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七章 토끼몰이
“그대가 실수한 거야.”
“시끄러워.”
퉁명스러운 정천의 반응에 백미련이 싱긋 웃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건 아니지. 그대도 그리 생각하고 있겠지?”
“글쎄.”
이번엔 시큰둥한 반응. 그것이 긍정의 뜻임을 모를 백미련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대가 일부러 검왕을 도발한 걸지도 모르겠어.”
“무슨 소리야?”
“그렇지 않아? 그대 정도의 재원을 아무 요직에도 앉히지 않았잖아.”
황룡회에서 두각을 보인 이들은 모두 한자리씩을 꿰찼다. 하물며 전대 맹주였던 남궁운조차 상당한 요직에 앉았다.
그러한 인사관리에서 제외된 것은 세 사람뿐.
정천과 장유추, 그리고 요태희였다.
요태희야 장기간 싸울 수 없는 몸 상태이니 그렇다 쳐도, 정천과 장유추의 경우는 누가 봐도 검왕의 눈 밖에 난 것이었다.
정작 본인들은 그게 더 좋았지만 말이다.
“이제부턴 어떻게 할 거지?”
백미련이 물었다.
“결국 청성파와 종남파가 선봉을 맡게 됐어. 듣기로는 거기에 더하여 의용대를 추가로 모집한다던데.”
정천은 반응하지 않았다. 백미련은 여전히 재미있다는 눈치였다.
“그들이 죽도록 내버려 둘 건가?”
“나와는 관계없는 이들이야. 죽든 살든 본인들의 팔자소관이지.”
“그럴지도. 그렇다면 그대는 혈선을 상대하는 데에만 집중할 생각이겠군?”
정천은 대답하지 않았다.
죽게 될 이들에게 동정심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정천은 그들의 생사엔 정말로 아무런 관심도 흥미도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마교를 불러들인 것은 혈선들의 의도일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대체 왜 마교를 불러들인 거지?’
혈선들의 목적.
정천이 알고자 하는 것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문제는 그것을 알 만한 자가 누구냐 하는 것이었다.
“백미련.”
정천이 백미련을 돌아봤다.
“혹시 금역 내부로 날 안내해 줄 수 있겠어?”
“……그대, 제정신이 아니군.”
백미련이 상앗빛 미간을 찡그렸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그대는 혈선들의 상대가 되지 않아.”
“멸천으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말하지 않았던가? 사기적으로 강한 힘을 지니긴 했어도 오직 그뿐이야. 그 일격만으로 여덟 명이나 되는 혈선들을 모조리 해치울 수 있다고 확신하나?”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애초에 멸천은 최후의 최후까지 아껴야 하는, 이를테면 죽음을 각오한 절기였으니까.
성공한다고 쳐도 목숨이 경각에 걸리고 실패할 경우엔 필연적으로 죽는다.
그것으로 혈선들을 상대할 순 없었다.
“혹은 그에 필적하는 검격이 따로 있나? 미안하지만 그대가 보여준 초식들로는 혈선들을 상대할 수 없어. 그들 개개인이 검왕을 능가하는 무위를 지녔으니까.”
“…….”
“따라서 금역으로 그대를 안내할 순 없어. 애초에 혈선들만이 문제가 아니라, 그대 홀로는 마라혈천 전부를 당해 낼 수도 없을 거야.”
결국 대규모의 전력이 필요하다는 소리. 그러나 그 전력은 지금 마교와의 전투를 앞두고 있다.
“이쪽에선 놈들의 움직임만을 주시하며 벌벌 떨어야 한다는 건가?”
“선택권이 그들에게 있다는 건 확실하지.”
문제였다.
지난번 천연살과 살마괴의 말마따나 공격을 하고 말고는 그쪽이 선택할 사안이었다.
정천 측에선 그저 그로 인한 결과에 대응하는 게 전부. 치고 들어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답답하군.’
정천은 내심 쓴맛을 느꼈다.
진마동에서 생환하며 많은 것을 짊어지게 됐다. 그중 가장 큰 것은 물론 동료들의 복수라는 짐이었다.
하지만 덜어 놓은 것들도 몇 가지 있었다. 그중 가장 큰 것은 무력감이었다.
정천은 떨어지는 햇살을, 십 년 만에 보게 된 하늘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저 아래에선 그 누구도 자신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라고.
자신이야말로 정점에 선 무사라고.
그러나 아니었다. 내력이란 면에선 정천에게 필적하지 못할지언정, 다른 방식으로 그를 위협하는 이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리고 백미련의 말에 따르면, 혈선들은 하나하나가 정천에 필적했다.
‘그렇다면 내가 더 강해져야 한다.’
그러나 그럴 방법이 있을까?
‘분명 있을 거다.’
정천은 멸천에 그 답이 있을 거라 보았다.
멸천의 개념 자체는 나락 밑바닥의 마룡에게서 따 왔다. 정확히는 그 마룡이 내뿜던 어마어마한 죽음의 숨결에서.
세상 어떤 것이든 무로 되돌릴 수 있을 것만 같던 숨결. 그것 앞에선 어떠한 호신강기도 통용되지 않았다.
그 숨결을 검격으로 변환시킨 게 멸천이었다.
‘하지만 아직 불완전하다.’
정천은 그렇게 확신했다.
‘쓸데없는 힘의 손실이 너무나 많아. 그저 내력을 끌어올리는 데에만 집중해서 그래.’
사실 이는 힘의 제어가 순탄치 않은 면이 컸다. 너무나 거대한 규모의 기운이다 보니 달리 운용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저 검에 실어 휘두르기에만 급급할 따름.
그러한 문제점을 고쳐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정천은 다시금 벽에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한동안은 느껴 본 적이 없었던 막막함이었다.
“한 명이 있긴 해.”
“뭐라고?”
정천이 백미련을 돌아봤다. 백미련은 그런 정천을 흘겨보았다.
“본후가 말하는 걸 듣지 못했군.”
“잠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어. 조금 전에 뭐라고 했지?”
“혈선들에 대해 알 법한 사람이 있다고 했어.”
정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너나 마라혈천을 제외하고 말인가?”
“그래.”
장로들을 말하는 것은 아니리라. 애초에 그들조차도 지금 정천이 아는 만큼은 알지 못했고.
“그럼 누구를 얘기하는 거지?”
“아마도 직접 혈선들과 대면해 보았을 인물.”
“그게 누군데?”
백미련은 곧장 대답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십여 년 전, 마교의 철절삼마와 당시 맹주 남궁운은 중마산에서 대면했었지. 그리고 비슷한 시각, 홀로 황룡성에 침투해 팔부혈선을 만났던 인물이 있어.”
“마교의…… 인물인가?”
백미련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천은 굳이 듣지 않더라도 그게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홀연히 황룡성에 침입하여 금역까지 깨고 들어갈 수 있는 인물.
그럼에도 어떠한 기록이나 흔적조차 남기지 않을 수 있는 존재.
독보적이다 못해 초월적인 무위를 지닌 무인.
“천마.”
* * *
“천마가 오고 있소.”
어둠 속에서 장로들의 눈빛이 빛났다.
“마교의 정예 병력을 이끌고서 오고 있다고 하오. 그 선봉군은 아마도 멸살독마인 것 같소.”
아직 비영대조차 접수하지 못한 정보를 알고 있는 그들이었다. 애초부터 마교와 내통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혈풍대의 정보를 뿌려 그들을 궤멸로 몰아넣은 것도 이들이었다.
물론 그 배후엔 팔부혈선이 있었지만 말이다.
“혈선들께선 뭐라고 하시오?”
“별다른 말씀은 없소.”
“새 맹주 검왕의 동태는?”
“우리를 경계하고 있는 것 같더군.”
그들이 팔부혈선의 끄나풀이란 것은 이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요직에 있는 이들은 모두 알고 있는.
최소한 검왕 본인과 군사 제갈현, 전대 맹주 남궁운과 비영대주 비목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장로들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우선은 현재 상황.
검왕은 당장 코앞에 들이닥친 마교에 신경 쓸 수밖에 없다.
장로들이 거슬린다 하더라도 일단은 내버려 둬야만 했다. 고작 그뿐이겠는가? 도리어 장로들에게 손을 벌려도 모자랄 처지다.
두 번째 이유는 정당성.
그들이 혈선들의 수하라 해도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아는 이는 실로 극소수였다.
애초에 혈선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 개중엔 혈선 본인들이 몰래 심어 놓은 수하들도 존재했다.
하물며 장로들을 해코지할 정당성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이유는…….
“그대들이 있기 때문일 테지.”
장로들은 웃는 낯으로 한쪽을 바라봤다. 천연살과 살마괴가 그곳에 있었다.
“정말 천군만마를 곁에 둔 기분이오. 안 그래도 요즘 워낙 위험한 일들이 많다 보니 말이오.”
호상장로 유군광을 시작으로 상당수의 장로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들을 죽인 작자야말로 검왕이나 제갈현보다도 두려운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젠 더 무서워할 이유가 없었다. 혈선이 길러 낸 최강의 살수들, 마라혈천이 그들 곁에 배치되었으니 말이다.
천연살은 히죽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는 장로들을 한차례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모두 모인 건가?”
“그렇소이다. 언제 습격을 당할지 모르니 모두들 집합시켰다오.”
안 그래도 비바람을 피하는 양 비밀 장소로 대피해 온 그들이었다.
가져온 것은 오로지 몸뚱이뿐. 금은보화도 절세미녀도 버리고 왔다. 어차피 그것들이 어디 가지도 않을 테니 말이다.
지금은 폭풍전야다. 바깥에선 언제 폭풍이 몰아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마교가 불러온 폭풍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폭풍이 지나치기만을 기다린다.’
폭풍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강력하기 그지없어, 천무맹의 마교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것이다.
그들은 그저 그 뒤에 나서면 되는 일이었다.
폭풍에 휩쓸려 엉망이 된 세상을 다시 주무르면 되는 것이었다.
“똑똑하군, 당신들.”
천연살이 싱글거리며 살마괴를 돌아봤다.
“하지만 동시에 어리석어.”
“음?”
“뭐라 하셨소?”
“간단하다.”
살마괴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그대들의 이용가치는 여기까지라는 것.”
“그게 무슨……?”
장로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살마괴가 말하는 바를 본능적으로 깨달았던 것이다.
“서,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지? 미안하지만 팔부혈선께선 쓸모없는 짐 더미를 싫어하시거든.”
천연살이 탐욕스럽게 혀를 날름거렸다.
“애초에 혈선의 존재는 조금 더 오랫동안 비밀 속에 있었어야 했어. 하지만 정천이란 놈 때문에 생각보다 빨리 알려지게 됐지. 너희들 장로들이 발설해 버린 덕분에 말이야.”
“그,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잖소!”
“누구의 잘못이든 의미는 없어. 중요한 건 너희가 더 이상 그분들에게 필요하지 않다는 거지.”
살마괴가 말을 받았다.
“그러니 여기서 죽어야겠다.”
“개소리!”
장로들이 즉각 반발했다. 마라혈천에 비할 바는 아니라지만 그들 모두는 중원에서도 손꼽히는 고수였다.
“개 같은 혈선 놈들! 간도 쓸개도 다 바쳐서 충성해 온 대가가 이것이란 말이냐!”
“응.”
순순히 대답하는 천연살의 천덕스러움에 장로들은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각자의 병기를 꺼내 들었다.
“간단히 죽지는 않는다!”
“잘난 마라혈천이라 해도 너희는 고작 둘! 우리 모두를 당해 낼 순 없다!”
천연살이 푸핫 웃음을 터트리고는 살마괴를 돌아봤다.
“저렇게 말하는데, 네 생각은 어때?”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게 있나.”
살마괴의 입에서 흉소(凶笑)가 걸렸다.
“입으로는 뭔들 떠들지 못할까?”
“크으, 죽어랏!”
장로들이 땅을 박찼다.
그들은 우선 겉보기에 더 약해 보이는 천연살을 노렸다. 어쨌든 하나를 빨리 제거한 후 협공을 펼칠 생각이었다.
“그런데 말이지. 그것 아나?”
천연살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너희를 여기로 불렀다는 것.”
덜컥! 덜컥!
사방에서 무언가가 걸리는 소리가 났다. 장로들은 어둠 속에서 자신들을 얽매는 무언가가 있음을 느꼈다.
“더, 덫인가?”
그러나 아니었다. 안력을 돋워도 보이지 않고 검으로 후려쳐도 허공만을 갈랐다.
그곳에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구속하는 힘.
천연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주망살진(蛛網殺陳)에 들어온 것을 환영한다.”
“살진이라고!”
장로들이 경악했다. 이런 게 장치되어 있음을 어찌 미리 깨닫지 못했단 말인가?
“스스로를 책망하진 말라고. 너희가 죽었다 깨어나도 이 몸의 살진을 간파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말이야.”
천연살은 만족스럽게 웃고는 살마괴를 돌아봤다.
“다 썰어 버려.”
“그럴 생각이다.”
살마괴가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그의 손이 가볍게 허공에 떨쳐졌다.
파팍! 팍!
가장 가까이 있던 장로들의 목이 하늘로 치솟았다. 경쾌하게까지 느껴지는 검격이었다.
“으으으……!”
“으아아!”
살진에 구속된 장로들이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그래 봐야 몸을 부르르 떠는 정도에 그쳤지만.
주망살진.
이름 그대로 거미줄처럼 먹이를 붙들어 버리는 무서운 살진이었다.
‘파훼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저 멍청이들이 죽기 전에 알아내는 건 불가능하겠지.’
실제로 살마괴는 지금 파훼법에 따라 걷고 있었다. 그렇기에 주망살진의 주박에 걸리지 않고 있는 것이었고.
물론 공포에 빠진 장로들이 그 사실을 알 리는 없었다.
“살려 줘, 살려 주시오! 목숨만 건져 주신다면 억만금을 드리겠소!”
“내가 더 드리리다! 날 살려 주시오!”
“아무에게도 혈선에 대해 얘기하지 않으리다. 아예 황룡성을 떠나 숨어 살겠소. 제발!”
“에구, 시끄럽군.”
천연살은 두 귀를 손가락으로 막았다.
“빨리 처리해 버리라고 살마괴.”
“음.”
살마괴는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검을 떨쳤다. 또다시 장로들의 머리가 잘려 나갔다.
팍! 파팍! 팍!
“으아, 아, 안 돼!”
“죽고 싶지 않아!”
장로들의 비명 소리가 한동안 어둠을 두들겼다. 그 소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줄어들었고, 반 각 후엔 완전히 사라졌다.
스르릉.
요검을 꽂아 넣은 살마괴가 말했다.
“끝났군.”
“흐, 너무 싱거운데.”
확실히 천연살의 말마따나 허무한 임무였다. 그래도 상당한 고수인 장로들이 손 한 번 쓰지 못하고 전멸해 버리다니.
‘천연살의 살진이 없었다면 꽤나 시간이 걸렸겠지만.’
아마 혼자였다면 못 해도 반 시진은 잡아먹었으리라. 종국엔 모든 장로의 목을 치긴 했겠지만.
그만큼 천연살의 살진은 강력했다.
“이제 남은 일은 하나뿐이군.”
손뼉을 짝짝 친 천연살이 말했다.
“마교 놈들이 얼마나 날뛰어 주느냐는 것.”
* * *
“피 냄새가 나는 듯도 싶구먼.”
코를 벌름거리던 멸살독마가 기분 좋게 웃었다.
물론 피 냄새가 난다는 건 그의 생각일 뿐이었다. 그들이 있는 곳은 평범한 평야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이제 곧 피 냄새가 사위를 물들이게 될 것도 분명했기에.
“놈들은 어디쯤이라더냐?”
“이십 리 거리까지 접근한 모양입니다.”
놈들이란 물론 천무맹 측 선봉군을 뜻했다.
“그 규모는?”
“두 갈래로 나뉘어 오는 병력이 각각 삼사백, 그 뒤를 따르는 무리가 이천을 조금 넘습니다.”
“잉?”
멸살독마가 잘못 들었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냐? 네놈이 빼먹은 건 아니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적운수 비차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멸살독마는 주름 가득한 얼굴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이놈들이 우리를 우습게 봤다는 소리렷다.”
그의 나이가 올해로 여든을 훌쩍 넘었다.
십여 년 전의 대전을 기억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이전의 기나긴 혈전의 역사 역시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 기간 내내, 마교 무인들은 단 한 차례도 동수의 정파 무인들에게 패한 적이 없었다.
‘아니, 아예 없지는 않구먼.’
유일한 예외가 있긴 했다. 정파 역사상 최강의 타격대로 불렸던 용검대가 그러했다.
그러나 그 외엔 한 차례의 예외도 없었다.
못해도 네다섯 배. 그 정도가 마교와 정파가 동률을 이루는 전력 비율이었다.
‘하물며 나의 독마대라면 말할 것도 없거늘!’
고작 두 배 조금 넘는 병력으로 맞이하려 든다. 이건 숫제 자신을 무시하는 처사나 다름없었다.
“끄응, 아무래도 안 되겠구나.”
멸살독마가 문자 그대로 독이 오른 얼굴로 일어났다.
“가자꾸나. 여기서 놈들을 맞으려 했으나 생각이 바뀌었다.”
“독마님?”
“단번에 그 겁도 없는 애송이들을 처부순다. 그 기세를 몰아 천무맹까지 달려 보자꾸나.”
비차는 이번엔 반대하지 않았다. 그 역시 내심 기분이 상해 있던 차였다.
“선제공격은 이 비차에게 맡겨 주십시오.”
“그럴 수야 없지! 이 몸이 아니고 누가 전투를 시작하겠느냐?”
멸살독마가 신이 난 듯 몸을 날렸다. 그것을 신호로 비차를 비롯한 독마대가 전진하기 시작했다.
“클클, 이십 리 거리라고 했겠다?”
멸살독마가 속도를 끌어올렸다. 철절삼마의 위용에 걸맞은 엄청난 경공술이 펼쳐졌다.
츠츠츠츠.
그러한 가운데 멸살독마의 두 손아귀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혈산독무의 기운이 손아귀에 어린 것이었다.
얼마 되지 않아 이십 리 거리를 주파한 멸살독마.
그의 눈에 전진해 오는 천무맹 무인들이 보였다.
“클클, 거기 있었느냐!”
파핫!
멸살독마의 우수가 떨쳐진 순간 벌 떼와 같은 보랏빛 기운이 천무맹 무인들에게 쇄도했다.
혈산독무가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워낙 빠른지라 방비할 수도 없었다.
“커억!”
가장 앞에 있던 무인이 눈과 코와 귀와 입으로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그제야 천무맹 무인들은 화들짝 놀랐다.
“적습이다!”
“방어 태세를…… 커억!”
앞쪽에 있던 무인들이 같은 식으로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해독을 할 여유 따위는 주지 않는 무시무시한 독기였다.
치지지직.
주변의 풀과 나무 역시 새하얗게 말라 버렸다. 그 모습을 보며 멸살독마가 앙천대소를 터트렸다.
“클클클! 고작 이 정도 인사에 고꾸라지면 어쩌자는 것이냐?”
“크, 이 빌어먹을 노괴!”
한 무인이 장검을 그러쥐고 몸을 날렸다.
그는 멸살독마가 있는 십 장 높이의 나뭇가지까지 단숨에 쇄도했다.
청성파의 윤철이었다.
“죽어라!”
윤철의 검이 멸살독마의 미간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피식 웃은 멸살독마는 혈산독무가 실린 손으로 윤철의 검을 쳐냈다.
파삭!
그 순간 진득한 독기가 칼날에 묻었다. 이윽고 삽시간에 녹이 슬어 버리는 검.
“크윽!”
당황한 윤철이 물러났다. 멸살독마는 그런 그를 보며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제법 강단이 있는 놈이구나. 아무리 인사에 지나지 않는다지만 혈산독무의 독기에도 쓰러지지 않고. 그러나 그 정도가 한계인 듯싶군.”
“뭐라고!”
“열 낼 것 없느니라. 당장은 혈산독무에서 무사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픽!
둑이 터지듯 코피가 터졌다. 윤철은 검붉은 피가 삽시간에 앞섶을 적시는 것을 느꼈다.
“이, 이럴 수가…….”
“야금야금 네 몸을 갉아먹거든. 그것이 바로 본괴의 혈산독무이니라.”
“크윽…….”
윤철의 몸이 땅으로 떨어졌다.
“윤 형!”
종남의 염신이 달려 나왔다. 그는 비교적 뒤쳐져 있었기에 혈산독무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염신은 추락하는 윤철의 몸을 받으려 했다. 그러나 그가 다가가기 전에 쏜살처럼 날아드는 인형이 있었다.
적운수 비차였다.
팟!
비차의 두 손이 붉게 빛났다. 이윽고 그의 쌍장이 떨어지던 윤철의 복부를 강하게 격했다.
퍼어엉!
윤철의 등허리가 터지며 내장과 척추가 뿜어져 나왔다. 피부만 남겨 두고 체내의 모든 것이 터져 나온 것이다.
그걸로 절명.
보는 이들의 다리가 절로 풀리는 광경이었다.
“이런…… 악귀들!”
염신이 악에 받쳐 소리쳤다.
“어찌 그리 손속이 잔인할 수 있단 말이냐! 더러운 놈들! 저주받을 마교의 괴물들!”
“흥. 웃기는 놈이로고. 뒈지는 것에 예쁜 게 있고 더러운 게 있단 말이냐?”
코웃음을 친 멸살독마가 히죽거렸다.
“그럼 네놈은 예쁘게 죽여주랴? 클클, 뭐든 좋으니 본괴에게 부탁하거라.”
“그러면 죽어라!”
염신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화신찰(火神刹)이라는 별호답게 그의 몸 주변으로 강렬한 화기가 몰아쳤다.
화르르륵!
멸살독마의 독기까지 태워 버릴 듯한 화력이었다. 멸살독마는 의외의 위력에 조금 놀랐다.
“호오, 제법이구나. 조금 전에 죽은 놈보다는 뛰어나구먼?”
“닥쳐랏!”
염신이 화기를 머금은 검격을 날렸다. 불타오르는 검기가 멸살독마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휙!
이번에도 그 앞으로 인형이 뛰어들었다.
적운수 비차가 두 손을 번갈아 뻗어 허공을 격했다. 그 타격으로 인해 염신의 화기가 상당 부분 약해졌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구나.”
“나이도 생각하셔야지요.
멸살독마의 말에 비차가 대꾸했다. 멸살독마는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네 녀석도 노괴를 무시하는 게냐? 철절삼마의 위명도 개털이 됐구먼.”
“철절삼마라고?”
염신이 화들짝 놀랐다. 보통 늙은이는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설마 전설적인 마교의 수괴일 줄이야!
그런 염신을 향해 비차가 말했다.
“그나저나 괜찮겠나?”
“뭐가 말이냐?”
“저 아래.”
비차가 가리킨 곳에선 독마대와 천무맹 무인들이 격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혹했다.
“크아악!”
“으악!”
비명을 지르는 쪽은 일방적으로 천무맹 측뿐이었다. 독마대는 마치 물살을 가르듯 무인들을 베어 넘기고 있었다.
“큭!”
염신이 이를 악물었다. 그런 그에게 비차가 조언하듯 말했다.
“이대로는 싸워 보기도 전에 전멸할 거다. 지휘체계가 박살난 이상 아무리 대단한 무인이라 해도 절반의 전력밖에 낼 수 없다.”
“왜 그런 걸 내게 말하는 거냐!”
염신의 외침에 비차가 피식 웃었다.
“너희들이 좋아하는 게 이것 아닌가? 정정당당. 그래서 부득불 조언해 주는 것이다.”
“큭…….”
“게다가, 이런 걸 말해 준다고 해도 우리의 승리는 변하지 않을 테니까.”
그야말로 절대적인 자신감.
염신은 실력뿐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서도 크게 밀린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러나 맥없이 죽을 수는 없다!’
이젠 문파의 자존심이나 이득이 문제가 아니었다. 자칫하면 이천 넘는 젊은이들이 손 한 번 쓰지 못하고 몰살당할 수 있었다.
“쳇!”
염신은 곧장 몸을 돌려 물러났다. 비차는 굳이 그의 등에 살수를 펼치지 않았다.
“네놈이 제정신이 아니구나.”
멸살독마가 툴툴댔다.
“적에게 자비를 베풀다니, 천마께서 보셨더라면 진노하셨을 것이다.”
“이대로 쓸어버리는 것은 너무나 쉽지 않겠습니까? 저들에게도 발악할 기회 정도는 주어야지요.”
“클클, 그것은 그렇다만.”
멸살독마가 땅으로 내려섰다. 비차 역시 그의 뒤로 내려섰다.
“그럼 이제부터…….”
멸살독마가 주름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토끼몰이를 시작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