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一章 마교 출병
“좋지 않구먼.”
귀도신마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막 천마의 호출 명령을 받은 직후였다.
그만 따로 불려가게 된 것은 아니었다. 마교십존(魔敎十尊) 전부를 부르는 호출이었으니까.
그러나 그게 의미하는 바를 알기에 씁쓸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 모양이다, 귀령아.”
그는 애병 귀령도의 칼집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천마는 아마도 일흑령의 보고를 받았으리라.
일흑령은 정천이 예견한 대로 그에 대한 정보를 발설했을 테고.
그럼에도 자신을 추궁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강룡단의 파견 자체가 천마의 의지로 이루어졌다는 것이지.”
강룡단이 음모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음모를 주도한 자는 천마. 마교의 일존이자 지배자였다.
그것이 천마의 뜻이라면 어떠한 악행이나 음모도 무의미한 것.
천마의 뜻이기에 따르는 수밖에 없다.
귀도신마는 정천과의 약속을 잊기로 했다. 애초부터 내부의 적은 없었던 것이다. 그저 천마의 뜻이 있었을 따름이다.
‘자네들과 우리는 다르다네. 아무래도 우리 사이의 연도 여기까지인가 보군.’
후에 어떤 형태로든 정천과 재회하게 된다면, 그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도를 휘두를 것이다.
마음을 다진 귀도신마가 회의장으로 향했다.
회의장엔 이미 나머지 아홉 명의 십존이 모여 있었다.
철절삼마와 마교 칠절, 이들 열 명을 일컬어 마교십존이라 한다. 기본적으로 십 인 모두가 동등한 입장이긴 하나, 상징적인 면에서 철절삼마가 조금 더 대우를 받긴 한다.
“클클, 무슨 낯짝으로 왔는지 궁금하구먼.”
멸살독마가 눈자위를 부라리며 말했다. 귀도신마는 나직이 혀를 차고서는 대꾸했다.
“난 댁들 보기에 부끄러울 게 하나도 없수다.”
“말이야 잘하는구먼. 정파의 애송이와 내통하려 했던 주제에.”
“얘기 좀 나눈 게 내통이라면 할 말 없소.”
“그자와 그저 단순한 사담이나 나눴단 말이더냐?”
“그는 강룡단의 형제였소.”
내내 시큰둥해 하던 나머지 십존들이 약간 관심을 보였다.
멸살독마는 그런 분위기가 내키지 않는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용검대의 나부랭이 따위가? 언제부터 형제라는 단어가 어중이떠중이에게도 허용됐다던가?”
“그는 천마의 무공을 사용했었소. 일흑령의 보고를 보았다면 알고 있을 텐데?”
“일흑령이 무얼 안다고 천마의 무공을 운운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다시 말하지. 내가 보증하오. 그가 사용했던 무공은 천마의 무공이었소.”
“네놈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고 어찌 단언할 수 있단 말이냐?”
참고 참던 귀도신마도 끝내 폭발했다.
“이런 빌어먹을 늙은이. 이제 보니 그냥 나한테 시비를 걸려는 게 목적이로군. 시팔, 그렇게 아가리만 신나게 놀리지 말고, 한번 사내 대 사내로 목숨 걸고 덤벼 보는 게 어떻겠수?”
“골빈 놈 같으니. 네놈은 모든 게 그저 싸움질이면 장땡이지?”
“그래! 그간 노친네라고 봐줬더니 끝 갈 데 없이 시비를 걸어대는군. 네놈도 귀령이 맛 좀 보아야 정신을 차릴 테지?”
두 사람의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나머지 십존들이 쾌재를 불렀다.
그들이야 동료가 됐든 뭐가 됐든 싸움판만 구경할 수 있으면 그저 좋았다.
살짝 물러나 원을 만든 십존들이 제각기 떠들기 시작했다.
“소살도! 냄새나는 독쟁이 노인네한테 쓴맛 좀 보여 주라고!”
“독마! 그 백정 놈 몸뚱이를 시퍼렇게 만들어 버리게!”
분위기가 달아오르자 귀도신마는 서늘하게 웃었다. 웃으며 죽인다는 별호대로 살기를 풀풀 풍기는 냉소가 입에 걸렸다.
“흥! 건방진 놈.”
코웃음을 친 멸살독마의 몸에서도 시커먼 독기가 흘러나왔다. 삽시간의 발아래 땅이 거멓게 썩어 들어갔다.
“내가 신호를 보내지.”
또 다른 칠절인 무령권마(霧令拳魔)가 주먹을 꾹 쥐었다. 이윽고 그의 주먹이 빠르게 허공을 격타했다.
파앙!
공기가 찢기는 소리가 신호였다. 멸살독마가 벌 떼와 같은 독기운을 뿌렸고 귀도신마의 귀령도가 허공에 번뜩였다.
그 순간.
두 패도적인 기운 사이로 한 사람의 신형이 끼어들었다.
퍼퍼퍼펑!
붉은빛 기운이 폭사되며 두 사람이 크게 밀려났다.
튕겨져 나간 귀령도에선 연기가 피어올랐고 독마의 독기운도 위세를 잃었다.
단 일수로 두 절정고수의 공격을 튕겨낸 사내.
천마 진검운이 옷자락을 툭툭 털었다.
“힘 쓸 일을 앞으로도 널렸네. 쓸데없는 일로 힘 빼지 말게.”
“으음.”
“알겠습니다.”
천마가 직접 나서니 두 사람도 이내 조용해졌다. 무엇보다도 조금 전의 신기(神技)에 얼이 빠진 까닭이었다.
‘노부의 혈산독무(血酸毒霧)가 이리도 허무하게 깨어질 줄이야.’
‘귀령이가 힘도 못 쓰고 튕겨지다니, 허!’
너무나 압도적이니 반발심도 생기지 않는다. 두 사람은 고개를 조아리고서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갔다.
천마는 십존을 한 차례 훑어보았다.
두 사람을 제외한 십존들 역시 하나같이 경탄한 표정들이었다. 물론 단순히 감탄하기만 한 게 아니라 호승심 역시 지니고 있었다.
받들어 모시긴 하되 언제든 도전하리라는 전제가 깔린 감정.
그들의 호승심이 천마는 좋았다.
“본좌는 자네들이 좋네. 본좌에게 복종을 하면서도 끝없이 본좌를 넘어서려고 들거든. 우선은 그 끈기와 열정이 좋다네.”
잠시 뜸을 들인 천마가 씩 웃었다.
“그리고 언제나 승리는 본좌의 것이기에 더욱 좋지.”
십존들 역시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어디 말씀대로인지 대련 한판 하시겠습니까?”
“그것도 좋지. 하지만 조금 뒤로 미루세, 혈륜창마(血輪槍魔).”
천마는 귀도신마를 돌아봤다.
“보고에 누락된 부분이 있더구먼.”
“그렇습니다.”
“의도적으로 그리한 것인가?”
“그 친구와 약조를 했었습니다.”
“나의 무공을 익힌 용검대원이란 말이지? 얘기는 대강 들었네.”
빙긋 웃은 천마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어떠한가? 그자와 본좌의 무공을 비교해 본다면.”
귀도신마보다도 멸살독마가 대경실색했다.
“그 무슨 말씀을! 일개 정파인 따위가 어찌 교주님께 대적할 수가 있겠사옵니까?”
“본좌는 그대에게 묻지 않았네.”
멸살독마는 꿀 먹은 양 입을 다물었다. 천마는 다시 부드러운 얼굴로 귀도신마를 보았다.
“어떻던가?”
잠시 생각하던 귀도신마가 운을 뗐다.
“솔직히 교주님의 무위를 모두 가늠하기가 어렵습니다만, 조금 전의 신위에 통해 추측해 본다면…….”
“본다면, 어떠한가?”
“교주님께서 우위에 서실 것으로 예상됩니다.”
십존들이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들을 지었다. 특히나 멸살독마는 이 정도 질문에 뭐 그리 뜸을 들이냐는 듯 힐난하는 시선을 보냈다.
반면 천마만은 그 의미를 달리 받아들였다.
“돌려 말하자면, 압도적이진 않으리란 말이로군.”
“……그렇습니다.”
귀도신마의 말에 십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찌 감히 저런 말을 할 수 있느냐는 표정들.
다만 천마만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재미있군. 이 천마와 어느 정도 검을 섞을 수 있을 강자란 말인가?”
“그 친구 역시 상당히 실력을 숨기고 있었기에…….”
“그렇군. 자네의 말을 듣고 나니 더더욱 그자를 만나고 싶어졌어.”
“교주! 저런 무지렁이 같은 놈의 말을 귀담아 들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되었네, 독마. 귀도신마는 괴팍하긴 해도 거짓말을 하는 사내는 아닐세. 자네들이 그렇듯이 말이야.”
손을 내저은 천마가 당연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리고 본좌가 누구에게도 패하지 않을 것임은 자네들이 그 누구보다 잘 알 것 아닌가.”
쿠구구구.
주변의 땅이 가볍게 진동했다. 천마가 발한 기운에 의해 경미하지만 지진이 일어난 것이다.
그 순간 천마의 모습은 패도 그 자체였다.
평소 그에게 충성하던 이들이나 내심으로는 그를 싫어하던 이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십존들은 패배감에 가까운 경이를 느끼며 천마를 보았다.
엄청난 위압감으로 자신을 증명한 천마가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말이지, 이참에 천무맹을 취할까 생각하네만.”
때가 되었다.
십존들은 그 사실을 실감하며 가볍게 전율했다.
“십 년이나 약속을 지켜 줬으니 혈선들에게도 면목이 서겠지. 그 덕에 우리는 힘을 비축할 수 있었고, 마교는 고금 최강의 전력을 지니게 되었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이제 십 년 전에 취하지 못했던 것을 취해야겠지?”
피식 웃은 천마가 말했다.
“뭐, 우선은 가볍게 간만 보도록 하자고.”
멸살독마 휘하 일천 병력이 귀암산을 나선 것은 칠주야 뒤의 일이었다.
* * *
북풍장, 모용세가는 빠르게 힘을 회복하고 있었다.
모용린 본인의 수완도 뛰어났지만, 병상에서 회복된 모용훈의 존재가 큰 힘이 되었다.
그는 모용린의 미흡한 점인 사교성 면에서 큰 활약을 할 수 있었고, 한 달을 조금 지나는 시점에서 모용세가와 적대적이던 세력 중 절반의 마음을 돌리는 데에 성공할 수 있었다.
많은 이들이 그 성과에 놀랐고, 북풍장의 새로운 약진에 다시금 놀랐다.
모용세가는 위기를 기회로 뒤집은 것이다.
“만지신통의 공능이 이렇게도 쓰이는군.”
피식 웃은 정천이 술병을 기울였다. 그 앞에 앉은 모용훈도 미소를 지었다.
“운이 조금 따랐습니다. 마침 그들이 내심 원하던 것들을 들어줄 능력이 되더군요.”
“그랬겠지. 남들이 보기엔 그저 요술로만 보이겠지만 말이야.”
“예전엔 그렇게나 저주했던 공능이었는데, 지금은 세가를 위해 쓰일 수 있으니 그저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군. 확실히 행복해 보이는데.”
모용훈이 감사의 미소를 지을 때, 안주상을 든 모용린이 방으로 들어섰다.
그녀를 본 정천이 피식 웃었다.
“살다 보니 이런 일도 다 있네. 천하의 모용가 아가씨께서 상을 내오시다니.”
“당신은 먹지 마요.”
“오라비만 너무 편애하지 마시지. 어차피 이렇게 많은 건 혼자서 못 먹는다고.”
“차라리 내가 먹고 말겠어요.”
“너무 먹었다간 살 찔 텐데.”
“시끄러워요!”
신경질적으로 대꾸한 모용린이 턱 상을 놓고는 나가 버렸다.
그녀의 인기척이 멀어지자 정천이 넌지시 물었다.
“암투 같은 건 이제 없나? 꽤나 야심이 강한 아가씨일 텐데.”
“린아가 원래부터 그런 아이는 아니었습니다. 저 아이는 그저 제 빈자리를 채우려고 노력해 왔을 뿐이지요.”
“하지만 마음이 아주 없다고는 못할걸.”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가주직을 잇고 싶지 않습니다.”
“차라리 여동생에게 줘 버리는 게 좋겠다는 건가?”
모용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천은 그저 시큰둥한 표정이었지만.
“아마 힘들걸. 모름지기 수뇌란 본인이 원한다고 거절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모용훈이 씁쓸히 대꾸했다.
모용세가는 거대한 집단이다. 그렇기에 파벌도 많으며 보이지 않는 알력 다툼 역시 상당하다.
황룡성 내의 북풍장이야 상당한 피를 본 직후이기에 단결력이 강한 편이지만, 본가에선 지금도 후계자 다툼이 치열하다.
정작 후계자들은 모조리 황룡성에 있는데, 본가에선 그들을 따르는 자들이 반목하고 있는 것이다.
“지긋지긋한 일입니다.”
모용훈이 몸서리를 쳤다.
그는 만지신통의 공능이 한창 폭주할 적에 심복들의 의중을 훑어본 적이 있었다.
그 이후 심복들에 대한 적개감이 생기게 되었고, 한때는 그들 모두를 쳐낼까 하는 생각까지 했었다.
“만약 열 명의 심복이 있다면 그중 진심으로 충성하는 이들은 두 명이 채 되지 않습니다. 하나같이 명예욕이나 물욕, 혹은 권력욕에 눈이 멀어서 저를 따르는 경우더군요.”
“그렇겠지. 세상엔 성인군자만 있는 게 아니니까.”
“저는 그 사실이 너무 싫었습니다. 그 생각은 지금도 그다지 변하지 않았고요.”
“하지만 네가 세가에 남아 있는 한은 피할 수 없는 일일걸.”
“그것도 그렇겠지요…….”
우울한 표정을 짓던 모용훈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후우, 이런 얘기나 하려고 형님을 부른 게 아닌데. 마시지요. 그리고 다른 얘기나 좀 하죠.”
“다른 얘기라…….”
매끈매끈한 턱을 쓰다듬던 정천이 물었다.
“너희 가문에서도 황룡회에 참가할 거냐?”
“예? 아뇨. 사실 본가의 아버님께서는 나가라고 성화이시긴 합니다만, 저는 나가 봐야 우승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해서…….”
“그래도 네 실력이라면 상위권엔 들 수 있을 텐데. 어쨌든 대회에서 높은 성적을 거둔다면 차기 맹주의 눈에도 들 수 있을 테고.”
기실 황룡회의 성격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검왕처럼 우승을 넘보는 이들, 다른 하나는 그러한 이들에게 잘 보여 한자리 꿰차려는 이들이었다.
“형님도 참가하실 겁니까?”
“아마도 그래야 할 것 같더군. 반강제적으로 이름이 등록되어서 말이야.”
“반강제적으로요?”
“검왕 그 노인네가 나랑 붙어 보고 싶은 눈치거든.”
모용훈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대, 대단한 영광이로군요. 그런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안 괜찮을 건 또 뭐야. 그리고 그게 무슨 대단한 영광이라는 거야?”
“대단하고 말고요! 다른 이도 아닌 검왕께서 직접 붙어 보고 싶다고 말씀하신 거잖습니까.”
“흠.”
정천은 팔짱을 끼고서 생각에 잠겼다. 얼굴엔 여전히 귀찮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구경하러 오는 사람이 많겠지?”
“그렇겠지요. 그야말로 역사가 탄생하는 순간일 테니까요.”
“그게 좋은 쪽일지 나쁜 쪽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지.”
“예?”
“아니, 아무것도 아냐. 그것보다 돈은?”
“물론 준비해 뒀습니다.”
모용훈이 방 한쪽에 있던 상자를 끌어왔다. 그 크기만도 어지간한 궤짝 이상인 상자를 열어 보니 금빛 광채가 흘러나왔다.
금전 천 냥. 정천의 입가가 절로 미소를 그렸다.
“정확하지?”
“물론입니다. 몇 번이고 사람을 시켜 세어 보았어요.”
“알겠어. 어쨌든 이건 갈취하는 게 아니라 정당한 대가니까 아까워하지 말라고.”
“그런 생각 전혀 없습니다. 형님은 제 생명의 은인이신걸요.”
“역시 그렇지.”
싱글싱글 웃는 정천과 달리 모용훈은 표정이 미묘했다. 물론 돈이 아까워서 그러는 건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 형님,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황룡회 말입니다. 보아하니 검왕뿐만 아니라 내로라하는 정파 고수들이 모조리 참가하는 모양이던데요.”
“정사백팔고수인가 하는 자들?”
“그들이야 천무맹 측에서 임의로 정한 것이고요. 실질적인 무위로는 그들에 필적하는, 혹은 그들을 능가하는 이들도 참가할 거랍니다.”
“강한 자들이 꽤 있나 보지?”
“당장 검왕과 겨룰 수 있다는 인물만 해도 몇 명 됩니다. 섬서일권(陝西一拳) 현상성이라든가, 풍신창왕(風神槍王) 윤하월이라든가…….”
“재미있겠군. 맞붙는 쪽이든 구경하는 쪽이든.”
“위험하기도 하겠지요. 단순한 친선 비무와는 그 궤를 달리할 테니까요.”
“죽음을 넘나드는 싸움이야 예전에도 몇 번이고 치렀었어.”
모용훈은 입을 다물었다. 이따금 잊고는 하지만 눈앞의 사내는 정파 최강 타격대의 조장이었었다.
“제가 너무 주제넘은 얘기를 했군요.”
“알면 됐어.”
짤막히 대꾸한 정천이 남은 잔을 비우고는 일어섰다. 신줏단지 모시듯 상자를 옆구리에 끼운 채였다.
“다음부터 네 동생더러 고기 좀 잘 구우라고 해. 너무 기름져서 위장까지 미끌거리게 될 것 같군.”
문 밖에서 쿵 하고 벽을 치는 소리가 났다. 정천은 피식 웃고서 몸을 돌렸다.
“다음에 보자고.”
“아, 예…….”
정천이 방을 떠났다. 홀로 남은 모용훈은 잠시 후 밖으로 슬쩍 나가 보았다.
벽 한쪽에 주먹 자국이 깊이 파여 있었다. 그게 누구 짓인지는 안 봐도 뻔했다.
“린아가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 * *
“잠깐 기다려요!”
정천이 고개를 돌리니 모용린이 뛰어오고 있었다. 얼굴 잔뜩 화가 난 표정이었다.
정천은 사뭇 진지해진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이 돈은 내 거야. 달라고 해도 안 돌려줄 거야.”
“……누가 그깟 돈 달라고 쫓아온 건 줄 알아요?”
“그럼 왜 쫓아오는데? 그건 그렇고 고기 구우는 법 좀 배워야겠더라.”
“…….”
뺨 한 대 후려갈기고 싶다는 생각이 모용린의 머릿속에서 끓어올랐다. 그나마 남은 이성이 참으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모용린은 애써 화를 삭이고는 말했다.
“황룡회에 참가한다는 게 사실이에요?”
“그러고 보니 그 엿듣는 버릇도 고쳐야 할 것 같군.”
“묻는 말에나 대답해요.”
“이미 들어 놓고는 뭘 또 묻는 거야? 네가 그렇게 들었다면 그런 거겠지.”
퉁명스러운 태도에 모용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걱정스런 마음에 물어본 것이었는데.
야속하다는 생각에 그녀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항상 그런 식이군요. 어떻게든 사람 속을 뒤집어놓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 같아.”
“버릇이 되어 놔서.”
“참으로 유익한 버릇만 들이셨군요.”
정천은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상자를 내밀었다.
“이거나 가지고 돌아가.”
“……왜요?”
“나보다는 북풍장에 더 필요할 테니까. 안 그래도 재건 비용에 적대 세력과의 교섭에, 있는 돈 없는 돈 박박 긁어야 할 처지일 테니.”
모용린은 얼떨떨하게 상자를 받아들었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정천을 바라보면서.
“말도 안 돼…….”
“뭐가 말도 안 된다는 거야? 나도 그렇게까지 날강도는 아니라고.”
“말도 안 돼.”
“……말을 말자.”
정천은 됐다는 듯 몸을 돌렸다. 모용린이 아차 싶어서 그를 불러 세웠다.
“잠깐만요!”
“또 뭐야?”
정천이 돌아보자 모용린은 당황했다.
그러고 보니 일단 쫓아오기는 했는데 무얼 말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한참 머뭇거리던 그녀가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화륜문에…… 같이 가도 돼요?”
“뭐?”
정천은 이상하다는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언제는 허락받고 왔었나? 오고 싶으면 오면 되는 거지, 왜 그런 걸 물어 보지?”
“그게…….”
할 말이 없었던 모용린이 정천을 밀쳤다.
“됐으니까 걷기나 해요.”
“이상한 녀석이네.”
작게 투덜거리면서 걸음을 떼는 정천이었다.
모용린은 약간 상기된 얼굴로 그런 정천의 옆에서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북풍장에서 화륜문까지의 길을 말없이 걸었다.
본디 할 말이 많은 사이도 아니었거니와, 모용린부터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황룡회에서 열심히 하라고 말해야 할까?’
그렇게 말해 봐야 내가 알아서 잘한다는 식의 대꾸나 들을 것이다.
‘요즘 뭐하고 지내냐고 물어야 할까?’
적당히 놀고먹는다는 식의 성의 없는 대답이나 돌아올 것이다.
‘그럼 뭐라고 운을 떼어야 하지?’
할 말이 없다. 무얼 말하든 장난기 가득한 대꾸나 듣고 말 것이다.
모용린은 절로 우울해졌다. 본인이 왜 그러는지도 잘 모르는 채로.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은 화륜문 장원에 당도해 있었다.
정천이 별 생각 없이 안으로 들어서니 마침 화연란이 나오고 있었다.
“어머. 오셨어요, 오라버니?”
“오냐.”
대강 고개를 끄덕이는 정천. 화연란은 뒤이어 들어오는 모용린에게도 인사를 하려다 그녀가 들고 있는 상자를 보았다.
나가기 전 금전 천 냥을 받아오겠다고 큰소리치던 정천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이내 정색하고는 정천을 쳐다봤다.
“오라버니!”
“응?”
“저 무거운 걸 모용 소저더러 들고 오라고 한 거예요? 너무하시네요, 정말!”
“응?”
정천은 그제야 모용린의 손에 들린 상자를 돌아봤다.
“……아냐. 내가 들고 오라고 한 게 아니라고.”
“아니라고요?”
화연란이 상자를 덜컥 열어 보니 금전들이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이래도요?”
“음. 그러니까 그것이…….”
정천은 모용린에게 눈치를 보냈다. 설명 좀 해 보라고. 그 시선을 받은 모용린이 입을 뗐다.
“정천 대협은 이런 걸 즐기시는 모양이에요.”
“……!”
정천이 한 방 먹은 표정으로 모용린을 보았다. 모용린은 말을 꺼내고 나서야 아차 싶었지만, 그것보다도 정천을 골탕 먹인다는 쾌감이 더 컸다.
“오라버니?”
화연란의 추궁하는 시선에 정천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 젠장. 이게 아닌데.”
부엌에서 고개만 슬쩍 내밀고 있던 소윤이 한마디 꺼냈다.
“아저씨, 그렇게 살지 마세요.”
“……뭐가 어째?”
혀를 쏙 내민 소윤이 부엌 안으로 숨었다. 정천은 백미련과 맞붙을 때보다 더한 피로를 느끼며 이마를 꾹꾹 눌렀다.
“이곳에 내 편은 한 명도 없군.”
“그래도 그렇게 슬픈 표정은 아니로군.”
“뭐, 이 정도로 좌절할 만큼 약한 놈은 아니니…….”
정천의 말끝이 흐려졌다. 결코 익숙하다고는 할 수 없는 목소리였던 까닭이다.
어느새 백미련이 다가와서 싱긋 웃고 있었다.
“……깨어난 건가?”
“응. 모두 그대의 간호 덕분이지.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잘도 지껄이는군. 혼열고인지 뭔지로 이 몸을 협박했던 주제에.”
“그게 거짓말이었다는 건 후에 알았을 텐데?”
정천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혼열고니 하는 것은 없었다. 은밀히 화연란을 비롯한 화륜문 식구들을 검사해 봤지만 어떠한 이물질도 찾아낼 수 없었다.
그 후에도 정천은 그녀의 목숨을 끊지 못했다. 별다른 이유보다도 화연란이 지극정성으로 간호했기 때문이 컸지만.
어찌 됐든 그녀를 살려 둔 것은 사실이란 의미.
“이 은혜는 꼭 갚도록 하겠어.”
“네 말을 믿으라는 건가? 놈들의 개인 너를?”
정천의 날 선 대꾸에 백미련은 그저 쓴웃음만 지었다. 어딘지 모르게 처량한 느낌에 정천도 더 화를 낼 생각이 사라졌다.
옆에 있던 모용린은 당황한 표정이었다.
“누구죠, 이분은?”
“불청객. 너와 같은.”
짤막히 대꾸한 정천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냉랭한 대꾸였다.
모용린은 화도 내지 못한 채 남겨져 버렸다.
어색한 것은 화연란과 백미련도 마찬가지.
그녀들이 멍하게 있을 때 소윤이 부엌에서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찻상이라도 가져다 드려요?”
“……부탁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