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권 - 第一章 경고 (61/146)

第一章 경고

환의궁.

이백 명의 수호대가 겹겹이 에워싸고 있는 그곳을 검왕이 찾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수호대장 단리열이 검왕에게 다가섰다. 검왕은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말했다.

“맹주를 만나러 왔다.”

“알고 계실 텐데요. 맹주님께선 아직 깨어나지 않으셨습니다. 누군가를 만날 상황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다 나았다. 지금이라면 본좌와 대화를 하는 것도 가능할 테지.”

“예?”

단리열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남궁운의 상처가 대부분 회복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아직 깨어나지 못했다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그런데 어찌 대화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검왕 유극태는 나직이 혀를 찼다.

“지금 그는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이나 같네. 그러한 잠은 의원 나부랭이들이 깨울 수 있는 게 아니지.”

유극태의 몸에서 순간 기세가 피어났다.

화아악!

“……!”

“윽!”

단리열을 비롯한 이백 수호대는 자기들도 모르는 새 몇 걸음씩 물러난 상태였다. 검왕은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그걸 깨울 수 있는 것은 강렬한 투기(鬪氣)뿐. 본좌야말로 그에 적합할 테지.”

“거, 검왕님…….”

“본좌는 바쁘다네. 얼른 끝내고 돌아가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네. 그러니 더 말할 여유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군.”

유극태가 한 걸음 나섰다. 이백 인이 두 걸음씩 물러났다.

유극태가 두 걸음 나섰다. 이백 인이 다섯 걸음씩 물러났다.

“어찌할 텐가?”

단리열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숫제 협박이나 다름없잖은가.

그러나 협박도 하는 사람에 따라 명령이 될 수 있는 법. 검왕은 농담처럼 건넨 한마디로도 천무맹을 뒤흔들 수 있는 인물이었다.

결국 단리열이 손을 들었다. 긴장하고 있던 이백 수호대가 멀찍이 물러났다.

“들어가 보십시오.”

“그러지.”

유극태는 당연하다는 태도로 걸어 들어갔다. 그가 환의궁 안으로 모습을 감춘 뒤에 몇몇 수호대원들이 참았던 숨을 토했다.

“헉헉! 헉…….”

단리열 역시 숨이 가빠져 있는 것을 느꼈다.

‘독대하는 것만으로 이런 위압감이라니.’

맹주 남궁운에게서도 느껴 본 적 없는 위압감이다. 그야말로 왕의 위세랄까.

단리열은 어느새 자신이 검왕을 맹주보다 위에 두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아마도 이백 인의 수호대원들 역시 마찬가지일 터.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어쩌면 천무맹의 무게중심은 이미 옮겨진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 누군가 유극태야말로 진짜 천무맹주라고 외친대도, 단리열은 그를 말리거나 욕할 수 없을 것 같았다.

* * *

안으로 들어선 검왕은 곧장 남궁운의 병실로 향했다. 방을 오가던 시비들이 검왕을 보자마자 흠칫하여 물러났다.

남궁운의 병실엔 의원 한 명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역시 검왕을 보고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어찌 이곳에?”

“비키게.”

별다른 말도 없이 냉큼 비키라 말하는 검왕. 의원은 직감적으로 두 번째는 없으리라 생각했다.

“아, 알겠습니다.”

의원이 종종걸음으로 물러났다. 검왕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남궁운의 머리맡에 앉았다.

“칠칠치 못하구나. 그깟 암수에 당해 지금까지 고꾸라져 있다니.”

침묵만이 검왕의 목소리에 대답했다. 턱을 쓰다듬은 검왕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게 다 십 년간의 게으름 때문이다. 무인이 싸울 상대를 잃고, 싸울 자리를 잃고, 싸울 시기를 으면, 그건 더 이상 무인이 아닌 것이다.”

“…….”

“너의 천무맹이 그러했다. 지난 십 년간의 천무맹이 그러했다. 평화 협정이라고? 휴전이라고? 그 결과가 어떠한가. 힘을 기른 마교 놈들이 우리의 앞마당까지 왔다가 살아 돌아갔다. 혈풍대는 궤멸당했고, 너는 내부 반역자에 의해 병상에 처박혔다.”

검왕은 손을 들어 남궁운의 이마를 짚었다.

“이젠 더 이상 그래선 안 된다. 적들의 칼날은 이미 코앞까지 다가와 있다. 지금 필요한 건 천무맹을 하나로 뭉칠 힘이다. 그럴 만한 자질을 지닌 무인의 존재다.”

파밧!

검왕이 두 눈을 부릅떴다. 순간 그의 몸에서부터 맹렬한 기세의 투기가 흘러나왔다.

움찔.

남궁운의 몸이 살짝 요동쳤다. 검왕은 지속적으로 투기를 보냈고, 남궁운의 반응도 차츰 커져 갔다.

그러던 한순간.

남궁운이 오랜 꿈에서 깬 듯 눈을 떴다.

“……!”

남궁운은 한동안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저 두 눈을 깜빡이며 방의 전경과 검왕을 돌아볼 따름.

검왕은 그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자네로군.”

남궁운의 입이 열렸다. 검왕은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내게 훈계하듯 소리치던 목소리는 자네의 것이었나?”

“아마도 그럴 테지.”

“그렇다면 그 일 역시 꿈이 아니었겠군.”

“그 일?”

고개를 끄덕인 남궁운이 말했다.

“한 여자아이가 나를 암살하려 했었네. 정천이 그걸 저지했고. 두 사람은 내 머리맡에서 싸움을 벌이다가 이내 사라졌지.”

“개꿈을 꾼 게 아닐세. 실제로 혼절한 자네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니까.”

“그랬군.”

남궁운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자네의 이야기는 잘 들었네. 자네 말대로 나의 방식이, 지난 십 년 동안의 통치가 천무맹을 약하게 만든 것일지도 모르지.”

“그런 것일지도 모르는 게 아니야. 이 모든 일엔 분명 자네의 방식이 큰 몫을 했어.”

“변명하진 않겠네. 그러나 내가 단순히 평화에 찌들었던 것만은 아니야.”

“그런가?”

“우리의 적은 마교뿐만이 아닐세. 어쩌면, 아니 분명 마교보다도 거대하리라 추정되는 적이 우리의 바로 곁에 존재하네.”

검왕은 놀라지 않았다. 이미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팔부혈선에 대해 말하는 것인가?”

“알고 있었군.”

“알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네. 자네마저 그 얘기를 꺼낼 정도라면 거짓은 아니겠군.”

“거짓일 리가 없지. 내가 당한 것도 그들의 술수에 의한 것이니.”

남궁운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나뿐만이 아니야. 역대 맹주들 중 상당수가 그들의 눈 밖에 나 하루아침에 변사했지. 그들의 힘은 천무맹이란 집단 깊은 곳까지 뿌리를 내리고 있어.”

“오랜 기간 권세를 누려 온 문파나 가문들은 의심할 필요가 있겠군. 앞으로 유념하겠네.”

남궁운은 검왕의 말투가 미묘하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앞으로 유념하겠다고?”

“그렇다네.”

“마치 자네가 맹주라도 된 듯이 말하는군.”

“앞으로 그렇게 될 테니까.”

남궁운은 분노하지 않았다.

언제고 예상했었던 일이다. 검왕이 언제고 맹주직을 노리리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으니까.

그가 쓰러져 있던 지금이라면 뭔가 수를 썼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설명해 보게.”

“그러지.”

검왕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천무맹은 어느 때보다도 크게 비틀거렸고, 그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자네는 쓰러져 버렸네.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자네의 자질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지.”

“선동을 했군.”

“뭐, 구태여 부정하진 않겠네. 중요한 건 새로운 맹주의 필요성을 황룡성의 모두가 느끼고 있다는 점이지. 또한 군사 역시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네.”

남궁운은 제갈현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 혼자서는 대세를 거스르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천무맹에 항상 맹주가 있어야 한다는 건 만고불변의 진리이기도 했고.

“맹주가 필요한 때에 자네는 그 자리에 없었어. 그것이 예기치 못한 사고 때문이라 해도, 그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네.”

“알고 있네.”

맹주는 천무맹의 심장이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쓰러지거나 무너져선 안 된다.

비바람이 몰아쳐도 우뚝 서 있어야 하고, 태풍이 불어와도 휩쓸려선 안 된다.

수십만 정파 무인들이 그 한 명만을 바라보기에.

맹주는 철인이어야만 했다.

한 개인에게 주어지는 짐이라기엔 너무나 거대했으나, 그것을 해낼 수 있는 사람만이 맹주의 자리를 얻을 수 있는 게 사실이었다.

그리고…….

“나는 분명 맹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지.”

순순히 인정한 남궁운이 물었다.

“그래, 그래서 어떤 방식으로 새 맹주를 뽑기로 했지?”

“황룡회를 열 것이네.”

“황룡회?”

“간단한 것 아니겠나? 우리들은 무인. 무인에게 가장 어울리는 방식으로 대표를 뽑자는 거지.”

“비무회로군. 하지만 자칫하면 엉뚱한 인물이 맹주가 될 수도 있을 텐데?”

“어중이떠중이가 차지할 수 있을 정도로 맹주의 자리가 녹록할 것 같은가?”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게 무림일세.”

그 말은 검왕 역시 동의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걱정하지 말게. 내가 우승할 것이니.”

하늘을 찌를 듯한 자신감. 그러나 그 누구도 그에게 오만하다고 말하지 못한다. 그 자신감조차도 검왕의 일부분이기에.

남궁운도 그 사실을 잘 알고는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입을 열어 말했다.

“오만하군.”

“하하하.”

검왕은 소탈하게 웃었다. 평상시 그의 모습을 아는 이들이라면 깜짝 놀랄 모습이었다.

두 사람은 딱히 친분이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도리어 지난 수십 년 동안 반목해 온 정적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통하는 게 있는 법.

검왕은 친구를 대하는 듯한 살가운 태도로 말을 이어 갔다.

“자네도 깜짝 놀라게 될 걸세. 이번 황룡회에 나타나게 될 면면을 살펴본다면 말이야.”

“이곳저곳을 찔러 본 모양이군.”

초고수라 할 수 있는 이들 중 맹주직에 욕심을 지닌 사람은 열에 서넛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검왕이 저렇게 말할 정도면, 못해도 열에 여덟아홉은 출전할 것이 분명했다.

“어떤 방식으로 그들을 구슬렸나?”

“사람에 따라 방법을 달리했지. 호승심이 있는 자들에겐 그걸 건드릴 만한 강자의 이야기를 흘렸고, 물욕이 있는 자들에겐 막대한 상금 이야기를 흘렸네. 협사들에겐 천무맹의 위기에 대해 이야기했으며, 세상에 초연한 이들에겐 우정의 이름으로 부탁을 했지.”

“역시 오랫동안 준비해 온 사람답군.”

남궁운은 새삼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검왕은 지금, 자신의 강력한 적수가 될 수 있는 이들을 모조리 끌어모은 것이다.

그럴수록 변수가 많아질 게 뻔한데 말이다.

그 이유는 남궁운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정말 역대 최강의 천무맹을 만들고 싶은 모양이군, 자네.”

“그래.”

검왕은 간단히 긍정했다.

“무인 집단이란 것은 의외로 단순해. 강한 자가 많으면 그만큼 강한 것이지. 군대에선 강한 자가 많아 봐야 전술과 계략의 힘을 당해 낼 수 없겠지만, 무림의 집단은 다르지.”

검왕의 말은 사실이다. 군인과 무인은 애초부터 전혀 다른 존재인 것이다.

“나는 맹주의 자리에 오를 것일세. 그리고 황룡회의 참석한 이들을 최대한 포섭할 것이네. 그리하여 역대 최강의 천무맹을 만들 것이야.”

정말 엄청난 자신감이라 할 수 있었다. 단순히 우승하는 것을 넘어, 참가자 모두를 자신의 제어하에 둘 것이란 의미니 말이다.

강한 자가 많은 집단은 물론 강하다. 그러나 그것은 내부 분열이 전혀 없을 때의 얘기다.

이론과 실상의 차이가 여기서 발생한다.

강한 무인은 좋은 전력이기에 앞서 모난 돌이다. 언제 무슨 문제를 일으킬지 모르는데다, 어지간해선 억누를 수도 없다.

지금 검왕은 그런 문제점까지 자신이 제어할 것이라 말하는 것이었다.

“무모해. 너무나 무모하네. 자네의 말처럼 된다면야 좋겠지만, 현실은 이상과는 다르네.”

“알고 있네. 하지만 난 해낼 것이네.”

너무나 확고한 목소리에 남궁운은 뭐라 더 말하지 못했다. 본인이 그렇다는데 누가 뭐라 할 수 있겠는가.

“어쨌든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이는군.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견문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기회라는 것.”

“물론이지.”

빙긋 웃은 검왕이 말했다.

“정천, 그 사내도 그 자리에 참가할 게야.”

“정천…….”

남궁운은 나직이 그 이름을 곱씹었다.

무려 두 번이나 자신을 구해 준 사내. 한때는 자신과 장로들에 의해 나락 밑바닥에 버려져야 했던 사내.

“홀로 내달리는 이리 같은 사내야. 자네라고 해도 수중에 둘 수는 없을걸.”

“나는 해낼 것이네.”

“세상엔 길들일 수 없는 존재들이 있는 법이야.”

“그거야 두고 보면 알 일이겠지.”

검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궁운 역시 상체를 일으켜 바르게 앉았다.

“자네는 어쩔 텐가? 자네도 참가하지 않겠나?”

검왕의 말에 남궁운은 쓴웃음을 지었다.

“나 역시 포섭하겠다고?”

“중용해 주지.”

“미안하지만 이번엔 빠지겠네. 몸 상태도 상태거니와, 이제 내가 낄 자리는 없어 보이는군.”

검왕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역시 자네는 현명하단 말이지.”

칭찬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말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남궁운은 그 말에 반발할 입장이 아니었다.

“나의 시대는 끝났군.”

남궁운은 솔직하게 인정했다. 이미 정천에게 목숨을 구원받은 그 순간, 맹주로서의 그는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검왕이 돌아서려다 멈춰서 남궁운을 보았다.

“가장 믿었던 이에게 배신당했으며, 한때는 버렸던 이에게 구원받았다. 무인으로서 이만한 치욕도 없을 것이야.”

“그게 무림이지.”

“그래. 또한 이런 일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곳이 무림이기도 하네.”

남궁운은 맑은 눈으로 검왕을 바라봤다.

“자네도 마음을 단단히 먹는 게 좋을 걸세.”

“나는…….”

뭐라 대답하려던 검왕이 입을 닫았다.

한동안 남궁운의 두 눈을 똑바로 보던 그가 돌연 몸을 돌렸다.

“나는 그 누구에게도 패배하지 않네.”

검왕이 환의궁을 떠났다.

남궁운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된 그의 빈자리를 응시하다가 중얼거렸다.

“패배하기 전까진 누구나 그렇게 생각한다네.”

* * *

만월(滿月)이 떠올랐다.

화륜문 장원의 전경 위로 풀벌레 소리가 낮게 깔렸다. 이따금 달이 구름에 가려질 때마다 짙은 어둠이 벌레 소리를 짓누르며 내려앉았다.

다시금 달이 구름을 벗어났을 때, 장원이 한눈에 보이는 돌담 위엔 인형(人形)이 하나 얹혀 있었다.

“…….”

조용히 장원을 응시하는 인형.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만 같다.

이윽고 그의 목젖 위로 칼날이 닿았다.

인형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오랜만이야.”

“그렇군.”

백미련이 대답했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침착한 목소리.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불안감이 느껴졌다.

“혼자 온 건가?”

“그런 것 같나?”

언제나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한다. 백미련이 상대방을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솔직히…… 모르겠군.”

인형, 소윤 또래로 보이는 소년이 픽 웃었다.

“정말 무뎌졌구나, 구검절후.”

그 순간 백미련의 목젖에 칼날 하나가 와 닿았다. 백미련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하긴 그랬으니 실패했을 테지.”

목소리는 백미련의 뒤에서 울렸다. 이번엔 갈라지고 쉰 노인의 그것.

실제로 백미련의 목을 겨누고 있는 이는 백발노인이었다. 인두라도 지진 양 흉측한 화상 자국을 두 눈에 박고 있는.

백미련이 이를 악물었다.

“천연살(天然殺)과 살마괴(殺魔怪)!”

소년, 천연살이 씩 웃었다.

“우리 둘 말고도 세 명쯤이 더 왔어. 여길 찾아온 사람은 우리뿐이지만.”

노인, 살마괴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꼬락서니를 봐선 우리 둘만으로도 충분하겠군.”

“너희들……!”

“혈선들께선 너의 실패에 대해 궁금해하셨다. 하지만 구태여 보고할 필요도 없을 것 같군. 절후의 구검은 무뎌지고 무뎌져 종이 하나 자를 수 없게 되었나 보군.”

“하하! 한 번 시험해 볼까, 살마괴?”

친구라도 부르는 양 친근하게 말하는 천연살. 듣기에 따라 기분이 나쁠 수도 있을 법한데 살마괴는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하기야 그건 당연했다.

생긴 건 소년이나 천연살은 실제 나이 오십에 육박하는 중년인이었고, 다 죽어 가는 노인의 외관이나 살마괴의 나이 역시 오십 근방이었던 것이다.

외견은 정반대이나 나이는 비슷한 두 사내.

마라혈천 내에서도 최고의 단짝으로 통하는 그들이었다.

꾸욱.

백미련의 목에서 피가 흘렀다. 살마괴의 요검이 살을 파고든 것이다.

“원래 우리의 임무는 너의 상황을 살피는 것이다. 하지만 이래서는 이 자리에서 그대로 죽여 버려도 문제가 없겠군.”

천연살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래선 안 되지. 기왕 죽일 거라면 한판 붙어 보고 죽이는 게 낫잖아? 구검 중에 일검도 구경을 못했는데 죽이면 아깝다고.”

“무뎌졌다고는 해도 한때 마녀로까지 통하던 계집이다. 무슨 수작을 벌일지 알 수 없다.”

“뭐 어때? 제깟 게 수작을 부려 봐야 우리 둘을 당해 낼 순 없을 텐데.”

두 사람은 백미련을 마치 장난감처럼 보는 듯했다. 그럼에도 백미련은 분노를 느낄 수가 없었다.

실제로 저들 개개인의 실력은 그녀에 필적한다. 그런 둘이 함께 있는 지금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더군다나 자신은 뒤를 내준 상황.

‘하지만…….’

목을 겨누고 있는 칼만 어찌할 수 있다면 또 모른다. 그렇기에 그녀는 차라리 두 사람이 자신을 가지고 놀기를 바랐다.

그때 천연살의 눈동자가 그녀의 시선과 마주쳤다.

“혹시 설레었나?”

“뭐?”

꾸우욱.

살마괴의 요검이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백미련은 살이 천천히 베어지는 느낌에 전율했다.

아주 약간, 아주 약간만 칼날이 더 파고든다면 즉사할 터.

그러나 어느 한순간, 살마괴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야말로 백미련의 목숨이 간당간당하던 순간이었다.

“호오.”

천연살이 기묘한 감탄을 뱉었다.

“제법인데. 설마 우리들이 미처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다가오다니 말이야.”

“네놈들이 워낙 부주의한 것들이니 그럴 테지.”

목소리의 주인은 살마괴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거대한 대도를 가지고서.

장유추가 광천뇌도를 살짝 흔들고는 으르렁거렸다.

“빌어먹을 칼 치워라. 목을 댕강 떼이기 싫다면.”

“흥.”

코웃음을 치긴 했으나 일단 요검을 치우는 살마괴였다. 그제야 자유로워진 백미련이 몇 걸음 물러나 콜록거렸다.

“고맙군.”

“흥. 네년이 좋아서 도운 게 아니니 고마워할 것도 없다.”

질색이라는 듯 대답한 장유추가 광천뇌도를 치웠다. 자연히 두 사람이 두 불청객과 마주보는 형태가 되었다.

천연살이 싱글거리며 말했다.

“정정당당한 협객이시군. 모처럼 얻은 기회를 그냥 버리다니.”

“비겁한 건 질색이니까. 게다가 네놈, 마음만 먹었다면 어렵잖게 몸을 피할 수도 있었잖나.”

살마괴가 피식 웃었다.

“그랬지. 구검절후와는 달리 말이야.”

“…….”

백미련은 입술을 깨물었다.

확실히 그녀는 약해져 있었다. 아직까지도 강룡검에 당했던 타격이 온전히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외상이야 치료했다지만 내상은 쉬이 낫질 않고 있었다. 아마도 시간만이 해답일 터.

어쨌든 지금 현재로선 저들보다 못해도 한 수 이상은 뒤지고 있는 그녀였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장유추가 광천뇌도를 붕붕 휘둘러 보였다.

“시끄럽게 수다 떠는 건 질색이니 붙을 테면 어서 붙어 보자꾸나. 마침 숫자도 딱 맞군. 아니면 두 놈 다 노부에게 덤벼도 상관없다.”

“대단한 자신감이군그래. 입만 갖고 허풍 떠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정말 입만 살았는지 시험해 볼 테냐?”

프츠츠츠.

광천뇌도의 칼날 위로 희미한 뇌기가 어렸다. 양팔을 쓰던 때보다도 위력 자체만큼은 훨씬 올라간 강렬한 검기였다.

백미련은 내심 감탄한 눈으로 장유추를 보았다.

‘팔을 잃은 게 저자의 검기 자체를 변화시켰어.’

어깨 아래로 완전히 잘려 나간 왼팔은 철저히 버려졌다.

장유추는 체내의 기운을 돌릴 때 아예 그쪽으로 향하는 기운 전부를 거두어 버렸다.

그렇게 거두어진 기운은 거의 억압에 가까운 방식으로 오른팔에 뭉쳐 들었다.

자칫하면 주화입마에 들어설 수도 있는 방법이었다. 실제로 왼팔이 온전했을 때 이랬다면 칠공에서 피를 쏟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행한 것은 장유추의 육체 역시 변화에 적응했다는 점.

왼팔을 잃게 된 그의 몸은 자연히 오른팔 하나뿐인 상황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여기엔 오른팔을 더욱 가혹하게 단련시킨 장유추의 훈련도 큰 몫을 했다.

그 결과 지금의, 양팔의 기운 전부가 오른팔 하나에 뭉쳐 들게 된 검기가 탄생했다.

부분적인 환골탈태라고도 할 수 있는 변화였다.

“대단하네?”

천연살이 순순히 감탄했다. 살마괴 역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무림이 넓긴 넓은가 봐. 댁 같은 고수도 있는 걸 보면 말이지.”

“흥. 싸우는 게 무서운 건가? 무단으로 침입한 녀석들이 어울리지 않게 칭찬이나 하고 앉았군.”

“아무래도 이 대 삼은 좀 불리할 것 같아서 말이야.”

백미련과 장유추 너머를 가리키며 말하는 천연살이었다. 두 사람은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누구를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정천은 한가로운 태도로 툇마루에 앉아 있었다.

“끼어들지 않을 테니 붙어 보시지. 물론 여기 말고 밖에서.”

정천의 말에 장유추가 사납게 웃었다.

“붙어 보라는데 어쩔 테냐. 이래도 발을 뺄 건가?”

“응.”

생글생글 웃으며 대꾸하는 천연살. 덕분에 장유추의 얼굴만 잔뜩 구겨졌다.

“이런 빌어먹을 애새끼가?”

당장에라도 달려들려는 장유추를 백미련이 말렸다.

“관둬. 녀석의 도발에 넘어가지 마. 그게 녀석이 바라는 거니까. 그리고 생긴 것은 저래도 나이는 오십을 넘겼어.”

“나이 따윈 아무래도 좋다. 적이 도발한다면 도발하는 대로 응해 줘야지!”

“녀석은 살진법의 대가야.”

그 한마디에 장유추가 분노를 멈췄다. 백미련의 말이 사실이라면, 도발에 열을 내 무턱대고 덤볐다간 피를 볼 수도 있었다.

장유추가 조용해지자 천연살이 입맛을 다셨다.

“아깝네. 재미있게 놀 수 있을 뻔했는데.”

“네놈…….”

“댁 정도 되는 고수라면 꽤 오래 버틸 수 있었을 거야. 그만큼 죽어 가는 걸 보는 나도 즐거웠을 테고.”

“으음!”

장유추가 이를 악물었으나 더 덤벼들진 않았다. 진정한 살진에 빠졌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잘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느긋하게 있던 정천이 물었다.

“금역의 안개 역시 네놈과 관계된 건가?”

“나의 선대가 만들었지. 그 뒤를 이어 지속적으로 보수해 온 게 나고.”

“생긴 것과 다르게 얕볼 수 없는 녀석이군.”

“그런가?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웃으며 대답한 천연살이 살마괴에게 눈짓했다. 살마괴는 백미련을 바라보며 말했다.

“혈선들께는 이렇게 보고하겠다. 구검절후 백미련은 임무에 실패했으며, 그런 주제에 뻔뻔하게 적과 결탁했노라고.”

“…….”

“세간에 화륜문으로 알려져 있는 문파가 그 협력 세력이며, 그 우두머리는 아마도 구검절후 이상의 고수일 것이라는 것 역시.”

정천이 쓴웃음을 지었다.

“좋게 봐줘서 고맙긴 한데, 난 화륜문의 우두머리 따위가 아냐.”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그리고 우린 딱히 저 여자의 협력 세력도 아냐. 하지만 별 상관은 없겠군. 너희와 대면하는 건 나로서도 바라는 일이니까.”

화아악.

정천이 뿜어낸 살기가 천연살과 살마괴의 주변을 잠식했다.

“엇?”

“……!”

내내 여유롭던 두 사람의 표정이 처음으로 경직되었다.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기도 하거니와, 정천의 살기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강렬했던 것이다.

‘이런, 낭패다. 내가 저자에 대해 오판했다.’

살마괴는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구검절후 이상 정도가 아니다. 구검절후를 가볍게 능가하는 고수다.’

단순히 살기의 밀도만 따진다면 천연살과 살마괴 두 사람이 덤벼도 승산을 자신할 수 없다. 더군다나 천연살의 특기가 적을 끌어들이는 살진임을 생각해 본다면 더더욱.

‘이곳은 저들의 자리. 살진을 펼친 여건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살진을 펼치더라도 승리를 자부할 수 없는 마당이니.’

싸워선 안 된다. 살마괴는 여차하면 도망칠 생각을 하며 긴장했다.

“너희를 지금 죽이진 않는다. 혈선들에게 보고를 올려야 할 테니까.”

정천이 나직이 말을 이었다.

“보고 올리는 김에 이 말도 전해. 너희 팔부혈선은 내가 모조리 죽여 버릴 거라고.”

“네놈!”

천연살이 고함을 쳤다. 내내 여유작작하던 태도는 어느새 자리를 감춘 뒤였다.

정천의 입매가 비틀렸다.

“흥. 충성심 하나는 대단한 모양이군. 하지만 머리는 좋지 않은 모양이야. 살진이 특기라는 놈이 먼저 달려들려고 들어서야 쓰겠나? 하긴 내 살기에 짓눌렸을 테니, 버티려면 악이라도 질러야겠지.”

“크읏.”

천연살이 침음했다. 정곡을 쿡 찔렸던 까닭이다.

그는 결코 쉽게 흥분하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도리어 상대방을 흥분시켜 자신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심리전의 대가였다.

그러나 지금은 무지막지한 살기 앞에 겁을 먹고 말았다. 그렇게 되니 거의 본능적으로 기세를 발출할 수밖에 없었다.

살마괴가 천연살의 어깨를 짚었다.

“놈의 말이 옳다. 지금은 싸울 만한 상황이 아니다.”

“나도 알고 있어.”

신경질적으로 대꾸한 천연살이 정천을 노려봤다.

“네놈의 이름이 뭐지?”

“정천.”

“그렇군. 좋다, 정천. 네놈의 말을 꼭 그분들께 전해 드리겠다. 그리고 한 가지 약속하지. 네놈은 내가 펼친 살진 안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죽을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정천이 담담히 말했다.

“나도 약속하지. 단 일격으로 널 죽여주겠다고.”

“큭!”

주먹을 바르르 떨던 천연살이 화를 삭이고 물러났다. 살마괴는 작게 한숨을 쉬며 뒤로 빠졌다.

“후회하게 될 것이다. 이미 그분들은 태동하실 준비를 모두 마쳤다.”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살마괴는 더 말하지 않고 물러났다. 어차피 말싸움만으로는 시간만 축낼 따름이었다.

‘검왕 하나만이 문제일 거라 생각했거늘.’

어디서 저런 은둔 고수가 나타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의 일이 쉽지만은 않겠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마라혈천은 승리할 것이다.’

그 사실만큼은 추호의 의심도 없는 살마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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