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十章 자연검(自然劍) (58/146)

第十章 자연검(自然劍)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마수들의 소굴. 끝없이 쏟아져 나와 며칠 사이에 성 하나를 파멸로 몰아넣은 괴인들.

그러나 그 원인에까지 의심을 가져 본 적은 없었다. 그저 황당무계한 일이 벌어졌다고만 생각했을 따름.

그와 동료들에게 명령이 내려졌고, 그는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것들을 잃고, 수많은 것들을 짊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백미련은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 모든 일이 인위적으로 벌어진 일이었노라고.

“진마동이…… 자연히 만들어진 곳이 아니라고?”

“그렇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미 존재하던 곳을 중원으로 불러왔다고 해야겠지만…….”

백미련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정천의 태도가 심상찮다는 것을 깨달은 까닭이다.

‘실수했구나.’

그녀는 뒤늦게 실감하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설마 이렇게까지 격한 반응을 보일 줄이야.

정천의 몸은 절반쯤 어둠에 휘감겨져 있었다. 어느새 흘러나온 수라강기가 그를 감싼 것이었다.

“내가 용검대의 생환자라는 것은 몰랐던 건가?”

정천의 목소리에서 살기가 뚝뚝 묻어났다. 백미련은 자신이 크나큰 실수를 했음을 통감했다.

‘마교 쪽과 관련이 있는 인물일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녀는 강하다. 또한 칠대에 걸친 무공과 그 지식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세상사엔 그만큼 무지하다.

그렇기에 정천의 무공이 마교와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이해는 했지만,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이 사실을 혈선에게 보고했더라면 얘기가 달랐으리라. 그러나 그녀는 굳이 중요하진 않을 거라 생각하여 그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 결과가 이것.

혈선들은 조금은 안이하게 포섭 명령을 내렸고, 그녀 역시 안이하게 이를 받아들였다.

츠츠츠츠.

정천에게서 흘러나온 기운은 이제 주변의 땅까지 부식시키고 있었다. 그야말로 광륭혈독무를 능가하는 어마어마한 독기였다.

“진정……하라고 말해도 소용없을 것 같군.”

“넌 큰 실수를 한 거다, 백미련.”

“말하지 않아도 느끼고 있다. 아무래도 그냥 물러나기는 힘들 것 같구나.”

“가게 내버려 둘 것 같나?”

정천의 손아귀에 강룡검이 들렸다. 그녀를 이 자리에서 죽이겠다고 마음을 굳힌 것이다.

“널 이대로 보냈다간 화륜문이 위험해질 테지. 굳이 너를 살려 두어야 할 이유도 없고. 어떤 말도 필요 없다. 넌 여기서 죽는다.”

“말은 기세등등하군. 하지만…….”

백미련의 머리칼에도 강기가 실렸다. 구절검강. 그녀가 자랑하는 아홉 갈래의 흑적색 검강이었다.

“잊지는 않았겠지? 지난번에도 그대와 나는 결판을 내지 못했었다는 것을.”

“너야말로 잊은 모양이군.”

파지지직!

강룡검의 크기가 한층 거대해졌다. 그 길이는 못해도 십 자를 넘어서는 듯했다. 지난번과는 그 규모와 밀도부터가 확연히 다른 모습.

“그땐 전력을 다하지 않은 거라고 말이야.”

까아앙!

말과 동시에 백미련의 눈앞에서 불꽃이 튀었다. 강룡검이 그녀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던 것이다.

겨우 다섯 갈래의 검으로 막아내긴 했으나, 그 반동부터가 지난번과는 확연히 달랐다.

‘허풍이 아닐지도.’

그녀의 표정이 새삼 긴장되었다.

정천은 그녀에게 반격의 틈을 주지 않고서 몰아붙였다.

무기의 숫자에서 우위에 있는 그녀인 만큼 공격의 기회 자체를 차단해 위험을 줄이려는 것이었다.

핏! 피핏!

이내 백미련의 몸 곳곳에 혈선이 그어지기 시작했다. 검 자체를 막아내더라도 뿜어져 나온 예기(銳氣)에 생채기를 입는 것이었다.

‘호신강기마저 뚫어 버리는 예기라고?’

그녀는 기가 막힌 심정이었다.

금강불괴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녀의 호신강기는 어지간한 검기 정도는 어렵잖게 막아 냈다.

검강까지야 어찌할 수 없다지만, 칼날에서 흩뿌려지는 예기가 그 정도까지일 리가 없잖은가.

물론 그런 검이 세상에 존재하기는 했다.

‘명검칠존!’

중원의 정점. 당대 최강의 고수에게만 허락된다는 존재 자체가 전설인 일곱 자루의 검.

그 주인만 해도 천마와 검왕 등 쟁쟁한 인물들뿐이었다.

백미련 역시 어린 날의 기억 덕에 대강은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설마 그에 준하는, 아니, 그마저 넘어서는 무기를 맞대게 될 줄이야.

‘그저 강기의 덩어리일 뿐인데!’

어느새 그녀는 아홉 갈래의 검 모두를 방어에 쓰고 있었다.

일전에 기껏해야 한두 갈래만을, 절초를 쓸 때에도 다섯 갈래를 방어에 썼던 데 비하면 엄청난 차이였다.

수세에 밀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틈이 생겼다.

정천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왼팔을 찔러 넣었다.

“크윽!”

복부를 격타당한 백미련이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충격이 체내에 퍼지자마자 왈칵 각혈이 터져 나왔다.

이대로 있다가는 속절없이 당한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서 공세를 취했다.

“타올라라, 백타환(白打煥)!”

새하얀 불꽃이 그녀의 몸을 둘렀다. 순식간의 주변 십 장 내의 풀잎들이 바스러져 흩날렸다.

정천의 옷가지 역시 바스락거리더니 하얗게 타올랐다. 체액 전체를 말려 버릴 듯한 어마어마한 열기였다.

백미련은 불꽃을 몸에 두른 채 공격해 들어왔다. 구절검으로 베어 버리고 백타환으로 살라 버리는 연계 공격이었다.

‘그렇다면…….’

정천은 물러나지 않았다.

“깨부수면 그만이지!”

시퍼런 뇌전이 강룡검에 휘감겼다.

정천은 두 번 생각하지 않고서 폭뢰진세를 펼쳐 백타환에 맞섰다.

콰르릉!

격발한 뇌전이 새하얀 불꽃을 반으로 갈랐다. 십이성 내공이 모조리 실린 그 위력은 지난번과는 비교를 불허했다.

당황한 백미련이 아홉 갈래의 검 모두를 동원했으나, 정천은 그것마저 가르고 들어갔다.

콰아앙!

뇌전에 격타당한 백미련의 몸이 크게 튕겨져 나갔다. 외마디 비명조차 지를 수 없을 정도의 충격이 그녀의 몸을 훑었다.

백미련의 몸은 허공을 날아 몇 그루의 나무들을 부수고서야 떨어졌다. 독기를 머금은 매화향은 거의 흩어진 뒤였다.

정천은 엉망이 되어 널브러진 그녀를 보고도 강룡검을 회수하지 않았다.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과연 그녀의 몸이 크게 꿈틀거렸다.

“커헉! 컥!”

겨우 상체를 든 백미련이 각혈하며 움찔거렸다.

“내가…… 너무 그대를 얕잡아 봤군.”

“그 대가는 죽음이고.”

정천은 어서 끝을 낼 생각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강룡수라마공의 검초는 하나같이 일격필살.

전력을 담으면 어느 무공과 맞붙더라도 승산을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만큼 내공 소모도 엄청났다. 지금의 정천조차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기에 한 번 쓰기로 마음먹었을 때엔 일말의 망설임도 두지 않았다.

아마 조금 전의 폭뢰진세라면 장유추나 귀도신마라 해도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을 터였다.

또한 그만큼 백미련의 무공 수위가 대단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살려 둘 수는 없다.’

이미 그녀에 준하는 강자가 백여 명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할 수 있을 때 한 명분의 전력이라도 줄여 두는 편이 좋았다.

그녀를 살려 두면 후에 수백, 수천 명이 죽음을 맞이하게 될 테니까.

정천이 백미련의 목에 칼끝을 가져갔을 때였다.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백미련의 말에 정천이 잠시 움찔했다. 불안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무슨 소리냐.”

“본후가…… 아무 대책도 없이 그대와 맞섰으리라 생각해?”

“얄팍한 수를 쓰는군. 그런다고 내가 눈썹 하나 꿈쩍할 것 같나?”

“그대의 식구들을 중독시켜 놓았어. 본후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해독할 수 없는 독이야.”

으득 이를 악문 정천이 백미련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래 놓고서 날 포섭하겠다고 떠들어댔나?”

“만일의 경우를 대비했을 뿐이야. 그대가 본후였더라도 그랬을 것 아닌가?”

“잘도 지껄이는군.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해독시키지 못할 것 같나?”

“혼열고(魂熱蠱)는 본후의 목숨과 이어져 있어. 본후가 죽는 순간 발동하여 반 다경이 되기 전에 그들의 목숨을 앗아갈 거야.”

정천은 피가 나도록 이를 악물었다.

마음 같아선 쳐 죽이고 싶으나 그럴 수는 없는 상황. 그는 애써 분노를 가라앉혔다.

“그래서, 거래를 하고 싶다는 거냐?”

“본후를 치료해 줘. 그러면 혼열고를 해독하겠어.”

“그렇게까지 해서 살고 싶나?”

“그래.”

백미련이 미소를 지었다. 어딘지 처연해 보이기까지 하는 미소였다.

“난 아직…… 죽을 수 없어.”

그 말을 끝으로 백미련은 혼절해 버렸다.

정천은 다시금 강룡검을 들어 올렸으나 차마 그녀의 몸에 꽂아 넣지는 못했다.

“젠장.”

그녀를 둘쳐업은 정천이 화륜문으로 몸을 돌렸다.

* * *

한 달여의 시간이 급류처럼 흘렀다.

화륜문으로 옮겨진 백미련은 그동안 죽은 듯이 잠들어만 있었다.

치료를 게을리한 것은 아니었다. 정천은 말렸지만 화연란이 직접 의원들을 찾아다니며 그녀의 치료를 부탁했다.

천고의 영약이라고까지는 못하겠지만 상당한 고가의 약재들이 쓰였다.

그 때문에 가장 불만을 쏟은 사람은 우습게도 외부인인 장유추였다.

“제정신이 아니로군. 너희를 죽이려 한데다 네 몸을 중독시키기까지 한 년을 어째서 치료하는 거냐?”

물론 죽여선 안 된다. 그녀가 죽는 순간 그들의 몸에 잠재되어 있는 혼열고가 폭주할 테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치료를 할 것까지는 없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목숨만 건져 놓아도 되는 일이 아닌가 말이다.

그러한 장유추의 불만에 화연란은 한마디만으로 대꾸할 따름이었다.

“그녀는 우릴 죽일 생각이 없었어요.”

“……고작 그 이유 때문에?”

장유추는 그렇게 반문했지만 더 이상 따지고 들지는 않았다.

납득했다기보다는 그냥 질려 버렸을 뿐이었지만.

더군다나 당사자인 정천도 침묵하고 있으니 맥이 풀려 버렸다.

“되었다. 관두지. 노부는 노부 볼일만 보면 그만이니.”

장유추의 뇌혈천섬도법은 한 달 사이에 엄청난 개량을 거친 뒤였다. 그가 정천에게 자신했던 대로 재정비를 마친 것이다.

정천의 도움이 크긴 했지만, 그보다도 장유추 본인의 끈기가 빛을 발한 덕이었다.

백미련에게 한 차례 압도당한 그인 만큼 복수의 칼날을 매일같이 갈았다. 그러한 의지는 도법의 재정비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런 만큼 내심으로는 백미련이 어서 깨어나길 바라고 있는 장유추였다.

정천은 한 달 내내 금역을 들락거렸다.

들락거린다고는 해도 내부 깊숙이까지 들어가진 않았다. 아무리 정천이래도 혈선의 본거지를 아무 준비 없이 치고 들어갈 순 없었다.

대신 그곳의 지형이나 안개의 밀도 등을 머릿속에 담았다.

훗날 쓰이게 될 때가 필시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선 안개 자체를 흩어 버리고 싶었으나, 강렬한 열기로 증발시키거나 바람으로 밀어 훑는다고 해도 금세 회복되어 버렸다.

이는 곧 자연적인 것이 아닌, 인위적으로 생성된 안개라는 의미였다.

‘아마도 이 역시 혈선들의 수작이겠지.’

백미련은 혈선들이 진마동을 중원에 ‘불러왔다’고 말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는 몰랐다. 그러나 그런 일조차 할 수 있는 자들이라면 이런 안개를 만드는 것도 어렵진 않을 터였다.

‘그나저나 놈들의 움직임이 신경 쓰이는데.’

혈선들은 한 달 내내 잠잠했다. 그 고요가 정천으로서는 도리어 더욱 신경 쓰였다.

그사이 황룡성 내에선 기묘한 열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그 모두가 황룡회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간 남궁운의 천무맹은 무력한 모습만을 잇달아 보여야 했다.

장로들이 행방불명된 걸로 모자라 맹주 본인이 피습을 당해 버렸으니 말이다.

원인은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은 맹주가 당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큰 실망감을 느꼈다.

“역시 정의나 협을 부르짖으려면 그에 앞서 힘이 필요하다는 거지.”

“우리에게도 천마와 같은 강한 지도자가 필요하지 않을까?”

“현 맹주는 뛰어난 사람이지만 과연 강맹하다고 할 수 있을지는…….”

남궁운은 물론 강대한 실력의 고수였다. 그러나 절대적이라고 할 정도의 존재는 아니었다.

반면 그 대척점에 위치한 검왕은 고금제일마저 넘볼 수 있는 검의 일존(一尊).

세상에 수많은 고수들이 있으나 검왕의 별호를 쓰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 누구도 유극태의 위에 선다고 자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세상에 천마가 하나이듯.

사람들은 단 한 명의 절대존을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인이 검왕이라는 거지.”

정천으로선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현 맹주 남궁운은 아직까지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상당한 상처를 입었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이상할 정도였지만, 독에 당했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이미 한 달 이상의 부재였다. 그 이상이 되더라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런 만큼 황룡회 역시 시간이 갈수록 큰 지지를 얻고 있었다. 더군다나 군사부 측으로서도 당장의 혼란이 없어지니 좋은 일이었고.

문제라면 하나뿐이다.

검왕이 과연 누구의 편이냐는 것.

그리고 그것을 알아낼 방법이라면 하나뿐이었다.

* * *

유가장은 본디 산동성 제남(齊南)에 뿌리를 둔 문파였다.

위치가 위치인 만큼 필연적으로 황보세가 및 제갈세가와 반목을 거듭해 왔는데, 애초부터 규모의 차이가 있는 만큼 상당한 견제를 받아야만 했다.

그러한 상관관계를 일거에 뒤엎은 인물이 바로 유극태.

이십 년 전의 그는 산동의 신성(新星)이자 신성(辰星)으로 군림했다. 앞선 두 가문의 영향력이 십 년이 채 안 되는 동안 절반 이하로 줄어들 정도였다.

결국 제갈세가는 화평을 택했고, 황보세가는 마지막까지 맞섰다.

그 결과 황보세가는 지금까지도 천무맹 내에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한 사람의 존재가 이토록 크나큰 위력을 보인 것은 근래의 정파무림사에 있어 찾아볼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런 만큼 유가장의 무인들이 느끼는 자부심도 엄청났다.

“맹주는 비록 남궁세가의 인물이지만 진정한 천무맹의 중심은 유가장에 있다!”

그것이 그들이 항시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었다. 또한 이에 반박을 할 수 있는 이들은 남궁세가 사람들 말고는 거의 없었다.

그리고 지금.

정천은 그런 유가장을 찾아온 것이었다.

유가장의 문지기들은 와룡장의 경우와 달리 정천을 문전박대하지 않았다. 대신 사무적인 어조로 질문을 해 올 따름이었다.

“누구를 찾아오셨소?”

“검왕.”

일순 문지기들의 눈에 적의가 감돌았다. 천하의 검왕을 아무렇게나 부르는 태도에 뿔이 난 것이다.

그러나 이내 냉정을 되찾았다. 장난삼아 그들을 도발해 보려던 정천이 도리어 의아해졌다.

“이름은?”

“정천.”

문지기들의 얼굴에 역시나 하는 표정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빗겨 세웠던 창을 옆으로 치우고서 말했다.

“들어가서 본인의 이름을 밝히시오. 시녀가 검왕 어르신이 계신 곳으로 안내해 드릴 거요.”

그 말에도 정천은 걸음을 떼지 않았다.

“검왕께선 내가 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

“그거야 그분께서 아실 일이지. 왜 우리에게 묻는 것이오?”

“얼마나 나를 기다렸지?”

문지기가 불쾌하다는 얼굴을 했으나 정천은 고집스럽게 기다렸다. 결국 문지기가 항복한다는 듯 입을 뗐다.

“한 달이 다 되어 가오. 대체 댁이 뭐하는 작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군.”

그제야 빙긋 웃은 정천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문지기의 말대로 시녀 한 명이 걸어 나왔다. 정천은 그녀의 안내를 받아 안채 너머의 뜰로 안내받았다.

커다란 연못. 그 옆에 세워진 누각이 하나. 술 한 잔 기울이기에 딱인 운치 좋은 정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선 채 연못을 바라보는 중년인이 한 사람.

그에게 다가간 정천이 입을 열었다.

“저를 만나고 싶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중년인, 검왕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자네는 그걸 알고도 한 달 만에야 본좌를 찾아왔고.”

“그간 좀 바빴지요.”

“해야 할 일이 있었던가?”

“꽤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빈둥거리느라 바쁘기도 했고, 낮잠을 자는 데에 열중하느라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더군요.”

듣기에 따라 화를 낼 수도 있는 말. 그러나 검왕은 빙그레 웃을 따름이었다.

“그러는 것치고는 꽤나 분주히 돌아다니던데.”

“…….”

정천의 표정이 도리어 굳었다.

“감시를 붙여 놓았었습니까?”

“어쨌을 것 같은가?”

“만약 그랬다면 정말 대단한 실력자를 붙인 것이겠군요. 어지간해선 남한테 감시 따위 안 당하는 성미인데.”

“맞네. 그냥 대강 넘겨짚어 본 걸세.”

“…….”

그제야 정천은 자신이 한 방 먹었다는 걸 깨달았다. 도리어 지금 긴장하고 있는 쪽이 누구인지도.

“날이 선 도발로 상대의 심중을 흔들고, 거기서 생겨난 틈을 노린다. 아마도 이것이 자네의 방식일 테지. 그렇기에 일견 건방지고 광오해 보일 수 있는 행동들을 하는 것이겠고.”

검왕은 마치 오랫동안 정천을 알아 왔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말이 대체로 사실이기에 정천은 얼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지그시 정천을 바라본 검왕이 덧붙였다.

“와룡장 총관이 꽤나 많은 얘기를 해 주더군.”

“……제갈순 그 인간이 문제였군.”

“그를 너무 미워하진 말게. 본좌가 이것저것 캐물은 데에 대답한 것뿐이니까.”

유가장과 제갈세가는 긴밀한 맹우 관계. 과거의 악연이 있는 만큼, 제갈세가는 유가장에 잘 보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정천도 그 사실을 알기에 제갈순을 더 욕하진 않았다.

“검왕의 위명은 허명이 아니었군요. 솔직히 한 방 먹었다는 건 인정해야겠습니다.”

“그런가. 자네 역시 여간내기가 아닌 듯싶던데.”

“저야 그저 운빨과 잔머리로 살아갈 뿐이지요.”

“대단히 겸손한 성격이었군, 용검대 제삼조장.”

정천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검왕은 오해하지 말라는 듯 설레설레 손을 내저었다.

“내 아는 사람 중에 비영대의 인물이 있어 오랜 기록을 뒤져보았을 따름이네. 운 좋게도 자네의 기록을 찾아낼 수 있었지.”

하기야 기록 열람 자체는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정천은 어깨를 살짝 으쓱거렸다.

“그리 떠들고 다닐 만한 과거는 아닙니다.”

“천무맹 최강의 타격대 출신치고는 너무 겸손한 말이로군.”

“워낙 험한 꼴을 많이 봤으니까요.”

속뜻을 숨겨 놓은 한마디. 그것을 알아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검왕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어찌 됐든…….”

정천이 화제를 돌렸다.

“요사이 황룡성이 시끌벅적하더군요. 이 모두가 검왕 선배의 위용 덕분인 모양입니다.”

“황룡회를 그리 좋게 생각하지 않나 보군.”

“그렇진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선 상당히 유용한 발상이기도 하고요. 맹주 후보자가 몇 사람만으로 줄어드는 문제도 있긴 합니다만.”

“본좌가 스스로의 위세를 위해 황룡회를 제안했다고 생각하나 보군.”

“그렇게 생각하진 않습니다. 단지 황룡회의 흥분이 혼란으로 이어지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울 뿐이죠.”

검왕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자네도 군사와 비슷한 말을 하는군. 자네가 우려하는 혼란이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와 관련된 것일 테지?”

정천은 내심 긴장했다. 지금이야말로 검왕의 의중을 캐낼 수 있는 때였다.

“그들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공교롭게도 아는 것이 없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까지도 그런 자들이 존재하는지 의심스럽군.”

“그들은 존재합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자네나 군사쯤 되는 이가 이유 없이 헛소리를 할 리는 없으니.”

검왕은 이내 바위 같은 표정으로 선언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천무맹을 어지럽히게 두지는 않을 걸세. 본좌에게 야심이 있느냐고 물었던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면 하게. 본좌의 생각은 확고하네. 남궁운은 천무맹을 이끌 자질이 아니라는 것.”

잠시 뜸을 들인 그가 덧붙였다.

“그 자리를 본디 본좌의 것이었어야 했네.”

“…….”

“자네는 파벌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인물인 것 같더군. 그러나 본좌는 자네가 탐난다네. 자네쯤 되는 무인이라면 능히 본좌의 오른편을 맡길 수 있을 걸세.”

“저 역시 황룡회에 참가하도록 종용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랬었지. 자네의 실력을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으니까. 그 생각은 지금도 같다네.”

“그렇다면 한 가지 가능성도 염두에 두셔야지요.”

정천은 쓴웃음을 지으며 검왕을 보았다.

“본인 외에 다른 사람이 우승할 수도 있는 경우를 말입니다.”

“…….”

두 사람은 잠시 동안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결국 웃음을 터트리는 쪽은 검왕이었다.

“지금 본좌를 넘어서겠노라고 말하는 것인가?”

“그냥 그런 경우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얘기입니다. 굳이 저나 검왕 선배가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재미있겠군.”

휘이잉!

순간 두 사람의 주변으로 돌풍이 몰아쳤다. 바람은 정천과 검왕을 가두듯 두 사람의 주변만을 매섭게 회전했다.

정천의 눈빛이 가늘게 떨렸다. 눈앞의 사내는 어느 순간부터 태산과도 같은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세상의 중심이 이곳으로 옮겨진 듯한 느낌.

‘이것이 검의 극의에 달한 자…….’

호흡만으로도 삼라만상을 제어 하에 둘 수 있는 경지. 검왕은 이미 자연검(自然劍)의 영역에 들어선 모양이었다.

“태산에는 맞설 수 없네.”

검왕이 나직이 운을 뗐다. 괜한 생각 말고 숙이고 들어오라는 의미였다.

“때로는 태산도 허물어질 수 있는 법이지요.”

정천 역시 나직한 말로 화답을 했다. 모든 것은 두고 볼 일이라는 의미.

정천은 몸을 돌렸다.

매섭게 몰아치는 바람을 뚫고서 꿋꿋이 걸어 나갔다.

“…….”

검왕은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빛으로 그 뒷모습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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