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七章 모용세가
그 시각.
정천이 서 있는 곳은 천무맹주의 방 앞이었다.
두 개의 창날이 그의 가슴팍을 겨냥하고 있었다. 침입자를 향한 호위무사들의 창이었다.
정천은 피식 웃었다.
“치워. 그리고 맹주더러 정천이 왔다고 전해.”
그러나 창날은 치워지지 않았다.
호위무사들로선 당연한 대응이었다. 다짜고짜 경공을 펼쳐 맹주실 앞까지 달려온 놈이다. 신분이 어찌 됐든 일단은 막고 봐야 했다.
정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안 치우면 뚫고 들어간다.”
“큭!”
호위무사들이 내심 각오를 할 때였다.
“들여보내게.”
맹주, 검왕 유극태의 목소리였다. 호위무사들은 내심 안도하며 그제야 창을 치웠다.
거침없이 걸어간 정천이 문을 밀었다.
검왕은 방 한편에서 난초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예의를 찾아보기 힘든 행보로군.”
“급한 일이니 좀 봐주시죠.”
“자네 말마따나 정말 급하다면 봐줘야지. 하지만 본좌를 얕보는 마음에 일부러 그러는 거라면 가만둘 수 없는 일이야.”
정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말 돌리는 재주도 없고, 그럴 성격도 아니니 단도직입적으로 묻죠.”
“뭔가?”
“내가 무섭습니까?”
“……!”
검왕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가 손을 뻗었다. 허공섭물에 의해 벽에 걸려 있던 검이 날아들었다. 태천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분명 명검이었다.
“정말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군. 무공 수위가 높다고 세상 모든 게 자네 마음대로 될 거라 생각하나?”
“쓸데없는 사족은 치우시죠. 그러니까 제가 무섭다는 겁니까, 아닙니까?”
“본좌는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방을 뒤흔들었다. 미처 문을 닫지 못했기에 바깥에 있던 호위무사들이 픽 쓰러졌다.
그쪽을 힐끔 본 정천이 혀를 찼다.
“사자후는 좀 자제해 주시죠. 둘만 있는 것도 아닌데요.”
“자네부터가 본좌의 성정을 건드리지 말게.”
“강한 반발은 곧 긍정이라는 걸 모릅니까?”
“본좌와 정말 해보자는 건가?”
정천은 고개를 저었다.
“이럴 시간 없습니다. 안 무섭다는 걸로 알 테니 검을 거두시죠.”
“본좌를 도발한 이유가 뭔가?”
“확인해 보고 싶었습니다.”
“무얼 말이지?”
“맹주께서 천마를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
“……!”
검왕이 크게 움찔했다. 그가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이름 때문이었다.
천마.
그러고 보면 정천은 천마를 찾아갔었다. 생각한 것보다 너무 일찍, 너무나 성한 모습으로 돌아와서 미처 떠올리지 못했지만.
“천마를…….”
검왕의 입이 느릿하게 열렸다.
“만나고 돌아온 모양이군.”
“물론입니다.”
“상처 하나 없이 말인가?”
“싸울 일이 없었으니 다칠 일도 없었지요. 뭐, 아예 안 싸웠다고 하기도 그렇지만.”
검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제가 직접 싸우진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궁후가 싸웠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비무였지요.”
“누구와 말인가?”
정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승패부터 얘기하는 편이 낫겠죠. 이십 합이 지나기 전에 그녀가 패배했습니다.”
“……천마와 붙었던 모양이군.”
분명했다.
궁후 정도의 실력자를 이십 합 안에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은 중원을 통틀어 다섯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터였다.
그렇기에 검왕으로선 호기심이 동할 수밖에 없었다.
“둘의 대결은 어떠했나? 천마의 자연지경의 수준은 어느 정도였지?”
정천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쓰지 않았습니다.”
“음?”
“천마는 자연지경은커녕 나찰수라조차 뽑지 않았습니다.”
검왕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구, 궁후는? 그녀 역시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육박전을 펼쳤나?”
“그랬더라면 이십 합이 아니라 오 합도 버티지 못했을 겁니다. 궁후는 아랑궁을 든 채 천마에 맞섰습니다.”
“……그는 진정 괴물이로군.”
검왕이 침음을 토했다. 강하다는 거야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뭐, 장소 자체가 그녀에겐 약간 불리했으니까요. 비무장이 아니라 좀 더 넓은 공간과 엄폐물이 있었다면 그리 쉽게 패하진 않았을 겁니다.”
“궁후는 괜찮은가?”
“경상을 입긴 했지만 회복됐습니다.”
“그렇군.”
검왕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정천은 분명 자신의 무위를 확인해 본다고 했다. 그렇다는 건 머릿속으로 나름 판단을 내렸으리란 의미였다.
곧이곧대로 믿을 수야 없겠지만, 신뢰도가 없느냐면 그건 아니었다.
검왕은 내심 긴장한 채 물었다.
“그래서, 그자와 본좌를 비교한다면 누가 우위에 있다고 보나?”
“제가 대답해 주길 바랍니까?”
검왕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대답하게.”
정천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본인 앞에서 말하기는 조금 미안했기 때문이다.
“천마의 우세. 전력으로 붙는다면 이백 합을 넘기지 않을 겁니다.”
“…….”
검왕은 이를 악물었다.
그 역시 지난 시간을 인고 속에 보냈다.
맹주직을 차지하기 위해 고된 폐관의 시간을 거쳤고, 남들의 수십 배에 이르는 노력과 고통을 겪었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천마와의 무위 차이는 그럼에도 이 정도란 말인가?’
무공의 수준 차이, 혹은 개인의 자질 차이.
어느 쪽이 되었든 뒤처지진 않는다고 자부했던 검왕이었다.
그러나 정천의 한마디는 그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만 같았다.
검왕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본좌는 자네의 말을 믿지 않겠네. 고작 그 얘기를 하러 온 거라면, 본좌의 심중을 혼란케 하러 온 거라면 그만 돌아가게.”
검왕의 말에 정천은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그것이 검왕을 다시금 자극했다.
“정말 본좌가 분노하는 모습을 보러 왔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니, 애초에 이따위 것이나 말하러 왔을 거라 생각한단 말입니까?”
“이따위 것이라고?”
“이따위 것이 아니면 뭡니까. 누가 누구보다 세다는 게 그렇게나 중요합니까?”
“으음!”
검왕은 터져 나오려는 일갈을 애써 참았다. 그러나 정천은 무심하기까지 한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어느 정도는 이해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특별한 상황이 아닙니까? 단순히 개개인의 무력 서열보다도 천무맹의 앞날이 더 중요한 것 아닙니까?”
“본좌를 조롱할 땐 언제고 이젠 선생인 양 가르치려 드는 건가?”
“조롱은 무슨. 천마보다 약하다는 게 조롱입니까? 좀팽이 같으니.”
“허.”
검왕은 헛웃음만 뱉었다. 저런 말을 듣고 나니 화가 나기보다도 기가 막혔다.
하지만 정천은 진지한 얼굴이었다.
“제가 온 이유는 간단합니다. 두 사람의 무위를 상세히 비교해 보고, 그에 맞는 조언을 하기 위해서죠.”
“조언이라고? 자네가?”
“귀담아 들어서 나쁠 건 없을 텐데요?”
검왕은 마지막으로 참기로 했다.
“말해 보게.”
“간단합니다. 비무대전에서 천마에겐 윤하월을 붙이십시오.”
“…….”
검왕은 터져 나오려는 욕을 애써 참았다.
“어째서 그렇게 주장하는 거지?”
“천무맹의 승리를 위해서입니다.”
정천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비무대전의 대결 방식은 기본적으로 삼선승제. 다섯 명이 각각 맞붙어 세 명 이상 승리하는 쪽이 이기는 형태입니다.”
“그건 본좌도 알고 있네.”
“그렇다면 계산도 간단한 것 아닙니까? 가장 약한 사람을 가장 강한 적에게 붙이고, 가장 강한 사람이 두 번째로 강한 적을 상대하고, 같은 식으로 죽 이어지면 어지간해선 질 수가 없죠.”
굳이 정천이 말해 주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간단한 셈이다.
그러나 검왕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무인의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윤하월이 가장 약하니 천마에게 붙이잔 말인가?”
“그렇습니다. 솔직히 말해 장유추 선배와 비슷할 것 같은데, 그래도 칼밥 먹은 걸 생각해 보면 장 선배 쪽이 조금 낫겠죠.”
“하!”
검왕은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트렸다.
아마 윤하월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정천을 죽이려 들었을 것이다.
“결국 본좌도 천마의 상대는 되지 못하니, 그를 피해 승리를 취하자는 거군. 비겁하게 말이야.”
“비겁이고 뭐고, 지고 나면 비겁한 거 따질 수도 없습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그렇기에 우리들 천무맹의 자존심이 서는 것이네.”
검왕은 정천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자네의 의견은 각하하겠네.”
“자존심 때문입니까?”
“그렇다. 죽어서도 꺾일 수 없는 무인의 자존심 때문이지.”
정천은 실소를 머금었다.
“죽고 나면 자존심이 무슨 의미인가 싶지만, 맹주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어쩔 수 없겠죠.”
“……그럼 물러가게. 더 자네를 보고 있기가 불편하군.”
“두 번째 제안까지 말하고 가겠습니다.”
콰직!
검왕의 바로 옆에 있던 벽에 큼직한 균열이 갔다. 검왕은 더 참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정천을 노려보고 있었다.
“무사들을 불러야겠나? 아니면 본좌가 직접 자네를 나가게 만들어야겠나?”
“저를 천마에게 붙여 주십시오.”
“뭐라고?”
“제가 천마와 싸우겠단 말입니다.”
검왕은 피가 나도록 이를 악물었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간단합니다. 그나마 승리의 가능성이 높은 쪽이 천마와 붙겠다는 거죠.”
“놈!”
이제 검왕에게선 찢어 죽일 듯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멍청이가 아닌 바에야 지금 정천의 말을 못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 말은 곧 네놈이 본좌를 능가한다는 뜻이렷다!”
“틀립니까?”
“네놈이 정말 죽어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엄청난 기세의 검강이 검왕의 팔 끝에서부터 뿜어져 나왔다. 그대로 휘두른다면 맹주실 전체가 풍비박산이 날 터였다.
그 와중에도 정천은 침착했다.
“지난번의 승리가 진짜 승리였다고 생각합니까?”
“큭.”
멸천을 떠올린 검왕이 침음을 흘렸다.
정천에 대한 적개심과는 별개로, 그때의 검격은 분명 엄청난 위력이었다.
스치기만 했더라도 죽었을 터.
필사(必死)라는 단어는 그 검에만 허락된 것이리라.
‘허나……!’
그래 봐야 결국은 검격. 궤도를 예측할 수만 있다면 피하는 것도 가능할 터였다.
그 사실이 검왕에게 힘을 주었다.
“네놈이야말로 뭘 모르는군. 이미 한 차례 경험을 한 본좌다. 다음번엔 피할 자신이 있다. 그리고 본좌가 그 검격을 피하기만 한다면, 그때 죽게 되는 것은 네놈이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게 그겁니다.”
“뭐라고?”
정천은 한숨을 애써 참으며 말했다. 그 행동조차도 검왕의 억장을 뒤집어 놓았지만.
“한 번 보았으니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게 가능한지 아닌지는 일단 차치하고서, 그 말을 뒤집으면 결국 이것 아닙니까?”
“이것이라니?”
“본 적이 없다면 피할 수도 없다.”
“……?”
“직접 경험해 보신 맹주께서 누구보다도 잘 알 겁니다. 생사의 기로가 갈리는 그 상황에서, 순간적으로 터져 나온 거대한 검격을 피할 수 있다고 봅니까?”
“…….”
‘그렇다’라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피할 수 있으리란 생각이 차마 들지 않았던 것이다.
멸천의 검격은 거대했다. 하늘을 뚫어 버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거대한 궤적을 남겨 놓았을 만큼.
그것을 바로 앞에서 피한다?
그 존재를 미리 알고 있더라도 불가능에 가깝다. 검왕 본인조차 팔이나 다리 하나를 잃을 각오를 해야 하리라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천마에게 먹힐 수 있다는 의미.
나아가 그를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컸다.
‘마교라는 것은 애초에 천마를 중심으로 구축된 기형적인 집단. 다시 말해 천마만 제거할 수 있다면 집단 전체가 붕괴될 것이다.’
단순히 승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차후 수백 년 동안은 마교가 감히 중원을 노리지 못하도록 만들 수 있었다.
‘아니, 마교란 집단 자체를 없애는 것도…….’
그 자체로 엄청난 사건이요, 역사가 될 것이다. 정파무림의 후세에 길이길이 남겨지게 될 역사.
‘그러나……!’
검왕은 알고 있었다. 그 역사의 주인공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어디까지나 이름을 남기는 것은 천마를 죽인 사나이, 정천이 될 것이다.
그 점을 생각하니 머릿속이 새삼 싸늘하게 식는 느낌이었다.
“역시 각하한다. 허락할 수 없다.”
“…….”
이렇게 되니 정천도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유가 뭡니까?”
“너를 믿을 수가 없다. 너와 관련된 모든 것을 믿을 수가 없다.”
“그게 무슨…….”
“이것 자체가 네놈들의 계략이라면? 네가 천마와 마교 놈들과 짜고서 벌인 일이라면?”
정천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했다. 그러나 이미 불이 붙은 검왕은 쉴 새 없이 말을 쏟아 냈다.
“네놈은 일전에도 마교의 무리를 불러낸 적이 있었다. 그 결과 놈들을 추격했던 혈풍대가 전멸했어! 게다가 이번엔 천마를 만났다면서 아무 상처도 없이 멀쩡히 귀환했다!”
“그거야…….”
“놈들과 내통했다고 본다면 당연한 일이겠지. 안 그런가? 무엇보다도 네놈은 그 천마의 무공을 사용하고 있지 않나!”
“…….”
정천은 입을 다문 채 검왕을 노려봤다. 검왕 역시 밀리지 않고서 정천을 노려봤다.
“네놈에게 맡길 순 없다. 천마는 본좌, 아니 나 유극태가 쓰러트릴 것이다.”
“천마에게 죽게 될 겁니다.”
“개소리! 네놈의 말 따윈 믿지 않겠다.”
정천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사람 자체가 망가졌군.’
그는 맹주가 되어선 안 될 인물이었다. 책임감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그는 정천을 두려워하는 소인배가 되어 버렸다.
‘단순히 내가 더 강하기 때문에?’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분명한 것은 맹주의 자리가 그를 바꿔 놓았다는 점이었다.
도리어 맹주가 되기 전의 검왕은 맹주 이상으로 빛이 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존심만을 내세우는 인물일 뿐.
대화가 통할 상대가 결코 아니었다.
“더 얘기해 봐야 의미가 없을 것 같군요.”
“그렇다면 썩 꺼져라!”
“그렇게 떠들지 않아도 물러날 겁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히 말해 두죠.”
“듣지 않겠다!”
검왕의 말에도 정천은 입을 움직였다.
“항시 안팎을 함께 주시하십시오. 지금 이 순간에도 혈선들이 움직이고 있을지 모릅니다.”
“흥! 팔부혈선부터가 네놈이 만들어 낸 허상일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그게 무슨……!”
그때였다.
군사 제갈현이 맹주실로 헐레벌떡 뛰어들어 왔다.
“맹주!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호위무사들이 왜 쓰러진 것이고 이곳의 모습은 왜 이런 겁니까?”
검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제갈현은 그와 정천의 얼굴을 번갈아 보고서야 대강 상황을 짐작했다.
‘결국은 터지고 말았나.’
전 맹주인 남궁운이 귀띔해 준 사실이 있었다. 제갈현은 그의 말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유극태는 스스로 무너질 것이네.’
그리고 지금.
그의 말대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었다.
기꺼워 할 일은 아니었다. 어찌 됐든 천무맹의 중심인 맹주가 바로 그였으니 말이다.
그가 흔들리면 천무맹도 흔들린다. 제갈현으로선 그 상황만은 막아야 했다.
검왕은 정천을 노려본 채로 물었다.
“무슨 일인가?”
“급히 보고할 일이 있습니다.”
“말하게.”
제갈현이 숨을 고르고서 말했다.
“남아 있던 장로들이 전원 피살된 채 발견됐습니다.”
* * *
모용린은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 앞엔 본가에서부터 날아온 서신이 놓여 있었다. 그 내용은 실로 간단했다.
즉각 천무맹 내의 세력을 수습한 후 귀환하라.
쉽게 말해 침몰 중인 배를 버리라는 의미.
본가에선 이미 천무맹의 패배를 기정사실화 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결국 아버님께서도 그리 판단하신 모양이구나.”
바로 옆에서 모용훈이 씁쓸히 중얼거렸다. 모용린은 뭐라고 해야 할지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형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모용준이 조심스레 물었다. 모용훈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입을 뗐다.
“본가의 모사들이 정확히 판단한 거라고 본다.”
“그렇다면…….”
“어쩌면 근시일 내에 천무맹이 무너질지도 모른다.”
모용준은 눈앞이 아찔해지는 기분이었다.
언제나 당연한 듯이 존재해 왔고, 언제까지나 당연히 존재할 것이라 생각했던 곳이었다.
그런 곳이 무너지게 되리란 말을 들으니,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임에도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직 확정된 건 아무것도 없어요.”
모용린의 말이었다.
모용훈은 쓴맛을 느꼈다. 가능하다면 그 역시 그녀와 함께 희망에 기대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역할은 동생을 옆에서 돕는 모사의 그것.
매몰차더라도 현실을 직시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마교의 군단은 역대 최강이다. 과거의 용검대가 있었다고 해도 당해 낼 수 없었을 거야. 더군다나 현재의 천마 진검운 역시 역대 최강의 천마라 불릴 정도의 실력자다.”
“…….”
“솔직히 말하지. 현재 정파의 지존이라 불리는 검왕 유극태도 그를 이길 수는 없을 거야.”
“형님, 너무 성급하게 단정 짓는 게 아닙니까?”
모용준의 지적도 분명 일리가 있었다. 실제로 천마의 무공을 직접 경험해 본 이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용훈은 확신하는 얼굴이었다.
“어쩔 수 없어. 지금의 유극태는 천마를 죽었다 깨도 이길 수 없다.”
“대체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는 이미 무너지고 있으니까.”
“예?”
“나는 직접 보았다. 그의 눈이 예전의 총기를 완전히 잃어버린 모습을.”
실제로 이 중 천무맹 회의에 참석했던 사람은 모용훈뿐이었다.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겠지만, 지금의 유극태는 예전 검왕으로 불리던 시절의 그가 아냐.”
“으음…….”
모용준은 침음을 흘리며 모용린을 흘끔 보았다.
어차피 실질적인 결정권자는 그녀였다. 이는 그도 모용훈도 암묵적으로 합의한 사실이었다.
여동생에게 모용세가를 맡긴다.
그리고 자신들은 그녀의 양 날개가 되어 아낌없는 지원을 벌일 것이다.
‘이번에 본가로 돌아가게 된다면 그 점부터 확실히 할 것이다.’
모용훈도 모용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
모용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힘겨운 고심을 하고 있다는 걸 알기에 모용훈도 모용준도 그녀를 채근하지는 않았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모용린이 말을 꺼냈다.
“그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음? 그 사람이라니?”
“알고 계시잖아요, 큰 오라버니.”
모용훈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기실 그녀가 고민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정천 형님 말이구나.”
모용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같아선 나도 희망적인 얘기를 하고 싶다. 하지만…… 글쎄. 나도 확답하지 못하겠구나. 형님에게 검왕, 아니 우리 수준의 세력만 있었더라도 모르겠지만…….”
“그의 곁엔 상당한 강자들이 모여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럴 거다. 듣기로는 궁후 요태희 역시 형님을 따르는 것 같더구나.”
새로운 이름에 모용린이 눈을 빛냈다.
그러나 여전히 모용훈은 부정적이었다.
“전쟁은 소수만의 싸움이 아니야. 그래, 그들의 실력이 만부부당이란 데엔 이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너무나 숫자가 적어. 최소한 대문파 하나 정도의 세력이 뒤를 받쳐줘야 할 거다.”
잔인하지만 냉철한 판단이었다.
모용준도 그 사실을 알기에 큰형의 말에 토를 달지 못했다.
하지만 모용린은 다른 의미로 침묵하고 있었다.
“린아?”
모용훈이 다시 부를 때, 모용린은 한없이 맑은 눈으로 큰오빠를 바라보고 있었다.
“큰 오라버니.”
그녀의 시선이 모용준에게 향했다.
“그리고 작은 오라버니. 두 분은 저를 도와주시겠다고 약속하셨었죠.”
“그랬지.”
“네게 가문의 미래를 맡기고 우리는 최선을 다해 널 돕겠다고, 그렇게 맹세했다.”
고개를 끄덕인 모용린이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그 약속을 이행해 주세요. 제가 아무리 바보 같고 허황된 결정을 내리더라도 저를 믿고 도와주세요.”
“…….”
“린아…….”
간단한 부탁은 아니리라. 두 오라비는 그 사실을 마음속에서부터 체감할 수 있었다.
모용린은 결심을 굳힌 표정으로 말했다.
“모용세가는 정천과 화륜문을 돕겠어요. 본가에도 그렇게 서신을 올리겠습니다.”
결국은 이렇게 되는구나.
모용훈은 어느 때보다도 심호흡을 했다.
“모 아니면 도로구나. 성공한다면 천무맹의 실세가 되겠지만, 실패하면 본가에까지 타격이 막심하겠지.”
“실세가 되고 싶어 그를 도우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패하고 싶지도 않아요.”
그녀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도 확고했다.
“우리가 제대로 힘을 발휘하려면 본가의 힘까지 빌려야만 가능할 거예요. 가능하시겠어요?”
눈을 살짝 감았다 뜬 모용훈이 말했다.
“해내겠다.”
* * *
아직까지도 상황 파악을 미처 못한 제갈현이 움찔했다.
“내통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맹주?”
“놈은 마교와 내통했다!”
검왕의 외침에도 제갈현은 쉬 동조할 수 없었다. 하물며 정작 중상모략을 당하고 있는 정천이 침착한 걸로 보아선 더더욱.
제갈현이 정천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맹주는 미쳤소.”
정천의 목소리는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이미 눈이 반쯤 뒤집힌 검왕에 비할 수야 없었지만.
“미쳤다고? 감히 본좌에게 그런 망언을!”
“젠장! 이제 그만 현실을 직시하십시오. 뻔한 것 아닙니까? 팔부혈선이, 놈들이 수를 쓴 겁니다!”
“으음!”
혈선의 이름이 나오자 검왕도 잠시 주춤했다. 정천이 곧장 말을 이어 갔다.
“아마도 마라혈천을 부렸을 테죠. 놈들의 실력이라면 평화에 찌든 장로들을 학살하는 정도야 문제가 없었을 겁니다.”
“…….”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그런 일을 벌였다면, 다른 이들은 몰라도 동행했던 윤하월이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그놈을 포섭했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윤하월이 포섭당할 인물로 보입니까? 그 자존심 강한 인간이?”
검왕은 이를 악물었다.
“그럼 왜 혈선들이 장로들을 제거했다는 건가!”
정천은 난감해졌다. 이런 간단한 것까지 설명해 줘야 한단 말인가?
다행히 제갈현이 끼어들었다.
“아마도 눈엣가시였기 때문일 공산이 큽니다. 기본적으로 장로들은 혈선의 직계 수하들이었으니까요.”
“그렇다면 더더욱 살려 뒀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니지요. 이용 가치가 사라졌으니 없애는 것이 응당 간편했을 겁니다.”
“…….”
“더군다나 그들을 죽임으로써 천무맹의 체계 자체를 뒤흔들 수도 있지요. 실제로 현재 각 문파들 사이엔 흉흉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습니다.”
대다수 장로들이 하나 이상의 문파를 배후에 두고 있었다.
그런 장로들이 몰살당했다는 건, 해당 문파들에도 큰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으음.”
검왕은 분노를 삭였다.
화가 가라앉으니 냉정도 어느 정도 되돌아왔다.
“……문파들의 상황은 어떤가?”
“폭발 직전입니다. 누군가 간단히 건드리기만 해도 내란이 터질 겁니다.”
“본좌가 직접 나서겠다.”
검왕의 말에도 제갈현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생각해 놓으신 게 있습니까?”
“문주들을 모두 호출하겠다. 으름장을 놓으면 제깟 것들이 어쩔 텐가?”
이젠 제갈현이 정천과 비슷한 표정이 되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역효과만 불러일으킬 겁니다.”
“놈들이 감히 본좌에게 대들 것이란 뜻인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맹주께서 나서신다면 일단은 분위기를 진정시킬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건 억누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해결책이 아니라 미봉책일 뿐, 추후에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인망 높은 사람이 나서서 문주들의 마음을 달래야 합니다. 더불어 혈선들의 정보를 적당히 흘려 경거망동하지 못하게 막아야 합니다.”
“인망 높은 사람이라면…….”
제갈현은 마음속으로 빌었다. 이 말에 검왕이 흥분하지 않기를.
“남궁세가주가 안성맞춤이리라 봅니다.”
“……남궁운!”
불행히도 역효과였다.
검왕은 이제 제갈현조차 정천을 볼 때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군. 군사, 그대 역시 본좌를 끌어내리고 싶었던 모양이군.”
“무슨……! 그런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다만, 뭔가. 본좌는 그저 싸움 잘하는 무뢰배일 뿐이란 건가? 인망 있는 군자는 남궁운 그놈이란 말인가?”
“맹주!”
“그만! 본좌가 문주들을 직접 호출하겠다!”
검왕은 성큼성큼 방을 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 앞을 정천이 가로막았다.
“아직 얘기 안 끝났습니다.”
“네놈……!”
파앗!
검왕의 몸에서 백색 호신강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그 빛은, 예전과 달리 어딘지 모르게 탁한 느낌이 강했다.
“비키지 않으면 쳐 죽이겠다.”
“해 보시죠.”
정천도 더 참고만 있진 않았다.
강룡검이 구현되어 오른손에 들렸다. 검왕의 백색 기운이 순간 정천의 흑색 기운에 밀려났다.
“으음!”
검왕의 이마에 실핏줄이 그어졌다. 이윽고 팽팽하게 맞서기 시작하는 두 사람의 기운.
쿠쿠쿠쿠.
방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들이 있는 건물 자체가 경련하고 있었다. 마치 소규모의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제갈현은 그 모습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말려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천무맹 내에서 세 손가락에 들 강자 두 명이다. 도대체 누가 저들을 말릴 수 있단 말인가?
저들이 싸우기 시작하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누구의 승리로 끝을 맺든 천무맹으로선 엄청난 손실일 터.
“무슨 짓들인가!”
쩌렁쩌렁한 외침이 들려왔다. 전대 맹주 남궁운이 험악해진 얼굴로 들어오고 있었다.
“자네는 또 무슨 일인가?”
시선은 여전히 정천에게 고정한 채 묻는 검왕.
남궁운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서 정천에게 소리쳤다.
“그만두게! 싸우기도 전에 일을 그르칠 생각인가?”
“대가리가 이래선 싸워 봐야 소용없습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지금 따 버리는 편이 낫죠.”
정천의 대답에 검왕이 두 눈을 부릅떴다.
“죽여주마!”
검왕의 검이 정천의 미간으로 치고 들어갔다. 남궁운이 나서려 했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정천은 피하지 않았다.
강룡검을 찔러 넣어 검왕의 검극을 노렸다.
두 자루의 검이 서로의 끄트머리를 노리고 쇄도했다. 그리고 깨어지는 것은…….
쨍강!
검왕의 검이 산산이 부서져서 사방으로 튀었다.
“큭!”
검왕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검이 파괴된 여파인지 손바닥이 찢어져 피를 흘리고 있었다.
“네놈……!”
검왕은 경악한 눈이었다. 반면 정천은 차분한 얼굴이었다.
정천이 그새 압도적으로 강해진 것은 아니다. 지난번 대결에서 힘을 아꼈던 것도 아니다.
그저 검왕의 검이 태천검이 아니란 것뿐.
그 작은 사실 하나가 이런 결과를 낳고 말았다.
“강룡검에 대적하려거든 최소한 명검칠존에 비할 만한 검을 들고 오십시오. 자기 자신의 검강을 버티는 데에도 급급한 그런 검 말고.”
“크윽!”
검왕이 주먹을 쥐고 기운을 격발했다. 굳이 검이 없더라도 그는 충분히 강했고, 정천을 때려눕힐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끝나지 않았다! 네놈 따위, 검을 들지 않고도 상대할 수 있다!”
“그럴지도. 하지만 관두렵니다.”
강룡검이 흑색 기운으로 화하여 사라졌다. 검왕은 당혹스런 얼굴이 되었다.
“무슨…… 짓이냐?”
“더 싸울 이유가 없으니까요. 게다가 맹주 살해자의 죄목을 뒤집어쓰고 싶진 않습니다.”
이대로 싸운다면 자신의 필승이란 의미.
검왕은 자존심이 산산이 박살나는 기분이었다.
“네놈!”
“그만하게!”
남궁운이 검왕의 앞을 막아섰다.
“우리끼리 싸워서 뭘 어쩌겠다는 건가? 지금 황룡성 바깥에 누가 와 있는지, 황룡성 내부에 어떤 존재가 도사리고 있는지를 모른단 말인가?”
“…….”
“황룡회의 개최를 허가했던 건 자네가 맹주가 되더라도 잘해 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야. 그런데 지금 이 꼴이 뭔가?”
검왕은 할 말이 없었다.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침묵할 따름이었다.
남궁운이 정천을 돌아봤다.
“자네도 그만하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물러가게.”
“그럴 순 없습니다.”
“자네, 왜 그러나?”
정천은 남궁운의 시선을 피했다. 오직 검왕만을 바라볼 따름.
“천마와는 내가 싸우겠소. 이를 허가하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서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을 겁니다.”
“천마와 붙겠다고?”
남궁운의 얼굴이 경직됐다. 더 듣지 않아도 대강의 상황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은 두 사람의 자존심 싸움이란 소리.
“중원 최강이란 이름이 그렇게나 탐나는가?”
남궁운의 물음에 정천은 코웃음을 쳤다.
“최강? 그런 건 줘도 안 가집니다. 쓸데없이 거창하기만 한 이름, 가져 봐야 귀찮기만 할 텐데 무엇 하러 갖겠습니까?”
“그럼 왜 천마와 붙겠다는 건가?”
“그래야 그나마 승산이 있을 테니까요.”
검왕이 주먹을 꾹 쥔 채 부르르 떨었다. 남궁운이 애써 그의 몸을 억눌렀다.
“천마와 싸워 이길 생각인가?”
“질 거란 생각으로 싸워 본 적은 없습니다. 반드시 이길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고 답해야겠지만요.”
“그나마 승률이 더 높을 것이기에 싸우는 것이란 말인가?”
정천은 혀를 찼다.
“그냥 이쪽의 제일 약한 사람을 천마에게 붙이면 다 될 일입니다. 망할 자존심 때문에 그게 싫다니 제가 싸우겠다는 거고요.”
“그런 것인가.”
상황을 모두 파악한 남궁운이 검왕을 돌아봤다.
“자네는 그게 싫다는 것이고?”
“물론!”
검왕이 남궁운을 떨쳐 내고서 이를 갈았다.
“천무맹의 맹주는 본좌다! 모든 결정권은 본좌에게 있어. 그게 싫다면 애초에 네놈이 맹주가 되었으면 될 일 아닌가!”
“…….”
“하지만 네놈은 맹주가 아니야. 본좌가 맹주다! 네놈이 본좌보다 정말 강할지는 모르겠으나, 네놈은 어떤 이유로든 결국 맹주의 자리를 얻지 못했다. 그러니 본좌에게 이래라 저래라 말하지 마라! 본좌의 판단에 불응한다면 결국 둘 중 하나일 뿐이다.”
검왕의 손이 바깥을 가리켰다.
“천무맹을 나가라.”
정천의 시선과 검왕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남궁운도 제갈현도 숨을 죽인 채 추이를 지켜보기만 했다.
잠시 후.
정천이 몸을 돌렸다.
“그러죠.”
“정천!”
남궁운이 급히 정천을 뒤따랐다. 정천은 그가 오든 말든 무시한 채 걸음만 옮길 따름이었다.
“정말 천무맹을 탈퇴할 건가? 이곳을 버리고 떠날 거냔 말일세.”
“모르겠습니다.”
시큰둥한 대답. 의외로 화가 난 것 같진 않았다.
“자네, 괜찮은가?”
“괜찮고 자시고 할 것도 없죠. 맹주의 말이 옳습니다. 맹주의 말을 따르지 않을 거였다면 차라리 제가 맹주가 되었어야 했겠죠.”
“그럼…….”
“맹주가 천마와 붙어도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살아남을 수 있는 기회를 주려 했는데, 그게 싫다면 어쩔 수 없겠죠.”
남궁운이 움찔했다.
“그 말은, 유극태가 천마에게 죽을 거란 말인가?”
“비무대전이란 게 단순한 친목회는 아니잖습니까? 서로 적대하는 두 세력의 대표들이 나와 생사투를 벌이는 것. 그렇다면 누군가 죽는다 하더라도 이상할 것은 없을 텐데요.”
“내가 묻고자 하는 건 천마가 유극태를 능가하느냐는 걸세.”
“물론입니다.”
잔인하리만치 분명한 대답.
자신의 일이 아닌데도 남궁운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리고 천마가 유극태를 죽일 것이다……?”
“적대 세력의 수장을 처치할 수 있는 둘도 없는 기회입니다. 놓치는 게 우스운 일이죠.”
잠시 입을 닫았던 정천이 조금 뒤 덧붙이듯 말했다.
“게다가 맹주는 강합니다. 천마조차도 두 번 싸우고 싶진 않을 겁니다. 그러니 처음 봤을 때 우환의 싹을 자르려 할 테죠.”
남궁운의 얼굴이 구겨졌다.
개인 대 개인으로선 싫어해 마지않는 인간이지만, 그래도 현 천무맹주다. 그냥 죽는 꼴을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그렇다면 호위무사들을 보내야겠군.”
“소용없을 겁니다. 맹주 본인부터가 꺼릴 테고, 비무대전 자체도 그런 분위기를 용납하지 않을 테고요.”
마교 측에서 바란 것은 양측의 대표들만이 참석하는 것.
쓸데없이 거창하게 일을 벌일 것 없이, 소수의 사람들만이 대결의 결착을 확인하자는 것이다.
각 오 인의 참가자, 그리고 참관인 입장의 무인 소수가 대동한다. 혈전의 자리에 나오는 사람은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렇다면 나는 유극태가 죽는 모습을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던 남궁운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다. 이것은 그저 정천의 추측에 불과할 뿐! 천마가 정녕 유극태를 이길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남궁운의 표정은 이내 어두워졌다.
‘정천이 허튼소리를 할 사내는 아닐 터인데…….’
어느새 남궁운은 걸음을 멈춘 뒤였다.
그러는 사이 정천은 거침없이 멀어져 가고 있었다.
* * *
정천은 곧바로 북풍장으로 향했다. 마침 그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던 모용세가 삼남매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당신, 관심법이라도 쓰는 거예요?”
“관심법이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우리 마음을 읽었냐는 거예요.”
정천은 황당하단 얼굴로 모용린을 보았다.
“나를 열렬히 사모하기라도 한 건가?”
“누, 누가 그랬다는 거죠?”
“네가.”
모용린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젓고는 최대한 차가운 얼굴로 정천을 쏘아봤다.
“잡담은 그만하죠.”
“그러지. 시작한 쪽은 너지만.”
“……왜 여길 찾아온 거죠?”
“빌릴 게 있어서.”
두근.
모용린의 가슴이 뛰었다.
바로 반 시진 전에 정천의 힘이 되겠다고 결정한 그녀였다. 그리고 조금 전에 본가로 보낼 서신까지 끝낸 차였고.
그런 시점에 정천이 찾아와 빌릴 것이 있다고 한다.
정말 마음이라도 꿰뚫어보는 게 아닐까 싶었다.
“정말 뻔뻔스럽군요.”
생각과 달리 말이 튀어나왔다. 말을 꺼낸 모용린이 더 놀라고 말았다.
“뻔뻔스럽다니?”
모르겠다는 눈으로 묻는 정천.
모용린은 잠시 더듬거리다가 목소리를 높였다.
“어,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우린 그렇게 간단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당신 마음대로 움직여 주는 수하들이라 생각하면 곤란해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의 정천.
모용린은 그녀답지 않게 말을 버벅거렸다.
“그, 그러니까…….”
지켜만 보던 모용훈이 끼어들었다.
“사실 저희 남매가 조금 전 결심한 게 있습니다.”
“무슨 결심을 했는데? 내가 알아먹을 수 없는 얘기를 떠들기로?”
모용린의 얼굴이 한층 붉어졌다. 모용훈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게 아니라, 형님을 돕겠다는 것입니다.”
“나를 돕는다고?”
“예. 모용세가의 모든 전력을 동원해서라도요.”
그 말을 하는 모용훈은 벅찬 표정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 대상인 정천은 시큰둥했다.
“너무 무리하는 것 같은데.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아뇨. 저희는 이미 마음을 정했습니다.”
“뭐, 그렇다면 내가 뭐라 할 수도 없겠지만…….”
입을 다물고 있던 모용린이 쏘아붙였다.
“애초에 그걸 바라고 여길 찾아온 것 아니었나요?”
“응? 아닌데.”
“그, 그럼 왜 온 거죠?”
“검 좀 빌리려고.”
“검이라고요?”
정천은 모용훈을 돌아봤다.
“지난번에 내게 주겠다고 했던 검 있지?”
“북제혈랑 말씀입니까?”
“그런 이름이었던가? 어쨌든 그 명검이란 녀석.”
모용린의 입이 쩍 벌어졌다.
“오라버니! 모용가의 제일가보를 저런 작자에게 주려고 했었단 말이에요?”
“돕겠다던 땐 언제고 저런 작자라는 거야?”
모용린은 정천의 말도 무시한 채 모용훈을 닦달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그게…… 내 병을 치료하는 조건으로 드리겠다고 했었다.”
“아.”
모용린의 표정이 살짝 누그러졌다.
아무리 비싸고 값진 가보라 해도 오라비의 목숨만큼 중하진 않았다.
모용훈이 정천을 돌아봤다.
“하지만 형님은 그때 거절하셨잖습니까? 이제 와서 가져가신다고 해도 할 말은 없습니다만, 심경의 변화라도 온 것인지요?”
“그런 거 아냐. 내가 쓸 것도 아니고.”
“그럼……?”
정천은 혀를 찼다.
“멍청이가 하나 있어.”
“예?”
“죽을 게 뻔한 싸움에 나가려고 하더군. 최고의 상태로 싸운대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데, 애병까지 부서져 버린 상태야.”
“설마…….”
모용훈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스쳤다.
다른 이도 아닌 정천에 의해 애병이 깨어지고 만 사내. 그 애병 역시 보통의 무기가 아닌 명검칠존의 하나, 태천검이다.
모용린 역시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 멍청이라는 게 맹주 유극태인가요?”
“그래.”
정천은 구태여 말을 돌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세상 어느 누가 천무맹주를 멍청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암만 사적인 자리라 해도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어차피 그런 상식이 통할 인물도 아니지만.’
모용훈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형님께 드리면 되겠습니까?”
“응. 아니, 잠깐. 그냥 너희가 따로 맹주에게 주는 편이 낫겠다. 내가 준다고 해 봤자 받을 생각도 안 할 테니까. 꺾어 버리려 들지 않으면 다행이겠군.”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그런 일이 있어. 어쨌든 나중에 따로 사람을 보내 검을 빌려줘.”
모용훈은 모용린을 돌아봤다. 결정권은 그녀에게 있었으므로.
모용린은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좋아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정천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조건 따질 때는 아니라고 보는데.”
“그렇게 어려운 조건은 아니에요. 게다가 우린 당신에게 협력하기로 했으니, 이 정도 조건을 들어주는 건 괜찮지 않겠어요?”
“아니, 내가 협력해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싫다는 거예요?”
정천은 픽 웃어 버렸다.
“들어는 주지.”
모용린은 잠시 머뭇거렸다. 왠지 그녀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한참 뜸을 들이던 그녀가 겨우 입을 뗐다.
“죽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요.”
“……뭐?”
정천은 이 무슨 아닌 밤중에 홍두깨냐는 눈으로 모용린을 보았다.
“이상한 소리를 자꾸 하는군. 미안하지만 죽어 달라고 해도 안 죽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모용린의 얼굴이 기묘하게 붉어졌다. 모멸감과 부끄러움, 창피함과 분개가 공존하는 얼굴이었다.
“꼬, 꼭 말을 그런 식으로 해야겠어요?”
“아니, 별 이상한 약속을 해달라고 하니까 이러는 거잖아.”
모용린은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됐어요. 그냥 가서 마교 놈들에게 콱 죽어 버려요!”
“아, 글쎄 그렇게 말해 봐야 안 죽을 거라니까.”
모용린은 이제 벼루를 집어 던질 기세였다. 찔끔한 정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는 와중에도 모용훈에게 한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네 동생 요즘 잠자리가 안 좋나 보다.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는데 보약이라도 한 채…….”
“어서 꺼져요!”
기어코 벼루가 허공을 갈랐다. 물론 정천은 날아드는 벼루를 간단히 붙들어 바닥에 놓고 말았지만.
“어쨌든 부탁한다.”
정천은 달아나듯 북풍장을 빠져나갔다. 모용훈은 동생의 반응에 쓴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너, 그가 정말 걱정스러운가 보구나.”
“누가요? 저 멍청이가요?”
“그런 것 같구나.”
살기 어린 시선이 모용훈에게도 쏘아졌다.
“어…… 아무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