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四章 천마
주변을 위압하는 무지막지한 존재감 같은 것은 없었다. 도리어 사람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귀신을 보는 것 같은 기분.
기척을 없애는 요태희의 능력조차 천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괴물이군.’
장유추는 혀를 찼다. 저쯤 되는 인물이 이렇게까지 접근할 때까지 기척을 느끼지 못하다니.
다른 이들의 심정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모두들 한 방 먹은 표정으로 천마를 보고 있었다.
천마는 그 시선이 싫지 않은 듯 웃었다.
“이로서 비긴 셈이군.”
“비겼다고요?”
요태희의 말에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본좌 역시 그대들이 이 안까지 들어오는 동안 눈치채지 못했거든. 이런 경우는 근 십여 년 내에 처음인 듯싶군.”
“그렇다면 어떻게 여기에 나타난 거죠?”
“간단해. 그냥 진지를 한 바퀴 순찰하고 있던 중이었거든.”
“…….”
“기척은 없는데 이래저래 소리가 시끄럽더군. 덕분에 몰래 다가와서 구경하고 있었지.”
요태희는 한숨을 쉬었다. 기껏 기척을 죽여 놓았더니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도루묵이 되었다.
천마의 시선이 일행을 훑었다.
그의 시선이 잠시 멈추었다.
윤하월이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구면이로군, 애송이.”
“……큭!”
윤하월은 침음을 뱉었다. 그의 손은 어느새 청룡창을 부서져라 움켜쥐고 있었다.
전의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공포를 몰아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공포를 안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 무서움을 모르는 하룻강아지는 언제고 목숨을 짚신처럼 버리게 될 테니까.”
“크읏, 닥쳐라!”
“본좌의 입을 다물게 할 수 있다면 해 보게.”
윤하월이 이를 부러져라 악물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 그가 천마를 어찌할 수 없다는 건 누구보다도 본인이 잘 알았다.
천마는 이내 윤하월에게 흥미를 잃었다.
“이미 부서진 장난감이나 마찬가지니 더 관심을 줄 필요도 없겠지.”
한가로운 중얼거림. 윤하월도 윤하월이지만 장유추나 백미련도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놈이 개차반이긴 해도 실력 하나는 초일류거늘…….’
‘하지만 허풍이 아니야. 이 남자는 풍신창왕을 얕잡아 볼 자격이 있어.’
검왕조차도 이런 기도를 풍기진 못했다. 어째서 상대적으로 세력이 작은 마교가 끝끝내 사라지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천마는 그 혼자서도 천무맹에 맞설 수가 있을 것만 같았다.
“십 년 전보다 강해지셨군요.”
불쑥 흘러나온 목소리.
정천이었다.
“음?”
천마는 의아한 눈으로 정천을 보았다. 그러고는 무언가를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본좌가 자네를 예전에 만난 적이 있던가?”
“직접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일 겁니다.”
“그렇겠지. 자네쯤 되는 무인을 본좌가 기억하지 못할 리는 없으니까.”
천마의 시선이 정천에게 고정됐다.
“그렇기에 더더욱 물을 수밖에 없군. 마치 예전부터 본좌를 알고 있었다는 듯한 그 말투는 뭔가?”
“이미 답을 알고 계시잖습니까? 전 예전부터 당신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건 답이 아니야.”
천마가 단언했다.
“사방만해의 모든 무인들이 본좌를 알고 본좌를 경외한다. 마교의 무인들은 본좌를 숭배하고, 정파의 무인들은 본좌를 경멸한다. 그러나 그들의 공통점은 그 모두가 본좌를 두려워한다는 것이지.”
참으로 광오한 말이었다. 그럼에도 일말의 망설임이 없는 것을 보면 정말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그러나 두려워한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그것만으로는 본좌에 대해 안다고 할 수 없지.”
“그럴 겁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말, 증명할 수 있나?”
“물론입니다.”
순간 정천이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이윽고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천마보.
정천은 천마를 제외한 모두가 좇지 못할 속도로 천마의 앞까지 당도했다. 그야말로 한순간이었다.
천마의 표정도 약간 미묘해졌다.
“자네였군. 귀도신마가 말했던 이, 강룡단의 무공을 소유했다는 정파인.”
“그렇습니다.”
“본좌를 바라보던 시선이 미묘하던 것도 그 때문이군. 왠지 자네만큼은 본좌를 봐도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더군.”
“…….”
“강룡단을 통해 본좌의 무공을 익혔으니, 그만큼 본좌의 성취에 대한 견식도 높을 수밖에 없겠지. 자네가 본좌더러 강해졌다고 말한 것은 그런 맥락일 테고. 안 그런가?”
“맞습니다.”
천마는 씩 웃었다.
그는 정천이 마음에 들었다. 말 몇 마디밖에 나누지 않았어도 많은 것을 알 수 있었고, 그 하나하나가 마음에 쏙 들었다.
쓸데없이 말이 길지도 않으며 거침이 없다. 무엇보다도 천마를 경외하면서도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적으로 둔다면 누구보다도 까다로울 테지.’
그러나 곁에 둘 수만 있다면 천군만마가 부럽지 않을 터였다.
그렇기에 천마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말했다.
“어떤가? 이참에 천무맹 따위는 갖다 버리고 본좌와 손을 잡는 것은?”
“……!”
정천보다도 주변 사람들이 더 놀랐다. 귀도신마조차도 입이 쩍 벌어져서 천마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은 더더욱 놀랄 일이었다.
“최고의 대우를 약속하지. 자네라면 마교십존보다도 위에 있을 자격이 있어. 원한다면 본좌의 후계자로 둘 수도 있네.”
“처, 천마님?”
“본좌의 말이 부당한 것 같은가, 귀도?”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마교의 불문율, 힘은 곧 법이며 힘의 정점인 천마는 언제나 옳다.
그것을 잘 아는 귀도신마이기에 불만 따위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그는 권력이나 위치에 그다지 목메는 성격도 아니었고.
그래도 이런 파격적인 제안이 놀라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천마는 다시 정천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어떤가? 좀 더 쉽게 말해 본좌는 그대에게 중원 전체를 선물하겠다고 말하는 걸세. 얼마 후 천무맹은 과거의 이름이 되어 사라질 테니 말이야.”
다른 이들의 얼굴이 금세 긴장되었다.
아주 가능성 없는 얘기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정천은 천마와 얘기를 나누겠다고만 했을 뿐, 구체적으로 무얼 하겠다고 말하진 않았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천마와 손잡는 것은 분명 이점이 크다. 혈선이란 공동의 적을 상대하려 한다면 더더욱.
천무맹은 반쯤 혈선의 본거지이자 수족이나 다름없다. 그에 반해 마교는 바깥의 세력.
혈선에 맞서기엔 천무맹보다도 수월한 것이다.
‘그렇다면?’
장유추는 요태희의 표정을 살폈다.
요태희는 실제로 갈등하는 얼굴이었다. 그녀 역시 같은 결론에 도달한 것이리라.
‘큰일이군.’
정천이 천마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천무맹은 그날로 끝이다.
검왕이라 해도 저 둘을 감당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천무맹이 사라진다. 그것을 생각하니 장유추로서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본디 천무맹에 충성적이진 않은 그조차 이 정도이니, 다른 이들은 어떨 것인가?
윤하월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백미련 역시 살짝 긴장한 표정.
그런 와중에, 정천은 픽 웃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
“사족이 붙는 것을 보니 본좌의 제안을 거절할 생각이로군.”
“중원 같은 것은 줘도 안 가지거든요.”
천마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중원이 본좌와 천마신교에 있어 어떤 의미인지를 알면서도 하는 말인가?”
“압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게 의미가 없는 것에 억지로 의미를 부여할 순 없겠죠.”
“옳은 말이군. 하지만 지나치게 건방져.”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몇 마디 말에 의해 팍팍 변하는 공기에 다른 사람들이 더욱 불편해졌다.
하지만 천마는 이내 표정을 풀었다.
“뭐, 정말 필요하다면 본좌의 힘으로 쟁취하면 그만이지. 자네에게 정말 그 정도 가치가 있다면 팔다리를 부러트려서라도 데려가면 되겠지.”
“쉽지는 않을 텐데요.”
“본좌도 알고 있네. 쉽지 않다는 말은 불가능하진 않다는 말과 같다는 것도.”
“말을 잘못했군요. 그냥 불가능할 거라고 말할걸.”
“본좌에게 불가능은 없네.”
정천은 어깨를 으쓱였다.
“세상 그 누구도 당신의 오만과는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을 겁니다.”
“그렇기에 본좌는 지존인 것이다.”
지존.
남이 담았다간 비웃음만 살 말이지만 천마에게 있어선 달랐다. 실제로 모두들 그 말에 토를 달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어쨌든…….”
천마가 화제를 돌렸다.
“본좌를 구태여 찾아온 이유는 뭔가? 검왕 유극태의 서신이라도 받아 왔나?”
“그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슨 용건으로 찾아왔지?”
정천은 구태여 말을 돌리지 않았다.
“팔부혈선에 대해 알고 있을 거라 봅니다만.”
“…….”
천마가 처음으로 침묵했다. 거침이 없던 그간에 비하면 무척이나 신중한 반응이었다.
잠시 후 그의 입이 느릿하게 열렸다.
“혈선들과 관련해 무슨 얘기를 하러 왔나?”
“간단합니다. 연맹하여 그들과 맞서 주셨으면 합니다.”
“연맹하자고? 검왕이 그렇게 전하라고 했나?”
“천무맹주와는 아무 관련도 없습니다. 그저 제 판단 하에 이곳까지 온 것뿐입니다.”
“천무맹과 우리 사이의 전쟁과도 무관하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정천은 단언하듯 말했다.
천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다시 말해, 천무맹이 멸망해 버리더라도 본좌가 자네와 협력하겠다고 한다면 상관없다는 말이로군.”
정천도 미소를 지었다.
“대신 동맹의 자격으로 요구하겠지요. 천무맹과의 전쟁을 물러 달라고 말입니다.”
“…….”
“그 대신 혈선들과의 일이 정리된 후엔 전쟁을 벌이든 정파무림을 멸하든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바라신다면 도와드릴 수도 있고요.”
“네놈!”
윤하월이 버럭 일갈했다.
“결국은 더러운 마교 놈들과 손을 잡겠다는 소리로구나! 그런 얘기를 하고자 몰래 이곳에 온 것이었나!”
정천과 천마는 그의 말을 무시했다. 무시당한 윤하월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돌아가 지금 일에 대해 모두 말하겠다. 네놈의 정체를 세상에 밝히고 네놈과 관련된 모든 것을 남아나지 못하게 할 테다!”
“…….”
“화륜문이라 했던가? 그 별 볼일 없는 문파도 멸문당하게 될 것이다!”
“시끄러우니 좀 닥쳐라.”
천마의 한마디였다.
별것 아닌 목소리임에도 윤하월은 덜컥 목구멍이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정천의 살기 어린 시선이 윤하월의 미간에 꽂히고 있었다.
“할 테면 해 봐. 네가 화륜문을 적대하는 순간 너와 관련된 모든 것을 쓸어버릴 테니.”
“네놈…….”
“천무맹? 그 전체가 화륜문의 적이 된다면 난 천무맹도 무너트릴 거다.”
광오하기로는 천마에도 뒤지지 않는 말이었다. 천마는 한 방 먹었다는 듯 웃었다.
“대단한 자신감이군. 최소한 저 창잡이보다는 담이 크다고 봐야겠어.”
“칭찬은 됐고, 어떻게 하실 겁니까?”
단도직입적인 정천의 말에 천마는 잠시 고심했다.
“상당히 매력적인 제안이기는 하군. 확실히 혈선들은 우리 천마신교에 있어서도 눈엣가시이니 말이야.”
“혈선은 마라혈천이란 백 인의 수하들을 두고 있습니다. 그 개개인의 실력은 못해도 마교십존에 비할 정도일 겁니다.”
“……그 정도라고? 증명할 수 있나?”
정천은 백미련을 가리켰다.
“그녀 역시 마라혈천의 일원이었습니다. 지금은 부상을 입어 전력이 약간 훼손됐습니다만, 보통 실력이 아니란 건 알 수 있을 겁니다.”
“흐음.”
천마는 물건을 감정하듯 백미련을 훑어봤다.
“미인이군. 본좌의 수발을 들게 하고 싶을 정도야.”
백미련이 흠칫했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가볍게 무시했을 테지만 상대는 천마였다.
“확실히 제법 매서울 것 같긴 하군. 귀도와 붙어도 오백 합 내에 승패가 나지 않겠어.”
귀도신마가 발끈했다.
“천마님, 제 귀령이는 아직 녹슬지 않았습니다.”
“알아. 하지만 저 아가씨도 보통내기가 아니야. 자네라고 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걸.”
“하오나…….”
“되었네.”
간단히 말을 끊은 천마가 정천을 보았다.
“자네의 말은 잘 알겠어. 본좌도 혈선들이 호락호락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
“그럼 손을 잡으실 거라는……?”
“그러나 자네의 제안은 받아들이지 않겠네.”
정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유가 뭡니까?”
“간단하네.”
천마는 글귀를 읽듯 무미건조하게 선언했다.
“천마신교는 세상의 정점. 자네나 천무맹과 손을 잡지 않고도 혈선들을 쓸어버릴 수 있네. 다시 말해 천무맹도 팔부혈선도 모두 우리의 힘만으로 해치워 버릴 거란 말일세.”
“그건 만용입니다!”
요태희가 끼어들었다. 혈선의 관련된 일이기 때문인지 평소보다 격앙된 목소리였다.
“천마, 당신은 혈선들의 힘을 너무 얕잡아 보고 있어요. 단언컨대 지금의 마교만으로는 그들을 당해 낼 수가 없습니다!”
“제법 앙칼진 목소리로 건방진 소리를 지껄이는군, 계집. 그 말을 증명할 수가 있나?”
“저는 누구보다도 그들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한때는 그들의 동지이기도 했으니까요.”
천마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호오, 이제 보니 다른 녀석들과는 전혀 다른 기운을 풍기는군. 모두의 기척을 가렸던 것도 너의 능력이었던 건가?”
“그렇습니다.”
“흐음.”
천마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그러나 그 정도 실력으로는 설득력이 부족하겠는걸. 혈선들의 수준이 네년보다 약간 나은 정도여서야, 본좌의 상대는 되지 못한다.”
“큭…….”
요태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힘에 크게 도취되는 일이 없는 그녀였다. 그러나 자신이 이렇게까지 무시당할 만큼 약하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팟.
소매를 떨쳐 아랑궁을 꺼내든 그녀가 말했다.
“그렇다면 한번 시험해 보시지요? 정말 상대가 되지 못할지 말입니다.”
“하하하.”
천마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마치 손녀딸의 재롱을 바라보는 할아버지 같은 웃음이었다.
물론 실제 나이야 요태희 쪽이 훨씬 많겠지만 말이다.
그것 때문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요태희로서도 상당히 빈정이 상했다.
“혈선들은 당신의 시조를 죽였습니다. 과연 당신이 그보다 강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요?”
그녀답지 않은 도발.
그러나 효과만큼은 확실했다.
“실언했구나, 계집.”
천마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따라와라. 격의 차이란 것을 느끼게 해 주지.”
“해 보시죠.”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요태희.
천마는 어느 때보다도 진지해진 표정으로 귀도신마를 돌아봤다.
“이들을 중앙 비무장으로 안내해라.”
* * *
일행은 귀도신마의 뒤를 따라가게 되었다.
그들이 지나가는 뒤로 마교도들의 시선이 따랐다. 더 이상 기척을 숨길 필요가 없었던 만큼, 그들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마교도들을 자극하고 있었다.
“정말 미쳤군, 미쳤어.”
귀도신마는 연신 한탄을 뱉고 있었다.
“제법 기이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그분의 앞에선 전혀 통하지 않을 게야. 소저는 괜한 만용 때문에 어린 나이에 죽게 되었군.”
요태희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굳은 얼굴로 내심 다짐을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때문에 귀도신마의 말동무는 자연스레 정천이 되었다.
“저 여자, 저래 보여도 천마보다 연상이우.”
“뭐야?”
귀도신마는 황당하다는 눈으로 요태희를 힐끔 보고는 혀를 찼다.
“역시 여자는 요물이야. 에잉, 괜히 안타까워했군.”
“나이 좀 많다고 그렇게 홱 돌아서는 거요?”
“그것 때문만은 아니네. 어쨌든 저 요녀는 성히 돌아가지는 못할 게야.”
그새 호칭까지 소저에서 요녀로 바뀌어 버렸다.
정천이 피식 웃고 있으려니 귀도신마가 속삭이듯 덧붙였다.
“그건 자네들도 마찬가지일세.”
“…….”
“자신감 있는 건 좋네만 그분의 심기를 너무 건드렸어. 안 그래도 자네들은 우리의 적인데, 호랑이 아가리 속에서 너무 만용을 부렸네.”
“만용일지 아닐지는 지켜볼 일이지요.”
“하! 자네는 저 요녀가 천마를 꺾을 수 있으리라 보는가?”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장유추와 윤하월이 귀를 종긋 세웠다. 그들도 내심 이 대결의 귀추를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마는 무의 정점이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검왕도 강하고 정천도 경이로웠지만, 그 누구도 천마와 같은 기도를 내뿜지는 못했다.
그러나 요태희 역시 궁후로 불릴 정도의 강자.
실력만으론 검왕에게도 크게 밀리지 않는다고 평해질 정도다.
한마디로 천무맹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인물. 천마가 상대라 해도 크게 밀리진 않으리라 생각됐다.
물론 그것도 추측일 따름이었다. 실제로 붙어 보지 않고서야 제대로 된 실력을 가늠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으니까.
때문에 정천의 생각이 궁금해지는 것이었다.
‘이 중 두 사람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건 저 친구다.’
‘마음에 들진 않지만 놈의 추측이 가장 해답에 가깝겠지.’
그때 정천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마 천마가 이기겠지요.”
너무 간단하여 허무하기까지 한 대답이었다.
각오를 다지던 요태희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장유추도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뗐다.
“너무 간단히 단정 짓는 것 아닌가?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아는 걸세.”
“그것도 길이가 미묘한 경우에나 그렇죠. 척 봐도 뭐가 긴지 알 수 있을 정도면 굳이 대 보는 건 시간 낭비 아니겠습니까?”
“그, 그거야 그렇지만…….”
장유추는 우물쭈물했다. 사실 자신이 왜 요태희를 두둔하는지도 의아한 차였다.
“그래서, 두 사람의 실력 차이가 확연하다는 거냐?”
윤하월의 물음이었다. 정천은 여러 번 말할 것도 없다는 투로 대꾸했다.
“물론이오.”
“그래, 천마는 물론 강하다. 그건 직접 맞붙어 보았던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안다. 반면 너는 궁후의 실력을 잘 알고 있을 테지. 맞붙지는 않았다지만 바로 앞에서 목도했으니 말이야.”
“궁후뿐 아니라 천마의 실력도 내가 더 정확히 파악하고 있을 거요. 댁과 싸웠을 때의 천마는 본실력을 드러내지도 않았으니까.”
“네놈……!”
“어쨌든 이번 일은 궁후가 실수한 거요. 뻔히 보이는 수법에 넘어가 버렸으니.”
요태희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천마가 일부러 도발을 한 거란 말인가요?”
“당연하지. 그 인간 싸우고 싶어 안달 난 눈을 보지 못했단 말이야?”
“그런…….”
요태희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천마에 대해 착각하고 있었다. 마치 그가 자신처럼 혈선들을 반드시 해치워야 한다는 사명에 빠져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천마는 본질적으로 싸우는 이유부터 달랐다.
그녀는 대의를 위해 싸운다. 혈선들을 없애 중원을 안정시키겠다는 대의.
그러나 천마는 달랐다.
그저 적이 있기에 싸우는 것뿐이다. 애초에 그는 마인(魔人). 싸워야 하는 이유 따위는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끌끌, 이래서 정파 놈들은 안 된다니까.”
귀도신마가 혀를 찼다.
“싸우기 위해 강해지고 싸우기 위해 무공을 익힌다. 암습도 흉수도 모두 싸워 이기기 위한 방법일 뿐. 그것이 바로 마인의 삶이란 것을 모르나?”
“그래서 네놈들이 야만적인 것이다. 사람 구실을 저버리고 오직 싸움만을 생각하기에!”
윤하월의 반박에도 귀도신마는 웃어넘길 따름이었다.
“정말 놀고 있군. 너희는 뭐 다른 것 같은가?”
“뭐라고?”
“이 몸의 질문에 대답해 보게. 너희들이 농사를 짓기를 하나, 돼지나 소를 사육하기를 하나? 먹고 싸며 싸우는 것 외에 너희가 하는 일이란 뭐지?”
“…….”
“싸우고 싶어 싸운다. 그 진리를 외면한 채 싸우기 위해 별별 이유를 갖다 붙이지. 대의가 어떻고 정의가 어떻고 하며 구실 만들기에 급급한 너희야말로 위선자가 아니겠나?”
“우린…….”
윤하월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귀도신마는 단언하듯 말했다.
“이 몸이 확실히 해 주지. 무인으로서는 우리가 너희보다 순수하다. 똑같은 깡패 무리지만 우린 그래도 깡패라는 자각이 있거든.”
“…….”
윤하월은 아예 입술을 굳게 다물어 버렸다.
귀도신마가 의기양양해 하고 있을 때 장유추가 불쑥 끼어들었다.
“이제 보니 떠벌이기만 잘하는 게 아니라 궤변도 수준급이구나.”
“뭐야?”
“우리와 너희는 전적으로 다르다는 거다.”
“하!”
신경질적으로 웃은 귀도신마가 물었다.
“뭐가 그리 다르다는 거냐, 칼도둑놈아?”
“간단해. 우린 밥값을 한다.”
“밥값이라고?”
고개를 끄덕인 장유추가 말했다.
“나라가 수상하여 도적 무리가 생겨나 농민 무리를 핍박한다. 그럴 때마다 분연히 일어섰던 것이 우리들 무인 집단이었다.”
“그 무슨 말 같지도 않은…….”
“그렇게 생각하나? 그러나 실제로 황룡성 내의 농민들은 다른 지역의 사람들보다 훨씬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다. 싸움밖에 머릿속에 없는 너희들 마교와는 근본부터 다르단 거지.”
“그게 무인 집단이란 말이냐? 너희는 그저 또 하나의 정치 집단에 불과하다!”
“무엇이 되었든 우리는 그들을 보호한다. 존재 가치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
“그 정도야 우리들도…….”
“조금 전에 말하지 않았던가? 너희는 싸움밖에 모르는 머저리들이라고 말이야.”
“…….”
이번엔 귀도신마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사이 그들은 거대한 공터로 들어서고 있었다. 천마가 말했던 중앙 비무장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이런 걸 잘도 만들어 놓았군.”
장유추가 감탄했다. 실제로 엉성하긴 해도 갖출 건 다 갖추고 있는 비무장이었다.
통나무를 깔아 놓아 관객석까지 구현해 놓은 모습. 물론 대결이 대결인 만큼 그곳은 텅텅 비어 있었다.
물론 구경꾼이 아주 없진 않았다. 몇 명의 무인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저들은?”
백미련의 물음에 귀도신마가 운을 뗐다.
“마교십존. 나와 동률의 존재들이다.”
“저들이 마교십존……?”
실제로 모여 있는 사람은 여덟 명뿐이었다. 멸살독마가 여전히 쓰러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그중 한 명인 마의는 무인이 아니었으니, 실질적인 전력은 귀도신마를 포함해 여덟 명이었다.
“하하하. 귀도신마, 꼬락서니가 꼭 구경꾼을 안내하는 하인 같구나!”
장유추 뺨치는 거한이 호탕하게 웃어 댔다.
귀도신마는 쯧 하고 혀를 찼다.
“닥쳐라, 금강역마! 대가리 속까지 근육으로 들어찬 주제에 누구를 놀리려는 거냐!”
“하하하. 너무 화내지 말게. 그냥 농담한 것 아닌가?”
“끄응.”
욕먹은 쪽은 껄껄 웃어 대고 욕을 한 쪽이 골머리를 앓는다. 구경하는 입장에선 상당히 기이한 모습이었다.
“금강역마라면…… 소림권이라도 익힌 건가?”
정천이 중얼거리려니 거한 금강역마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자네 제법 눈썰미가 좋군! 본마는 본디 소림의 무승이었지! 하하하!”
“소림 출신의 마교도란 말이오?”
“음. 파계당했거든!”
남의 일이더라도 말하기 쉽지 않을 텐데 웃으며 얘기를 늘어놓는 금강역마였다. 듣는 정천이 도리어 떨떠름했다.
귀도신마가 속삭였다.
“저 자식, 완전히 미친놈이야.”
“하하. 미치진 않았다네, 귀도신마.”
“젠장. 그 빌어먹을 웃음이나 좀 관두게!”
“웃음이 나오는 걸 어쩌겠나. 하하하!”
외관만 보아선 유쾌하기 짝이 없는 금강역마였다. 그러고 보면 외관 자체도 인심 좋은 승려 같아 보였고.
‘마교엔 별별 인간들이 다 있나 보군.’
정천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려니 나머지 십존들도 다가왔다.
“누가 궁후 요태희지?”
백발의 화려한 장식을 치렁치렁 멘 여인이 말을 꺼냈다. 정천이 귀도신마에게 물었다.
“저 여자는 누구요?”
“혈패검마.”
이번에도 떨떠름하게 대답하는 귀도신마였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허리춤에 어울리지 않게 거대한 장검을 차고 있었다.
“이봐요, 귀도 영감. 누구더러 혈패검마라는 거죠?”
그녀는 기분이 상한 듯 귀도신마를 질책했다.
“진백란이라고 불러 달라고 했잖아요.”
“……그건 본명도 아니잖나.”
“어쨌든 난 그 이름이 마음에 들어요. 그나저나 궁후가 누구지?”
잠자코 있던 요태희가 나섰다.
“내가 궁후예요.”
“당신이?”
혈패검마 진백란은 우습다는 눈으로 요태희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용기가 가상하다는 점은 칭찬해 주겠어. 하지만 멀쩡히 돌아갈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야.”
“…….”
“그게 아니면 비무를 핑계로 그분께 잘 보이려는 생각인가? 그렇다면 꽤 괜찮은 발상이라는 걸 인정해야겠어. 나조차도 지금껏 그런 생각은 못해 봤거든.”
요태희는 한숨을 쉬며 물러났다. 진백란이 대뜸 미간을 찡그렸다.
“어? 무시하는 거야, 지금?”
“미안해요. 당신 같은 사람은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냥 물러나 버리는 요태희였다.
진백란도 흥 하고 코웃음을 치기만 할 뿐, 더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말하는 벽에 소리쳐 봐야 본인 입만 아픈 법이었으니.
전체적으로 긴장감이 결여된 모습이었다. 다른 마교십존들도 별반 차이가 없는 모습.
정천으로서도 한숨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마교십존이란 작자들은 원래 하나같이 이럽니까?”
“어이, 너. 뭐가 이렇다는 거지?”
진백란이 마침 잘됐다는 듯 정천을 노려봤다. 정천 역시 요태희와는 달랐기에 그냥 듣고 있지만은 않았다.
“천마 바로 아래라는 것들이 입만 산 것 같아서 그렇다.”
“입만 살았다고?”
진백란의 눈썹 끝이 치켜 올라갔다.
“입만 살았는지 아닌지 지금 당장 확인시켜 줄까? 네 배에 커다랗게 구멍을 내 주면 알 수 있지 않겠어?”
“하. 그래도 마교도는 마교도로군. 계집애 입이 걸걸한 게 일품이야. 과연 실력은 그에 걸맞은 수준일지가 의문이지만.”
“네가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일단 그런 말은 죽일 수 있는 실력부터 갖춘 다음에 하시지?”
스르릉.
진백란은 더 떠들지 않고서 검을 뽑아 들었다.
금강역마나 다른 십존들도 재미있다는 듯 구경만 할 뿐 끼어들지는 않았다.
때문에 결국 중재는 귀도신마의 몫이었다.
“그만둬라, 혈패검마.”
“진백란이라니까! 그리고 당신답지 않게 왜 말리려는 거예요, 귀도신마?”
“다 네가 걱정되어서 그러는 거야.”
“걱정이라고요?”
진백란이 표정이 일그러졌다. 반면 생각이 깊은 편인 금강역마는 웃음을 거두고서 되물었다.
“저 친구가 그렇게나 강한가?”
귀도신마는 구태여 숨기지 않았다.
“전력으로 싸운다면 이 몸조차 십초지적이 되지 못할걸. 이 정도면 충분하겠나?”
“……!”
마교십존들의 표정이 굳었다.
파죽지세의 기세만큼은 십존 중에서도 필두라 할 수 있는 귀도신마였다. 그런 그가 이렇게나 간단히 패배를 인정하다니?
“거, 거짓말! 귀도신마가 우릴 놀리려고 장난치는 거 아니에요?”
“그런 장난을 해서 뭘 하겠나? 어쨌든 이 친구는 강해. 괜한 만용 부리지 말게, 혈패검마.”
“윽…….”
진백란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정천을 쳐다봤다. 빌어먹을 놈이긴 한데, 귀도신마가 강하다고 하니 치고 들어가기가 꺼려졌다.
정천은 어쩔까 하다가 그냥 피식 웃었다.
“지금이라면 봐줄 테니 검 집어넣어.”
“으으! 망할 자식, 네가 그러라면 내가 그럴 것 같아?”
“그럼 집어넣지 마.”
“으……!”
진백란의 고민을 풀어 준 사람은 따로 있었다.
“관두지. 정천 자네도 그쯤하고.”
천마가 비무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