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九章 백미련의 방문 (57/146)

第九章 백미련의 방문

칠주야 뒤.

제갈순은 정천의 앞에서 변명과도 같은 설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하여, 형님께서는 그대를 소개해 주겠노라고 하실 수밖에 없게 되었소.”

“…….”

“뭐라 할 말이 없소.”

제갈순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정천을 보았다. 반면 정천은 그다지 화가 나거나 당황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묘하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담미화가 돌아온 것이 바로 어제의 일이었다.

그녀는 차기 맹주의 좌에 가장 가까운 이를 골라내었다. 사실 별다른 노력이 필요한 일도 아니었다. 너무나 분명한 존재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의 이름은 유극태.

본명보다도 검왕이란 이름으로 자주 불리는 사내였다.

사십대 중반의 나이로 정파제일검의 자리에 오른 사내. 무위로는 남궁운마저 아득히 능가하는, 정사백팔고수의 서열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인물.

어떤 의미로는 진정한 천무맹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사내였다.

“그런데 왜 그런 작자가 맹주가 되지 않은 거지?”

담미화의 설명은 간단했다.

“맹주를 선출하던 때에 폐관 수련 중이었다더군요.”

그러고 보면 정천이 용검대원으로서 활약하던 시기에도 유극태의 위명은 높지 않았다. 검왕의 이름 역시 존재하지 않던 시기.

그의 비약은 근 십 년 내에 폭발적으로 이루어진 셈이었다.

담미화는 닷새를 할애했음에도 그 이상의 무언가를 알아내진 못했다.

유극태가 기거하고 있는 유가장의 방비가 철통같았던 까닭이다.

그리고 지금.

조만간 만나 보아야겠다고 생각하던 인물이 먼저 손을 내밀어 왔다.

“재미있군.”

정천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리자 제갈순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무엇이 말이오?”

“아니, 아무것도 아니오.”

대강 얼버무린 정천이 물었다.

“일시와 장소는?”

“그것이…….”

제갈순은 더더욱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얘기가 더욱 기묘하게 되었소.”

* * *

소문은 이미 황룡성 전체에 휘돌고 있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자리에선 응당 그래야 하듯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들었어?”

“들었지.”

“차기 맹주를 선출하는 자리가 열린다지?”

“각 문파와 세가의 종주들이 강력하게 요구했다더군.”

“하긴 맹주께서 아직도 인사불성이시니…….”

그러한 얘기에 뒤에는 당연하게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흘러나왔다.

“그렇다면 맹주 선출은 어떻게 한다던가?”

“힘. 무위로써 참된 자리를 가르자는 것이 검왕의 생각이오.”

제갈순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을 이었다.

“수많은 문주들이 환호로서 그에게 찬동했지.”

“……여기가 마교인지 천무맹인지 모르겠군.”

정천은 혀를 내둘렀다.

개인의 무위가 곧 권력인 마교와 천무맹은 다르다. 비실비실한 자를 맹주에 앉힐 수는 없겠으나, 단순히 강하다고만 해서 맹주가 될 수 있는 것 역시 아니다.

그렇기에 검왕의 요구는 일견 폭압에 가깝기까지 한 것이었다.

“그래서, 싸움질로 차기 맹주직을 선출하겠다는 거요?”

“일단은 맹주께서 깨어나실 때까지의 임시직이라고 못을 박아 두었소. 그게 과연 지켜질지는 의문이오만.”

“어이가 없군. 이래서야 남들의 의심만 키울 텐데?”

맹주가 쓰러지자마자 새 맹주를, 임시직이라고는 하나 뽑자고 한다. 시선에 따라 맹주 습격의 의심을 받을 수도 있었다.

“검왕을 의심하는 이들은 거의 없을 거요. 그만큼 신뢰가 탄탄한 인물이니.”

“……대체 왜? 단순히 강하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은데.”

“그것을 뭐라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군. 하지만 분명한 건 유극태에겐…….”

잠시 뜸을 들인 제갈순이 말을 이었다.

“제왕의 귀품이 있다는 거요.”

“하.”

정천은 자기도 모르게 실소를 짓고 말았다.

“보아하니 대단한 걸물인 모양이군. 지니고 있는 야심도 상당한 것 같고.”

“시기만 잘 탔어도 벌써 맹주의 자리에 있었을 인물이오. 어쨌든 그가 그대를 호출한 것은 다름 아닌 황룡회의 자리요.”

“황룡회?”

“새로운 맹주를 선출하는 대회. 이름을 그리 붙인 것도 검왕 본인이라더군.”

“호칭만 아닐 뿐이지 이미 맹주의 자리에 오른 것 같군그래.”

모든 상황이 검왕의 손아귀에서 돌아가고 있다. 정천이 아닌 그 누구라도 그렇게 느끼고 있을 터였다.

“문제라면 그자의 심중이로군.”

검왕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어떤 형태로든 혈선들이 손을 뻗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결국 둘 중 하나.

혈선의 편으로서 맹주직을 노리려는 것이거나, 그와 별개로 스스로 맹주의 좌를 취하려는 것.

어느 쪽이 되었든 답은 하나뿐이었다.

“그를 만나 봐야겠군.”

정천의 대답에 제갈순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룡회의 참가자 명단에 그대의 이름도 올리도록 하지. 소속은…….”

“용검대.”

짤막한 대꾸에 제갈순이 눈을 빛냈다.

“괜찮겠소?”

“이제는 더 숨길 것도 없겠지. 굳이 사람들에게 정체를 비친다면 내 본연의 모습으로 나서고 싶소.”

“알겠소.”

고개를 끄덕인 제갈순이 설명했다.

“아마도 황룡회는 비무의 형태로 이루어질 거요. 마지막까지 승리를 차지한 자가 맹주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지.”

“임시직이지만 말이지. 재미있군. 결국 검왕은 나와 한판 붙어 보고 싶다는 말을 하고팠나 본데.”

“무인으로서의 흥미가 동했는지도 모르는 일이오. 어쨌든 일견한 것만으로도 그대와 살수의 대결을 파악해 냈다고 하니.”

“그쯤 되는 인물에겐 어려운 일도 아니겠지.”

가볍게 숨을 뱉은 정천이 중얼거렸다.

“쉬운 싸움은 아니겠는데.”

* * *

소윤은 투덜거리고 있었다.

“바보 같은 노인네. 잘나신 무인이라면서 술심부름은 항상 나한테만 시키네.”

구시렁거리는 말과 달리 그녀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귀찮은 것과 별개로 심부름을 갈 때마다 동전 한 닢씩 꼬불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시내에 들러 백청주 세 병을 샀다. 그러고 남은 돈으로는 당과를 사서는 설렁설렁 걸어갔다.

그때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를 붙들었다.

“익숙한 향기가 나는구나.”

순간 자욱한 매화향이 소윤의 코끝을 찔렀다. 자기도 모르게 취해 버릴 정도로 매혹적인 향기였다.

“누구세요?”

고개를 돌려 보니 고혹적인 미인이 서 있었다.

화연란이나 모용린과 비교해 보아도 밀릴 것이 없을 정도의 미모. 그녀들보다 창백한 느낌이 강해서 왠지 외세의 사람 같은 느낌이었다.

“너는 어디 살고 있지?”

“화륜문에 살고 있는데요. 언니는 누구죠?”

“화륜문은 어디 있지?”

자신의 질문을 싹 무시한 채 자기 질문만 한다. 그럼에도 소윤은 그리 화가 나지 않았다.

“지금 가는 중인데, 따라오실래요?”

“그러마.”

기묘하게 대답한 여인이 소윤의 옆에서 나란히 걸었다. 소윤은 하나 더 사 두었던 당과를 여인에게 내밀어 보였다.

“드실래요?”

“되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씩 웃은 소윤이 당과를 치웠다. 여인이 흥미가 동한 듯 그녀를 돌아봤다.

“왜 그럴 줄 알았지?”

“언니 같은 사람이랑 안 어울리잖아요. 그 얼굴로 당과를 핥는 모습은 상상이 안 가요.”

“참 단순한 이유로구나.”

“그래도 맞았잖아요. 안 그래요?”

동의를 구하듯 가슴을 쓱 내밀어 보이는 소윤. 여인은 웃음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맥없는 반응에 소윤은 살짝 실망했다. 적어도 미소 정도는 보일 줄 알았거늘.

“왜 안 웃으세요?”

“안 웃는다고?”

여인이 피식 웃어 보였다. 그러나 소윤은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웃는 게 아니잖아요.”

소윤의 말에 여인은 한참을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웃는 법을 잊었다.”

“왠지 제가 아는 사람이랑 느낌이 비슷하네요.”

“비슷하다고?”

“그 인간도 진심으로 웃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고 웃든가 상대방을 위압하려고 웃든가, 언제나 둘 중 하나거든요.”

“피곤한 사람이겠군.”

“그렇죠.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여인은 실소를 지었다. 물론 진심이 담긴 미소는 결코 아니었다.

“이런 식이란 말이지?”

“……네. 어째 약간 소름이 끼치네요.”

“그럴 것이다. 보통은 아무에게나 보여주지 않으니 말이야.”

“언니, 위험한 사람이군요.”

여인, 구절검후 백미련은 구태여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

“나를 해치려 들 건가요?”

“아니.”

소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해하려 했다면 이미 했을 테지.

두 사람은 어느새 화륜문을 앞에 두고 있었다. 소윤은 약간 걱정이 됐지만, 그래 봐야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애초에 안내하지 않았다면 목이 달아났을 테고.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서니 벌컥 문이 열리며 장유추가 뛰어나왔다. 그의 표정은 평소보다도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백미련을 본 장유추가 이를 갈았다.

“범상치 않은 기운이로고. 짙은 향취로 가리려 하나 탁한 독기를 어찌하지 못하는구나.”

“그 독기를 베어 볼 텐가?”

장유추가 뭐라 대답하려 할 때 화연란이 바깥으로 나왔다. 그녀는 열랑을 이미 뽑아 든 뒤였다.

“당신은 누구시죠?”

“구절검후 백미련.”

백미련의 머리칼이 불그스름한 기운을 머금었다.

“마검의 주인을 만나러 왔다.”

“마검이라고요?”

의아한 듯 되물은 화연란이었으나 이내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저 정도 인물이 찾아올 정도라면 그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정천 오라버니를 찾아온 모양이군요.”

“정천? 그자의 이름인가? 아마도 그럴 테지.”

“당신은 대체 누구죠?”

“조금 전에 대답했을 텐데? 본후는 같은 말을 두 번 하지 않아.”

“그만.”

광천뇌도를 뽑아 든 장유추가 딱 잘라 말했다.

“아마도 네년이 백운신을 죽였을 테지?”

“그렇다.”

“역시 그렇군. 그럼 여기엔 싸우러 온 것이냐? 그렇다면 노부가 대신 어울려 주겠다.”

장유추의 왼팔을 본 백미련이 나직이 웃었다.

“그래서야 본 실력도 제대로 보일 수 없을 텐데. 죽음을 재촉하지 말거라.”

“네 목을 날릴 정도의 실력은 남아 있다. 백운신은 재수 없는 놈이었지만 이참에 원한을 갚아 주도록 하지.”

“원한? 후후후.”

소리 내어 웃은 백미련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잘도 떠드는군.”

순간 주변의 공기가 달라졌다. 어마어마한 살기가 주변을 점한 것이다.

기세등등하던 장유추마저 순간적으로 움츠러들 정도였다.

‘이런…… 괴물 같은!’

장유추는 기겁할 것 같은 심정이었다. 정천에게서 얘기를 들었을 때엔 과장이 섞였던 거라 생각했었는데, 지금 보아하니 그녀의 실력은 멀쩡할 때의 자신에 필적할 수준이었다.

지금 상태로는 당연히 당해 낼 수 없을 터.

그가 조용해지자 백미련도 기운을 어느 정도 가라앉혔다. 그녀는 장유추를 무시한 채 화연란을 돌아봤다.

“그는 어디에 있지?”

“……지금은 외출하셨어요. 조금 뒤에는 돌아오시겠죠.”

“그렇군. 이곳에서 기다리겠다.”

“어림없는 소리를!”

장유추가 나서려 했으나 화연란이 열랑을 들어 제지했다. 기가 막힌 장유추가 소리치려 할 때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화륜문의 문주입니다.”

“뭣……!”

“그리고 저분은 우리 문파의 손님이세요. 아무리 뇌혈도 선배님이라 하여도 함부로 대하게 둘 수는 없습니다.”

장유추는 기가 막혀서 화연란을 보았다.

지레 겁을 먹어 설설 기는 것인가 생각했지만 그런 기색은 없었다. 화연란은 정말 문주로서 그녀를 대접하려는 것이었다.

백미련은 그사이 마루에 걸터앉고 있었다. 화연란은 살기를 거둔 채 그녀에게 물었다.

“차를 내 오겠어요. 딱히 좋아하는 것이라도?”

“아무것이나 좋다.”

“알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소윤아, 좀 도와주겠니?”

“알았어요.”

화연란은 소윤을 데리고서 부엌으로 향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장유추 역시 광천뇌도를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훙.”

기분 나쁜 듯 코웃음을 친 그가 화륜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마루에 앉아 있던 백미련은 잠시 후 나직이 입을 떼었다.

“나가지 않는 편이 좋을걸.”

움찔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백미련이 다시 입을 열었다.

“모습을 드러내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담미화가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고양이 앞의 생쥐처럼 몸을 바르르 떨었다.

백미련은 흥미 없는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너는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눈치로구나. 사실 저 아이도 마찬가지일 테지만.”

그녀가 말한 저 아이는 화연란을 가리키는 것.

담미화는 머릿속이 모조리 읽혔다는 기분이 낭패감을 느꼈다.

“그럼에도 저 아이는 본후에게 말하지 않았다. 나름대로의 각오를 한 것일 테지. 그래서 본후는 그 각오를 존중하기로 했다.”

“…….”

“네가 그걸 깨 버린다면 본후 역시 손속을 둘 필요는 없겠지? 이곳에서 기다려라. 그가 돌아올 때까지.”

“알겠……습니다.”

힘겹게 대답한 담미화가 고개를 떨어트렸다.

* * *

정천이 돌아온 것은 반 시진 이후였다.

그는 화륜문 안에 들어서자마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진동하는 매화향을 그제야 맡은 것이다.

“너……!”

무시무시한 살기가 폭사되어 백미련에게 집중되었다. 그녀보다도 주변의 화연란과 담미화가 하얗게 질려 버렸다.

그 사실을 안 정천도 살기를 거두었다.

백미련은 아마 이것을 노리고서 두 사람을 바로 옆에 붙여 놓았으리라.

싱긋 웃은 백미련이 입을 열었다.

“의외로 인질에 약한 성격이군.”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왔나.”

“운이 좋았다. 그대의 향취가 묻은 아이를 찾아낼 수 있었거든.”

정천은 입을 다물었다.

설마 화륜문에, 그것도 이렇게나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지난번의 결착을 내려고 온 것 같지는 않군.”

한판 붙을 마음이었다면 화륜문 사람들을 살려 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정천이 냉정을 잃고 날뛰게 된다면 백미련으로선 좋은 일이었으니까.

싱긋 웃은 백미련이 말했다.

“얘기를 나누러 왔다.”

“속도 좋군. 내 분노를 사고도 성히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그대는 분노보다도 이성이 먼저인 사내니까. 소중한 이들을 앞에 두고도 함부로 검을 휘두르지는 못할 테지. 안 그런가?”

입맛이 썼지만 그녀의 말이 옳았다. 암만 정천이라 해도 화륜문을 위험에 몰아넣는 행동은 쉽사리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살행을 위해 온 것 같지도 않았고.

“얘기하려거든 얼른 해라.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지 말고.”

백미련은 다 식은 찻잔을 내려놓고는 일어났다.

“나가서 얘기하지. 둘만 있고 싶구나.”

정천은 이를 악문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이미 서산으로 해는 져서 달이 동쪽으로부터 떠오르는 시각이었다. 두 사람은 달빛 비치는 길목을 나란히 걸어갔다.

물론 연인과 같은 부드러운 분위기 따위는 없었다.

“혈선 놈들의 사주로 왔나.”

살기 어린 정천의 말에 백미련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분들은 본후에게 그대를 포섭하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포섭?”

“그대의 실력을 높이 샀다는 것이지. 본후에 필적하는 강자는 마라혈천(魔羅血天) 내에서도 극소수니까.”

“마라혈천?”

“혈선을 모시는 무리. 금역을 고향으로 삼고 자란 백여 명의 아이들.”

백미련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덧붙였다.

“나와 같은 이들이다.”

“……장로들이 가져다 바친 인질들인가.”

“그분들 스스로가 거둔 이들도 있긴 하지. 그리 많은 수는 아니지만.”

“그보다, 너와 필적하는 놈들이 백 명 정도 있다는 건가?”

정천의 물음에 백미련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두려운가?”

“…….”

정천은 침묵했다. 긍정의 의미가 상당히 담겨 있는 침묵이었다.

백미련이 자신에게 필적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전력을 다한다면 그녀를 압도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정천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실력이 낮다는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정천이 검을 맞댔던 그 누구보다도 강한 그녀였다.

그에 필적하는 이가 백여 명.

정사백팔고수를 총동원한대도 이에 맞설 수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그중 수위를 차지하는 장유추 정도나 백미련에 준하는 수준이니.

이런 이들이 금역 안에서 숨 쉬고 있다.

게다가 혈선의 세력은 이게 끝이 아닐 터였다.

“놈들의 끄나풀은 그보다도 많을 테지?”

“본후가 대답해 주었으면 좋겠나?”

은밀한 미소에 정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마치 다 내주겠다는 듯한 웃음이지만 그 안엔 날카로운 가시가 숨어 있을 것이다.

“공짜로 대답할 성격 같지는 않은데.”

“잘 보았구나.”

웃음기를 거둔 그녀가 말했다.

“그분들에게 고개를 숙인다면 그분들이 지닌 모든 것을 알려 주지. 나아가 그대에게 높은 자리를 내어 줄 수도 있다.”

“수백 년씩이나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놈들이? 높은 자리라 해 봐야 안개 안에 처박혀 있는 게 전부일 테지.”

“바보 같은 소리. 이제는 때가 되었다.”

“때라고?”

“우리들 마라혈천의 나이는 그다지 많은 편이 아니야. 기껏해야 그대와 비슷한 또래거나 그보다 어릴 테지.”

그것은 정천도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던 점이었다. 어쨌든 백미련은 백운신의 딸. 고작해야 서른 남짓의 나이일 테니까.

백미련의 말이 이어졌다.

“마라혈천은 칠대에 걸쳐 이어져 왔다. 전대의 혈천들은 후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지. 후대는 전대에게서 물려받은 힘을 갈고닦아 다시 다음 세대에게 전달해 왔다.”

“그 말뜻은……!”

정천은 경악한 눈으로 백미련을 보았다.

의문을 느끼긴 했었다. 암만 혈선들이 인외(人外)의 존재라지만 그녀 정도의 고수를 키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정체가 다름 아닌 흡령공(吸靈功)의 수법이었다니.

목숨과 함께 전달된 내력은 칠대에 걸쳐 백미련의 몸에 쌓였을 터.

그녀가 어린 나이에도 놀라운 위력을 발휘했던 이유도 여기 있었다.

“그러한 혈천의 연쇄도 우리로서 끝이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그대는 잘 알 것이야.”

“놈들이 더 이상 그림자 속에만 숨어 있지 않을 거란 뜻인가.”

“그래. 그분들은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고 말씀하셨다.”

정천은 항상 생각해 왔던 질문을 꺼냈다.

“그들의 목적은 뭐지? 무엇 때문에 배후에서 천무맹을 지배해 왔지? 그리고 왜 이제야 움직이려고 나선 거지?”

“질문이 잘못되었어. 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움직이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백미련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정천을 보았다.

“진마동이 정말 우연히 생겨난 곳이라고 생각해?”

* * *

귀암산.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칼을 나부끼며, 주름 가득한 얼굴의 사내가 전방을 응시하고 있었다.

휘리리리!

계곡을 타고 올라온 골바람이 그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강인한 맹수의 몸뚱이마저 찢어발길 정도의 강풍이었으나, 사내는 약간의 흐트러짐도 없이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정파의 하늘과는 또 다른 하늘.

마교의 하늘을 발아래에 둔 자.

천마 진검운은 동녘의 하늘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보고는 틀림이 없던가?”

나직한 한마디.

순간 천마의 등 뒤에서 호호백발의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철절삼마 중 일인, 멸살독마(滅殺毒魔)였다.

“그렇습니다. 혈풍대는 그들이 건네준 정보대로 망원곡에 출현, 본교의 병력에 역습당하여 궤멸당했습니다.”

“모든 게 혈선들의 예상대로 되었군.”

“본교의 무사들이 강했던 까닭입니다.”

“그야 당연한 것이다.”

지그시 눈을 감은 천마가 다시 물었다.

“귀도신마에게선 별다른 얘기가 없던가?”

“예, 형식적인 보고 말고는 아무 말도 없더군요.”

순간 멸살독마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감돌았다.

“일흑령의 보고와는 다르게 말이지요.”

“……그들이 핏빛 서신의 주인과 만났던 것은 분명해 보이는군.”

강룡단원만의 전달 도구인 핏빛 서신.

그것을 통해 보내졌던 한마디야말로 마교를 움직이게 만든 원인이었다.

“귀도신마는 분명 서신의 주인을 만났었습니다. 일흑령의 보고에 따르면 그는 강룡단의 무공을 사용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정파의 인물이라고도 했지요.”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군.”

천마가 나직이 단언했다.

“그는 용검대의 생존자다.”

“그렇습니다. 그 외엔 답이 있을 리가 없지요.”

강룡단의 무공은 곧 천마의 무공. 이를 목도한 정파인은 거의 대부분 몰살당했고, 그 비전은 철저히 감춰져 외부로 새어 나가지 않았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면 하나뿐.

이를 목도했음에도 목숨을 건졌으며, 나아가 그들과 한편이 되기도 했던 용검대밖에 없었다.

“아마도 그는 진마동의 생환자일 가능성이 높겠군. 그곳에서라면 무슨 일이 일어났대도 이상할 게 없으니.”

“그럴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그렇다면 구태여 그 정체를 숨기려 한 귀도신마의 의중에 의문이 가는군.”

멸살독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당장 그를 소환할까요?”

“아니, 굳이 그럴 것까진 없다. 게다가 지금은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고.”

천마의 시선이 다시 동쪽으로 향했다.

“혈선들이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속내야 본좌로서도 알 도리가 없기는 하지만…….”

그의 입가가 미소를 그렸다.

“천무맹이 크게 요동칠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하지.”

“그 말씀이 천 번 옳습니다.”

멸살독마도 클클거리며 웃었다.

십여 년 전 그들이 천무맹, 나아가 혈선과 손을 잡았던 이유는 간단했다.

호각인 두 세력이 끝도 없이 소모전만 하다가는 함께 자멸할 것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천무맹이 내민 손을 붙잡았다. 훗날, 그들을 발아래에 둘 날을 기약하면서.

그로 인해 강룡단이라는 막강한 타격대를 잃기는 했으나, 천마는 그때도 지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오로지 하나의 목표만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중원일통.”

나직이 중얼거린 천마가 선언하듯 말했다.

“이를 실현할 때가 마침내 당도했다.”

몸을 돌린 천마의 등 뒤에서 계곡풍이 솟구쳤다. 순간적으로 그의 붉은 머리칼이 사자 갈기처럼 흩날렸다.

“십존에게 전하게. 얼굴 좀 봐야겠다고.”

“알겠나이다.”

고개를 조아린 멸살독마가 모습을 감췄다. 천마는 그가 사라진 자리를 보다가 다시 동쪽을 바라봤다.

황룡성까지는 못 해도 석 달은 걸릴 거리.

그동안이라면 천무맹은 내분을 통해 피폐해지고 난 후일 것이다.

그 승자가 혈선이든 그 외의 존재든 천마로서는 그다지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찌 됐든 최후의 승자는 우리가 될 테니까.”

천마 진검운은 나직이 읊조렸다.

천마신교 수백 년의 숙원이 지금 해갈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0