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六章 귀환
“딱히 할 얘기는 없을 것 같은데.”
시큰둥한 목소리. 평소의 정천이다.
그러나 그에 익숙하지 않은 진백란으로선 왈칵 열이 뻗치는 일이었다.
“아버님께 인정받았다고 콧대가 하늘을 찌르는군. 내가 얘기를 하고 싶으면 하는 거야. 너한테 선택권 따위는 없어.”
“딱히 그런 것 같진 않은데.”
“내 한마디면 너희 모두가 여기서 죽어 나가게 될 텐데도?”
어느새 귀도신마도 괴룡염마도 말다툼을 멈춘 뒤였다. 특히나 괴룡염마는 기이한 기대감이 담긴 눈으로 둘을 쳐다보고 있었다.
정천은 어깨를 으쓱였다.
“천마가 우릴 살려 보내라 명령했는데도?”
“당신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야. 이 정도는 이해해 주실걸?”
“뭐, 그럴지도 모르겠군. 확실히 딸한테는 약한 것 같으니.”
진백란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내 말대로 하겠다는 거지?”
“아니.”
“뭐야?”
그녀의 눈썹이 대번에 치켜 올라갔다.
“내가 장난하는 것으로 보여? 애들 다 호출해서 이곳을 겹겹이 에워싸야 실감하겠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어쨌든 우리는 이곳을 걸어 나갈 테니까.”
“그게 가능할 거라 생각해?”
“물론.”
너무 당당한 대답인지라 진백란은 할 말을 잃었다. 할 테면 해 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정천은 가르침을 주는 선생인 양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가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이야 무궁무진하지. 더군다나 물기 좋은 인질까지 바로 곁에 있다면.”
“인질?”
“응.”
정천은 더 말할 것도 없다는 듯 손을 들었다.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것은 진백란의 얼굴.
“건방진……!”
그 순간 장유추와 백미련이 섬전처럼 움직였다.
그들은 삽시간의 진백란의 후방을 점해 들어갔다.
“감히!”
진백란도 멍청히 당하진 않았다. 천마의 딸이긴 해도 마교십존의 자리에 들어선 건 엄연히 그녀 본인의 실력이었다.
스릉!
불그스름한 검신이 뽑혀 나왔다.
마치 피를 머금은 듯한 그 모습은 혈패검마란 별호에 놀랍도록 어울렸다.
그러나 장유추와 백미련도 절정의 고수들.
두 사람은 어렵잖게 합격진을 짜 진백란을 몰아붙였다. 진백란 역시 어찌어찌 방어는 하고 있었지만, 반격까지는 버거운 모습이었다.
“이런 고얀!”
화가 머리끝까지 난 괴룡염마가 쌍장을 떨쳤다. 그의 손바닥에서 기괴한 흑색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미친놈들!”
“죽음을 재초하는구나!”
금강역마를 제외한 나머지 십존들도 각자의 병장기를 뽑아 들었다.
그런 그들 앞을 윤하월이 막아섰다.
“네놈들은 나와 붙어 보자.”
청룡창이 푸르스름한 창강을 뿜었다. 그 기세는 십존들조차도 한 수 접어야 할 수준이었다.
천마의 배려 아닌 배려로 적엽단을 복용했던 그였다. 적엽단은 그의 상처를 회복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내력 자체를 증진시키는 효능까지 발생시켰다.
그 결과 그의 실력이 짧은 시간 동안 일취월장했다는 것.
그 전에도 멸살독마를 몰아붙였던 윤하월이다. 일대일로 붙는다면 십존들도 한 수 접어 줘야 할 터였다.
더군다나…….
“저도 가만히 있진 않겠어요.”
충분히 회복한 요태희가 아랑궁의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그제야 십존들은 아차 하는 심정이 되었다.
‘이런!’
‘당했다!’
숫자는 우세. 그러나 형국이 너무나 좋지 않았다.
윤하월이 든든한 방패 역할을 하고 있는데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궁후 요태희가 시위를 당기고 있다. 그 진용의 공격력은 문자 그대로 최강이라 할 수 있을 터였다.
그 안쪽의 진백란은 장유추와 백미련의 협공에 휘둘리는 상황.
애초에 이 시점에서 그녀는 반쯤 인질이 된 거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계속 싸우려면 싸우라고.”
정천은 비무대 바닥에 앉은 채 희희낙락하고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 모습이 십존들의 복장을 긁어 놓았다.
‘저 개자식.’
‘성히 죽지는 못할 것이다.’
십존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윤하월과 요태희가 거의 동시에 말을 꺼냈다.
“빨리 들어와라. 안 그러면 내 쪽에서 간다.”
“공격할 생각은 버리세요. 봐줄 생각은 없습니다.”
상반된 말에 십존들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이었다. 이거야 쳐야 할지 물러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 진백란은 수세에 몰렸다. 그리고…….
차앙!
그녀의 애병 혈륜검(血輪劍)이 하늘로 치솟았다. 장유추의 무게가 실린 도격을 버티지 못하고 놓쳐 버린 것이다.
‘강해졌군, 저 칼도둑놈.’
귀도신마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동안, 치솟았던 검은 정천이 낚아챘다.
“상황 종료로군.”
“쳇.”
윤하월이 김샜다는 듯 청룡창을 치웠다. 백미련은 구절검 모두를 형성하여 진백란의 팔다리와 급소들을 겨누었다.
“무기를 치우세요.”
요태희의 말에 마교십존들은 하릴없이 따랐다.
다른 십존이라면 모를까, 진백란은 교주의 딸이다. 공적으로야 같은 배분이라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들과 격이 달랐다.
쉽게 말해 공주님이랄까.
“하하. 이래서야 따르는 수밖에 없지 않겠소?”
그 와중에도 싱겁게 웃는 금강역마였다. 괴룡염마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같은 편이란 놈이 아주 복장을 긁는구나, 빌어먹을 땡초 같으니.”
“미안하오. 화내지 마시구려, 염마.”
“사과하지 마라! 네놈한테 사과를 듣느니 차라리 욕을 들어먹고 말지!”
“하하. 그것참.”
여하간 십존들은 싸움을 포기했다. 그 모습에 가장 열불이 터지는 건 정작 진백란이었다.
“젠장! 내 신경은 쓰지 말고 공격해! 공격하라고요, 염마!”
“아가씨, 그리 말씀하셔도…….”
“아가씨는 무슨 아가씨예요! 귀도신마! 무령권마! 그렇게 구경만 하고 있을 거예요?”
“그, 그것이…….”
십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딴청을 피웠다. 진백란은 칼에 겨냥당한 와중에도 분통이 터지는지 발을 동동 굴렀다.
“참 대단한 성깔일세.”
정천조차 혀를 내둘렀다. 청출어람이랄까. 성격만큼은 아버지를 능가하는 진백란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이만 물러날 생각이야. 그냥 가게 내버려 둘래, 아니면 이곳 입구까지 인질로서 같이 갈래?”
“네 배에 바람구멍을 내 줄래.”
살기 어린 진백란의 대꾸에 정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실현 불가능한 일은 제외하고.”
“흥!”
“어쨌든 순순히 보내 줄 생각은 여전히 없나 보군. 그럼 같이 걷자고. 그러는 동안에 얘기를 나누면 되겠군.”
“…….”
“그렇게 쳐다보지 마시지. 어쨌든 본인 뜻대로 얘기를 나눌 순 있게 됐잖아.”
“이럴 거였으면 차라리 처음부터 내 말을 들었으면 될 일 아냐?”
“그건 아니지.”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데?”
정천의 대답은 간단했다.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거든.”
진백란은 정천 일행에 포함된 채 막사 사이를 걸어갔다.
외관상 나란히 걷고 있는 평범한 모습이었으나, 백미련이 언제든 공격할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물론 진백란은 날뛸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 무의미한 경계였지만.
맨 뒤에서 따라가는 윤하월은 연신 진백란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뭘 그렇게 힐끔거리나?”
장유추의 물음에 윤하월이 낮게 속삭였다.
“이참에 황룡성까지 데려갈 수도 있지 않겠소? 천마의 딸년이라면 인질 가치는 충분할 텐데.”
“호락호락 잡혀갈 소저도 아닌 것 같고, 그런다고 기가 꺾일 천마도 아니야. 무엇보다 마교 놈들의 분노만 사게 될 테고.”
“하긴 그렇겠군. 못 들은 걸로 해 주쇼.”
윤하월은 그녀에게서 눈을 돌렸다.
잠시나마 인질 따위를 생각했다는 게 진저리가 나는 듯했다.
장유추는 그저 쓰게 웃었다. 자신도 비슷한 생각을 떠올렸다는 말은 하지 않고서.
앞서 걷는 진백란은 시종일관 정천에게 종알거리고 있었다.
“얘기해 줘. 얘기해 달라고. 그까짓 거 얘기 좀 해 주면 덧날 일도 없잖아?”
“아까 다 얘기해 줬잖아. 그게 전부라고.”
“끝없이 이어진 굴을 따라 내려가며 별별 괴물들과 싸웠다는 것? 정말 그게 전부라고?”
“그래.”
정천은 딱 잘라 말했다.
왜 자신에게 말을 걸었나 했더니, 그녀는 진마동에 대해 물어 왔다.
정천에게 있어선 잊고 싶은 악몽.
그것을 꼬치꼬치 캐물으니 결코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다른 사람에겐 응당 있는 배려심이란 게 전혀 없는 진백란이었으니.
“그래서 결국 당신 혼자 살아 돌아왔다는 거야?”
“그렇다니까.”
“칫. 왜 하필 정파 나부랭이가 살아 돌아온 건지.”
당사자를 앞에 두고도 말하는 데 거침이 없는 진백란이었다.
“차라리 우리 마교의 무인이 살아 돌아왔다면 좋았을 텐데.”
대꾸 자체를 내내 피하던 정천이 운을 뗐다.
“살아 돌아왔어.”
“뭐?”
“그들은 나와 함께 살아 돌아왔다. 비록 육신은 더 이상 없지만. 그들의 뜻을 내가 잇고 있으니 허무하게 사라진 것만은 아냐.”
“……당신, 의외로 감상적인 말도 할 줄 아네.”
“어떤 아가씨가 아까부터 배려 없이 떠들고 있다 보니, 어쩔 수가 없더군.”
“그럼 마교의 적인 당신더러 치하라도 해 줄까? 진마동을 토벌한 영웅이시여, 소녀의 치하를 받으소서, 이런 식으로?”
“나쁘진 않군. 하지만 기왕이면 좀 더 얌전한 아가씨가 그래 준다면 좋겠는데.”
“얌전하지 못해서 미안하네.”
“알면 됐어.”
역시나 울컥 하고 마는 진백란이었다. 대체 진마동에서 말발 수련만 하다 온 것인지…….
그사이 그들은 본진 입구에 다다랐다.
이제 이곳을 떠나면 다음에 보는 것은 비무대전 때가 될 터였다.
“이제 놓아 줘.”
진백란이 말했다. 정천은 말없이 백미련을 돌아봤다.
약간이지만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지금의 진백란은 백미련의 공격에 완전히 무기력했으니 말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호신강기를 펼치기도 전에 그녀의 칼날들이 피부를 파고들 것이다.
그러나 백미련은 미련없이 진백란에게서 물러났다.
진백란은 흘러나오려는 한숨을 애써 참았다.
“그럼 우린 간다. 네 아버지한테 안부나 전해 줘.”
“그게 뭐야. 무슨 옆집에라도 놀러 왔다 가는 사람인 것처럼.”
“딱히 차이점은 못 느끼겠군.”
“됐으니까 어서 꺼져 버려.”
매몰찬 말에 정천은 픽 웃었다.
“그러지. 하지만 마냥 농담으로만 한 말은 아냐. 정파의 무림도 마교의 무림도 본질적으론 크게 다르진 않을 테니까.”
“큰일 날 소리를 하는군. 그런 말 진지하게 떠들다간 정파 놈들에게도 칼침을 맞게 될걸?”
“그런가?”
정천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진백란도 꼴 보기 싫다는 얼굴로 홱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우리는 분명 한편이었어.”
자그만 목소리가 스치듯 지나갔다.
“……!”
진백란이 고개를 돌렸을 때 정천 일행은 어느새 멀어지고 있었다.
뒤늦게 십존들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괜찮습니까, 아가씨?”
괴룡염마의 물음에 진백란은 엉뚱한 말을 꺼냈다.
“염마.”
“예?”
“우리가 저들과 뜻을 같이 할 수가 있을까요?”
괴룡염마는 못 들을 걸 들었다는 얼굴을 했다.
“그런 가당찮은! 저 비열한 위선자 놈들과 우리가 어찌 뜻을 함께할 수 있겠습니까? 정파 놈들은 겉으론 군자의 모습을 하면서도 뒤에선 칼을 갈고 있는 악질들입니다.”
“……그렇죠?”
염마의 말은 사실이었다.
최소한 지난 이십여 년 동안 진백란이 듣고 배워 온 바에 의하면 그러했다.
성인군자의 탈을 쓰고 있는 괴물들.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위선자들.
그것이 그녀가 알고 있는 정파 무인이었다. 그리고 그 사고관은 오늘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직접 만나 본 저들은…….
‘됐어.’
진백란은 생각하길 멈췄다.
어차피 며칠 내에 적이 되어 맞붙을 사이다. 쓸데없는 감정은 칼끝을 무디게만 할 뿐이었다.
“돌아가요.”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걸음을 떼었다.
괴룡염마는 미묘한 기시감을 느꼈지만 크게 내색하진 않았다.
‘잠깐 마음이 흔들리신 거겠지.’
* * *
황룡성으로 돌아온 정천이 일행에게 말했다.
“여기까지 왔으면 더 같이 있을 필요가 없겠지. 이쯤에서 찢어집시다.”
“찢어지자고 해 봐야…….”
장유추가 말끝을 흐렸다.
어차피 그와 백미련, 요태희는 정천을 따라갈 터였다. 결국 헤어질 사람은 윤하월 한 명뿐이었다.
윤하월은 코웃음을 쳤다.
“흥. 잘됐군. 나도 네놈 옆에 붙어 있느라 죽을 지경이었다.”
“그런 것치고는 잘 따라오던데 말요.”
“시끄럽다.”
툴툴거리듯 내뱉은 윤하월이 거리 너머로 멀어졌다.
정천은 나머지 세 사람을 돌아봤다.
“안 갑니까?”
“응?”
장유추가 멍한 얼굴을 했다. 어차피 화륜문으로 갈 거면서 이게 무슨 말인가?
정천의 말뜻을 알아챈 사람은 백미련뿐이었다.
“할 일이 따로 있어?”
“응.”
“우리에게는 말해선 안 될 일인가 보지?”
“말해도 되긴 한데, 웬만하면 혼자서 움직이는 편이 편하지.”
“그렇다면 알겠어. 먼저 화륜문으로 돌아가 있겠어.”
정천은 나머지 두 사람을 보았다. 요태희가 곧바로 말했다.
“저도 함께 가 있죠.”
“흠흠. 그럼 노부도…….”
피식 웃은 정천이 몸을 돌렸다.
“그럼 나중에 봅시다.”
정천이 유유자적한 걸음으로 멀어졌다.
졸지에 버려진 오리 알 신세가 된 세 사람이 서로를 쳐다봤다.
“어쩌지?”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군, 뇌혈도. 당신이야 어디 가서 술이나 들이켜고 있으면 될 거 아냐?”
“싸우지 마세요, 두 분.”
한마디씩을 던져 놓고서도 서로 걸음을 떼지 못했다.
“흠흠. 저기 말이지…….”
장유추가 운을 떼자 백미련과 요태희가 연달아 받았다.
“미행하자고?”
“미행해 볼까요?”
세 사람은 정천이 사라진 거리를 쳐다봤다.
이윽고 그들은 정천의 흔적을 좇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천은 그 짧은 시간 동안 기척과 흔적을 완전히 감춘 뒤였다.
백미련이 살짝 짜증이 나서 중얼거렸다.
“약삭빠르기는. 대체 뭘 감추려는 거지?”
“흠. 남들에게 밝히기 힘든 뭐라도 있나?”
“일단은 화륜문으로 돌아가 있죠.”
요태희의 말에 백미련이 발끈했다.
“당신, 언젠가부터 은근슬쩍 우리에게 묻어가는 것 같은데?”
“같은 편이니까요.”
“난 당신을 같은 편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 게다가 당신은 화륜문 입장에선 불청객일 뿐이잖아.”
잠자코 있던 장유추가 은근슬쩍 말했다.
“그건 너도 그렇잖아.”
“…….”
백미련이 입을 꼭 다물었다. 정곡을 제대로 찔렸던 까닭이다.
요태희는 정말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장 대협께선 본디 화륜문의 사람인가요?”
장유추가 움찔했다.
“……그건 아니지.”
“흥. 뭐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군.”
“뭐야? 애초에 처음 말을 꺼낸 건 네 녀석이잖나!”
그 와중에도 요태희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결국 우리 모두가 화륜문의 입장에서는 불청객인 셈이군요.”
“…….”
“…….”
할 말이 없어진 백미련과 장유추였다.
생각해 보면 화륜문 식구들이 얼마나 그들을 불편해 했을까 싶었다.
“생각해 보면 그분들이 얼마나 우리를 불편해 하셨을까 싶군요.”
“…….”
“…….”
두 사람은 요태희를 흘겨보았다. 그냥 생각만으로 끝낼 것이지 구태여 말을 하여 사람 무안하게 만들다니.
그들은 일단 화륜문 앞까지 돌아갔다.
그러나 차마 문지방을 넘어서지 못했다. 조금 전의 일 때문이었다.
‘우리는 이곳의 불청객…….’
‘들어가 봐야 환영받지는 못하겠지?’
백미련과 장유추는 머뭇거렸다. 차마 본인이 먼저 문지방을 넘기가 부담스러웠다.
요태희는 그런 부담조차 없는 듯했지만.
“우리 돌아왔어요.”
그녀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태도로 문을 열었다. 생각해 보면 셋 중에서 가장 불청객에 가까운데 말이다.
‘저런 여우!’
백미련이 옷자락을 질끈 깨물었다. 처음엔 먼저 들어가기가 꺼려졌는데, 이렇게 되고 나니 왠지 선수를 빼앗긴 기분이었다.
“아, 오셨어요?”
화연란이 반기는 얼굴로 뛰어나왔다. 그들은 몰랐지만 내심 걱정에 잠겨 있던 그녀였다.
요태희가 웃으며 물었다.
“별일 없었죠?”
“네, 다행히 별일은 없었어요.”
대답을 한 화연란이 백미련을 돌아봤다.
“잘 다녀오셨어요, 언니?”
화악.
백미련의 얼굴이 순간 붉어졌다.
“으, 응.”
“그렇군요. 시장하시죠? 식사 준비해 뒀으니까 곧 내올게요.”
평소와 다름없는 그녀다. 이들을 불청객이 아닌 한 명의 식구로 대우해 주는.
백미련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왜 이곳에 더없는 친근감을 느꼈던 것인지. 어째서 위험을 감수해 가며 이곳에 남았는지.
그걸 떠올리니 왠지 눈물이 핑 돌 것 같았다. 남들 앞인지라 애써 참았지만.
“흠.”
장유추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고 보면 너도 참 많이 변했군.”
“무슨 뜻이지?”
“이제 좀 사람다운 표정을 짓게 되었단 말이다.”
백미련은 약간 멍한 얼굴로 장유추를 올려다봤다.
“처음의 너에겐 인간미라는 것 자체가 없어 보였지. 짓는 미소는 꾸며진 것이고, 어느 표정을 짓든 살기가 풀풀 풍겼으니까.”
“…….”
“지금은 좀 사람다워진 것 같다. 뭐, 노부가 착각을 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사람답다.’
백미련은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그사이 부엌에 있던 소윤이 쪼르르 뛰어나왔다.
“할아버지, 맛난 거 사왔어요?”
“응? 아, 아니. 급히 돌아오느라 미처 못 샀다.”
왠지 쩔쩔매는 장유추. 소윤은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말했다.
“괜찮아요. 지금 가서 사면 되죠. 같이 가실 거죠?”
“그, 아직 밥을 못 먹었는데.”
“우린 나가서 먹어요.”
끙 하는 소리를 낸 장유추가 외팔을 내밀어 소윤을 들어올렸다. 백미련은 그 모습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사람다워진 건 본후뿐만이 아닌 것 같군.”
“……시끄럽다.”
쑥스러운 듯 말하며 밖으로 나가는 장유추였다.
요태희가 그런 두 사람을 흐뭇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부럽네요.”
“부럽다고?”
백미련이 돌아보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겐 저럴 기회가 없었죠. 사람과 교류할 기회, 가족을 가질 기회.”
백미련은 의문을 느꼈다.
“어째서지? 마음만 먹었다면 언제든 가족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당신 정도의 무인이라면…….”
“가족은 무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무력은 그저 그들을 지킬 수 있는 힘일 뿐.”
요태희는 씁쓸한 눈을 했다.
“그건 구절검후께서도 잘 아실 텐데요.”
“그건…….”
백운신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건 그래.”
씁쓸해진 얼굴로 중얼거리는 백미련이었다. 평소엔 밉상이기만 한 요태희였으나 왠지 지금은 마음이 통하는 것 같았다.
“이곳은 좋은 곳이에요. 거대한 문파는 널렸고 훌륭한 문파는 많겠지만, 이곳 같은 문파는 손에 꼽을 정도일 거예요.”
“그렇겠지.”
“그러니까 지켜야지요.”
백미련은 고개를 끄덕였다.
요태희의 시선이 어느 허공에 고정되었다.
“누구보다 그걸 잘 아는 사람은 정 소협이겠죠.”
백미련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아마도 그렇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