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六章 마교도래(魔敎到來) (66/146)

第六章 마교도래(魔敎到來)

“…….”

“…….”

무림 명숙들이 모두 모인 회의장엔 침묵만 가득했다. 전적으로 그들의 축하를 받아야 할 인물 때문이었다.

황룡회의 최종 우승자.

검왕 유극태는 황금빛 맹주좌에 앉은 채로 무거운 침묵만을 고수하고 있었다.

“음…….”

이따금 무거운 침음만을 뱉을 따름.

그토록 원하고 원했던 자리를 차지한 후의 반응치고는 너무나 이상했다.

누군가가 분위기를 환기시켜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그들이 생각할 무렵이었다.

끼이익.

천무맹 군사 제갈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검왕이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그것도 상당히 큰 반응이었다.

“상태가 어떻다던가?”

사람들은 처음엔 검왕이 태천검에 대해 말하는 줄 알았다. 성 한 채와도 바꿀 수 없는 비보를 잃었다는 건 분명 엄청난 손실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제갈현이 꺼낸 말은 태천검에 대한 게 아니었다.

“목숨엔 별 지장이 없다고 합니다. 단순히 내력을 모두 소모해 탈진한 정도니까요.”

“그런가? 다행이군.”

그제야 안도한 듯 자리에 몸을 파묻는 검왕.

무림 명숙들은 어리둥절해서 서로를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맹주,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 설명을 좀 해 주실 수 있겠소?”

산동 명가 백마파(白馬派)의 장문인인 권추였다. 그가 사람들을 대표해 껄끄러운 질문을 꺼내자 많은 이들이 감사의 눈길을 보냈다.

대답은 제갈현이 했다.

“조금 전 정천의 상태를 살피고 온 길입니다.”

“정천? 맹주의 마지막 상대였던 자 말이오?”

의아함 가득한 권추의 반응. 기실 다른 이들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그들이 보기에 마지막 일전은 압도적인 검왕의 승리였던 것이다.

궁극검인 무한아에 맞서 정천은 자포자기했다. 그 와중에도 어찌어찌 전력을 다한 일격을 날리긴 했으나, 결국은 무한아를 감당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들이 지켜본 바로는 그러했다.

그 와중에 태천검이 부러진 것은 궁극검의 위력이 너무 셌기 때문일 뿐.

결국 정천에 대한 그들의 평가도 그리 높진 않았다. 그 나이치고는 강하긴 하나 검왕과의 격차는 넘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목숨을 구한 것만으로도 다행이지.’

‘검왕도 마지막엔 손속을 두었던 모양인데.’

‘뭐, 당분간은 정신도 차릴 수 없을 테니 무시해도 되겠지.’

그들의 생각은 그러했고, 그것이야말로 그들의 한계였다.

그러나 제갈현으로서도 그들을 탓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하긴 나조차도 두 눈을 의심할 정도였으니…….’

제갈현처럼 무학에 밝은 사람조차도 마지막 격돌을 고스란히 읽어 내진 못했다.

그저 정천의 검이 태천검을 부러트렸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았을 뿐. 엄밀히 말해 격돌 순간 자체는 눈으로도 좇을 수 없었다.

그때 마지막으로 한 사람이 희의장에 들어섰다.

전 맹주이자 현 남궁세가주인 남궁운이었다.

“맹주 등극을 축하드리오.”

남궁운의 공손한 인사에도 검왕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행간의 숨겨진 비웃음을 느꼈던 것이다.

“자네도 날 놀릴 생각인가?”

“그럴 리가 있겠소? 나는 지금 진심으로 그대의 맹주 등극을 축하하는 것이오.”

“상처뿐인 결과일세.”

“그러나 자네가 우승자가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요. 안 그렇소?”

검왕은 내심 쓴맛을 느끼며 한쪽을 가리켰다. 남궁운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그 자리로 가 앉았다.

안 그래도 딱딱한 분위기인데 전대 맹주까지 가세하니 한층 갑갑해졌다. 그것도 반쯤은 찬탈당하다시피 한 맹주 자리이니…….

‘이보다 공기가 안 좋을 수도 없겠군.’

‘이래서야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놀라지 않겠는데.’

무림 명숙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다시금 문이 열리며 비영대주 비목이 들어섰다. 손에는 자그만 서신을 하나 든 채였다.

“군사님, 이것을.”

비목에게서 서신을 받아 든 제갈현의 표정이 이내 일그러졌다.

“무슨 일인가?”

검왕의 물음에 제갈현은 말없이 서신을 내밀었다. 그것을 읽은 검왕의 미간에도 커다란 주름이 생겼다.

“대체 무슨 일이오?”

“무슨 일이기에 그러십니까?”

검왕은 무거운 어조로 짤막히 말했다.

“마교의 선진군이 우리 코앞까지 밀고 들어왔소.”

“……!”

무림 명숙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 * *

“깊이 치고 들어가지 말고 본대와 합류하라고?”

천마로부터의 서신을 읽은 멸살독마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천마께서 이런 말씀을 하실 리는 없고, 또 어떤 겁쟁이 놈이 엄살을 부린 모양이군.”

그 누구보다도 중원 정벌에 의욕적이었던 천마다. 하물며 기세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서전이라는 걸 생각해 본다면…….

“귀도신마, 그놈의 짓인가?”

틀림없었다. 놈이 무언가 수를 써서 천마의 마음을 돌렸을 것이다.

“허나 이상한 일이군. 신마 그놈이 그렇게 언변이 뛰어난 놈은 아닐 텐데.”

어쩌면 함부로 천마의 직인을 훔쳐 썼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말재주야 별로일지 몰라도 손재주 하나는 탁월한 놈이니.

“클클, 그럴 테지. 그럴 게야. 어쩌면 놈이 정파 놈들과 내통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안 그래도 귀도신마를 안 좋게 보고 있던 멸살독마였다.

귀도신마가 용검대원을 만났다는 것, 그 용검대원이 강룡단의 무예를 지녔으며 그들과 형제 같았다는 것 등등. 귀도신마와 관련된 모든 사실이 미심쩍기만 한 그였다.

“어쩌면 놈이 정파 놈들에게 매수됐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암, 그랬기에 그토록 싸움박질 좋아하는 놈이 이번 일에 미적거렸을 테지.”

멸살독마는 서신을 구겨서는 주먹으로 꾹 쥐었다.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서신이 시체인 양 썩어 문드러져 버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멸살독마가 명령했다.

“계속 전진한다. 이대로 독기 품은 바람을 몰고 황룡성으로 간다.”

“명령에 따르지 않아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멸살독마의 오른팔인 적운수(赤雲手) 비차가 물었다. 멸살독마는 가래 섞인 웃음을 뱉고는 말했다.

“우리들 십마에겐 자유재량권이 있다. 천마님께 직접 듣는 명령을 제외한 모든 상황에서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권한이지.”

“하오나 그 서신은…….”

“이 서신이 천마님 본인의 의지라는 증거는 없지 않느냐? 막말로 귀도신마 그놈이 중간에 수작을 부렸을지 어찌 아누?”

“그렇다면…… 무시하고 가는 겁니까?”

“두 번 말하지 않겠다. 나는 지금 그대로 전진하기로 결정했다.”

비차는 더 토를 달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군을 움직이겠습니다.”

“음. 그래.”

천명의 선봉군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멸살독마는 씩 웃고서 동쪽을 응시했다.

이제 황룡성까지는 닷새 거리였다.

“그렇게나 가까이까지 놈들이 접근했단 말인가?”

“……그렇다고 합니다.”

제갈현의 목소리는 거의 기어들어 가고 있었다. 참을 수 없는 자괴감 때문이었다.

만통지재라고까지 불리는 그였다. 세상 모든 정보를 손아귀에 쥐고 마음껏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랬던 그가 숙적의 접근을 지금까지도 눈치챌 수 없었다.

일련의 사태로 비영대가 큰 타격을 입었다고는 하나, 제갈현에게 있어 크나큰 충격인 것은 변하지 않았다.

그것을 알기에 검왕 역시 그를 책망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소. 너무 스스로를 몰아붙이지 마시오, 군사.”

“알겠습니다, 맹주.”

대답은 그렇게 하나 일그러진 표정만은 어쩌지 못하는 제갈현이었다.

더 말해 봐야 무의미할 듯했기에 검왕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적의 규모는 어느 정도요?”

“정확히 파악하진 않았으나 대략 수백에서 천 명에 이르는 것으로 보입니다.”

“천 명이라.”

“이는 아마도 선봉이나 별동대 정도로 보입니다. 군장이 가볍고 진군 속도 역시 상당히 빠르니 말입니다.”

최소한의 식량만을 가지고서 이동 중이라는 것.

“그 말은 곧 본대가 있다는 의미겠군.”

“그렇습니다.”

무림 명숙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혈풍대가 전멸했을 때 각오했던 일이다. 그러나 이렇게나 갑작스레 전투에 내몰리게 될 줄이야.

“본대의 규모는?”

“역시나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굳이 예측하자면, 못해도 수천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만 단위를 넘을 가능성이 높다는 소리군.”

“그렇습니다.”

많은 숫자다. 그냥 수천도 아니고 마교도 수천이다. 휴전 이전의 마교를 기억하는 무인들은 자연히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십여 년 전에도 그랬다.

마교는 적은 숫자임에도 압도적인 무위로써 천무맹을 여러 차례 궁지로 몰아넣었었다.

그나마 그들과 견주어 밀리지 않았던 건 용검대를 위시로 한 정예 타격대뿐.

일반 문파의 무인들은 소수의 마교도를 상대하는 데에도 고전해야 했다.

하물며 지금은 길었던 평화에 익숙해진 상태다.

게다가 천무맹의 물갈이가 이제 막 시작되려는 상황. 알고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마교는 최적의 시점에서 허를 찌르고 들어온 셈이었다.

“맹주로서의 업무는 시작부터 거칠기 그지없군.”

검왕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었던 무림 명숙들이 어색한 표정들을 지었다.

“어떻게 하시겠소?”

남궁운의 물음이었다. 검왕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반문했다.

“그대라면 어떻게 했겠는가?”

“지금 축출당한 전 맹주에게 질문하는 것이오이까?”

비웃음 섞인 남궁운의 말.

그러나 검왕은 역시 걸물이었다. 그는 남궁운에게 마주 웃어 보이며 대꾸했다.

“그대의 지혜 정도는 쓸 만할 테니 말이지.”

달리 말하면 그 외의 넌 무용지물이란 의미.

남궁운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역시 맹주가 된 뒤에도 기분 나쁜 놈이군. 그러나 지금은 이런 자존심 싸움이나 벌일 때가 아니다.’

어느 한쪽은 접어 들어가 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 그래야 할 사람은 밀려난 실세인 남궁운이었다.

“서전을 가져가는 쪽이 전세를 취할 수 있을 것이오. 잔재주 부릴 것 없이 최고의 전력으로 마교의 선봉을 분쇄시키는 게 옳을 것이외다.”

“본 맹주의 생각과 일치하는군.”

빙긋 웃은 검왕이 제갈현을 돌아봤다.

“그렇다면 이에 어울리는 무인들이 있겠는가?”

잠시 생각하던 제갈현이 되물었다.

“느리지만 묵직한 부대를 원하십니까, 가볍지만 빠른 부대를 원하십니까?”

“번개보다도 빠르고 날랜 부대. 마교 본대가 도착하기 전에 선봉군을 꺾어 버릴 수 있을 정도로 빠르고 날카로운 부대!”

“그렇다면 청성과 종남의 힘이 제격일 겁니다.”

청성파 대표 윤철과 종남파 대표 염신의 표정이 굳어졌다. 자신들을 칼받이로 이용하려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들이 괜한 마음을 품지 않게 검왕이 약속했다.

“최고의 대우를 약속하지. 그대들의 절의(節義)는 천무맹의 가장 높은 곳에서 휘날릴 것이네.”

좋은 자리를 약속하겠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이 기회에 잘 보이면 한자리 꿰찰 수 있다는 것.

두 문파 대표들의 떨떠름하던 표정은 이내 미소로 변했다.

“믿어 주십시오, 맹주!”

“마교 수괴의 목을 당장이라도 갖다 바치리다!”

“음, 믿음직스럽군.”

겉으로는 기꺼워하는 검왕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제갈현은 찝찝함이 어린 전음을 듣고 있었다.

—이 정도만으로 괜찮겠나?

황룡성 내 청성파 무인은 대략 삼백, 종남파 무인은 대략 사백에 정도다.

이를 합쳐 봐야 칠백에 불과하니, 마교 선봉 천 명에 비하면 상당히 부족한 셈이었다.

—나머지는 의용대를 맞으면 될 일입니다.

—의용대?

—새 천무맹을 위해 분연히 일어설 자, 새로운 정파무림을 위해 한 몸을 바칠 수 있는 자를 모집하는 겁니다. 일, 이천을 모으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일 테지요.

말이야 그럴 것이다. 어쩌면 제갈현의 예상보다도 많은 무인이 모일지도 모르는 일.

마교와의 휴전, 그 십여 년에 걸친 금제는 수많은 무인들의 혈기를 억누르고 있었다.

무인은 기본적으로 싸움으로써 스스로를 증명하는 존재들. 그런 이들이 한창 혈기왕성할 시기에 제 실력을 선보일 수가 없었다.

아마도 전투에 목마른 이들이 한둘이 아닐 터.

의용군 모집은 그런 무인들에게 크나큰 기회가 될 것이었다.

—하지만 과연 그것만으로 충분할지 모르겠군.

—어느 정도의 타격은 줄 수 있을 겁니다.

—어느 정도?

제갈현은 검왕만이 알 수 있게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마교도들의 접근이 너무 빠르고 갑작스러웠습니다. 우선은 시간을 두어 그들의 전력을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음…….

검왕은 제갈현의 말뜻을 단박에 이해했다. 결국 젊은 무인들로 시간 벌이를 하자는 것.

청성파와 종남파에게 있어도 삼, 사백의 손실은 큰 문제가 되진 않는다.

천무맹에 있어서도 일, 이천 수준의 무인 손실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것.

제갈현은 그들로서 일단 선봉의 움직임을 막고, 다음 작전을 생각해 보자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쁘지 않겠군.”

검왕이 나직이 중얼거리고는 좌중을 둘러봤다.

“그럼 영광스런 첫 전투의 주역은 청성과 종남, 두 문파에 맡기도록 하겠소.”

“믿어만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맹주!”

두 문파의 대표들이 예를 취해 보였다. 다른 문파의 무인들은 본인들이 선택되지 않은 데에 안타까워했다.

그런 가운데 남궁운 홀로 표정이 구겨져 있었다.

—그들을 희생시키려는 얕은 수작이군. 서전부터 지고 들어갈 셈인가?

—자네의 군사가 떠올린 생각일세.

—이제는 자네의 군사지. 그리고 그런 군사의 생각을 승인하는 것은 자네고.

—그건 그렇군.

미적지근한 검왕의 반응에 남궁운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군사에게 말하여 희생 작전을 관두라고 하게. 군사는 뛰어난 지재(知才)지만 갑작스런 상황에 판단력을 상실했네!

—걱정할 것 없네. 이 전쟁은 결국 한 가지 싸움으로 귀결될 테니.

—뭐라고?

—나와 천마.

검왕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둘이 결착을 내면 모든 게 끝나네. 그 외의 싸움은 전부 겉치레에 불과해.

—그 무슨 소리인가? 천마가 아무 생각도 없이 자네 앞에 떡하니 나타날 성싶은가?

—그렇게 될 걸세. 그래야만 할 것이고.

확신하듯 말하는 검왕. 남궁운은 그제야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군사 혼자가 아니었군. 판단력을 잃은 것은.

어쩐지 예전의 검왕답지 않다고 느꼈었다. 맹주 자리에 오른 검왕에게선 예전의 날카로움이 조금 무뎌진 듯한 느낌이었다.

‘도대체 왜?’

잠시 생각해 본 남궁운은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정천, 그 친구와의 일전 때문이군.’

한없이 패배에 가까운 승리.

정점에 올랐노라 생각했던 검왕에게 있어 이는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로 인해 검왕은 초조해하게 됐을 터. 정천에게 거저 받은 맹주의 자리가 아니란 것을 증명하고 싶어 안달이 났으리라.

‘그것이 냉정함을 앗아갔을 테고. 정천 그 친구가 이번엔 잘못 생각했군.’

차라리 꺾어 버렸어야 했다.

어설프게 마음을 쓰느니 철저하게 짓눌러 굴복시켰어야 했다.

그랬다면 검왕 본인도 만족했을 것이다. 자신보다 높은 경지가 있다는 건, 경악스럽긴 해도 의욕이 생기는 일이었으니.

그러나 결과는 석연찮기만 한 승리.

검왕으로선 냉정을 잃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미 지나 버린 일이다.’

남궁운은 어쩔 수 없음을 깨달았다.

지금으로선 검왕과 제갈현의 마음을 돌릴 방도가 없었다.

‘만일 그들의 마음을 바꿀 사람이 있다면 한 명뿐이겠지.’

남궁운은 열려 있는 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제 어떻게 할 셈인가, 정천?’

* * *

“일단은 뭘 좀 먹고 싶은데.”

눈을 뜬 정천이 가장 먼저 꺼낸 말이었다.

“그, 그럼 죽을 먼저 가져다 드릴까요?”

“그거 먹고 기운 차리겠어? 배를 좀 든든히 채울 수 있는 게 필요해.”

화연란은 바로 옆의 의원에게 눈짓을 했다. 귀신 보듯 정천을 쳐다보던 의원이 화들짝 놀랐다.

“예, 예?”

“음식을 좀 가져다 달라고 전해 주세요.”

“음식이요? 음식 말이지요?”

의원은 말을 더듬거리며 일어났다. 하기야 진료하러 왔는데 환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으니 놀랄 만도 했으리라.

허둥지둥 의원이 방을 나서자 화연란이 정천을 돌아봤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괜찮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 그냥 내력만 고갈되었던 것뿐이니까.”

“하지만 오라버니는…….”

화연란은 언젠가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운기조식을 취하려 할 때마다 악몽이 정천을 음습한다던 말을.

평범한 잠이라 해서 다를 건 없으리라.

정천은 그녀의 반응에 안심하라는 듯 웃었다.

“이번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어. 녀석들도 이젠 지친 건지 모르겠군.”

정말 그럴까? 화연란은 정말이냐고 묻고 싶었으나 관두었다.

마침 백미련이 방으로 들어서고 있기도 했고.

“깨어났군. 왜 그때 유극태를 베지 않았지?”

곧바로 본론인가. 정천은 어깨를 으쓱했다.

“베었다간 뒷일을 수습할 수 없었을 테니까. 추종자만 수천이 넘어가는 인물을 멋대로 죽이라고?”

“힘을 조절해 무력화시키기만 했어도 됐을 텐데?”

“멸천은 나도 제어할 수 없어.”

멸천. 참 단순하고도 광오한 이름이다.

백미련은 그 이름을 몇 차례 입속으로 곱씹어 보았다.

“그게 그대가 자랑하는 절초의 이름인가 보군.”

“멸천은 초식이 아니야.”

“그런가. 본후가 본 것이 잘못된 게 아니었군.”

백미련은 화연란의 옆에 앉았다.

“내력……이라고 할 수나 있을까 싶은 힘을 모조리 쏟아부어 전력으로 베어 버린다. 필요한 것은 오로지 힘뿐이니 기술과 재주가 들어갈 자리는 없을 테지. 하지만 너무 위험해.”

“그건 나도 알아.”

정천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 내력을 소모해 버렸다. 황룡회가 비무회였기에 망정이지, 실전이었다면 목숨을 내놓은 거나 다름없었다.

‘아니, 그렇지도 않아.’

황룡회를 안전하다고 볼 수도 없다. 누군가가 급습할 가능성이 전혀 없진 않았던 것이다.

“그대는 죽을 수도 있었어.”

백미련이 책망하듯 말했다.

“마라혈천이 이미 황룡성 내를 활보하고 있어. 그들이 황룡회를 급습했더라도 이상할 게 없었지. 하물며 정신을 잃은 그대 정도를 해치울 방법이 없었을까?”

“방법이야 무궁무진했겠지.”

대수롭잖은 정천의 반응에 백미련이 혀를 찼다.

“위기의식이 너무 없군. 아니면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었나?”

“그런 건 아니야. 하지만 믿는 구석이 있었지.”

“믿는 구석?”

“놈들이 나타났다면 네가 날 지키려 했을 것 아닌가?”

백미련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상황에 따라…… 달랐겠지. 그들의 급습 규모가 작았다면 본후는 그대를 지켰을 거다. 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면 그대를 버리고 자리를 떠났을 거야.”

“그런가? 사실 너한테 별반 대단한 걸 기대하지도 않았어.”

“따로 믿는 구석이 있었나?”

“굳이 말하자면 놈들의 방식을 믿었지. 대놓고 나타나지 않으며, 항상 배후에서 움직이려 하는 방식을.”

마라혈천이 황룡회를 급습했다면 필연적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게 됐으리라. 하지만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란 게 정천의 생각이었다.

“내 생각대로라면 마교의 움직임 역시 놈들의 계획 안에 들어 있어.”

“마교?”

“그래. 아마 십 년 전부터 계획해 왔겠지.”

혈선에게 있어 마교는 적도 아니고 동지도 아니다. 그저 이용하기 위한 대상에 지나지 않을 뿐.

‘마치 우리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렇다면 자신들이 나서는 것은 최후의 최후가 될 것이었다. 수순상 당연히 마교의 움직임이 먼저 있게 될 터.

“그리고 놈들은 지금쯤 움직이고 있을 거야.”

“놈들이라면 마교 말인가?”

“그래.”

백미련과 화연란이 반신반의하고 있을 때였다.

드르륵 문이 열리며 곰 같은 거한이 들어섰다.

“얘기 들었나!”

붕대를 온몸에 칭칭 감은 장유추였다. 아직 핏자국이 드문드문 남은 걸로 보아 완치되지도 않았는데 일어난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본 정천이 헛웃음을 지었다.

“꼴이 말이 아니시군요.”

“흥. 이쯤이야.”

가볍게 코웃음 친 장유추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 아니지. 이런 얘기나 하려는 게 아닐세. 자네 들었는가?”

“쩌렁쩌렁한 선배 목소리라면 지금도 듣고 있습니다.”

“그게 아니야. 놈들이 들이닥치고 있단 말일세.”

백미련과 화연란이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반면 정천의 표정은 담담했다.

“마교입니까?”

“그래!”

장유추가 사나운 미소를 그렸다.

“아마 그놈도 오고 있을 테지. 빌어먹을 칼 도둑놈!”

“귀도신마 말이군요. 놈들의 병력 구성은 어떻게 되어 있답니까?”

“응? 어, 그것은 듣지 못했네만.”

아마 마교가 온다는 얘기만 듣고는 신이 나서 뛰쳐나왔으리라. 정천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뭐, 자세한 얘기야 가서 들으면 되겠지.”

“오라버니? 가서 듣는다니요?”

“지금쯤 높으신 분들이 다들 모여 있을 테니까.”

정천이 끙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의 그와 달리 휘청거리는 움직임이었다.

그를 부축한 화연란이 말했다.

“쉬셔야 해요. 깨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요.”

“그러다가 회의가 끝나 버리겠지. 꼭지가 돈 검왕이 무슨 실수를 할지도 모르고.”

“실수라고? 설마 유극태 그 인간이 실수를 할 거라는 말인가?”

장유추가 말도 안 된다는 얼굴을 했다. 그러나 정천의 생각은 확고했다.

“저와의 일전으로 자존심에 큰 타격을 입었을 겁니다. 하물며 그 아픔이 가시기 전에 마교 출진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냉정을 잃는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겠죠.”

“그를 꺾었어야 했어.”

백미련의 말에 정천은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면 앞으로 귀찮아졌을 거야. 멸천 없이 꺾는 건 거의 불가능하기도 했고.”

“다른 초식들로 내공을 상쇄시켰으면 됐잖아? 시간은 그대의 편이었을 텐데?”

검왕이라 해도 정천만큼의 내공을 지니진 못했다. 비슷한 초식으로 힘을 소모해 갔다면 정천이 승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천은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얼마가 걸렸든 결국은 이렇게 됐을 거야. 검왕의 절초는 무한아가 끝이 아니었을 테니.”

“끝이 아니라고?”

자연검의 힘을 모조리 끌어낸 궁극의 초식 무한아. 초식의 한계마저 넘어선 그것이 검왕의 모든 것이 아니란 말인가?

“뭐, 내 추측일 뿐이지만.”

정천은 부축을 받은 채 걸음을 옮겼다.

때마침 하인들이 수라상 같은 요리상을 들고 오고 있었다. 정천은 거기서 닭다리 하나만 뜯은 채 걸음을 떼었다.

“나머진 거기 남겨 둬. 돌아와서 먹게.”

정천은 회의장을 향해 걸어갔다. 화연란이 그를 부축했고 장유추와 백미련이 뒤를 따랐다.

마침 회의장 안에선 이런저런 얘기가 들려오고 있었다.

귀를 종긋 세운 장유추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첫 번째 패로 종남과 청성을 내밀 생각인가? 나쁘진 않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텐데.”

“일단은 적의 전력을 탐색하려는 모양이군.”

백미련 역시 탐탁찮은 표정이었다. 신생 천무맹의 대응이 너무 미적지근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뭐, 전술이야 언제든 바뀔 수 있으니까.”

나직이 중얼거린 정천이 회의장의 문을 밀고 들어갔다.

“……!”

“음!”

정천을 발견한 무림 명숙들이 놀란 얼굴을 했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놀란 인물은 단연코 검왕이었다.

“벌써 깨어났는가?”

검왕의 물음에 정천이 웃었다.

“약간 피로한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내력을 회복하진 못했을 터인데?”

“그건 그렇습니다. 사실 지금도 간신히 걸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검왕의 눈에 미묘한 빛이 스쳤다.

“그냥 푹 쉬지 그랬는가?”

“마교도가 온다는 얘기에 마냥 누워 있을 수가 없더군요.”

청성파 대표 윤철의 표정이 굳었다.

“공을 세우고픈 마음을 알겠지만 이미 늦으셨소. 서전은 우리 청성과 종남이 함께하기로 했으니.”

“그렇소.”

염신이 맞장구를 쳤다.

정천은 그들을 힐끔 쳐다보기만 한 후 검왕에게 시선을 돌렸다.

“시체로 마교를 환영할 생각입니까?”

“뭐라고?”

“그 무슨 건방진 소리냐!”

윤철과 염신이 발끈했다. 그럼에도 정천의 표정엔 한 점 흔들림이 없었다.

당돌한 물음에 검왕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청성과 종남은 정파무림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검문(劍門)들일세. 지금 그들의 검을 무시하려는 것인가?”

“그들이 용검대보다 강합니까?”

검왕의 입이 닫혔다. 그뿐 아니라 회의장의 모든 이들이 입을 다물었다.

정천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혹은 그들이 혈풍대보다 강합니까? 그렇노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저는 십 년 전, 용검대의 조장으로서 그들과 검을 맞댔었습니다. 승리할 때도 있고 패배할 때도 있었지만 언제나 한 가지는 동일했습니다.”

“그게 뭔가?”

“놈들이 사자(獅子)라는 것.”

좌중에 침묵이 감돌았다. 정천은 그들 하나하나를 노려보듯 둘러봤다.

“전투 규모가 크든 작든 놈들은 언제나 전력을 다합니다. 선봉군이라 해도 본대와 다르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으음.”

“이미 놈들은 혈풍대를 궤멸시켰습니다. 이번이라고 다를 건 없습니다. 탐색전이란 가벼운 생각으로 맞섰다간 시체만 쌓게 될 겁니다.”

검왕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파였다.

윤철과 염신은 정천을 노려보면서도 별다른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래, 그렇다면 자네는 어쨌으면 좋겠다는 건가?”

검왕의 물음에 정천은 제갈현을 돌아봤다.

“선봉대의 병력 규모가 어떻게 됩니까?”

“대략 천여 명으로 추산하고 있네.”

정천은 검왕을 똑바로 응시했다.

“최소 오천 명 이상의 무인들로 맞서야 합니다. 더불어 수적 우위를 앞세워 포위 공격을 펼쳐야 합니다.”

무림 명숙들이 하나 같이 입을 쩍 벌렸다.

“오천이라고?”

“고작 일천의 적에 맞서 다섯 배의 병력을 동원하란 말인가?”

무인 오천 명이면 천무맹이 당장 동원 가능한 전력의 일 할이다. 그 숫자를 고작 선봉대에 쏟아부으라니 이들이 반발할 수밖에.

“웃기는 소리!”

“숫자로 놈들을 뭉갰다간 승리하더라도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윤철과 염신이 소리쳤다. 그 순간 그들은 싸늘한 정천의 시선을 마주해야 했다.

“시체가 되어 썩어 문드러지는 것보단 웃음거리가 되는 편이 낫소.”

“크윽…….”

“네놈은 비슷한 숫자로 마교의 강룡단과 맞섰으면서, 우리더러는 숫자로 찍어 누르라고 말하는 것이냐?”

“우리야 놈들과 실력이 비등했으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아니란 말이냐?”

“당연한 걸 묻는군.”

윤철과 염신, 두 사람뿐 아니라 모든 무림 명숙들이 정천을 노려봤다. 살기만으로 정천을 수십 번 난자하고도 남을 기세였다.

화연란이 불안한 눈으로 정천을 보았다. 백미련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스스로 적을 만드는군. 그게 그대답기는 하지만.”

장유추는 그저 팔짱만 낀 채 묵묵히 있을 뿐이었다. 이성적으로는 정천에게 동조하나 심정적으로는 다른 무인들도 이해가 되는 그였다.

‘인정할 수 없겠지. 동수의 전투에선 자신들이 마교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그것은 현실이다. 그 사실은 지난번 팔을 잃었을 때 뼈저리게 느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용검대는 정말 초월적인 수준의 타격대였다.

‘화륜패, 자네가 여기 있었다면…….’

분위기는 갈수록 험악해지고 있었다.

무림 명숙들에게 있어 정천은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모난 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주제에 자신들의 치부를 건드니 인정하기에 앞서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검왕이 손을 들어 올렸다. 순간적으로 좌중이 조용해졌다.

“그러니까, 오천의 무인들을 동원해 마교 선봉대에 맞서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검왕은 말없이 정천을 노려봤다. 그의 눈빛은 마교의 일이 아니라 다른 것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이윽고 그의 입이 열렸다.

“자네의 의견은 받아들이지 않겠네.”

“…….”

정천은 이를 악물었다. 얘기가 쉽게 쉽게 풀리진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이유가 있습니까?”

“맹주로서의 결정일세.”

“그렇게 결정한 이유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것을 자네에게 말할 의무는 없겠지.”

정천은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결국은 아무 이유도 없다는 소리 아닌가.

검왕은 이제 아예 정천의 시선을 무시하고 있었다.

“자네 마음대로 천무맹을 주무르고 싶었다면 맹주직에 오르면 될 일이었네. 하지만 자넨 그러지 못했지. 그렇다면 본좌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권리도 없는 것이네.”

‘결국은 이렇게 되는 건가.’

백미련이 우려하고 정천 자신도 불안해하던 일이 벌어졌다.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그의 숨통을 끊어 버리는 편이 나았을까?’

그러나 그랬다면 더 큰 혼란이 벌어졌으리라.

아무 배경도 권력도 없는 정천이 맹주가 되었다면, 가장 먼저 일어날 일은 암살 기도와 반란일 테니까.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그래도 최악은 아니란 것에 위안을 가질 수밖에.

‘최소한 천무맹이 내부 분열되지는 않겠지.’

차라리 힘을 숨기고 맥없이 패배할 걸 그랬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이미 늦어 버린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정천은 더 설득하기를 포기했다. 어차피 방법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

검왕은 좌중을 돌아봤다.

“더 이상의 이의는 없는 걸로 알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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