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章 풍신과 궁후
선봉군 출격에 앞서 제갈현은 정보 체계를 재편했다. 남아 있는 소수의 비영대원만으로도 정보를 곧장 전달받을 방법을 떠올린 것이다.
그가 택한 방식은 간이 봉화.
수십 리의 거리를 두고 비영대원들이 봉화를 피워 정보를 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간이 봉화를 통한 첫 번째 연락이 도달했다.
“선봉군, 크게 고전 중.”
“…….”
“…….”
무거운 침묵이 회의장을 감쌌다. 무림 명숙들 모두가 검왕의 눈치만을 살피고 있을 따름이었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결국 정천, 그 아이의 말이 옳았군요.”
궁후 요태희의 말에 모두들 긴장했다. 자칫하면 큰 사단이 날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검왕은 의외로 차분했다.
“그렇군.”
“제 생각보다도 차분한 반응이군요. 마치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하신 것 같군요.”
“전투가 있으면 승패도 당연히 따르는 법이다. 각 경우마다 일희일비할 수는 없지.”
“그래도 직후의 일을 염려하긴 해야 할 듯한데요.”
검왕은 제갈현을 돌아봤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눈빛이었다.
“그들을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구원군을 조직해 보내는 수밖에는.”
“허나 그들은 여기서 사흘 거리에 떨어져 있소. 과연 구원군이 도착하기 전까지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군.”
남궁운의 말이었다.
그 자체는 제갈현에게 보내는 말이었으나, 시선은 검왕을 향해 있었다.
그 시선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그러니 결국 나의 실착이다, 그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그렇다고는 하지 않았소.”
“그렇다면 왜 본좌를 쳐다본 것이지?”
“누군가를 보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단 말이오?”
검왕의 이마에 심줄 하나가 돋았다. 남궁운 역시 험악해진 표정을 풀지 않았다.
제갈현은 그 사이에서 한숨을 토했다. 이래서야 제대로 된 대응은커녕 천무맹을 유지할 수나 있을지가 의심스러웠다.
그때 짝 하는 손뼉 소리가 울렸다.
궁후 요태희였다.
“그쯤해 둬요.”
놀랍게도 검왕과 남궁운은 눈싸움을 멈췄다. 무림 명숙들은 놀란 눈으로 그들과 요태희를 번갈아 보았다.
제갈현은 다시금 한숨을 쉬었다. 이번엔 안도의 한숨이었다.
‘궁후께서 돌아오셔서 다행이다.’
검왕과 남궁운은 한때 요태희를 사이에 둔 연적이었다. 결국 둘 중 어느 누구도 그녀를 취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젊은 시절, 요태희는 본인의 궁술을 갈고닦기 위해 동쪽으로 떠났었다.
그리고 궁후라는 별호에 어울리는 신궁이 되어 돌아왔다.
그땐 이미 세 사람 모두 적기를 놓친 후. 검왕과 남궁운은 각기 부인을 들인 뒤였다.
요태희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숭산 근처의 작은 마을에 기거하며 조용히 살았을 뿐이었다.
그러던 그녀가 수십 년의 은둔을 깨고 돌아왔다. 수십 년 전과 같은 용모를 지닌 채로.
이미 흰머리가 가득한 두 사람과는 너무나 달랐다. 그러나 두 사람을 진정시킬 수 있는 신기한 힘만은 그대로였다.
“두 분이 그럴 줄 알고 제가 미리 수를 써 두었어요.”
“수를 써 두었다고?”
검왕이 불쾌한 얼굴로 되물었다. 맹주인 자신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었다.
“걱정하실 것은 없어요. 맹주님의 권한을 무시하는 일은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말해 보도록.”
“간단해요. 지금 가장 전장이 필요한 사람을 그곳으로 보냈습니다.”
“지금 가장 전장이 필요한 사람?”
“그래요.”
고개를 끄덕인 요태희가 대답했다.
“자존심이란 면에 있어선 두 분마저도 능가하는, 곁에 두었다간 찢기거나 베여 나가기만 할 소용돌이. 지금 이곳에 있었다면 크나큰 문제만 일으켰을 말썽꾼.”
“설마……?”
경악하는 남궁운의 얼굴을 보며 요태희가 말했다.
“풍신창왕 윤하월을 그곳에 보냈어요.”
* * *
파파파팟!
무서운 기세로 치고 들어가던 독마대 무인들이 일순 갈가리 찢겨 나갔다.
하릴없이 밀리기만 하던 천무맹 무인들이 순간 여유를 찾았다.
“응?”
학살을 자행 중이던 멸살독마가 주춤했다. 염신이나 윤철 같은 것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살기가 느껴졌던 것이다.
그 자체로 한 자루 요도와 같은 느낌.
‘허, 이런 기운을 지닌 놈이 정파무림에 있었단 말인가?’
멸살독마의 입가가 미소를 그렸다. 그의 등허리로는 어느새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실로 오랜만이었다. 이런 느낌은.
“생사투의 느낌이로구나.”
멸살독마가 중얼거린 순간.
푸화하악!
독마대 무인들 사이에서 피의 폭풍이 몰아쳤다. 무인들은 손 한번 쓰지 못하고 갈가리 찢겨선 허공에 흩날렸다.
잔혹하기로는 비차의 혈운수조차 한 수 접어야 될 듯한 광경.
피의 폭풍 한가운데에 악귀 같은 사내가 서 있었다.
기다란 창 한 자루를 땅에 꽂은 채.
“제법 신나게 날뛰더구나, 빌어먹을 늙은 마두.”
“허.”
멸살독마가 헛웃음을 지었다.
“건방지기 짝이 없는 놈이로군. 네놈은 아비, 어미도 없느냐?”
“놀고 있네. 그래서 네놈이 내 아비라도 된다는 거냐?”
사내가 꽂았던 창을 뽑았다. 그 순간 벼락같은 창격이 멸살독마의 눈앞에서 펼쳐졌다.
파밧!
“……!”
멸살독마는 반사적으로 쌍장을 내뻗었다. 혈산독무의 독기로 쇄도하는 창강을 상쇄하려는 것이었다.
허공에서 보랏빛 독기와 푸른빛 창강이 충돌했다. 그리고 이내 깨어지는 것은…….
“크윽!”
혈산독무의 기운이었다.
멸살독마는 결국 몸을 내던졌다. 몰아친 창강은 그가 있던 자리를 훑고 지나갔다.
파바바박!
멸살독마의 뒤편에 있던 독마대 무인들이 창강에 노출됐다. 그들은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수십 갈래로 찢겨졌다.
“이런 개 같은…….”
멸살독마가 이를 갈며 사내를 돌아봤다.
상처 입은 늑대 같은 사내가 히죽 웃었다.
“이제야 제법 마두답구나. 네놈들은 역시 그렇게 널브러져 있어야지.”
“네놈은 뭐하는 새끼냐!”
부웅! 붕!
몇 차례 창을 휘두른 사내가 이죽거렸다.
“이 몸의 존명은 알아서 뭐하게? 늙은 마두.”
“이놈!”
열불이 난 멸살독마가 혈산독무의 기운을 십이성 극성까지 끌어올렸다.
쿠구구구구.
멸살독마 주변의 땅이 시커멓게 죽어 갔다. 독기가 멸살독마를 중심으로 둥글게 뭉쳐 들었다.
그 밀도는 실로 엄청나서, 본디 보라색이던 기운이 핏빛으로 보일 정도였다.
저것을 한순간 발출한다면 거대한 황소조차 거죽만 남기고 썩어 문드러질 터.
비차조차 가까이 다가가지 못할 정도였다.
‘독마께서 독왕지체를 펼치시다니.’
멸살독마의 궁극의 절초라 할 수 있는 수법이었다. 극한까지 이른 독기운을 몸에 둘러 그 무엇이 접근하든 썩히고 부식시켜 버리는.
평소 천마가 상대가 아닌 이상은 쓸 일이 없으리라 얘기해 왔던 멸살독마였다.
‘그렇다면 저자가 그 정도로 강하단 말인가?’
조금 전의 격돌은 비차 본인도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꿰뚫어 버리는 데에 특화가 된 창강을 독기로 막아 낼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멸살독마는 최강의 절기까지 꺼내 들었다.
그만큼 사내가 위험한 존재라는 의미였다.
‘그냥 싸우게 둘 수는 없다!’
생각을 마친 비차가 사내를 향해 달려들었다.
“타앗!”
“관둬라, 비차!”
멸살독마가 소리쳤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비차의 혈운수가 극성으로 펼쳐졌다.
파아앗!
새빨간 기운이 사위를 물들였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서 사내는…….
“훗.”
차갑게 웃었다.
퍼어억!
“컥!”
비차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어느새 사내의 창이 그의 몸통을 꿰뚫어 버린 뒤였다.
그야말로 초신속의 찌르기.
눈으로 좇을 수도 없었다.
“멍청한 놈. 풍신의 바람 앞에서 무사할 줄 알았나?”
“그, 그렇다면 네놈은…….”
사내를 노려보던 비차의 눈이 빛을 잃었다.
쓰러지는 비차의 뒤쪽에서 멸살독마가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풍신창왕 윤하월.”
“이 몸의 이름을 알고 있나? 마교 놈들치고는 제법 똑똑한가 보군.”
“그래, 네놈의 소문은 잘 알고 있지. 실력 조금 있다고 개차반처럼 구는 망나니 같은 놈이라는 것.”
사내, 윤하월이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재미있군. 마두 놈들한테 그런 소리를 듣다니.”
“흥. 우리라고 천륜을 저버린 패악자들일 것 같으냐? 우리도 네놈들과 똑같다. 그저 무에 대한 관점이 조금 다를 뿐이지.”
“뭐, 상관은 없어. 네놈이 무에 대해 어찌 생각하든 이 몸이 알 바는 아니니까.”
윤하월은 청룡창을 들어 멸살독마를 겨냥했다.
“지금은 그저 모든 걸 잊고 싸우고 싶을 뿐이다. 찌르고 베고 꿰뚫고 가르고 싶을 뿐이야.”
“싸움에 미친 투귀로구나. 징그러운 놈……”
말을 잇던 멸살독마의 눈이 일순 가늘어졌다.
“그렇군. 그러고 보니 네놈들이 새로운 맹주를 뽑는 중이라지 않았던가? 듣기로는 검왕 유극태의 주도하에 비무회를 연다는 것 같았는데.”
“…….”
윤하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찌 그것을 마교 놈들이 알고 있단 말인가?
해답은 하나뿐이었다.
‘내통자!’
멸살독마가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보아하니 네놈, 거기서 패배한 모양이구나.”
“…….”
“클클, 대답하지 못하는 걸 보니 정곡을 찔렸나 보군. 이제 보니 네놈이 바로 패배한 개였구나.”
“…….”
“하기야 패배의 기억을 잊고 싶다면 싸우고 또 싸우는 게 제일이지. 그래 봐야 네놈이 패배했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말이다.”
“이봐, 늙은 마두.”
내내 침묵하던 윤하월이 입을 열었다.
“네 부하 하나만은 무조건 살려 주마.”
“뭐야?”
“그러니 그놈더러 유언이라도 전하라고 해라. 네놈은 오늘 여기에 뼈를 묻게 될 테니까.”
무시무시할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윤하월은 시뻘겋게 핏발이 선 눈으로 멸살독마를 노려봤다.
“풍신의 역린을 건드린 대가는 죽음뿐이다.”
“……흥. 웃기는 놈이군. 누가 죽는다고?”
멸살독마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었다. 이제 더 이상 입으로 떠들 생각 따위는 없었다.
“죽는 것은 바로 네놈이다!”
탓!
멸살독마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그 순간 윤하월 역시 청룡창을 허공으로 뻗고 있었다.
파밧!
핏빛 독기와 푸른빛 창강이 허공에서 격돌했다.
* * *
“대체 어떻게 윤하월을 설득한 거지? 그 승냥이 같은 자를 움직이기가 쉽진 않았을 텐데.”
남궁운의 말에 요태희는 고개를 저었다.
“설득하지 않았어요. 그저 그가 가장 바라는 것을 알려준 것일 뿐. 처음부터 그가 원하는 일이었으니 따르게 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죠.”
“어찌 됐든…….”
검왕이 말을 받았다.
“윤하월이라면 구원군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겠군.”
“그것은 아직 모르는 거요.”
다시 한 번 끼어드는 남궁운이었다.
“따로 구원군을 구성해야 하오. 만전을 기해 놈들을 상대해야 하오.”
“곧 들이닥칠 마교 본대를 상대할 병력을 구성하는 데에도 시간이 부족하네. 그리고 윤하월이라면 홀로도 천 명의 역할을 할 수 있을 테고.”
“그러나 윤하월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간이오.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면 그냥 떠나 버릴지도 모르오.”
“허나 여력이 없지 않은가!”
다시 언성이 높아지는 두 사람이었다. 제갈현은 다시금 요태희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그녀는 제갈현의 시선에 고개를 저을 따름이었다.
—제가 할 일은 여기까지예요. 나머지는 군사께서 중재하셔야 합니다.
그녀의 전음에 제갈현은 나직이 침음했다.
—이미 큰 도움을 주셨으니 더 도움을 바라는 건 염치없는 일이겠지요. 알겠습니다, 궁후.
—두 사람을 잘 부탁해요.
마치 떠나려는 사람의 인사말 같았다. 내심 불안해진 제갈현이 물었다.
—다시 천무맹을 떠나시려는 겁니까?
—아뇨. 그렇지는 않아요. 이제 당분간은 이곳을 떠날 수 없을 거예요.
—그렇다면 조금 전의 말씀은…….
요태희가 부드럽게 웃었다.
—만나 볼 사람이 있답니다.
—지금 말씀입니까?
—네. 사실 황룡성으로 돌아온 것도 그를 만나기 위함이었어요.
제갈현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처음엔 그녀가 맹주직을 노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황룡회에서의 태도를 보니 그것은 아니었다.
다음으론 그녀가 검왕을 돕기 위해 온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의 말을 보아선 그것도 아닌 듯했다.
—누구를 만나시려 하십니까?
—당신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랍니다.
—제가 잘 알고 있는……?
고개를 끄덕인 요태희가 몸을 돌렸다.
—정천이라고 하던가요? 나는 그를 만나기 위해 은거를 깼어요.
그 말을 끝으로 회의장을 나가는 요태희였다. 제갈현은 검왕과 남궁운의 말싸움도 잊은 채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어떻게 정천을 알고 있지?’
회의장을 나선 요태희는 화륜문으로 곧장 향했다. 마치 여러 차례 갔었던 양 익숙한 걸음걸이였다.
잠시 후 그녀가 화륜문의 장원에 도착했을 때였다.
스륵.
칼날 하나가 그녀의 목에 드리워졌다. 백미련의 구절검이었다.
“여긴 무슨 일이지?”
빙긋 웃은 요태희가 손을 들어 보였다.
“싸우려 온 게 아니에요. 검을 치웠으면 좋겠군요.”
“그걸 어떻게 믿으라는…….”
그때 솥뚜껑만 한 손이 백미련의 구절검을 붙들었다. 여전히 붕대를 몸 곳곳에 감고 있는 장유추였다.
“적이 아니다. 쓸데없이 진 빼지 마.”
“…….”
백미련은 그제야 검을 치웠다. 장유추가 요태희에게 말했다.
“대신 사과하지. 어째서인지 꽤나 날카로워져 있더군.”
“그럴 테지요. 언제 습격당할지 모르는 입장이니.”
장유추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요태희의 말투가 마치 다 알고 있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백미련은 노골적으로 의심스런 표정을 지었다.
“우리의 사정을 알고 있나?”
“그래요.”
단도직입적인 대답. 장유추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어떻게 알고 있다는 거지?”
“들어가서 찬찬히 얘기하면 안 될는지요?”
“아, 음. 그러는 게 낫겠군.”
세 사람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긴장한 채 열랑을 쥐고 있던 화연란이 놀란 눈을 했다.
“당신은……?”
“오랜만이군요.”
“예?”
요태희의 말에 화연란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녀와 언제 만난 적이 있었던가 싶었던 것이다.
‘만난 적이 있다면 기억 못할 리가 없는데?’
누가 보더라도 단번에 망막에 새겨질 정도. 요태희에 대한 화연란의 인상이었다.
단순히 미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모용린이나, 화연란, 백미련과 같은 절색은 아니다.
다만 그녀에겐 어린 여성들에게선 느낄 수 없는 기품이 있었다.
물론 검왕이나 남궁운과 비슷한 연배임을 생각해 본다면 그 용모도 대단한 것이었고.
“제가 궁후님을 뵌 적이 있었나요?”
화연란의 물음에 요태희가 빙그레 웃었다.
“하긴 문주께선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르겠군요.”
그녀가 문주라는 것 역시 알고 있다. 지켜보는 장유추의 의문이 더욱 깊어지는 순간이었다.
‘화륜문에 대해서도 이미 알고 있는 건가? 대체 어디까지 조사를 한 건지 모르겠군.’
요태희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문주를 만났던 건 꽤나 오래전의 일이지요. 정확히는 문주의 아버지를 만났었다고 해야겠군요.”
“아버님을요?”
요태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십 수 년 전, 화륜패 공을 만나러 이곳을 찾아왔었습니다. 그땐 아직 화륜문이 아닌 평범한 집이었지만요.”
“아…….”
화연란의 입이 벌어졌다. 그렇게 오래전이라면 그녀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사담은 그만.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으면 좋겠군.”
백미련이 차갑게 말했다. 그녀는 확실히 남들이 보기에도 초조해하고 있었다.
“그러는 게 낫겠군요.”
동의를 한 요태희가 본론을 내놓았다.
“굳이 쓸데없는 설명을 할 필요는 없겠지요. 저는 여러분을 돕기 위해 은거를 깼습니다.”
“우리를?”
“정확히는 정천 소협, 그를 돕기 위해서라고 해야겠군요.”
모두가 의아한 눈으로 요태희를 보았다. 결국 장유추가 대표 격으로 질문을 꺼냈다.
“잠깐. 당신이 어떻게 정천을 알고 있지? 일전에 그와 만난 적이 있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럴 터였다. 황룡회에서 요태희를 본 정천은 처음 본다는 반응이었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그를 알고 있지?”
“얘기가 좀 길어질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간략히 축약해 설명하도록 하지요.”
짧게 숨을 고른 요태희가 설명했다.
“십여 년 전, 저는 당시 용검대주였던 화륜패 공에게 한 가지 청탁을 받았습니다. 일전에 그에게 졌던 빚에 대한 보답으로 말이죠.”
“빚이라고?”
“그에게 목숨을 구원받은 적이 한 번 있지요.”
짤막히 대답한 요태희가 말을 이었다.
“화륜패 공의 부탁은 간단했습니다. 그는 용검대가 함정에 빠진 것 같다고 말했지요. 그러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도 말했습니다.”
“함정이라.”
장유추가 심각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화륜패는 진마동에 관한 음모가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군.”
“아버지…….”
화연란이 우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요태희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고서 말을 이어 갔다.
“화륜패 공의 부탁은 이것이었습니다. 자신, 혹은 자신의 유지를 이어받은 자가 돌아왔을 때 그를 도와 달라는 것이었죠.”
“화륜패의 유지를 이어받은 자…….”
그게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애초에 그 자격을 지닌 사람은 한 명뿐이었으니까.
“저는 후에 많은 것을 조사해 봤습니다. 조사는 황룡성, 나아가 천무맹의 뿌리와 관련된 것이었기에 필연적으로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은거에 들어간 것인가?”
“예. 그 후에도 은밀한 경로를 통해 조사를 계속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알게 되었죠.”
요태희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팔부혈선의 존재를.”
세 사람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특히나 백미련의 경악은 더더욱 컸다.
“고작 개인적인 조사만으로 그들의 정체를 알아냈다는 건가?”
“혼자의 힘만은 아니었어요. 많은 이들의 도움이 뒤따랐으니까요. 그중엔 목숨을 버려야 했던 이들도 많습니다.”
“……그랬군.”
백미련은 그제야 납득했다. 실제로 팔부혈선의 정체에까지 접근했던 이들이 아주 없진 않았다. 그 대부분이 제거당하긴 했지만 말이다.
“정천 소협의 소식을 들은 것은 얼마 전이었습니다. 마침 황룡회가 열린다는 얘기도 접했지요. 그래서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고 황룡성으로 오게 되었지요.”
“으음.”
장유추가 화연란의 표정을 살폈다. 이 정도면 믿을 수 있지 않겠냐는 눈치.
현재 정천을 제외하면 화륜문의 결정권자는 그녀였다. 백미련을 별개로 둔다면 말이다.
화연란은 요태희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래서 오라버니를 도우실 건가요?”
“그래요.”
올곧은 대답. 화연란은 왠지 모르게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아버님께 진 빚 때문에?”
“그것도 큰 이유지만, 천무맹을 위해서이기도 해요. 천무맹은 내게 있어서도 고향과 같으니까요.”
“당신은 혈선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백미련의 물음이었다.
화연란이나 장유추와 달리 그녀는 여전히 요태희를 경계하고 있었다.
“당신의 정체와 출신 정도를 알고 있는 정도라면 대답이 될까요?”
“……거짓말.”
“거짓말이 아니에요. 한때는 혈선들의 심복이었던 이에게서 마라혈천이란 존재들의 명단을 받은 적이 있었어요.”
“거짓말! 마라혈천에 대해 아는 사람은 혈선을 제외하면 장로들 정도야!”
표독스럽게 소리쳤던 백미련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설마?”
요태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내게 명단을 넘겼던 이는 장로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
“…….”
“그 명단엔 각 인물에 대한 상세한 설명도 있었어요. 예컨대 백미련, 당신과 화군장로 백운신의 관계와 같은 것들…….”
두근.
백미련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기분이었다. 치부를 드러냈다는 사실이 이렇게나 아픈 일일 줄이야.
요태희 역시 그녀의 사정을 알았기에 더 이상 얘기를 꺼내진 않았다.
“이 정도면 설명이 됐을 것 같군요.”
그녀는 다시 화연란을 돌아봤다. 화연란은 고개를 끄덕여 확인해 주었다.
희미하게 웃은 요태희가 물었다.
“정천 소협은 지금 어디에 있죠?”
“오라버니는 지금…….”
조금 주저하던 화연란이 입을 열었다.
“묵상 중이세요.”
“묵상?”
질문에 대답한 사람은 장유추였다.
“자신의 한계를 느낀 눈치더군. 혹은 아직 발전할 여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거나. 어쨌든 며칠 동안 연공실에만 틀어박혀 있다.”
“그렇군요. 잘됐네요.”
“잘되었다고?”
고개를 끄덕인 요태희가 말했다.
“저 역시 은거하는 동안 상당한 수련을 거듭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혈선들과 겨룰 수 있으리란 확신은 들지 않더군요.”
“……당신마저도 말인가?”
장유추의 목소리엔 경악이 섞여 있었다.
궁후라고까지 불리는 그녀다. 그것조차도 십 수년이 더 된 과거의 별호.
거기에 은거 수련까지 했다면 발전했으면 했지 퇴보하진 않았으리라.
“역시 체질 때문인가? 오래 싸울 수 없는 체질이기에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는 건가?”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이각 안에 그들과 승부를 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으니까요.”
요태희의 대답에 백미련이 코웃음을 쳤다.
“흥! 제약만 없다면 이길 수 있다는 듯 말하는군.”
“여덟 명 모두가 아니라 한 명만이라면 가능할지도 몰라요.”
“궁후라는 게 얼마나 대단한지는 몰라도, 그대는 혈선들을 너무 얕보고 있어.”
“그저 그들의 기록을 통해 실력을 유추해 보았을 뿐이에요. 물론 제대로 된 기록 하나 찾기 힘든 만큼 오차는 상당히 있겠지요.”
백미련이 입술을 깨물었다.
“본후는 그대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런가요?”
스스스스.
매화향이 퍼지기 시작했다. 백미련의 흑적색 머리칼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요태희보다도 장유추와 화연란이 당황했다.
“어, 언니?”
“미쳤군! 무슨 짓을 하려는 건가?”
백미련은 그들의 반응을 무시한 채 요태희만을 노려봤다.
“본후가 그대를 시험해 보겠어. 정말 떠드는 만큼 강한지, 아니면 그저 허풍선이에 지나지 않는지!”
“그걸로 저를 신뢰할 수 있다면, 좋아요.”
자리에서 일어난 요태희가 화연란을 돌아봤다.
“문주, 혹시 이곳에 활이 한 자루 있을는지요?”
“활…… 말인가요?”
“구태여 필요 없을 것 같아 아랑궁을 두고 왔어요. 맨손으로 싸워도 괜찮지만, 아무래도 활을 쓰는 편이 더 빨리 끝날 것 같군요.”
화연란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그 말은 곧, 활 없이도 백미련을 상대할 순 있다는 소리 아닌가.
바보가 아닌 만큼 백미련도 그 말뜻을 이해했다. 그녀의 머리칼은 이제 구절검의 형상을 완전히 구축한 상태였다.
“그 아랑궁이란 것을 어서 가져오도록 해. 제대로 퉁기기도 전에 갈기갈기 찢어 줄 테니!”
“이럴 줄 알았다면 정말 가져올 것을 그랬군요.”
기묘한 광경이었다. 평소 냉정하다 못해 쌀쌀맞던 백미련이 흥분한 모습이라니.
화연란은 그녀의 반응에 놀라 허둥지둥했다.
“아마 활은 따로 구해 두지 않았을 텐데. ……아!”
그녀는 손뼉을 치고는 장유추를 돌아봤다.
“와룡장에서 활 한 자루 정도는 빌릴 수 있을 거예요.”
“그렇군.”
대충 대답한 장유추는 화연란이 자신을 여전히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더러 가져오라고?”
“두 분을 빼면 가장 경공이 빠르시잖아요.”
“그거야 그렇지만…….”
장유추는 못미더운 눈으로 두 여인을 보았다. 그 눈빛의 의미를 깨달은 백미련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걱정하지 마. 비겁하게 지금 공격할 생각은 없으니.”
요태희 역시 한마디를 보탰다.
“걱정하지 마세요. 활이 없어도 제 몸 하나쯤은 건사할 수 있으니.”
‘뭐, 어떻게든 되겠지.’
장유추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