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五章 멸천 (65/146)

第五章 멸천

“그런데…….”

태천검을 쥔 검왕이 물었다.

“곧장 싸워도 되겠는가?”

“그건 무슨 의미입니까?”

“자네, 본좌와는 달리 운기조식을 취할 여유가 없었잖은가. 윤하월과의 일전으로 상당히 기력이 떨어져 있을 터인데.”

정천은 잠깐 자신의 몸을 살펴봤다. 확실히 기운을 회복한 검왕과 달리 완전하다고 하기는 힘든 상태였다.

검왕은 태천검을 검집 안으로 밀어 넣었다.

“운기조식을 취하게. 여력을 회복할 기회를 주지.”

“적수에게 마음을 쓰시는 겁니까?”

“찝찝한 승리는 본좌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네. 가능하다면 전력의 자네를 쓰러트리고 싶군.”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마시죠.”

정천의 눈자위가 검게 물들었다. 동시에 그를 둘러싼 공기 자체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사위를 압도하는 존재감.

‘이것은…….’

검왕은 어느새 태천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설마 이 정도의 여력을 숨기고 있었다니?

강룡검이 다시금 정천의 손아귀에 나타났다.

“선배님과 결착을 낼 정도의 여력은 남겨 두었습니다.”

“확실히 그래 보이는군.”

이것을 내력이라 할 수 있을까? 만일 그렇다면, 정천의 내력은 검왕이 걱정할 수준을 아득히 넘고 있었다.

‘저 나이에 이 정도 내력이라니. 정천 저 사내는 대체 어떠한 사선을 건너왔으며 어떠한 전투를 치러 온 것인가?’

검왕 자신도 수십 년 검행이 순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죽을 고비를 넘겼던 것도 수차례요, 패배의 쓴잔을 마셨던 것도 여러 번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사내와는 거쳐 온 수라장 자체가 달랐다. 그런 사실을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나락을, 지옥을 거쳐 돌아온 귀환병인가.’

검왕은 정천에 대한 여유를 완전히 접었다.

아무리 낮게 친다고 쳐도 이 사내는 자신과 동급이었다. 아마도 이 황룡성 내에서는 유일할.

“오랜만이로군.”

태천검을 쥔 손이 가늘게 전율했다.

실로 오래간만이다, 이런 감각.

죽음이 두 사람 사이에서 춤사위를 추고 있었다.

“지금부터 일말의 손속도 두지 않겠네.”

“저 역시.”

검왕의 말에 정천이 대꾸했다.

두 사람은 각자의 검을 쥔 채 대치했다. 그리고 잠시 동안 이어지는 고요.

멈춰 선 채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아래에서 지켜보던 칠삼이 중얼거렸다.

지금까지의 격전도 그의 기준에선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으나, 지금은 더욱 그랬다.

두 사람의 신형은 멈추어 있으나 격렬한 전투가 치러지고 있는 듯했다.

“거리와 때를 가늠하고 있군.”

“거리?”

칠삼의 물음에 백미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거대한 내공을 덧칠한다 해도 결국은 누가 급소를 꿰뚫느냐의 싸움이니까. 아마 저 자리에서 서로 상대방과의 거리를, 더불어 치고 들어갈 틈을 궁리하고 있겠지.”

“치고 들어갈 틈이라.”

“하지만 이대로는 몇 날 며칠이 지나도 결착이 나지 않아. 서로의 무위가 동급이니까. 저 상황에 먼저 들어가는 쪽이 수를 먼저 보이는 셈이니 신중해질 수밖에 없어.”

백미련은 발밑에 떨어져 있는 파편을 주웠다. 비무대의 부서진 바닥 파편이 날아와 떨어진 것이었다.

“그렇다면 외부에서 인위적으로 싸움을 촉발시키는 수밖에.”

휙!

그녀가 던진 파편이 쏜살처럼 날아갔다.

조금 앞에서 관전 중이던 제갈현과 남궁운이 그것을 감지했다. 그러나 백미련의 의도를 알았기에 구태여 막거나 하지 않았다.

수십 장을 날아간 파편이 두 사람의 발치에 떨어졌다.

파삭.

파편이 깨지는 순간 정천이 움직였다. 오른팔이 채찍처럼 휘어서는 강룡검을 쥔 손끝을 내질렀다.

먹잇감을 노리는 뱀의 아가리처럼, 강룡검이 검왕의 목덜미를 향해 쇄도했다.

같은 순간 검왕도 움직였다.

태천검이 백색 빛을 흩뿌렸다. 그 목표는 검을 내지르는 정천의 손목. 뱀의 아가리를 피하고 목을 쳐내려는 것이었다.

다시 정천의 공격 궤도가 바뀌었다.

이번에 노리는 곳은 검왕의 오른쪽 어깨. 적이 목을 치려 한다면 허리를 끊어 버리겠다는 의도였다.

태천검 역시 또다시 궤도를 바꿨다. 이번엔 잠시 참고서 일단 공격부터 막겠다는 생각.

그런 과정이 끝난 후에야 첫 번째 부딪침이 있었다.

차차차창!

허공 위로 불꽃이 튀었다. 바람처럼 쏘아진 두 사람의 검이 수십 차례의 충돌을 거듭했다.

“허어…….”

“오오.”

비교적 안목이 낮은 이들이 넋이 빠진 채 초신속의 공방을 지켜보았다. 그래도 이 자리에 있을 만큼의 무위는 됐기에, 두 사람의 검속을 좇으며 경탄할 정도의 능력은 됐다.

“크으.”

“말도 안 되는…….”

저들보다 조금 뛰어난 이들은 공포를 느끼며 치를 떨었다. 한 차례의 충돌 직전까지 몇 번의 계산과 움직임이 뒤따른다는 것까지 간파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보다도 무위가 뛰어난 이들은 허탈감에 휩싸였다.

“괴물들이군.”

“그렇군요.”

남궁운의 혼잣말에 제갈현이 동조했다.

눈에 보이는 공방보다도 머리싸움이 더 치열하다. 그러나 그보다도 치열한 것은 두 사람의 전투 방식이었다.

검과 검이 부딪치는 내내 두 사람의 왼팔과 두 다리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일견 검을 보조하기 위한 행동으로만 보이는 그것은, 실제로는 상대의 허를 찔러 들어가기 위한 공격 자체였다.

정천은 강룡검을 회수하며 왼팔을 강하게 떨쳤다. 화천우(火天雨)의 불길을 머금은 주먹이 검왕의 복부를 노렸다.

검왕은 토룡수(土龍手)의 수법으로 불길을 다스렸다. 동시에 정천의 주먹을 강하게 밀쳤다.

강렬한 검격에 가려져 거의 눈치채기 힘들 정도의 공방. 아마 초고수들 외엔 확인조차 하기 힘들었으리라.

단순한 검객 사이의 싸움이 아니다.

두 사람은 문자 그대로 모든 방식을 총동원해 적을 공격하고 있었다.

카캉!

두 사람의 몸이 십 장씩 물러났다. 실질적으로 유효타는 하나도 없었는데 입고 있는 옷들이 너덜너덜했다.

먼저 입을 연 쪽은 검왕이었다.

“본좌가 아는 것보다도 많은 초식을 익혔군. 설마 자네에게서 마교의 무공까지 볼 수 있을 줄은 몰랐네.”

“하지만 그중 어느 것도 선배님께는 효과를 보이지 못했군요.”

“그야 상대가 상대니까. 만약 본좌가 아닌 다른 무인이었다면 얘기가 달랐겠지.”

“아직 끝나진 않았습니다.”

“알고 있네.”

검왕은 태천검을 고쳐 쥐었다. 정천은 직감적으로 이제부터가 진짜라는 것을 느꼈다.

“정말 모든 것을 걸어 보세.”

“그러죠.”

“본좌가 먼저 가지.”

순간 바람의 흐름이 바뀌었다. 검왕의 눈빛에서도 투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수백, 수천의 살기가 집중되는 것보다도 위험한 느낌.

정천은 내심 긴장하며 강룡검을 꾹 쥐었다.

‘자연검이 온다.’

휘이이이.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단순히 살기나 검기 등으로 일으키는 것과는 수준이 다른 바람이었다.

세상 모든 바람이 자신을 적대하는 느낌.

정천은 홀로 세상에 맞서는 기분을 느꼈다.

팟!

정천의 왼팔에서 피가 튀었다. 그저 바람이 스쳤을 뿐인데 살점이 떨어져 나간 것이다.

“윽.”

깜짝 놀란 정천이 한 걸음 물러났다. 어지간한 검기로도 상처 하나 낼 수 없는 그가 너무나 간단히 피를 보고 말았다.

지켜보던 이들 역시 눈을 의심했다.

“호신강기마저 뚫어 버리는 바람이라고?”

“그런 게 가능하단 말인가?”

화연란이 즉각 백미련을 돌아봤다.

“언니라면 저런 게 가능하겠어요?”

“불가능해.”

선선히 고개를 저은 백미련이 쓴웃음을 지었다.

“설마 혈선들을 제외하고도 저런 고수가 있을 줄이야.”

화연란은 작은 충격을 받았다. 그 말은 곧, 혈선들 역시 저 정도는 벌일 수 있다는 의미 아닌가.

다시 말해, 지금의 검왕을 이기지 못한다면 혈선에겐 어림도 없다는 의미.

‘오라버니.’

화연란은 다시 정천을 응시했다. 자기도 모르게 두 손이 젖어 들어가는 걸 느끼며.

정천은 팔에 묻은 피를 슥 닦아 냈다. 상처 자체는 금세 치유가 된 뒤였다.

“대단한 회복력이군. 자네를 제대로 쓰러트리려면 폭풍 하나를 몽땅 가져다 박아야겠어.”

검왕의 감탄에 정천은 사납게 웃었다.

“저야말로 놀랐습니다. 한 줄기 바람에도 검강을 실을 수 있을 정도라니.”

“그 정도에 놀랐다면 자네의 무운도 여기까지겠군.”

검왕이 태천검을 들어 정천을 겨냥했다.

그 순간 정천은 그의 옷자락을 펄럭이는 바람결 하나하나에 검강이 실렸음을 느꼈다.

‘주변의 자연이 그의 검.’

저 바람이 몰아친다면 정천이라 해도 온몸이 난자당할 것이다. 죽고 사는 게 문제가 아니라, 시체가 온전히 남기나 할지가 문제일 터.

“흥.”

정천은 작게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죽을 고비라면 그 역시 수도 없이 넘겨 왔었다. 고작 거기에 한 번이 더 추가될 뿐이었다.

“자연이 상대라면.”

파츠츠츠.

강룡검 주변으로 푸른빛 전광이 어렸다.

“자연 자체를 부숴 버리면 그만.”

정천이 땅을 박찼다.

그대로 천마보를 밟으며 검왕의 코앞까지 쇄도했다. 어떠한 잔재주도 섞지 않은 정직하기까지 한 돌진.

“어리석군.”

검왕의 태천검을 휘둘렀다. 그 칼날의 흐름을 따라 검강을 머금은 폭풍이 몰아쳤다.

콰과과과!

우선은 귀를 먹먹하게 하는 굉음이 몰려왔다. 뒤이어 느껴지는 공기의 흐름. 이 흐름이 조금만 더 몰려온다면 살갗이 베이고 뼈가 끊어지리라.

‘그렇다면 그보다도 빠르게!’

그 흐름이 오기 전에, 정천이 검을 뻗었다.

제사검 뇌천월인(雷天月刃)이 그의 손아귀 안에서 울부짖었다.

파지지직!

푸른빛 뇌전이 비무대 위로 몰아쳤다. 들이닥치던 바람이 순간 힘을 잃고서 약해졌다.

“으음!”

검왕은 내심 당황했다.

바람은 그 누구도 깨트릴 수 없다. 아무리 예리한 검으로 벤다고 해도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이다.

그의 자연검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람 속에 담긴 수없이 많은 검강을 깨트리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러나 결국은 그래 봐야 검기(劍技)일 뿐.”

정천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리는 듯했다. 어쩌면 검왕 자신의 착각일지도 몰랐다.

파지지직!

몰아친 뇌전이 검왕의 태천검으로 떨어졌다. 검왕은 전격이 자신의 몸을 훑는 것을 느꼈다.

“흡!”

기합성을 토하며 뇌기를 몰아냈다. 전격은 그대로 땅으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이윽고 찾아오는 어지러움.

검왕은 비틀거리려는 몸을 애써 가누었다.

“놀랍군.”

벌어진 검왕의 입에서 새하얀 김이 뿜어져 나왔다. 기합으로 애써 밀어내긴 했지만 전격은 그의 몸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다.

물론 심대한 수준은 아니다. 약간만 있어도 회복이 가능한 수준.

정천만큼은 아니어도 그 역시 인간을 초월한 존재였다. 어지간한 타격은 큰 의미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정신의 타격은 얘기가 다르다.

“어떻게 본좌의 풍아(風牙)를 파훼했지?”

“간단합니다.”

정천이 강룡검을 내민 채 대꾸했다.

“그저 보다 강한 힘으로 부숴 버렸을 뿐.”

허무할 정도로 단순한 대답이다. 여느 사람이라면 어이가 없어 맥이 풀릴 정도로.

그러나 검왕은 뭔가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함이 복잡함을 이긴 것인가?”

“자연검이란 표현은, 일견 광대하고 심오해 보이지만 결국 검기의 확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실제 바람이라면 어찌할 수 없겠지만, 검기에 근간을 둔 기술이라면 마찬가지로 검기에 부서질 수도 있겠죠.”

“그럴 테지. 하지만.”

검왕이 다시 태천검을 끌어당겼다.

“다시 말해 부서지지 않는 검이라면 될 일이지.”

쿠구구구.

또다시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엔 조금 형질이 달랐다.

마치 거대한 벽과 같은 느낌.

수없이 많은 결들을 하나로 뭉쳐 거대한 망치로 탈바꿈한 느낌이었다.

그 위력은 조금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터.

그러나 그것으로도 끝이 아니었다.

콰콰콰콰!

비무대가 갈라지고 있었다. 떨어져 나온 파편과 흙무더기가 정천을 향해 아가리를 틀며 다가왔다.

쿠구구구구.

하늘이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비구름이 모여들더니 속이 뒤틀린 양 뇌전을 번뜩이기 시작했다.

그 한가운데에 검왕이 서 있었다.

“본좌 역시 잔재주는 집어치우지. 쓸데없이 시간을 길게 끌지도 않겠네. 펼칠 수 있는 최강의 수로 자네를 상대해 주지.”

이것이 진짜였다. 상상할 수 있는 세상 모든 것이 단 한 존재를 향해 이빨을 들이미는 것.

검왕의 궁극검인 무한아(無限牙)의 실체였다.

‘어지간한 검으로는 상대할 수 없다.’

정천은 내심 실감했다. 어지간한 강룡검식으로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그 역시 선보일 수 있는 가장 강한 검을 보여야만 할 터. 그러나 그 검은 정천 자신도 직접 펼쳐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하는 수밖에 없다.’

더 계산하고 재단할 여유도 없었다. 이제는 정말 하거나 말거나, 둘 중의 하나만 남았을 뿐.

‘한다.’

결정을 내린 정천이 이를 악물었다. 동시에 강룡검을 두 손으로 쥐고는 자세를 낮췄다.

그것이 전부.

지켜보는 모든 이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꾹 쥐었다.

‘죽을 셈인가?’

‘검왕에게 대항할 궁극의 초식이 더 이상은 없단 말인가?’

눈 씻고 다시 봐도 변한 것은 없다. 기본 중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기수식을 취한 채, 그저 두 손으로 검을 쥐고는 서 있을 뿐.

그것이 말 그대로 궁극의 검식이란 것은 검왕만이 깨달을 수 있었다.

‘처음의 처음으로 돌아간 것인가.’

검법이란 결국 한 가지 이유에서 출발된 공부다.

그냥 휘두르는 검으로는 적을 벨 수 없다는 것.

그렇기에 최초로 초식이 생겨났다. 보다 쉽게, 보다 나은 방식으로 적을 베기 위해.

거기에 대항하여 수많은 방어식이 파생됐다. 이는 또다시 수없이 많은 변초를 불러왔다. 그것이 바로 검술의 발전이었다.

검술뿐만이 아니다. 모든 무술은 애초에 같은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어떻게 하면 보다 쉽게 적을 쓰러트릴 수 있을까?

다시 말하자면, 그 점이 충족될 수 있다면 초식이고 검술이고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다는 소리다.

한 번 휘두름으로써 적을 벨 수 있다면, 그저 한 번 휘두르면 족하다.

쓸데없이 허식을 섞을 필요도 없고 변초로 속이려 들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자네는, 결국 그러한 경지를 이룩했다는 것인가?’

인정할 수 없다. 검왕은 자신도 모르게 피가 나도록 이를 악물었다.

‘이 얼마나 오만하고 어리석은가!’

모순이다. 세상 모든 것을 꿰뚫는 창, 세상 모든 것을 막는 방패가 없듯이 세상 모든 것을 벨 수 있는 검 역시 없다.

그렇기에 검술이 있고 무술이 있는 것 아닌가?

정천은 지금 그 사실에 정면으로 반하고 있었다.

다른 모든 것을 떠나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용인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실감했을 때.

검왕은 몸을 날리고 있었다.

“타아아앗!”

무한아가 펼쳐졌다. 폭풍과 뇌전과 지진과 천둥이 검왕이 뻗는 태천검을 따라 정천에게로 몰아쳤다.

단번에 정천을 삼키고 드는 공격. 검격의 상식을 초월한 궁극의 검이 펼쳐졌다.

끝이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멸(滅)…….”

그러한 검강의 한가운데에서, 정천이 강룡검을 내뻗었다.

“……천(天)!”

쩌어어억!

흑색의 일선이 모든 것을 갈랐다.

* * *

“음?”

천마는 자기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동쪽 하늘을 노려봤다.

“왜 그러십니까, 천마님?”

귀도신마가 다가왔다. 천마는 대답하지 않은 채 무서운 눈으로 동녘만을 노려봤다.

“천마님?”

“보이는가?”

선문답 같은 반문. 귀도신마는 의아했다.

“무엇이 말씀입니까?”

“저 하늘 말이야. 저 하늘이 보이느냔 말이네.”

“예?”

귀도신마는 천마가 노려보고 있는 먼 동녘을 바라봤다. 시커먼 구름이 드문드문 끼어 있긴 하나 그 외엔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비가 올지도 모르겠군요.”

귀도신마의 대꾸에 천마는 고개를 저었다.

“보이지 않는가. 하기야 자네의 안력으로도 아직은 무리일지도 모르겠군.”

“예?”

“아무것도 아니네. 그러나 아마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잠시 주저하듯 말을 않던 천마가 나직이 운을 뗐다.

“이번 토벌행도 결코 순탄치만은 않겠어.”

“…….”

귀도신마는 설마 하는 생각에 침묵했다. 천마는 동쪽에서 눈을 떼고는 곧장 전서구 담당을 호출했다.

“멸살독마에게 전하게. 섬서성에 도착하더라도 곧장 황룡성으로 돌진하진 말라고. 일단은 기다린 후 본대와 합류하라고 말이야.”

열흘 간격으로 멸살독마의 병력과 마교 본대가 귀암산을 나섰던 차였다.

다른 십마들이 천마에게로 다가왔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그런 명령을 하셔 봐야 독마의 사기만 떨어트리게 될 텐데요.”

“사기가 떨어지고 마는 편이 목숨을 잃는 것보단 낫지 않겠나.”

단호한 천마의 말에 십마들도 할 말이 없어졌다. 대체 갑작스런 그의 신중함이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귀도신마가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엇 때문에 천마님께서 걱정하시는 것인지요?”

“자네들.”

천마는 이번에도 선문답 같은 대답을 꺼냈다.

“하늘을 가를 수 있겠나?”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본좌라면 어떨까. 본좌는 과연 하늘을 가를 수 있을까?”

하나같이 어리둥절해서 서로만 쳐다보는 십마들.

그들 역시 무의 극치에 다다른 초고수들이었으나, 천마가 말한 것과 같은 일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천마는 더 말하지 않고서 말에 올랐다.

그의 눈은 동쪽에 고정된 채 떨어지지 않았다.

“구태여 중원 정벌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지금의 황룡성은 꼭 찾아가 볼 가치가 있겠군.”

나직이 중얼거리는 천마.

그가 바라보던 하늘의 구름은 어느새 흩어져 사라진 뒤였다.

하늘이 갈라졌다.

자신의 모든 공세가 으스러지는 순간 검왕이 느꼈던 기분이었다.

폭풍은 흩어지고 지진은 잠재워졌다. 뇌전과 천둥은 거짓말처럼 소멸해 버렸다.

무한아의 이빨이 완전히 부러진 셈.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갈라 버린 검격은…….

‘하늘마저 베어 버렸는가?’

검왕은 무의식중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가 불러들였던 먹구름이 뿔뿔이 흩어져 사라지고 있었다.

“멸천.”

하늘을 멸한다. 이 얼마나 어리석고도 오만한 이름이란 말인가.

그러나 지금의 검왕은 그 이름이 퍽 어울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뚝.

태천검이 부러져서는 땅으로 떨어졌다.

비무대 아래에서 숨 죽인 채 지켜보던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태, 태천검이……!”

“명검칠존의 수장이!”

중원, 나아가 세상에서 최고라 할 수 있는 일곱 자루의 검. 검에게 선택받지 않고서는 왕이나 황제조차 쥘 수 없었다는 명검 중의 명검.

명검칠존 중에서도 나찰수라와 더불어 최강이라 불리던 태천검이 부러졌다.

“본좌의 목숨을 네가 구했구나.”

검왕은 씁쓸히 웃었다.

한 번 꺾인 검은 다시는 되돌아오지 못한다. 부러진 철을 다시 벼른다고 해도 태천검이 돌아오진 않을 것이다.

‘그것만이 전부였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검왕의 생각이 맞다면 정천은 그를 똑바로 노리지 않았다. 비스듬히 검격을 날려 검기 자체는 검왕을 비껴가게끔 했다.

다시 말해 검을 휘두른 여파만으로 검왕의 궁극검을 파훼해 버렸다는 것.

어찌 보면 죽음보다도 큰 수치였다.

‘빗나간 검에 검왕이 패한 셈인가. 검왕이란 이름이 울고 가겠군.’

씁쓸히 되뇌인 검왕이 전방을 응시했다.

정천은 검을 휘두른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강룡검은 어느새 사라진 뒤.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은 만큼 조금 우습게도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걸 보고 웃을 수 있는 이는 없으리라.

“자네가 이겼군.”

검왕이 씁쓸히 입을 열었을 때였다.

“아뇨.”

정천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제겐 더 이상의 여력이 없습니다. 조금 전의 일격에 모든 내력을 쏟아부었으니까요. 반면 선배님께선 아직도 싸울 여력이 있겠지요.”

“허나 그것은…….”

검왕은 입을 다물었다. 차마 ‘네가 봐준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오지 않았던 까닭이다.

정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 일격으로 선배님의 태천검을 부수고 죽지 않을 정도의 상처를 입혀 쓰러트린다. 그것이 처음의 계산이었습니다.”

“…….”

“하지만 변수가 있었던 것 같군요. 그 검이 그렇게나 뛰어난 줄은 몰랐습니다.”

검왕은 떨어져 있는 태천검을 내려다봤다. 정천의 한마디가 더 이어졌다.

“그 시점에서 저의 패배입니다.”

검왕은 주먹을 꾹 쥐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아귀에서 선혈이 흘렀다.

“그걸 본좌더러 납득하란 말인가? 패배보다 더 치욕스러운 승리를 받아들이라고?”

“분하면 실력으로 절 뛰어넘으시죠.”

그 말을 끝으로 정천의 몸이 허물어졌다. 검왕은 복잡한 표정으로 그런 정천을 응시했다.

승리라고 할 수 없는 승리. 아니, 이건 누가 뭐래도 명백한 패배였다.

“결국 자네는 자기 좋을 대로 승패를 정해 버렸군.”

검왕의 한마디를 끝으로 황룡회 역시 종막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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