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五章 절대지존
마교십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부복을 해 보였다. 말괄량이처럼 날뛰던 진백란도, 쩔쩔매고 있던 귀도신마도 다를 건 없었다.
평소엔 비교적 자유로이 행동하는 그들이다. 천마도 격식엔 큰 의미를 두지 않았기에, 자기 앞에서 십존들끼리 잡담을 나누어도 크게 뭐라 하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할 때가 있었다.
천마가 마검 나찰수라를 대동했을 때였다.
“유일자 절대지존 천마만세!”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비무장을 울렸다. 정작 당사자인 천마는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언제 들어도 유치한 문구란 말이지. 어쨌든 편히 쉬도록.”
그제야 몸을 일으키는 마교십존이었다.
천마는 쑥스러운 듯 정천을 돌아봤다.
“좀 우스웠지?”
“약간요.”
“역시 그렇군. 흠. 본좌도 이런 건 싫은데, 옛날부터 이어져 온 관습이라 말이지.”
“이해합니다. 오히려 그런 건 정파 쪽이 더 심하기도 하고요.”
“하하. 그런가?”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는 정천과 천마였다. 모르는 이가 봐선 인상 좋은 중년인과 청년의 대화로만 보일 터였다.
“어쨌든…….”
천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비무장으로 오르지, 궁후.”
“그러죠.”
굳은 얼굴의 요태희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의 손엔 상앗빛의 아랑궁이 굳게 들려 있었다.
비무장에 오른 요태희가 천마를 돌아봤다.
“오시죠.”
“음.”
천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바로 비무장에 들어서진 않았다.
이윽고 모두들 흠칫했다.
천마가 나찰수라를 진백란에게 건넸던 것이다.
“들고 있어라.”
“네, 천마님.”
진백란은 조심스럽게 나찰수라를 받아 들었다. 조금 전까지의 걸걸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목숨보다도 소중한 양 나찰수라를 꼭 껴안을 따름이었다.
“검 없이 싸울 겁니까?”
“응.”
정천의 물음에 천마가 대꾸했다.
“왜, 너무 오만한 것 같은가?”
다른 사람들은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천은 조금 달랐다.
“그렇다고 생각 안 합니다. 검이 없더라도 당신의 우세는 변하지 않으니까요.”
역시나 잔인하리만치 단정적인 답변이었다. 백미련이나 윤하월조차 좀 심하지 않나 생각할 정도로.
정천이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비무 중에 검을 빼앗길 수도 있을 텐데요.”
“음?”
“어쨌든 당신은 천무맹의 적. 비무하는 중에 나찰수라를 탈취당하기라도 한다면 상당한 타격일 것 같습니다만.”
대놓고 검을 뺏겠다는 선언이었다. 진백란이 어이없다는 듯 소리쳤다.
“내가 그리 호락호락하게 뺏길 것 같아?”
“나라면 할 수 있지.”
황당할 정도의 자신감에 진백란은 입을 닫지 못했다. 천마는 그저 웃어넘길 따름이었지만.
“관두는 게 좋을걸. 나찰수라는 아무나 쥘 수 없는 검이야. 천마의 피를 잇지 않은 사람이 쥐었다간 몸이 뼛속부터 녹아내리게 되지.”
모두의 등허리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때 백미련이 문득 깨달았다는 듯 소리를 냈다.
“그렇다는 건 저 여자가……?”
“내 딸이지.”
담담한 목소리로 인정하는 천마였다.
진백란이 의기양양한 눈으로 정천을 보았다. 이제 좀 알아 모시겠느냐는 시선.
정천은 그저 피식 웃을 따름이었다.
“왠지 시끄럽다 했습니다.”
“우리 애가 좀 발랄하지.”
“딱 버릇없이 자란 부잣집 아가씨 같은데요?”
“하하. 비유 참 걸작이군. 그래도 그런 면이 매력 아니겠나?”
팔불출 아버지와 옆집 사람의 대화랄까. 한가롭기 그지없는 대화에 진백란이 빽 소리쳤다.
“아버님!”
“하하. 미안하다. 어쨌든 저 아이와 본좌를 제외하면 누구도 나찰수라를 손에 쥘 수 없어.”
“쥐지 못하더라도 꺾어 버릴 방법은 무궁무진합니다. 혹은 따님의 손을 잘라 내든지, 따님과 함께 납치해 버리든지 할 수도 있고요.”
“꽤 잔인한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군, 자네.”
“따님은 좀 전에 제 배에 바람구멍을 내겠다고 협박했었는데요.”
“그럼 비긴 셈 치지. 어쨌든 관두게. 그러는 순간 본좌의 분노를 맛보게 될 테니.”
“뭐, 상황 봐서요.”
애매하게 답변하며 물러나는 정천이었다.
천마는 표정을 살짝 찡그리며 혀를 찼다.
모두가 의아해하는 가운데 요태희만이 정천의 의도를 알아챘다.
—설마 나 때문인가요?
—응.
정천은 곧장 실토했다.
—천마의 의중을 조금이라도 흔들어 놓기 위해서?
—그래. 그렇게라도 해야 당신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그나마 높아지니까.
대놓고 천마의 승리를 점쳐 요태희의 각오를 다지게 했고, 그의 앞에서 딸을 공격할 가능성을 환기시켰다.
이로써 요태희는 전력을 낼 수 있게 됐고, 반대로 천마는 전력을 낼 수 없게 됐다. 마음에 빈틈이 생겨 버렸기 때문이다.
정천은 실제로 힐끔힐끔 진백란을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대놓고 보진 않았고,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는 정도였다.
그것이 대놓고 쳐다보는 것보다 신경 쓰이리란 건 자명했다.
“뭘 그렇게 쳐다봐?”
진백란이 앙칼지게 소리치니 정천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매력적이어서.”
“뭐, 뭐?”
“너 말고 그 검.”
“개자식!”
진백란이 빽 소리치고는 고개를 돌렸다. 잠시나마 얼굴이 붉어졌던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정천은 그제야 비무장 쪽으로 눈을 돌렸다.
이제부터는 요태희가 헤쳐 갈 일이었다.
“선공하게.”
비무장에 오른 천마가 처음 꺼낸 말이었다.
자존심을 박박 긁는 말이었지만 요태희는 도리어 고개를 숙였다.
“호의를 받아들이겠어요.”
“나중엔 호의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될걸.”
“아뇨. 전 호의라고 생각합니다.”
말을 마치는 동시에 요태희의 손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타앙!
강철이 바위를 때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아랑궁의 시위가 당겨졌다 풀리는 소리였다.
이윽고 천마의 팔다리를 노리며 쇄도하는 백색 기운.
천마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콰과광!
천마가 사라진 자리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각각의 기운이 허공에서 격발된 것이었다.
요태희는 실망하지 않았다. 그녀는 기운을 날리자마자 뒤로 몸을 날렸다.
아슬아슬한 시간차로 천마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부웅!
주먹을 휘두른 것만으로 풍압이 발생해 주변으로 퍼졌다. 제대로 맞는다면 황소조차 가죽과 내장이 분리되어 버릴 터.
거리를 벌린 요태희가 다시 시위를 당겼다.
이번엔 두 배로 숫자가 늘어난 기운들이 사방에서 천마에게 쇄도했다.
‘피할 자리가 없군.’
판단을 마치자마자 천마가 쌍장을 떨쳤다. 장력이 발생해 쇄도하는 기운과 충돌했다.
콰과과광!
전투는 비슷한 양상으로 이어졌다. 요태희가 시위를 당겨 기운을 쏘아 보내고, 천마는 피하거나 막는다.
그사이 훌쩍 물러난 요태희가 이어지는 반격을 피해 버린다.
비무장이 상당히 넓었던 만큼 그녀의 전략은 상당히 주효했다. 실제로 천마는 십 초가 지날 동안 그녀의 옷깃조차 스치지 못했다.
“제법이군.”
천마가 중얼거렸다.
그 와중에도 요태희는 궁기(弓氣)를 날리고 있었다.
쐐애액!
“쯧. 한마디 할 여유도 안 주는군.”
천마가 다시금 풍압을 일으켰다. 이번에도 궁기는 허공에서 그대로 폭발해 버렸다.
‘계속 이런 식으로만 나오진 않을 텐데.’
천마가 그렇게 생각할 무렵.
폭발로 인한 연기를 헤치며 요태희가 나타났다.
“음!”
기척을 죽이는 것은 그녀의 특기. 천마가 그녀를 잡지 못한 데엔 피하는 속도보다도 이것이 주효했다.
‘그 능력을 공격에 이용했군.’
폭발로 인한 연기가 시야를 차단한다. 그 사이 기척을 죽여 바로 앞까지 당도한다.
이 공격을 위해 지금까지 도망만 쳤던 것이리라.
‘훌륭하다.’
천마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리고 아쉬움을 느꼈다.
‘하지만 너무 성급했다.’
눈앞의 요태희는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이 거리에서라면 장력을 떨치더라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을 터.
그러나 그것도 시위를 당길 때의 얘기였다.
천마의 눈엔 요태희의 움직임이 굼뜨게만 보였다. 실제로 천마 자신의 속도와 감각, 순발력 등이 그녀를 상회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쉬익!
천마가 손을 뻗었다. 시위는 이제 절반 정도 당겨진 상태.
천마의 손이 요태희의 목을 틀어쥐었다. 상상 이상의 빠르기와 고통에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대로 비틀어 버리면…….’
그녀의 목숨은 끝. 궁후라고까지 불리던 강자의 허무한 죽음이 될 터였다.
그러나 요태희도 녹록하지만은 않았다.
짧은 순간 그녀는 몸을 뒤로 빼냈다. 때문에 목을 완전히 움켜쥐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사이 시위는 완전히 당겨진 뒤.
요태희의 손이 시위를 놓았다.
타아앙!
근거리에서 빛이 번뜩였다. 이것이라면 피하지 못할 것이라고 요태희 본인조차 자신할 수 있었다.
콰아앙!
격발된 기운이 폭발하며 비무장을 흙무더기로 뒤덮었다. 궁기를 넘어선 궁강(弓剛)이었던 만큼 그 위력과 속도는 보통이 아니었다.
‘이렇게 끝?’
요태희는 의아해하며 십존들의 표정을 살폈다.
어느 누구도 당황하거나 난감해하지 않고 있었다.
‘끝이 아니야!’
그 순간 폭발의 먼지 속에서 신형이 튀어나왔다.
퍼억!
복부를 강타당한 요태희가 땅을 굴렀다. 호신강기로 몸을 감싸고 있음에도 갈빗대가 부러질 정도의 위력이었다.
“커흑!”
일어나자마자 각혈이 쏟아졌다. 요태희는 겨우 자세를 잡고서 전방을 응시했다.
천마는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모습이었다. 좀 볼썽사납긴 했으나, 실질적인 피해는 전혀 입지 않았다.
‘그걸 피했단 말인가?’
고통보다도 놀람이 더욱 컸다.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법이었다.”
천마가 칭찬의 말을 꺼냈다. 비웃음이 일말도 섞이지 않은 진심이었다.
“듣자하니 본좌보다도 오랜 시간을 살아 왔다지? 과연 그에 걸맞은 연륜과 실력이야.”
“…….”
“하지만 본질적으로 무인의 자질이나 심성을 타고난 것 같지는 않군. 화살 끝이 무딘 이유는 아마도 그것일 테지?”
천마가 저벅저벅 걸어왔다.
요태희는 일어나 시위를 당기려 했으나 이내 움찔하며 아랑궁을 내렸다.
갈빗대의 고통이 너무 심해서 활을 당길 수가 없었다. 폐부를 찌르는 격통은 엄살이라기엔 너무 생생했다.
“사람의 몸이란 게 참 우습지. 어느 한 부분만 살짝 무너트려도 전체적으로 망가져 버리기 일쑤란 말이야.”
“크…….”
“오랫동안 고통을 잊고 있었던 사람일수록 그런 면이 크지. 아마 지금껏 자신에게 제대로 접근할 수 있었던 적조차 거의 없을 테지?”
천마의 말은 사실이었다. 소위 초고수라 불리는 작자들조차 요태희의 화살 세례를 뚫고 가까이 다가오지는 못했었다.
무려 수백 년 동안.
다시 말해, 그녀는 접근전에 관해선 완전히 무지하다는 의미.
적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데다 호신강기까지 있다. 애초에 다치거나 부상 입을 일 자체가 없으니 그런 일이 일어날 경우 무력할 수밖에.
걸음을 멈춘 천마가 선언했다.
“본좌의 승리다.”
* * *
“놈들이 천마에게로 간 것 같군.”
“그래.”
천연살의 말에 살마괴가 대꾸했다.
그들은 황룡성에서도 가장 높은 건물의 지붕에 올라 있었다.
물론 그곳이라 해도 정천 일행의 모습이 보이진 않았다. 다만 대강 그쪽 방향으로 갔으리라 추측을 할 따름이었다.
“놈의 목적이 뭘까?”
“뻔하지. 천마를 구워삶는 것.”
“가능할까?”
“가능하다고 보나?”
천연살이 씩 웃었다.
“물론 불가능하지. 무인이란 족속들은 원래 그러니까.”
“내 생각도 동일하다.”
천연살은 광기 어린 눈으로 아래를 응시했다. 드넓은 황룡성의 전경이 그의 눈에 가득 들어오고 있었다.
“마교 놈들에겐 정말 고마워해야겠어. 놈들 덕분에 수월하게 작업을 할 수 있었으니.”
“혈선들의 선견지명이 있었던 덕이다.”
“그건 그래. 그분들은 정말 모든 걸 꿰뚫어 보고 계시단 말이지.”
얼마 후, 황룡성은 죽음의 땅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다름 아닌 천연살의 작품으로 인해.
“작동은 확실한 거겠지?”
“물론!”
살마괴의 물음에 천연살이 소리쳤다.
“살인의 역사란 게 있다면 그중에서도 단연 으뜸을 차지하게 될 걸작이야. 이 몸에게 실수 따위는 있을 수가 없어.”
“자만은 좋지 않다. 아주 작은 가능성까지도 꼼꼼히 따져 봐야 해.”
“걱정 말라니까? 이 몸이 작은 실수라도 용납할 멍청이처럼 보여?”
잠시 천연살을 살피던 살마괴가 고개를 돌렸다.
“그건 아니지.”
“그렇지?”
어린아이의 순수한 웃음이 천연살의 입에 걸렸다.
그는 실제로 순수했다. 다만 그 순수가 선(善)의 순수가 아니라는 것이 문제일 뿐.
잠자리의 날개를 별 생각 없이 떼어 내는 아이의 순수 역시 순수는 순수인 것이다.
천연살의 순수는 그보다 조금 더 진할 따름.
그야말로 악(惡)의 순수라 할 수 있었다.
‘그 정수가 바로 이 살진.’
살마괴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거대한 황룡성 전체에 살진이 드리워져 있으리라고.
이는 문자 그대로 걸작이었다. 천연살의 삶의 대부분은 이 살진에 투입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장로들의 도움을 받아 조금씩 구축되어 왔다.
신중하며 은밀한 구축.
때문에 황룡성의 그 누구도 그 존재를 의심조차 하지 못했다.
물론 때때로 이상함을 느끼는 이들도 있었다. 대개는 군사부 소속인 비영대원들이었다.
그들의 처리는 살마괴의 몫이었다.
그냥 죽여 없애진 않았다. 괜히 죽였다간 일이 귀찮아질 것이었기에.
살마괴는 그들을 혼절시킨 후 마라혈천에 전수되어 오는 특별한 독약을 썼다.
독약은 크게 두 가지 효과를 지녔는데, 일단은 음독자의 기억을 조각조각 내었다. 하루나 이틀 전의 일은 기억조차 못하게끔.
또 다른 효과는 정신 파괴.
비영대원들은 짧게는 반년, 길게는 몇 년에 걸쳐 서서히 백치가 되어 갔다.
그 기간이 꽤 길기에 군사부 측에서도 살마괴의 존재를 의심하지 못했다. 그저 다른 임무를 수행하다 문제가 생겼으리라 생각할 뿐.
그렇게 그들은 황룡성 전체에 걸쳐 살진을 설치해 왔다.
장장 삼십여 년이 걸린 작업이었다.
천연살이 이렇게나 감격스러워 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날까지 참을 수가 없어.”
천연살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당장이라도 살진을 발동시키고 싶다. 황룡성 위로 죽음의 비명이 터져 나오리라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어.”
“그래도 참아야 한다, 천연살. 그분들은 아직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쳇. 나도 알아. 안다고.”
어린애처럼 툴툴대는 천연살.
그때 두 사람의 뒤로 제삼의 인영이 나타났다.
“이곳에 있었군. 천연살, 살마괴.”
고개를 돌린 천연살이 눈살을 찌푸렸다.
“또 뭐냐, 흑천살.”
“혈선들께서 마라혈천 전체를 호출하셨다.”
“뭣?”
천연살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렇다면 드디어?”
“아니, 살진을 발동하진 않는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으니까.”
천연살은 실망해서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쳇. 그럼 왜 부르시는 건데?”
“말하지 않았나. 마라혈천 전원이 동원될 일이라고. 그 임무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이 있을 것이다.”
“암살 임무인가?”
“그래.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 마라혈천 전원이 투입될 것이다.”
흑천살의 말에 살마괴가 움찔했다.
“설마…….”
천연살 역시 놀란 얼굴이었다.
“고작 암살에 우리 전원이 투입된다고? 그래야 할 정도의 대상이 있나?”
“딱 한 명 있지. 전 중원을 통틀어서.”
살마괴의 말에 흑천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가 죽여야 할 자는 그 사내다.”
흑천살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조금 전까지도 천연살과 살마괴가 바라보고 있던 방향이었다.
“천마 진검운.”
* * *
“끝이 아니에요.”
요태희가 아랑궁을 들어 올렸다. 욱신거리는 격통에 얼굴이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었지만, 어찌어찌 시위를 당길 수는 있었다.
“무리하는군. 미안하지만 본좌는 그런다고 해서 손속을 둘 생각이 없다.”
“그런 건 바라지도 않습니다. 단지 생각을 재고할 수 있기만을 청할 뿐이에요.”
“재고하라고?”
“그래요.”
요태희의 표정은 필사적이었다.
“우리와 손을 잡고 팔부혈선에 대적해 주세요. 여러분의 중원을 보존할 방법은 그것뿐입니다.”
“천마신교의 힘만으로도 가능하다.”
“아뇨. 전쟁이 벌어지는 순간, 이미 누가 이기든 혈선의 승리가 될 거예요.”
“허튼수작을 부리는군. 시간을 끌 생각이라면 관두도록.”
“그런 생각 따윈 애초에 없었어요.”
요태희는 아랑궁을 내던졌다. 가면 같던 천마의 표정에도 균열이 생겼다.
그녀는 이제 천마만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마교십존 전부를 훑었다.
“팔부혈선은 거대한 주술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대량의 제물을 필요로 하는, 전쟁에서 발생되는 죽음을 연료로 한 주술이에요.”
“…….”
“전쟁이 시작되면 주술은 필연적으로 발동합니다. 몇 명이 죽든, 누가 승리하든 상관없이요.”
“그 주술이란 게 뭐지?”
천마의 물음에 요태희는 또박또박 대답했다.
“거대한 문을 여는 것.”
“거대한 문이라고?”
“그래요. 두 개의 세계를 잇는 거대한 문. 혈선들은 그 문을 열기 위해 지금까지 천무맹을 배후에서 조종해 왔어요.”
“웃기는 소리로군. 두 개의 세계라고? 그런 것을 본좌가 믿을 것 같나?”
“믿으셔야 해요!”
전에 없을 박력이 요태희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죽음마저 각오했기에 가능한 일일 터였다.
“주술 자체에 거대한 힘이 소모된 데다, 문이 열리는 여파 역시 엄청날 거예요. 그 문이 현신하는 것만으로도 섬서성의 대부분이 소멸될 거예요. 황룡성과 그 근처의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질 테죠.”
“…….”
“일단 문이 열리게 되면 모든 게 끝이에요. 그걸 막으려면 전쟁 자체를 멈춰야 합니다. 그리고 두 세력의 힘을 모아 팔부혈선에 맞서야 해요.”
“그 말을 증명할 수 있나?”
“없습니다.”
너무 당당한 말이기에 천마는 기가 찼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제겐 지금의 말을 증명할 수단이 없어요. 그렇기에 당신이 바란다면, 지금 목숨을 버려서라도 입증을 하겠어요.”
“……쓸데없는 짓을 벌이려 하는군. 본좌는 네깟 것의 목숨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다.”
“제 각오가 그 정도라는 걸 알리고 싶은 겁니다.”
천마는 잠시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그는 한참 아무 말도 없더니, 정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말이 사실인가?”
“제가 보증한다고 믿으실 수 있겠습니까?”
“믿는다.”
천마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자네는 강룡단의 형제였으니까.”
“…….”
“본좌가 그들을 저버렸지. 마교 전체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그들을 진마동의 어둠 속으로 내몰았다.”
이번엔 천마의 시선이 마교십존을 훑었다.
“단 한순간도 그 일을 잊은 적이 없다. 본좌가 그들을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렇기에 다짐했다. 천무맹과 팔부혈선을 멸절시켜 그들의 넋을 달래겠다고.”
“…….”
“지금 이 자리에서 본좌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사람은 자네뿐일 테지. 본좌는 강룡단에게 빚을 지고 있으니 말이야.”
천마는 정천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러니 말하게. 그녀의 말이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그렇군.”
천마는 눈을 감았다.
마교십존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천마! 설마 이제 와서 병력을 물리시려는 건 아니겠지요?”
철절삼마의 일인인 괴룡염마(怪龍炎魔)였다.
이윽고 다른 십존들도 이에 동조했다.
“강룡단의 형제라니, 저자가 일방적으로 주장하기만 할 뿐 증명할 수 없는 얘기가 아닙니까?”
“애초에 이 모든 게 정파 놈들의 계략일지 모릅니다. 두 개의 세계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저들을 믿을 순 없습니다.”
그 와중에 침묵하는 사람은 귀도신마와 금강역마 정도였다.
의외로 진백란 역시 침묵하는 쪽이었다.
‘역시 믿을 수 없는 얘기겠지.’
정천은 설득할 생각을 포기했다. 이렇게 된 이상은 맞서 싸우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
“모두 조용.”
천마에게서 나직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마교십존은 언제 떠들었냐는 듯 조용해졌다.
천마는 더 볼일이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비무대전은 처음 선언했던 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본좌와 네 명의 대표들은 전력을 다해 너희 측 대표들을 뭉개 버릴 것이다.”
‘역시 이렇게 되는가.’
정천이 한숨을 내쉴 때였다.
“대신.”
천마의 말이 조금 더 이어졌다.
“너희 측이 승리할 경우 본좌는 병력을 물리겠다.”
“천마!”
괴룡염마가 소리쳤으나 천마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더불어 너희를 도와 팔부혈선에 맞설 것을 약속하지.”
“……!”
요태희의 얼굴이 밝아졌다.
천마는 그녀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선수치듯 운을 뗐다.
“고마워할 것 없다. 어차피 약해 빠진 천무맹과 정파무림 따위, 언제고 마음만 먹으면 재로 돌릴 수 있으니 말이야.”
천마는 정말 할 말 다했다는 듯 걸음을 뗐다.
“이만 돌아가라. 귀도신마가 저들을 안내해 주도록.”
진백란에게서 나찰수라를 건네받은 천마가 자신의 막사로 멀어졌다. 그가 사라지자 비무장 전체를 짓누르던 공기도 해소됐다.
“용납할 수 없다!”
그렇게 소리치는 인물은 물론 괴룡염마였다.
그는 충혈된 눈으로 요태희를 손가락질했다.
“네년! 네년이 요망한 말과 수법으로 저분의 심기를 어지럽힌 게 분명하다.”
“그만하시오, 염마. 천마께선 이미 마음을 굳히셨소.”
“닥쳐라, 귀도! 네놈도 저것들과 한패거리인 모양인데 네놈의 말을 들을 것 같으냐?”
“젠장. 이젠 나까지 얽겠다는 거요?”
“그러고 보면 네놈과 멸살독마는 견원지간이었지. 그리고 멸살독마는 지금 병중에 있고! 이 역시 네놈이 놈들과 짜고서 벌인 일이 아니더냐?”
“이젠 중상모략까지 하려 드는군, 빌어먹을 노인네 같으니!”
자기들끼리 싸움판이 벌어질 분위기였다. 제삼자인 정천 일행이 더 당혹스러워졌다.
“하하. 결국은 이렇게 되는군.”
그 와중에도 허허롭게 웃고 있는 금강역마였다.
“댁은 불만스럽지 않은 거요?”
정천의 물음에 금강역마는 고개를 저었다.
“천마의 말씀은 절대적. 그분이 판단이 무엇이든, 그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는 자체가 옳지 못한 일이지.”
“그건 그렇군. 그렇게 보자면 철절삼마의 한 명이라는 저 영감이 잘못된 건가?”
“염마는 그 누구보다도 충성스러운 마인이지. 사실 철절삼마의 세 사람 모두가 그렇다네.”
“충성이라…….”
“너무나 충성스럽기에 때로는 주인의 뜻에도 반발하는 것이지.”
“그럴싸하군.”
“사실 진정한 의미로 천마에게 충성하는 십존은 그 세 사람이 전부라네. 우리야 힘의 논리를 따르는 것뿐이니 말이야.”
“그렇다면 저 아가씨는?”
정천이 가리킨 사람은 진백란이었다. 그녀는 귀도신마와 괴룡염마를 지켜보는 동시에 힐끔힐끔 정천 쪽을 보고 있었다.
“자식이 아버지를 경애하는 마음은 충성심과는 조금 다르지 않겠나?”
“그렇겠군.”
정천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쨌든 더 이상 이곳에 볼일은 없었다. 남은 것은 비무대전에서 제대로 맞붙는 것뿐.
비무장 위로 올라간 정천이 요태희의 몸을 살폈다.
“좀 봅시다. 치료하게.”
“됐어요. 내 스스로가 할 수 있습니다.”
요태희가 거부했지만 정천은 물러나지 않았다.
“당신이 익힌 선술로는 회복할 수 없을 거요. 천마의 무공은 그런 성질을 지녔으니까.”
“…….”
실제로 요태희의 상처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고 있었다.
어지간한 타격 정도는 가볍게 재생해 버리는 체질이란 걸 생각해 보면 의외였다.
정천의 말이 이어졌다.
“혈선들에게 대적할 최적의 수단은 아마도 천마신공일 거요. 단순히 강하기만 한 게 아니라, 철저하게 그들을 공략하기 위해 만들어진 무공이니 말요. 나도 지금까진 긴가민가했는데, 당신의 상처를 보니 확신할 수 있을 것 같군.”
요태희는 한숨을 뱉었다.
“혈선들도 완전히 회복하는 데에 수십 년이 걸렸죠. 아마 그대라고 해도 별수 없을 겁니다.”
“그렇진 않을 거요. 천마 그 양반도 나름대로 선심을 썼으니까.”
“선심을 썼다고요?”
“정말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면 그 일격으로 목숨을 앗아갈 수 있었을 거요.”
요태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자와 내 사이의 벽이 그렇게나 크단 말인가요?”
“그렇다기보다는 상성이 나빴지. 아마 당신과 비슷한 실력의 평범한 무인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밀리지 않았을 거요.”
“내가 혈선과 비슷한 체질이기 때문에 더 쉽게 당했단 말이군요.”
정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호신강기가 예상보다 허무하게 깨진 걸 보면 알 수 있지.”
“그렇군요.”
요태희는 이제 편한 자세를 하고 있었다.
정천은 그녀의 상처 부위에 손을 가져갔다. 그런 다음 강룡수라마공을 운용한 회기영술의 수법을 사용했다.
평범한 회기영술만으론 천마신공의 기운을 몰아낼 수 없다.
그러나 비슷한 성질을 지닌 강룡수라마공이라면…….
“아…….”
조금씩 회복되는 상처.
요태희의 얼굴이 한결 편안해졌다.
어느 정도 그녀를 회복시킨 정천이 손을 뗐다. 그때 정천의 옆으로 그림자 하나가 드리웠다.
“당신, 잠깐 나랑 얘기 좀 해.”
진백란이 팔짱을 낀 채 정천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