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二章 황룡회의 시작 (62/146)

第二章 황룡회의 시작

정천은 자신의 방으로 백미련을 불렀다.

평소 그녀를 대하기가 껄끄러운 그였으나, 이번만큼은 밤을 새어 얘기를 나눠야 할 듯했다.

“저들도 마라혈천이겠지?”

“그래.”

“혈선이 기른 아이들이라기에 너와 비슷한 또래일 거라 생각했는데, 개개인의 편차가 있는 모양이군.”

“물론이야. 게다가 저쯤 나이를 먹은 이들이라 해도 혈선들의 기준에선 아이나 다름없지.”

“저번엔 대부분 네 또래라고 했던 것 같은데.”

“엄밀히 말해 그 둘은 정찰대야. 그렇기에 굳이 젊은 몸이 아니더라도 능력을 백분 발휘하는 게 가능하지. 반면 우리는 전투 및 암살을 해야 하는 입장이니, 젊고 강한 몸을 필요로 하지.”

들을수록 치가 떨리는 무리다. 정천은 미심쩍은 눈으로 백미련을 보았다.

“그게 두려워 저들을 배신한 건가? 너 역시 후대에게 목숨을 내놓아야 해서?”

“내가? 후후후.”

부드럽게 웃은 백미련이 고개를 저었다.

“본후의 목숨 하나 잃는 것은 두렵지 않아. 그리고 위험하기로 치면 마라혈천에 몸담고 있을 때보다도 지금이 더 심하고.”

정찰대의 실력이 그 정도니 백미련의 말이 과장은 아니었다.

정천은 그녀가 얘기했던 이유를 떠올렸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라고 했던가?”

“그래.”

담담히 긍정하는 백미련.

“그게 누구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건가?”

“정말 그대가 듣기를 원한다면. 지금 그대는 그 대답을 꼭 듣고 싶어?”

“그건…… 아닌 것 같군.”

정천은 솔직하게 말했다. 사실 그녀의 목적이 무엇이건 간에 정천이 알 바는 아니었다.

“지난번에 말했었지. 진마동이 그들 혈선에 의해 만들어진 거라고.”

“그래. 정확히는 그들에 의해 불려진 곳이라 해야겠지만.”

“불려졌다는 게 무슨 의미지?”

“문자 그대로야. 소환되었다는 거지.”

“소환?”

고개를 끄덕인 백미련이 말했다.

“중원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들 거야.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실제로 해냈어. 완전히 다른 세상에 속해 있는 공간을 이곳 중원으로 불러낸 거지.”

“그게 무슨…….”

정천의 눈동자가 혼란스러운 듯 흔들렸다.

사람은 누구나 상식에 구속받는 존재다. 그것은 정천이라 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나마 차이가 있다면 경험일 터.

정천은 그 아비지옥의 전경을 두 눈에 담고 돌아왔다. 아니, 고작 그 정도가 아니라 실제 그 지옥 밑바닥까지를 체험하고 돌아왔다.

평범한 중원인이었다면 아예 이해하질 못했을 터.

그러나 정천은 조금씩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정리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복잡한 건 다 떼어 내고 말하지. 결국 놈들이 나락이나 지옥, 그 비슷한 것을 이 중원에 불러냈다는 말인가?”

“비슷해.”

“어째서 그따위 짓을 벌인 거지?”

“그건 혈선 본인들만이 알아. 우리들 마라혈천에게도 한 번도 얘기한 적이 없어.”

“그런데도 너희는 놈들에게 충성한다는 건가?”

“그 외엔 어떤 길도 없었으니까.”

백미련이 쓸쓸한 얼굴로 대꾸했다.

“전대 마라혈천은 후대에게 능력을 전수하면서 목숨을 잃게 돼. 그때 전대의 능력뿐만 아니라 기억이나 감정 등도 후대에게 전달되지.”

“기억이나 감정?”

“그래. 물론 모든 것이 전달되는 건 아냐. 전해지는 건 약간의 편린뿐. 받아들이는 후대 입장에선 거의 대부분 이해할 수 없는 것들뿐이지.”

단순한 이야기에도 흐름이나 맥락이 존재한다.

그중 앞뒤를 다 잘라 낸 한 부분만 떡하니 갖다 놓는다면 이해할 수 없을 터.

후대 마라혈천들이 느끼는 기분이란 상당히 당황스러운 종류일 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만은 분명하게 전달돼. 오랫동안 혈선에 의해 주입되어 온 충성심.”

정천은 천연살의 격한 반응을 떠올려 보았다.

“그럼 녀석이 그때 흥분한 것도…….”

“그대의 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뼛속 깊이 자리 잡은 충성심의 영향이 클 거야.”

“말 그대로 수대에 걸쳐 세뇌되었다는 소리군.”

“그래.”

“하지만 너는 놈들과는 다른 것 같은데?”

“아마 내가 다른 아이들보다 늦게 거두어졌기 때문일 거야.”

정천은 왜 그녀에게서 화산검의 향기가 진하게 났었는지 알 것 같았다.

백미련의 구절검 자체는 화산검과 별다른 접점이 있을 수가 없는 검법이다. 기본적인 부분에서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검에선 매화향이 났다. 자잘한 초식 사이사이에서 화산검의 자취가 느껴졌다.

그녀가 마라혈천이 되기 전에 화산검을 익혔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이가 어느 정도 있을 때 그들에게 끌려갔다는 것이군.”

“그래. 보통은 자아가 완전히 확립되기 전에 혈선들에게 보내지지.”

“그래서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원망했던 건가?”

백미련의 표정이 순간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아버지? 그는 그런 이름으로 불릴 자격도 없어.”

“…….”

“한때 나와 어머니를 버렸던 남자야. 버려진 우리에겐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았어.”

한 단어가 정천의 뇌리를 스쳤다.

‘사생아.’

“어머니는 외롭게 세상과 싸워 나가셨어. 동냥을 하거나 때로는 몸을 팔아 가며 나를 키우셨어.”

그 순간 백미련은 구검절후가 아니라 한 명의 어린아이였다.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아버지를 원망하는.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나타났지. 그리고 어머니에게서 나를 빼앗아 갔어.”

“빼앗아 갔다고?”

“나에 대한 풍문이 돌았던 모양이야. 대화산파의 인물이 사생아를 버렸다는 얘기가 맴도니 울며 겨자 먹기로 날 거둔 거지.”

백운신은 체면을 중시하고 평판에 예민한 인물이었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나도는 것을 가만히 볼 수 없었을 터.

“그랬던 인간이…… 나를 다시 혈선들에게 팔아 버렸어. 한 번도 그자를 좋아해 본 적이 없었지만…….”

백미련의 고개가 떨어졌다. 정천은 그녀의 어깨를 살짝 짚어 주었다.

다시 고개를 든 백미련의 얼굴은 가면처럼 딱딱했다.

“그래서 본후는 그를 죽였어. 본후를 비난하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

물론 정천으로선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런다고 죽은 백운신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었고.

“다른 질문을 하지.”

정천이 화제를 돌렸다.

“혈선들은 그간 묵묵히 천무맹을 배후에서 조종해 왔어. 그러는 동안 수많은 반발도 있었겠고, 어찌 보면 지금과 같은 일도 여러 번 있었을 거야.”

“그랬었지.”

“그런데 그때에도 철저히 자신들을 숨기던 그들이 왜 지금은 모습을 드러내려 하는 거지?”

간단히 생각할 수도 있는 의문이다. 지금만큼의 거센 공격을 받은 적이 없었으리라 생각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왠지 그것뿐일 것 같지는 않았다.

때가 되었다. 그것이 마라혈천들이 공통되게 말해 오던 것이었기에.

백미련의 대답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때가 되었으니까.”

“어떠한 때가 되었다는 거지?”

“그건 본후도 몰라. 그저 혈선들이 그렇게 말했기에 그렇구나 할 뿐이지.”

“마라혈천들은 전혀 모른다는 건가?”

“대부분은 그래. 혈천오강이라면 알지도 모르겠지만.”

“혈천오강? 그게 뭐지?”

“마라혈천 내에서도 가장 강한 다섯 사람.”

“너와 비교한다면 어느 정도 실력이지?”

잠시 머릿속으로 가늠해 보던 백미련이 대답했다.

“서로 전력을 다한다면 본후가 오십초까진 버틸 수 있을 거야.”

“……강하군.”

백미련은 문자 그대로 극강의 고수다. 외팔이가 되어 더욱 강해진 장유추조차 온전한 상태의 그녀를 상대한다면 아슬아슬하게 밀릴 것이다.

그런 그녀가 오십초를 겨우 버틸 수 있는 이들.

그쯤 되는 강자 다섯이라면 대문파 하나쯤은 사흘 안에 멸문시킬 수 있으리라.

“정말 산 넘어 산이군.”

농담조로 중얼거리는 정천. 그 모습에 백미련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도 크게 두려워하진 않는구나.”

“뭐, 어느 정도는 예상했으니까. 도리어 이쯤 되어 주지 않으면 내 쪽이 곤란하지.”

홀가분하게 대답한 정천이 손을 저었다.

“어쨌든 나가 보도록 해. 여기서 더 물어봐야 뭔가를 기대하긴 힘들겠군.”

“그러지.”

역시나 홀가분하게 일어선 백미련이 방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녀는 문지방을 곧장 건너지 않았다.

“……한 가지.”

“응?”

“혈선들이 말했던 게 있어.”

정천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그게 뭐지?”

“진마동은 실패작이었다.”

“실패작이라고?”

“그래. 십 년 전의 그들은 무언가 일을 꾸몄었고, 그 실패의 결과가 진마동이었어. 그리고 이번엔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의지를 갖고 있고.”

그 말을 끝으로 백미련이 방을 나갔다.

정천은 그녀가 사라진 뒤에도 한참 동안을 생각에 잠겨야 했다.

‘놈들은 대체 무엇을 시도하려는 거지?’

* * *

아침이 밝았다. 황룡회의 날이었다.

화연란은 아침 일찍 덥힌 물을 대야에 담아 정천의 방으로 향했다.

“오라버니?”

인기척은 없었다. 정천쯤 된다면 기척을 죽이는 것도 일은 아닐 테지만…….

“그는 지금 방에 없어.”

백미련의 목소리였다.

항상 예기치 못한 때에 나타나는 그녀였다. 처음엔 그 때문에 깜짝깜짝 놀랐던 화연란이지만 지금은 많이 익숙해져 있었다.

“그럼 지금 어디 계시죠?”

“아까 보니 연공실로 향하더군.”

“그렇군요. 알려 주셔서 고마워요, 언니.”

백미련은 어색하게 웃었다. 언니라는 호칭은 몇 번을 들어도 익숙해지기가 쉽지 않았다.

화연란은 대야를 들고 연공실로 향하려 했다. 그런 그녀를 백미련이 다시 말렸다.

“관둬. 지금은 혼자 있고 싶어 할 거야.”

“아, 그런가요?”

“그쯤 되는 사내도 상당히 긴장이 되는 모양이더군.”

화연란의 얼굴에도 숨기고 있던 걱정이 드러났다.

“지금이라도 말려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글쎄. 그가 맹주가 될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보는데. 운이 따르질 않아 맹주가 되지 못하더라도 큰 자리를 얻게 되는 건 당연할 테고.”

“오라버니는 어딘가에 얽매이는 걸 좋아하시지 않는걸요.”

“하지만 앞으로는 혼자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야.”

화연란은 백미련을 똑바로 쳐다봤다.

가끔 보면 그녀가 자신보다도 정천에 대해 더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우리는 오라버니의 짐이 될 수 있겠죠?”

“아마도.”

“그렇다면 도움이 될 길은 없는 건가요?”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고 있지.”

“그게 뭐죠?”

백미련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정말 감당할 수 없는 짐이라면 그가 예전에 벌써 버리고 떠났으리라는 것. 그리고…… 너희는 이미 그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

“준비는 다 됐나?”

연공실로 들어선 장유추가 대뜸 소리쳤다. 묵상에 잠겨 있던 정천이 나직이 눈을 떴다.

“대충은요.”

“밤새 한숨도 못 잔 모양이군. 자네쯤 되는 괴물도 긴장을 하나?”

“긴장해서 그런 건 아닙니다. 사실 요즘은 일각도 잠들어 있을 수가 없더군요.”

“어째서?”

정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동료들이 자주 꿈속에 나타납니다.”

장유추는 입을 다물었다. 이따금 정천의 등 뒤에서 느껴지던 이유 모를 귀기의 실체를 알 것도 같았다.

‘동료들의 망령, 혹은 홀로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인가.’

동료들이 죽은 것은 정천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이 있었기에 정천이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사실.

정천은 이백 인의 목숨을 버팀목 삼아 살아남았다. 그렇기에 살아남은 자로서의 책무가 있었다.

그러한 부담감은 조금씩 마음속에서 부피를 불리고 있을 터.

평소의 촐랑거리는 행동은 모두 그러한 부담을 숨기기 위한 것이리라.

정천이 짐밖에 되지 않는 화륜문을 떠나지 않는 것도 이와 관련됐을 것이다.

지켜야 할 곳이 있다는 것, 가족이 있다는 건 그만큼 큰 버팀목이 되어 줄 테니까.

“자네도 참 피곤하게 사는군.”

“뭐, 그렇죠.”

장유추의 말에 정천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피식 웃은 장유추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가세. 검왕 그 인간의 콧대를 꺾고 이참에 맹주 노릇이나 해 보라고.”

* * *

태극단.

천무맹의 운명을 결정짓게 될 장소.

잠시 후 황룡회가 벌어지게 될 드넓은 광장은 의외로 한산했다. 집행부 무인들에 의해 진입이 통제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에 들어설 자격을 지닌 이는 극히 극소수뿐.

황룡회 참가자 및 그 지인들, 각 문파와 가문의 문주, 가주급 인물들이 전부였다.

“요란하지 않아서 좋군.”

태극단으로 들어서면 정천이 중얼거렸다. 바로 그 옆에서 칠삼이 당부했다.

“못하겠다 싶으면 재빨리 포기하게. 포기할 줄 아는 것도 용기일세.”

“그럴 생각이야.”

정천은 화륜문 식구 모두를 데려온 상태였다. 괜히 장원에 남겨 뒀다가는 습격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백미련의 존재가 걸리긴 했으나, 다행히 집행부 측에선 그녀에 대해 모르는 듯했다. 화산파 역시 잘 모르는 눈치였고.

태극단엔 이미 상당수의 무인들이 모여 있었다.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기세를 뽐내는 이들. 대강 장유추와 필적할 법한 인물만 스무 명이 넘어 보였다.

그중에서도 정천의 눈길을 끄는 사람은 단연 다섯 명. 정천이라 해도 확실히 긴장해야 할 상대들이었다.

우선은 풍신창왕 윤하월이 있었다.

“…….”

“…….”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이윽고 윤하월의 입가가 기다란 호선을 그렸다.

이윽고 정천의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전음.

—죽을 준비는 하고 왔나?

—미안하지만 그런 준비는 지금껏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수다.

—지금부터라도 해야 할걸. 본좌의 청룡창은 적당히란 것을 모르니까.

—그 말, 그대로 돌려 드리지.

—흥.

코웃음을 친 윤하월이 고개를 돌렸다. 정천은 나머지 네 사람을 살펴봤다.

한 사람은 그 풍채부터가 좌중을 압도했다.

마치 녹림채의 채주를 연상케 하는 쭈뼛쭈뼛한 수염과 장정 두 사람이 손을 뻗어도 전부 두르지 못할 것 같은 엄청난 뱃살.

얼핏 보면 체구만 큰 살덩이 같지만 숨기고 있는 실력은 윤하월에 필적할 정도였다.

“저자는 누굽니까?”

정천이 묻자 장유추가 대답했다.

“섬서일권(陝西一拳) 현상성일세. 권법에 있어선 독보적인 존재라 할 수 있지.”

“힘을 중시한 권객입니까?”

“고작 그 정도일 것 같은가?”

정천은 고개를 저었다. 외관처럼 단순히 힘만 센 정도라면 일권(一拳)의 칭호를 얻지 못했으리라.

“그럼 저자는요?”

다음으로 정천이 가리킨 사람은 표독스러운 인상의 사내였다.

어지간한 언월도보다도 아득히 구부러진 기이한 검을 두 자루씩이나 들고 있었는데, 거기에 외모까지 이국적이어서 기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열사도객(熱蛇刀客) 마태륜이군. 저자 역시 조심하는 게 좋아. 무기만 봐도 알겠지만 상당히 변칙적인 도법을 사용한다네.”

“중원의 도법 같지는 않군요.”

“음. 서방의 도법이라는데, 하여간 상대하기가 정말 껄끄럽더군.”

“붙어 본 적이 있습니까?”

“딱 한 번. 솔직히 두 번 붙고 싶지는 않아.”

호승심 강한 장유추가 저리 말할 정도. 그것만으로도 마태륜의 강함이 대강은 짐작이 됐다.

그때 마태륜이 장유추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이윽고 그는 옷깃을 접어 왼팔을 내 보였다.

길쭉하게 이어져 있는 흉터.

쓴웃음을 지은 장유추 역시 오른팔을 내보였다. 뱀이 지나간 듯 구불구불한 형태의 흉터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시선을 치웠다.

“좋지 않군. 아무래도 예전의 빚을 아직 잊지 않고 있는 모양이야.”

“괜찮으시겠습니까?”

“여기까지 온 이상 꼬리를 말고 도망칠 수도 없잖나. 차라리 잘됐다 싶군.”

고개를 끄덕인 정천이 다른 쪽으로 눈짓을 했다.

“저자에 대해서도 알고 계십니까?”

이번에 가리킨 사람은 부드러운 인상의 여인이었다.

하지만 장유추의 반응은 지금까지 중에서도 가장 격했다.

“젠장! 저 여자까지 나타났단 말인가?”

“아는 사람인가 보군요.”

“궁후(弓后) 요태희일세. 검왕과 마찬가지로 유일하게 궁후의 이름을 허락받은 사람이지.”

그 말만으로도 충분히 설명이 되는 듯싶었다.

실제로 여인은 등에다 상아로 만들어진 거대한 활을 매고 있었다.

“쥐 죽은 듯 은거하고 있던 인간이 아랑궁(牙狼弓)까지 챙겨 들고 나왔군. 오늘이 확실히 날은 날인 모양이구먼.”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 듯 심호흡을 크게 하는 장유추였다. 정천 역시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정천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한곳을 향했다.

검왕 유극태가 한 치 흔들림 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잘 지냈나?

—그럭저럭 지냈습니다. 검왕께서는?

—본좌도 그렇다네.

검왕이 돌연 미소를 지었다.

—본좌는 맹주가 될 것일세.

—고생 좀 시켜 드리죠.

그 순간 검왕으로부터 희미한 기의 파동이 흘러나왔다. 제삼자는 주의를 기울여도 쉽게 알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한 파동이었다.

그러나 희미한 대신 날카로웠다. 찔리게 되면 심장이 덜컥할 정도로.

정천 역시 일말의 기운을 쏘아 보냈다. 검왕의 파동과는 다른 일직선의 화살이었다.

파앙!

두 기운은 정확히 두 사람의 중앙에서 충돌하여 상쇄됐다. 다른 이들은 느끼지 못할 찰나의 대결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극소수만이 느낄 수 있었다.

“자네……!”

정천의 바로 옆에 있던 장유추와 백미련은 물론, 앞서 정천이 살펴봤던 네 사람이 그러했다. 그 외에도 몇몇이 더 있는 것 같았다.

“후후.”

조용히 웃은 검왕이 걸음을 떼어 멀어졌다. 그와 동시에 초고수들의 시선이 정천에게로 꽂혀 들었다.

“시작부터 너무 눈에 띄는군, 자네.”

장유추의 말에 정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는 동안 군사 제갈현이 단상 위로 올라섰다. 좌중의 시선이 그에게로 몰렸다.

무인들을 슥 훑어본 제갈현이 운을 뗐다.

“황룡회에 들어가기에 앞서 전하고 싶은 말이 있소. 전대 맹주께서 기나긴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셨다는 사실이오.”

좌중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맹주가 깨어난 이상은 황룡회의 정당성이 깨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중 영리한 이들은 제갈현이 ‘전대’라고 표현했음을 놓치지 않았다.

“그와 별개로 황룡회는 속개될 것이오. 이후의 말씀은 전대 맹주께서 이어 하실 것이오.”

과연 남궁운이 제갈현의 옆으로 올라섰다. 길었던 혼수상태 때문인지 몸이 상당히 야윈 모습이었다.

그러나 좌중을 바라보는 눈빛만은 여전히 맑았다.

“근래 연이어진 습격을 통해 본인은 스스로에게 부족함이 많았음을 깨달았소. 또한 자신도 모르는 새에 상당히 느슨해져 있었다는 것 역시.”

그의 시선이 정천에게로 잠시 향했다.

“맹주의 자리는 한순간도 흔들려서는 안 되오. 그것은 여러분이 그 누구보다 잘 알 것이오. 하여, 본인은 지금 이곳에서 공식적으로 맹주직을 반납하는 바요. 다음 맹주는 오늘 이 황룡회에서 탄생할 것이오.”

소리 없는 떨림이 좌중을 훑었다.

누군가는 자신에게 올 수도 있는 기회에 흥분했고, 누군가는 마치 남의 일인 양 초연했다.

남궁운의 시선이 검왕에게로 향했다.

“결전의 방식은 검왕께서 설명하실 거요.”

남궁운의 소개를 받은 검왕이 단상에 올라갔다.

그는 남궁운과는 다른 시선으로 좌중을 훑었다. 남궁운의 그것이 맑되 부드러웠다면, 검왕의 시선은 맑으면서도 강맹했다.

실로 상대방의 호승심을 자극하는 시선.

어쩌면 천무맹주보다도 천마에게나 어울리지 않을까 싶은 눈빛이었다.

“쓸데없는 허례허식은 필요 없겠지. 간단히만 설명하겠소.”

무뚝뚝하게 운을 뗀 검왕이 말을 이었다.

“황룡회 참가를 신청한 이는 총 삼백여 명에 이르오. 그러나 그중 실력이 부족하다 여겨지는 이들은 본인이 임의로 누락시켰소.”

“……!”

좌중이 크게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전혀 예기치 못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좌르륵!

검왕이 자그마한 두루마리를 펼쳐 보였다.

“여기에 참가 자격을 지닌 이들의 명단이 있소. 총 오십 인에게 자격이 주어졌소. 명단에 이름이 오르지 않은 이들은 탈락됐다고 생각하시오. 다만 이곳에 남아 황룡회를 견식할 기회는 주겠소.”

참가자들이 너도 나도 안력을 돋워 명단을 읽었다. 이윽고 불만에 찬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왜 본좌가 탈락했단 말인가! 인정할 수 없다!”

“이건 음모다!”

“처음부터 이럴 속셈이었나!”

불만은 기름 위에 떨어진 불꽃처럼 삽시간에 타오르기 시작했다. 자칫하다간 황룡회를 시작하기도 전에 폭동이 일어날 판이었다.

그때 검왕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불만이라면 당장 이리 올라와 본좌에게 도전하라. 이백오십 명 모두가 덤벼도 좋다.”

뚝.

광기처럼 끓어오르던 목소리가 한순간에 멎었다.

검왕이 알게 모르게 쏘아 보낸 살기가 좌중을 짓눌렀던 것이다.

“시간이 부족하니 이백오십 인 모두가 한꺼번에 덤볐으면 좋겠군. 암습도 좋고 합공도 좋다. 불만이 있다면 어서 덤비도록.”

“…….”

“아니면 본좌 쪽에서 먼저 가 줘야 하는가?”

수백 명이 한 사람에게 압도되는 순간이었다. 평소 검왕을 싫어하는 이들조차도 그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재미있군요.”

궁후 요태희가 한걸음에 단상 위로 올랐다. 지켜보는 이들이 넋이 나갈 만큼 우아한 경공술이었다.

“검왕께서 혼자 재미를 보게 둘 수는 없지요. 불만이 있다면 검왕 대신 저에게 덤비셔도 좋습니다.”

“흥! 두 사람만 이 자리의 주인공이 될 셈이오?”

풍신창왕 윤하월이 세 번째로 단상에 올랐다. 이윽고 명단에 오른 이들이 하나둘 단상 위로 올라갔다.

들끓던 불만은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사실 명단에 적힌 이들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강자들뿐이었던 것이다.

“당신은 올라가지 않아?”

백미련의 웃음 섞인 목소리에 정천은 고개를 저었다.

“구경거리가 되어서 좋을 게 뭐가 있겠어?”

옆에 있던 장유추가 움찔했다. 사실 그도 단상에 오를까 고민하던 차였다.

좌중이 조용해지자 검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명단에 오른 이들은 모두 단상으로 올라오시오.”

“쳇.”

혀를 찬 정천이 걸음을 뗐다.

오십 인 모두가 올라왔음에도 단상 위는 허전한 느낌이었다. 말이 좋아 단상이지, 실제로는 거대한 규모의 비무대였던 것이다.

“지금부터 황룡회를 시작하겠소.”

호화로운 행사도, 웅장한 제악(祭樂)도 없었다. 그럼에도 황룡회의 분위기는 엄숙하고 웅대했다.

“방식은 간단하오.”

검왕이 눈짓을 하자 남궁운과 제갈현이 비무대 아래로 내려갔다.

“마지막까지 이 단상에 남아 있는 한 사람. 그가 바로 천무맹주가 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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