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二章 풍신창왕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고작 찻잔 몇 번 돌리며 수다를 떨고서는 서로의 모든 것을 알게 된 양 친근히 구는 꼴이라니.”
장유추의 목소리엔 노기가 어려 있었다. 특별한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바깥에서 들려오는 재잘거림 때문인 듯했다.
“어제 보니 화옥점에 새로운 연지를 들여 놓았더라고요. 진주를 갈아 넣은 신품이래요.”
“진주를?”
“네. 단순히 치장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계속 바르면 피부에 좋아진다는 거 있죠?”
“한번 같이 구경가 볼래요?”
까르르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주로 대화를 주도하는 쪽은 제갈세연과 소윤. 확실히 성격이 활발하다 보니 말이 많고 목소리도 크다.
화연란은 이따금 맞장구를 쳐 주는 정도. 모용린과 백미련은 조용히 얘기를 듣는 편이다.
그런 시시콜콜한 사실들을 알고 있는 것은, 정천이 방에 틀어박혀 나가질 못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장유추 역시 함께 고립된 처지. 사실 정천보다도 그가 지금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있었다.
“외출이라도 하고 오지 그러나?”
“그랬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잖습니까.”
정천이 염려하는 건 물론 백미련이었다. 혈선의 수하인 그녀를 그냥 두고 나갈 순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맹우를 자처했던 장유추 역시 함께 있게 되었다. 혼자 피신하는 짓 따위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광천뇌도의 손잡이를 쥔 장유추가 속삭였다.
“그냥 눈 딱 감고 베어 버리면 되지 않겠나?”
“란아랑 여자애들 전부를 인질로 두게 될 겁니다. 설사 해치우더라도 뒤끝이 더러울 테고.”
“그렇다고 그냥 둘 수는 없잖나.”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미묘합니다.”
“미묘하다니?”
정천은 턱을 쓰다듬었다.
“전 혈선에게 협력하는 것들은 모조리 쓸어버리기로 다짐했습니다. 실제로 그들에게 가담했던 장로들에게도 일말의 동정을 두지 않았고요.”
“저 계집도 마찬가지 아닌가? 여자라고 해서 놔두는 것은 아닐 텐데?”
“저 여자, 백운신의 딸입니다.”
“…….”
장유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윽고 그의 눈이 무섭도록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쳐 죽여야 하는 것 아닌가? 제 아비를 죽인 계집이니 말이야.”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건가?”
정천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일전에 백 장로와 얘기를 나눴던 적이 있죠. 그는 평생을 후회할 일이 한 가지 있다고 했었습니다. 그땐 그냥 흘려 넘겼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무슨 얘기였는지 알 것 같습니다.”
“으음.”
“게다가 백미련의 태도도 조금 걸리는 게 있고요. 어쩌면 혈선들의 지배력이란 것도 생각보다 약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계집이 혈선을 배신할 가능성도 있다는 건가?”
“아직은 추측일 뿐이지만 말입니다.”
정천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그렇지 않다면 그때 베어 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러다 허를 찔리게 될지도 모르네.”
“란아나 모용린은 바보가 아닙니다. 자기 몸 하나쯤은 건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일이 그리 쉽게 풀릴 리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정말 그렇다면 지금 이렇게 전전긍긍할 이유도 없고 말이다.
장유추는 그 사실을 지적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정천은 당장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후에 혈선들과의 싸움이 본격화될 때를 말하는 것이었다.
“자네, 필요하다면 오랜 인연까지도 끊어 버릴 생각이군.”
“주변을 돌보며 싸울 형편은 아니니까요.”
짤막한 말로 긍정하는 정천.
후에 화연란이나 다른 이들이 혈선의 인질이 된다면 그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그들을 버릴 것이다.
‘결국은 정(正)도 마(魔)도 아닌 패도(覇道)를 걸으려는 모양이군. 자신의 목적을 위해선 무엇도 돌아보지 않겠다는 건가.’
정, 사, 마의 구분이 무의미해진 세상이다.
하지만 그런 걸 감안하더라도 정천의 성향은 실로 극단적이었다.
‘나쁘지는 않군.’
장유추는 피식 웃었다. 확실히 그는 천무맹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내였다.
“한판 놀아 볼 텐가?”
광천뇌도를 슬쩍 흔들어 보이며 장유추가 말했다. 정천은 힐끔 그를 돌아보고는 대답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을 텐데요.”
“관두게. 자네 말마따나 저기 계집들도 바보는 아닐 테니, 만약의 일이 생겨도 스스로 건사하겠지.”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연공실로 가세.”
정천도 결국 몸을 일으켰다. 사실 그 역시 바깥의 수다에 슬슬 질려 가던 참이었다.
두 사람은 방을 나와 연공실로 향했다. 그것을 본 제갈세연이 소리 내어 물었다.
“어디 가세요?”
“시끄러.”
정천의 대꾸에 제갈세연의 볼이 부풀었다.
“무슨 대답이 그래요?”
“시끄러.”
“윽, 자꾸 그럴 거예요?”
정천은 아예 무시하고서 걸음을 옮겼다. 제갈세연은 기가 막혀 아무 말도 못했다.
그때 백미련이 살며시 몸을 일으켰다.
“대련을 하려는 모양이군. 우리도 가 보자.”
“네? 하지만 분위기가 험악하던데요.”
“괜찮을 거야.”
간단히 대꾸한 백미련이 그대로 걸음을 뗐다. 다른 여인들도 몸을 일으켜서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녀들이 오는 것을 감지한 정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무슨 짓이냐.
전음을 받은 백미련이 미소를 지었다.
—이참에 견식을 넓히려고.
—허튼수작을 부리려는 건 아니고?
—본후는 이미 그대에게 패했어.
—보통은 그 이후에 복수를 꿈꾸는 법이지. 내가 멍청하게 틈을 내 줄 것 같나?
—본후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군. 본후는 실패했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정천이 잠시 멈칫했다.
—그게 무슨 뜻이지?
정천은 볼 수 없었지만 백미련의 눈엔 우울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본후의 살행이 몇 번이나 있었다고 생각하지?
—……백운신이 첫 목표가 아니었던 건 분명해 보이는군.
—호북의 백룡문을 알아?
—처음 듣는군.
—본후가 사 년 전 멸문시키기 전까진 호북 삼대 신진 세력으로 꼽히는 곳이었다.
정천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혈선들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무림의 일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었던 듯했다.
—자랑을 하려는 것 같지는 않군. 요점만 말해.
백미련은 쓴웃음을 지었다.
—혈선들은 실패를 용납하지 않아. 임무에 실패한 마라혈천은 동료들의 손에 의해 제거당하게 되지.
—……너 역시?
—본후가 쓰러진 지 한 달이 넘었지? 지금쯤이면 혈선들은 임무에 실패했음을 직감했을 거야.
—그럼 곧 네 친구란 것들이 들이닥친단 소린가?
—그래. 본후를 죽이기 위해.
—젠장. 왜 지금껏 말하지 않았던 거냐!
—들으려고는 했던가? 요 며칠 동안 본후가 말을 걸려고 해도 그대 쪽에서 피하지 않았나.
정천은 이를 악물었다.
—죽으나 사나 도움이 안 되는 녀석이군. 혼자 깽판을 친 걸로 모자라 동료들까지 불러들이겠다고? 차라리 지금이라도 다른 곳으로 꺼진다면 나을 것 같은데. 최소한 그놈들이 여기로 오진 않을 테니.
—이해를 못 했군. 본후가 죽고 말고를 떠나 그대와 화륜문은 공격당하게 될 수밖에 없다. 본후가 실패했다는 것은 곧 그대가 혈선들의 뜻을 저버렸다는 의미니까 말이야.
정천은 침묵했다. 백미련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받아들이든 상관하지 않겠어. 하지만 나는 살아남아야 해. 살아남아서 해야 할 일이 있어. 그렇기에 이곳에 남아 있는 거야. 그대나 이들과 힘을 합친다면 살아남을 가능성이 조금은 커질 테니까.
—목숨을 연명해서 무얼 하려는 거지?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
정천은 그게 누구인지 묻지 않았다. 더 이상 그녀에게 신경 쓰고 싶지 않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기도 했고.
게다가 이미 연공실 안이었다.
전음이나 날려대며 임할 만큼 눈앞의 사내가 녹록한 것도 아니었고.
장유추는 광천뇌도를 천천히 빼어 들고 있었다. 하나만 남은 오른팔은 예전보다도 더욱 팽창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지난 한 달 내내 오른팔만을 지독하게 단련시킨 결과였다.
그 완력은 내력을 돋우지 않고도 통나무를 쥐어 부스러트릴 수준.
그러한 힘으로 펼쳐지는 도법의 위력이란 굳이 형용할 것도 없었다.
“시작하지.”
“그러죠.”
정천은 풍심권의 기수식을 취했다. 속도와 유연성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권법이었다.
그 기수식을 보자마자 장유추는 혀를 찼다. 그의 뇌혈천섬도법과는 상극이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놈의 잔머리는 오늘도 여전한가 보군.”
“설렁설렁 싸워서 이길 상대는 아니잖습니까?”
“흥.”
장유추가 웃는 낯으로 코웃음을 쳤다. 말은 그렇게 해도 지금껏 강룡검 한 번 뽑아 든 적이 없었잖은가.
‘오늘은 기필코!’
생각함과 동시에 장유추의 오른팔이 움직였다.
쐐액!
광천뇌도가 뇌기를 머금은 순간 이미 폭풍 같은 검기가 쏘아져 나가고 있었다.
정천은 천마보를 밟으며 전방을 향해 좌권과 우권을 연달아 난타했다. 수십 발의 권풍이 쇄도해 오는 검기와 충돌해 위력을 줄였다.
한 방의 질은 장유추 쪽이 압도적. 정천은 굳이 정면 승부를 하지 않고서, 무지막지한 양으로 질을 상쇄시킨 것이다.
장유추도 이 한 방에 그다지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진짜는 이쪽!’
있는 힘껏 전각을 밟자 연공실의 바닥이 깨져 나갔다. 장유추는 묵직한 힘을 실어 정천을 향해 발을 뻗었다.
동시에 휘둘러지는 광천뇌도.
기운은 다르지만 그 형태는 분명 화연란의 진운패화각검이었다.
장유추는 지난 한 달 동안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그 결과 잃어버린 왼팔을 대체할 수 있는 건 두 가지뿐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오른팔과 두 다리!’
그리하여 중점적으로 수련한 것이 오른팔의 근력 강화와 각검의 수행이었다.
물론 그 결과물은 화연란의 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화연란이 현란하다면 장유추는 단순했고, 대신에 묵직하고 강렬했다.
콰앙!
정천의 주먹과 장유추의 다리가 충돌했다. 놀랍게도 정천의 몸이 붕 떠서 밀려났다.
지릿거리는 손목. 정천은 어이가 없어 쓴웃음을 지었다.
‘권강을 둘렀는데도 이 정도라니.’
두른 기운이 조금만 약했더라도 팔 전체가 박살 났으리라.
평소라면 정면 대결을 피했을 텐데, 괜히 오기를 부렸다가 큰일 날 뻔했다.
‘그래도 예전보단 나아진 것 같은데.’
장유추와의 대련은 정천에게도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어쨌든 정사백팔고수의 수위에 드는 강자였으니 말이다.
강룡검은 기본적으로 최후까지 아껴야 할 비기였다. 위력은 절대적이나 소환 및 유지에 있어 내력 소모가 너무나 극심했던 까닭이다.
때문에 그 외의 무공에 자연히 집중하게 되었다. 용검대와 강룡단의 무공 전반을 익힌 정천이기에 써먹을 것은 널려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장유추와의 대련을 통해 하나씩 사용해 보는 것이었다.
생사투와는 거리가 멀긴 해도, 어쨌든 상당한 경험이 되기는 했다.
한편 대련을 지켜보는 여인들의 얼굴은 얼이 빠져 있었다.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괴물들…….”
특히나 제갈세연과 모용린은 상당한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제갈세연은 정천의 본 실력 자체를 처음 보았고, 모용린 역시 제대로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북풍장에선 워낙 정신이 없었으니…… 그래도 강하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라니.’
무공 지식이 얕은 소윤이나 이미 경험이 많은 화연란, 저들에게 밀리지 않는 실력인 백미련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물론 그녀들이라고 아주 태평하진 않았다.
경악하는 정도는 아니더라도 식은땀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언젠가는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
‘그에겐 마검만이 있는 게 아니었구나.’
각자의 생각을 머릿속에 간직한 채, 그녀들은 두 사람의 움직임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파파팡!
정천이 거리를 벌리며 연격을 날렸다. 연달은 권풍에 맞은 장유추의 복부가 움푹 파여 들어갔다.
“흠!”
기합과 함께 금세 극복해 버리는 장유추. 그의 광천뇌도가 시퍼런 뇌기를 연신 토해 냈다.
꽈르르릉!
연공실 내부 곳곳에서 뇌전이 몰아쳤다. 천뢰강림을 펼칠 수 없는 실내이기에 위력은 떨어졌지만, 대신 장소가 좁아 공격하기엔 용이했다.
정천도 그걸 알기에 굳이 피하지 않고 기막을 펼쳐 뇌전을 막았다.
두 사람의 열기는 연신 고조되고 있었다. 황룡회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기에 더더욱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어느 한순간.
“……!”
“……!”
정천도 장유추도 움찔하여선 기세를 거두었다. 할 말을 잃은 채 지켜보고 있던 여인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나마 백미련 정도만이 그들이 멈춘 까닭을 알고 있었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 이유로 움찔했던 것이다.
세 사람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팔척장신의 거한이 서 있었다. 오른팔에 들린 채 땅을 짚고 있는 것은 기다란 장창.
발하고 있는 기세는 고요했다. 그러나 그것의 대하의 고요. 세 사람이 반응한 것은 고요 속에 거대한 격정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강자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고수.
장유추가 침음을 뱉듯 중얼거렸다.
“청룡창…….”
“청룡창?”
정천의 물음에 장유추가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 보지 못했나? 검왕과 더불어 황룡회의 유력한 우승 후보인데.”
그제야 정천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이름이 스쳤다.
“풍신창왕 윤하월?”
“그렇다네.”
거한이 대꾸했다. 대략 보아도 장유추보다도 큰 체격과 키, 머리칼은 희끗희끗했으나 검왕이나 남궁운에 비하면 상당히 젊은 편이었다.
우락부락한 몸집에 비해 얼굴선은 날랜 편. 실눈까지 겹쳐져 어쩐지 영악한 느낌도 났다. 참으로 몸과는 어울리지 않는 얼굴이었다.
창왕이란 별호를 지닌 수많은 고수들 중에서도 언제나 수위에 오르내리는 인물.
풍신창왕 윤하월이 웃는 낯으로 걸어 들어왔다.
“오랜만이오, 뇌혈도 선배.”
“그렇군.”
여유작작한 윤하월에 비해 장유추는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그나저나 못 본 새에 괴상한 짓거릴 하시게 되셨군. 어울리지 않는 각법이라니.”
“…….”
“왼팔은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요?”
“마교 놈한테 적선했다.”
윤하월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아하, 선배도 혈풍대를 따라 갔었던 거요? 상당한 혈전이었다던데 목숨은 건져서 다행이구려.”
“이곳엔 어떻게 왔나?”
다시 실눈을 뜬 윤하월이 씩 웃었다.
“검왕 선배한테서 재미있는 놈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오. 그래서 몸소 행차를 한 건데 선배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
대화를 듣던 정천이 쓴웃음을 지었다.
“검왕께선 생각보다도 수다스러운 편인가 보군요. 아무에게나 내 얘기를 하다니.”
윤하월이 이채를 띤 눈으로 정천을 돌아봤다.
“제법 강단은 있는 놈이구나. 감히 창왕의 대화에 끼어들다니.”
“진짜 왕도 아닌데 못 끼어들 건 뭐랍니까?”
윤하월의 얼굴에 찬바람이 불었다.
사실 창객 중 수위라고는 해도 검왕 유극태처럼 절대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그였다. 그 누구도 넘보지 않는 검왕의 이름과 달리, 창왕을 자처하는 이는 그 외에도 꽤 많았고.
정천은 그러한 맹점을 지적한 것이다. 윤하월의 역린이기도 한 부분을.
“건방진 놈이로군.”
“자주 듣는 얘기지요.”
웃는 낯으로 대꾸하는 정천. 내심으로는 윤하월이 우습게 보이기도 했다.
‘검왕과는 그릇 자체가 다르군.’
검왕이 태산이라면 윤하월은 나룻배였다. 고작 말 몇 마디에 동요하여 열을 내는 꼴이라니.
그때였다.
쉭!
바람이 불었다고 생각한 순간 정천의 왼뺨이 북 찢어졌다.
터져 나온 피가 정천의 몸을 붉게 물들였다.
“아!”
화연란이 당황하여 다가가려 했으나 백미련이 저지했다. 그 순간 그녀의 앞으로도 바람이 불었다.
청룡창이 스쳐 지나간 것이다.
“운이 좋구나. 한 발자국만 더 넘어왔어도 몸이 찢겼을 것을.”
차갑게 내뱉은 윤하월이 정천을 돌아봤다.
“반면에 네놈은 운이 나쁘군. 멍청하기까지 하고. 감히 이 몸을 도발하다니 말이다. 곱게 죽지는 못할 거란 사실만 알아 둬라.”
“그냥 간지러운데?”
가볍게 대꾸한 정천이 왼뺨을 슥 훑어 피를 닦아 냈다.
그새 출혈은 멈춘 뒤.
윤하월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회복력은 뛰어나군. 하지만 양팔을 잘라 놓아도 붙일 수 있을까?”
“지금 한 판 붙어 보자는 거요?”
“붙는다고? 네놈이 그 정도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부웅! 붕!
몇 차례 창을 휘두른 윤하월이 거만한 얼굴로 말했다.
“몇 초라도 버틸 수 있으면 다행일 게다.”
“재미있는데.”
정천의 두 눈이 검게 물들기 시작할 때였다.
장유추가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만하게! 이 자리에서 피를 볼 생각인가?”
“나는 이미 봤는데요.”
시큰둥한 정천의 대꾸에 장유추가 고개를 저었다.
“관두게. 싸우는 건 황룡회에 가서 해도 늦지 않아.”
“먼저 시비를 건 쪽은 저쪽인데요.”
“내 얼굴을 봐서 참게.”
평소의 장유추를 생각해 보면 놀라운 일이었다. 보통 누군가를 말리기보다 누군가가 말려야 하는 쪽이 어울리는 그였기 때문이다.
장유추는 힐책하는 눈으로 윤하월을 돌아봤다.
“자네도 관두게. 내 체면을 뭉갤 셈인가?”
“……왜 선배가 저놈을 감싸는지 모르겠군요. 검왕 선배의 설명에 비해 한참 모자라는 놈 같은데.”
“정말 그런지는 황룡회에서 확인하게.”
윤하월은 쯧 하고 혀를 차고는 청룡창을 거뒀다. 장유추는 그제야 내심 안도했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게. 여기에 있어 봐야 좋을 게 없을 것 같군.”
“그러지요. 어차피 놈을 확인하면 갈 생각이었습니다.”
윤하월의 차가운 눈이 정천을 훑었다.
“상당히 실망했지만 말이오.”
“이상한 일이군.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는 일이 더 많을 것 같은데 말요.”
“입만 산 애송이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더 수를 쓰지 않는 윤하월이었다. 암만 그라고 해도 뇌혈도 장유추와 반목하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윤하월은 여유작작한 걸음으로 멀어졌다.
그가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장유추가 한숨을 뱉었다.
“초상 치를 일 있나? 다른 이도 아니고 풍신창왕을 도발하다니.”
“별것 아닌 놈 같은데요.”
시큰둥하게 대꾸하는 정천. 장유추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놈이 무서운 이유는 단순한 무공 실력에 있지 않네. 조금 전에도 보지 않았나. 놈은 한 번 불이 붙으면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미쳐 날뛴다네. 자칫하면 자네가 아니라 저 아이들이 위험했을 게야.”
“…….”
정천도 그제야 납득했다.
모용린이나 백미련이라면 몰라도 나머지 세 사람은 위험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황룡회까지는 참게. 그 전에 싸움판을 벌여 봐야 좋을 것은 없네.”
“……그러죠. 뭐, 저도 인사를 해 두기는 했으니까요.”
장유추의 눈에 의문이 감돌았다.
“그건 또 무슨 소린가?”
“그런 게 있습니다.”
피식 웃으며 말하는 정천이었다.
* * *
“검왕 선배도 허풍이 심하군. 저런 놈이 섬서일권이나 뇌혈도보다 위험할지 모른다고?”
코웃음을 치며 걸어가던 윤하월이 일순 멈칫했다.
“응?”
그는 자신의 가슴팍으로 손을 가져갔다. 옷자락의 일부가 길게 베어져 있었다.
“무슨……?”
순간 조금 전의 상황이 스쳐 갔다. 자신이 놈의 왼뺨을 가를 때, 놈의 오른손 역시 섬전처럼 움직였었다는 사실이.
베어진 옷자락을 풀어 헤쳤다.
가슴 한복판에 자그마한 멍이 나 있었다.
“하하…… 하하하!”
윤하월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 설마 그 짧은 시간 동안 반격을 가했을 줄이야.
타격 자체는 피부만 때리고 만 수준이었지만, 풍신이라고까지 불리는 자신의 속도를 따라잡았다는 건 확실히 놀라웠다.
“당신이 옳았소, 검왕. 이제 보니 그냥 재수 없는 놈이 아니라 실력깨나 있는 개자식이었군!”
윤하월이 광소를 터트렸다.
“갈가리 찢어 놓는 보람이 있겠어!”
〖강룡검제 6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