
“…….”
“어쨌든 그럴 거라면 관두라고. 정천 그 친구 몫은 노부가 할 테니 말이야.”
요태희도 희미하게 웃고서는 끼어들었다.
“양보하고 싶지 않은 일이군요.”
“같은 사람이 두 명을 상대하다간 마교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걸. 어떻게든 책을 잡으려 할 테니, 차라리 본후가 그 대신 끼겠어.”
백미련까지 대화에 끼어드는 상황.
누구도 맹주인 검왕을 생각지도 않는 것 같았다.
“저…….”
화연란 혼자서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나마 그녀만이 검왕의 표정이 붉으락푸르락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검왕은 당장이라도 폭발하려는 것 같았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모두들 본좌를 무시하는 것인가……!”
‘이런.’
난감해진 남궁운이 검왕을 말리려 들 때였다.
“남의 자리 뺏을 생각 말고 본인 상대나 이길 생각을 하시지.”
정천이었다.
그가 새벽안개 속에서 스르륵 걸어 나왔다.
“어딜 갔다 온 건가?”
장유추의 물음에 정천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몇 가지 준비를 할 게 있었습니다.”
“음모를 꾸미는 것은 아닐 테지?”
검왕이었다. 그는 여전히 정천을 신뢰할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정천이 검왕을 위아래로 훑었다. 이윽고 그의 허리춤에 걸려 있는 북제혈랑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모용세가에서 잘 전한 모양이군.’
거기까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검왕이 자신을 의심하든 말든, 정천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바를 하기로 결심한 뒤였다.
“갑시다.”
정천이 걸음을 뗐다.
“무시할 생각이냐!”
검왕이 날카롭게 소리쳤지만 정천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 역시 검왕을 무시한 채 정천의 뒤를 따랐다.
무언가 잘못됐다.
검왕은 그렇게 생각했다.
‘본좌는, 나는…….’
툭.
검왕의 어깨에 남궁운의 손이 얹혔다. 검왕의 시선을 받은 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지금은 아무 생각도 말게. 그저 천마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그에 대해서만 생각하게.”
“……그렇군.”
검왕도 그제야 분노를 삭였다.
진짜 적은 정천이 아니다. 팔부혈선이나 다른 놈들도 아니고. 지금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숙적은 다름 아닌 천마였다.
‘중원의 정점에 서 있는 사내.’
오늘.
검왕은 그를 쓰러트리고 중원 역사에 이름을 남길 것이다. 천하제일, 나아가 고금제일의 천마를 쓰러트린 무인으로서.
일행이 떠나는 모습을, 담미화는 비영각의 꼭대기에서 응시하고 있었다.
정천은 떠나기 전에 그녀를 비영대주 비목에게 소개시켰다. 나아가 지금까지 그녀가 정천의 수발을 들었다는 것 역시.
비목은 어이없어 했으나 이미 지난 일이었다. 정천의 실력을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고.
정천은 그녀와 비목에게 명령에 가까운 부탁을 남겼다.
“총력을 기울여 금역을 감시해. 놈들이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어.”
“…….”
“마라혈천, 나아가 팔부혈선은 오늘 반드시 움직일 거야. 그렇게 되면 어떻게든 나에게 와서 알리도록 해.”
정천은 마교 쪽을 감시하는 비영대원 역시 이쪽으로 빼돌리도록 종용했다.
“하지만 그건 힘듭니다. 이미 제갈 군사와 맹주께서 명령을…….”
“그러니까 이렇게 찾아와서 말하는 거잖아.”
정천은 비목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부탁하는 것도 아니고 애원하는 것도 아냐. 내 말을 따르지 않겠다면 지금 여기서 넌 죽어.”
“내가 죽음을 두려워할 거라고 보는 거요?”
“내가 말하는 죽음은 보통의 죽음과는 조금 다를걸. 난 지금 네 껍데기의 죽음을 말하는 게 아냐.”
“껍데기의 죽음이라니?”
정천의 손에서 흑색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비목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마교의 사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서, 설마?”
“난 마음만 먹으면 널 백치로 만들 수 있다. 머릿속을 완전히 지워 버리고 내 명령만 따르게 하는 거지. 이게 내가 말하는 죽음이다. 이런 꼴이 되고 싶은 거냐?”
비목은 고개를 저었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개죽음은 싫었다.
“나는 마교와의 전쟁에서 어떤 식으로든 활약하고 싶소.”
“그러려면 내 말을 따라. 장담하지. 이 전쟁은 비단 마교와의 것만이 아니야. 보다 큰 적은 이곳 황룡성 내의 금역에 있다.”
비목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당신의 말을 따르지.”
정천은 담미화에게도 명령했다.
“내게 보고하는 건 네가 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정천은 일련의 과정을 마치고서야 다른 대표들과 합류했다.
비목은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정천의 말을 따랐다. 잠시 후엔 파견되어 있는 비영대원 전원이 귀환하게 될 것이다.
이미 싸움은 시작된 것.
담미화는 금역 쪽을 돌아보며 각오를 다졌다.
* * *
깊은 안개.
광륭혈독무라 불리는 금역의 안개였다.
흑천살의 눈빛이 그 너머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우습군.”
그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고작 저따위 것들로 우리의 동향을 파악하려 했던가. 천무맹 놈들은 발전이란 게 없군.”
그는 안개 너머를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곳에 은신하고 있는 비영대원들을.
딴에는 최대한의 기량을 발휘하여 은신한 것이리라. 그러나 그들의 노력도 천성적인 만통안(滿通眼)을 지닌 흑천살에겐 무의미했다.
묵묵히 있던 살마괴가 물었다.
“숫자는 얼마나 되지?”
“금역 전체에 걸쳐 대략 서른 명쯤 될까.”
천연살이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멍청이들이군. 고작 그 숫자로 우리의 그림자라도 잡을 거라 생각하나?”
“별수 없을 것이다. 놈들에게 있어 당장 더 중요한 것은 마교일 테니.”
“그렇기에 놈들이 멍청한 거겠지.”
천연살이 육포를 꺼내어 입으로 찢었다.
“범이 숨어 있는 것도 모르고 늑대가 알짱거리는 걸 경계하고나 있으니.”
“몸을 잘 숨긴 범의 공이지. 늑대만 있는 줄 아는 우매함이야 어쩔 수 없는 법.”
“그래, 다른 동지들은?”
“기다려라.”
흑천살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곧 이곳으로 모두 모이게 될 것이다.”
그의 말대로였다. 일다경쯤 지나니 곳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윽고, 안개를 뚫고서 인영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숫자는 총 구십구 인.
본디 백 명이었으나, 배신자 백미련의 부재로 인해 세 자릿수에 이르진 않았다.
그들의 우두머리 격인 흑천살이 곧 중앙으로 걸어 나갔다. 마라혈천들은 그를 둘러싼 채 침묵했다.
동지들을 둘러본 흑천살이 입을 뗐다.
“혈선들께서 때가 왔음을 알리셨다.”
고요 속에 작은 웅성거림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두 시진 후, 금역을 감싸던 광륭혈독무는 천연살이 해제할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린 더 이상 모습을 숨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수백 년 만이다.
몇 대를 이어져 온 광륭혈독무가 사라진다는 건 모든 게 변한다는 걸 의미했다.
“그것을 신호로 행동에 나선다.”
“천무맹 놈들을 모두 쓸어버리는 건가?”
천연살이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 그는 희열을 참을 수 없는 듯 몸을 떨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그들 모두는 버림받은 자식들이다. 역대 장로들, 혹은 각 문파의 사생아들. 그것이 그들의 정체성이었다.
혈선에 대한 복종의 의미로 바쳐진 제물.
그러나 그들을 바친 부모들은 자식들의 존재를 잊었다. 때문에 그들은 반사적으로 혈선에 대해 충성하게 되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백미련 같은 배신자 역시 간혹 생겼으니까.
그럴 때마다 그들은 직접 배신자를 처단해 왔다.
백미련 역시 다를 것은 없었다.
“기왕 나가는 김에 구절검후, 그년에게도 죽음의 맛을 가르쳐 줘야겠지?”
실실 웃으며 말하는 천연살. 광기 어린 표정임에도 모두들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기실 자신들도 다를 게 없었기에.
“설명 중이다, 천연살.”
“쳇. 알았다고, 흑천살.”
천연살이 입을 다물자 흑천살이 말을 이었다.
“우리의 목표는 천무맹이 아니다.”
“……?”
의문의 물결이 좌중을 쓸었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길 속에서 흑천살은 담담히 혈선들의 명령을 전달했다.
“그분들의 목적은 거대한 혈전, 그리고 거기서 이어지는 학살이다. 그러려면 필연적으로 마교와 천무맹이 맞붙어야만 한다.”
“놈들은 이미 싸우기 일보 직전이잖아?”
“아직은 모르는 거지. 게다가 비무대전에서 변수가 일어날 수도 있다.”
“천무맹이 이길 수도 있다는 건가?”
흑천살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 맹주 유극태는 멍청이다. 반면 천마 진검운은 역대 최강이라는 수식이 붙을 정도의 인물이지.”
“그렇다면 생각할 것도 없지 않나? 멍청이가 최강을 이길 리 만무하잖아.”
“하지만 천무맹 측엔 변수가 있다.”
천연살의 머릿속에 얼굴 하나가 스쳤다.
그의 입이 귓가에 걸렸다.
“놈이군.”
“어쨌든 그런 만약의 상황이 일어날 수 있기에, 우리들 마라혈천은 전력으로 한 명의 사내를 암살할 것이다. 그를 죽임으로써 마교와 천무맹은 돌이킬 수 없는 전쟁에 돌입할 테고.”
마라혈천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설마……?”
“그래.”
고개를 끄덕인 흑천살이 말했다.
“우리의 목표는 천마 진검운이다.”
가벼운 흥분이 좌중을 휩쓸었다.
최강의 무인을 죽인다. 그 사실이 주는 희열이었다.
“하하하! 재미있어. 재미있겠군. 다른 놈도 아니고 천마가 대상이란 말이지?”
천연살은 손뼉까지 쳐 가며 기뻐했다.
본디 살진을 펼치는 게 그의 능력. 적을 끌어들이는 거라면 모를까, 적진에 침투해 암살을 벌이는 것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기뻐하고 있었다.
굳이 살진이 아니더라도 사람 죽일 능력이야 무궁무진했던 것이다.
“누가 갈 거지, 흑천살? 혈천 최강인 너야 당연히 갈 테고, 다른 녀석들은 누구를 데려갈 거냐?”
은근히 바라는 눈빛으로 묻는 천연살.
그러나 흑천살은 나직이 고개를 저었다.
“고르지 않는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설마 혼자서 가려는 건 아닐 테고…….”
천연살이 말끝을 흐렸다. 흑천살이 의미하는 바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설마……?”
“그래.”
흑천살이 말했다.
“가는 것은 우리들 구십구 인 모두다.”
“……!”
충격이 좌중을 휩쓸었다.
내내 침묵하던 살마괴가 흑천살의 바로 앞으로 걸어 나왔다.
마라혈천의 무공 서열 일, 이 위의 대면에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그건 혈선들께서 정하신 건가?”
“그래.”
“그래야 할 정도로 천마가 강하다고?”
“그렇다.”
두 번에 걸친 대답에도 살마괴는 물러나지 않았다.
“놈은 아마도 천무맹주 유극태와 붙게 될 거다. 맹주가 된 이후 예전 같지 않다지만, 그는 정파 최고의 무인으로 손꼽히는 인물이야. 그런 적을 상대한 뒤의 천마를, 우리 구십구 인이 우르르 몰려가 제거해야 할 정도라는 말이냐?”
“그렇다.”
우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악문 살마괴가 몸을 돌렸다. 혈선들의 명령인 이상 더 이상 반항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그런데…….”
천연살이 말을 꺼냈다.
“그분들께선 어디 계시지?”
“주의가 부족하군, 천연살.”
흑천살은 차분한 얼굴이었다.
“이미 이곳에 와 계시다.”
그 순간 한쪽의 안개 너머에서 열여섯 개의 붉은 눈이 빛났다. 그 눈을 목도하는 순간 마라혈천들은 숨이 멎는 느낌이었다.
그들은 강하다.
중원에서도 그들과 일대일로 겨루어 이길 무인은 백 명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그들임에도, 혈선들의 눈빛을 마주할 때마다 심장이 작아지는 느낌을 피할 수가 없었다.
마라혈천은 단 한 번도 팔부혈선의 본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을 두려워했다.
그들에게 충성했다.
‘그러나 이 안개가 사라진다면…….’
천연살은 생각했다.
‘우리는 저들이 두렵다. 그렇기에 바로 앞에 있음에도 가까이 다가갈 엄두도 내지 못한다. 하지만 이 안개가 사라진다면…….’
팔부혈선을 눈앞에서 볼 수 있다. 그렇게 됐을 때의 느낌은 과연 어떨까?
생각하는 사이, 안개 너머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때가 되었다.”
때가 되었다.
그 말을 듣게 되니 마라혈천은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다. 정말로 때가 된 것이라고.
팔부혈선의 눈빛이 평소 이상의 형형한 빛을 뿜었다.
“천마를 죽여라. 그 외의 것은 무시하되, 방해하는 자가 있다면 마찬가지로 죽여라. 그 후 황룡성으로 당당히 귀환해라.”
천마를 죽인다.
그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목격자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 마교도들은 폭주하여 황룡성으로 치고 들어올 것이다.
“그런 연후에는 어떻게 합니까?”
흑천살의 물음.
혈선들은 약간의 뜸도 들이지 않았다.
“내일 아침까지, 이곳 황룡성 내에 어떤 것도 살아 있지 못하게 만들어라. 미생물 하나조차 남아 있어선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숙원이 이루어질 것이다.
마지막 말만은 혈선들의 입속에서만 메아리처럼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