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三章 몰아치는 바람 (63/146)

第三章 몰아치는 바람

묵직한 충격이 참가자들을 휩쓸었다.

평범한 비무회가 아니리라고는 생각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일대일의 대결이 될 거라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검왕이 말한 방식은 그런 점잖은 것이 아니었다.

주변의 모두가 적. 협공에 당할 수도 있고 암습에 쓰러질 수도 있다. 이건 비무가 아니라 차라리 전쟁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그 말은 곧…….”

질문을 꺼낸 이는 장유추였다.

“연합도 가능하다는 말씀이신가?”

“그렇소.”

검왕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최후에는 결국 결착을 내야 하겠지.”

“으음.”

장유추가 침음했다. 다른 이들의 생각 역시 별반 다르진 않았다.

그러나 불만을 제기하기도 애매했다.

이런 방식이라면 필시 가장 강한 이들이 첫 번째 목표가 될 터. 그렇다면 가장 불리한 사람은 누가 뭐래도 검왕이었다.

“혹시 수하들을 참가시킨 것은 아니오? 그들이 당신과 연합한 후 적수들을 모두 탈락시키면 맹주직은 고스란히 그대의 것이 될 것 아니오?”

누군가의 물음에 검왕이 피식 웃었다.

“그렇다면 살펴보시오. 주변에 과연 본좌의 수하가 있는지 말이오.”

“몰래 매수하거나 위장시켰을 수도 있지 않소?”

“그런 일은 결단코 없었다고 천지신명께 맹세할 수 있소.”

“나와 군사가 보증하리다!”

단상 아래에서 남궁운이 소리쳤다. 그까지 그렇게 말한다면 음모는 없다는 의미였다.

검왕은 중천에 뜬 해를 힐끔 살펴보고는 자신의 검을 땅에 꽂았다.

“자리를 잡고 태세를 갖출 여유를 주겠소. 정확히 태천검의 그림자가 사라질 때 황룡회를 시작하겠소.”

명검칠존이자 검왕의 반려인 태천검.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참가자들은 정신이 번쩍 뜨이는 걸 느꼈다.

“흥. 대략 일각쯤 남았군.”

코웃음 치며 중얼거린 윤하월이 청룡창을 땅에 꽂고는 그대로 드러누웠다. 마치 나들이라도 온 것인 양 태평한 모습.

궁후 요태희 역시 다소곳이 자리에 앉았다. 차라도 한 잔 하려는 듯 태평한 모습이었다.

“우리도 쉬죠.”

정천이 장유추에게 말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장유추는 못 당하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자네나 저 인간들이나 제정신이 아니군.”

“힘을 비축하려는 겁니다. 쓸데없이 긴장하기만 하다간 싸우기도 전에 진이 빠질 테니까요.”

“흠. 하기는 그도 그렇군.”

장유추 역시 호방하게 자리에 앉고는 검왕에게 소리쳤다.

“뭐 좀 먹고 있어도 되겠소?”

“일각 안에 처리할 수 있다면.”

씩 웃은 장유추가 단상 아래에다 소리쳤다.

“술상 하나 다리 휘도록 가져오게!”

몇몇 참가자들이 기가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장유추가 의기양양하게 중얼거렸다.

“이쯤은 되어야지 다른 놈들의 기를 죽일 수 있지 않겠나?”

“큰 효과가 있을 것 같진 않은데요.”

“그건 나도 동감이네.”

실제로 참가자들은 장유추의 허풍에도 크게 질리진 않았다.

이 자리에 올라왔다는 건 검왕이 인정했다는 거나 마찬가지, 하나같이 보통이 아닌 실력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때 여자애 하나가 단상 위로 쪼르르 올라왔다. 술병을 들고 오는 아이는 소윤이었다.

소윤은 곧장 장유추에게로 가서 술병을 내밀었다.

“여기요. 술상 같은 건 없으니까 이거나 드시래요.”

“안주는 하나도 없는 게냐?”

“당과라도 드릴까요?”

둘의 대화에 검왕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의외의 걸물이 화륜문에 있었군.”

소윤은 검왕을 힐끔 보고는 돌아 내려갔다.

장유추에겐 질리지 않았던 이들도 이번만큼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때 젊은 도사 하나가 정천에게 다가왔다.

“오랜만입니다, 정 대협.”

“응?”

젊은 도사를 돌아본 정천이 힘겹게 그 이름을 기억해 냈다.

“무당의 윤평, 맞나?”

“기억하고 계셨군요.”

윤평이 미소를 지었다. 모용린과 더불어 용봉소회의 수장 자리를 맡고 있던 사내가 바로 그였다.

정천은 약간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여기까지 왔다니, 내 생각보다도 대단한 고수였던 모양이군.”

실제로 모용린 정도는 십초 안에 거꾸러트릴 수 있는 고수들만 모인 곳이 이 자리였다. 그런 곳에 어린 윤평이 끼었다는 분명 대단한 일이었다.

윤평은 겸손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문파의 위명 때문입니다. 제 본연의 실력만으론 어림도 없었겠지요.”

“검왕 선배가 문파 이름에 쫄아 사람을 택할 리는 없겠지. 네 실력에 자신을 가져도 좋을걸.”

“과찬의 말씀입니다.”

윤평은 정천의 몸을 한차례 훑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는 정 대협이야말로 본연의 실력을 숨기고 계셨었군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거든.”

“알겠습니다. 여하간 서로 최선을 다해 봅시다.”

목례를 한 윤평이 걸음을 떼어 멀어졌다. 아무래도 정천과 바로 붙기는 싫은 모양이었다.

술병 하나를 완전히 비운 장유추가 혀를 찼다.

“저 친구도 바보로군. 자네 옆에만 붙어 있다면 꽤 오래 버틸 수 있을 텐데.”

“그럴 리가요. 곁에 있었다면 봐주지 않고 떨어트렸을 겁니다.”

“허, 그런가?”

픽 웃던 장유추는 정천의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마, 노부도?”

“예.”

“에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그래도 힘을 합치는 편이 나을 텐데.”

“전 전력을 다할 겁니다.”

장유추가 입을 다물었다.

두렵지는 않았다. 정천과 전심전력으로 싸울 수 있다면, 비록 깨진다손 쳐도 후련할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노부가 말했었지. 어떻게든 자네에게 힘이 되겠다고 말이야.”

“그랬었죠.”

“그렇기에 노부는 자네와 맞붙지 않을 걸세. 허나 그럼에도 자네가 노부와 싸우려 든다면.”

장유추는 벌떡 일어났다.

“노부가 자리를 피하는 수밖에.”

정천의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숙였다. 장유추는 한마디를 남기고서 걸음을 옮겼다.

“승리하게.”

약간의 시간이 더 흐른 뒤, 검왕이 운을 뗐다.

“시간이 되었군.”

스르릉.

바닥에 박혔던 태천검이 뽑혀 나왔다. 그 순간 비무대 위의 모두가 시작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지금부터 황룡회를 시작하겠소.”

파바바밧!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윤하월과 현상성이었다. 윤하월은 청룡창을 뽑아 듬과 동시에 한 바퀴 회전하며 횡으로 길게 그었다.

“차앗!”

촤촤악!

원형으로 뿜어져 나온 창기가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갔다. 미처 대응 못한 몇몇이 팔다리에 상처를 입고는 밀려났다.

현상성은 앉은 자세 그대로 땅을 주먹으로 쳤다. 그와 함께 무형의 파장이 그를 중심으로 퍼졌다.

왈칵!

가까이 있던 무인들의 코와 귀로 피를 쏟았다. 원륜영파(圓輪影波)의 기세가 내부에서부터 몸을 진탕시킨 것이었다.

다른 곳에서도 벼락같은 기습들이 펼쳐졌다. 시작하자마자 참가자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크으윽!”

“컥!”

그중 치명상을 입은 이는 두어 명. 그러나 경상에 그친 이들도 상황이 좋진 않았다.

상처 입은 짐승이야말로 먹잇감이 되기 편했으니 말이다.

과연 그들은 검왕보다도 먼저 사냥감이 되었다. 비교적 멀쩡한 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협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차차차창!

“크으, 비겁한 놈들!”

“하나씩 정정당당하게 덤벼라!”

“흥! 웃기는 소리!”

“이 마당에 비겁이고 정정당당이고가 있을까 보냐!”

곳곳에서 병장기가 연신 부딪쳤다.

몰리는 자의 분통 어린 목소리와 몰아붙이는 자의 신명이 난 목소리가 어우러졌다.

“크으윽!”

“커억!”

하나둘 단상 아래로 굴러떨어지기 시작했다. 이 추세로는 한 시진이 지나기도 전에 황룡회가 끝이 날 것만 같았다.

그 와중.

검왕의 행보를 지켜본 이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

“무, 무슨 짓을?”

검왕은 비무대 끝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고는 그야말로 극단, 한 걸음만 내딛어도 장외가 되어 버리는 위치에서 멈췄다.

이윽고 자리에 주저앉는 검왕.

여유가 넘치다 못해 도발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크윽!”

“우릴 우습게 보는가!”

몇몇 무인들이 분개하고 있을 때,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과연 검왕, 재미있는 생각을 하셨군요.”

궁후 요태희였다.

그녀는 검왕과 정반대에 위치한 끄트머리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검왕과 마찬가지로 살포시 주저앉았다.

보는 입장에선 어이가 없다 못해 웃음이 나올 지경.

그것을 본 윤하월이 이를 갈았다.

“정신 나간 늙은이들, 제 잘난 맛에 끝까지 멋을 부리고 앉았군.”

그렇게 중얼거리는 와중에도 덤벼드는 무인 둘의 합공을 가벼이 막아 내는 그였다.

그걸로 끝이 아니라 반격하여 두 사람의 가슴에 기다란 창상(創傷)을 내었다.

“으윽!”

“큭!”

치명상을 입은 그들이 비틀거렸다. 이리 떼처럼 기회를 노리던 다른 무인들이 그들에게 덤벼들었다.

그사이 윤하월은 검왕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받아 보시오, 유극태!”

촤아앗!

청룡창의 아가리가 짙푸른 창강이 뿜어냈다. 보는 이가 눈이 멀 정도로 시린 빛줄기가 검왕을 향하여 질풍처럼 쏘아졌다.

검왕의 두 눈이 번뜩였다.

휘릭!

앉은 자세에서 곧바로 일어난 그가 몸을 회전시키며 태천검을 휘둘렀다.

백색의 검강이 뿜어져 나와서는 윤하월의 창강을 향해 올곧게 나아갔다.

콰앙!

두 기운이 충돌하며 엄청난 빛을 뿌렸다. 그 충돌에서 떨어져 나온 강기들이 사방으로 쏟아졌다.

파바바밧!

“크아악!”

“으악!”

간접적으로 강기에 노출된 이들의 몸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직접 맞은 것도 아니고 떨어져 나온 기운일 뿐인데도 이 정도 위력. 과연 정파 최강의 무인들이라 할 만한 그들이었다.

“재미있군. 나도 어우러져 볼까!”

호기롭게 외치며 끼어드는 이는 장유추였다.

애초부터 정천을 위해 싸우기로 한 그였기에, 최고 적수라 할 수 있는 윤하월과 검왕을 노리게 된 것이다.

“울어라, 뇌도여!”

빠지지직!

강렬한 섬전이 장유추의 몸 위로 떨어졌다. 그의 절정신공인 천뢰강림이 펼쳐진 것이다.

“대단하군.”

검왕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천뢰강림을 몸에 두른 장유추는 그조차도 긴장하게 할 정도로 강대했다.

“쳇.”

윤하월 역시 쓴맛을 느끼며 청룡창을 거뒀다. 검왕이라면 모를까, 장유추는 상대하긴 까다로운데 쓰러트려 봐야 좋을 게 없는 상대였다.

“낄 데 안 낄 데 가리지 못하시는군. 선배와는 나중에 상대해 드릴 테니 물러나시오.”

“그럴 수야 없지. 너를 내버려 뒀다가 좋을 게 없을 것 같거든.”

싸울 수밖에 없나. 윤하월은 쓴맛을 느끼면서도 청룡창을 고쳐 쥐었다.

그러나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후후, 안 됐구려. 아무래도 선배의 상대는 따로 있는 모양이오.”

“음?”

그 순간 마태륜의 쌍도가 후방에서부터 장유추를 노리고 들어왔다. 장유추는 아슬아슬하게 몸을 굴려 쌍도를 피했다.

“큭.”

등이 살짝 긁혀 피를 쏟아 냈다.

그래도 피했기에 망정이지, 좀만 깊이 베였더라면 등뼈가 드러났으리라.

몸을 일으킨 장유추가 으르렁거렸다.

“빌어먹을 놈. 결국은 해 보자는 것이냐?”

“…….”

일언반구 대답도 없이 몰아치는 마태륜이었다. 장유추는 할 수 없이 그에 맞서 광천뇌도를 휘둘러 갔다.

궁후 요태희의 전투는 간단했다. 앉은 자세 그대로 독문병기 아랑궁의 시위를 튕겨 줄 뿐이었다.

화살 없는 활.

그러나 그녀의 손가락이 닿는 순간, 형형색색의 개성을 지닌 화살들이 탄생하여 날아갔다.

이른바 천해랑사(天海狼射).

동쪽에서부터 전해져 왔다는 궁극의 궁술은 그녀의 반경 십 장 내로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파밧! 팟!

“크으윽!”

“으음!”

기운으로 이루어진 화살에 적중당한 무인들이 침음하며 물러났다.

호신강기를 둘렀음에도 궁후의 화살은 어김없이 꿰뚫고 들어왔다.

그럼에도 그들이 죽지 않는 것은 모두 요태희의 인정 덕분. 그녀가 일부러 기운을 조절하고 있다는 것은 한 발만 맞아 봐도 알 수 있었다.

“나, 나는 포기하겠소.”

“아무래도 더 싸우긴 힘들겠군.”

그렇게 포기하고 내려가는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요태희는 멀어지는 그들의 뒤에 나직이 한마디를 건넬 따름이었다.

“수고하셨어요.”

정천 역시 자신만의 방식으로 싸워 가고 있었다. 그 방법이란 그가 가장 좋아하는 방식이었다.

난전(亂戰).

검왕이나 윤하월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요태희처럼 깔끔하지도 않으며 현상성이나 장유추처럼 압도적이지도 않다.

그저 주변에서 난무하는 병장기를 피할 뿐. 동시에 사거리에 들어오는 적에게 권각을 뻗을 뿐.

어찌 보면 정천이야말로 가장 힘을 아끼고 있는지도 몰랐다.

퍼퍼퍽!

파박!

주먹질 하나, 발길질 하나가 펼쳐질 때마다 어김없이 뼈가 부러지고 살이 뭉개졌다. 죽을 정도는 아니라지만 계속 싸우긴 힘들 정도의 타격을 착실히 주고 있는 정천이었다.

그렇게 싸워 나가다 보니 결국은 윤평과 마주치게 되었다.

윤평은 나직이 심호흡을 하고는 말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요.”

“모인 사람이라 해 봐야 겨우 오십 명이니, 언젠가는 붙을 수밖에 없지.”

“그렇겠지요.”

검을 뽑아 든 윤평이 자세를 낮췄다.

“잘 부탁드립니다.”

“싸울 땐 일일이 예의 챙기지 마.”

정천의 몸이 화살처럼 쏘아졌다. 그 선봉에는 권기가 둘러진 주먹이 자리하고 있었다.

“흡!”

기합을 뱉으며 윤평이 찌르기를 시도했다. 그의 나이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빠르고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쉬릭!

정천의 몸이 아래로 미끄러졌다. 그의 주먹이 아슬아슬하게 윤평의 칼날을 피해 지나갔다.

퍼억!

복부를 직격당한 윤평의 몸이 기역 자로 꺾였다.

“끄윽……!”

윤평은 거품을 문 채 그대로 혼절했다. 정천은 피식 웃고는 그의 몸을 비무대 밖으로 던졌다.

“꽤 훌륭했어. 상대가 안 좋았을 뿐.”

* * *

결국 이각이 채 지나기 전에 비무대 위가 깨끗해지고 말았다.

남은 사람은 스무 명 남짓. 그중 치명상을 입은 이들 역시 상당수였다.

“흥. 강단이 있는 것들은 겨우 이 정도로군.”

윤하월의 한마디였다.

그는 그때까지도 검왕을 상대하고 있었다.

물론 서로가 전력을 다하지 않은 싸움이었다. 힘을 아끼며 싸우는 탐색전인지라 두 사람 모두 상처 하나 없었다.

“잠깐 좀 쉽시다.”

윤하월의 말에 검왕이 피식 웃었다.

“벌써 지쳤는가?”

“그럴 리가 있겠소? 총력전은 잔챙이들부터 걸러 낸 다음 하자는 겁니다.”

청룡창을 거둔 윤하월이 비무대 중앙으로 향했다. 뻔뻔스러울 정도로 당당이 등을 드러낸 채.

일순 기습할까 하던 검왕이 고개를 저었다.

‘저렇게까지 뻔뻔해서야 존중해 줄 수밖에 없잖나.’

안하무인이고 자존심 강하고 성격도 더러운 윤하월이지만, 그 자부심 하나만큼은 검왕의 마음에 쏙 들었다.

비무대 중앙에 선 윤하월이 주변을 둘러봤다.

장유추는 온몸에 검상을 입은 상태였다. 울룩불룩한 그의 거체 위로 뱀들이 기어 다닌 듯한 상처가 곳곳에 나 있었다.

그의 상대인 마태륜은 비교적 멀쩡한 모습.

그러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만은 어쩌지 못했다. 천뢰강림의 뇌기가 뼛속까지 스며든 까닭이다.

‘흥. 저것들은 곧 양패구상하겠군.’

이윽고 그가 바라본 이는 궁후 요태희였다.

위명에 걸맞게 상처 하나 입지 않고 느긋하게 앉아 있는 모습. 지켜보는 윤하월이 치가 떨릴 정도였다.

‘어쩌면 검왕 이상으로 까다로운 상대일지도.’

다음은 현상성이었다.

장유추를 아득히 넘어서는 거구답게, 그 역시 수많은 무인들의 목표물이 되었다.

장유추만큼은 아니더라도 몸 곳곳에 상처를 입은 모습이었다. 그중 어느 것도 치명상은 아니었지만.

‘끈질긴 녀석. 저놈도 처리하려면 상당히 까다로울 테지.’

정말 상대하기 싫은 놈들만 남았다. 하기야 그 자체가 저들의 강함을 입증하는 것이리라.

그래도 느긋하게 주변을 살피던 윤하월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네놈…….”

정천이 비무대 한곳에 느긋하게 서 있었다. 피로 범벅이 된 채.

윤하월은 이내 그게 모두 적들의 피라는 것을 깨달았다. 정천 역시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은 것이다.

“송사리들만 상대하고 있었나 보구나.”

정천이 피식 웃었다.

“누가 상대든 이기기만 하면 그만이니까.”

“흥. 구질구질하게 잔머리를 굴리는군.”

“누구처럼 잘난 척하다가 진을 빼는 것보단 나으니까 말요.”

그게 누구를 가리키는 건지는 안 봐도 뻔한 일. 윤하월이 뿌드득 이를 갈았다.

“재잘재잘 떠드는 것도 이것으로 끝이다! 네놈은 지금 본좌가 끝장을 내 줄 테니 말이다!”

“괜찮겠소? 설렁설렁 싸웠다지만 검왕 선배를 상대하느라 힘이 좀 들었을 텐데.”

“걱정할 것 없다! 그 정도 손해쯤 감수하더라도 네놈을 상대하는 데엔 문제가 없으니까.”

“그래 보이는군.”

순순히 동의한 정천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내가 납득할 수 없거든.”

“뭐야?”

정천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 순간 윤하월뿐 아니라 잠시 숨을 돌리며 두 사람을 지켜보던 이들 역시 경악했다. 짧은 순간 정천이 그들의 안력마저 따돌리고서 움직인 것이다.

실로 섬전 같은 속도!

정천은 다음 순간 현상성의 앞에 나타났다.

“한번 붙어 봅시다.”

“뭣……?”

대답 대신 정천의 일권이 펼쳐졌다. 땅을 깊게 밟으며 내지르는 혈권절도세(血拳絶道勢)의 수식!

현상성은 그 커다란 몸을 뒤로 물렸다. 육체의 내구력만 믿고서 어쭙잖게 받아넘길 공격이 아니었다.

일격은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그러나 곧장 이어지는 이, 삼격.

현상성의 몸 곳곳에서 격타음이 터져 나왔다.

퍼퍼펑! 퍼펑!

“크읏!”

육중한 거구가 비틀거렸다. 상당히 체력이 빠져 있다고는 해도, 섬서일권으로 불리는 그가 속절없이 당하고만 있었다.

“이익, 건방진!”

내내 격타당하던 현상성이 내력을 끌어올렸다. 그의 장기인 원륜영파를 펼치려는 것이었다.

“받아랏!”

현상성의 두 주먹이 허공을 격타했다. 그 순간 그의 주변이 아지랑이처럼 일그러졌다.

원륜영파의 궁극식이 펼쳐진 것이었다.

기본식은 땅이나 바닥 같은 매개체를 통해 내파를 쏘아 보내는 것. 그 궁극식은 공기를 통해 내파를 뿜어내는 것이었다.

일종의 파장, 즉 떨림이기에 단순한 호신강기로는 보호가 불가능하다.

게다가 그 위력은 단련할 수 없는 내장과 안구 등을 모조리 파괴해 버리는 살권의 극치!

방어법은 없다. 파장이 비교적 약해지는 먼 곳으로 피하는 게 최선.

실제로 모두들 현상성보다 조금이나마 멀리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내내 여유롭던 검왕이나 궁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녀석은?’

정천의 반응을 살피던 현상성이 눈을 부릅떴다. 그것은 윤하월도 마찬가지였다.

“저런 미친놈!”

정천은 도리어 원륜영파의 정면으로 뛰어들었다. 잠시 후 체내가 진탕이 되어 검붉은 피를 쏟아 내게 될 터.

그때 정천의 몸 주변도 아지랑이처럼 일그러졌다. 그 순간 그의 오른팔에서 흑색 기운이 뿜어져 나온 것은 검왕만이 알아볼 수 있었다.

“뭣……!”

현상성이 기겁하는 순간, 정천의 신형이 화살처럼 날아와 복부에 꽂혔다.

“크으으윽……!”

비대한 그의 거구가 이내 고꾸라졌다. 코와 귀를 피를 쏟아 내게 된 것은 오히려 그였다.

“놈이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윤하월의 의문을 검왕이 풀어 주었다.

“압도적인 힘으로 파형 자체를 깨트려 버렸네.”

“그런 게…… 가능하단 말이오?”

단순한 힘의 문제가 아니다. 윤하월 본인이 전력을 다한 창강을 발출한대도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그것은 검왕 역시 마찬가지.

“아무래도 저 친구에겐 비장의 절기가 있는 모양이군. 그것도 무공과는 궤를 달리하는 무언가가 말이야.”

“무공과는 궤를 달리한다?”

“그렇다고밖엔 볼 수가 없군.”

검왕이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을 때, 현상성을 장외로 내던진 정천이 입을 열었다.

“하나.”

스륵!

그의 모습이 다시금 사라졌다. 이번엔 부상당해 주저앉아 있는 어느 검객의 앞이었다.

“어, 어엇!”

대처하기도 전에 검객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그가 장외로 떨어진 순간 정천이 중얼거렸다.

“둘.”

또다시 사라지는 신형. 격타당해 쓰러지거나 손도 못 쓰고 내던져지는 무인들.

“셋, 넷, 다섯.”

잠시 후 비무대 위에 남은 것은 정천과 검왕, 윤하월과 요태희, 장유추와 마태륜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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