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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章 순례자 (74/146)

第二章 순례자

오랜 세월을 여행해 온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세계의 경계를 여러 차례 넘나들었고, 수많은 것들을 보고 익혔다.

그러던 와중, 갑작스럽게 여행은 끝을 맞게 된다.

중원. 그곳이 그들이 불시착한 곳이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그들은 더 이상 세계를 넘나들 수 없게 됐다.

차원은 굳게 잠겨서는 닫혀 버렸고, 무슨 수로도 그 문을 열 수가 없었다.

그들은 절망했다.

그러나 절망이 있는 자리엔 희망도 있는 법. 그들에겐 세계를 넘나들며 얻게 된 강력한 힘이 존재했다.

그들은 거의 불사신이었다. 아무리 긴 세월도 그들의 몸을 노화하게 만들진 못했다.

이따금 마주치게 된 중원의 무인들도 그들의 힘엔 적수가 안 됐다.

그들은 다른 세상으로, 나아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계획을 수립했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이 땅의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아야 했다.

무인들은 그들에 비해 한없이 약했다. 그러나 때로는 그들을 위협할 정도의 강자도 나타났다.

우선은 그들에게 방해받지 말아야 했다.

그러려면?

방법은 간단했다. 그들 중 일부를 포섭하거나 복종시켜서, 자신들을 보호하게 하면 될 일이었다.

어떤 자들은 힘으로 제압했다. 어떤 자들에겐 그들이 바라는 바를 충족시켜 주었다. 어떤 자들은 세뇌해 꼭두각시로 만들었다.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할 힘이 그들에게 있었다.

그러는 사이 그들 사이에서도 내분이 일어났다.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이들과 이곳에 정착하고자 하는 이들로 나뉜 것이었다.

귀환파와 정착파는 이내 찢어졌다.

본디 열두 명이던 그들 무리 중 최후까지 남은 이들은 여덟이었다.

네 명의 정착파들은 모습을 감추었다.

들리는 풍문엔 죽었다고도 했고, 중원 너머의 땅으로 건너갔다고도 했다.

나머지 여덟 명은 계획을 기반을 다지는 작업을 충실히 이행했다.

이윽고 그 노력은 빛을 발해, 강력한 무력 집단이 그들 아래에서 탄생했다.

그것이 바로 천무맹.

여덟 명은 어느새 팔부혈선이라 불리고 있었다.

떨어져 나간 네 명 중 한 명은 노골적으로 그들의 방식에 반기를 들었다.

그리하여 천무맹의 핍박을 받던 이들을 규합, 자신만의 세력을 구축한다.

그리고 자신을 천마라 칭하니, 그의 발아래 모인 이들이 바로 천마신교, 즉 마교였다.

전쟁은 필연적이었다.

천무맹과 마교는 기나긴 세월을 맞부딪치게 되었다. 초기엔 혈선들도 적극적으로 나섰기에, 초대 천마를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 혈선들도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죽음에 이를 정도는 아니나 수십 년을 족히 요양해야 할 타격이었다.

그사이 천마는 자신의 씨를 뿌린 뒤.

그뿐 아니라 본래 지녔던 능력과 중원의 무공을 융합, 천마신공이란 절세의 무공을 탄생시켰다.

혈선들이 쉬는 수십 년 동안 천마의 후손들이 마교를 이끌었다.

결과적으로는 천무맹이 마교를 중원에서 몰아냈지만, 완벽한 마무리를 맺지는 못했다.

마교는 중원 외곽에 존재하며 항시 중원을 넘보게 되었다.

요양에서 회복한 혈선들은 이제 전면에 나서지 않기로 합의를 보았다.

이미 그들의 숙적인 천마도 죽었고 천무맹은 중원을 통일했으니, 배후에서만 적당히 조종하면 될 일이었다.

허수아비 맹주들이 천무맹을 맡게 되었다.

물론 허수아비라고는 해도 대부분의 실권은 그들에게 주었다. 애초에 혈선들이 바라는 바는 권력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는 사이.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내게 된다.

정확히는 그에 필요한 것을.

“그래서, 그 방법이란 게 뭔데?”

정천의 물음에 요태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밀교를 알고 있나요?”

“지금은 사라진 세력 말인가? 상당히 오래전에 마교에 의해 멸망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장유추의 대답에 요태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밀교를 멸망시킨 건 초대 천마, 그러니까 우리의 동족이었어요. 그가 혈선들보다 한발 앞서 고향으로 돌아갈 방법을 알아냈기 때문이었죠.”

“고향으로 돌아갈 방법이…… 밀교에 있었다고?”

“밀교의 특기는 술법. 사람을 현혹하는 환술과 주변 환경에 변화를 주는 주술이 그것이었죠. 그중 천마가 주목한 것은 주술이었어요.”

제물을 공양하여 술력을 얻고, 그 힘을 이용하여 자연을 움직인다.

그 힘이 궁극에 이른다면 차원의 벽조차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천마가 얻게 된 결론은 그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천마는 밀교를 멸하여 방법 자체를 찾아내지 못하게 하려 했어요.”

“밀교를 없앤대도 다른 방법을 찾아낼 길이 있었을 텐데? 무엇보다 당신들이 이곳으로 온 방법부터가 세상의 벽을 넘나드는 것이었을 거 아냐?”

정천의 말에 요태희는 고개를 저었다.

“본디 우리가 사용하던 방법은 이곳 중원에서 전혀 먹히지 않았어요. 애초에 그게 먹혔다면 이렇게 오랫동안 남아 있지도 않았겠죠.”

“전혀 먹히지 않았다고?”

“무인들이 자연에서 내력을 얻듯, 본디 우리도 자연의 힘을 흡수하여 힘을 펼쳤어요. 하지만 중원의 공기는 우리가 본디 살던 곳과 상당히 다르더군요.”

“공기가 달랐다……?”

“전투에 쓰기 위한 힘을 끌어낼 순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차원의 문을 열 힘을 끌어낼 수 없었어요.”

“그래서 밀교의 주술에까지 손이 닿게 된 거군.”

고개를 끄덕인 요태희가 설명을 이어 갔다.

“마교에 의해 철저하게 불살라진 밀교였지만, 극소수의 생존자들이 도망칠 수 있었어요. 대부분 지위가 높은 주술사들이었죠.”

혈선들은 뒤늦게 손을 썼다.

그들은 황급히 주술사들을 포섭하거나 납치했다. 그런 후 그들에게서 주술에 대한 지식을 흡수했다.

“지식 자체는 불완전한 부분이 많았어요. 사람의 기억력엔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주술의 정수가 담긴 서적들은 천마가 불살라 버렸으니까요.”

“그래서 많은 시간을 소모하게 된 건가?”

“그래요. 처음엔 수년이면 끝날 것 같던 일이 수십, 수백 년을 끌게 된 거죠.”

“하지만 결국은 방법을 알아냈군.”

요태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십 년 전, 그들은 마침내 주술의 시행에 나서게 됐어요.”

“진마동…….”

정천이 침음했다. 이제야 자신이 어떤 경위로 죽음까지 내몰렸는지 알게 되었다.

‘우린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주술은 실패로 돌아갔어요. 그들이 불러들이려던 문은 나타나지 않았고, 대신 수많은 마수들이 득실거리는 마굴(魔窟)이 나타나고 말았어요.”

“그래서 우리가……?”

“그래요. 용검대와 강룡단은 그 뒤처리를 위해 파견된 것이었죠. 애초에 혈선들은 그들과 함께 입구를 봉해 버릴 작정이었던 것 같지만.”

“그렇다면 조금 이상한 것 아닌가?”

묵묵히 듣고만 있던 장유추가 끼어들었다.

“용검대를 움직인 거야 그렇다고 치지. 하지만 마교의 강룡단은? 모종의 합의가 있었다고는 해도, 혈선들이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었을 텐데?”

“혈선들이 한 가지 사실을 알아 버렸기 때문이죠. 주술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재료를 말이에요.”

“그게 뭐지?”

정천의 물음에 요태희는 잠시 주저했다. 기나긴 세월을 살아온 그녀로서도 쉽게 말하기 힘들었다.

“앞서 말했듯이, 밀교의 주술엔 제물이 필요해요. 약한 것은 짐승의 피를 재료로 쓰지만…….”

장유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경우엔 사람이다, 그건가?”

“그래요.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필요해요.”

“…….”

“그것을 알기에 혈선들은 천마와 합의를 하기로 했어요. 당시의 전쟁은 천무맹 측이 우세를 점하고 있었죠. 자칫하면 마교의 본산인 십만대산까지 침범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어요.”

“크으…….”

정천이 침음을 삼켰다.

당사자인 만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용검대의 활약과 정파 무림의 단결력은 그 어느 때보다도 대단했다.

무섭게 저항하던 강룡단도 차츰 위세를 잃어 가던 시기.

천무맹 내에서도 십만대산을 직접 치자는 얘기까지 공공연히 나올 정도였다.

“혈선들에겐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죠. 그들이 주술을 펼치기 위해선 많은 이의 죽음이 필요했고, 그러려면 전쟁은 필수였으니까.”

“적이 사라지면 전쟁도 없다, 그건가?”

“사실 방법이 아주 없진 않았을 거예요. 적이 없으면 만들면 그만이니까요.”

불편한 침묵이 감돌았다.

요태희의 말대로다. 전쟁이야 얼마든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적이 없다면 동지를 적으로 만들어 버리면 그만이니 말이다.

어쩌면 천무맹이 내분으로 갈가리 찢겨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혈선들은 그보다는 마교의 존속을 택했다. 그들이 선하기 때문은 물론 아니었다.

요태희가 단언하듯 말했다.

“그들은 오늘의 전쟁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십 년 동안 비수를 갈아 온 마교와 천무맹이 정면으로 충돌하기를. 역사상 최강의 전력을 지니게 된 두 세력이 사이좋게 죽어 가기를.”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나자빠지든, 그 모든 죽음이 놈들의 주술에 이용된다는 건가?”

“그것까진 자세히 모르겠어요. 하지만 분명한 건, 최소한 이 섬서성 내에서 죽는 이들은 제물로서 쓰이게 될 거란 점이에요.”

“그럼 이 전쟁에서 죽는 이들은…….”

“모두 제물이 된다고 봐야겠죠.”

“빌어먹을 놈들!”

장유추가 주먹으로 근처의 나무를 후려쳤다.

“우리는 뭔가, 정파는 뭐고 무림은 뭔가, 또한 마교와 천마는 뭔가! 모두들 놈들의 계획대로 놀아나고 있었단 말인가? 그것도 태어나기 이전부터, 수백여 년이나 전부터!”

정천은 장유추처럼 분통을 터트리진 않았다.

그저 조용히 분노와 증오를 삭일 뿐.

혈선에 대한 복수심과 증오야 이미 예전부터 타오르고 있었다.

이제 와 거기에 무언가가 더해진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들을 얘기는 다 들은 것 같군. 하지만 궁금한 게 더 있어.”

“물어보세요.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선 답해 드리죠.”

“초대 천마가 이미 죽었다는 건, 나머지 세 사람의 정착파가 남아 있다는 소리 아닌가? 그중 한 명이 당신이라면 나머지 둘은 어디에 있지?”

“그건…….”

요태희의 눈빛이 우울해졌다.

“모두 죽었어요.”

“그렇다면…….”

“아뇨. 혈선들에게 당한 것은 아니에요. 모두들 자신이 얻게 된 새 삶 속에서 천수를 누리고 행복하게 죽어 갔어요.”

“그들은 당신네와 달리 불사신이 아니었던 건가?”

“불사라고는 해도 완벽한 건 아니에요. 엄밀히 말해 우리는 의지력을 통해서 젊음을 길게 유지하고 있는 것뿐이에요.”

“의지력?”

“네. 그렇기 때문에 본인이 마음만 먹는다면 당장이라도 스러져 갈 수 있어요.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삶에 만족했고요.”

“모든 이들이 혈선들처럼 미친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로군.”

요태희가 슬픈 눈을 했다.

“우리도 당신들과 같아요. 우리도 우리의 세상에선 평범한 사람이었고, 가정을 꾸리거나 사회생활을 하며 살았어요.”

“…….”

“상황이 이렇게 되어 버리긴 했지만, 우리도 근본적으론 당신들과 같아요.”

“못 들은 걸로 하지.”

정천은 딱 잘라 말했다.

요태희는 발끈하여 더 말하려 했지만 그 전에 강룡검이 그녀의 목젖에 닿았다.

“난 혈선들이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걸 용납할 수 없어. 진마동의 심연에서 보았던 악귀들이라면 모를까.”

“……그렇겠지요. 다른 이들이라면 몰라도 당신은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겠죠.”

“그러니까 이 얘기는 그만두지. 어쨌든 중요한 건 놈들의 계획을 막는 거니까.”

장유추가 정천에게 물었다.

“방법은 있나?”

“글쎄요. 일단은 이 얘기를 천마에게 똑같이 해 주면 되지 않을까요?”

“천마가 그걸 믿을지 의문이군.”

“뭐, 아주 정신이 나간 놈이 아닌 바에야 믿겠죠. 못 믿으면 설득해 버리면 되는 거고.”

정천의 말에 장유추가 피식 웃었다.

“자네가 그렇게 말발이 좋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말이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

강룡검을 회수한 정천이 주먹을 쥐어 보였다.

“이걸 몇 대 먹여 줘야죠.”

요태희가 흠칫했다.

“천마와 싸울 생각인가요? 하지만 그거야말로 혈선들이 바라는…….”

“요컨대 죽지 않으면서 죽이지만 않으면 되는 거잖아? 살아 있는 사람은 놈들의 제물로써 쓰이지 않는 모양이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그럼 답은 간단한 거지.”

정천은 뒤를 돌아봤다.

“안 그래?”

조금 소리를 내어 물었다. 시선이 향한 수풀 너머에선 풀벌레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기척을 암만 죽여도 벌레 소리까지 죽여 버려서야 의미가 없잖아.”

정천의 지적에 이내 수풀 사이에서 두 사람의 신형이 나타났다.

윤하월과 백미련이었다.

백미련이 곧장 한숨을 쉬었다.

“창왕이라는 이 멍청한 작자 때문이야. 가만히만 있어도 독한 살기를 뿌려서 벌레들을 죽이니.”

“사돈 남 말하는군. 그러는 너야말로 망할 매화향 때문에 백 리 밖에서도 눈치채겠다.”

“됐으니까 그만 싸워. 어차피 아까 전부터 쫓아오는 거 다 알고 있었으니까.”

정천의 말에 두 사람은 머쓱해졌다.

“어, 언제부터?”

백미련의 물음에 정천이 피식 웃었다.

“황룡성에서부터.”

“……그럼 왜 미리 말하지 않았지? 그랬다면 쓸데없이 힘 빼 가며 미행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아니, 열심히들 따라오는 걸 보자니 말하기가 좀 그렇더군. 나름 노력하고 있는 건데 산통을 깨서야 곤란하잖아?”

“망할 자식.”

윤하월이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

“난 네놈이 정말 마음에 안 든다. 남의 머리 위에 있다는 듯한 태도도 그렇고, 사람 속을 박박 긁어 놓는 말도 그렇고. 네놈의 모든 것이 정말 마음에 안 드는 것투성이란 말이다.”

“그러면서도 쫄래쫄래 잘 쫓아오셨군. 나한테 매력을 느껴서 그런 거 아뇨?”

“매력? 네놈 배때기에 청룡창을 꽂아 넣어도 그런 말이 나올까?”

“젠장. 하여간 머릿속에 싸울 생각뿐이군. 대체 그럴 거면 뭐하러 쫓아온 거요?”

“네놈이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지 알기 위해서다.”

윤하월이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

“천마를 만나 뭘 할 셈이지?”

정천은 씩 웃었다.

“조금 전에 다 들었을 텐데?”

“혈선이 어쩌고 다른 세계가 어쩌고 하는 얘기? 그딴 게 다 무어냐. 내 알 바 아니다. 내가 알고 싶은 건 네놈이 꾸미는 짓거리다.”

쓴웃음을 지은 정천이 요태희를 돌아봤다.

“봤지? 이게 무인이란 작자들이라니까.”

“그건 나도 잘 알고 있어요. 이래봬도 저런 자들과 수백 년을 부대끼며 살아왔으니까요.”

“그건 그렇겠군. 그런데도 아직 만족하지 못한 건가?”

요태희가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아마 옛 동지들을 멈추기 전까진 안식을 취할 수 없겠죠.”

“그런가. 뭐 어쨌든 그건 그렇다 치고…….”

심각한 얘기를 가볍게 넘겨 버린 정천이 윤하월을 쳐다봤다.

“어쩔 거요? 지금부터 천마랑 담판을 지으려 갈 생각인데.”

“담판이라니, 도대체 무엇에 대해서?”

“별것은 아니고, 공동의 적을 상대로 힘을 합치자는 거지.”

“하!”

윤하월이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트렸다.

“천마와 힘을 잡는다고? 그 오만불손하고 자존심 강한 작자와?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나? 놈은 네 제안을 비웃고서 공격부터 해 들어올 거다.”

“뭐 그럼 어쩔 수 없는 거고. 어쨌든 얘기 정도야 해 볼 수 있는 거 아뇨?”

언제나 여유가 묻어 있는 가벼운 말투.

윤하월은 정천의 저 말투가 정말로 싫었다.

“난 네놈이 싫다.”

“한 얘기 또 할 필요는 없을 텐데.”

“하지만!”

윤하월이 이를 박박 갈면서도 말했다.

“지금은 네놈을 따라가 주지. 가능하면 천마가 네놈을 박살 내 주었으면 좋겠군.”

정천은 빙긋 웃었다.

“어차피 쫓아올 생각이었으면서 뭘 그렇게 말씀하시나.”

“……!”

정천은 폭발하려는 윤하월에게서 시선을 뗐다. 백미련은 평소의 건조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넌 어떻지?”

“뭐가 말이지?”

“너를 지배했던 자들의 실체 말이야. 상당히 감상이 남달랐으리라 생각하는데.”

“후후.”

백미련이 웃음소리를 냈다.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잘 모르겠어. 다른 세계라는 것도, 주술 의식이라는 것도. 본후에게 있어선 모든 게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니까.”

“구절검후의 생각은 그렇군. 그렇다면 백미련의 생각은 어떻지?”

백미련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나는…….”

“너는 어떻지?”

“역시 모르겠어. 하지만 지금은 네가 생각하는 바를 따르고 싶어.”

“좋아.”

정천은 만족한 얼굴로 물러났다.

장유추가 넌지시 물었다.

“굳이 그런 것들을 물을 필요가 있었나?”

“물론입니다. 저 두 사람을 신뢰할 수 있느냐가 문제였으니까요.”

“신뢰?”

장유추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백미련이라면 모를까, 과연 윤하월에게 신뢰라는 단어를 쓸 수 있을까?

과연 윤하월은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었다.

“빌어먹을 놈! 신뢰가 어쩌고 저째? 네깟 놈이 본좌를 신뢰해서 뭘 어쩌겠다는 거냐. 그런다고 본좌가 네놈과 친해지리라 생각하나!”

“뭐, 나도 그런 것까진 바라지 않아. 그저 최소한 배신할 것인지 아닌지를 알고 싶었던 거지.”

“배신? 그건 무슨 개소리냐?”

정천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두 사람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혈선의 비밀을 공유하게 됐어. 당장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체감하게 될 순간이 올 거야.”

“체감한다고?”

“그때 우릴 배신할 것인가 아닌가, 그 점은 상당히 중요하니까. 그리고 난 조금 전에 그러지 않을 거라고 판단을 내렸지.”

윤하월이 입을 다물었다. 백미련은 복잡한 눈으로 정천을 바라봤다.

정천은 무심히 등을 돌렸다.

“내가 다른 판단을 내렸다면, 지금쯤 숨을 쉬고 있지도 못했을 거라는 점만 알아둬.”

“……네놈!”

윤하월이 일갈하려 할 때 정천은 이미 경공을 펼치고 있었다.

“빨리 쫓아오기나 하시지. 마교의 본진과는 얼마 남지 않은 거리니까.”

“……본좌에게 명령하지 마라!”

그렇게 소리치면서도 정천의 뒤를 따르는 윤하월이었다. 장유추도 어깨를 으쓱이고는 몸을 날렸다.

요태희는 미안한 눈으로 백미련을 보았다.

“괜한 일에 휘말린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미안해할 것 없어. 본후 역시 처음부터 얽혀 있는 입장이니까.”

“그렇겠죠. 본디 마라혈천의 일원이었던 당신이니.”

“그래도 한 가지 수확은 있었군.”

“수확이라고요?”

고개를 끄덕인 백미련이 말했다.

“당신이 강한 이유. 처음부터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었어.”

“……조금 아픈 말씀이군요. 저 역시 본질은 당신들과 같아요.”

“그건 나도 알아. 그저…….”

백미련은 더 말하지 않고서 몸을 날렸다.

요태희도 구태여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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