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四章 최후의 여섯 사람
“네놈…….”
뿌드득 이를 가는 윤하월에게로 돌아선 정천이 느긋하게 말했다.
“이제 얼추 비슷하겠군.”
윤하월은 솟아오르는 불쾌감 속에서 인정했다. 녀석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강하다는 것을.
그러나 그렇다고 자신이 패배할 거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놈의 무위가 상당하긴 했지만, 자신 역시 그쯤은 할 수 있었다.
현상성의 궁극식 원륜영파에 정면으로 맞서진 않았겠지만, 그것을 피하는 것쯤은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나머지 놈들을 상대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결국은 붙는 게 정답. 차라리 이렇게 되니 간단해서 좋았다.
“좋다. 유극태에 앞서 네놈 먼저 끝내 주지!”
“뭐, 그러는 것은 댁의 자유인데 말이야.”
정천이 웃는 낯으로 지적했다.
“이 마당에 정정당당히 싸우게 저들이 둘 것 같나?”
“…….”
윤하월은 입술을 깨물었다.
남은 사람은 모두 여섯. 그중 장유추와 마태륜은 혈전을 치르고 있는 중이니, 남은 것은 넷뿐이다.
이 마당에 정천과 윤하월이 붙는다면?
나머지 두 사람은 기회를 노릴 것이다. 가만히만 있어도 둘 중 하나, 혹은 둘 모두가 쓰러질 텐데 본인들도 싸우려 들 리는 없었다.
틈을 보이는 순간 협공당하게 될 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수지가 맞지 않았다.
“빌어먹을.”
욕설을 내뱉은 윤하월이 검왕을 돌아봤다.
“끼어드실 거요, 선배?”
“글쎄.”
검왕은 미묘하게 웃었다.
“뭐라 딱히 약조할 수는 없겠군.”
“제기랄. 그렇다면 당신도 마찬가지인가?”
궁후 요태희 역시 웃는 얼굴로 대꾸했다.
“날 바보라고 생각한다면 마음 놓고 싸워요.”
“쳇.”
윤하월은 신경질적으로 혀를 찼다. 어째 오십 명이 단상에 있던 때보다 상황이 더 지저분해졌다.
“그래서 이제 어쩌자는 거요? 보아하니 당신들이 먼저 싸우려 들 것 같지도 않은데.”
“확실히 상황이 미묘하군.”
“이렇게 하는 건 어떻겠어요?”
살며시 일어난 요태희가 나풀거리는 걸음으로 정천의 옆으로 갔다. 그녀는 슬며시 정천과 팔짱을 끼고서는 말했다.
“이 소협과 내가 한편이 되고, 그쪽의 두 분이 한편이 되어 싸우는 거지요. 누가 뒤통수를 칠지 걱정하는 것보단 차라리 편을 맺어 싸우는 게 나을 것 같군요.”
“둘씩 편이 되어 싸우자고?”
윤하월이 내키지 않는 듯 중얼거렸다. 검왕과 한판 붙어야 할 판에 그와 편이 되란 말인가?
‘하지만…….’
합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가장 이상적인 형태이기도 했다. 어찌 됐든 우군으로 둔다면 검왕이야말로 최고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태희는 속을 알 수 없는 여자고, 정천은 검왕보다도 싫은 놈이었다.
게다가 실력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최강. 저 두 사람도 상당히 뛰어날 테지만 검왕의 비교 대상은 아닐 터였다.
승리만을 우선한다면 이보다 좋을 수도 없었다.
“나쁘진 않은 것 같은데…….”
말끝을 흐리는 윤하월. 일단은 다른 이들의 반응을 살피자는 생각이었다.
“난 됐소. 혼자가 편하거든.”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정천이었다. 곧이어 검왕 역시 선선히 웃으며 말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 차라리 홀로 나머지 셋을 상대하는 게 편하겠네.”
“큭!”
윤하월이 침음했다. 한순간이나마 협력을 생각했던 자기 자신에게 자괴감이 들었다.
“후후후. 그런가요?”
요태희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웃었다. 그녀는 팔짱 끼었던 손을 살며시 빼고는 정천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래도 누가 천무의 주인으로 적합할지는 대강 보인 듯하군요.”
“크으……!”
윤하월이 이를 가는 가운데 그녀가 선언했다.
“저는 이만 기권하겠어요.”
“뭐야?”
윤하월이 깜짝 놀랐고 정천 역시 눈을 둥그렇게 떴다. 검왕에 거의 필적할 것으로 보이던 그녀가 너무 허무하게 포기를 한 것이다.
검왕만큼은 그 가운데에서도 빙그레 웃고 있었다.
“그런가. 알겠네. 수고하셨네. 앞으로도 옆에서 본좌를 도와주었으면 좋겠군.”
부드럽게 웃은 요태희가 대꾸했다.
“그런 말씀은 맹주가 되신 다음에나 하시지요.”
“본좌는 기필코 천무맹주가 될 것이야.”
“아직은 모르는 일이에요.”
요태희는 정천에게 눈을 징긋해 보이고는 홀가분히 단상을 내려갔다.
정천은 왠지 찝찝한 눈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욕심이 없다는 건 그렇다 쳐도 호승심마저 없단 말인가?
검왕이 정천의 의문을 해소해 주었다.
“그녀는 오래 싸울 수 없는 몸이야. 계속 있었다면 필시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을 것이네.”
“오래 싸울 수 없다고요?”
“선천적인 지병이 있지. 그녀가 전력으로 싸울 수 있는 건 하루에 일각 정도뿐일 걸세.”
정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아까 전에도 요태희는 그리 적극적으로 전투에 나서지 않았다. 오직 다가오는 적만을 쏘아 맞추었을 뿐.
“흥. 결국은 약하다는 것 아닌가. 자신이 패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미리 꼬리를 내린 것 아닌가.”
윤하월이 이죽거리며 청룡창을 쥐었다.
“약하기에 패배했다. 그것이 진실이오. 기권을 하든 피떡이 되어 쓰러지든 패배했다는 사실만은 차이가 없지.”
“뭐, 그럴지도 모르지.”
정천은 의외로 순순히 수긍했다. 그것은 검왕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패배했네.”
“훗, 역시 본심들은 그런 것…….”
“하지만.”
윤하월의 말을 자른 검왕이 말했다.
“패배했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를 업신여기는 건 좋지 않은 버릇일세. 한 번도 패자가 되지 않는 자는 세상에 없으니까.”
“흥. 우스운 소리로군.”
코웃음을 친 윤하월이 소리쳤다.
“승리하고 또 승리한다면 될 일이오. 패자가 되지 않는 자는 없다고? 그것이야말로 패자들의 희망 사항에 불과하오.”
“그럴지도 모르지. 넌 거기에 포함되지 않겠지만.”
“뭐라고?”
정천은 더 말할 것 없다는 듯 기수식을 취했다. 풍심권. 극한의 속도로써 승부를 보겠다는 의미였다.
“흥. 건방진 놈, 보법 좀 유별나다고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눈으로 좇을 수 없을 정도의 쾌속. 그 비밀은 보법에 있을 것이라 윤하월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정천이 펼친 보법은 궁극보라고도 불리는 천마보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무공은 보법이 전부가 아니다. 그리고 풍신창왕 윤하월은 보법뿐 아니라 창법에서도 극쾌를 추구하는 인물이었다.
‘속도 싸움에선 지지 않는다.’
윤하월이 그렇게 되뇔 때였다.
스윽.
검왕 역시 태천검을 들어 자세를 취했다.
윤하월을 겨냥한 채로.
“……이런 개자식들!”
상황이 더러워졌다. 윤하월은 두 사람을 번갈아 노려보며 분통을 터트렸다.
“입으로는 잘도 떠들더니 결국은 이건가! 두 놈이 손을 잡고 나를 쓰러트리겠다는 것이냐?”
“그러니까 말본새를 곱게 해야지. 그렇게 지껄여대면서 대접받으리라 생각했나?”
“동감일세. 미안하지만 자네는 말이 너무 많아.”
“비겁한 놈들!”
포효하듯 욕설을 뱉은 윤하월이 검왕에게 짓쳐 들어갔다. 상황이 이렇게 됐어도 끝끝내 굽히지는 않는 그였다.
“마지막까지도 꼿꼿하군. 그래서 내가 자네를 좋아한다네.”
“닥쳐랏!”
콰과과과!
청룡창이 돌풍처럼 회전하며 검왕의 목젖을 노리고 들어갔다. 정면으로 받았다간 호신강기조차 갈가리 찢어 버릴 위력이었다.
검왕도 그런 무지막지한 공세를 정면으로 받지는 않았다. 그는 자세를 낮추는 동시에 태천검을 빠르게 휘둘러 청룡창을 비껴 보냈다.
“흥!”
윤하월은 당황하지 않고 청룡창의 궤도를 비틀었다. 정면으로 쇄도하던 창날이 삽시간에 아래로 방향을 바꾸었다.
검왕 역시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그의 태천검은 이번에도 흐르는 물처럼 청룡창의 공세를 흘려보냈다.
그야말로 윤하월의 창법과는 상극.
자연검까지 선보이지 않았음에도 검왕의 방어는 완전무결해 보였다.
차차차창! 따앙!
눈으로 쫓기 힘들 정도의 공방이 이어졌다.
윤하월은 한순간도 쉬지 않겠다는 듯 무섭게 몰아쳤고, 검왕 역시 한 치의 빈틈도 내주지 않은 채 무섭도록 방어해 냈다.
질풍 같고 철벽같은 두 사람의 성미가 그대로 드러나는 광경.
정천은 끼어들지 않은 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물론 가만히 앉아 이득만 볼 생각은 아니었다.
“백초 지나면 제가 끼겠습니다.”
“그러게.”
한가로운 두 사람의 대화에 윤하월만 열불이 났다.
“개 같은 놈들!”
윤하월의 창강이 한층 강렬해졌다. 그는 정말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는 기세로 청룡창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몰아치는 기세가 한층 강해졌다. 검왕으로서도 쉽게 버티기 힘든 강기의 폭풍이었다.
“할 수 없군.”
검왕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리고 그 순간.
파바바밧!
주변의 공기가 윤하월을 향해 무섭게 쇄도하기 시작했다.
“뭣……!”
윤하월도 이번만큼은 당황했다. 한 번도 당해 보지 못한 공세였던 것이다.
검왕의 검이 휘둘러졌다.
돌풍이 그 뒤를 따라 몰아쳤다.
검왕의 검이 강하게 떨쳐졌다.
흙무더기가 치솟아 무섭게 흩날렸다.
내내 공세를 유지하던 윤하월이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주변 모든 것이 철저하게 그의 공세를 방해하고, 꼼꼼하게 검왕의 움직임을 도왔다.
마치 세상과 외로이 싸우는 듯한 기분.
세상이 검왕을 돕는 듯한 느낌.
‘이것이 검왕 유극태의 자연검인가?’
윤하월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자존심 강한 그임에도 검왕의 경지가 자신보다 우위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지지 않는다!’
윤하월은 아예 방어를 포기했다.
돌무더기가 날아와 몸을 후려치든, 회오리가 몰아쳐 살갗을 찢든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오직 공격! 찌르고 찢고 후려친다!’
윤하월이 다시금 검왕과 팽팽히 맞서 나갔다. 물론 빠른 속도로 상처가 늘어 가고는 있었지만 기세 자체는 검왕마저 능가할 정도였다.
“크아아앗!”
기괴하기까지 한 기합성이 터져 나왔다.
그럴 때마다 윤하월은 한층 기세가 살아서는 야수처럼 맹공을 펼쳤다.
검왕의 표정도 차츰 딱딱하게 굳어 갔다.
제압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윤하월의 저항이 생각보다 거셌다.
‘여기까지 온 이상 적당히 끝낼 수는 없다.’
상처 입고 날뛰는 맹수는 제압할 수 없다. 숨통을 끊든가 자신이 당하거나 둘 중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검왕은 그래야 한다면 응당 숨통을 끊는 쪽을 택할 인간이었다.
‘하는 수 없는가.’
태천검을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엄밀히 말해 자연검을 펼치는 와중에도 의식적으로 손속을 두고 있던 그였다.
그 제약을 해제한다면 단번에 윤하월을 불귀의 객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
검왕이 살의를 드러내려 할 때였다.
“백초 지났습니다.”
정천이 섬전처럼 두 사람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윤하월의 맹공에 준하는 강렬한 기세로.
“으음.”
검왕은 일단 물러나기로 했다. 정천이 과연 어떤 식으로 윤하월을 상대할지 궁금하기도 했고.
정천의 방식은 간단했다.
몰아치는 바람에 똑같은 바람으로 맞서는 것.
카카카캉!
정천의 오른팔이 거칠게 요동쳤다. 어느새 구현된 강룡검이 돌진하는 뱀처럼 사방에서 윤하월에게 쇄도했다.
윤하월 역시 맹렬한 창격으로 그에 맞섰다. 그야말로 한 치의 밀림도 없는 속도였다.
파바바밧.
검과 창이 부딪치는 곳에서 강렬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이른바 튕겨져 나온 강기의 파편.
파편들은 사방으로 몰아치며 모든 것을 파괴했다. 비무대의 바닥이 뜯겨져 나갔고 파편들이 부서지고 갈려서는 흩날렸다.
그야말로 한 치의 물러남도 없는 공방.
정천도 정천이지만 윤하월의 체력과 정신력은 놀랄 만한 수준이었다.
‘아니, 이미 체력은 바닥이 났을 터.’
검왕은 그렇게 확신했다. 실제로 윤하월의 두 눈은 반쯤 풀린 상태였다.
정신을 잃은 채 미치광이처럼 창만을 휘두를 뿐. 지금의 그는 창과 하나가 된 악귀였다.
그런 윤하월을 멈출 방법은 하나뿐.
숨통을 끊거나…….
‘지쳐 쓰러지게 만드는 것인가?’
그제야 검왕은 정천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초월적인 정신력을 지녔다고 해도 몸이 따르지 못하면 그만이었다.
‘그렇다면.’
검왕은 아예 자리를 잡고는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이렇게 된 것, 정천이 시간을 끄는 동안 완전히 회복할 생각이었다.
백초의 공방이 다시 지나갔다.
그사이 운기조식을 마친 검왕이 태천검을 들었다.
“다시 본좌가 맡겠네!”
정천은 미련없이 물러났다. 처음부터 목적은 소모전이었으니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
검왕이 윤하월을 상대하는 동안 정천은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그러나 검왕처럼 운기조식을 취하진 않았다.
곧 끝이 보였던 것이다.
“허억허억…… 허억!”
윤하월은 이제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호흡은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져 있었고 두 다리는 후들거리다 못해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 같았다.
그럴 만도 한 게, 이백초가 넘도록 전력을 다해 공방을 펼쳤던 것이다.
검왕도 태천검을 거두었다. 윤하월에게 한계가 왔음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자네는 정말 대단한 무인일세. 이 정도까지 본좌를 몰아붙였던 인물은 처음이야.”
“나, 나는 지지 않는다. 나는 지지 않아.”
앵무새처럼 중얼거리는 윤하월.
오래전에 의식을 잃은 채, 그저 무의식중에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검왕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자네는 오늘 여기서 패배하네. 바로 이 자리에서 지는 것이야.”
“나, 나는…….”
“패배의 밑바닥에서 다시 기어 올라오게.”
그 말과 함께 검왕이 일장을 날렸다. 윤하월은 변변히 방어하지도 못하고 흉부를 맞고는 널브러졌다.
도합 이백십오 초의 싸움. 천하의 검왕조차도 진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다른 모든 싸움의 시간을 합친 것보다 길었군.”
검왕의 말에 정천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 같진 않군요.”
“음?”
정천이 가리킨 곳을 본 검왕이 입을 살짝 벌렸다.
장유추와 마태륜이 그곳에 있었다.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
장유추의 온몸은 시뻘겠다. 수많은 상흔이 그의 몸에 새겨진 뒤였다.
마태륜 역시 온몸에서 붉은빛 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체내를 난타한 뇌기로 인해 체액이 끓어오르는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조금 전부터 움직이지 않았다. 거의 동시에 정신을 잃은 모양이었다.
아래에서 지켜보던 제갈현이 뒤늦게 손짓을 했다. 의원들과 집행부원들이 비무대 위로 올라왔다.
두 사람과 윤하월이 실려 가는 모습을 보며 검왕이 중얼거렸다.
“본좌는 참으로 행운아로군. 이렇게나 대단한 인재들을 곁에 두었다니 말이야.”
“…….”
“이제는 자네만 남았네. 마지막으로 자네를 굴복시킨 후, 본좌는 새로운 천무맹의 맹주로서 거듭나게 될 것일세.”
정천은 가볍게 숨을 뱉었다.
‘천무맹주라.’
얻을 것 없이 짊어져야 할 것만 많은 자리. 이미 짊어진 것이 너무나 많은 정천으로선 조금도 부럽지 않은 자리.
하지만 기왕 여기까지 온 이상은 끝을 보고 싶었다.
“까짓거, 맹주가 되고 나서 다른 사람을 임명시켜 버리면 되겠지.”
“음?”
의아해하는 검왕을 향해 정천이 피식 웃었다.
“제가 맹주가 된 다음엔 검왕 선배께 곧장 자리를 양도해 드리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본좌를 놀리는 것인가?”
“제게 있어 천무맹주직 같은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는 뜻입니다.”
검왕의 얼굴은 딱딱해진 채 펴질 줄 몰랐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자네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게 남에겐 목숨보다 더한 것일 수도 있네.”
“그렇겠지요.”
“그걸 알면서도 그리 말했다는 것이지?”
“선배께서도 익히 알고 계시잖습니까? 제 방식.”
검왕은 사납게 웃었다. 도발로써 심리를 흔들고, 그로 인해 만들어진 틈을 파고든다. 무인이라기보다는 사냥꾼의 방식.
‘그리고 이제는 그 방식으로 본좌를 사냥하겠다고?’
볼수록 마음에 드는 인재다. 윤하월과 함께 맹주의 양 날개가 되어 줄 수 있으리라.
그렇기에 더더욱 그를 쓰러트리고 싶었다. 갖기 위해선 굴복시켜야 했으니까.
스스스스.
검왕의 주위로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자연검의 조화가 또다시 시작된 것이었다.
“자네를 무릎 꿇리고야 말 것이네.”
검왕이 선언하듯 말했다. 정천 역시 강룡검을 거세게 쥐었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그들을 중심으로 거대한 회오리가 생기고 있었다. 두 사람이 흘린 기세가 주변으로 몰아치고 있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모두가 곧 결착이 날 것임을 예감했다.
* * *
“클클클, 드디어 도착했는가.”
멸살독마는 두 눈을 희번덕거렸다. 섬서성의 비옥한 농토가 그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제 황룡성까지는 열흘 거리.
그들이 이끌고 온 파멸의 풍문은 그보다 약간 빨리 천무맹을 강타할 것이다.
“클클클, 이건 너무 간단한 일이 아닌지 모르겠구먼.”
이곳까지 오는 동안 일곱 개의 마을을 불사르고 십여 개의 문파를 멸문시켰다.
그나마 그조차도 최대한 조용히 움직이기 위해 주의한 결과였다.
“허무할 정도로 쉬운 진군이었다. 부디 지금부터라도 고난이 존재하기만을 바랄 따름이다.”
나직이 중얼거린 멸살독마가 명령했다.
“전진한다. 이대로 독기를 품은 바람을 황룡성 대문까지 날리자꾸나.”
멸살독마 휘하의 일천 병력, 섬서성에 당도.
그 뒤를 따르는 마교의 본대는 사천성에서 동진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